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립병원에서 퇴원한 빈센트는 로랭과 함께 노란집으로 돌아갔다. 로랭이 옆에 있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퇴원은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완전한 퇴원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림 작업은 노란집에서 하고 잠은 병원 입원실에서 잤다. 그림 그리는 활동이 정신병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치의가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테오가 의사에게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한 결과이기도 했다. 특히 부주치의 레에게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그럼에도 빈센트는 지독한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렸다. 각성된 채 밤을 새우다가, 잠을 잠깐 자는 순간엔 악몽이 그의 목을 죄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귀에 붕대 감은 자화상>과 <붕대 감은 귀와 파이프를 문 자화상> 두 점을 그렸다. 그 유명한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이 그런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완성된 것이다. 충격적인 자해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몰골이 송연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자신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이해를 구하는 것조차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찢겨진 의식의 흐름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그래도 건강이 회복되어 갔지만 결코 평안하지 않았다.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위안자였던 로랭이 그해 1월 21일 가족을 남겨주고 마르세이유로 승진 전근을 간 것이다. 로랭에게는 월급도 인상되고 승진이 되어 호사일 수 있지만 빈센트에게는 낭떠러지에 홀로 남겨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가 떠나자 공허해졌다.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의 정신회로는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친구가 사라지자 자연히 그는 말을 하지 않았고, 음식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은 주민들에겐,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귀를 자른 괴이한 존재로 각인되었는데 그의 행동이 예전 같지 않자 경계를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미친 사람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에 거리를 거닐 때면 동네 아이들이 그를 뒤쫓으며 돌을 던지기도 하고, 어느 때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노란집 일 층 유리창을 두드리고 도망가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공간에 있으면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직면하자 그는 2월 초 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흥분 상태에 빠져 직실할 것 같은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자진해서 시립병원 입원했다. 부주치의 레는 그런 빈센트를 독방에 격리시켰고, 2주 후에 상태가 호전되자 다시 노란집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시립병원에서 내린 질병명은 간질이나 정신분열증이었다. 발작 증상이 간혹 나타났기 때문에 강제로 정신병원이 입원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를 주민들은 빈센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미친 사람과 한 공간에서 함께 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인 빈센트를 강제적으로 몰아내기 위해 작당을 하기에 이르렀다. 30여 명이 서명한 빈센트 강제 퇴거 탄원서가 시청에 접수된 것이다. 이에 빈센트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내쫓으려는 주민들에게 실망한 빈센트는 그렇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어떻게 저항하겠는가. 어제의 이웃이 갑자기 돌변하여 자신을 내쫓으려는 것에 대해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탄원서를 심사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주민들은 그에게 엄청난 제약을 강요했다. 가령 유일한 낙인 담배도 피우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편지를 쓰는 것도 제약하였다. 아마도 로랭 대신 새로 온 우편배달부가 빈센트를 미친 사람 취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런 환경 속에서 빈센트는 다시 발작을 일으키며 병원 독방을 찾았고, 그리고 탄원서 심사가 가결되어 결국 그는 경찰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었다. 그가 당장 갈 수 있는 곳은 시립병원 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정신 장애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을 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발작 증세는 자신이 보아도 위험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주민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자신이 정성껏 가꾼 노란집을 이렇게 허무하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내면과도 같은 소중한 공간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미 승부는 나 있었다. 이미 노란집 주인은 집을 내놓고 얼마 전에 다른 사람과 임대 계약을 한 상태였다. 단지 임차인이 이사만 보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노란집은 폐쇄되어 경찰이 열어주어야만 출입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때 빈센트는 이렇게 아를에서 시달릴 바에야 정신병원에서 요양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떠나는 것이 현명했던 것이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후 실의에 빠져 시립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시냐크가 찾아왔다. 마르세이유로 가는 여정 가운데 테오의 요구로 아를을 방문한 것이다. 1년 만의 만남이었다. 사실 빈센트는 시냐크의 병문안 형식의 방문은 탐탁하지 않다고 테오에게 밝혔으나 이미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손쓸 방법은 없었다. 아무튼, 반갑게 맞이한 빈센트는 병원으로부터 외출 허가를 받아 시냐크를 데리고 노란집으로 갔다. 시냐크는 빈센트가 그동안 그린 작품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란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경찰이 노란집 현관문을 열어주어야 했는데, 경찰이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시냐크가 파리지엥 특유의 점잖은 부탁으로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노란집에서 빈센트는 시냐크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고, 이에 시냐크가 감동을 받자 그에게 <청어 두 마리가 있는 정물화>를 선물했다. 나이는 비록 자신보다 훨씬 어렸지만 명성이나 실력 면에서 시냐크가 월등했기 때문에 감히 자신의 작품을 내놓기 민망스러웠던 것이다. 사실 그는 매사에 그런 태도였다.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존감이 항상 부족하여 간혹 자기 작품을 칭찬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자신이 감동받았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이제 아를에서 생활하기는 불가능했다. 아쉽지만 자신의 혼이 묻혀있는 노란집을 포기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책이었다. 그렇다고 월래 종착지인 마르세이유로 무작정 갈 수도 없었다. 발작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발작이 왔을 때 곧바로 자신을 케어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장소는 정신병원이 유일했다. 자신의 발작증상이 질병 중에 하나라고 인식한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병의 치료라면 정신병원이라 해도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병원이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는 그에겐 배부른 소리였다. 발작 상황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후에 찾아오는 후유증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엄습해 오는 그 서늘한 느낌처럼 파손된 영혼이 한없이 침잠하고 있었던 것이다.
빈센트에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림 작업 외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일상생활에는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림만은 온전히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란집에서 쫓겨난 후 정상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아뜰리에는 없었다. 그것마저 없는 그로서는 하루하루가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빈센트의 호소에 주치의는 일종의 치료의 방편으로 병원 내에 작업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물론 데오도 주치의에게 편지를 보내 형의 뜻을 강력하게 피력했고 금전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었다. 당시 빈센트는 <아를 병원의 정원>과 봄을 주제로 과수원 풍경 연작을 그렸다.
