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이었다. 카프카의 나이도 이제 어느덧 중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그의 위상이 높아져 진급을 거듭하여 실장까지 올라갔고 이젠 연금 자격도 얻은 나이가 된 것이다. 회사는 그의 병 치료에 최대한 신경을 써주었지만, 월급쟁이인 카프카의 입장에서는 한번 병가를 내기 위해서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차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출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렇게 3개월의 병가를 얻은 그는 당시 메론 요양소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요양소에서는 글쓰기가 전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이 막연하게 어떤 희망도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율리스 보흐리체크에게 청혼을 되돌리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처지였고, 그렇게 무의미하게 간간히 편지만 주고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4월 초, 위에서 얘기했듯이 어느 날 밀레나 예젠스카에게서 편지가 온 것이다. 번역해야 할 작품을 찾고 있던 밀레나가 어느 잡지에서 카프카에 대한 기사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의 작품 텍스트를 조사한 후 출판사와 협의하여 수소문 끝에 카프카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 편지에는 자신의 작품을 체코어로 번역하여 출판을 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장황하게 엮어져 있었다. 자신을 간단히 소개한 그녀는 몇 년 전부터 폴락의 절친인 베르펠로부터 카프카에 대해 전해 들어 익히 알고 있었으며, 전반적인 내용은 작가 정신이 투철한 카프카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에 카프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예로 들며 자신은 밀레나의 말처럼 위대하지 않고 그저 비천할 뿐이라고 응대했다. 카프카가 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예는 이렇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생의 곡절을 겪기 전, 20대 중반에 쓴 첫 작품 가난한 사람이란 소설은 거장의 첫걸음을 알리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작품을 읽은 평론가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그날 새벽에 그의 집을 찾아가 위대한 작가라고 찬양을 했다는 일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새벽에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경탄해 맞이 않는 극찬을 들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가 돌아간 후 그 열기가 식기도 전에 어두운 창가를 내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런 멋진 사람이 있다니, 얼마나 훌륭하고 귀한 사람인가. 그런데 나는 얼마나 비천한가... 내가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해도 그들은 믿지 않겠지...' 카프카는 겸손의 표현을 이렇게 에둘러 표한 것이다. 당시 카프카의 문학적 입지는 비록 대중적으로 찬사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식자들 사이에서는 요주의 작가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의례적인 것 일뿐 두 사람은 번역에 대한 비즈니스에 쉽게 합의를 했고 그 후 본격적으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더구나 원작자와 번역가로 첫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1년 전부터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가까워졌다. 특히 에른스트 폴락이 대놓고 벌이는 여성 편력 스캔들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어서 상대적으로 밀레나의 인성에 대한 평판도 문학계에서는 널리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가운데서도 두 사람의 감정은 마치 운명적인 만남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처음엔 카프카가 소극적인 반면에 밀레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분명하고 단호한 그녀의 표현에 그는 쉽게 무너졌다. '37살의 유대인인 내가 어떻게 젊은 유부녀인 당신에게 다가가겠는가. 나는 소리쳐 부를 수 없고, 당신은 나를 모르고,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어떻게 당신이 이 상황을 견딜 수 있겠는가...'라고 그는 밀레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 이런 사실에 대해 카프카는 브로트에게 고백했다. '그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불꽃이고, 지극히 사랑스럽고, 용감하고 영리하며, 자신의 희생을 통해 획득하는 성향‘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불꽃이었고, 카프카는 그 불꽃에 점지가 되었으며 그렇게 두 사람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불꽃의 생명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두 연인은 불꽃이 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화려하게 자신을 불태웠다.
카프카의 작품 <화부>는 4월 22일 크멘이라는 잡지에 실렸다. 이미 밀레나가 번역을 마치고 카프카의 승인만 기다리고 있다가 금방 인쇄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뜨거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카프카가 메란 요양소를 퇴소하여 프라하에 오자마자 그해 6월 29일 빈에서 첫 대면을 했다. 그들은 빈에서 7월 4일까지 매일 만나면서 데이트를 즐겼다. 그녀는 당시 첫 만남에 대해 카프카의 멘토이며 예전부터 알고 있던 브로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그의 불안에 대해 작품을 통해 잘 알고 있었고, 하지만 나와 만난 그는 불안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안을 비웃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천천히 산책을 하다 잔디밭에 앉거나 누워 쉬기도 하고, 때론 그는 세상모르고 잠을 잤고, 생각과 달리 그는 엄청 먹었고, 그는 긴장도 없이 편안했고, 그의 병도 그저 가벼운 감기에 불과했으며, 무언가 구원을 받은 듯했다...'
빈에서 헤어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열렬하게 편지를 주고받았다. 모든 관심사는 한 곳에 모였다. 밀레나는 저널리스트로서의 기질이 강한 작가였다. 브로트는 그녀의 글이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지만 카프카는 당시 최고의 기행작가인 폰타네의 편지를 들먹이며 호평해 마지않았다. 그녀는 당시 문학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던 자유주의 경향을 가진 진보적인 신문 트리브나의 정기 기고가였는데, 카프카는 일요일이면 그녀의 칼럼이 실린 일요일 판 신문을 사려고 가판대로 달려가곤 했다. 그녀가 쓴 칼럼은 당대 최고의 도시인 비엔나에서의 일상, 여성들의 패션, 주요 사건들,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평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카프카는 그녀의 글을 읽고 기사의 정교함과 생동감 넘치는 문장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브로트에게 떠벌렸고, 아예 큰소리로 보란 듯이 그 글을 잃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브로트가 보기에도 카프카는 정말 밀레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것도 모자라 전보도 주고받았다. 카프카는 밀레나의 전보를 받기 위해 회사생활을 하면서 일찍이 해보지 않은, 퇴근 시간을 뒤로 물러서면서까지 사무실에서 전보를 기다렸다. 언제 올지 모르는 전보를 말이다. 단어가 몇 개 밖에 되지 않는 전보지만 그래도 그 단어 하나하나는 천금과도 같은 사랑의 메시지였는지 모른다. 이렇게 깊은 사랑의 수렁에 빠져버린 카프카는 건강이 헤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랑의 집착은 그의 간을 손상시켰고, 브로트가 표현했듯 '지독한 흥분' 상태로 인해 도파민 과다 분비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브로트는 밀레나에게 편지를 보내 카프카의 건강을 위해 좀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밀레나는 우리의 사랑 전선에는 브로트의 걱정처럼 문제가 없고 오히려 카프카의 정신 상태는 좋아지고 있다고 해명하는 답장을 브로트에게 여러 편 보냈다.
