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마르세이유행 기차에 오른 빈센트는 거의 하루 만에 중간 기착지인 아를에서 내렸다. 1888년 2월 20일이었다. 그가 도착했을 무렵 때 아닌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 의하면 거의 60cm라고 하는데 그것은 과장이고 당시 기록에 의하면 20cm 정도가 내렸다고 한다. 그 정도의 눈도 남부지방에서는 사건으로 불릴 만큼 기상이변이었다. 빈센트는 생각지도 않은 눈을 맞으며 카를 호텔을 찾아가 여장을 풀었다. 아직 작업실을 만들기엔 협소한 방이었다.
아를은 도시 중앙에 콜로세움 같은 고대 원형극장 건축물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도시였다. 당시 인구는 비록 20,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였지만 로마제국 시절부터 카이사르가 알프스를 피해 갈리아로 원정을 가던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였고, 중세 때는 상업이 발달하여 파리와 리옹이 있는 북부보다 부유했다고 한다, 파리와 멀리 떨어진 탓인지 그 도시는 고유한 풍습과 방언에 가까운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정통 프랑스 문화와 이질적인 면을 보이고 있었다. 빈센트의 표현에 의하면 매우 이국적이었다. 특히 여인들의 복장은 남프랑스 특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고, 미인이 많은 것으로 프랑스 내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드가가 젊은 시절 한때 잠시 머물며 그림 작업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프랑스나 인접 국가에서 온 화가 여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빈센트가 가장 좋아했던 알퐁스 도테가 쓴 소설 아를의 여인은 아를레지엔이라는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베스트셀러였고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비제가 오페라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탓인지 아를 사람들은 문화적 자긍심이 강했다.
당시 아를은 프랑스 국가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군사시설과 철도시설이 건설되어 타 지역의 많은 인구가 유입되고 있었다. 주로 알제리 출신 용병들로 구성된 방위군 부대가 건설되어 아를 경제의 한몫을 담당하고 있었다. 빈센트의 아를 초기 시절 그 군인을 모델로 몇 장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아를엔 프랑스 남부지역을 관할하는 큰 철도 기지가 있었다. 민간인이 사용하는 기차역은 물론이고 철도와 관련된 조차장과 정비창 같은 시설이 건설되어 이와 관련된 근로자들이 상당수 유입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자 투우 경기가 활성화되어 주말이면 로마식 원형 경기장에 많을 사람들이 찾았다. 아를은 철도라는 신산업으로 인해 생동감이 넘쳤지만 원주민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전통이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것은 때로 배타적인 형태로 나타나 이방인을 경계하기도 했다.
빈센트가 아를에 온 후, 며칠 지났을 때 동네 사람 두 명이 숙소로 찾아왔다. 파리에서 온 화가가 카를 호텔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왔는데, 식료품 가게 주인 쥘 아르망과 치안 판사인 외젠 지로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지역의 아마추어 화가였다. 아마도 처음엔 파리에서 화가가 왔다고 하니 마치 드가처럼 꽤 유명한 화가라고 짐작했는지 모른다. 그들이 다소 실망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모만 보면 예술가로서의 아우라는 빈센트가 드가보다 더 강열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배타성이 강한 주민들 중간에서 빈센트를 그나마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처음 아를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과도한 열정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처음 생각과 달리 날씨는 매일 흐리고 추워서 눈도 녹지 않았다. 더구나 프로방스 특유의 미스트랄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센 바람이 그치지 않고 불어 이젤을 제대로 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에서도 그는 태양이 보이는 틈틈이 풍경화를 그렸고 그 외에는 초상화와 정물화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다른 데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그림에만 매달려 주민들로부터 괴짜라느니 기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시간이 날 때면 펜을 들었다. 편지는 빈센트에게 있어 특별한 소통 도구였다. 비록 2년 동안의 파리 생활에서 테오에게 쓴 편지는 10 통도 안되지만 그전 네덜란드 시절에는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었다. 그렇게 그는 예외 없이 다시 테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리에서 새롭게 사귄 사람들과도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 대상자도 다양해졌고 내용도 풍부해졌다. 조카뻘 되는 베르나르에게는 작품세계는 물론이고 개인적인 멘토 입장에서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하기 위해 주옥같은 얘기들을 늘어놓았고, 당시 브리타뉴에서 금전적으로 시달리며 징징거리던 고갱에게는 테오가 그의 작품을 팔아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는 편지들이 서로 왕래되었다. 그리고 그들 외에도 기요맹과 로트랙과 코닝 같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애를 썼다. 빈센트는 테오 외에도 과거 구필 화랑 파리 본점 재직 시절 함께 근무할 때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네덜란드 화상이자 화가인 헤르마누스 테스테그에게도 편지를 써서 동료 화가들의 작품 구매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 판매보다 다른 작가의 작품 판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편지에서 나타난 빈센트의 이런 선한 영향력은 그의 사후 재평가에서 절대적인 평점을 주는 덕목이 된다. 이런 선한 행동이 없었다면 작품 만으로 사악한 프랑스 비평계의 높은 벽을 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베르나르는 빈센트 사후 자신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아 서간집을 발간하여 빈센트의 재평가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아를에 적응할 즈음에 폴 시냐크가 아를을 찾아왔다. 마르세이유를 비롯해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던 도중에 잠깐 아를에 가서 빈센트를 찾아간 것이다. 빈센트는 몰랐지만 시냐크가 그를 찾아간 것은 테오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형이 혼자 잘 살고 있는지 한번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시냐크는 빈센트와 함께 며칠 동안 지내며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시냐크가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빈센트는 덴마크에서 온 무리에 피터슨을 알게 되어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부잣집 아들로서 의사 출신 화가였는데 처음엔 서로 경계를 했지만 금방 친해졌다. 그 외에도 아를에는 화가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 미국인 화가 윌리엄 맥나이트와도 친분을 쌓았다. 맥나이트는 빈센트가 파리 시절 호주에서 온 화가 존 러셀의 소개로 안면이 있었는데 아를에서 우연히 조우했던 것이다. 파리에서 보다가 머나먼 아를에서 만나니까 우정이 남다르게 솟구쳤는지 모른다. 그리고 맥라이트는 벨기에에 있는 외젠 보슈에게 편지를 보내 아를에서 함께 작업을 하자고 제안했고 정말로 보슈는 며칠 만에 아를로 내려와 빈센트파와 합세했다. 브리타뉴 퐁타방에서 고갱을 중심으로 베르나르와 라발 같은 젊은 화가들이 모였듯이 생각지도 않게 자신의 주변에 여러 화가들이 모였던 것이다. 빈센트를 중심이 된 그들은 함께 들녘으로 나가 풍경화를 그리기도 하고 저녁이면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미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 시간은 빈센트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이어서 피터슨과 맥라이트는 6월에 아를을 떠났고 마지막에 온 보슈가 남아 빈센트와 몇 개월 더 친교를 유지하였다.