시립병원엔 정신병동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까지 눈칫밥을 먹으며 병원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노란집에 보관되어 있던 가구들 때문에 거주하지도 않으면서 보관료 명목으로 매달 21프랑을 지급해야 하는 처지이기도 했다. 이에 부주치의 레는 자신의 아파트(레는 당시 병원 기숙사에서 기거했기 때문에)에 가서 살 것을 제안했는데 결국 작업 공간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때 살 목사가 빈센트를 도와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빈센트는 자신과 친하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는데 살 목사 만은 유일하게 초상화가 없다. 아무튼 살 목사는 테오와 연락을 취하며 빈센트의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그는 노란집에 있던 빈센트의 가구를 가르 카페에 3개월 18프랑에 보관하게끔 도와주었고, 무엇보다도 빈센트를 생 레미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추진했다. 빈센트의 발작이 지난 몇 개월 동안 여러 차례 반복되자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집중적으로 치료에 매진할 것을 빈센트에게 권했고 그도 이에 동의했다. 살 목사는 테오에게 생 레미 병원에 대한 팸플릿 같은 자료를 보내어 설득하였다. 3개월 예상에 월 100프랑이었다. 테오는 형이 웬만하면 여름에 퐁타방이나 파리에서 요양하든지, 아니면 남부 지방 적당한 곳에서 형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하숙집을 구해 안정을 찾을 수 있길 원했으나 빈센트의 상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빈센트는 아직 세상에 나가 홀로 살기에는 불안했던 것이다. 빈센트는 자신의 정신 건강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병원 입원을 결정하고 테오의 허락을 기다렸다. 그런 빈센트의 결정을 존중한 테오는 병원 측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건을 직접 문의를 하였고, 병원으로부터 환자의 상태를 보고 가능하면 외출과 그림 작업 등 환자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하겠노라는 답변을 받았다. 조 봉거와의 신혼생활에 경황이 없었던 테오는 아를에서 긴박하게 오가는 이런 서신에 일일이 답하며 최선을 다했고 혹시나 빈센트가 최악으로 치닫지 않을까 하며 노심초사했다. 사실 테오에게는 비용 문제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월급쟁이인 입장에서 두 집 살림을 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대단한 압박이었다. 그는 형을 위해서라면 항상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형이 마음 상할까 봐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금전적인 것 외에도 수시로 날아오는 장황한 편지를 다 읽고 답하는 그의 진심 어린 마음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헌신적 행위였다.
당시 빈센트는 수개월 동안 병원생활을 하면서 생각지도 않게 몸이 건강해졌는데 이를 이용해 프랑스 용병에 자원해 북아프리카로 가는 상상을 했다. 그는 몇 차례 이런 사실을 테오에게 넌지시 밝히고 정말 지원을 할 것처럼 진지하게 말했던 것이다. 테오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지 마라고 구박을 주었지만 사실 빈센트도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외인용병 지원은 하나의 상상적 도피처였는지 모른다. 테오와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비참한 현실 상황이 그의 내면을 천근만근 억눌렀으며, 그런 삶의 무게를 버거워한 일종의 이상향적 상상이었다. 그는 이제 삶에 지쳐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궁색한 삶이 이어져야 하는지, 포기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 또한 자신이 없었다.
1889년 5월 8일이었다. 빈센트는 뜨거웠던 태양을 뒤로하고 짧지만 강렬했던 애증의 흔적을 남긴 채 아를을 떠났다. 생 레미는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사설 정신병원이었는데 요양소 같은 곳이기도 했다. 공공 정신병원은 한번 입원하면 어지간해선 퇴원하기 힘들지만 사설 병원은 이보다 훨씬 유연하게 운영을 하고 있었다. 그날 빈센트는 살 목사와 함께 병원을 찾아 주치의를 만나 진료를 받았고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판정을 받은 후 작업할 수 있는 방과 입원실을 배정받았다. 주치의는 테오필 페롱이었다.
생 레미에서의 생활은 각오는 했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회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이기 때문에 괴성과 기벽 기행 등이 매일 벌어졌고, 그 소란이 사라지면 죽음과 같은 침묵이 병원에 감돌았다. 그리고 책도 없어 문학 작품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빈센트는 테오에게 ‘이곳에 오길 잘했다. 우선 이 요양소에 있는 다양한 광인들을 보니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는 것 같다. 그리고 차츰 광기를 어느 질병과 다름없는 하나의 질병으로 여기게 된 것 같다’라고 자신의 첫인상을 편지로 보냈다. 당시 빈센트는 병실 창살 밖으로 보이는 <밀밭>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자 빈센트는 병원에 적응할 수 있었다. 비록 다른 환자들의 광증으로 인해 매일 소란스럽고, 식사도 형편없어 빵과 수프로 만족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만족했다. 적어도 그랬다. 처음엔 병원 내의 정원과 샘물, 라일락, 붓꽃, 그리고 건물 등을 그렸다. 그리고 상태가 호전되자 주치의의 허락을 받고 밖으로 나가 풍경화를 그렸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보호자이자 간병인 트락뷕의 초상화와 주변 마을에 사는 농부들의 초상화도 화폭에 담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열정인가. 그의 영감은 새롭게 샘솟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는 ‘외부에서 생활하기엔 자신은 너무 훼손되었다고’ 테오에게 말할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다. 이에 느낌을 받은 빈센트는 주치의 페롱의 초상화를 그려주려고 했지만 그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빈센트가 그림 작업을 하는 것은 작품 활동이 아니라 치료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완곡하게 거절한 것이었다. 정신병 환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 그가 뒤에서 한 행동을 보면 빈센트의 그림 전체가 미학적으로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페롱은 그저 세속적인 의사에 불과했다.
