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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Mar 04. 2019

불멸의 꿈

진시황의 악마적 탐욕

노애와 조태후는 변강쇠와 옹녀처럼 궁합이 너무나 잘 맞았다. 천하의 노애를 얻은 조태후는 그에게 일부종사를 했다. 그리고 자식을 둘씩이나 낳았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태후의 남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파국의 원인이 되었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오직 파국만이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첫 번째 자식을 낳을 무렵 조태후는 여불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양 밖으로 거처를 옮겨 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여불위는 흔쾌히 받들어 조태후와 노애를 도성 밖 웅이라는 곳에 처소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니까 조태후는 진시황의 씨 다른 동생을 잉태한 것이었다. 남편과 사별하면 열녀문을 세우야 한다는 유교적 관습이 미미했던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을 거쳐 남존여비 풍습이 지배적이었던 2300년 전 엄중한 왕실 법도로 볼 때 조태후의 그런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패륜이었다.     


진시황이 왕위에 오른 지 7년이 지난 20살 되던 무렵이었다. 당시 조태후의 몸과 마음으로 총애를 받은 노애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자신이 거느린 노비가 3000명이 넘었고, 조태후의 권세를 등에 업은 그는 이권이 개입된 종사에 적극 관여하였으며 결국에는 자신의 권세를 주체하지 못하고 쿠데타를 자행하게 된다. 조태후에게서 낳은 아들을 제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모반이었다. 물론 조태후도 그 쿠데타에 동의하였다.     


노애의 난에 진시황은 진노한다. 전국 시대 7웅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진나라였는데 겁도 없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당연히 초장에 제압을 당한다, 그리고 노애는 능지처참에 처해진다. 야사에 의하면 진시황이 친히 조태후의 두 아들을 포대에 담아 때려죽였다고 하는데 그 상태가 사람의 모양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그만큼 진시황이 격노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럼 조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노한 진시황은 조태후를 변방으로 유배를 보냈으나 신하인 모황이 다른 나라 제후들이 이 사실을 알면 등을 돌릴 염려가 있으니 유배를 거두어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이에 냉정을 찾은 진시황은 조태후를 함양으로 불러들여 감천궁이란 후미진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킹메이커 여불위가 남았다. 그도 노애의 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알고 보면 여불위로 인해 사달이 난 꼴이었다. 참수를 당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그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노애의 난 이후 3년 뒤 그는 변방으로 유배를 가고, 진시황의 자살을 유도하는 편지를 받고 자결한다. 화려했던 그의 인생은 그렇게 마감을 한다. 역사에 의하면 그는 섭정 기간 동안 큰 업적을 남기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오점을 남기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진시황과 트러블 없이 무난하게 왕을 보필해 왔던 것 같다. 단지 조태후와의 숙명적인 관계로 인해 명이 조금 단축되었을 뿐이다. 사실 난세였던 전국시대에 그나마 20년 이상 고위관직에서 살아남았다면 그의 처세술은 남다른 것이었지 모른다. 진시황이 몇 년 터울을 두고 그를 자결하게 한 것은 최소한의 예를 보인 것이리라.     