처음엔 카를 호텔에서 오래 묵을 생각은 없었다. 게스트하우스 수준의 작은 공간으로 인해 작업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완성된 그림을 보관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다른 숙소를 구해야 했지만 그림에 빠져 있느라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결국 호텔 사장이 숙박료를 인상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빈센트가 사용하는 그림 도구들로 인해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니 그만큼 더 많이 내라는 것이었다. 일견 일리가 있는 논리였다. 하지만 빈센트는 숙박료를 올려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테오도 당시 인상주의 작품만 선호하였기 때문에 화랑 고위층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어서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 테오에게 자신의 숙박료가 인상되었다고 생활비를 더 보내달라고 할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숙박료 인상을 거부하고 버티자 호텔 주인은 빈센트의 화구를 일방적으로 가압류하여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에 빈센트는 법원에 청원하여 겨우 승소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호텔 주인의 이런 극단적인 행동은 사실 빈센트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평소 빈센트의 행동은 호텔 주인의 불신을 유발한 것이었다. 음식을 시시때때로 자기 마음대로 먹기 일쑤고, 화구들로 인해 호텔이 너저분해졌는데도 미안하다는 표현 하나 하지 않았고 그리고 성격 또한 괴팍한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불안하게 보여 이미 내쫓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아무튼, 카를 호텔에서 쫓겨날 처지에 몰린 빈센트는 새로 살 집을 수소문했다. 4월 말경, 자신이 자주 가던 가르 카페에서 안면이 있던 베르나르 술레라와 대화를 하던 중 그는 숙소를 구하는 문제에 대한 애로사항을 얘기했다. 은퇴한 기관사 출신인 술레라는 마당발이어서 아를의 거의 모든 대소사를 꿰차고 있었다. 그는 빈센트의 딱한 얘기를 듣고 집 하나를 소개해주었는데 바로 그 건물주가 가르 카페 주인 조세프 지누였다. 빈센트는 당장 지누와 함께 그 집을 보러 갔다. 외벽이 노란색으로 칠해진 그 집은 지누 부인의 부모가 30년 동안 살던 2층짜리 집으로서 그 후 수리를 하고 2년 동안 빈집으로 놓아둔 상태였다. 내부 벽은 흰색이었고 바닥은 빨간색 타일이었으며 햇볕이 잘 들어왔다. 그리고 각층에 방 두 개씩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매일 지나가면서 본 그 이층집이 지누의 집인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옆 건물은 지누 부인의 조카 프랑수아 그래블랭이 운영하는 식료품 가게였다. 빈센트는 1888년 5월 1일 당장 임대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월 15프랑이었다. 도로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작업실로서 적당하지 않았지만 독채로 쓸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임대료도 매우 저렴했다. 카를 호텔은 월 45프랑이었다. 물론 식사까지 제공받는 조건이었지만 먹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빈센트는 그 집을 보자마다 공간 배치를 구상했다. 1층은 주방과 작업실로 쓰고 2층은 침실 두 개로 만드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반듯한 작업실을 만들 수 있어서 매우 흡족했다. 그리고 침실을 2개로 만들겠다는 의도는 베르나르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집이 노란집이다.
빈센트는 지누의 허락을 받아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착수했다. 공사비용은 300프랑이 넘었다. 두 달치 생활비에 상당하는 거금이었다. 그는 이 공사에 필요한 비용을 받아내기 위해 테오에게 작업실의 필요성을 장황하게 역설했다. 특히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모델이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호두나무로 만든 침대와 탁자와 그리고 의자 10개를 구입하고, 간단한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주방도 만들고, 벽면에 흰색 페인트칠도 다시 하고 붉은색 바닥 타일도 교체했다.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지만 테오는 그런 형을 위해서 돈을 보냈다. 빈센트는 해를 넘기지 않고 자신의 그림이 팔릴 것이라면서 한편으론 불편한 테오를 다독였다. 빈센트는 물론이고 테오도 현재 쓰고 있는 돈의 성격의 일부는 투자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빈센트는 테오의 주머니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작업 공간과 생활공간을 만드는데 몇 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함께 생활하며 작업할 사람만 있다면 완벽했다. 이 공간이라면 마르세이유로 가는 것을 늦출 수도 있었다. 아니면 굳이 그곳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빈센트는 왜 노란집에 집착했을까. 노란집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빈센트 자신이었다. 그는 35년 동안 살아오면서 어엿한 자신만의 공간을 갖지 못했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은 아버지로부터 세상의 규칙을 강제로 습득하는 공간이었다. 오히려 억압의 장소였다. 그리고 사춘기 시절 이후엔 런던과 파리 등을 오가며 화상 생활을 하느라 단칸방 하숙집을 전전했으며, 위에서 얘기했듯이 그 후에도 자신의 집을 가지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마지막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뉘넌의 집은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었다. 그는 그렇게 노매드처럼 떠도는 가운데 간절하게 그림에 매달렸다, 잠자리도 불편했고 작업 환경도 열악했다. 그러던 차에 운명처럼 노란집을 만났다, 그 집은 자신의 노고에 대한 신의 보답처럼 그의 가슴에서 빛을 발했다. 자신의 공간을 자신의 의지대로 꾸밀 수 있는, 이 노란집은 자신의 천국이었는지 모른다. 빈센트가 노란집에서 작업한 기간은 7개월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 천국에서 가장 화려한 영광을 누렸다. 용광로 같은 뜨거운 영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 천국은 오래가지 않아 지옥으로 변한다. 천사와 악마가 노란집을 차지하려고 싸웠는데 처음엔 천사가 승리했지만 결국엔 악마가 이겨 노란 집을 장악하고 말았다. 승리에 도취된 악마는 빈센트의 귀에다 이렇게 속삭였다. 너의 영혼을 내가 가져가겠노라고. 악마가 삼킨 노란색은 마약과도 같았다. 노란색은 설탕처럼 욕망을 강요했지만 그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노란색에 중독된 그의 영혼은 신경증을 악화시켜 돌이킬 수 없는 자멸의 길로 그를 내몰았다. 노란색은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정신병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많은 화가들은 긍정적인 정서를 반영한 노란색을 선호하지만 과다 사용은 정신착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빈센트는 묵과한다. 노란집은 결국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증폭하여 파멸의 길로 돌진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덧칠한 캔버스의 진노란색에서 파멸의 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 빈센트의 생의 여정에서 아를에서의 짧은 시간은 나머지 시간을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강렬했다. 자신이 원하는 집도 얻었지만 여러 명의 친구들도 얻었다. 첫 번째, 건물주인 지누 부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노란집을 갖지도 못했을 것이다. 예술적 상상력을 극대화시킨 노란집을 제공한 지누 부부는 빈센트에게 있어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빈센트는 지누 부부가 운영하는 가르 카페의 내부를 작품으로 남기기도 하였고, 지누 부부의 초상화도 여러 편 그렸으며, 고갱이 아를에 왔을 때도 매일 그 카페에 출입하였고 그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지누 부부는 이 고독한 방랑자에게 지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편배달부인 조세프 로랭과의 우정을 빼놓을 수 없다. 거의 매일 편지 봉투를 주고받으면서 가까워진 두 사람은 서로 뜨거운 인간적 교감을 나누었다. 빈센트는 수염이 길게 자란 로랭의 모습을 좋아했다. 비록 우편배달부에 불과했지만 그의 외모와 더불어 그에게서 어떤 성스러운 느낌을 받았다고 빈센트는 테오에게 밝혔다. 그의 행동과 말에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인간의 고매함을 보았는지 모른다. 로랭의 가정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었다. 세명의 어린 자식을 건사하던 로랭 부인도 본디 성품이 착하고 이타적이어서 빈센트에게 친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빈센트는 로랭의 집에 자주 초대를 받아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의미를 깨달았다. 이것이야 말로 이상적인 가정의 품격이었는지 모른다. <감자 먹는 사람들>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는 로랭의 가족이 부러웠다. 그래서 로랭 가족이 등장하는 초상화를 10점이나 그렸다. 특히 로랭의 초상화와 부인의 초상화는 어떤 성화를 보는 듯 온유함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빈센트의 선한 감정이 투영된 그림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이처럼 사람에게서 따듯함을 경험한 것은 로랭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인물은 개신교 목사인 프레데릭 살이었다. 목사의 딸의 증언에 의하면 빈센트가 아를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아버지와 친분 관계를 유지하여 때로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과거 목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기 때문에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빈센트가 재평가를 받아 유명세를 탈 무렵이어서 신빙성이 결여될 수도 있는 증언이지만 빈센트가 선물로 주었다는 정물화를 내놓은 것을 보면 어느 정도의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빈센트는 자신과 친했던 사람이라면 그들의 초상화를 대부분 그렸다. 그런 선례로 볼 때, 목사의 초상화가 없는 것은 친분의 정도가 약한 것으로 보인다고 반론을 제기했지만 목사 딸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엔 빈센트가 초상화를 그리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목사는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사실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살 목사는 나중에 빈센트가 아를에서 쫓겨나다시피 할 때 그의 거취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위키피아 / 1888년 밤의 카페 테라스
아무튼, 여름이 되자 그의 영감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그는 야외로 나가 다양한 풍경을 빠르게 드로잉을 했고, 노란집에서 놀라운 집중력으로 신들린 듯이 완성을 했다. 그 몰입은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아를로 온 후 그의 그림은 네덜란드 시절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화가일 정도로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2년동안 200여 점의 작품을 생산한 파리 시절도 결국 아를의 세계로 오는 습작으로서의 완충지에 불과했다. 그는 사실주의적인 요소를 버리고 색채에만 집착했다. 노란집에 집착했듯 그는 오직 색에서 그림의 의미를 찾았다. 아를의 태양을 미치도록 눈부셨고, 그 빛은 색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노란색과 파란색의 보색의 향연에 빠져들었다. <밤의 카페 테라스>, <별이 빛나는 밤에>, <노란집> 등의 작품은 노란색과 파란색의 보색의 극명함을 보여준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색을 구성한 것 같지만 그가 테오에게 작가 노트 같은 부연 설명을 하는 것을 보면 자기만의 치밀한 계산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튼 그가 가장 사랑한 작품이라고 말했던 <감자 먹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1888년 아를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주제와 미학적 의미를 가진다.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의 대전환이었다. 그리고 작가적 상상력의 도약이었다.