아무튼 왕성하게 작품을 생산하던 빈센트는 6월 햇살 좋은 어느 날 보호자와 함께 생 레미 시내로 외출 나가 평화롭게 산책을 한다. 하지만 빈세트 주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누가 보아도 행색이 정상적이지 않는 빈세트를 보고 불편한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에 빈센트는 그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란 하늘을 보며 정신을 잃고 만다. 아직도 사회생활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발작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보호자 없이 홀로 사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항력이었다. 상대적으로 병원 생활이 그나마 위안을 주었다. 그는 당시 어느 날, 창살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보고 붓을 잡았다. 바로 그 작품이 <별이 빛나는 밤에>이다. 진청색 밤하늘엔 선명한 초승달과 수많은 별들이 불꽃놀이처럼 빛나고 있었고 그 중앙으로 그 모든 것을 삼킬 듯한 바람이 휘감고 있었다. 그 회오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밤하늘을 마치 시공간을 휘는 것처럼 표현한 것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지체해 있는 자신의 삶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출처 위키피아 / 별이 빛나는 밤에
상태가 호전되자 그는 외출 허가를 받아 보호자와 함께 아를에 갔다. 완성도와 상품성이 높다고 판단한 작품은 테오에게 보냈지만 아직 미진한 작품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아를 생활 마지막 몇 개월 동안 그린 작품이 아직도 가르 카페에 가구와 함께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미완성 작품을 회수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두 달 만에 가는 아를 여행은 불미스러웠던 기억을 조금이나마 일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살 목사는 멀리 휴가를 떠나 만날 수 없었고, 레 박사 역시 출타 중이어서 말동무를 만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노란집 주인 부인과 지누 부인과 그리고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몇몇 사람들을 만나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자신을 내쫓았던 사람들에 배해 비교적 자신에게 친절하고 관대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만남으로 해서 부정적이었던 아를을 이제 떨쳐버릴 수 있었다. 아마 홀가분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아를에서 가져온 그림 중에 손질하여 테오에게 보낸 작품이 <아를이 보이는 과수원> <아를 공원의 붉은 밤> 등이다.
하지만 아를에 갔다 온 후 그는 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들녘에서 풍경화를 그리다가 갑자기 목청이 상할 정도로 소리를 질렀고, 이에 놀란 트리뷕은 빈센트를 데리고 병원으로 급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빈센트는 병실에서 물감을 먹고, 테레빈유를 한통 다 마시는 돌발적인 행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경비원이 정신을 잃은 채 푸른 침을 흘리고 있는 빈센트를 발견하고 바로 위세척을 한 후에야 그는 겨우 살아났다. 이에 페롱 박사는 그에게 그림을 금지시켰다. 그렇게 빈센트는 병실에서 6주 동안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림 작업이 치료의 방법이 될 수도 있지만 과몰입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다. 그 과몰입은 정서적 안정을 취하게 하는 게 아니라 정신 쇠약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또한 영혼의 에너지를 갈아먹는 요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빈센트처럼 신경증이 있는 사람은 그런 현상이 유독 도드라지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굶주린 늑대처럼 그림을 목말라했다.
발작이 없었다면 누가보아도 호전되어 있어서 퇴원을 예견할 수 있었지만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빈센트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료에 대한 의지도 한풀 꺾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무심히 흘러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감금에서 해제되었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테오도 형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페롱 박사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었다.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열정이 불타오르지 않았다. 과몰입했다가 다시 발작 증세가 나타날까 봐 겁이 났다. 따라서 그림 그리는 행위는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고 광기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리고 테오에게 재정적으로 부담을 주는 자신에 대해서도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이어져야 하는가. 그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슬픔이 우리 영혼 속에 쌓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토로했다.
겨울이 다가오자 빈센트는 생 레미를 떠날 것을 고려했다.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병원을 떠나더라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에 대한 희망이 가슴을 두드렸다. 물론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두려워하면 영원히 병원을 떠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빈센트의 이런 제안에 테오도 적극 찬성했다. 북 프랑스나 브뤼셀 근처가 생각했던 이주지였다.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색채 또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이제 북쪽으로 가면 이런 태양과 색감은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아무튼 빈센트의 의향을 적극 수용한 테오는 피사로를 만나 빈센트의 입장을 설명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피사로도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는 과거 세잔과 같은 가난한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돌보아주었던 경력이 있어서 항상 그의 주변에는 도움을 청하는 화가들이 많았고 대표적인 화가가 고갱이었다. 하지만 피사로는 찬성을 했지만 그의 부인은 빈센트의 정신병력을 의심하여 먼저 피사로의 절친인 가셰 박사에게 정신 감정을 받아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일견 이런 조건도 타당성이 없지 않았다. 이에 빈센트는 다시 한번 고민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좀 더 치료에 매진한 후 퇴원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빈센트가 정신병원에서 기약 없이 투병생활을 하고 있을 때, 프랑스 화단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었다. 1889년 11월 말경이었다. 브뤼셀에서 열린 20인 전에 초대된 그는 <해 뜨는 밀밭> <꽃이 핀 과수원> <해바라기> 2점, <담쟁이덩굴> <아를의 붉은 포도밭> 등을 출품하였다. 이 작품들은 일부 평론가나 매니아 층의 관심을 받았고, 많지는 않았지만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아마추어 평론가인 로제는 테오의 집을 방문하여 빈센트의 작품을 보고 광팬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주류세계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동안 테오가 꾸준하게 빈센트의 작품을 화랑 곳곳에 전시를 한 결과였다. 