꺼지지 않은 불꽃을 가슴에 움켜쥔 두 사람은 브로트의 염려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해 8월 중순 경 그뮌트에서 다시 만나 밀회를 즐겼다. 비엔나에서 7월 4일 마지막으로 만났으니 거의 6주 만이었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접경 지역에 있는 공업도시인 그뮌트는 거리상으로 비엔나와 프라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비엔나는 밀레나가 생활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유부녀인 그녀 입장에선 남의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프라하에서 데이트를 하는 것도 역시나 밀레나의 아버지와 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또한 카프카 역시 유부녀와 사귄다는 소문이 나면 가족은 물론이고 회사와 친구들이 불편한 시선으로 볼 께 뻔했기 때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뮌트에서 몰래 만난 것이다. 하지만 그 만남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어느 한순간 갈등이 고조되었다는 정황을 감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갈등의 단초는 발생한 것 같다. 사랑에는 애증의 메커니즘이 상존하기 마련이다. 사랑의 감정과 함께 시시콜콜한 갈등과 사소한 다툼은 항상 공존하기 마련이며 그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의 메커니즘이다. 두 연인도 그런 구조적 연관에서 갈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에서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를 잠깐 훑어보겠지만, 카프카의 너무나 솔직한 성정 때문에 그런 오해와 갈등을 낳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뮌트에서 만난 후 몇 개월 동안은 사랑싸움도 하는 등 알콩 달콩 잘 지내다가, 그렇게 사랑에 눈이 멀어 있다가, 무언가 현실 상황을 인식하면서 사랑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한다.
밀레나는 카프카를 나름 정확하게 직관하고 있었다. 그녀는 브로트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카프카를 논한다. '그의 금욕은 비영웅적이고, 금욕을 목적을 위해 도구화하지도 않고, 놀라운 형안과 순수를 지녔고 타협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금욕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며... 그의 생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기 지금 이런 생의 방식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고, 피할 은신처도 없고, 엄호물도 없고,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카프카를 구원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카프카는 그녀에게서 삶의 희망을 발견했고 영혼의 위로를 받았다. 자신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자아의 분열과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불안과 그리고 스스로의 고립은 그를 절망으로 몰아갔고, 그 차갑고 혼돈스러운 정신세계를 그녀가 포근하게 감싸주었던 것이다. 그는 그뮌트에서 프라하로 돌아온 후 며칠 있다가 자신의 말에 삐친 밀레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그대를 생각하면 가장 또렷이 떠오르는 그림이 그대가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오. 그대가 그뮌트에서 저녁에 풀밭에 누워 있었던 것처럼 말이오. 그런데 그건 괴로운 상상이 아니라, 사실 지금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상상이오. 그대는 침대에 누워있고, 나는 그대를 간호하면서 가끔씩 와서 그대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그대를 내려다볼 때에는 그대의 눈 속에 빠져들고, 그리고 내가 방 안에서 왔다 갔다 할 때에는 그대의 시선이 내게 머물러 있는 것을 느끼고, 그러면서 내가 그대를 위해 산다는 것과 내가 그래도 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느끼는 것, 그래서 그대가 한번 내게로 와 멈춰 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 시작하는 것 등등 말이오.'(밀레나에게 쓴 편지에서) 또한 그는 자신의 작품 성에 등장하는 프리다에게 이렇게 감정이입을 한다. '프리다를 손안에 두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이다. 프리다가 떠나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는 듯 몹시 불안할 만큼 행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소한 다툼과 갈등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은 아니었다. 사랑의 망각에서 잠시 빠져나왔을 때 카프카는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은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폐결핵 환자였으며 미루어 짐작을 하더라도 인연의 결과가 비극적 서사로 결말이 날 것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사랑의 결말은 고통스럽게 끝날 게 뻔했다. 그리고 자신이나 밀레나는 문학적 감수성이 예민하여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보충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시간이 지나자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애증의 크기가 시간이 갈수록 커질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럼으로써 그 갈등을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레나는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카프카를 붙잡기 위해 몸부림쳤다. 브로트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별을 고하는 카프카를 놓치지 않으려는 자의 뜨거운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카프카를 구원할 자는 자신이 유일하며, 그 어느 누구도 그의 불안한 심리를 케어할 수 없다고 설파한다. 그리고 그녀의 이런 고백은 다분히 이중적인 측면도 있다. 카프카는 사랑 행각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은 것을 항상 꿈꾸어 왔는데, 그녀는 폴락과 이혼하는 것만큼은 거부했고 그것은 카프카의 희망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카프카 사후 3년이 지났을 때 결국 밀레나는 폴락과 이혼을 했는데, 정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 자료는 없지만, 당시엔 이혼이란 행위를 무슨 종교적 금기처럼 여기며 카프카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신을 그토록 사랑한다고 하면서 바람둥이 폭락과 이혼을 하지 못하는 밀레나를 카프카는 이해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사랑하지만 결혼을 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정신적 공감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렇게 사랑의 욕망은 식어갔다. 편지도 보내지 말고 만나지도 말자는 카프카의 극단적인 표현에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던 그녀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한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그의 작품 <변신>의 마지막 번역 작업을 할 때는 정말 끔찍했었노라고 말이다. 아마도 짐작해 보면, 이별의 감정이 격해 있는 가운데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카프카의 일방적인 절교 선언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정제된 플라토닉 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남녀 관계에서 애증의 상처 때문에 이렇게 이성 친구로 변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들은 마지막까지 서로를 등지지 않았다. 카프카는 1921년 10월 프라하에 온 밀레나와 만나 자신의 원고, 즉 일기와 미완성 작품인 <실종자> 원고와 그리고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원고를 전달했다고 한다. 출간을 부탁한 것도 아니고 돌려달라는 조건도 없이 마치 마지막 선물처럼 그녀에게 준 것이다. 사실 그랬는지 모른다. 자신의 영혼을 갈아 만든 소중한 일기와 작품을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다. 아니 더 감성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는지 모른다. 그가 사망하기 전 디아만트와 브로트에게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라고 부탁을 했지만, 밀레나에게만큼은 대가 없이 자신의 영혼을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원고는 카프카 사후 몇 년이 지난 뒤 브로트에게 전해져 출간의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카프카가 부모집에 잠시 얹혀 살 때 그녀는 그 집에 방문하기도 하고, 병세가 악화되면 요양원에 병문안을 가기도 하면서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4.밀레나에게 쓴 편지
그럼 여기서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를 잠깐 엿보고 가겠다. 그의 생애 동안 수많은 편지를 썼지만 아마도 한 사람에게 이처럼 많은 편지를 몰아서 쓴 경우는 밀레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1920년 그해 7개월 동안에는 브로트가 건강을 염려할 정도로 뜨거운 열정을 발산했다. 하지만 그 많은 편지는 30년 이상 지난 후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 세상에 드러났다. 밀레나는 당시 카프카가 보낸 편지 다발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1939년 독일 나치가 프라하를 침공했을 때 레지스탕스 언론지에 관계했어야 했기 때문에 가택 수색을 염려하여 그 편지를 카프카의 친구이기도 했던 빌리 하스에게 보관을 요청했고, 그 편지 박스를 받은 빌리 하스는 1944년 다시 자신의 친척 집에 보관을 요청한 후 프라하를 탈출하여 인도에 가서 한동안 언론인 생활을 했다. 당시는 온 세상이 전쟁통이었기 때문에 그런 편지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편지의 행방을 잊고 있다가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더 지난 후 프라하로 돌아온 빌리 하스는 문득 그 편지의 행방이 떠올랐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친척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 편지는 온전하게 살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편지의 주인은 이미 세상이 없었다. 이에 편지를 어떻게 처리할까 망설이던 그는 1952년 그 편지를 당시 이스라엘에 정착해 있던 브로트에게 편지의 존재를 알렸고, 두 사람은 그 편지를 출간하기로 의기투합하였다. 브로트는 당시 카프카의 전기와 미출간 된 작품을 수집 정리 및 편집하여 세상에 알리는 등 일종의 카프카 전문가로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빌리 하스는 이 편지의 미래에 대해서 상의를 했던 것이다.