세상은 항상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타자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6월 초, 무리에 피터슨 마저 덴마크로 떠나자 갑자기 대화할 할 상대가 없어졌다. 미술에 대한 토론을 누구보다 즐겼던 빈센트로선 허전함을 달랠 수 없었다. 그리고 화가 공동체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다. 하지만 기회는 있었다. 자신의 말이면 전적으로 신뢰하는 베르나르와 그리고 파리에서 아를로 내려오기 전에 함께 공동 작업을 하자는 자신의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고갱을 아를로 불러오는 것이었다. 사실 조합 결성은 희망 사랑일 뿐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보다도 우선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작업할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것은 적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았다. 고갱이 살고 있는 브리타뉴에서도 그를 중심으로 베르나르를 비롯해 폴 세뤼지에, 모리스 드니, 샤를 라발 등 패기 넘치는 젊은 화가들이 한 하숙집에 모여 생활하면서 미술에 대해 토론도 하고 함께 그림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그 그룹을 퐁타방파라고 불리기도 하고 일부는 나비파로 발전을 한다. 만약 그 정도의 그룹이 형성된다면 그는 고갱을 수장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베르나르가 군 입대를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세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만약 군에 간다면 아프리카 알제리로 가는 게 유력했다. 사실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베르나르의 아버지가 프랑스 최남단에 있는 아를로 내려가는 것을 극구 반대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해 봄 고갱과 함께 있었던 퐁타방은 파리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아예 누이동생과 할머니가 뒷바라지를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지만 아를은 파리에서 기차로 18시간을 가야 하는 먼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에 낙심한 빈센트는 아쉬움을 달래며 고갱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고갱은 경제적으로 항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빈센트에겐 기본적으로 테오 같은 후원자가 있었지만 고갱의 경우는 그런 배경이 전무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작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냉엄한 현실에서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인상주의나 신인상주의를 추구했다면 그나마 그림이 판매되었겠지만 그는 아예 상징주의와 원시주의 같은 아방가르드적인 비주류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도 빈센트와 쌍벽을 이루는 독단적인 화풍에 매달려 있었기에 그림을 팔아서 생활하는 것은 매우 힘든 상활이었다. 그래서 고갱은 항상 다른 화가들에게 돈 돈 하며 죽는소리를 했다. 빈센트가 아를로 내려온 후 한 달이 지난을 무렵, 당시 고갱은 마르티니크에서 만든 작품을 파리에서 전시를 했지만 판매가 저조하여 낙담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에 고갱은 빈센트에게 편지를 보내 테오에게 부탁해서 자신을 도와줄 것을 대놓고 청탁을 하였던 것이다. 테오가 고갱의 작품 몇 점을 팔아준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갱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댈 만했는지 모른다. 가난한 화가였던 고갱은 이미 자존심 따윈 버린 지 오래였다. 뒷배경 없는 독고다이 고갱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리고 코펜하겐에서 5명의 자식을 거느리고 살고 있는 아내에게서 도움을 받기는커녕 생활비를 대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만 했다.
당시 빈센트는 고갱을 간절히 원했다. 과거 케인과 호르닉에 보였던 사랑의 집착과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보였던 강박적인 믿음처럼 그 에너지가 고갱에게로 향했던 것이다. 파리시절 몇 번 만났던 고갱에게서 자신의 모든 삶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예술 세계에 뛰어든, 마치 아우구스투스 같은 성인의 모습을 보았는지 모른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고갱의 과단적 행동은 빈센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환상이었고, 우상이었다. 그 정도의 인간이라면 친구로서 올인을 해도 부족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세계를 떠돌던 선원 생활과 금융회사에서 펀드매니저로 근무한 경력 등 다이내믹한 신화적 서사에 비하면 빈센트의 삶은 너무나 초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파나마와 마르니티크가 있는 카리브해까지 모험적인 미술 여행을 감행하고, 또다시 머나먼 남태평양으로 떠나 작품 활동을 하려는 고갱의 행동에의 의지는 요샛말로 넘사벽이 아닐 수 없었다. 단지 돈이 없을 뿐이었다.
그렇게 빈센트는 고갱에서 이질적이었지만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세속적인 삶에 배타적이었지만 고갱에게는 세속성이 삶의 원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그런 고갱의 세속성조차도 존경해 주었다. 하지만 고갱은 빈센트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빈센트를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테오라는 든든한 배경이 없었다면 빈센트란 인물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 게 당연했을 것이다. 그래도 빈센트의 진정성만큼은 존경했다. 그림은 거기서 거기지만, 그리스도교의 기본이 근간을 이루고 있는 빈센트의 성품과 그리고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소양은 고갱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했을지 모른다. 비록 자신보다 6살이나 어렸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아우라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빈센트는 테오에게 고갱이 아를로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강력하게 부탁했다. 파리 시절 말미에도 이런 얘기를 하기도 했었지만 그해 여름엔 그 타당성을 설명하며 매우 적극성을 띠었다. 함께 노란집에 살면서 작업을 한다면 창작에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금전적으로 애로사항이 있겠지만 고갱과 비즈니스적 협상을 해서 성사시켜 줄 것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두 형제의 집요한 설득 끝에 고갱은 잠정적으로 허락을 했다. 기간은 1년이고, 한 달에 최소한 작품 1점을 테오에게 보내고, 월 150프랑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에 합의한 고갱은 여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퐁타방에서 아직 주변 정리가 되지 않아 금방 떠날 수 없다는 통보가 여러 번 왔던 것이다. 돈을 더 받기 위한 줄다리기인지 모르지만 고갱은 애매한 이유로 빈센트의 속을 타게 했다. 사실은 고갱이 퐁타방 하숙집 주인에게 500프랑 정도를 빚지고 있었는데, 이 빚을 갚지 않으면 자신의 그림을 모두 압류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사실이 테오에게 전해지자 거금 500프랑을 마련한 테오가 그 채무를 탕감해 주었다. 빈센트는 그런 테오에게 면목이 없었다. 두 사람 다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한 테오는 무모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지만, 일말의 희망과 형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무리한 결단을 내렸는지 모른다. 사실 두 사람의 미래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테오는 놀랍게도 형의 계획을 마지막까지 존중했던 것이다.