비록 금방 그림을 사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런 관심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었다. 프랑스 남부에서 은둔 화가로 살아가는 빈센트를 파리에서 누가 알겠는가. 제2의 세잔은 세잔이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빈센트는 그와 비견될 수 없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아무튼 전시회에서 이목을 끈 결과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 화가 외젠 보흐의 여동생 아나 보흐가 400프랑에 구입을 한다. 제대로 된 첫 판매였다. 파리 시절 10점을 1프랑에 팔았던 모욕적인 순간이 떠올랐다. 그 수치스러운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프랑스에서 빈센트에 대한 존재가 회자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있었다. 호전되는가 싶었던 병세는 그해 크리스마스에 다시 재발되었다. 상태는 심각하지 않아 금방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언제 터질지 모르는 발작 요인은 암세포처럼 그의 머리에 서식하고 있었다. 1년 전이었다. 고갱과 죽일 듯이 싸우고 귀를 자른 사건은 벌써 1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 끔찍했던 시간이 기억되지는 않았지만 결과로 기억되는 시간은 그를 다시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 후 5번이나 나타났던 격렬한 발작은 언제 또다시 어떤 형태로 폭발할지 매일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불안함이 그를 점점 더 깊이 침몰시키고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그의 의식을 지배하여 목을 조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생 레미 생활에 만족했지만, 이제는 먹는 것 외에는 하는 게 없는 환자들과 섞여 살다 보니 정말 미칠 것 같은 착각이 빠지기고 하고, 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망실이었다. 특히 자신의 그림을 보고 때론 정상적인 정신으로 그린 작품이 아닌 것 같은 섬망 증상을 보이기도 하다가 잠시 후 사실을 자각하고는 했다. 자신이 보아도 미친 그림이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그런 객관화는 오히려 그가 정상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1890년 1월은 빈센트에 대한 평론이 처음으로 언론에 등장한 기념비적인 날이다. 메르퀴를 드 프랑스지에 시인이며 미술평론가인 가브리엘 오리에의 비평문이 실렸던 것이다. 그는 말라르메와 더불어 폴 베를렌의 뒤를 잇는 상징주의 시인이었으며 아직도 25살에 불과한 예술적 혁명주의자였다. 그는 빈센트는 물론 고갱 같은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대변자로서 프랑스의 보수파와 싸우고 있었다, 비록 2년 후 발진티프스에 감염되어 요절하지만 당시까지 그는 천재성을 발휘하며 괄목할 만한 작가 활동을 한다. 그의 비평문을 요약하면, ‘표현의 격렬, 사물의 특성에 대한 긍정과 단순화와 태양을 정면으로 보는 오만, 데생 및 색깔의 격렬한 푸가, 난폭하고 때론 진솔하리만치 섬세하고 강력한 존재, 어떤 대담한 자의 모습이 드러낸다. 광란에 가까운 과도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인 같은 존재가 보이고, 자신의 용암을 예술의 모든 골짜기로 흘러들게 하는 들끓는 뇌가 있고, 때로는 숭고하고 때론 그로데스트 한, 병적으로 소름 끼치는 미친 재능이 있다. 너무나 독창적이고 외로이 있는, 이 순종의 강건한 예술가, 거인의 거친 손, 히스테릭한 여성의 신경을 가진, 계시받은 자의 영혼을 가지 예술가,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부르주아 정신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동시에 너무나 섬세하다. 아주 예술가적인 예술가나 행복한 하층민들에게서나 온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오리에의 비평은 빈센트를 어떤 형태로든 한 번도 접하지 않고 오직 작품으로 직관만 한 상태에서 나온 글인데, 정말 실재 빈센트라는 작가에 대해 명확학게 꿰뚫고 있어서 그의 천재적 감수성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태양을 정면으로 보는 오만이라는 문장은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
당시 프랑스 화단에게 오리에의 위치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단에 빈세트의 이름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고무적이 아닐 수 없었다. 희망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세트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화가로서 위안을 받는 것보다 자신의 작품이 많이 팔려 테오에게 진 빚을 갚는 게 우선이었다. 10여 년 동안 자신을 뒷바라지 한 테오의 은혜를 묻어둔 채 무력하게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자신에게도 비겁한 짓이었다.
아무튼 항상 진지했던 빈센트는 오리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감사의 표현을 짧게 한 후, 자신에 대한 평가에 앞서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몽티셀리를 먼저 연구한 후 비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귀에 피가 나도록 길게 설파했고, 또한 도덕적 결함이 있지만 고갱도 주목해야 하는 화가이기에 그에 대한 비평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고 의견을 제시한다. 자신의 미학적 계보가 몽티셀리에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세계를 엉망으로 만든 고갱에 대한 지독한 연민도 여전히 그의 내면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빈센트의 이런 언급 때문인지 모르지만, 오베르는 마지막까지 고갱을 포기하지 않고 지원사격을 하였다.
하지만 빈센트의 뇌에서는 또다시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1월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며칠 전 아를에 가서 독감에 걸려 앓아누워 있던 지누 부인을 위로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어디에 갔다 왔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고, 아를에서 가져온 자신의 그림을 잊어버린 것은 물론이고,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벽난로 옆 숯가루 속에 뒹굴고, 결국 테렌벤유와 물감과 그리고 램프용 기름을 먹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심각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 솟구쳤고 혼수상태를 수반한 환각과 야맹증에 시달렸다. 그런 증상은 2달 동안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그의 심신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발작의 원인은 아를이었다. 지난번에도 아를에 갔다 온 후 발작이 일어났었는데 이번에도 그런 것을 보면 아를은 그의 정신회로에 버그를 일으키는 원인인 것만큼은 숨길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광기를 숨기고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과 그에 고양되어 있던 치명적인 영감과 그리고 고갱과의 비극적 결말 등이 혼재되어 발작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인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아를의 태양은 메르쏘의 태양과 닮았다. 오랑의 태양 때문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한 사내에게 권총을 발사했듯이 빈센트도 아를의 태양 때문에 자신의 영혼에 총알을 발사했다. 그렇게 빈센트는 항상 발작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그 불안함은 우울 증세를 악화시켰다.
