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탐욕이 없다면 한낱 사바나에 어슬렁거리는 사자와 다를 게 없다. 직립보행을 하면서부터 인간은 식욕과 성욕에 이어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탐욕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탐욕은 보다 나은 삶의 향상을 위해 불을 만들고 돌을 쪼아 연장을 만들었으며 또한 사람을 죽이고 열등한 문명을 파괴하였고 결국 신의 섭리에 도전하는 위치에 까지 다다르게 했다.
혹자는 인간의 탐욕이 인류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2000여 년 전 부처와 예수는 그 탐욕은 내쳐야 할 괴물이라고 설파했다. 이미 2000년 전 탐욕의 폐단을 부처와 예수도 익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탐욕이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많이 파괴하였는지 그 실상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탐욕과 인간과의 싸움은 영원한 숙제인지 모른다.
군웅할거의 시대, 공자 장자 노자 등이 우주의 이치를 설파하던 시대, 그 현인들의 설파를 기록으로 남겨 사상의 르네상스를 연 백가쟁명의 시대, 관포지교 오월동주 와신상담 합종연횡 등 수많은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시대, 역사가는 그 시대를 춘추와 전국시대를 합친 춘추전국시대라 칭했다.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221년 약 550년 동안 지속되었다. 여기서 춘추전국시대 550년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집고 넘어가겠다. 당시 형식상 가장 상층의 권력자는 주나라 즉 동주의 천자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혀 실권이 없었고 제후라 불리는 영주들이 각자 왕이라 칭하고 지역을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주나라 초에는 정책적으로 땅을 왕족이나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제후들의 힘이 강해지자 스스로 왕이라 하였고, 그에 따라 천자의 권능이 약해지면서 중원이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바로 봉건제의 시작과 끝이었다. 춘추시대 초에 약 1000개 이상의 제후국들이 난무하다 춘추오패 즉 10개의 나라로 정리되었고, 기원전 400년 경 이후 다시 수많은 전쟁과 병탄 합병 등을 거쳐 전국칠웅의 시대가 200여 년 지속되었는데 그 시대를 전국시대라 한다. 그리고 그 두 시대를 합쳐 춘추전국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위 제 진 한 조 연 초 등 전국칠웅이 중국 대륙을 분할하여 지배하던 전국시절, 가장 변방인 서쪽 끝 척박한 땅을 지배하던 진나라의 소양왕이 56년 동안 재위하면서 부국강병에 매진하고 또한 책사인 범저의 원교근공 정책을 받아들여 진나라를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증손자인 진시황이 그 토대를 기반 삼아 10년의 기간을 거치며 나머지 6개국을 정복하여 천하를 평정한다. 기원전 220년 진시황 나이 39살 때였다. 13살에 장양왕의 뒤를 이어 진의 왕이 된 후 26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당시 개념으로는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천하는 주나라 천자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가 존재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였으며, 서로 이합집산 합종연횡하는 현상은 하늘의 이치였다. 바로 그런 중원의 패러다임을 깬 것이 진시황이었다.
천하를 제패한 진시황은 먼저 화폐와 문자와 도량형 등을 통일시켰다. 그리고 500년 이상 중원을 혼란하게 만들었던 봉건제를 없애고 군. 현제도를 도입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그 제도는 그 후 중국의 모든 왕조들의 기본적인 통치제도가 되었다. 그러한 제도들이 비록 진나라에서 빛을 보지 못했지만 한나라에서 그 제도를 이어받아 계승 발전시켰다. 초한지에서 보듯 항우를 제거한 유방이 진나라를 무너트리고 한나라를 세웠지만 진시황 때의 제도를 비토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유방 한고조의 현명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진나라와 법가에 대해 얘기하고 가겠다. 춘추전국시대는 유가, 도가, 묵가, 명가, 법가 등 제자백가 사상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진시황의 5대 조부인 효공(그 당시만 해도 진나라의 지도자를 왕이라 칭하지 않음) 시절 진나라는 변법주의자 상앙에 의해 처음으로 법가사상을 통치기반으로 삼아 법치국가를 만들었다. 약 100여 년 전부터 기반을 다져온 법가사상을 진시황이 이어받아 더욱 강고하게 다졌던 것이다.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통치철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통일 진나라의 생명이 20년도 가지 못했지만, 통일천하 된 대제국 하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모른다. 명검도 주인을 잘 만나야 명검으로서 진면목이 나타나는 법이다.