빈센트는 고갱을 기다리며 그의 침실을 정성껏 가꾸었다. 침대, 화장대, 서랍장, 의자 등을 구입하고, 고갱이 좋아했던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8월 늦여름이라 해바라기는 천지에 만연해 있었다. 파리시절 샬렛 레스토랑 컬렉션 때 자신이 그린 해바라기 작품을 선물했었는데 그때 고갱이 매우 흡족해했던 것이다. 사실 고갱은 인사치레로 감사의 표현을 한 것이지만 순진했던 우리의 빈센트는 진심으로 그 감사를 받아주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고갱의 마음을 사기 위해 해바라기 작품을 그의 침실에 걸어둘 참이었다. 해바라기 작품은 빈센트가 각별하게 마음에 둔 작품이었다. 파리에서 4편, 아를에서 7편을 그린 일종의 해바라기 연작의 정물화인데, 과거 뉘넌에서 그렸던 오두막 연작이나 직조공 연작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파리에서 그린 4개의 작품은 시들어 죽어가는 해바라기를 눕혀서 그린 반면에 아를에서 그린 해바라기는 화병에 꽂혀 있고 또한 싱싱한 것과 시들어가는 것이 혼합된 모습을 연출한다. 삶의 절망과 희망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출처 위키피아 / 1888년 8월 / 해바라기
빈센트의 해바라기 정물화는 일종의 바니타스 계보를 잇고 있는 상징성을 함유한 작품이다. 바니타스화는 100여 년 전 네덜란드에서 성행했던 정물화의 한 장르로서, 시들은 꽃이나 사람의 해골 그리고 썩은 과일과 모래시계 같은 것을 화폭에 담음으로써 인간의 무상함을 표현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이 덧없다는 것을 그림으로 상징화하여, 살아 있는 때 너무 세속의 욕망이 치우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던 네덜란드에서 기독교적인 정신이 해이해지고 있는 가운데 등장한, 일종의 메멘토 모리를 연상케 하는 각성과 교훈적인 의미를 함축한 화풍이었다. 그래서 이런 연유를 잘 알고 있던 빈센트가 해바라기를 그렸기 때문에 여러모로 곱씹을만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를 시절의 해바라기는 온통 노란색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특이할 만한 점은 처음엔 배경과 꽃병은 청색 계통의 색을 사용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온통 노란색으로 도배를 한 것이다. 또한 해바라기 꽃의 숫자도 처음엔 3개에서 시작해 6개, 12개, 14개, 마지막엔 15개까지 많아진다.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리고 그 많아진 해바라기의 표정 하나하나가 다 제각각이라는 것은 그만큼 빈센트의 마음이 복잡하고 다각적이라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해바라기 연작과 노란색에 대한 수많은 미학적 연구와 정신분석학적인 탐구 등이 이 시각에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예술에는 정답이 없듯이 이 또한 다양한 설만 양산할 뿐이다.
그해 8월 한 달 동안 4개의 해바라기를 완성하고, 두 달이 지난 1888년 10월 21일이었다. 고갱은 브리타뉴에서 드디어 아를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그리고 이틀 후, 그날 새벽 4시경 아를역에 모습을 나타냈다. 몇 달 동안 줄다리기 끝에 성사된 아를행이었다. 짐을 잔뜩 둘러맨 고갱은 24시간 영업을 하는 가르 카페로 갔다. 카페 주인 지누는 동트기 전에 모습을 드러낸 키가 좀 작고 단단하게 생긴 사내를 보고 그가 고갱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어제 빈센트가 미리 고갱의 얼굴을 드로잉 해서 지누에게 준 것이었다. 고갱은 자신을 알아본 지누가 안내한 탁자에 앉아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 이 새벽녘에 불쑥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지난 후, 지누가 노란집에 가서 빈센트를 깨웠다. 두 사람의 조우는 그렇게 성사되었다.
처음엔 어색했다. 사실 고갱과는 몇 번 만나 간단한 대화만 나눈 사이였기 때문에 어색한 것은 당연했다. 빈센트는 고갱을 노란집 2층으로 데려가 침실을 보여주었다, 2개월 전에 빈센트가 그린 해바라기 4쪽이 벽이 걸려 있었다. 침실을 둘러본 고갱의 표정은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해바라기 그림만 없으면 더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1층 작업실로 내려갔다. 함께 작업할 공간이었다. 하지만 2층과는 달리 물감 튜브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고, 그리다 만 캔버스와 완성된 듯한 캔버스들이 어지럽게 싸여 있었다. 발길을 어디다 둘지 불안했다. 그리고 고갱의 시선을 잡은 것은 벽에 붙어 있는 낙서였는데, ‘나는 정신이 건강하다. 나는 성령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고갱은 무언가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빈센트는 고갱의 표정을 애써 외면했다.
빈센트는 고갱과 보다 가까워지를 원했다. 남자들끼리 친해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19세기 파리 예술가 세계에서는 유흥업소 출입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중에서도 매춘업소 출입이 가성비가 높았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공창제도가 있어서 지역 경찰서에서 허가를 받으면 개업을 할 수 있었고 그 수요는 항상 넘쳐났다. 경찰의 영향권 아래에서 영업을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안전했다고 한다. 아를에서도 노란집과 불과 10분 거리에 업소 여러 개가 모여 영업을 하고 있었다. 특히 부근에 군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성황이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매매춘 여성들이 수십 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빈센트도 이미 업소 출입을 하면서 단골이 되어 있었다. 그의 파트너는 가비라는 여인이었다. 빈센트가 알제리 용병 초상화를 그리게 된 동기도 업소에 출입하면서 그들과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빈센트는 고갱과 함께 매춘 업소에 다니면서 우정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행위는 빈센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고갱은 세속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런 유흥적 행위가 통할 수 있었겠지만 베르나르 같으면 아마도 환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빈센트는 역설적이게도 한때 종교에 광신적인 경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욕망 해소에 어떤 죄의식이 없이 출입을 했지만 베르나르는 혈기왕성 한 20대 초반임에도 그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이런 내용에 대한 얘기가 두 사람의 편지에 남아있다. 이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하자면, 빈센트는 매매춘에 대한 인식은 당시 세속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과도한 욕망 해소는 건강에 안 좋고 더구나 작품 활동에 저해된다고 베르나르에게 누누이 말하곤 했었다. 아마도 작가적 영감과 상상력에 저해된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고 욕망을 억제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드가를 본받아야 한다고 베르나르에게 설파하기도 했다. 매춘업소에 출입하면서도 당시 예술계에서 유행하던 데카당스를 거부하는, 이런 양가적인 윤리 성향을 보인 빈센트를 속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금물이다. 당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어디를 가나 이런 퇴폐적인 문화는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빈센트의 세속성을 비난할 수 없다. 그런 잣대로 본다면 아마도 살아남은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얘기가 잠깐 옆으로 샌 것 같다. 아무튼 빈센트는 고갱과 함께 많은 시간을 가르 카페에서 보냈다. 그 카페에서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고 그리고 미술에 대한 열띤 논쟁도 벌였다. 그들은 생각보다 금방 가까워졌다. 그리고 바람이 잔잔한 날이면 야외로 나가 함께 이젤을 설치하고 풍경화를 그렸다. 비록 여름처럼 태양이 눈부시지 않고 들녘의 색감도 좋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림에 집중했다. 당시 알리스캉에서 같은 장면을 보고 그린 작품이 아직도 남아 있다. 빈센트 4점과 고갱의 2점이 그들의 공동작업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야외 풍경화 외에도 가르 카페의 내부 풍경과 지누 부인의 초상화도 각각의 시각으로 그렸다. 이런 작품 행위는 미술사에서 역사에 남을 기록이 아닐 수 없었다. 당대에는 보잘것없었던 두 사람이 미래의 자신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잠깐 두 사람이 같은 시간 때에 그린 지누 부인의 초상화를 보고 가겠다. 고갱은 지누 부인을 지극히 세속적으로 표현했다. 식탁에 압생트 놓고 앉아 살짝 눈웃음을 치면서 누군가 유혹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고, 뒷 배경에도 카드 치는 4명의 사내와 식탁에 머리를 묻고 졸고 있는 사내를 배치하여 세속적인 표현을 강조하였다. 카페는 다분히 세속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에 고갱의 눈에도 세속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하지만 빈센트의 지누 부인은 매우 고상하다.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앉아 있고, 탁자에는 책 두 권이 놓여져 있는데 한 권은 펼쳐져 있고 한 권을 닫혀져 있다. 책을 읽다가 잠시 사색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배경은 고갱처럼 실내를 표현하지 않고 전체를 노랑색으로 칠했다. 보라색과 파란색이 혼합된 진한 색상의 지누 부인과 노랑색의 대비는 그녀를 또렷하게 부각하기에 충분하다. 마치 성녀의 아우라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다분히 세속적인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이 결코 고상할 수 없지만 빈센트는 의도적으로 고갱과 다르게 연출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은연중에 표현한 것은 아닐까. 작가는 어떤 작품을 만들 때 항상 그냥 생각 없이 구도를 잡고 드로잉을 하지 않으며, 심지어 색상의 선택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를 상징화하려는 의도는 다분하다. 작자 자신이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설명이 없더라도 의미는 곳곳에 상징으로 남아 있고, 그 의미는 감상하는 사람들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낳고, 그것이 바로 예술 작품의 매력 중에 하나이다. 그런 논리로 볼 때 두 사람의 각 작품에서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묘한 희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출처 위키피아 / 1888년 고갱의 아를의 여인 / 고흐의 아를의 여인
