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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Feb 18. 2019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인간은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카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일 때 이미 인간은 분노를 원죄처럼 가지게 되었다. 태초에 신이 인간에게 불어넣었던 영혼의 입김 속에 분노라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인간은 인간관계라는 사회성을 가지는 처음부터 분노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을 보면 인간의 정신활동은 정말 대단히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자의식을 가질 때부터 식욕과 성욕과 함께한 분노는 인간의 DNA에 천착되었으리라. 분노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분노에 대한 이야기는 생존하기 위해 부르짖는 동물적인 분노가 아니라 시기와 질투와 복수와 같은 의식 활동의 한 형태로서 형성되는 분노를 의미한다.     


알렉산드로스는 20살 때인 기원전 336년 왕위에 올라 기원전 323년 33살에 사망했다. 제위기간 13년 동안 마케도니아에서 편안하게 궁중생활을 한 것은 고작 2년 정도이고 10년 이상을 혼탁한 야전에서 생활했다. 물론 정복하는 도시에 왕의 거처를 만들어 생활했지만 마케도니아의 궁궐처럼 편안할 수는 없었다.     


왕위에 오른 후 친정체제를 구축한 알렉산드로스는 미친 듯이 싸운다. 전쟁의 신 아레스와 접신을 한 듯 정복에 대한 욕망은 제우스도 혀를 내둘렀다. 마케도니아군이 지나가는 도시는 초토화되었다. 그렇게 이집트와 바빌론과 페르시아, 즉 현재의 이란과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에까지 다다른다. 순조롭던 그의 정복 여정은 인더스강을 건너서 거센 저항을 받는다. 그가 만약 인도의 갠지스강까지 건넜다면 인류사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나 초나라와 한판 승부를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인더스강에서 멈추게 했다. 인도에서 반 죽다 살아난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으로 돌아와 10여 년의 정복 여정을 마감한다. 그가 정복한 주요 도시에 알렉산드로스라는 자신의 이름을 명명했으며, 지금도 이집트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가 남아 그의 위대함을 전해주고 있다.     

전쟁은 살육을 정당화시키는 가장 동물적인 행위이지만 문명의 발전 측면에서 볼 때는 필요 불가결한 측면도 존재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위대한 것은 문명의 접목이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글로벌 정책이었다. 헬레니즘 문명의 흔적을 정복지 곳곳에 남겼고 그 지역의 문명을 흡수하기도 한 것이다. 그런 융화정책이 소피스트적 논법에 익숙한 신하들의 벽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철학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 결과 융화정책은 군사문화적으로 볼 때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이르는 머나먼 여정의 주동력이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성정이 제대로 역사에 드러난 것은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의 재혼식장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지만, 필리포스 2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와 정식으로 이혼을 하고 곧바로 재혼을 선언했으며, 그 재혼식에 알렉산드로스도 참석한 것이다.     


영악하고 욕망이 강했던 올림피아스를 필리포스 2세는 오래전부터 탐탁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가 집안에서 강하면 남자는 집을 뛰쳐나가게 마련이다. 시간이 흘러 알렉산드로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을 떠날 때까지 부부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변방의 소국 마케도니아를 당시 선진국이었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폴리스 아테네, 오이디푸스의 도시 테베,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의 스파르타가 버티고 있던 발칸반도를 노련한 정치력으로 통합을 했고, 북으로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정복 전쟁을 하고 있던 위대한 필리포스 2세도 마누라한테는 한낱 범부에 불과했다. 역사는 밤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허접한 얘기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조강지처를 버리고 뻔뻔하게 재혼식을 하는 자리에 왕태자으로서 참석해야만 했던 알렉산드로스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그 감정선을 공감하고도 충분할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을 마마보이 수준으로 키웠으며 더구나 플라톤의 문하에서 수학한 당대의 석학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정교사로 두는데 치맛바람을 발휘하지 않았던가.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들끓고 있었다. 굳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먹이지 않아도 그의 심리 상태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자괴감에 빠져 연회장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던 차에, 재혼녀 클레오파트라의 삼촌 아저씨 아탈로스가 사단을 내고 말았다. 필리포스 2세의 충직한 신하이며 모사꾼이었던 그는 취기가 오르자 ‘업’된 기분을 통제하지 못하고 필리포스 2세와 좌중 앞으로 나가 클레오파트라가 왕의 아들을 낳아 이 왕국을 다스리기를 기원하노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취중 건배 수준의 축하 메시지였다 하더라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 가벼운 언행이었다. 이 말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이 마케도니아를 이끌 왕세자임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아탈로스는 대놓고 그런 사실을 부정하는 하는 것이 아닌가. 알렉산드로스는 참을 수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취중 덕담이라고 하기엔 평상시 권모술수에 능한 그의 언행으로 보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아탈로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 그럼 나는 사생아란 말이오!”라고 알렉산드로스는 격분하며 소리쳤다.     