진시황이 통일전쟁을 벌이기 전, 법가사상에 심취해 있던 진시황은 어느 날 우연히 한비자가 지은 법가에 대한 서적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에 자신의 참모 중에 한비자와 인연이 있던 이사에게 명하여 그를 진나라로 영입하게 했다. 이사는 과거 순자의 문하에서 수학한 적이 있었고 그 동문 중에 한비자가 있었던 것이다. 동문수학한 동창이었다. 하여튼 이사는 한나라 왕족 출신인 한비자를 현란한 술수를 발휘한 끝에 진나라로 불러들여 진시황의 어전 앞에 앉혔다. 자신에게 감명을 주었던 학자를 마주한 진시황은 크게 만족을 하여 그를 자신의 참모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울지도 모른다고 염려한 이사는 그를 모함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한비자의 학문 수준이 자신보다 훨씬 우월하여 자신의 영달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진시황의 미래를 볼 때, 그 당시 한비자는 진시황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법치주의로 무장하게 한 원인 제공자인 것만큼은 주지의 사실이다.
진시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폭군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행정적인 부분에 들어가면 일 중독자처럼 업무에 대한 욕심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 뒷짐 지고 다니며 보고만 받은 게 아니라 하루에 120근 정도 되는 죽간, 그러니까 각 부처에서 올라오는 상당량의 행정 서류를 매일 밤늦도록 파악하고 결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CEO와 비교하자면 회사의 주요 사안을 임원한테 맡기지 않고 꼼꼼하게 직접 챙기는 스타일이었으며 또한 주위에서 피곤해하는 완벽주의자였다. 이런 스타일도 한비자가 주장한 ‘술’(법을 다스리는 방법)의 개념에 충실히 따른 결과인지 모른다. 좋게 말하면 나랏일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런 열정은 순행이라는 통치 행위에서 잘 나타난다. 순행이라 함은 왕이 전국의 군. 현을 순시하며 실정을 파악하는 행위인데, 진시황은 한번 나가면 1년이나 걸리는 순행을 제위 기간 10년 동안 5번을 나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위 기간 반을 궁궐 밖에서 보낸 것이다. 그런 통치 행위가 물론 왕의 열정이라고 보아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위에서 언급했듯 직접 챙기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는 일종의 편집증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결국은 마지막 순행에서 의문의 병에 걸려 객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제 본 얘기의 중심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진시황의 내면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인 조희, 즉 조태후에 대해서 알고 가야 한다. 조태후는 진시황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좀 심하게 표현하면 처음과 끝인지 모른다. 조태후로 대변되는 끝없는 음욕이 진시항의 악마적 탐욕을 잉태했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조희는 진나라 북동쪽에 있던 조나라 어느 귀족의 자녀였는데, 이유는 정확이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젊은 대상이었던 여불위의 애첩이었다고 한다. 다른 역사서나 야사에 의하면 기생 출신의 여불위 애첩이라는 설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은 다루지 않겠다.
하여튼 당시 지금으로 말하면 상장회사 대표이사쯤 되는 상당한 재력가였던 여불위는 어느 날 자신이 공들여 관리하던 자초라는 진나라 왕족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파티를 열었다. 당시 자초는 근접한 나라끼리 침범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서로 왕족 중에 한 명을 볼모로 두는 외교정책에 따라 조나라에 살고 있던 참이었다. 대상으로서 재력이 상당했던 여불위는 그런 자초에게 펀드를 들어 애지중지 관리하는 즉 지금으로 말하면 고품질의 스폰서를 자처한 것이었다. 사실 자초는 당시 진나라 효문황의 많은 서자 중 한 명에 불과해 신분상승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여불위의 무모한 베팅은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었다.
여불위는 (야사에는 의도를 가지고 조희를 자초에게 접근을 시켰다고도 하지만) 그 파티에서 조희에게 자초의 시중을 들게 했다. 미색이 출중했던 조희는 자초의 시선을 한순간 확 잡아버렸다. 조희의 미색에 빠진 자초는 술김에 여불위에게 조희를 자신에게 달라고 청한다. 아마도 당시 조희와 여불위의 관계를 몰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왕족이라 하더라도 더구나 볼모 신세인 처지에서 그런 무례한 짓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 청에 여불위는 기분이 나빴지만 순간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하여 거대한 운명 속으로 빠져든다. 만약 여불위가 거절을 했다면 중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훗날 자초와 조희에게서 낳은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그 당시 어찌 알았겠는가.