아무튼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제 편지 속으로 들어가 보겠다. 1920년 4월 두 번째 편지에서 카프카는 첨언에 ‘지금 생각났는데, 부인의 얼굴이 가물거리고, 나중에 테이블 사이로 지나서 나갈 때의 뒷모습과 의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라고 고백했다. 프라하 문학 서클의 모임이 있던 카페에서 처음 본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1920년 5월 29일 편지에서는 밀레나의 남편 폴락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한다. '문인들 중에서 가장 믿음직스럽고, 이해심 많고, 침착하고, 아버지 같은 성품을 지닌 사람이며, 특히 나의 절친 막스 브로트가 문학적인 면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노라고 썼다. 세상이 보는 폴락과 아내가 보는 폴락의 차이는 너무나 큰 격차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6월이 되자 호칭부터 달라진다. 부인에서 그대나 밀레나로 바뀐 것이다. 편지는 거의 매일 우체통에 던져지고 심지어 두 번씩이나 보내는 경우도 있었으며 그 편지 또한 장황해졌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수시로 전보도 주고받았다. 6월 12일 편지에서 카프카는 이렇게 토로한다. ’밀레나, 이 편지들이 우리 둘 다를 미치게 만드는구려. 무슨 말을 썼는지, 무슨 말에 대한 답인지도 모르겠고, 그러면서 계속 떨고 있으니 말이오 ‘ 그리고 6월 15일 편지에서는, '오늘 아침에 또다시 그대 꿈을 꾸었소... 내가 그대를 그저 말없는 임의의 여자처럼 대하면서, 그대 안에서 바로 나를 향해 말하고 있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아니 어쩌면 내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게 아니라 그 목소리에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오... 내 사랑하는 사람은 땅 위를 지나가는 불기둥이라오.' 카프카는 멜란 요양소에서 1920년 6월 29일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요양소에 있으면서 그의 유일한 낙은 밀레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요양소라는 공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지만, 그는 무슨 한이라도 맺힌 것처럼 자신의 내면에 있던 연애 감정 한 톨까지 토해냈다. 펠리체에게 쓴 편지는 의례적이면서 다소 엄격한 면이 있었다면, 밀레나에게 쓴 편지에서는 타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주체 못 하는 전혀 다른 카프카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열병이었다.
그렇게 3개월 가까이 격정적인 편지를 썼던 카프카는 7월 4일 비엔나에서 밀레나와 며칠간의 달콤한 데이트를 즐긴 후 프라하로 돌아와서 곧바로 편지를 또 썼다. 나흘 밖에 휴가를 주지 않은 회사를 원망하고, 가는 날 오는 날을 제외하면 비엔나에서의 시간은 너무나 짧았노라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지금 그대의 왼쪽 귀에 다 속삭이고 있는 중이오. 그대가 그 초라한 침대에 누워 좋은 원천에서 나온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누워 내 입술 쪽으로 향하게 되는 동안 말이오.’ ‘기차역에서 헤어질 때의 그대 얼굴이 너무나 또렷하게 내 앞에 있었소. 승강장에서의 그대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소. 구름에 덮여서 흐려지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흐려지는 햇빛 같은 모습이었소.’ 편지는 8월 그뮌트에서 밀회를 즐긴 후에도 계속되었다. 편지의 문장에서 중요한 단어들이 밀레니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으로 보아 그뮌트에서 그들만의 말 못 할 무언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문맥을 보면 카프카의 과거 여자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당시에 완전하게 정리하지 않고 있던 율리스 보흐리체크와의 관계가 의도적이지 않게 노출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된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진지한 카프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저 귀엽게 변명을 하기도 하고 때론 다정다감하게 도닥여주기도 하고, 가벼운 농담도 건넨다. 그리고 밀레나는 뾰로통하게 질투를 하기도 한다. 그 편지들은 평범한 여인 사이에 벌어지는 사소한 애정싸움을 보여준다. 또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사랑이 무르익자 문학과 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글을 쓰기도 하고, 프라하에 있는 밀레나의 아버지로부터 생활자금을 받아내기 위해 그녀가 꾸민 계책에 공범으로 참여하는 내용도 담겨 있고 또한 실생활에 필요한 잡다한 내용을 주제로 서로 알통 달콩 떠들기도 한다. 연인으로서의 관계와 생활인으로서의 관계가 겹쳐져서 편지의 내용은 한층 다양해졌으며, 개인사적인 일을 터놓고 얘기하고 때론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카프카는 8월 26일 편지에서 다시 기동연습 즉 야간 집필 작업에 돌입했다고 전하며 ‘가장 중요한 노획물’을 사냥하기 위한 영감이 고양되어 있노라고 전한다. 그 무렵 카프카의 본가는 오펠트하우스라는 동네로 이사를 갔는데 그 집 4층 방에서 2달 동안 집필에 매달린 것이다. 당시 썼던 작품이 <시의 문장>, <공동체>, <밤에>, <법의 물음 앞에서>, <독수리> 등이다. 비록 짧은 산문 같은 소설이지만 기도하는 심정으로 쓴 보석 같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당시 메모 수준의 머물러 있던 <성>의 플롯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 편지의 답장이 오기도 전에 이틀 후 그는 다시 편지를 썼다. 당시 자신의 작품집 <관찰>에서 6개를 선정해 번역작업을 하고 있던 밀레나에게 마술사 같은 번역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또한 그녀의 신장이 요양을 원할 정도로 좋지 않았는데 이에 자신이 요양원 입원 비용 일부인 1000크로네를 월마다 주겠노라고 썼다. 그리고 메란에서 받은 밀레나의 편지는 강한 목마름과 때론 입술을 깨물어야 할 정도로 격정적이었지만 그뮌트에서 만난 이후에는 표현 수준이 낮아져, 문장이 보다 안정되고 명료해졌다면서 카프카는 환영해마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차분해진 멜라나의 모습이 흡족했던 것이다. 처음 그녀는 경제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고 무엇보다 폴락과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매사에 신경질적이고 투정도 많았지만, 그래서 그녀의 편지 내용이 어두우면 카프카도 우울했고, 가볍고 쾌활하면 덩달아 행복했는데 당시는 그녀가 심적으로 안정을 찾고 있어서 카프가의 마음도 평온했는지 모른다. ‘나는 밤에 편지를 쓸 때면 아이처럼 정직하고 진지했고, 그대는 엄마처럼 그렇게 진지하고 잘 받아들이는 그런 대화’처럼 그는 그녀의 포근한 가슴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뮌트로 밀레나를 만나러 갈 때의 기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를 계속해서 엄습하는 이 모든 불안에도 불구하고 이 소유한 자의 무딤이 나에게 가능하다는 사실’에 그는 행복에 젖어들었다.