이 사건 이후 진나라에서 조태후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조태후에 대해 말을 하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잡아 사형을 처하라고 어명을 내린 것이다. 그 어명에 걸려 사형을 당한 사람이 무려 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진나라에서는 조태후의 조자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친모에 대한 분노는 피해의식이 되어 진시황으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황후를 두지 못하게 하였다. 부정한 짓을 저지른 친모에 대한 콤플렉스는 그의 성격 형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미 친모 콤플렉스는 노애의 난 이전부터 그의 무의식을 잠식하고 있었다. 진시황이 13살에 즉위해 20살 노애의 난으로 섭정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친정세력을 구축하기 전까지 그 7년 동안의 진시황에 대해서는 역사에 기록된 것이 없다. 그 사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태후와 여불위 그리고 노애에 관한 부도덕한 행위들만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 청소년 시기 그러니까 사춘기 시절 진시황은 그런 사실들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한비자의 법가사상에 심취할 정도로 제자백가 사상을 가까이 두고 있던 진시황의 영특함을 볼 때 그런 사실을 눈치 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노애와의 관계에 대해 몰랐다고 한다면 진나라 궁궐 시스템이 아무리 복잡하고 두텁다 해도 무능력한 왕이 아닐 수 없다. 여불위의 섭정으로 인해 국사에 대해서는 뒤로 좀 물러서 있었다 하더라도 조태후의 부정한 행위를 왕으로서 모를 리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조태후에 대한 분노가 사춘기 진시황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은 조태후의 성에 대한 탐욕, 그러니까 그 탐욕에 대한 에너지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는 유전학적인 측면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빌리자면 이드 안에 있는 리비도가 초자아를 억누를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다. 정사와 야사에 기록될 정도로 강력한 음기의 소유자인 조 태후의 피를 받은 진시황은, 그런 사실을 극구 거부한다. 조태후의 문란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지만, 그의 내면은 형태만 다를 뿐 뜨거운 그 무엇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진시황은 그 7년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면은 용광로처럼 이글거렸지만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감정의 표출로 인해 어떤 행동이 뒤따랐다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지 않을 수 없었다. 조태후와 여불위의 권력을 이겨낼 힘이 그에게는 아직 부족했다. 그런 현실을 인식한 그는 침묵했다. 무서운 평정심이었다. 그렇게 냉혹한 탐욕의 에너지는 잉태되고 있었다. 악마적 탐욕은 그의 무의식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 후에 나타난 진시황의 화려한 행적을 알고 있다. 10년에 걸친 위대한 천하통일의 여정, 후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방궁과 만리장성과 왕릉 등의 거대한 토목공사, 그리고 분서갱유와 불사불생을 위한 끝없는 탐욕을.     


사실 진시황은 전국 통일까지만 보면 한고조와 모택동을 능가하는 위대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그가 펼쳤던 10년 동안의 외교 정치적 능력은 입신의 경지에 오르고도 남는다. 하지만 통일 후 그가 보여 준 통치력은 한 인간의 탐욕의 오메가를 보여 줄 뿐이다. 통치자의 탐욕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한 예로 분서갱유에 대해 알아보고 가자. 분서갱위의 주인공은 진시황이지만 주인공 같은 조연은 역시나 이사였다. 결국 CEO의 잘못된 판단으로 회사가 부도가 나지만 믿었던 참모의 역할도 그에 못지않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이사는 성악설로 유명한 그 순자의 문하생이었다. 조선에서는 맹자가 더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순자가 전국구 스타였다고 하며 그의 문하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 한 명이 이사였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유명한 한비자도 이사와 동문수학한 제자였다. 학문에 정진하는데 부족함을 인식한 이사는 재빠르게 현실 정치로 경로를 바꾸어 어찌어찌하여 여불위를 알게 되고 그를 따라 진나라로 와서 결국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일조하게 된다.     


이사는 자신이 모함하여 죽인 한비자처럼 법가사상 신봉자였으며 진나라에 법가를 도입한 상앙의 후계자였다. 한비자가 이론가라면 그는 실천가였다. 법가는 그의 철학이며 종교였다. 그런 통치철학적인 면에서 진시황과 궁합이 딱 맞았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분서갱유를 촉발시킨 주도자가 된다.     


위나라 사람이며 협객의 대명사인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할 때 죽다 살아난 것도 법이었듯이 진나라에서의 법은 너무나 강고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한 예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은 백성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하며, 보다 많은 조세를 위해 강력한 법이 작용한 것이니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관습과 도덕의 기준보다 법이 우선으로 작동하여 그로 인해 백성의 인심은 사라지고 민심은 흉흉하였다. 무엇보다, 현재의 민주주의처럼 국민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한비자가 설파한 법사상은 한계가 분명했다. 법은 오로지 황제의, 황제에 의한, 황제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백성은 법 앞에 평등한 것이 아니라 황제 앞에서 평등할 뿐이었다.     


