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대중의 광기
당시 10대의 히틀러에게 유일한 재능은 그림 그리기였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학업 능력보다는 앞섰다. 덩치도 크지 않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으며, 공부에도 취미가 없었다. 그나마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공무원이 되기를 바란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화가의 길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실업학교를 졸업한 후 미술대학에 입학하려고 나름 노력을 하였지만 계속 낙방했다. 첫 번째 낙방이 있을 무렵 어머니가 사망했다.
그에겐 이제 가족이라고는 부모 형제자매 전부 사망하고 누이동생뿐이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약간의 유산과 고아 연금 등으로 당장 금전적인 불편함은 없었지만 어린 나이에 삶을 개척한다는 것은 누구든 지난한 일이었다.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면 룸펜이 되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그는 마마보이로 길들여져 사회생활이 녹록지 않았다.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며 수차례 지원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고 포기한다. 그토록 갈망했던 미술학교 진학의 꿈은 그렇게 산산히 깨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미술학교 입학사정관의 추천으로 건축가의 길을 가려고 방법을 모색해보았으나, 학사 정도의 학력이 있어야 건축가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현실을 파악한 후 그것마저도 포기한다. 다시 공부를 하여 대학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처한 가정환경이 뒷받침하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공부는 그의 성향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대 초반의 히틀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은 거리의 화가였다. 사실 그림 이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실업학교에서 배운 기술은 그의 사회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그런 일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공부를 한다는 것도 그에겐 무리한 요구였다.
생활이 어렵지 않은 20대 초반에는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화구들을 메고 빈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제법 화가 티가 났다. 그리고 바그너의 오페라가 공연할 때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바그너였다. 그중에 리엔치에 매료되어 있었다. 리엔치는 1842년 초연 당시 정치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문제작으로서, 귀족과 시민계급의 대립과 투쟁,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사회의 모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를 추구하는 파격적인 오페라였다. 혁명가 리엔치의 투쟁을 노래한 그 작품은 히틀러의 여린 마음을 낚아챘다.
리치엔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치인으로 성장할 때부터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바그너의 며느리와 교분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 현상은 니체의 누이동생이 그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초인을 히틀러와 연관시키려는 의도와 다르지 않았다. 바그너의 며느리와 니체의 누이동생은 히틀러를 ‘민족의 태양’으로 찬양하며 바그너와 니체를 천박하게 만들었다.
무명 화가로 빈의 거리를 배회하던 히틀러는 결국 2년도 안되어 가진 돈을 탕진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오페라 관람료가 상당한 금액이었을 터인데 겁도 없이 오페라 관람에 돈을 펑펑 썼으니 돈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소비형태로 삶을 꾸렸으니 언필칭 마마보이로서 한계를 보인 것이다. 정상적인 생활인으로서의 그의 정신상태는 아직 미숙아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한 히틀러는 거리의 화가가 되어 초상화와 엽서를 그려 팔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한다. 그가 엽서를 그려서 팔았다는 것은 삼류 화가라는 의미이다. 당시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면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어디에도 명함을 내밀 수 없었다. 미술학교에 여러 번 낙방한 것도 세상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원망해야 할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었다는 방증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엽서 화가로서 그는 빈의 뒷골목 허름한 하숙집을 전전하기도 하고 그마저 돈이 떨어지면 쫓겨나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정말 앞날이 암담했다.
빈에서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멀지 않은 독일 바이에른의 뮌헨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모색한다. 그리고 일 년도 안 되어 히틀러는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뮌헨은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짙은 전운이 감돌던 1개월 후 드디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한다.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히틀러의 나이 25살 때였다. 오스트리아 국적인 히틀러는 자국의 군 소집을 거부하고 독일제국인으로 지원 입대를 한다.