찬물을 뿌린 듯 연회장은 순간 잠잠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필리포스 2세는 옆에 있던 경비병의 칼을 빼앗아 알렉산드로스를 향해 죽이겠다는 듯 달려들었다. 감히 왕이 결혼하는 이 좋은 날, 연회 분위기를 깬 알렉산드로스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몸을 피할 곳을 찾으려고 주춤하고 있을 때, 달려들던 필리포스가 그만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 모습을 본 알렉산드로스는 그냥 줄행랑을 쳤으면 되는데, 넘어진 아버지를 향해 당신의 힘이 그것밖에 안 되냐는 듯 조롱을 하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어머니인 올림피아스를 에피로스라는 도시의 왕인 외삼촌에게 위탁시켜 놓고 자신은 일리리아라는 도시로 가서 몸을 숨겼다. 지금으로 말하면 망명이었다.     


필립포스 2세는 아들이 아리스토텔레스 문하에서 졸업한 16살 무렵부터 그를 전쟁터에 보내어 실전을 몸소 터득하게 했다. 스승에게서 당대 최고의 학문과 이성적 정신세계를 습득한 알렉산드로스는 아킬레스처럼 용맹했으며, 장수로서의 냉정함과 대범함도 겸비한 뛰어난 지략가였고, 한마디로 전쟁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몸집은 크지 않았지만 그의 아우라는 그 당시부터 범접할 수 없었다. 그는 필리포스 2세도 경탄할 정도로 많은 전과를 만들어냈다.     


재혼식 사건 이후, 집안의 조정자쯤 되는 테마라토스라는 사람이 수많은 신하들의 설득에도 끔쩍하지 않던 필리포스 2세의 완고한 마음을 돌려놓았고, 그때서야 알렉산드로스는 6개월 만에 마케도니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부자간의 불편한 관계를 극복이라도 하려는 듯 전쟁터에서 분노한 헤라클레스처럼 싸웠다. 이미 20살에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의 전쟁 영웅이 되어 있었다.     


이에 필리포스 2세는 알렉산드로스를 시기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놀라운 용맹함에 마케도니아가 열광하였지만 아버지는 그런 현상을 내심 흡족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에 너무 강한 자가 있다면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아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현재도 그렇듯 2인자와 1인자의 관계는 불편하기 마련이다. 경쟁적 관계로 인식하였는지 모른다. 사실 필리포스 2세는 겉으로 보이는 아들이 용맹함 보다 내면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을 더 주시하고 있었다. 재혼식 때 보여준 아들의 행동에서 불길한 미래를 엿보았는지 모른다.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 무언가 세상을 뒤엎을 것 같은 광기,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라 했다.     


영민한 알렉산드로스 역시 아버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신화나 역사에서 볼 때 왕세자에서 낙마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인 왕의 눈에 벗어나는 순간 제아무리 유능한 2인자라 해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의 야망은 강했다. 하지만 야망을 철저히 숨겨야만 했다. 야망을 들어내는 순간 자신의 미래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왕관은 손 만 뻗치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역사가들은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의 이런 불편한 부자 관계의 결과를 필리포스 2세의 암살에 연결시키려 한다. 바로 음모론이다. 공주의 결혼식에서 자신의 경호실장인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을 당하듯 필리포스 2세도 경호실장한테 죽임을 당한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는 측근 중에 측근에 의해 급회전을 한다. 1인자도 이런 현상을 인지하고 경호에 집착하지만 틈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숙명처럼 말이다. 신의 뜻인지 모른다.     