이에 전국의 유생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인간과 도를 근본으로 하는 유가와 묵가와 도가사상 등에 익숙했던 통일된 백성들이 전체주의 체제에 힘겨워하자 유생들이 궐기를 한 것이다. 조선이나 진나라나 유생들은 어디서나 꼿꼿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박사 순우월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 중에도 군현제도와 법가의 폐해를 지적하는 부류들도 나타났다. 과거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요소들을 배척하지 말고 일부 유지해야 국가가 안정된다고 주장하였다. 유가와 법가 즉,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질서에 도전하려는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이사는 진시황에게 진나라의 서적과 기술서 등을 제외 한 6국의 역사서와 제자백가와 관련된 서적들을 소각하고자 강력하게 청하였고 이에 황제는 망설임 없이 결재를 한다. 하여 전국 곳곳에 소장하고 있는 불온서적을 자진신고해야 하며, 30일이 지난 후 조사하여 발각되면 사형에 처하겠노라고 어명을 선포하였다. 로마의 네로 황제급 광기였다.     


그리고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갱유였다. 분서 사태로 진나라가 한바탕 소용돌이가 치고 있을 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로장생에 대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불로초를 구해 오겠다는 서복에게 막대한 돈을 투자하였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이에 진시황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진시황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방사인 후생과 노사에게 불로초를 구해올 것을 명령하였는데, 그들은 불로초를 이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의 목숨은 어디로 가나 부지할 수 없는 처지였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여 그들은 이런 진시황의 말도 안 되는 행위를 극열하게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자취를 감추었다. 소문으로 만 듣던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세상에 폭로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내부자 고발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 유생들은 그렇지 않아도 분서로 인해 분노가 고조되어 있었는데, 유학자적인 관점은 차치하고 인륜사적 논점에서 보더라도 불로초 사건은 용납할 수 없었으며 이에  강력하게 저항한다. 진시황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을 비방한 유생과 방사들과 그리고 후생과 노사와 관련된 사람들을 색출하여 생매장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함양에서만 그 주검이 무려 460명에 이른다고 했다. 황제의 탐욕으로 인해 나라가 흉흉해지자 총명했던 왕세자 부소도 참지 못하고 간언을 했는데, 이에 진노한 진시황은 그를 몽염이 있던 변방 장성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때부터 종말의 먹구름에 세상을 뒤덥고 있었다. 기원전 212년, 진시황 붕어 2년 전이다.  

    

진시황의 죽음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으며 매우 쓸쓸했다. 순행 중 병에 걸려 사망했는데, 음모론과 온갖 추측만 난무할 뿐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각종 보약에 함유된 수은에 의한 중독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그것 또한 추측일 뿐이다. 수은 중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사인으로 등장한다 .


아무튼,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안 진시황은 유서를 써서 장성에 있던 부소에게 전할 것을 환관 조고에서 명했다. 하지만 곧 진시황이 붕어하자, 조고는 이사와 모의하여 황제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 시신을 함양까지 모시고 왔으며, 그 유서 또한 위조하여 결국 부소와 몽염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또 등장하는 이사는 바로 한비자의 동창이며 그를 모함한 그 이사이다.   그리고 조고 또한 중국의 3대 간신 중에 한 명으로서 위록지마의 주인공이다.  


황제의 붕어를 숨기고 태자를 바꿔치기한 것은 명백한 쿠데타였다. 그들은 왜 진시황의 후계자인 부소를 거부하고 막내아들 호해를 왕위에 오르게 했을까? 여기서 암살설 등 여러 가지 음모론이 난무한다. 진시황과 그들의 내밀한 갈등과 암투는 무엇이었을까? 그 거대한 욕망의 충돌 에너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애석하지만 그것이 답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시황의 욕망이 너무나 강했다는 사실이다. 권력이 강해지면 탐욕은 컨트롤을 거부하며, 그로 인해 측근에게 꺾이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학습해 왔지 않은가.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인 필리포스2세도 그랬고, 로마의 황제 시이저 그랬다.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다. 아마도 진시황의 죽음은 그래서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들이 대게 그렇듯 진시황도 극단적인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로스는 분노 조절을 실패하여 그의 절친이었던 클레이토스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지만 그 행위를 후회하고 자괴감에 빠져 고통스러워했던 반면 진시황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면을 상실한 냉혹한 악마적 분노의 소유자였다. 인간의 탐욕이 무한 증식하여 팽창한 결과 임계점을 넘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를 진시황의 예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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