그리고 1년 후 조희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 사마천 사기의 여불위전에는 그 자식의 씨가 여불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 사실관계에 대한 물증은 없지만 그들 관계의 정황상 여불위가 조희와 관계를 맺은 후 자초와 만났다고 하면 충분한 개연성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사기의 여불위 아들 설은 역사가들이 너무 야사로 나간 것이라 하여 신뢰를 하지 않지만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후에 밝혀지지만, 그 근거로 전형적인 도화살을 가지고 있던 조희의 섹스 파트너가 여불위라는 것은 세상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둘은 변강쇠와 옹녀처럼 궁합이 딱 맞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에 대해 얘기하고 가겠다. 자초는 효문황의 첩의 아들로서 20여 명의 서자 중에서도 말단에 위치한 존재감 없는 왕족의 일원이었다. 조나라에 볼모로 간 것도 왕족에서 전혀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나라에서 운명적으로 여불위와 조희를 만나고 그러므로 해서 여불위의 눈물겨운 도움으로 효문왕의 정실부인 화양 부인의 양자로 들어간다. 후사를 보지 못했던 화양 부인은 여불위의 기획 설계한 계략에 넘어가 별 볼일 없던 자초를 양자로 삼는다. 여기까지 오는 데 수많은 일화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겠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초의 할아버지가 죽자 효문왕이 왕위에 오르고 자초는 태자가 된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진시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효문왕은 상중에 그러니까 왕위에 오른 3일 만에 돌연사하고 졸지에 자초가 진나라 왕위에 오른다.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없던 미미한 대군에 불과했던 자초가 아침에 눈을 더보니 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250년 진나라 30대 왕이며 바로 진시황의 아버지인 장양왕이다. 그리고 진시황이 10살 때였다.
힘들었던 조나라 시절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진나라에 와서 왕이 된 장양왕은 고작 3년 동안만 부귀영화를 누리고 급사한다. 그의 나이 35살이었다. 생각해보면 그의 아버지인 효문왕이 즉위 후 3일 만에 돌연사하고 장양왕도 3년 만에 불의의 객이 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들은 급사한 것일까. 지금처럼 교통사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쟁터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불치의 병이 있다는 기록도 없고, 최고의 음식과 보약과 명의 등으로 건강이 보장되어 있는 상황인데,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궁궐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탐욕의 화신들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은 역사에 극히 일부부만 모습을 드러내며 경우에 따라서는 모조리 땅속에 묻힌다. 여하튼, 이제 운명의 수레바퀴는 험난한 여정을 마치고 진시황까지 왔다. 기원전 247년 그의 나이 13살이었다.
이제 조희는 왕의 모후 즉 조태후가 된다. 나이 어린 왕을 두고 섭정을 해야 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 조나라 지방 몰락한 귀족의 자녀로서 여불위의 애첩에 불과했던 그녀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타고 가다보니 자초의 처가 되어 결국 모후의 자리까지 도달한 것이다. 조태후는 섭정의 상당한 부분을 여불위에게 맡겼다. 이미 가능성 0.1%였던 복권에 당첨되어 재상의 자리에 올라 있던 여불위는 그것도 모자라 섭정까지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여불위의 이런 놀라운 인생역정은 100여 년 후 사마천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기 열전 70편 중 여불위전이라는 한 챕터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처세술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그 둘은 어떤 사이인가. 이미 십수 년 전 그들은 연인관계였지 않은가. 여불위가 자초에 올인하면서 야망을 불태운 결과 둘은 헤어져야 했지만 이제 운명은 그들을 다시 은밀한 침소로 인도했다. 어린 왕을 지척에 두고 그들은 회포를 풀었고 그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여불위는 색욕이 정점에 올라있는 조태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어린 왕과 주위 환관들의 눈이 두려워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험하다고 판단한 여불위가 이제 정부 관계를 정리를 해야겠다는 이유도 없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조태후의 끝없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게 큰 이유였다고 한다.
이에 고민을 하던 여불위는 함양에서 유명한 노애라는 자의 소문을 듣게 된다. 노애라는 자는 당대의 가장 거대한 음경을 가진 소유자로서 여기서 입에 담지 못할 전설적인 풍설의 주인공이었다. 여불위는 자초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직감으로 모종의 계책을 세웠다.
여불위는 그런 노애에게 없는 죄를 씌워 잡아오게 한 후 회유를 하여 환관의 직을 주고 조태후의 침소로 드려 보냈다. 바로 위장취업이었다. 그러니까 거세하지 않고 내시의 직책을 주어 태후 거처에 마음대로 출입을 할 수 있게 술책을 부린 것이다. 여불위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였으니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태후도 노애의 거대한 음경에 반하여 여불위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제야 여불위는 조태후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