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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Apr 01. 2019

위대한 독일의 탄생

히틀러와 대중의 광기

아인슈타인과 가우스와 라이프니치의 나라, 칸트와 헤겔과 니체의 나라, 괴테와 하이네와 헷세의 나라, 바흐와 베토벤과 브람스의 나라, 종교개혁을 이룩한 루터의 나라, 그리고 히틀러의 나라. 과학과 철학과 예술과 종교사를 선도해 왔던 독일이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광기의 블랙홀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경건한 마음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히틀러와 독일이 자행한 세계 2차 대전을 볼 때, 국민 개개인의 분노가 메시아적 선동가와 만나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핵폭탄급 광기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학습했다는 사실이다. 홀로코스트 같은 인종학살이 정상적인 사고로 가능하겠는가.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이 분노 앞에 무릎을 꿇는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종교와 인문학적 가치가 무용지물이 될 정도로 그들의 분노가 사우론급인지 아니면 월래부터 종교와 인문학은 인간 정신활동의 사치품에 불과한 것이었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대한 분노로 인해 역사는 본능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 왔다는 것이다.     


18세기 유럽은 해가지지 않는 영국과 짐이 곧 국가라고 설파한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양대 산맥을 구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프랑스가 18세기 유럽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시민에 의해 왕정이 무너진 인류사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비록 혁명의 성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정신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그 대변혁기에 나폴레옹이란 발군의 능력자가 나타나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수백 년 동안 견제와 싸움을 해오던 유럽은 나폴레옹으로 인해 힘의 균형이 크게 흔들렸다. 아마도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로 원정을 가지 않았다면 유럽은 장시간 프랑스에게 굴복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1806년 프로이센이라고 불리던 독일은 나폴레옹에게 철저히 짓밟혔으며, 프로이센을 비롯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위스 등이 속해 있던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연합군에 의해 쫓겨난 후 유럽에 힘의 공백기가 오고, 독일 연방이라는 복잡한 구조의 시대를 거쳐, 비스마르크라는 위대한 인물이 등장해 복잡하게 엉켜있던 프로이센 정국을 안정시키고 더 나아가 1871년 22개 군주국 등을 통합하여 독일제국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와 보불전쟁을 벌여 과거 나폴레옹에게 당했던 자존심을 되찾고 이를 계기로 강한 독일을 성립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드디어 하나의 독일이 유럽에 등장한 것이다.     


혁명가적 열정과 집념으로 독일제국을 건국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이웃 국가들에게 힘을 과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 간의 전쟁을 막는 평화 중재자 활약을 했으며, 내부로는 부국강병 정책에 몰두하여 유럽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는 기초를 다졌다. 1890년, 전임 왕 빌헤름 1세보다 욕망이 강했던 빌헤름 2세에 의해 팽을 당하기 전까지 독일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내실을 다지는 평화의 시대를 보냈다.     

비스마르크

하지만 팽창정책을 지양하고 균형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비스마르크가 제국주의를 주창하며 팽창정책을 신봉하던 신임 왕인 빌헤름 2세와의 권력 다툼에서 비스마르크는 패배하고 재상에서 물러난다. 이 당시 비스마르크가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지 묘비에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정적 비스마르크를 제거한 개혁 군주 빌헤름 2세는 제국주의 깃발을 들고 당시 유럽에 광풍이 불었던 식민지 사냥에 뛰어든다. 경제 성장을 한 단계 상승하기 위해서는 소비와 생산력의 측면에서 식민지 개발은 필수였다.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원칙에 따라 빌헤름 2세는 선발 국가인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의 견제를 무릅쓰고 식민지 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특히 마지막 식민지 사냥터인 아프리카에 집중하여 카메룬, 탄자니아, 르완다 등을 손에 넣은 데 성공했다. 당시 힘 좀 쓴다는 제국주의 국가 중에 일본만 하더라도 조선을 삼키려고 온갖 술수를 쓴 것을 보면 식민지 사냥은 당시 전 지구적으로 유행이었다.