암살엔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암살은 다분히 음모적이어서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수많은 1인자의 암살이 있지만 명쾌하게 원인이 밝혀진 사건은 거의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원인은 상투적이다. 진실은 영원히 역사의 뒤편에 숨어 나타나지 않는다. 암살자 파우사니아스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음모론만 역사에서 횡횡할 뿐이다.     


사실 알렉산드로스의 입지는 불안했다. 한 예로 이복형 아르리다이오스가 페르시아 어느 도시 유력자의 딸과 결혼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자신의 입지가 위태롭다는 것을 인식하였으며, 그로 인해 그 결혼식을 훼방 놓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아버지에게 심한 꾸지람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말 자신이 왕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처인 클레오파트라가 후사를 본 후로 그런 불안감은 더해 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직도 혈기왕성했다.      


바로 그 사건이 벌이진 후 얼마 되지 않아 필리포스 2세 암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물증은 없지만 심정적으로 납득하지 않을 수없는 정황이 존재했다.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이며 그래서 영원히 팩트를 확인할 수 없지만, 역사가들은 그 당시 주변의 역사적 사실 등을 놓고 퍼즐을 맞추고 또한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가 언급했듯, 결론은 필리포스의 암살 배후에 알렉산드로스와 올림피아스가 있다는 사실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보았다.     


기원전 336년 20살이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3세 메가스는 먼저 주변 정리를 한다. 정통성이 의심스러운 왕위 계승자들이 항상 그렇듯 그도 우선 잠재적 왕권 경쟁자들인 사촌 등 친족을 제거한 후, 아버지와 재혼했던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아들 그리고 그녀의 삼촌인 아탈로스를 죽인다. 또한 왕세자 시절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신하들도 살아남지 못했으며 자신의 왕위를 거부하는 반란군도 가차 없이 제압했다. 그렇게 친정 체제를 구축한 알렉산드로스는 발칸반도를 넘어 동쪽으로 정복 여정 길에 오른다. 모차르트가 20살에 당시 유럽의 음악계를 평정했듯 알렉산드로스도 그 당시 약관의 나이였다.     


알렉산드로스가 문화적 교양을 갖추지 못했다면 역사가들은 그를 폭군이라고 평가했을 것이다. 사실 폭군적 기질이 다분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학한 사실과 그에 따른 지적 능력, 헬레니즘 문명의 확장과 오리엔탈 문명의 융합 등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없었다면 역사가들은 그를 지금처럼 숭상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폭군과 성군의 경계선에서 그를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인물들을 볼 때 가슴이 뜨겁지 않은 사람은 없다. 윤리성과 선함 보다 변화무상하고 격렬한 감정선이 오히려 역사의 변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조울증과 편집증과 과대망상과 온갖 콤플렉스 등 정신분석학적으로도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요소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충동적 에너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다. 바로 클레이토스 사건이다. 클레이토스는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와 어린 시절을 함께 했으며, 왕세자 시절부터 수많은 전투에서 야전생활을 함께 한 각별한 친구였다. 특히 페르시아 원정 전에 일었던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마케도니아 주의자로서 배타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융화정책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알렉산드로스와 의견 출동을 격기도 했다. 또한 정복전쟁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도 알렉산드로스와 달랐다.      