1920년 8월 30일 편지에서는 사랑하는 밀레나로 편지는 시작된다. 금실 좋은 연인 사이라고 해서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다. 보다 관계가 깊어져 공동체적 관계가 되면 다툼과 애증 같은 요소들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런 것은 이해나 공감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막아내기 힘들며 무엇보다 그런 갈등 구조를 어떻게 소화시키느냐가 중요하다. 카프카는 밀레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표현 방법이 너무나 세밀하여 오히려 부작용을 만들어냈다. 너무 깊은 내면의 소리를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서로 오해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등장인물에 대한 심리분석에 익숙한 소설가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프카의 편지는 11월에 접어들면서 이별을 알리는 내용으로 바뀌고 횟수도 확연히 줄어든다. ‘그대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밀레나, 그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모든 세상을 뛰어넘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내가 그대에게 매일 써 보냈던 그 종이쪽지들에 담겨 있지 않소. 이 편지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고통만 안겨줄 뿐이지요. 그리고 그 고통을 안겨주지 않는다면 그건 한층 더 나쁜 일이오. 그것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고작해야 그뮌트에서의 하루나 오해들이나 치욕, 거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이나 만들어낼 뿐이오. 나는 그대를 길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또렷하게 보고 싶어 하지만, 편지들은 그 시끄러운 레르헨펠더슈트라세 전체보다도 더 주위를 산만하게 하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쓴다. ‘편지를 바라보고, 편지를 통해 그대를 바라보았소. 때때로 나는 - 꿈에서 말고 - 이런 상상을 한다오. 그대의 얼굴이 머리칼로 가려 있소. 나는 머리카락을 가르고 좌우로 젖혔고, 그대 얼굴이 나타나오. 나는 그대의 이마와 관자놀이를 천천히 쓰다듬고, 이제 그대의 얼굴을 내 두 손 사이에 감싸고 있소.’ 이별의 아쉬움이 짙게 배어있는 편지였다. 그리고 며칠 후 그해 마지막 보낸 편지에서 그는 ‘편지들은 고통만 안겨줄 뿐이잖소. 치유될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나와서 치유될 수 없는 고통만을 안겨줄 뿐이오... 잠잠해지는 것 그것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오. 슬픔이 있겠지요. 좋소. 그게 어떻단 말이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편지 여백에 내가 요양원에 가게 되면 물론 그대에게 편지로 알려주리다라고 적었다.
카프카의 편지는 위에서 얘기했듯이 그의 일방적인 절교 선언으로 그해 11월 말경부터 중단된다. 그 사이에 밀레나는 브로트에게 카프카의 절교 선언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프라하로 직접 카프카를 찾아가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922년 3월 말 그는 다시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로 인해 편지에 매몰되어 서로 오해와 갈등을 초래했다는 심정을 회한하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영혼들의 끔찍한 혼란을 초래’했으며 그것은 ‘유령과 교신한’ 것이며, 편지로 소통하는 것은 ‘유령 앞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라고 편지의 병폐를 설파한다. 우리가 멀어지게 된 동기가 편지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자신의 감정을 너무나 솔직하게 밝히므로 해서 안 해도 될 말을 하여 오해를 사고 그 사소한 오해는 확증하기에 이르고 그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동안 편지 교환은 없었지만 서로 왕래는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카프카는 병세가 더 악화되어 직장을 퇴사한 후 투병 중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23년 10월에 밀레나는 카프카의 편지를 받는다. 이 편지에서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고 했으나 자신은 결코 프라하를 떠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노라고 고백한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는 밀레나의 편지가 가족들에 의해 소각되었노라고 고백한 후 자신의 부주의에 대해 사과를 하고, 베를린에서의 생활이 생각보다 지낼 만 하다며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생활이 힘들지만 그는 애써 숨겼다. 밀레나도 자신의 상황을 애써 숨겼는데 카프카는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물론 나 자신의 상태도 알아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요. 그런 것이 두려움이지요.’ 두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삶이 궁박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프카의 마지막 편지는 엽서 형태로 그해 12월 23일 베를린에서 붙여졌다. 베를린의 물가는 너무 비싸고, 신문 가격도 엄청 비싸 구입하는 데 부담이 되니 프라하에서 발행되는 니로드니 리스터에서 기사를 스크랩하여 자신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였다. 그 당시 베를린에서 도라 디아먼트와 궁박한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5. 단식 광대
이별의 고통을 감수하고 밀레나를 마음에서 떠나보낸 카프카는 그해 12월 마틀리아리 결핵 요양소에 입원했다. 결핵균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폐를 거의 잠식해 가고 있었다. 아마도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밀레나와의 이별 과정에서 받은 정신적인 내상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민한 성격의 그로서는 담담하게 그 과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이별 외에는 선택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도 그렇지만 사실 그는 결핵 치료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질병은 어떤 운명적인 거슬릴 수 없는 형벌쯤으로 내밀화했고 혹은 예술적인 상징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결핵은 예술가의 병이라는 다분히 문학적인 메타포가 횡횡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결핵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필적고의를 적용시켜도 논리상 어긋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진해서 입소를 했던 것이다. 삶에 대한 욕구가 우러나온 것일까.
카프카의 요양소 생활은 처음 생각보다 길어졌다. 여러 차례의 요양소 생활 중 가장 긴 9개월 이상 소요되었다. 3~4월에 병이 악화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연장을 한 결과였다. 그렇게 투병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요양소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던 로베르토 클롭슈토크를 만나 15살 차이의 나이와 가문의 역사와 그밖에 모든 차이를 초월한 참된 우정을 나눈다. 문학을 좋아하는 의대생이었던 그는 카프카라는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관계를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카프카의 폐쇄적인 성향은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지만 그 바리케이드를 해제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문학적 감수성이었던 것이다. 문학과 더불어 클롭슈토크는 반듯하고 배려심이 깊어 카프카가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카프카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을 함께 한 유일한 인물이다.