     

국력이 급성장 한 독일은 당시 유럽 제1의 강국이었던 영국과 치열한 군비 경쟁을 한다. 가솔린, 디젤엔진을 처음 발명한 독일은 중공업 기계 분야에 집중하여 자동차와 항공기와 선박 등의 개발과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그런 현상은 미국에서 점화된 석유화학의 발전과 맞물려 개발 생산 속도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 특히 식민지 정책에 따른 선박 생산과 해군력 증대를 위한 군함 개발에 집중한다. 20세기 초 독일의 군비 지출은 해마다 10%씩 증가했다.    


유럽을 주도해온 영국과 프랑스는 수백 년 동안 앙숙으로 지내며 국력을 소비해 왔는데,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화 되면서 전쟁의 위험성을 깨달은 그들은 그 당시부터 항상 동맹의 입장을 취해 왔다. 하지만 독일은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보다 강력한 국가를 위해 팽창정책에 집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런 독일을 예의 주시하며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런 견제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독일은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유럽의 역사를 볼 때 힘의 균형은 전쟁과 평화의 중요한 바로미터가 되어왔다. 스페인이 강할 때 유럽은 스페인으로 인해 치도곤을 당했고, 영국이 상대적으로 강할 때도 시달렸으며, 가까운 프랑스도 나폴레옹에 의해 한바탕 뒤집어졌던 과거가 있다. 힘의 균형은 평화에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 고민의 결과가 현재 유럽이 EU이다.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그 당시부터 싹트고 있었다.    

빌헤름2세

하지만 유럽은 아리아인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독일에 의해 20세기 전반기를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보내게 된다. 힘쎈 깡패 한 명 때문에 온 동네가 쑥대밭이 된 것이다. 그것도 2번이나.


1914년 전운이 감돌던 유럽에 하나의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폭발한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산인 오스트리아는 슬라브계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에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역사적으로 민족의식이 강한 세르비아가 항상 눈에 가시였다. 오스트리아는 인접국인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사주해 자국 내에 있는 세르비아인을 포그롬과 비슷한 형태로 탄압을 했었다. 그런 험악한 분위기가 팽배하던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왕자인 페르디난트가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한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흑수단이라 불리는 극단주의 단체가 지원한 암살단에 의해 부인과 함께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로 인해 한 달 동안 치열한 외교전이 벌이지고 드디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이제 전쟁이라는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에 세르비아의 동맹국인 러시아가 동원령을 내렸고, 오스트리아의 형제국인 독일 제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곧바로 프랑스와 벨기에 한테도 선전포고를 하고 침공한다. 그리고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이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든다. 프랑스 나폴레옹 시절 이후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하던 유럽은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한 혹독한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상황은 100년 전보다 훨신 복잡해졌다. 바로 세계 1차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 1차 대전은 독가스라 불리는 화학무기가 처음등장한 전쟁이며, 당시 첨단 기술공학에 의해 만들어진 최신 무기들의 각축장이었다. 19세기 과학기술이 급성장하던 유럽과 뒤늦게 뛰어든 미국 등이 개발한 항공기, 잠수함, 군함, 장갑차, 트럭 등의 위력을 실전에서 실험하는 첫 번째 전쟁이었다. 그런 무거운 철강 제품을 움직이게 하는 고출력의 엔진 기술과 무엇보다 동력원인 석유화학의 발전이 무기의 능력을 극대화시켰다. 그런 신무기들의 위력은 상상외로 강력해서 각국의 당사자들도 놀랐다고 한다. 나폴레옹 때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전쟁이었다. 1000만 명 이상 사망한 숫자가 그것을 증명한다.    

바로 이 전쟁에 히틀러가 참전한다. 당신이 히틀러학을 전공한다면 바로 세계1차대전은 필수과목으로 수강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전쟁은 히틀러에게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현실 세계로 공간 이동하는 차원의 전환기적인 전쟁이었다. 신은 히틀러에게 인간의 분노가 초래한 결과를 시험하는 임무를 맡겼는지 모른다. 하여 그는 충실하게 그 임무를 완수했으리라.    