그즈음 브리타뉴에 살던 고갱한테서 편지가 왔다. 인생은 매우 길고 슬프다라고 시작한 편지는, 자신은 매일 돈이 시달리고 있고, 더구나 코펜하겐에 있는 아들 장 르네가 3층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 재정적으로 더욱 어려워졌고, 이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통킨으로 가기 위해 고위관료에게 압력을 넣고 있고, 마지막으로 빈센트가 잘 아는 드 한은 아직도 자신과 함께 있으며 요즘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고 자신의 근황을 알렸다. 빈센트는 이 편지의 답장에서 자신은 아를에 갔다 온 후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노라고 토로했다. 고갱의 편지는 2개월 후 다시 온다. 1890년 3월 19일 파리에서 테오가 주관한 앙데팡당 전시회에 빈센트의 작품 10점이 전시되었는데, 당시 그 전시회에 고갱도 참가하여 빈센트의 작품을 보고 편지를 쓴 것이었다. 그 전시회는 빈센트를 비롯해 쇠라, 기요맹, 로트랙, 고갱 같은 신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프랑스 대통령도 관람할 정도로 성황이었다. 당초 빈센트는 전시회에 참여 작가로서 당연히 초대장을 받은 상황이었지만 그의 병세가 악화된 관계로 취소된 상황이었다. 고갱은 편지에서 당신의 작품이 가장 인기가 많았으며 이번 전시회의 프리모 우오모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테오는 전시회가 끝난 후 피사로의 주선으로 폴 페르디낭 가셰 박사를 만나 형의 정신병 증세에 대해 상당을 했다. 이에 가셰 박사는 치료가 가능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희망을 가진 테오는 생 레미의 페롱 박사에게 퇴원을 해도 되는지 타전을 했지만 좀 더 두고 보아야 한다는 소견을 받았다. 아직 병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처음엔 3개월 정도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퇴원하기로 했으나 그 시점마다 발작이 일어나곤 했었다. 빈센트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심지어 오리에가 자신에 대해 호평하는 것도 부담이 되어 더 이상 그런 글을 쓰지 않기를 원했다. 그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은 너무 슬픔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읽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어떤 돌파구가 필요했다. 생 레미에 계속 있다고 해서 호전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다른 방법이 절실했다.
그리하여 그해 5월 빈센트는 파리로 가기로 결정했다. 페롱 박사는 아직 퇴원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지만 빈센트는 자신을 믿었다. 그것만이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결정이라고 확신했다. 그 결정 후 빈센트는 페롱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자신의 작품 여러 점을 선물했다. 그 뒤 일화에 의하면, 빈센트에게 받은 그림은 페롱의 아들이 사용하던 소총 사격 표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어느 사진사에게 전해져 원그림을 긁어내고 재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 무례한 행태는 아를 시립병원 부주치의 레에게서도 나타난다. 레는 빈센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관하지 않고 버리긴 아까웠던지 다른 사람 한데 그냥 주었던 것이다. 빈센트 사후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전기 작가들의 인터뷰가 쇄도하였을 때 레는 이런 사실을 숨기고 좋은 관계만을 증언하였다. 이런 의사들의 위선은 빈센트의 작품은 작품 자체로서 마음에 들기 이전에, 정신병자가 그린 작품이라는 편견에 매몰된 결과였다. 그런 사실을 당시 유리병처럼 예민했던 빈센트가 알았다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5. 오베르
생 레미 정신요양소에 1년 동안 입원해 있었지만 더 이상 희망을 보지 못한 빈센트는 1890년 5월 17일 그곳 생활을 청산하고 파리로 떠났다. 당초 목적지는 가셰 박사가 사는 오베르였는데 중간에 잠시 파리에 들러 테오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빈센트는 그 집에 며칠 머물렀다. 그는 테오의 아내 요한나를 그때 처음 대면했다. 언제나 관념 속에만 있던 그녀였다.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그는 항상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나는 처음엔 그를 경계를 했지만,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미소를 짓는 그를 금방 좋아했다. 훗날 그녀는 ‘어깨가 넓고 튼튼한 남자’라고 그에 대한 첫인상을 밝혔고 오히려 테오보다 건강해 보였다고 했다. 사실 당시에 테오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아무튼 빈센트는 자신의 그림이 걸려있는 테오의 거실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보낸 거의 모든 작품이 그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삶을 버리고 영혼을 갈아 만든 그의 작품은 아직도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셰 박사는 ‘우울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쓴 나름 능력과 평판이 좋은 정신과 전문의였다. 그리고 그런 정통 의학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는 유사 치료에도 관심이 많아 전기 요법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와 사별한 후 홀로 19살의 딸과 18살 아들과 함께 살면서 저택에서 정신과 진료 행위도 하고 있었다. 그의 저택에는 개과 고양이를 비룻한 많은 동물들이 사람과 함께 섞여 살았고, 무엇보다도 모네, 르느와르, 기요맹, 세잔, 피사로 같은 당대 최고의 미술품들이 저택 곳곳에 어지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는 미술 애호가이자 아마추어 화가였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주의자였다.