차도가 없다고 해서 요양소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는 8월 26일 프라하로 돌아와 사흘 후에 회사에 복직을 했다. 그리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에른스트 바이스와 구스타프 야누스와 그리고 민체 아이스너 등 문학 친우들과 만나 그동안 체증처럼 막혀있던 문학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그중에 구스타프 야누스는 청소년 문학도로서 카프카를 흠모하여 정식적으로 그와 인터뷰를 하였고 그 대화 내용을 엮어 추후에 출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프카와의 대화라는 제목의 그 작품의 내용을 보면 당시 정황과 함께 사실 진위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지금도 절판되지 않고 왕성하게 출판되고 있다. 그 의문 중에 하나가 당시 17살에 불과한 야누스가 과연 카프카의 대화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이다. 아무튼, 그런 가운데서 밀레나가 자신을 찾아왔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는 그녀에게 10월 초에 자신의 성궤인 일기장과 작품을 밀레나에게 넘겨주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그리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밀레나가 본 카프카는 병색이 역력했다. 이에 카프카는 주위의 만류에 따라 보다 체계적인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주위의 의견을 무작정 뿌리칠 수는 없었다. 몸이 쇠잔해지자 생각도 많아졌다. 만감이 교차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이제 마흔이 목전이었다. 브로트는 이미 오래전에 결혼을 해 자식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문학계에서도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카프카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작품은 고답의 그물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그랬다. 시작은 했으나 항상 결말을 보지 못했다. 점에서 멀어져 직선 운동을 하지 못하고 항상 원운동만 하고 있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진척이 없다가 도태되었고, 독문학도 보다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었지만 중도에 흐지부지 되었고, 시온주의와 히브리어도 관심의 범위 경계에서 항상 서성거렸고, 목공 기술을 배워 가구를 만들고 싶었으나 바쁘다는 핑계로 포기하였고, 독립을 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소리를 쳤지만 언제나 자신의 몸은 본가에 머물렀고, 그리고 펠리체와 두 번이나 약혼과 파혼을 거듭했으며, 보리흐체크에게도 불분명한 이유로 상처를 주지 않았던가. 그렇게 짙은 회한이 그의 내면을 안개처럼 들어찼다. 그렇다고 새롭게 시도할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몸은 결핵균에 의해 파괴되어 가고 있었고, 마음엔 신경쇠약이 독버섯처럼 자라나 그를 혼란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그의 불안과 고립은 더욱 심화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신경쇠약으로 집중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비젠게비르에 있는 슈핀델뮐레 요양소에서 3주를 보내고 돌아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2년은 마지막 영감이 폭발한 시기였다. 혹은 정신력으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단식광대>와 <어느 개의 연구>를 탈고하고 <성>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숨 막힐 것 같은 프라하 본가와 소음이 들끓는 오틀라의 집으로 집필 공간을 옮기면서도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그리고 카프카는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고 14년간의 회사생활을 마감하고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제 넉넉하지 않은 연금으로 생활을 해야만 하는 전업 작가를 자임한 것이다.
<성>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떻게든 자신을 간직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자신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망과 그 절박함이 그를 성으로 밀어 넣었는지 모른다. 그래야만 그 절망으로부터 잠시나마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성은 카프카가 피를 토하며 쓴 성스러운 작품이다. <성>의 배경과 인물은 현실에서 따왔다. 배경 마을은 오틀라가 살았던 취라우였다. 그 마을 풍경은 성 밖 마을의 배경의 텍스트이다. 그리고 K.의 애인이면서 클랙의 정부인 프리다는 밀레나가 모델이고, 성의 고위관료인 절대 권력자 클랙은 밀레나의 남편 에른스트 폴락이 모델이라는 설이 정설이라고 한다. 그 밖에도 영주의 저택은 비엔나에 있던 카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당시 비엔나의 문인들은 그 카페를 '창녀의 저택'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폴락이 프란츠 베르펠과 오토 피크, 에곤 에르빈 키쉬, 오토 그로스와 어울렸다고 한다. 물론 밀레나도 때론 그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성>은 그해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더 이상 쓰지 못했다. 그래도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성>의 페이지 수를 볼 때 그만큼 쓴 것만 해도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브로트가 손질을 했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미완성 작품은 위대하지 않을 수 없다. 카프카는 생전에 <소송>를 가장 사랑한 작품이라고 말했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일종의 번아웃 상태에서 쓴 <성>은 그의 영혼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소설은 카프카가 브로트처럼 오래 살았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결말이 없는 미완성으로 남겼을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소설은 미완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자신에 대한 하나의 삶의 의미로서 즉 실존적인 의미로 쓴 피의 변주곡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지경이 된 카프카는 오틀라의 집을 떠나 프라하로 돌아왔다. <성>을 쓰면서 자신을 너무 혹사시킨 것이다. 기력이 쇠잔해진 그는 많은 시간을 거의 누워서 생활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그 끔찍한 상황은 그를 더 이상 헤어 나오지 못하는 깊은 고독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말경에 밀레나가 번역한 <선고>가 체스터라는 주간지에 게재된다.
육신은 소멸되어 가지만 그는 펜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갈망이었다. 아니면 본능적이거나 무의식의 발현인지 모른다. 집필의 내면적 공간은 외부 세계를 차단할 수 있었고, 그런 실존적 고립 만이 그의 존재의 이유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으로서 그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에너지였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다시 프라하로 돌아온 그는 <부부>와 <단념하라>와 그리고 <비유에 대하여> 같은 짧은 소설을 썼다. 그 작품들은 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어떤 현자의 말씀처럼 통찰적 아포리즘의 결정체이며 세상을 방랑하는 시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그해 6월 프라하에서 마지막으로 밀레나를 만난 후, 7월 여동생 엘리와 함께 덴마크에 있는 뮈리츠로 여행을 떠났다. 요양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유대인 학생 수련회 캠프에 방문하려는 의도도 컸다. 겸사겸사한 여행이었다. 여름의 뮈리츠는 날씨가 온화하고 공기가 맑아 요양하기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매년 그 도시에서 방학 때면 유대인 청소년 수련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캠프는 7년 전 펠리체가 프로그램 교사로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카프카는 펠리체의 요청으로 학생들을 위한 교육적인 작품을 보내기도 했었다. 카프카는 캠프 프로그램에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히브리어를 공부하기도 하고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도 그런 고민을 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남달랐다. 과거 프라하 서클의 일원이었던 펠리스 벨치와 오스카 바움과 막스 브로트는 이미 열렬한 시온주의자가 되었고, 고등학교 동창인 휴고 버그먼은 몇 년 전 이미 가족을 데리고 팔레스카인으로 이주를 한 상황이었다. 당시는 많은 유대인들이 엑서더스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유럽인의 일원으로 남으려는 자와 시온주의에 동참하려는 자들로 구분되어 가고 있을 때 카프카는 항상 그렇듯 명백한 의도를 들어내지 않았다.