그가 왜 오스트리아군이 아니라 독일군으로 전쟁에 참전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뮌헨 생활 1년은 ‘나의 투쟁’이나 여러 평전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궁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숨기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투쟁’에 의하면 오스트리아 빈은 게르만인 외 유대인 슬라브인 헝가리인 집시 등 여러 인종들이 모여 사는 관계로 민족의 주체성을 찾을 수 없었고, 이에 강한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과 국가사회주의를 좇아 독일로 넘어갔다는 투로 말한다. 하지만 그 당시 히틀러의 지적 깊이를 볼 때 그런 논리는 각색에 불과할 뿐이다. 그의 지적 능력을 과대망상적으로 부풀렸다고 보아야 옳다. 실업계 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고, 어떠한 인문학적인 소양이 있다는 근거도 없고, 세상을 보는 탁월한 능력에 대한 기록도 없고, 예술에 대한 심미안적인 통찰의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단지 궁박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대도시 뮌헨으로 이사를 갔고,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군 보다 강한 독일군에 입대하여 자신의 안위를 도모했을 뿐이다.
여기서 바이에른의 뮌헨에 대해 잠깐 얘기하고 가겠다. 히틀러에게 뮌헨은 정치적 고향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뮌헨으로 왔지만 그는 그곳에서 독일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하였고, 무공훈장도 받았고, 제대 후 혼란한 뮌헨을 떠나지 않고 남아 독일 노동자 당에 가입하여 정치 세계에 뛰어들었으며, 그곳에서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폭동을 일으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감방에 갇히는 등 뮌헨은 그의 정치적 성지였다. 뮌헨을 논하지 않고 히틀러를 얘기할 수 없다.
전쟁에 참전한 그는 프랑스 접경지역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서부전선의 특징은 참호전으로서 우리의 한국전쟁 말기 고지전과 같은 밀고 댕기는 지루한 공방이 연일 벌어지는 전선이었다. 히틀러는 참호와 참호를 연결하는 일종의 통신병으로 충직하게 군 복무에 임했다. 미술 이외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오스트리아 입영을 회피했던 히틀러는 이상하리만치 전쟁터에서는 에너지가 솟구쳤다. 허약한 외모와 망각 속에 빠져 있는 듯한 눈빛은 사라지고 내면에서 강한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전쟁터는 그에게 또 다른 생명을 주었다. 히틀러도 자신의 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고 있었다.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그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독일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전쟁 말미에 그는 눈에 부상을 입고 후방 병원으로 후송을 간다. 당시 그는 철십자 훈장을 받는데, 그 훈장은 그가 독일 총통이 되어서도 가슴에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그 정도로 그는 1차 대전 참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나의 투쟁’에서 전쟁은 ‘장엄했노’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그에게 있어서 세계 1차 대전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주의와 약육강식의 우생학과 반유대주의 등 그동안 타인에 의해 듣기만 했던 내용들이 마치 바오로의 회심처럼 그의 의식세계를 점령해 버렸다. 새로운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전쟁은 히틀러를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었다.
1918년 11월,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중들이 거리로 나서 빌헤름 2세를 몰아내는 11월 혁명이 발생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한다. 당시 군 병원에 입원해 있던 히틀러는 항복 선언에 울분을 토했으며, 그 때 "독일을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위대한 독일을 회복하겠다"는 계시를 받는다. 이 계시는 ‘나의 투쟁’에 나오는 내용이다.