세계 1차 대전이 당시 유럽의 정세에서 필연이었듯이 히틀러의 탄생도 숙명이었는지 모른다. 유럽은 히틀러라는 괴물을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에이리언처럼 숙주의 배를 가르고 세상에 등장하리라는 것을 유럽은 알지 못했다. 악의 탄생은 그렇게 전쟁의 자궁에서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1889년 4월 독일과 접경 지역인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남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자수성가 한 세무공무원이었고 어머니 클라라 푈츠는 아버지의 두 번째 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 누나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누나의 딸과 결혼을 한 것이다. 굳이 히틀러와 어머니의 촌수를 따진다면 사촌이 된다. 어머니는 어머니이면서 사촌 누나뻘이 된다.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앙드레 지드도 사촌과 결혼한 것을 보면 당시 유럽에서는 근친결혼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동성애보다 근친결혼이 훨씬 더 관대했다. 근친결혼에 대한 윤리적인 관념이 개방적이었던 반면 유전학적인 문제의 심각성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또한 인간의 욕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독교적인 윤리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히틀러

먼 훗날 나타날 히틀러의 매우 독특한 성정과 폭력성과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을 보면 전형적인 조울증의 형태이며 그것은 근친결혼에 대한 유전학적인 문제에서 일차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종교와 이성의 시대에 불가사의한 악의 탄생은 그 괴물의 염색체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실마리를 풀 수 없다. 유전학적인 요소가 그의 자아와 초자아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클라라 푈츠

66살의 늙은 아버지는 히틀러가 15살 때 사망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했었다고 말하지만, 객관적인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의 폭력성(말과 폭행)이 빠지지 않는다. 히틀러의 폭력성의 원인을 아버지의 폭력성에서 추론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폭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부친의 알코올 중독이나 정신병적인 원인이 아니고서는 자식의 성격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은 과도한 논리이다. 아버지가 행한 폭력 정도로는 히틀러의 성격 형성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클라라 푈츠는 히틀러가 18살 때 암으로 사망한다. 문제는 어머니였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밝혔듯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슬픔을 주었다. 히틀러가 1945년 4월 권총 자살을 한 벙커에서 어머니의 사진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보면 어머니의 사랑은 끔찍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증언에 따르더라도 어머니의 히틀러 사랑은 마마보이 수준이었고, 그런 사랑을 히틀러는 당연시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누나 딸과 결혼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상적인 사랑으로 인한 결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촌도 아니고 3촌간의 결혼을 어느 누가 이해를 하겠는가. 더구나  나이 차이도 23살이다. 그 결혼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밟혀진 것은 없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약간의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인데 그렇다면 그 결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조금은 짐작은 할 수 있다. 들어내 놓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욕망들이 깊이 개입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클라라 푈츠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집착이었다. 상식적이지 않은 자식 사랑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낳은 자식 5명 중 3명을 여의고 2명이 생존했는데, 그중에 유일한 아들이 히틀러였기 때문에 히틀러에 대한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 지독한 사랑이 히틀러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히틀러는 평생동안 정부 관계로서의 여자와 동거를 했을 뿐 법적인 결혼을 거부한 것을 보면, 그런 특이한 행동 양태는 어머니에게서 도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히틀러의 성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여기서 잠깐 히틀러의 여성 편력에 대해 얘기하고 가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마지막 연인 에바 브라운도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연애 사건들이 많이 있다. 첫 번째 여인은 1923년 쿠데타 실패로 재판과 형무소 생활을 끝내고 잠시 시골에서 휴양을 하고 있을 때 만난 마리아 라이트였다. 10대인 그녀와 뜨거운 사랑을 빠져 있던 히틀러는 그녀의 청혼을 거절하고 대신 정부로서 자신 곁에 있어 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라이트는 그에 실망하여 히틀러와 헤어지고 자살을 시도한다. 10대 후반의 여자가 청혼을 하는 데, 남자는 이를 거절하고 정부로서 옆에 있어 줄 것을 요구하고, 이에 여자가 자살을 기도하고, 정말 정상적인 남녀 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두 번째 연애 사건은 대단히 엽기적이다. 배 다른 누나 앙겔라의 딸 겔리 라우발과 요즘 말로 썸을 탄 것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앙겔라와 딸 두 모녀가 히틀러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성장한 라우발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때 히틀러의 나이가 마흔이었고 라우발은 19살이었다. 아버지가 누나 딸과 결혼했듯이, 자신도 비록 배 다른 형제지만 조카딸에게 묘한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데자뷔였다.     

