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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Mar 11. 2019

세상에 분노하다

정도전의 꿈

장 폴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이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칭했다.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트린 후, 그 혁명을 지지했던 사르트르가 쿠바를 방문하여 체 게바라를 만나고 나서 한 말이다. 어떤 이는 완전한 인간이라 함은 곧 예수를 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생인 게바라는 1951년 어느 날 휴학계를 내고 선배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흔히 대학생 때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나듯 그에게도 낭만적인 경향이 짙은 ‘방랑 귀족’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2개월 만에 망가진 500cc 모터사이클을 폐기하고, 발과 자동차로 나머지 7개월 동안 칠레와 페루와 콜롬비아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한다. 물론 편안한 여행이 될 수 없었다. 비와 눈을 맞으며 걷기도 하고, 금방 분해될 같은 트럭을 히치하이킹하기도 하고 때론 허름한 마구간에서 잠을 자기도 하는 등 견유주의자 같은 지난한 여행이었다. 그는 그 여행에서 처참한 민중들의 삶을 목도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자신의 의술로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농장과 탄광에서 그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 민중들은 그런 환경을 개선하겠다는 저항의 몸짓을 하지 않고 자본가에게 오히려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에 게바라는 분노한다. 민중들의 능력으로는 이런 현상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게바라는 깊이 고민한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게바라는 이미 의식화된 운동권 학생이 되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사랑했던 그는 의대를 졸업한 후 안락한 의사로서의 미래를 접고 당시 혁명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던 남미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긴박한 현장을 접한다. 마치 80년대 우리의 ‘학출’과 같았다. 그리고 과테말라에서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를 만나 결혼을 하고, 미국 CIA가 개입된 전형적인 남미 국가의 혼탁한 정세에서 반정부 투쟁에도 적극 가담한다. 과테말라에서 남미 국가와 미국이 어떠한 관계가 맺어져 정권을 창출하는지 명확하게 확인한 그는 가데아로부터 멕시코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피델 카스트로에 관한 얘기를 듣고 멕시코로 떠난다. 이제 머나먼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혁명을 위해서. 그로부터 12년 후 1967년 10월 9일 그의 나이 39살 때 그는 볼리비아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14세기 말,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명나라 주원장에게 쫓겨 자신의 고향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원나라를 따르는 권문세족과 명나라를 따르는 신진사대부가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이색을 논하지 않고서는 당시 정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이색은 유학을 고려에 처음 들여온 안향의 정통 후예로서 약관의 나이에 원나라 국립대학인 국자감에서 수학하며 당대 최고의 학문인 주자성리학을 배웠고, 2개의 고시를 패스한 당대 최고의 두뇌였다. 24살 때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귀국한 그는 공민왕에 의해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성균관을 재건하여 총장 격인 성균 대사성이란 임영장을 받아 후학 양성에도 매진한다. 그는 엘리트 성리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했으며 그의 문하에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김구용 조준 등이 동문수학을 했다. 그러니까 서울대 법대를 능가하는 학당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바로 역성혁명 전 후 격동의 현장에서 이색과 그 졸업생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우정과 배신의 드라마를 쓴다.    

목은 이색

그 이색 문하에 바로 10대 후반의 정도전이 입학을 한다. 그러니까 이색 학파의 일원이 된 것이다. 정도전은 그로부터 13년 후, 그의 나이 33살 때 1375년 권문세가의 모략에 의해 유배를 가고, 1383년 이성계를 만나 혁명에의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하며, 5년 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거치면서 고려 권력의 핵심이 된다. 그리고 1392년 자신의 스승인 당대 성리학의 거두 이색은 숙청되어 다시는 권력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서로 동심우라 할 정도로 가까웠던 선배인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당하는 격동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역성혁명에 성공한다.  


우리는 정도전을 한고조의 한초삼걸, 즉 장량, 한신, 소하 중에 한 명인 장량과 비교하기를 즐긴다. 사실 주당이었던 그는 취기가 오르면 자신의 입으로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자신이 조선의 창업자라는 뜻이다.  