그렇게 캠프에 적응할 즈음에 카프카는 운명처럼 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도라 디아만트를 만났다. 카프카보다 20살(브로트는 전기에서 그녀의 나이가 당시 20살이라고 하나 다른 전기에는 25~26살이었다고 한다)이나 어린 그녀는 폴란드에서 온 유대인으로서 캠프에서 보조교사와 주방 보조 등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엄격한 동유럽 유대교 전통을 고집하는 부모의 속박을 견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그녀는 당시 배우가 되기 위해 베를린을 전전하던 상황이었다.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하시즈메 교육을 받았던 그녀는 이타적이며 희생할 줄 아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마치 성녀 같은 여인상이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넓은 포용력을 가지고 있어서 병약하고 신경이 날카로운 카프카를 보호할 줄 알았다. 그녀는 능숙한 히브리어로 카프카에게 유대교 서적을 읽어주기도 하면서 친근감을 표현했고, 이에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졌다. 그런 그녀의 영향 탓인지 모르지만 이성적으로 다가갔던 유대교에 대해 서서히 마음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무신론자였던 그의 믿음의 문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하시즘을 존중했고 그것만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순수한 헌신에 마음이 끌렸던 카프카는 그녀에게서 원초적인 위안을 받았다. 사실 카프카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이었다.
1923년 7월 말, 그렇게 뮈리츠에서 인생의 동반자로서 마음의 결의를 한 두 사람은 베를린으로 가서 동거를 시작했다. 카프카는 항상 그렇듯 가족의 반대에 부딪쳤지만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고, 디아만트 역시 독실한 유대교인이었던 가족의 반대를 이겨내야만 했다. 사실 두 사람 다 자신의 가족을 설득시킬 수 없는 가운데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한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누가 보아도 수긍할 수 없는 결합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베를린은 독일에서 반유대주의 바람이 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었다. 오래전부터 카프카가 동경하던 도시여서 프라하를 탈출하면 첫 번째 기착지는 항상 베를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도시는 사람을 강하게 해주는 기운 같은 것을 느꼈노라고 그는 브로트에게 말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그토록 원했던 프라하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하여 베를린에 가정을 꾸린 카프카는 처음엔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난로와 석유램프 같은 소소한 물건을 구입하고 조립하면서 일상의 안식을 만끽했다. 그를 찾아간 브로트는 그런 그를 보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보였다고 증언했다. 사실 당시 카프카는 일상의 행복을 느꼈으며 정말 가정을 꾸미려고 마음을 먹었다. 디아만트라면 인생의 동반자로 손색이 없었으며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구원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가정을 만들려고 했다. 그것이 현실이기를 갈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신봉했던 단독자인 키에르케고르를 배신하고, ‘결혼은 속박이지만 속박된 자로서 우리는 신의 자녀의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하지만 겨울부터 그 유명한 인플레이션이 베를린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베를린의 물가는 살인적으로 치솟았고 카프카 역시 그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 베를린의 경제 상황은, 세계 1차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연합국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독일 당국이 화폐를 마구 찍어낸 결과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번이나 이사를 하면서도 베를린을 고집했다. 처음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집주인이 두 사람을 수상쩍게 보고 퇴거를 강력하게 요구하여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거처를 옮겨야만 했는데, 미루어 짐작을 해보면, 누가 보아도 병세가 역력한 중년의 남자와 20살 밖에 안 된 젊은 처자가 함께 옹색하게 사는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괄시를 받으면서도 그는 베를린을 찾아온 브로트에게 큰소리를 쳤다. ‘나는 악마로부터 빠져 달아났어. 베를린으로 이사 온 것은 대단한 일이야. 지금 악마들은 나를 찾고 있겠지만 발견하지 못하지.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카프카는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생활에서도 본능적으로 집필을 이어갔다. 브로트가 베를린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카프카는 <작은 여인>과 <굴>의 일부분을 브로드에게 읽어주면서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브로트는 당시 카프카가 쓴 <작은 여인>, <작은 여판사>, <굴(Der Bau)> 등 4편의 소설을 모아 <단식 광대>라는 제목의 단편집 출간 계약을 체결해 주고 계약금을 카프카에게 전달했는데, 그 돈은 궁핍했던 카프카에겐 단비와 같았으며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여동생에게 답례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카프카는 자신의 폐가 목으로 전이되는 가운데서도 그 소설집의 교정과 편집에 직접 관여하며 문학에 대한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시 브로트는 그런 카프카를 보고 병세를 극복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작품 외 몇 개의 작품이 카프카의 지시로 디아만트가 소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카프카가 피를 토하며 쓴 마지막 작품들이 허무하게 재가 된 것이다. 그런 사실을 나중에 도라에게 들은 브로트는 땅을 치면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런 돌발적인 행위는 카프카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브로트에게 출간되지 않은 자신의 원고 전부를 불태워 줄 것을 당부한 것과 맥락이 이어진다. 자신의 작품, 즉 자신의 화신과 같은 작품을 불로 태우는 행위는 여러 가지 해석을 도출할 수 있는데, 카프카는 어떤 심정으로 그런 행위에 매몰되었는지 직접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진의를 확인할 수는 없다. 자신의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찢어버릴 수는 있지만 그리고 그런 행위는 소설가라면 다반사로 일어나는 행위이지만 소각하는 의식 행위엔 자신만의 어떤 특별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영혼을 화형 하는 일종의 광기일 수도 있고, 모든 게 부질없다는 허무의 발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개념을 적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아마도 그 자신도 그 행위에 대해 설명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냥 태웠어. 의미를 부여하지 마라...