사실 고갱과 빈센트는 외모만큼이나 거의 모든 면에서 달랐다. 거꾸로 표현하면 같은 점이 거의 없다고 보아야 옳을지 모른다.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동일한 공간을 두고도 전혀 다른 각도로 직관하는 미학적 차이를 보여주었듯이, 고갱은 반인상주의를 지향하여 아방가르드적인 상징주의라는 명확한 자신만의 사조를 추구하였고, 빈센트는 당시의 미술 사조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자아에 매몰되어 고도의 상상력에 의지하며 작품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상반된 행동을 보였다. 고갱은 금융회사 출신답게 돈 바구니에 있던 생활비를 자신이 가져가면 항상 장부에 기록을 하였고, 작업 공간이나 자신의 동선에는 항상 질서를 부여하였지만, 빈센트는 모두가 알다시피 돈을 어디다 쓰는지 기록도 하지 않았고 그의 주변에는 항상 무언가 어질러져 있었다. 아마도 이런 고갱의 결벽증적인 행위에 빈센트는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먹는 것도 그랬다. 고갱은 돈을 아끼기 위해 가능하면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자고 했고, 빈센트는 항상 하던 대로 식당에 가서 먹자고 했다. 하지만 그 답지 않게 빈센트가 한 발 물러서자 고갱은 조리 용품을 구입하여 직접 집에서 간단한 음식을 만들었다. 예전부터 고갱은 여건이 되면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민생고를 해결하고는 했었다. 자립심에 강했던 고갱에게 있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고갱이 음식을 만들어 내놓으면 빈센트는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어느 날은 미안했던지 빈센트가 직접 수프를 만들겠다고 해서 요리를 해 내놓기도 했는데 고갱은 다음부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이런 일상에서의 상반된 점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각자의 미학 세계에 대해서는 서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살아온 역정을 보면 미루어 짐작을 하더라도 갈등은 자명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항시 붙어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미술에 대한 주제를 놓고 대화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상시엔 말이 없다가도 미술 얘기가 나오면 두 사람은 기세가 들끓어 올랐다. 처음엔 서로의 미학적 주장을 존중하였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남 얘기엔 귀를 닫았고 이에 대화는 격렬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현상은 반복되었다. 투머치 능력이라면 결코 뒤처지지 않았던 두 사람은 물 만난 고기처럼 논쟁 속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밀레나 들라크루아 같은 고전주의자나 낭만주의 화가들을 추종하고 있던 빈센트는 그들의 화풍에 대해 극찬을 한 반면, 신인상주의의 대표주자인 세잔에 대한 평가는 그의 개인사는 존중하면서도 화풍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빈센트가 그렇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 고갱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구시대의 화가들을 추종하느냐면서 그를 공격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런 주제에 대한 대립도 그렇지만, 렘브란트가 살았던 과거의 미술사까지 소환하여 누가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놓고 끝없이 논쟁을 벌였다. 이런 무의미한 논쟁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비 오는 날이면 더욱 치열해졌다. 빈센트는 자신의 미학적 견해에 대해 고갱이 매번 비판하고 힐난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존경의 표시를 하지만, 미술사적인 측면에서는 동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빈센트는 결코 비판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이런 빈센트의 태도에 고갱도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고집이 센 고갱은 일일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분위기가 고조되면 빈세트의 분노 수치는 극도로 치솟았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 상태가 되어 잡아먹을 듯이 한 톨의 에너지도 소진하면서 열변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백해무익한 언쟁이었다. 그 정도까지 험악해질 때면 그래도 조금 담대한 고갱은 두 손을 들고 자릴 떴다. 이런 격렬한 언쟁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렇게 고갱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초심의 균열은 채 한 달도 안 되었을 때부터 나타났다.
고갱은 아를로 내려오기 전에 빈센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베르니르에게 그에 대한 전반적이 얘기를 들었었다, 파리에서 어설피 알고 지냈던 빈센트였기 때문에 다른 면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베르나르에게 들은 빈센트의 평판은 좋았다. 만약 그런 긍정적인 평가가 없었다면 아를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작업 환경에 대한 기대와 금전적 개선을 위한 테오와의 비즈니스적인 관계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르나르에게 들은 우호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아를에 왔지만, 이 모두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심정이었다. 그는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을과 달리 겨울이 다가오자 황량하게 변한 아를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고, 빈센트와의 일상에서의 관계도 어긋나 갈등이 고조되고 있으며, 미학적 논쟁도 물과 기름의 관계여서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토로했다. 사실 고갱의 이런 표현은 의도적이었다. 빈센트도 베르나르와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갱의 입장에서 갈등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베르나르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갈등의 증인이었고 조정자였고 그리고 판결자였는지 모른다.
이렇게 고갱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은 눈치챈 빈센트는 자신의 주장이 너무 과격했노라고 그에게 사과를 하기도 했다. 그는 매번 분노조절을 못하는 자신을 탓했다. 일상에서 부딪치는 작은 갈등에 대해서는 입장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고 미학 논쟁에서 자신이 한 언행에 대해서는 허심탄회하게 마음의 표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사과는 사과일 뿐 그런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고갱이란 인간과 화가로서의 고갱을 존중했지만, 그에 대한 어떤 콤플렉스 같은 감정이 내면 깊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에 반사적으로 지지 않으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였던 것이다. 고갱이 살아온 파격적인 서사에 비하면 자신의 삶은 너무나 궁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마초적인 성격이 강해 돈이 없으면서도 항상 당당했고, 복싱과 펜싱을 배워 비록 덩치는 크지 않지만 강단이 있었고, 또한 삶을 두려워하지 않아 항상 멀리 떠나는 것을 동경하고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도 했었다. 그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그는 파리 미술계에서 자신보다 우월하게 보였다, 비록 파리 화단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과하고 작품에 대한 미학적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었고, 지명도 있는 여러 화가와 화상들과도 꾸준하게 친교를 맺고 있었고, 풍타방에서는 젊은 화가들의 리더 노릇도 하면서 친화력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빈센트는 너무나 초라한 루저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고수와 하수 같은 관계가 동물의 세계에서 서열을 결정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본능적으로 서열이 형성되었다. 매일 서로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공간에서 이런 격차를 매일 느낀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을 하더라도 지속적인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기 마련인지 모른다. 빈센트는 고갱에게 굴복할 수 없었다. 그에겐 문학이란 무기가 있었다. 사실 그 칼은 상대적으로 고갱 것보다 예리했던 것이다. 예술 전반에 대한 통섭은 자신이 우월하다고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 연유로 빈센트는 고갱에게 알퐁소 도테와 콩쿠르 형제와 그리고 에밀 졸라 같은 소설가의 작품을 읽으시라고 넌지시 권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바라기 그림에 대해서도 두 사람의 시각은 달랐다. 처음 아를에 와서 빈센트의 안내로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을 때 벽에 걸린 해바라기 그림을 보고 이게 머지?라는 의문을 품게 만들었는데, 그때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불쾌한 면이 없지 않았었다. 해바라기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로서는 한편으로 무례하다고 느꼈던 순간이기도 했다. 해바라기가 네덜란드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의미에는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삶은 덧없는 것이기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적인 의미는 사회 통념적으로도 틀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소신과 성향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세상의 끝에 가서 살더라도 그 의지를 잃지 않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먼 훗날 고갱은 자신의 마지막 거처인 타이티 파페에테에서 자신이 괄시하던 바로 그 해바라기를 여러 편 그렸다. 그 머나먼 세상 끝에서, 발목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과 모르핀 중독으로 심신이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지는 가운데서도 그는 왜 해바라기를 그렸을까. 해바라기를 그리던 소회는 무엇이었을까. 짙은 회한이 몰려왔다. 붓끝 하나하나에서 빈센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을지도 모른다. 해바라기를 한번 그려보세요... 그것은 화해였을지도 모른다. 두 달 동안의 동거에서 생긴 서로의 절절한 애증과 무거웠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치유하는 그만의 성스런 의식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고갱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더구나 겨울이 되자 아를의 날씨는 짓궂어지기 일쑤여서 야외 작업을 할 수 없었고 이에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여러 가지 면에서 쌓인 감정을 해소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그나마 평온하게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마음은 서로에게 일도 없었고,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다시 원위치할 게 뻔했다. 빈센트의 사과를 한두 번 받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12월 11일에 고갱은 태오에 편지를 썼다. 빈센트와 서로 성격 차이가 심각해서 파리로 돌아갈 수박에 없을 것 같다라고. 금전적으론 지금까지 결과를 봐서 정산을 해주기 바라며, 유감스럽지만 떠나겠다고 그는 자신의 입장을 거듭 밝혔다. 하지만 왜 마음이 변했는지 모르지만 3일 후 다시 편지를 보내 지난번 편지 내용을 취소했다. 아마도 빈센트와 다시 한번 함께하기로 생각을 바꾼 것 같았다.