  

우리는 정도전에게 흔히 조선의 설계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조선의 헌법인 조선경국대전, 관료의 직제에 관한 경제문감, 억불숭유에 관한 불씨잡변, 군주의 도리를 설정한 경제문감별집 등의 집필에서 보듯 성리학과 민본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설계하였으며 그리고 경복궁과 서울의 주요 건물들을 신축할 때 위치를 정하고 건물 이름을 작명한 것을 보면 분명 설계자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 평가를 좀 강하게 표현하면 조선은 이성계의 나라가 아니라 정도전의 나라였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이성계는 단지 바지사장이었고 정도전이 실소유주라는 것이다. 고려 말 대부분의 개혁파들이 꿈도 꾸지 못한 역성혁명을 정도전이 이끌어내지 않았던가. 정도전이 아니었다면 이성계가 최 씨 무신정권처럼 권력을 잡을 수는 있었겠지만 역성혁명까지는 가지 못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가 된 후 삼봉이 없었다면 자신은 임금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것을 보면, 그리고 삼봉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살해되었을 때 왕위를 버리고 함흥으로 떠난 것을 보면, 그는 애초부터 왕과는 인연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정도전이란 인물이 이성계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성계에게 정도전은 알파요 오메가였던 것이다.    


조선은 결과적으로 정도전의 뜨거운 에너지가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유방에게 장량이 찾아가지 않았다면 유방의 한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이 인정하듯, 조선도 정도전이 1383년 함경도에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역성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정도전의 주도하에 역성혁명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정도전이 위대한 것은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개국에 통치 이념을 접목시킨 점이다. 그 이념은 현재와 비교하자면 민주주의를 할 것인지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중국에서 수많은 혁명으로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그 결과엔 인간의 욕망만 존재할 뿐 통치이념이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이성계와의 운명적 만남 이전부터 정도전의 머리에는 성리학과 민본이 확립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정과 추진력으로 현실 정치에 접목시켰다. 조선의 정신은 정도전의 정신 이리라.     


태종 이후 이런 분석과 평가에 대해 송시열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노’라고 외쳐왔지만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그런 도그마는 무너지고 있다. 과전법 실무 책임자였던 조준 정도(?) 되는 인물이 권력투쟁에서 패했다면 아마도 영원히 그의 가치는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지만, 정도전이기에 역적의 우두머리라고 욕을 먹더라도 그의 역사적 평가는 숨길 수 없었다. 감추기엔 크기가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영, 정조 때 재평가의 분위기가 나타났고,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정식으로 복권 된 것을 보면 그가 차지하는 조선에서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가름할 수 있다. 사후 460년이 지난 뒤 복권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그 자체로서도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사건이지만, 조선에서 정도전이라는 존재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여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그에 대한 재평가는 사필귀정인지 모른다.    

삼봉 정도전

이제 과거로 돌아가 보자. 1375년 삼봉의 나이 33살 때였다. 그는 당시 이색 학당 출신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서 성균관 사예 종4품 즉 지금으로 보면 국립대 음악교수 정도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당시 선진 사상인 성리학은 이색과 그의 제자들인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조준 등에 의해 고려 말의 정치사상적 이데올로기로 급부상하였는데 그들을 신진사대부라 칭하였으며 친명주의를 표방했다. 그리고 기득권 보수 세력을 권문세족이라 칭하였으며 친원주의를 표방했다. 당시 정치 판도는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이 양분하고 있었다.    


그해 명나라 공격에 밀리고 있던 원나라가 연합군을 만들자는 목적으로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그 사신의 영접을 놓고 권문세가의 거두인 이인임과 급진 신진사대부인 정도전이 한 판 붙은 것이다. 이인임은 세상이 다 아는 친명파 정도전 정몽주 이숭인 등에게 원나라 사신을 영접할 것을 명하였고, 이에 격분한 정도전은 중도파인 경복흥에게 항의하여 재고해 줄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끝내 청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그들은 항명을 하고 귀양을 자초하고 말았다. 권문세족이 신진사대부를 길들이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중에 가장 급진적인 정도전이 타깃이었다. 모난 돌이 정을 맞게 마련이다. 정도전 자신도 말했듯이, 그는 타협을 모르는 대쪽 같은 성격이었다. 정몽주 이숭인은 1년 후 복권이 되었지만 정도전은 그 후 9년이 지난 1384년에 복권이 된 것을 보면 정도전이 권문세족들에게 얼마나 많은 미운털이 박혔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정도전은 기득권층의 경계대상 1호였다.   


