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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Mar 18. 2019

분노를 넘어서

정도전의 꿈

1377년 7월 정도전은 유배에서 풀려난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2년의 유배생활은 쓰디쓴 와신상담의 시간이었다. 현재 개경의 분위기로 보아 언제 세상으로 나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복권은 요원할 뿐이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그의 앞길에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세상과 타협할 수는 없었다.    


2년 동안 정들었던 황현과 서안길 그리고 동리 사람들과 작별을 한 그는 고향인 영주로 가기 전에 강원도 원주로 발길을 돌렸다. 원나라에서 망명한 위그르인의 후손이며, 고시 동기이고 동문수학 했던 절친 설장수가 원주 목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이색학당 후배이며 자신을 친형처럼 따르던 하륜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참에 정도전에게 연락하여 원주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정도전을 개경에서 만나는 것은 빨갱이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아직까지는 불경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이목이 없는 원주에서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였다. 얼마나 친구가 그리웠으면 그 먼 원주로 발길을 옮겼을까. 정몽주와 서로 동심우라 부르듯 그들에게도 우정의 깊이는 그에 못지않았다. 먼 훗날 그들과 정적이 되어 죽기 살기로 싸우지만 말이다.    

나주 유배지 초막

정도전은 고향인 영주로 가서 몇 년 간 세상과 담을 쌓고 생활한다.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은둔시킨 침묵의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백면서생처럼 하릴없이 밥 만 축내는 시간은 아니었다. 생계를 위해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리키고 손수 농사도 지었다. 그가 처한 상황은 절박했다. 절치부심하며 권토중래를 한다는 것은 사치인지 모른다. 우선은 민생고가 급했다. 아내 혼자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게 할 수 없었다. 정도전이 나주 유배지에 있을 때 그의 아내에게서 받은 편지가 지금도 전해지는데, 삶의 고달픔이 절절하게 배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0년 이상 관직에 있었는데도 그에겐 재산이 변변히 않았다. 가장으로서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이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서당은 부업이었고 주업은 농사였다고 해야 옳다.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삼봉집 등 여러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선비의 체통 따위를 논하는 서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고 술이나 마시는 낭만적 행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맹자를 교주처럼 모시던 그에겐 노장사상의 은자적 태도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정도전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며 행동주의자였던 것이다.    


자신에게 호통을 치던 담전보의 방미호수(厖尾皓首) 노인처럼 정도전도 호미를 들고 김을 맸다. 은둔자라고 칭했던 답전보의 그 노인은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세상과의 연을 끊고 깊은 침묵 속으로 침잠하며, 그 피안과도 같은 고독에서 나를 발견하고, 땅의 숨소리와 나의 숨소리가 내면에서 공명하고, 그때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는다. 은둔자는 오금이 저려오는 것을  참으며 호미질을 멈추고 뜨거운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든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머금는다. 그리고 은둔자는 돈오와 같은 덩 빈 공간으로 빠져든다.       


정도전이 토지개혁에 눈을 뜬 것은 이 무렵이었다. 고려의 전시과 제도는 매우 복잡하여 여기서 설명을 다 할 수 없다. 전시란 말 그대로 곡물과 땔감을 생산하는 토지로써 조세 관계 체계를 말한다. 화폐 유통이 제한적이었던 당시 재화의 일종인 토지를 이용한 조세제도이다.   


그중에 수조제라는 제도에 문제가 많았다. 수조제는 관료에게 주는 급여를 관이 지정한 일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1/10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나라에서 공무원에게 주는 급여를 화폐 대신 곡물로 주었는데 그 방법이 간접적이었다.     


문제는 1/10이 지속되면 곡물을 생산하는 농민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세기말적인 혼탁한 세상이 되면 그 시스템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시간이 가면서 수조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진다. 가령 A라는 관료가 1/10의 급여를 받다가 관직을 변경하여 떠나면 그 1/10이 소멸되어야 하는데, A는 권력의 힘으로 그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상속까지 하는 현상이 발생되고, B라는 관료가 A의 후임으로 부임하면 그 땅에 1/10의 수조제가 부가되고 따라서 똑같은 땅에 2/10의 세금이 부과된다. 그리고 또 다른 C가 발생하고 급기야 농민은 3할 이상의 곡물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5할을 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자작농과 소작농이 혼재하다 보면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된다. 또한 벼룩의 간을 빼먹듯, 이런 과정에서 권문세족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마지막 살점까지 수탈한다.    