페르시아에서 한창 전과를 올리고 있던 어느 날,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군신들이 참석하는 연회에는 가능하면 참석하지 않던 알렉산드로스는 그날은 내심 들뜬 기분을 숨기지 않으면 신하들과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주연에 참석한 알렉산드로스 앞에서 신하들은 그를 향해 용비어찬가를 신나게 불러댔다. 부친이신 필리포스 왕 보다 위대하시고, 제우스 신의 아들로서 손색이 없노라고 찬양을 했다. 신격화에 과대망상적 집착을 가지고 있던 알렉산드로스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순간, 정복여 정의 피로가 개운하게 가시는 것을 즐기고 있던 그에게 클레이토스가 분연히 아니오라고 외치며 일어섰다. 요즘 말로 디스 하기 시작한 것이다. 술에 취하면 주사가 좀 있던 클레이토스는 그동안 품어왔던 생각들을 연신 토해냈으며, 역시 술에 취해 있던 알렉산드로스도 그의 주장을 계속 반박했다. 분위기는 험악한 토론장으로 변했다. 취중 토론이 항상 그렇듯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분노 조절에 실패한 클레이토스는 지금까지 승리해온 전쟁에서 보상받아야 할 사람은 일개 전사들이며 그들이 일등공신일진대 왕은 왜 그들의 공적을 빼앗아 가느냐고 겁 없이 열변을 토해냈다. 이제 막장으로 가자는 것이다. 피로 맺은 의리 때문에 계속 노여움을 참으며 응대하던 악렉산드로스는 그의 이 말에 드디어 폭발한다. 광분한 왕은 경비병이 가지고 있던 창을 빼앗아 클레이토스를 향해 던졌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창에 맞아 쓰러진 클레이토스에게 다가가 확인 사살을 하려고 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군신들이 광기에 빠진 그에게 달려들어 말렸다.     


클레이토스를 살해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사흘 동안 곡기를 끊고 슬퍼했다고 한다. 수많은 전투에서 함께한 전우이자 어린 시절을 함께한 절친이며 그리고 충실한 신하로서 대장정을 함께 했던 클레이토스를 그깟 논쟁 하나로 자신의 손으로 죽였으니 그 허무함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분노조절을 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그때부터 그의 정신세계는 흐트러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하나만 더 사례를 들어보겠다. 이 사건은 그의 분열된 정신세계를 잘 보여준다. 사건의 주인공 헤파이스티온을 빼놓고 알렉산드로스를 논할 수 없다. 알렉산드로스의 개인사를 볼 때 헤파이스티온처럼 그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파이스티온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의 소꿉친구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학하기 이전부터 가장 친하게 사귀어온 친구 중에 친구였다. 알렉산드로스 보다 덩치가 크고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는 수많은 전쟁에 참전하면서 클레이토스처럼 정복 여정을 함께했다. 군신들과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왕따를 당하기도 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항상 옆에 두었다. 클레이토스와는 남자들의 의리가 관계된 반면, 그와는 그 이상을 교감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둘의 관계를 친구이자 연인관계라고 추정한다. 물론 동성애 관계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지만 역사적인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친구 이상 그러니까 연인관계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장면들이 많기 때문에 의문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 문화권의 풍속을 볼 때 남성의 동성애가 윤리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동성애 관계가 더욱 설득력이 있는지 모른다. 하여튼 알렉산드로스가 헤파이스티온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정복 원정에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포근한 연인처럼 말이다.


정복 전쟁의 막바지, 인도의 갠지스강을 목전에 두고 후퇴하면서 알렉산드로스는 처음으로 지독한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도로스와 아리아노스 등이 지은 역사서를 보면 그 당시 갠지스강을 건너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장면이 자세하게 나오는데,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동쪽으로의 행군이 멈추자 그에게 찾아온 것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좌절감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가 죽기 두 해 전 헤파이스티온이 페르시아에 있는 엑바타나라는 곳에서 병으로 사망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인도 원정 실패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져 있을 무렵이었는데, 헤파이스티온 마저 세상을 뜨니 그의 정신상태는 공황장애 수준으로 격동을 쳤다.     


헤파이스티온이 세상을 하직하자 광기에 빠진 알렉산드로스는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의 주치의를 죽였다. 그리고 사흘 동안 실의에 빠져 식음을 전폐하고 어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이었다고 후세는 말한다.     