제대로 된 작품 중에 마지막 작품으로 보이는 단편소설 <굴>을 잠깐 얘기하고 가자면, 미완성인지 아니면 성처럼 의도적으로 결말이 거부했는지 명백하지 않지만 그 작품엔 아직도 카프카의 광기가 살아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삶의 마지막 절벽에서 쓴 고백이며 기도이며 그리고 실존적 자유로 향한 외침인지 모른다. 작품에서의 굴은 지하의 미로 같은 구조물을 뜻한다. 자신이 구축한 그 굴에 쥐와 비슷한 짐승이 홀로 행복하게 사는 데 어느 순간부터 소음을 감지하고 그 소음과 치열하게 싸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음에 집착하여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면서 그 소음을 없애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소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며 소설은 끝난다. 오래전에 쓴 소음이라는 산문을 기억할 것이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소음에 집착하여 밤잠을 설친다는 내용 말이다.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힌 요소가 많은 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소음이었다. 소음은 편집증을 유발하여 매일 밤 그를 고문했다. 그 소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많은 평론가들이 설명하고 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일종의 욕망이 결부된 불안 의식의 한 형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프카의 병세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과 함께 더욱 악화되었다. 열악한 삶은 결핵균이 번식하는 데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카프카는 음식 솜씨가 좋은 도라와 함께 작은 레스토랑을 열어 자신은 웨이터로 일하는 상상을 한다. 도라는 주방에서 자신은 서빙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 꿈같은 상상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삶의 욕구가 강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잠시 건강이 좀 좋아졌을 때, 그는 유대학 대학 예비 과정에 등록하고 토르치너 교수와 구트만 교수의 탈무드 강연을 청강하고 비교적 쉬운 교재를 구해 읽었다. 하지만 2월이 되자 그는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거의 침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결핵균이 다시 번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런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도라도 돈이 없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저 카프카 옆에서 특별할 것 없는 간병을 하며, 때가 되면 먹지도 않지만 그래도 간단한 음식을 만드는 정도밖에 할 일이 없었다. 병세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을 때 집주인의 소개로 의사의 왕진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왕진비로 20마르크를 지불하고는 정말 베를린의 물가와 싸우는 것을 포기하려고 했다. 이렇게 까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베를린을 고집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카프카의 연금으론 고물가의 베를린에서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동생이 소포로 보내주는 구호품 정도의 생필품마저 없었다면 진작에 베를린을 떠났을 것이다. 그는 ‘해묵은 고통이 나를 찾아내 내동댕이쳤다’라고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시간이 더 지나자 상황은 잔인하게 카프카를 옥죄였다. 1924년 3월, 카프카의 여동생이 오빠가 걱정이 되어 그 집을 찾았는데, 처참함 상황을 목도하고 즉시 이 사실을 가족과 브로트에 알렸다. 그리고 통보를 받은 브로트는 카프카의 외삼촌 지그프리크 뢰비와 함께 황급하게 베를린으로 갔다. 의사인 외삼촌이 보기엔 가망이 없었다. 이미 결핵이 후두까지 전이가 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브로트와 지그프리트는 즉시 카프카를 데리고 프라하의 본가로 갔다. 그리고 며칠 후 병원을 수소문한 끝에 비엔나에 있는 결핵 전문 요양소에 카프카를 입원시켰다. 하지만 이미 회복 불능 상태였기 때문에 결핵 전문 요양소는 달리 손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특히 지독한 통증 때문에 영양분 섭취를 할 수 없어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후두암 전문의 하예크 교수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비엔나 북쪽에 위치한 키어링 요양소로 옮겼다. 치료는 했지만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그저 마지막 삶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모르핀과 판토폰 만이 그를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곁에서 서성거렸지만 그래도 애써 외면하며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항상 디아만트와 마틀리아리 요양소서 친분을 맺었던 젊은 의사 로베르토 클롭슈토크가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의 헌신은 카프카의 유일한 위로였고 구원자였다. 카프카의 ‘작은 가족’인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지극 정성으로 카프카를 돌보았고, 브로트와 벨취와 베르펠 등 많은 친구들과 가족들이 병문안을 왔고, 그리고 1924년 6월 3일 그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가 남긴 육필 메모 만이 어지럽게 그의 옆에 쌓여 있었다. 그 필담 중에는 브로트가 문병 같을 때 쓴 메모지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새로운 제목을 얻었다네.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족속. 이러한 혹은이라는 제목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네. 이 제목은 저울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네...’
프라하를 탈출해 베를린에 정착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그가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은 프라하였다. 그렇게 그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죽었다. 가족에게서도 이방인이었고 프라하에서도 이방인이었지만 그는 끝내 프라하를 떠나지 못했다. 그는 왜 릴케처럼 자유를 찾아 이 철옹성 같은 프라하를 떠나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가 더 살았어도, 1939년 프라하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브로트를 따라가지 않고 프라하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동생들과 함께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그에겐 프라하는 어떤 존재일까. 하지만 그 모두 부질없는 질문이다.
카프카가 사망한 후 3일이 지난 뒤 밀레나 예젠스카의 추도문이 나로드니 리스트 지 64권 156호에 실렸다. ‘그제 빈 근교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 근처에 위치한 키어링 요양원에서 프라하의 독일어 작가 프란츠 카프카 박사가 사망했다. 여기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그는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현자였으며, 또한 세상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몇 년째 결핵을 않고 있었다. 그는 병을 고치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병을 키우고 내심 장려하기도 했다. 영혼과 마음이 짐을 더 이상 짊어지지 못하게 되자, 짐을 적어도 좀 고루 나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폐가 그 짐의 반이라도 짊어지기로 했다고 그는 언젠가 한 번 편지에 쓴 적이 있다... 카프카 박사는 화부, 선고, 변신, 유형지에서, 시골의사, 법정 앞에서 등의 소설을 썼고... 그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그곳에서 조차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토록 섬세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던 예술가요 인간이었다.’