이에 살기 힘들어진 농민은 자진해서 권문세족의 노비로 들어가고, 투탁이라 하여 사찰에 의탁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런 신분의 변화는 개인적으로 행하여지는 것이어서 가족의 분해로까지 이어진다. 봉건시대의 국가 기반은 농민이었다. 군대를 소집해도 농민군이라 하여 농민이 우선이었고, 국가의 역사에 동원되는 부역에도 농민이 우선이었으며, 나라의 온갖 납세의 의무도 농민이 해결해야 했다. 농민이 부족하면 국가의 재정은 궁핍해지고 따라서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고.    

하지만 농민의 삶은 세금으로 인해 점점 피폐해진 반면 권문세족은 납세의 의무에서 자유로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조세제도이지만 봉건사회에서는 당연한 논리였다. 곡물이 생산되는 모든 땅에는 세금이 부과되지만 권문세족은 예외라는 것이다.     


고려 전시법의 특징은 사찰전에도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권문세족과 버금가는 기득권층이었던 불교계는 토지 소유량이 상당하였으며 그에 상응하는 잠재적 조세의 크기 또한 간과할 수 없었다. 고려 전체의 사전에 조세 의무를 부여한다면 백성들의 허리는 상당 부분 펼 수 있었다. 사찰은 세금도 안 내고 생산력도 없는 완벽한 특혜 지역이었다. 사찰로 인한 유무형의 경제적 손실에 대한 현상은 당시 신진사대부의 중요한 관심사였고, 그중에서도 직접 농사를 지으며 격은 정도전에겐 불교 개혁은 최우선 항목이었다. 불씨잡변에서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면 불교가 민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하여튼, 십여 년 후 조준에 의해 혁신적인 토지개혁에 대한 상소가 올라가기 전 당초 정도전의 의중은 권문세족의 사전과 사찰의 사전을 모조리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사회주의적인 토지개혁이었다. 이런 제도는 공산주의가 아닌 이상 지구 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급진적인 토지개혁으로서 당연히 당신 기득권 세력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되고 결국 많이 완화된 과전법이란 형태로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삼봉집

4년 동안 완벽한 무망의 세월을 보내던 그는 관의 허락을 받고 1381년 39살 때 제천과 원주를 거쳐 드디어 경기도 양주 삼각산 아래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 거주지 제한이 풀린 것이다. 6년 만에 돌아온 동리였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공직에 나갈 수 없는 몸이었다. 복권은 요원했다.     


하여 그는 또다시 생계를 위해 삼봉재라고 명명 한 학당을 연다. 학자이자 관료 출신으로서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직업은 훈장이었다. 다행히 양주에서의 학당은 영주에서 보다 훨씬 운영이 양호했다. 양주는 당시 개경 서경과 함께 가장 큰 도시 중에 하나인 남경과 인접한 향리로서 인구가 많았다. 개경과도 가까운 남경에는 전국에서 모인 고시생들이 많았고 그중의 일부도 삼봉서원에 수강 등록을 했다. 정도전의 명성은 지방보다 대도시에서 더 많이 회자되기 때문에 글깨나 하는 유생들도 알음알음 찾아왔으며 따라서 서원의 경영은 농사를 짓지 않을 정도로 잘 되었다. 후진을 양성하며 오랜만에 마음 놓고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평화도 잠시, 지역에서 영향력 깨나 행사하는 자들이 정도전을 가만 두지 않았다. 과거 고위 관직에 있었다는 그들의 배경에 누가 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정도전의 행적을 감시하기도 하고 서원에 찾아와 훼방을 놓기도 했다. 어느 권문세족 일파의 사주가 분명했다. 결국 그들의 온갖 음해로 삼봉재가 철거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게 1년 만에 정도전은 양주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부평 남촌으로 이사를 가서 학숙을 연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부평 부사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재상 출신의 높으신 분의 별장을 짓는다는 핑계로 학숙이 폐쇄당하는 등 갖은 수모를 겪은 끝에 결국 몇 개월 만에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숙청당한 지 8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는 요시찰 인물이었으며 활동에 제한을 받고 있었다.     