빈센트는 테오와 함께 파리에서 3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오베르로 가서 가셰 박사를 만나 첫 진료를 받았다. 상담은 희망적이었다, 빈센트의 상태를 확인한 박사는 이곳에 머물며 치료를 받으면 가까운 시일 내에 완치가 될 것이라고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그런 전망은 가셰 특유의 낙관론적인 성향에 편승한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플라세보 효과처럼 치료에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빈센트는 박사와의 첫 만남에서 박사가 신경증 환자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테오에게 쓴 편지를 보면 적어도 자기만큼이나 박사도 심각하다고 전했고 계속 이런 견지를 유지한다. 정신질환자를 상대하다 보면 그에 맞추어 대화하기 마련인데 그런 박사의 언행을 보고 자신과 비교한 것은 빈센트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환자와 공감을 형성하다 보면 환자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빈센트는 오베르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가셰의 주선으로 그의 집과 가까운 곳에 하숙집을 얻었다. 하루에 3.5프랑이었다. 햇볕이 잘 들지 않은 다락방엔 침대와 의자와 탁자가 단출하게 놓여 있었다. 집주인 귀스타프 라브는 빈센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주인의 큰딸도 빈센트의 몰골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고, 특히 빈센트는 막내딸을 매일 다락방으로 불러 모래 사람을 그려주고는 했다고 한다. 가족의 향기가 진하게 빈센트의 텅 빈 내면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환경 요법인지 모른다. 가셰 박사가 치료의 목적으로 라브의 집을 주선했다는 뜻이다. 삭막한 정신병원에서 1년 동안 생활했기 때문에 우선은 그의 불안한 정서를 안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 생활과 병행해서 가셰는 빈센트를 자신의 집으로 자주 초대해 함께 식사 시간을 만들기도 했고, 빈세트의 작업 공간도 제공하며 미술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도 나누었다. 그리고 자신과 친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행위가 하나의 인간관계의 표현처럼 행동화되어 있던 빈센트는 박사에게 초상화 의향을 구했고 이에 흔쾌히 응낙했다. 생 레미의 페롱 박사는 빈센트의 이런 의도를 무시했지만 가셰 박사는 가식 없이 받아준 것이었다. 그만큼 환자를 존중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튼 그와 더불어 빈센트는 자신의 병이 일종의 남쪽의 병으로 진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베르의 환경이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사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이런 방법은 치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출처 위키피아 / 오베르 교회
오베르 지역은 아를이 있던 프로방스 지역처럼 강열한 태양은 없었지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다. 빈센트는 ‘엄숙하게 아름다운 곳’ 이라고 표현했다. 그에게 또 다른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이다. 그는 솟구치는 영감의 에너지에 다시 한번 자신을 맡겼다. 그것은 마지막 불꽃이었다. 마지막 2개월 동안의 창작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는 오베르에서 70일 동안 80점의 작품을 생산했다. 거의 하루에 1점 이상이었다. 그중에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비룻한 20점의 밀밭 연작과 <오베르 교회>를 포함한 39점의 오베르 마을의 다양한 풍경화와 그리고 <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포함한 12점의 초상화 등이 있다. 이런 과몰입은 아를에서의 경우처럼 작품 생산에는 득이 될지 모르지만 항상 상대적으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그림은 숙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창작 에너지에 블랙홀처럼 자신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간다 해도 그것이 어떤 부작용을 낳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간절히 원했는지 모른다. 나를 불사르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빈센트의 상태는 처음 예상과 달리 빠르게 호전되었다. 오베르에 온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가셰 박사는 완치되었다고 테오에게 통보했다. 박사 특유의 낙관적 성향으로 인해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지만 그쪽 세계에서는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에 신뢰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사실 빈센트의 말마따나 남쪽 병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일상의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튼 가셰 박사는 테오 가족과 빈센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완치 기념 만찬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빈센트는 처음으로 행복한 시간을 즐겼다. 멋진 오후였다. 마지막 만찬처럼.
그리고 그래 6월 28일, 일주일 전 브리타뉴에 있던 고갱에서 편지를 썼는데 그날 고갱에게서 답장이 왔다. 드 한과 함께 자신이 과거 살았던 퐁타방에 갔다 오느라 편지를 늦게 보았노라고 밝힌 그는 나는 여전히 마다가스카르에 가는 꿈을 꾸고 있으며, 당신도 오베르에서 열정적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건강을 위해 너무 무리하지 말 것을 당부했고, 빈센트가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이 사는 브리타뉴로 조만간 찾아가겠노라고 했는데, 이에 고갱은 당신이 오는 것은 환영하지만 여기는 퐁타방하고 달리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는 깡촌이어서 편의시설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당연히 병원도 없어 불편하다고 응했고, 더구나 9월 초에 드 한이 네덜란드로 떠나면 나도 마다가스카르로 가기 위해 여길 떠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이 이렇게 썼다. ‘나는 앞으로 나홀로 가족도 없이 버림받은 존재로 살아가려 한다. 그래서 숲 속의 고독은 미래의 나에게 새롭고 거의 꿈꾸어 오던 천국처럼 보인다. 야만인은 야만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마침내 한 번 쓴 운명은 뒤집어질 수 없다.’