겔리 라우발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디까지 발전한 것인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히틀러가 라우발의 누드화를 그린 것을 보면 정상적인 외삼촌과 조카딸의 관계는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겉으로 드러난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히틀러는 라우발에게 로리타 성애적인 성향이 있었고 그것은 병적인 집착 증세로 나타났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에 의하면 이드가 초자아를 집어삼킨 결과물이다. 욕망은 윤리적 사회 통념보다 우월하여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그들이 관계는 당시 대중에게 노출되어 히틀러 정적들의 공격용 단골 메뉴가 된다. 히틀러가 조카에게 변태적인 방법으로 성적인 학대를 했다고 공격한 것이다. 당시 정치적으로 한창 뜨고 있던 히틀러에게 이 사건은 치명상을 입힐 정도는 아니지만 이미지 관리에 악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관계는 1931년 라우발의 의문의 권총 자살로 마감을 한다. 그녀의 나이 23살 때였다. 정설에 따르면, 히틀러가 라우발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착한 결과,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라우발이 자유를 찾아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 사건 후 히틀러는 자신도 자살하겠다는 행동을 보일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다. 바로 어머니의 죽음에서 보였던 절망감과 다르지 않았다. 라우발에게서 모성과 욕정을 함께 공존했는지 모른다. 물론 여기서 음모론이 빠질 수 없다. 히틀러에게 심한 폭행을 당했다든지, 히틀러의 아이를 임신했다든지, 자살 후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는지 하는 등의 설과 이로 인해 히틀러 측근이 살해했다는 음모론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황색 언론을 타고 이어졌다.    


히틀러의 측근 에른스트 한프스탕겔은 이렇게 증언한다. 라우발의 죽음은 혼탁한 정치 상황에 지친 히틀러의 마지막 안식처를 앗아간 사건이며 그로 인해 더 이상 이성적 사랑을 할 수 없는 불구자가 되었다. 에바 브라운은 부속물에 불과할 뿐이다. 아마도 라우발이 히틀러 옆에 더 오래 있었다면 히틀러의 잔혹함은 진화하지 않고 멈추었을 것이고 따라서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라우발의 죽음은 히틀러를 악마로 만드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 귀족 데이비드 미트포드 공작 가문의 넷째 딸인 유니티 미트포드와의 염문이다. 1933년 언니인 다이애나는 19살인 유니티와 함께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당대회에 참석한다. 아버지 데이비드 공작은 나치 옹호론자로서 히틀러와 교류를 하고 있었고, 그 친분에 따라 자신의 딸들을 당 대회에 참관시킨 것이다.     

오른쪽이 유니티 미트포드

유니티 미트포드는 그 당 대회에서 사자후를 토해내는 히틀러에게 매료되고 히틀러도 그녀를 완벽한 아리아인 여성이라고 칭송하며 둘 사이는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미트포드는 독일을 수시로 왕래하며 히틀러 옆을 지킨다. 둘 사이가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무렵 독일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미트포드의 행적을 종합해 보면 히틀러의 아이를 출산하다가 몸에 이상이 생겼고, 그 후유증으로 1946년 사망했다는 추측이 황색언론에 등장한다. 몇십 년 후에도 그에 대한 추적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져서 히틀러의 자식 소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히틀러의 유일한 자식에 대한 각종 서프라이즈의 주인공이 바로 유니티 미트포드였다.    

17살 에바 브라운

그 이외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바 브라운은 17살 때 히틀러 전속 사진사인 호프만의 주선으로 히틀러와 만난 후 33살 때 그와 함께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영화배우이면서 소련의 스파이었던 올가 체코바와 요세프 괴벨스의 아내인 마그다 괴벨스도 히틀러와 염문을 뿌렸다. 라이트, 라우발, 미트포드, 브라운의 공통점은 10대 때 히틀러와 처음 만났으며 자살과 의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건강한 10대 여자를 선호한 히틀러의 성적인 독특성은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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