양주와 부평을 거쳐 온 곳이 김포였다. 부평부사의 도움으로 김포로 거처를 옮겼지만 주위엔 양주와 부평처럼 지인이 없었다. 그리고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허름한 초려를 얻었을 뿐 또다시 소작을 해서 민생고를 해결해야 만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농사밖에 없었다. 복권은 깜깜무소식이었고, 계속 박해를 받은 것으로 보아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은 보장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이제 나이도 마흔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사실 세상의 부조리를 질타하고 혁명을 꿈꾼다는 자체가 사치였다. 또한 세상에 대한 분노도 사치였는지 모른다. 혁명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식솔들을 어떻게 하면 굶기지 않을까 하는 삶의 의지, 본능만이 전부였다. 세상은 그를 잊었고, 그도 세상을 잊어 가고 있었으며,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과 같이 정몽주가 김포 초막으로 찾아왔다. 1383년 여름이었다. 얼마 만인가, 그래 9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도전은 그가 가져온 술로 회포를 풀었다. 정도전과 함께 유배를 갔던 그는 1년 만에 복권된 후 조정에서 외교와 관련된 주요한 일을 해왔다. 그리고 몇 개 월 전에는 함경도 함주에 침입한 왜구와의 전투에 이성계와 함께 참전하고 복귀한 후였다.      


동심우라 서로를 부르던 두 사람은 이제 세파에 찌든 중년이 되어 있었다. 정도전 보다 여섯 살 많은 정몽주의 머리는 반백이 되어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주름이 깊게 파인 정도전의 얼굴은 정몽주 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나누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는 이성계와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정몽주는 20대 중반 관직생활 초기에 함경도에서 당시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젊은 무장 이성계와 처음 만났다. 여진족과 원나라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백전백승하고 있던 이성계의 종사관 즉 군영 수장의 보좌역으로 부임하여 당시 여진족 토벌전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1380년 전라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고 있던 왜구를 토벌하는 전투 즉 황산대첩에 삼도 도원수 이성계와 함께 조전원수 자격으로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몇 개월 전에도 함경도 함주에서 왜구를 몰아내는 전투에서도 함께했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여러 전투에 함께 참전한 전우였다. 이성계는 정몽주보다 3살 많은 동년배였으며, 무엇보다 두 사람은 인간적인 관계가 돈독하여 우정의 순도는 정도전보다 결코 낮다고 할 수 없었다. 이성계와 정몽주 그리고 정도전의 관계는 이렇게 엮어진다.    


당시 이성계는 고려의 영웅이었다. 북으로는 여진족과 원나라의 침입을 격퇴했고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토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그로 인해 그는 최영을 능가하는 국민적 장수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인간됨을 정도전에서 역설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장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알며, 항상 겸손하고 침착하고, 무엇보다 인식체계가 개방적이고 유연하여 개혁에 대한 인식이 열려있다고 했다. 요즘 표현으로 오픈 마인드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사실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와의 교류가 활발했는데 아마도 정몽주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

정몽주가 이성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바로 정도전에게 연결고리를 이어 주기 위함이었다. 고려의 개혁은 지지부진하여 미래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정도전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조합, 고려 제일의 무장이면서 덕을 갖춘 이성계와 성리학 학자이면서 혁명적 기질을 가진 정도전의 조합, 냉정한 피와 뜨거운 피의 조합, 정몽주는 이 조합에 도박을 걸었는지 모른다. 이 난세에 영웅이 필요하다는 역사적 특명을 받았으리라.      


순간의 결정에 뜨거운 피가 관여되지 않는다면 역사는 권태로울 뿐이다. 장량이 진시황 암살에 실패한 후,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바로 그 분노가 유방을 찾아가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로 인해 유방은 한고조가 되지 않았던가. 역사적 운명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뜨거운 피에서 발원한다. 무너질 것 같은 어느 초막에서 발화된 불씨는 거대한 불길을 이끌어낸다.    


1383년 가을로 접어드는 어느 날, 정도전은 전대를 매고 김포 초막을 떠난다. 그리고 긴 여정 끝에 함경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와 만난다. 역사는 이 순간을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혁명의 불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후, 정도전이 어떻게 혁명을 성공에 이르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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