당시 테오는 구필 화랑의 오너인 레옹 부소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결국은 돈이었다. 빈센트에게 지급되던 생활비에 더해 이제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생겼으니 당연히 전보다 많은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의 경력을 보았을 때도 급여 인상은 정당성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소는 어느 정도는 올려줄 수 있지만 테오가 요구하는 만큼 인상시켜 줄 수는 없다고 밝혔다. 부소도 테오에게 불만이 많았다. 인상주의 작품을 선호하는 것은 알겠지만 고갱 같은 아방가르드 성향의 작품도 구매하는 것은 회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을 지시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거듭 된 회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테오는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였으며, 부소는 당연히 테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테오는 독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파리 미술계에서 10여 년 동안 쌓은 경력이면 독립을 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테오의 결정에 아내인 봉거는 내심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야생으로 나가는 것은 미래가 불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테오는 빈센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동안 정신적으로 몹시 힘들었던 형과 함께 며칠간 보내며 위로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고 그리고 파리의 옛 친구들과도 회포를 푸는 자리도 마련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1890년 7월 6일이었다. 두 달 전 오베르로 가기 전에 파리의 테오 집에 왔을 때는 아직 정신 질환의 여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완쾌되어 자신 있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테오의 아파트엔 첫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반가운 얼굴인 베르나르와 로트랙이 찾아와 진한 우정을 확인했고, 편지 왕래만 했던 오리에도 방문하여 빈센트와 첫 대면을 하였다. 그 외에도 파리시절 자신과 친하게 지냈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빈세트를 격려해 주었다. 기요맹도 온다고 했지만 멀리 있어서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친구들의 우정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받을 만했지만 그는 아직 깊은 마음의 상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해로 침잠하던 그 무거운 마음은 그리 쉽게 수면 가까이 올라올 수 없었는지 모른다. 생 레미의 참담했던 발작의 기억과 2년 전 크리스마스 사건은 아직도 그의 내면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그는 외로웠다. 친한 친구들을 만나더라도 한편에는 늘 외로움이 그를 꼭 죄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친구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사실 집안의 공기는 첫날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무언가 긴장감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요하나 봉거는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우유를 먹였는데 이것이 탈이 나서 아이가 매일 울고 수시로 병원에 다니는 상황이었다. 당시는 유아 사망률이 높아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부모의 걱정은 태산 같던 시절이었다. 이에 봉거는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테오의 미래도 걱정되었는데 이는 집안의 경제적인 측면과도 맞물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 살림을 하는 여자는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런 문제로 테오와 봉거는 빈센트 앞에서 다투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도 모른 채 빈센트는 자신의 작품을 보관하기엔 이 집이 협소하니 넓은 데로 이사를 갔으면 하고 테오에게 말했고, 또한 이번 가족 여름휴가를 오베르에서 보내면 어떠냐고 제의했다. 하지만 봉거는 빈센트의 요구를 쌀쌀맞게 거절하였다. 예전 같지 않게 다소 도발적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네덜란드에 있는 친정으로 휴가를 가겠노라고 덧붙였다.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라 테오도 말릴 수 없었다. 빈센트는 이런 봉거의 태도에 마음이 상했다. 이에 빈센트는 기요맹이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오베르로 떠났다. 그의 마음은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격지심도 한 몫했다. 테오 식구를 힘들게 만든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피해의식이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빈센트의 현재 정신 상태는 아직 다소 짜증스러운 봉거의 말을 소화할 수 있는 형편이 되어 있지 않았다. 테오는 이렇게 마음이 상한 채 오베르에 간 빈센트에게 50프랑을 동봉해서 보낸 편지에서 봉거가 요즘 위에서 얘기한 문제로 인해 심기가 불편하니 이해를 구하노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치 고부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남편처럼 말이다.
빈센트는 오베르에 온 며칠 후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이곳에 돌아와서도 계속 무척이나 슬펐고, 너를 위협하는 문제가 역시 나를 내리 누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기분을 바꿔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 삶의 뿌리에서부터 위협받고 있으니 걸음조차 비틀거릴 수밖에. 네가 나를 부담스러운 존재로 느낄까 두려웠다.’(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김) 그리고 그는 붓을 들기 조차 힘들지만 극한의 외로움과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밀밭> 시리즈를 그리겠노라고 했다. 그는 '극한의 외로움'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상대적으로 밝은 <도비니의 정원>을 그리겠노라고 했다. 빈센트에게서 당시 우울증과 조증이 교체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건드리면 금방 깨질 것 같은 얇은 유리잔처럼 심약했다. 비록 발작 증세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의 영혼은 무너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향해 화구들 둘러매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그곳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울 것이다. 당시 그는 밀밭 연작과 도비니 정원 작품에 모든 것을 걸고 몰입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림이 유일했고, 또한 그것만이 테오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이었다. 그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너무 늙어서 다시 출발하거나 다른 어떤 것을 바랄 수 없고, 그런 희망은 나를 떠난 지 오래고,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남겨둔 채로.’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두서없이 여러 가지 얘기를 한 후 자신의 그림 구상에 대해 열변을 토해낸다. 고갱의 그림을 호평하고, 화가 조합의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물감 비용을 아끼기 위한 방편을 설명한 후 그리고 <도비니 정원>에 대해 본편에서 못다 한 얘기를 추신에서 스케치까지 그려 넣으며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전경에는 녹색과 분홍색 풀이 있고, 왼쪽에는 녹색과 라일락 덤불, 그리고 희끄무레한 잎이 있는 식물 줄기가 있다. 중앙에는 장미꽃 침대가 있다. 오른쪽에는 장애물과 벽이 있고, 벽 위에는 보라색 단풍이 있는 개암나무가 있다. 그런 다음 라일락 울타리, 둥근 노란색 라임 나무가 늘어서 있다. 배경에는 집 자체가 있고, 분홍색 타일로 된 지붕이 있다. 벤치와 의자 3개, 노란색 모자를 쓴 어두운 인물, 그리고 전경에 검은 고양이가 있다. 하늘색 연녹색... ’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는 가운데 그는 눈물겹도록 자신의 그림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공허한 외침이었다. 아니면 이 세상에 퍼붓는 마지막 절규였는지 모른다. 그래 정말 절규였는지 모른다. 당시 독립하여 성공을 꿈꾸고 있던 테오는 초심을 버리고 대중성을 지향하고 있었으며 이에 빈센트의 심기는 불편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대중성이 없는 자신의 작품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실패자인 것 같다.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아무래도 그것이 내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 더는 변하지 않을 운명인 것 같다.’