하지만 겨울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매일 좁은 방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들어야 했고, 가르 카페에 가서 압생트를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 답답한 생활이 고조될 때 빈센트는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몽펠리에로의 여행을 제안했다. 그 미술 여행에 대해 고갱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있어 여기에 그대로 옮겨 놓겠다. ‘두 사람은 마지막 일주일 전에 기차로 2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몽펠리에로 회화 전시 관람 여행을 갔다. 19세기 대화상인 알프레드 브루야스가 파브르 박물관에 자신의 작품 전부를 기증했는데 그 기념 컬렉션 특별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파브르에는 이전 세대인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시대에 활약했던 쿠루베, 드라크루아, 귀스타브 리카드, 알렉산드르 카바넬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해 당일치기로 갔다 오는 여행이었는데, 고갱과 고흐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드라크루아와 렘브란트의 작품 세계에 대해 항상 그렇듯 진이 빠지도록 토론을 이어갔다’ 그들은 이 여행에서 감정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이 여행 이후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고갱의 자서전에 의하면, 한밤중에 잠을 자고 있는데 무언가 인기척을 느껴 눈을 떠보니 바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빈센트의 얼굴이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서로 눈이 마주치자 고갱은 화들짝 놀라 몸을 세웠고 이에 빈센트는 몽유병 환자처럼 무표정하게 자신의 침실을 돌아갔다고 한다. 이 일화를 보면 빈센트는 고갱에게 스토커처럼 집착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빈센트의 심리 상태는 매우 불안했다. 월래 유전적인 신경증을 가지고 있던 그의 심리상태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고 그리고 파리에서부터 우울 증세가 표면에 드러나고 있었는데, 아를에 내려온 후 그 증상은 증폭되어 심각해졌던 것이다. 살의를 느낄 정도로 투명한 지중해의 태양과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노란색에 도취되어 정신 회로에 심각한 버그가 발생했고, 이와 더불어 고갱과의 동거에서 상태는 임계점을 넘어 손쓸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정신병적인 행동의 시작은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나타난다.
발단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빈센트의 초상화 때문이었다. 12월 21일 시작한 빗줄기는 이틀이 지나도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서로 다툼의 씨가 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자제를 하는 가운데 작업실에서 각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마 전, 서로 해바라기를 그리는 장면을 각자 초상화로 남기자고 합의 한 상황에서, 고갱은 빈센트의 초상화를 그리고, 빈센트는 고갱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방법도 의미 있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고갱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본 빈센트는 실망하고 말았다. 마치 미치광이처럼 그렸다고 대놓고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언짢은 표정을 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상대방의 그림에 대해서는 항상 서로 관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888년 12월 23일,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카페에서 술을 마시면서 다시 거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미 고갱이 해를 넘기기 전에 아를을 떠난다고 선언을 한 후라 빈센트의 기분이 많이 상해 있던 참이었다. 이에 전날 저녁 이별을 고한 고갱에게 신문지 한 귀퉁이를 찢어 전했는데 그 기사 제목은 ‘살인자 도주하다’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파리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기사였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고갱을 그렇게 비유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빈센트는 초상화를 핑계로 다시 거품을 물고 대들기 시작했고 이에 고갱도 지지 않고 대응했다.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어느 때의 언쟁보다 강도가 높았다. 그리고 분노조절을 하지 못한 빈센트는 급기야 압생트 술잔을 고갱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다행히 빗나갔지만, 이런 상황을 참지 못한 고갱은 순간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쏘아붙였다. 다시 나한데 이러면 당신을 가만 두지 않겠어! 당장 아를을 떠날 참이었다.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고갱의 증언에 의하면 이렇게 카페에서 헤어진 두 사람은 한두 시간 후 그날 밤 노란집 부근 길에서 조우했다고 한다. 당장 가져갈 간단한 짐만 싸고 나온 고갱과 노란집으로 비틀거리며 가는 빈센트와 마주친 것이다. 그때 빈센트가 갑자기 자신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달려들었고, 자신이 잽싸게 피해 충돌하지 않았다고 한다. 10여 년이 지난 후 쓴 고갱의 자서전에 의하면 빈센트가 당시 면도칼을 들고 있었다고 했는데, 사건 직후 베르나르에게 사건 경위를 설명했을 때는 면도칼 얘기는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지나친 고갱은 인근 호텔에 가서 하루 묵고 다음 달 파리로 갈 참이었다. 더 이상 여기에 있다가는 무슨 망신을 당할지 몰랐다.
이렇게 고갱과 살벌하게 다툰 빈센트는 노란집 이층 자신의 침실로 갔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난 후 빈센트는 단골 매춘 업소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날 밤 10시 30분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기괴했다. 천 조각으로 머리와 귀와 턱 아래 세로로 감싸고 베레모를 푹 눌러쓴 빈센트는 창녀 가비를 불러내 그녀에게 봉투 하나를 들이밀었다. 그 물건을 무심결에 받은 가비는 흐릿한 조명에 비친 빈센트의 모습이 괴이했지만 특이점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빈센트의 엉뚱한 행동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지 모른다. 그렇게 얼덜결에 구겨진 봉투를 받은 가비는 이게 무언지 물어보기도 전에 휙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빈센트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빈센트의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봉투의 내용물을 꺼냈다. 그 순간 그녀는 기겁을 했다. 그것은 사람의 인체의 일부였다. 바로 잘린 귀였던 것이다. 비명소리를 지른 그녀는 바르르 떨었고 이에 놀란 업소 주인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순찰 중이던 경찰을 불러 이 사실을 알렸다.
다음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아를은 아침부터 축제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하지만 노란집은 새벽녘부터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가비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귀 절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노란집을 찾은 것이다. 어떤 폭력 사건이 발생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빈센트의 집을 전격 수색에 나선 경찰은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고 기겁을 한다. 조심스럽게 아래층 현관문을 열고 2층에 올라서자 피 묻은 하얀 천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바닥 여기저기에도 핏자국이 선명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살인 사건 현장처럼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침실에 들어서자 어둠 속에서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있는 빈센트를 발견했다. 처음엔, 경찰은 본능적으로 살해된 시신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바닥과 침대에도 아직도 굳지 않은 핏자국이 선명했고 지혈을 하기 위해 천조각을 사용한 정황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빈센트의 곁으로 간 경찰은 그의 목숨이 붙어 있는지 우선 확인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육신에서 가느다랗게 맥박이 뛰고 있었다. 아직 생명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즉시 의사를 불러 빈센트를 응급조치 한 후 시립병원으로 보냈다.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고갱은 나머지 짐을 챙기기 위해 해가 뜨자마자 노란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경찰들이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자세한 사실을 모르던 고갱은 숨을 죽이며 노란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이 모습을 본 경찰 한 명이 고갱을 불러 세웠다. 범인은 현장에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수사의 기본법칙에 입각하여 고갱은 즉석에서 피의자 심문을 받았다. 어제 저녁에 있었던 빈센트와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후의 알리바이까지 밝혀지자 고갱은 의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결국 어렵지 않게 일종의 자해 사고로 결과가 났다.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절단한 것이다. 고갱은 거의 공황상태에 빠질 지경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고갱은 테오에게 전보를 쳤다. 긴박한 순간이었다. 이 연락을 받은 테오는 야간열차를 타고 다음날 25일 아를에 도착한 후 빈센트를 만나러 시립병원으로 달려갔다.