정신을 좀 차리자 알렉산드로스는 1만 달란트(현재 화폐가치로 수조 원이라 한다)라는 거액을 풀어 바빌론에서 헤파이스티온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당시 바빌론은 세계 최고의 도시였으며, 그만한 돈이면 진시황을 능가하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장례식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총독인 클레오메네스에게 헤파이스티온의 무덤과 신전을 건립하라고 명령하였으며, 그 명령이 완료되면 추후 총독에게 어떠한 과오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노라고 했다. 그러니까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봐주겠다는 일종의 계약이었다. 그는 편집증적으로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에 매달렸다. 정신세계의 회로가 뒤엉켜버린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알렉산드로스의 행위는 광기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인생의 목적이 사라지고 그러므로 해서 삶의 활력소를 잃어버린 자의 좌절감, 그 열패감에 대한 격렬한 분노, 그런 현상이 조울 증세로 나타난 것이리라. 결국 끊임없는 전쟁으로 나타났던 극대화된 욕망, 사우론 같은 불멸의 욕망은 거품처럼 소멸되고 그렇게 그를 파멸로 이르게 했다.  


스토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그는 금욕주의자라고 자부할 만큼 모든 생활에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았지만 술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그의 음주는 헤파이스티온의 죽음 이후 더 심해진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는지 모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그는 디오니소스의 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으며 그렇게 그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가 소진하는데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편안한 궁정생활을 버리고 12년 동안 왜 정복의 화신이 되어 그 머나먼 광야를 떠돌아다녔는가. 당시는 도시 단위로 형성된 도시국가 시대였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사이즈는 꿈도 꾸지 못할 혁명적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도 제자의 정복 전쟁에 동의는 했지만 내심 인도까지 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사실 당시 마케도니아 군사력으로 보았을 때 발칸 반도를 벗어나 지금의 터키와 이집트 그리고 바빌론까지는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지금의 이란 지역인 페르시아까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마케도니아의 위정자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당초 목표인 페르시아 정복은 허풍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결국은 물러섰지만 그는 페르시아를 넘어 당시 대도시였던 박트리아를 수중에 넣었으며, 결국엔 인도를 치기 위해 인더스 강까지 가서 가장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현재 우리도 그의 정복 능력에 혀를 내두르는데 당시엔 신이라 불리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경탄해 맞이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전쟁의 신 아레스의 환생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에 대한 에너지는 과연 어디서 발원된 것일까. 우선 필리포스 2세의 정복에 대한 야망과 장수로서의 용맹함을 물려받았고, 그리고 자신도 왕위에 올랐을 때 치를 떨어을 정도였던 올림피아스의 독살스런 정념과 탐욕을 숙명적으로 이어받았다. 특히 올림피아스는 알렉산드로스가 헤라클레스와 자신의 교접으로 태어난 반신반인이라고 어릴 때부터 아들에게 주입시켰다. 폭군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집착 사이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다중적인 성격을 형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행복하지 않은 어린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권력욕을 버리기에는 그의 피는 속일 수 없었다.


하여 그는 전쟁의 신이 되기를 다짐했다. 그는 미친 듯이 싸우고 또 싸웠다. 물론 논리적으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정립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으로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던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인도 정복에 실패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빌론에서 술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마케도니아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마케도니아를 생각만 해도 끔찍했을 것이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저 거친 광야였는지 모른다.

아이 하눔 유적

신이 되고자 했던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페르시아의 메마른 모래 바람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는 도시 아이하눔에 가면 이슬람 건축 양식과 전혀 다른 유적을 볼 수 있다. 그리스 건축 양식의 신전과 공회당과 짐나지움과 그리고 그리스어로 된 비문 등 수많은 유물들이 펼쳐져 있다. 바로 기원전 2~4세기 번창했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유적이다.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꽤 영향력 있는 왕국이었던 박트리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그곳에 총독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고 그 후예들이 계승 발전시킨 또 다른 그리스 문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2천3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앞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뜨거웠던 그 욕망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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