하여튼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 지역 회진현 거평부곡이라는 곳으로 유배를 간다. 정도전에게 글쓰기는 일상과 같아서 일생동안 여러 분야의 수많은 기록들을 남겼는데, 소재동 황연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글로 남기는 것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제목이 마을 이름을 앞에 붙인 소재동기라는 책으로서 삼봉집에도 실려 있다. 이 글에 보면 그가 어떻게 2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문자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도전의 글쓰기는 역사적 사실성의 측면에서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정몽주는 당대의 석학이며 출중한 정치가였지만 자신이 쓴 기록은 한시와 잡문 등이 실린 포은집 이외에 미미하여 사실적 빈곤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문자를 남긴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근동으로 멀리 가지 않더라도, 일찍이 문자를 만들었던 중국은 2500년 전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고, 문자가 없었던 고조선의 역사는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는 몇 줄의 기록에 의지하는 역사적 빈곤에 처해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지금도 중국과의 역사적 문제가 발생하면 힘을 못 쓰고 있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나주 소재동에 유배된 정도전에게로 돌아가자. 소재동기에 보면 10여 호 되는 마을 주변 풍광을 글로서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그 표현을 그대로 다 옮겨 놓을 수는 없지만, 마을 주변의 산수풍경을 문학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궁벽하지만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한 편의 수려한 기행문을 보는 듯하다.    


소재동에 처음 와서는 환경의 변화로 적응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객들이 찾아와 술친구가 되어주어 삼봉에겐 적잖게 위안이 되었다. 그중에 서안길이라는 땡중이 있었는데, 얼굴이 길고 코가 높아 괴이하게 생겼으며 전국의 사투리를 구사할 수 있었고 또한 세상사 모든 일을 꿰차고 있어서 며칠 밤낮으로 대화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서 문자 좀 하는 객들이 각종 특산물과 음식과 술을 가지고 찾아와 그를 위로하고 시름을 달래주었다. 소재동기에 서안길과 황현 외 김성길, 김천부, 김천 등 손님들의 이름들이 거론된 것을 보면 기록의 구체성을 확인할 수 있고, 정말 그 지역 사람들과 흉금 없이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유배문학이라 하여 유배지에서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졌지만 그처럼 마을 사람들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쓴 작품은 없을 것이다. 이는 정도전의 교감능력이 뛰어나 그 촌락에 동화되었다는 증거이며 또한 타인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었다. 대게 많은 유배자들은 그 지역의 유력한 관리나 토호세력들과 친교를 하기 마련인데 정도전은 하층민과도 거리낌 없이 지낸 것을 보면 세상을 접하는 인식이 유연하고 넓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정도전은 답전보라는 글을 또 쓴다. 농부와의 대화라는 뜻이다. 나주 유배지를 배경으로 어느 노인과 나눈 문답체 글인데,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낮고 기울고 좁고 더러워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집을 나서 들을 거닐다가” 밭에서 호미를 들고 김을 매고 있는 노인과 만나 일장 훈시를 듣는 내용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은둔자라 칭했던 눈썹이 긴 노인의 입을 빌려서 자세하게 들려준다.    


불의를 외면하고 호의호식에 탐하는 자들. 권력과 가까이하려고 온갖 아첨을 하고, 겉으론 정의롭게 보이면서 밤 만 되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권력과 결탁하는 자들.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과 풍속의 미악 등은 돌보지 않고,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비방하고 비웃는 자들. 평화시에는 뒤짐만 지고 다니며 큰소리치고, 오만방자하여 조정의 선비들을 경멸하다가 전쟁터에 나가면 겁을 먹고 달아나는 장군들. 그리고 남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고, 아첨하고 아부하는 자를 좋아하고, 바른 말하는 선비를 배격하고, 관직과 봉록을 착복하고, 형법을 농단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 조정에 득실거리노라고 노인은 일갈한다.     


답전보는 정도전의 사상적 각성의 기록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자신이 품고 있는 권력세계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고백한 것을 볼 때 전환기적인 인식의 확장이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시작점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세상에 대한 깨달음이었는지 모른다. 그 깨달음은 세상에 대한 분노로 표현된다. 그동안 머리에서만 존재하던 맹자의 민본이 무슨 계시처럼 그의 가슴에 저며 들었다. 혁명의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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