히틀러의 ‘해방과 회복’의 방법론에 드디어 유대인이 등장한다. 패전의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이 유대인의 농간이었다는 논리이다. 블러드 라이벌, 즉 전형적인 ‘피의 비방’이었다. 14세기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어 인구의 20% 정도가 죽었을 때도 유대인이 웃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당시 독일에서만 8000명 정도가 학살을 당했는데 바로 그런 개념의 비방이 당시 히틀러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에 횡횡했었다. 한 예로, 1930년대 일본 관동 대지진 때도 조선인이 일본인의 온갖 유언비어와 중상모략에 의해 수천 명이 학살당했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종전 후 패전국 독일은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다. 빌헤름 2세가 물러난 자리에 바이마르 초대 대통령 루덴도르프가 선출되어 왕정을 버리고 본격적인 공화정 시대를 열었지만 독일은 혼란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의 경제는 회복 불능 사태에 빠졌고 여러 가지 국가적 자존심을 해치는 조약 내용으로 공분을 사고 있었다. 조약 후 몇 년 동안 조약 무효 시위가 베를린과 뮌헨 등 대도시에서 연일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서 지루하겠지만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간략하게 짚어보고 가겠다. 첫 번째 영토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전 영토의 15%가 인접국에게 잘려 나갔다. 그중에 중요한 것은 폴란드와의 관계이다. 백여 년 전에 되찾은 일명 폴란드 회랑이라고 일컫는,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의 배경 도시로 유명한 단치히 지역을 폴란드로 반환한 것이다. 발트해와 접해있는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독일과 폴란드의 분쟁지역이었는데, 연합국이 패전국 독일의 책임을 물어 폴란드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독도를 두고 일본과 한국이 민족적 자존심을 걸고 다투듯이 영토는 국가 간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1939년 9월 1일 세계 2차 대전의 서막을 올린 것도 폴란드 침공이었다. 전쟁의 명분으로서 독일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범은 없었다.
두 번째는 군사력과 관련된 조항을 보면, 대포 5000문, 전투기 포함 비행기 2500대, 장갑차, 함선과 잠수함, 각종 무기를 연합군에 양도하는 내용이 있다. 그 외의 무기들도 분해하여 고철로 만들었다. 그리고 육해공군 합계 10만 명 이상 군 병력을 보유할 수 없다는 조항도 있다. 군대의 해체나 다름없었다.
세 번째는 독일인의 피부에 와 닿는 경제에 관한 조항이다. 1320억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보상금을 50여 년 할부로 연합군에게 납부를 해야 하고, 과학기술과 관련된 수많은 특허권을 포기하고, 관세도 포기하고, 연합군에 농산물을 공급해야 하고, 그리고 중요한 석탄 채굴권도 포기해야 하는 등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식민지 포기 조항이다. 독일제국의 팽창정책으로 획득한 아프리카의 카메룬, 르완다, 탄자니아, 토고 등과 오세아니아에 있는 파푸아뉴기니를 포기하는 내용이다.
과거에 있었던 7년 전쟁으로 맺은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하고 맺은 수차례의 파리 조약, 프랑스와 독일제국 전신인 프로이센의 보불전쟁으로 맺은 프랑크푸르트 조약 등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조약이 있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처럼 구체적이고 가혹한 조약은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 대중은 바이마르 정부가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연합군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그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며 울분을 토했다. 패전국의 설움을 톡톡히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가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반유대주의와 함께 선동의 단골 메뉴로 쓰일 정도로 그 조약은 대중적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천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할 만큼 전쟁의 피해는 유럽 국가 모두가 경악할 정도여서 패전 독일이 억울하더라도 거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1919년 종전 후의 패전 독일은 전쟁의 후폭풍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더구나 베르사유 조약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실업자가 속출하고, 물가는 것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고, 돈이 있어도 생필품을 구할 수 없었고, 석탄 채굴권을 빼앗겨 석탄 전쟁이 일어날 정도였고, 정치는 좌익과 우익의 극한 대립으로 거리에는 매일 정치 집회가 일어났고, 크고 작은 폭력이 다반사였고, 치안은 엉망이었고, 국가의 기강은 사라진 혼돈의 독일이었다. 그나마 전쟁이 독일 내에서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히틀러는 제대를 미루고 의용군 형태의 군에 남아 있었다. 제대를 하려고 해도 그는 갈 곳이 없었다. 다시 궁박한 거리의 화가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었다. 더구나 지금은 뮌헨이나 빈은 전쟁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의용군에서 시키는 어떠한 일이라도 개의치 않았다. 정의롭지 않고 비굴한 어떤 명령도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의용군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던 그에게 상관의 새로운 지시가 떨어졌다. 의용군 내에 확산되어 있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그 조직에 잠입하라는 지령이었다. 바로 프락치를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 히틀러에게 프락치든 스파이든 연연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색출한 공산주의자에게 사상교육을 하고 전향시키는 작업에도 동원되었다. 히틀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급자가 그의 언변술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자신의 말솜씨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실토한다. 히틀러 자신도 자신의 뛰어난 언변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삼류 화가로서의 재능만 가지고 있었다고 믿었던 그는 타인도 부러워하는 언변술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쟁은 그에게 의식의 대전환과 함께 대중을 선동하는 능력을 선사했던 것이다. 아니면 신의 장난이었는지 모른다.