이 추도문을 쓴 밀레나는 그해 가을 비엔나에서 프라하로 돌아와서 정착했다, 폴락과 별거에 들어간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질곡을 벗어던졌는지 모른다. 그녀는 아직 28살에 불과했다. 프라하로 돌아온 그녀는 머리를 커트하고 해방된 여성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소망은 런던과 파리와 그리고 로마 같은 대도시에서 특파원 자격으로 여행하면서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이에 그녀는 사회주의에 심취하기도 하고, 프라하의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미네르바 출신 동창들과 여성운동과 관련된 저널을 발행하기도 했다. 폴락과 카프카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듯, 그녀는 강철처럼 강하고, 카프카가 표현한 것처럼 두려움이 없는 여인으로 완전히 탈바꿈을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연하의 젊은 건축가 야로미르 크레차와 사랑을 나누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카프카가 염려했던 것처럼 평생 동안 신장염으로 시달렸고 오른쪽 다리에 심각한 관절염이 발병해 결국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결혼 생활도 결국 야로미르 크레차가 새로운 애인이 생김으로 해서 파탄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타적인 차원에서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공산주의를 믿었으나 당시 레닌에 이어 등장한 스탈린의 철권통치를 목도하고 실망한 나머지 공산주의를 완전히 버려야만 했다. 당시 그녀는 공산당을 지지하고 공감하는 글을 많이 썼지만 당원으로 가입하거나 기부금은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이상향으로서의 공산주의를 믿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경제적으로 항상 어려웠던 그녀는 아버지 예젠스카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손녀를 위해 그는 최소한의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1939년을 기점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격랑의 전쟁 속으로 빠져든다. 잘 알다시피 그해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 역사적인 해이다. 나치 독일은 이미 1년 전 1938년 3월에 신성로마제국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반강제적으로 합병하였고, 1939년 3월에는 체코를 무력으로 침공하는 초유의 사건을 일으켰다. 전 유럽에 환난의 묵시록 같은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나치 독일군에게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프라하는 점령당한다. 이에 반기를 든 시민들이 반나치 저항운동을 시작하였고, 밀레나도 그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지하 저항지에 깊게 관여하여 투쟁에 대한 칼럼을 열정적으로 썼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요아킴 제드피츠 백작과 협력하여 많은 유대인을 폴란드나 동유럽으로 피신시키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군에게 추적당하는 레지스탕스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기도 했다. 이런 사실이 게슈타포에게 발각되면 온전치 못한 것은 명백했다. 이미 그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이에 그녀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그녀에게 위장 결혼을 하여 남미의 볼리비아로 피신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계속 저항 운동을 했다. 그러다 결국 1939년 11월 11일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그녀는 프라하 판크라치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되어 심문을 받은 뒤 독일 드레스덴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독일 북쪽에 있는 라벤스뷔르크 여성 정치범 강제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녀는 수용소에서의 온갖 핍박과 그리고 지병인 관절염과 신장염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암암리에 저항운동에 매진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밖에서는 밀레나의 석방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였다. 이 당시 연로한 아버지도 그녀의 석방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부모의 정을 느끼고 고맙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석방에 필요한 여러 자료들이 이런 노력에 불구하고 재로 변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수용소 생활이 막바지에 들어가 무렵인 1944년 봄, 그녀는 악화된 신장염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신장 제거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이 수술 과정에서 수혈에 문제가 생겨 의식불명에 빠진 채 결국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5월 17일 카프카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녀는 1994년, 홀로코스트로 사망한 유대인을 추모하는 단체인 이스라엘 야드 바셈으로부터 의인으로 선정되어 그 기념관에 이름이 기록된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유대인을 구출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을 일컫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영화로도 만들어진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이다.
카프카는 동시대에 몽파르나스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던 모딜리아니처럼 결핵균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41살의 나이에 하늘로 갔다. 흔히 그의 이름과 함께 따라다니는 것들은 고립, 폐쇄, 불안, 고독, 소외 같은 음울한 단어들이다. 하지만 그런 단어들은 문학 세계에서 통용되는 것들이고 일상에서는 반듯한 회사원이었고 가정에서는 전형적인 유대인 가풍을 따르는 착실한 아들이었다. 문학에서 보는 시각과 삶에서 보는 시각은 이질적이다. 다른 예술가들도 예술과 삶의 궤적이 다르지만 카프카의 정도는 전혀 다른 사람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 카프카가 이 카프카인가. 그의 작품 면면을 보면 인간적인 면이나 삶의 희망이나 사회적인 비판과 정의 같은 내용은 찾을 수 없고, 그에 따라서 문장 또한 그것을 반영한다. 여기서 그의 작품에 대해 감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의 문학은 어둡고 환상적이며 독백적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인 것 같지만 결국 도달하는 곳은 개연성과 당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중간계이다. <변신>과 <소송>과 <성>이 모두 그렇다. 식자들은 그것이 바로 인간의 깊은 내면에 있는 어두운 부분을 들추어낸 것으로 보며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리얼리티라고 설파한다. 그런 문학세계에서의 그의 평가와는 달리 일상에서의 카프카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인다는 점이다. 작품과 작가를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평가이다. 흔히 평론가들은 작품을 논할 때 작가의 삶을 끌어들여 접목시키려고 하는 데 그런 방법론은 그 개인의 인생을 모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고 정도는 될 수 있지만, 작품은 작품이고 개인은 개인일 뿐이다.
카프카는 헤르만 카프카의 집안에서 돌연변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양가에서 예술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찾을 수 없고, 형제들 중에서도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독재자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글 쓰는 행위를 그저 취미쯤으로 여겼다.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이 출간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넌지시 자랑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아버지의 반응은 전혀 무관심이었다. 그런 편견은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물론 어머니도 아들이 꽤 전도 유망한 소설가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공부 잘하고 예민한 자식으로 취급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동생 전부도 오빠의 글쓰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막내동생 오틀라가 10대 중반이 되었을 때 오빠가 소설가라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런 사실을 간파한 카프카가 흡족하게 여기고 자신의 작품 일부를 읽어주고는 했었다. 그렇다고 오틀라가 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관심만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카프카가 외향적이어서 가족과 살을 비비면서 정겹게 생활하지도 못했고 항상 조연이나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아마도 자수성가한 상인으로서 세속적이었던 아버지의 막강한 권력과 폭력 앞에 장남이었던 카프카는 어떠한 능력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잘 것 없는 나약한 존재였다. 그저 맨날 자신의 방에 틀어 박혀 있는 답답한 아들이었고, 간혹 집안 여자들한테 짜증을 부리는 소심한 오빠에 불과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아버지의 명령에 마지못해 가업을 도와주고는 브로트에게 저주의 투정을 부리는 어리석은 아들이었다. 그는 집안에서 이방인이었다. 가족과 그의 경계선은 선명했다. 함께 살지만 항상 그는 가족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자신도 가족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가족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을 떠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프라하도 떠나지 않았다. 제임스 조이스처럼 문학적 자유를 찾아 머나먼 길을 떠나지도 않았고 그저 길모퉁이 건물 모서리가 닳도록 그 도시를 마지막까지 지켰다. 문학적 사유와 상상을 찾아 드넓은 세계로 떠나는 탐험을 그는 마지막까지 거부했던 것이다. 오직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프라하 어느 골방에서 정신승리를 꿈꾸었을 뿐이다. 그렇게 삶과 문학적 공간에서 이방인을 자처하면서도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꿈꾸기도 했지만 그 자신도 실현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브로트는 카프카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시오니즘을 행동으로 실행했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일 뿐 사실 카프카에게 행동의 동력이 그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카프카에게 시오니즘은 종교적인 신념도 아니었고 민족적인 이데올로기로도 작동되지 않았다. 당시 인종주의와 더불어 반유대주의가 유럽 사회를 긴장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당사자로서 관심을 가진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유대인 세계에서도 결국 이방인이었다. 브로트를 비룻한 유대인 친구들에게 같은 민족적 연대감을 염두에 두고 시오니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것일 뿐 행동에의 의지는 타오르지 않았다. 카프카가 여동생들처럼 어느 유대인 수용소에서 독가스에 의해 주검을 맞이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정말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이방인을 자처한 그의 행동으로 볼 때 그런 장면의 개연성은 타당하지 않을 수 없을지 모른다. 어느 공간에서도 이방인이었던 카프카는 그런 운명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