빈센트는 이틀 전의 광기에서 벗어나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 의사는 알코올 중독이 의한 정신착란이나 간질 발작으로 자해를 한 것 같다는 진단을 테오에게 전하고, 며칠 두고 보다 퇴원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빈센트의 상태를 보고 마음이 놓인 테오는 우체부 롤랭과 살 목사를 만나 빈센트의 뒷수습과 앞으로 있을 상황에 대해 자신에게 전해줄 것도 함께 부탁한 후 다음날 새벽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고갱과 함께 아를을 떠났다. 하루 이틀 더 있고 싶었지만 연말이라 해야 할 업무가 많았고, 그리고 이와 더불어 10여 일 후 있을 봉거와의 약혼 준비 때문에 부득이하게 파리로 가야만 했던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성사된 약혼이었기 때문에 빈센트의 상태가 걱정이 되었지만 불가피하게 파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자신이 빈센트의 옆에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당시 테오와 고갱이 함께 파리로 가면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추정할 수도 없지만, 분명한 것은 고갱과 빈센트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다 아는 상황에서 무언가 조심스럽고 불편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던 만큼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출처 위키피아 / 1889년 자화상
여기서 잠시 시간을 이틀 전으로 앞당겨보겠다. 당시 시립병원에는 23살의 수련의 펠릭스 레가 당직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동이 트기 전에 응급마차 한 대가 병원에 당도했었다. 신상카드에는 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황급히 응급 환자를 맞이한 레는 항상 그렇듯 노숙자 폭력 사건의 환자 같은 그를 담담하게 치료하기 시작했다. 환자의 상태는 기괴했다. 거의 혼수-섬망-상태의 환자와 함께 온 것은 잘린 귀였다. 환자의 귀는 피떡으로 뭉친 헝겊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귀를 헝겊에서 분리한 후, 봉합을 할 수 있는지 점검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경과하여 봉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에 잘린 귀는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박하게 시립병원에 입원한 빈센트는 자신이 무슨 사고를 저질렀는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경찰이 찾아와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려고 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한 전말은 마지막까지 빈센트 자신의 입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오직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으로만 남아 지금까지 전해질뿐이다. 정말 기억에서 사리진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정신병적인 발작에 의한 자해 사건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발작은 사라지지 않고 테오가 떠난 다음날 다시 나타나 병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다른 환자의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고, 간호하던 수녀를 쫓아다녔고, 자신의 침대에 어느 누구의 접근을 막았고, 세수를 한다면서 석탄 보관통으로 가서 탄가루로 얼굴을 씻는 등 기괴한 행동을 일삼은 것이다. 이에 빈센트는 독방에 격리되어 침대에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징후가 좋지 않다는 것을 파악한 시립병원 측은 빈센트를 국립 정신병원으로 이송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의의 진단서와 경찰서와 시장 등의 관공서의 승인도 뒤따라야 했기 때문에 절차가 금방 끝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 대해 테오는 수시로 롤랭으로부터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국립 정신병원에 한번 입원하면 살아서 퇴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빈센트는 금방 호전되었다. 정신병 환자를 입원시키고 치료할 의료진이 없었던 시립병원은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보다 일단은 더 지켜보는 것으로 결정하고 양호해진 빈센트를 퇴원시켰다. 1889년 1월 7일이었다. 그렇게 14일 만에 퇴원한 빈센트는 노란집으로 갔다.
이 사건 기사는 7일 후 아를 지역 주간지인 Le Forum Républicain에 간단하게 보도된다. '지난 일요일 저녁 11시 30분, 화가이자 네덜란드 출신인 빈센트 반 고흐가 1번 사창가에 가서 어느 창녀 한데 자신의 귀를 전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물건을 잘 보관하세요." 그런 다음 그는 사라졌다. 불쌍한 미치광이의 행동일 수밖에 없다는 소식을 접한 경찰은 다음 날 이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 사람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때까지는 거의 생명의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이 불행한 사람은 긴급하게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파리 화단에서도 충격적인 사건으로 전해진다. 우선 고갱이 파리에 당도한 후 베르나르를 만나 사건 전말에 대해 설명하였고 그러므로 해서 이 사건은 파리 미술계에 파다하게 퍼지게 되었다. 사건의 당사자격인 고갱은 이후 이 사건에 대해 가능하면 입을 닫고 있다가 1903년 자서전에서 입을 열었다. 당시엔 고갱이 사건과 관계된 사정을 설명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을 과대포장 하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신뢰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저 당분간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그 사건 후 그는 평생 동안 주위로부터 빈센트를 죽음으로 내몬 냉정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적어도 귀 절단 사건에서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넌 도대체 아를에서 무엇을 한 거야? 한마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부정적인 평판은 결국 자신의 최고의 미술 파트너였던 베르나르와 인연을 끊는 계기가 되었다. 베르나르는 노골적으로 고갱을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고갱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선한 빈센트, 악한 고갱의 등식이 그렇게 당시 만들어졌다.
그리고 테오는 빈센트의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어머니에게 사실보다 완곡한 표현으로 전했다. 이미 빈센트의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어머니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노골적으로 알렸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테오는 약혼녀에게 쓴 편지에서 형의 불행에 대해 가슴 아픈 심정을 토로하며 형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번이라도 아를을 찾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라고 덧붙였다. 고갱에게 이런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빈센트의 정신건강에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신병 치료는 예후가 좋지 않고 완치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테오는 빈센트의 미래를 절망적으로 보았다. 아를의 로랭에게서 온 전보에 의하더라도 빈세트의 상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봉거에게 빈센트에 대해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 ‘희망은 거의 없지만 그는 인생에서 많은 일을 해왔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싸워왔다.’