그 후 히틀러는 정치 집단을 사찰하는 임무를 띠고 당시 정치 집회가 많이 열리던 맥주집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당신 독일은 맥주 국가답게 수많은 맥주집에서 아고라처럼 각양각색의 대중 정치 집회와 모임들이 열리고 있었다. 1919년 9월이었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의 전통적인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욱 극우적인 성향의 무언가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 그는 뮌헨의 어느 맥주집에서 열린 우파 성향의 정치 연설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뜻하지 않게 바우만이라는 교수의 연설 내용에 아니오라고 손을 들고 일어나 열띤 토론을 하게 된다.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이 맥주홀에 있던 독일노동자당 당수인 드렉슬러의 눈이 띠었고, 그의 놀라운 언변에 매료되어 그날 자신의 당에 가입할 것을 권유받는다. 그리고 다음 날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에 정식으로 가입한다. 바로 정치 세계에 처음 발을 드려 놓은 것이다. 그의 나이 30살 때였다. 홀로코스트에 이르는 광기의 불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독일 의용군을 제대하고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당세 확장에 열정을 쏟는다. 의용군 제대자들을 포섭하고 거리와 집회에서 찌라시를 돌리며 당원을 모집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의 언변은 60명밖에 안 되었던 당원수를 급격하게 늘리는 데 일조했다. 특히 당에 가입하고 몇 개월 지난 후 맥주집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그는 우리는 왜 유대인을 증오하는가라는 연설을 하는데, 그 연설은 그를 일약 아이돌급 스타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히틀러의 명성은 당시 정치 모임 장소였던 맥주집들을 통해 급속도록 퍼진다. 국가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에 굶주려 있던 정치 미아들이 그를 좇아 모여들었다.
그의 연설에는 마력이 있었다. 격정적인 그의 연설은 이성과 논리를 중요시하는 기존 정치인의 연설 방식을 압도하는 흡입력이 있었다. 전혀 새로운 방식의 대중 연설이었다. 군중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카리스마와 분노의 강약을 교묘하게 조절하는 격정적 연설은 바로 선동정치의 모범이었다. 기존의 정치적 행동양식을 허물어버리는 선동정치의 하이클래스를 히틀러가 보여준다. 지금 인터넷을 검색하면 히틀러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을 감상할 수 있다.
1920년 독일노동자당의 가입한 지 7개월 만에 60여 명이었던 당원 수는 2천 명으로 증가했고 그는 당의 핵심으로 성장한다. 이에 탄력을 받은 그는 당명을 바꾼다.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으로서 흔히 말하는 나치당이다. 광기의 서막이 올라간 것이다. 뮌헨의 허름한 맥주집에서 악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시작은 항상 미미하기 마련이다.
당시 독일노동자당을 뒤에서 지원하는 툴레라는 비밀결사 조직이 있었다. 툴레회는 국가사회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비밀 조직이었는데, 나치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조직을 확대하면서 그 강령을 흡수하여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반공주의, 반유대주의, 반민족주의,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신화화 등을 나치당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론적 근거 외에도 툴레회의 멤버였던 루돌프 헤스, 알프레도 로젠베르크, 디트리히 에카르트, 헤르만 괴링 등 상당수의 인적 자원도 나치당에 합류한다. 그들은 대게 국가사회주의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기득권층에 속한 부류였다. 히틀러와 같은 무산 계급과 괴링과 같은 유산계급이 결합한 폭력 지향적인 극우당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나치당의 코어가 되어 히틀러와 시작과 끝을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