그렇게 빈센트는 떠났다. 1890년 7월 27일이었다. ‘극한의 외로움’과 슬픔이 이글거리는 <밀밭>을 그리던 그는 까마귀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복부에 방아쇠를 당겼고, 이틀 후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베르나르와 탕기 영감이 달려왔고, 피사로의 아들 루시앙과 고갱의 제자 샤를 라발 등 빈센트와 우정을 나누었던 2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하여 조촐한 장례식을 치른 후, 그렇게 그는 오베르 시립묘지에 묻혔다. 처음엔 프랑스 정통 관례에 따라 장례미사를 하려고 했으나 성당으로부터 자살이라는 이유로 미사를 거부당했던 것이다. 베르나르는 그 장례식 장면을 그림으로 남겨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빈센트의 품속에서 테오에게 보내려고 했던 편지가 나왔다. 붙이지 못했던 그 편지는 마치 유서와 같았다. 며칠 전에 쓴 편지였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느낌이 든다.’라고 시작한 편지는 마지막에 이렇게 끝난다. ‘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렸다. 그런 건 좋다. 하지만 내가 아는 너는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꾼이 아니다. 네 입장을 정하고 진정으로 사랍답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도대체 넌 뭘 바라는 것이냐?’ 성공을 위해 초심을 잃어가는 테오를 보고, 또한 그보다 먼 자신을 보고, 자신의 실존적 존재가 너무나 무력했다는 것을 절감했는지 모른다. 그 무력감은 삶의 희망마저 묵살시켰는지 모른다. 짓누르는 절망을 움켜쥐고 그는 밀밭 앞에 앉아 검푸른 하늘 멀리 그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베르나르 작 / 반 고흐의 장례식
빈센트는 입을 다물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현재도 타살이냐 자살이냐를 두고 팽팽히 맞서고 있다. 타살의 논리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음악과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부잣집 이웃 가스통 세크레탕이란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빈센트를 존경하며 따랐지만 반대로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녔던 그의 동생 르네는 오히려 빈센트를 이유도 없이 괴롭히고는 했었다. 빈센트는 18살에 불과한 르네의 동네북이었다. 그러던 7월 27일, 르네는 밀밭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빈센트를 발견하고 다시 찝쩍거리기 시작했고 이에 빈센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여 싸움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때 르네는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권총으로 빈센트의 복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 권총은 월래 빈센트의 하숙집 주인인 라부의 것이었는데 르네가 사냥을 한다면서 빌려간 것이었다. 아무튼 총상을 입은 빈센트는 배를 움켜쥐고 두 시간 동안 걸어서 하숙집으로 왔다. 그것이 타살론자들의 스토리이다. 타살의 주장은 빈센트가 자살할 이유가 없다는 데서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까지 왕성하게 그림을 그리며 삶의 희망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자살을 하느냐는 것이다. 첫 번째는 빈센트가 권총을 소지한 경위가 불투명하고, 설령 어떤 방법으로 구했다고 하더라고 그와 더불어 권총으로 자살을 원한다면 머리를 쏘면 깨끗하게 끝낼 수 있는데 왜 힘들게 복부에 대고 쏘았겠냐고 그들은 주장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복부에 총구를 대고 쏘는 자세는 취하기 어렵다면서 직접 시연해 보이기도 했다. 자살의 당위성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며 그래서 타살의 정황을 추적한 끝에 르네라는 불량배를 찾은 것이다. 이런 류의 타살 주장은 법의학적으로도 많은 글들이 활자화되었고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하지만 설은 설일뿐이다. 그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대게의 자살에는 개연성이 없을뿐더러 자살하지 않는 자들이 모르는 사실이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감정의 교란은 이성의 회로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이해를 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말이 없을 뿐이다.
빈센트는 인생의 실패자였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아웃사이더였다. 기성 교육 기관으로부터도 외면당했고, 화상 업계에서도 무시당했고, 종교계에서도 쫓겨났으며, 파리 미술계에서도 무관심을 받았고, 심지어 고갱으로부터도 괄시를 받았다. 그것도 모지라 아버지한테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의 압력을 받을 정도이지 않았던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가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외사촌 누이 케이와 자식을 거느린 창녀 호르닉과 그리고 아를의 창녀 가비에 대한 치명적인 집착은 세상의 질곡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무의식의 발로이자 유일한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그는 살고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그곳은 아를이었다. 하지만 아를은 그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영혼을 빼앗아 갔다. 메피스토에게 세속적 쾌락을 구하고 자신의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빈센트는 악마와 타협하여 예술에 대한 영감을 받고 영혼을 판 것이었다. 그 거래는 운명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영혼은 시한부 생명을 얻은 것처럼 빠르게 파괴되었다. 2년 동안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도 2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쏟아냈지만 그의 영혼은 그와 비례해서 급격하게 소멸되고 있었던 것이다. 밀밭의 까마귀는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이었는지 모른다. 그림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온갖 멸시를 받으며 발버둥 쳤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에 존재한 이유는 바로 거기까지였다.
고갱은 타이티에서 4점의 해바라기 정물화를 그렸다. 빈센트가 사망한 지 10여 년 후였다. 그는 자신의 집 텃밭에 직접 해바라기 씨를 뿌려 한여름 동안 키운 뒤 그것을 따서 그림을 그린 것이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를 그린 후 해바라기를 주인공으로 그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해바라기는 빈센트가 10점 이상 그릴 정도로 가장 좋아하던 소재였고,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해바라기 작품을 고갱에게 선물하기도 했었다. 당시 고갱은 빈센트의 해바라기에 대해 앞에서는 훌륭하다고 했지만 내심 해바라기 화가라고 비꼬기도 했었다. 자신의 침실에 해바라기로 도배를 하지 않았던가. 고집불통이며 집착이 강한 빈센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갱은 빈센트가 아를에서 그랬던 것처럼 4개의 해바라기를 연달아 그렸다. 일종의 빈센트에게 보내는 그만의 속죄의 예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는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타이티에서 극도의 외로움과 싸우고 있었다. 쓸쓸한 오베르에서, 자신의 삶의 지팡이 노릇을 하던 테오의 존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세상의 끝이 그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운데 빈센트는 <까마귀 있는 밀밭>을 그렸고, 그렇게 고갱은 빈센트를 연상하며 해바라기를 그렸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씻김굿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빈센트가 입원해 있던 아를의 시립병원이나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찾아가지 않았던 자신의 불찰을 사과하고 고해성사하는 심정으로 해바라기를 그렸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옳고 그름을 떠나 빈센트의 죽음은 자신의 짐이었다. 잘 가시오 빈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