1888년 12월 23일,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귀 절단 사건은 당시엔 대중의 이목을 끌 정도로 회자되지는 않았지만, 그 후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이 유명세를 타면서 세상의 관심을 끄는 중요한 사건으로 부각되었다. 그런 관심으로 인해 수많은 억측과 설들이 난무하였다. 당시엔 외국인의 기괴한 자해 사건에 불과했기 때문에 경찰의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을 증거 하는 자료는 대단히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애매모호하다. 주관적인 빈센트의 편지와 사건이 일어난 몇십 년 후 빈센트의 추종자들이 아를에 가서 이미 노인이 된 주민들에게 증언을 들은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후자의 증언들은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여서 사실성이 희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아를의 관공서와 시립병원 등에 남아 있는 매우 건조한 몇 개의 기록들만 찾았을 뿐이다. 그리고 고갱과 빈센트의 개인 간의 갈등 상황은 고갱의 자서전과 주변 지인들에게 밝힌 증언에 의존해야만 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빈센트는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죽을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위에서 고갱이 아를로 온 배경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좀 더 부연하고 가겠다. 아마도 처음 염두에 두었던 베르나르가 아를로 왔다면 빈센트의 불행은 적어도 그렇게 치명적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운명의 시선은 고갱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사실 빈센트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고갱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세속적이고 이해타산에 밟고 때로는 구라쟁이라는 사실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를 너무 간과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자신이 그런 악동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확신했는지 모른다. 사실 고갱은 도덕적으로도 허점이 많고 개선해야 할 점도 많은 문제적 인간이었다. 아무리 예술을 위해 가족을 버렸다고 하지만 그 행위 자체는 결코 사회 규범에 부합되지 않는 부도덕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빈센트 같았다면 아마도 그런 무모한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빈센트는 적어도 도덕과 공동선의 영역을 거부하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또한 빈센트는 세상과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겸손에 바탕에 두고 있었지만 고갱은 매사에 타인의 호의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뻔뻔하고 오만한 행동을 일삼았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고갱의 이런 행동에 아쉬움과 섭섭함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고갱은 빈센트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형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사람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공감 능력은 엄연히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최소한의 가치일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빈센트의 불행은 자신이 자초한 것이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파리생활을 할 때까지 그에겐 열정만 있을 뿐 상상력은 결여되어 있었다. 연구하고 고민하는 자세가 그의 예술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디오니소스적인 영감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메피스토의 유혹을 받은 빈센트는 무언가 홀린 듯이 태양을 쫓아 아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양의 유혹에 거부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그는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낭만적 악의 상상력 속으로 빠져들었다. 약속의 땅 아를은 그에게 화려한 상상력을 주었지만 한편으론 영혼을 소멸시켰다. 그의 영혼은 장작처럼 불타올랐고 금방 재가 되었다. 그렇게 첫봄이 되자 상상력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광적인 열정이었다. 그는 끊어 오르는 열정과 영감을 통제할 수 없었다. 악마의 혓바닥 같은 태양이 아를의 들녘에 쏟아지는 날 그는 이젤을 둘러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는 빠르게 스케치를 하고 작업실로 와서 그 상상력의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들었다. 그의 구부정한 어깨에서 뜨거운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붓은 미쳐 있었다. 일필휘지 하듯 그의 붓은 명쾌하고 정확하고 그리고 빨랐다. 상상력 한 톨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그의 눈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표범이 어린 가젤을 낚아채는 것처럼... 빈센트는 테오에게 설명했듯이, 빠르게 그리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상상력을 올바로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신념이 확고했다. 그렇다고 즉흥적이지 않고 마치 소설의 플롯을 짜듯이 색채와 보색을 촘촘히 엮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 노트 같은 내용을 테오에게 편지의 형태로 항상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색의 배치에 대해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아를에서 그는 창작의 조증 상태에 함몰되어 있었다. 그 현상은 짧은 기간 동안 다량의 훌륭한 창작품을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조증 현상의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 중에 한 명이 알베르트 슈만인데, 빈센트도 1888년 봄부터 가을까지 양적인 것은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위대한 작품을 폭발적으로 양산한 것이다. 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압력을 주체하지 못한 영감의 마그마가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분출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영감의 에너지를 급격하게 분출하면 상대적으로 항상 내적 에너지가 소멸되기 마련이다.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 함몰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에서 이런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슈만도 결국 조증의 상대적 현상인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그런 긴장 상태에서 고갱과 함께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결론적으로 그 환경이 빈센트의 정신 상태를 더 악화시켰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그 상황은 불행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고갱은 그와 결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부터 다른 사람이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더라도 같은 공간에서 매일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단순히 좋은 감정으로 섣불리 살면 초심과 달리 마음의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많기 마련이다. 그렇게 충돌한 두 예술가 사이에는 매일 불꽃이 튀었고, 한 달도 안 되어 갈등은 고조되었으며 그러면서도 서로 화해를 하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빈센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양보하려고 했으나 정신적으로 항상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르시스트 고갱을 포용할 수 없었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쓴 편지를 보면 신경증이 집안 내력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런 타고난 기저질환과 조증현상 그리고 고갱과의 피할 수 없는 충돌 등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폭발한 것이 바로 귀 절단 사건이었다.
빈센트가 마지막에 광분한 것은 고갱이 이별을 고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계약 파기였다. 고흐 형제가 적잖은 돈을 투자해서 형성된 공동체를 협의 없이 자기 마음대로 파기하려고 했기 때문에 빈센트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테오를 설득해서 어렵게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 배은망덕한 놈이 모든 것을 깨버리고 말았지 않은가. 그는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배려를 개무시하는 고갱을 용서할 수 없었다. 빈센트는 사건 이후에도 테오에게 고갱에 대한 섭섭함을 여러 번 토로했다. 고갱에 대한 소회를 보면, 무책임한 사람이며, 정직하지 않은 사람으로 의심하고, 나와 테오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태연하게 자행하고, 인상주의의 새끼 호랑이 보나파르트라고 비아냥하는 등 막되 먹은 세속적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나고 십 여일 후, 급하게 도망치느라 두고 온 펜싱 도구와 스케치북을 소포로 보내달라는 고갱의 편지가 왔을 때도 빈센트는 거의 5개월이 지나서야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고갱의 뻔뻔함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고갱에 대한 연민을 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배신을 당했는데도 그는 고갱과의 절연은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해도 괜찮을 만큼 고갱을 좋아한다고 테오에게 밝히기도 했다. 그것은 호르닉에게 보였던 조건 없는 애증이었는지 모른다. 지독하게 싸우면서도 떠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용서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귀 절단 사건의 진실이다. 자해라는 것은 정설이지만 그럼에 불구하고 고갱이 범인이라는 설도 자자하다. 그 근거를 보면 고갱이 아를에서 가지고 있던 펜싱 검과 빈센트의 애매모호한 입장이다. 고갱은 복싱도 좋아하는 열혈 마초였지만 펜싱에도 조예가 깊어 자신의 거처를 옮길 때마다 그 도구들을 가지고 다녔다. 마지막 거주지였던 퐁타방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그곳 젊은 화가들에게 펜싱을 가르쳐주기도 했다고 한다. 바로 그 펜싱 검으로 그날 빈센트가 광분하며 달려들 때 그의 귀를 잘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상상력은 그저 상상일 뿐이다. 당시 프랑스에서의 펜싱은 무기가 아니라 스포츠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대결 도구로 사용할 때처럼 날이 서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찔러서 상처를 입힐 수는 있었지만 귀를 자를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빈센트의 모호한 입장이다. 그는 1889년 1월 4일, 사건 후 처음 고갱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측이 좀 더 성숙한 반성을 할 때까지 우리의 불쌍하고 작은 노란 집에 대해 나쁜 말을 삼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해 1월 21일에 쓴 편지에서는 많은 얘기를 두서없이 하는 가운데 펜싱 마스크와 장감을 논하면서 ‘(덜 유치한 전쟁 엔진을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사용)’이란 표현을 괄호 안이 넣었다. 바로 이 전쟁 엔진이라 표현 때문에 고갱이 펜싱을 무기로 사용했다는 논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표현을 추정하자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고갱은 펜싱 도구를 가지고 다니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펜싱을 잘한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아마도 빈센트에게도 그런 행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펜싱 검으로 찌르는 동작 같은 것 말이다. 아무튼 그것과 별개로 사건의 당사자인 빈세트는 여러 편지에서 고갱이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갱이 떠난 원인은 자신의 경박한 행동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하고, 사랑하는 친구여!, 필요하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서로를 좋아하기를 바란다라는 등의 표현을 고갱에게 직접 쓰기도 했다. 비록 테오에게는 몹쓸 사람이라고 토로하기도 했지만, 당사자에겐 고통스러운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또한 자해가 아니라는 다른 근거는, 어떻게 자신의 귀를 자를 수 있는가 하는 심정적인 논리이다. 그런 소름 끼치는 행동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빈센트의 정신상태는 매우 취약한 상태였고, 사건 당일 증인들과 고갱의 알리바이를 종합한 결과 경찰도 자해 사건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에 그런 논리는 설득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덧붙일 것은, 귓불만 잘랐느냐, 귀 전체를 잘랐느냐, 아니면 절반만 잘랐느냐는 설이이다. 버나뎃 머리가 지은 <반 고흐의 귀>라는 책을 보면 귀 절단에 대한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 거의 전부 잘랐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지은이는 거의 소실되었지만 그래도 아를 시립병원의 의무기록을 조사한 것은 물론이고 당시 빈센트를 응급처치 했던 레의 자손을 만나 그에 대한 증언은 듣고, 그리고 병원 사료와 과거 신문이 보관된 시립도서관을 뒤져 사실 관계를 확보했다고 한다. 여기서 추적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지은이의 주장과 같은 설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것도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