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는 너무나 많이 알려진 화가이다. 적어도 미술 역사에서 볼 때 그는 가장 비싼 화가라고 해도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서관이나 서점을 둘러보면 그에 대한 전기물도 예술가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을 쉽게 알 수 있고, 영화와 각종 미디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더구나 그는 800통이 넘는 편지를 쓰고 그에 상당하는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거의 외톨이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정보가 남아 있다. 그렇게 문자로 남은 그의 삶의 수많은 편린들은 드라마적인 요소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되었다. 또한 종교와 문학을 심탐한 결과 사유의 층이 두꺼워진 그의 복잡한 내면을 탐험하는 것도 하나의 진지한 흥밋거리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빈센트는 말년에 400프랑짜리 작품 하나만 팔린 요샛말로 듣보잡 무명 화가에 불과했고 그의 삶 또한 단내 나는 불행한 아웃사이더였다. 그의 삶의 족적을 따라가는 것은 그래서 편치 않다. 아마도 사후에 이런 드라마틱한 반전을 가진 예술가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아방가르드와 보헤미안이 혼합된 예술가의 전형이었다.
내년이면 서른 살이 되지만 빈센트는 아직도 안착하지 못하고 부표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미래는 불확실했다. 자신보다 4살 어린 테오는 이미 화상으로서 입지를 다져 구필 화랑 파리 본사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빈센트는 여전히 삶의 뒤안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빈센트도 처음엔, 구필 화랑의 공동 창업자가 삼촌 센트 반 고흐이듯 전통적으로 화상들이 많은 집안이어서 자연스럽게 10대 때부터 화상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목사였던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당초 큰 아들을 목사로 만들고 싶었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가정교사를 들여 기본적인 교육만 시킨 후 어린 나이에 직업전선에 내몰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중성과 야합을 해야 하는 화상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자의반 타의반 그 세계를 떠났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고집스러운 면모를 그 과정에서여실히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영국에서 기숙학교 보조교사 일을 하기도 하고, 네덜란드로 돌아와서는 서점점원으로 근무하는 등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드디어 아버지의 가업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선택한다. 사실 가업을 잇고자 한 것은 아니고, 런던에서 우연히 만난 목사의 권유로 인해 어떤 계시를 받고 사목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탕아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에 목사인 아버지는 반기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어릴 때부터 성경과 너무나 친근했기 때문에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7년 동안 공부를 해야만 했는데, 빈센트는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인생을 투자할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소개해준 신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적으로 신학공부를 하였으나 몇 개월 만에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고 자퇴를 했다. 신학교 교수도 빈센트가 사목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신앙심은 남다르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어서, 이에 빈센트에게 설교자나 전도사 같은 평신도 사역자가 적성에 맞을 것 같다는 견해를 보였다. 설교자나 전도사는 1년 이내에 일정한 교육을 수료하면 자격증을 받을 수 있어서 빈센트는 이 차선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종교관은 광신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자신은 보리나주 광산촌 같은 세상의 바닥에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려고 했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먹는 것을 최소한으로 했고, 맨발과 누더기 옷을 입고 다녔고, 마구간 짚단 위에서 잠을 잤고, 또한 거의 씻지 않았다. 마치 초기 기독교 수도승 성 안토니처럼 가장 낮은 곳을 지향했다. 이런 고행과 같은 신앙생활은 타인이 볼 때는 자기 학대였고 심하게 표현하면 미치광이였다. 낮은 데로 임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낮은 데를 지향하여 역효과를 낸 것이었다. 과잉적 복음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지만 빈센트가 보기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십자가의 삶을 영위하려는 그를 세상은 광신자 혹은 기독교 극단주의자로 내몰았던 것이다. ‘사제직의 존엄성을 훼손’시킨 대가로 파면을 당한 그는 실망할 만도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세상과 싸웠다. 그에겐 성전과도 같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큰아들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기 위해 가족과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진단서가 없으면 입원시킬 수 없었다. 그 대신 가족 모두의 동의가 있으면 입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아버지는 이를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인지한 빈센트는 황급히 집에서 야반도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은 빈센트는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일견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신병원에 보내려던 의도는 지나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화상과 평신도 사역자로서 쓴맛을 본 빈센트는 몇 개월 만에 에턴에 돌아온 후 게으른 백수가 되어 밥 만 축내고 있었다. 어느 때는 몇 날 며칠 디킨스의 작품만 읽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카드의 석판화가나 회계사나 목수와 제빵사 같은 직업을 선택해서라도 앞으로 살 궁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전 브뤼셀에서 아브라함 피터르선 목사에게 권유받은 화가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피터르선 목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문득 어떤 예술가의 소명 같은 것을 느꼈다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목회자의 길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묻어두고 있었는데 그때 그 소명이 바오로의 회심처럼 솟구친 것이었다. 테오도 형의 이런 의도에 찬성하고 그렇다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독려했다. 사실 빈센트는 뛰어나지 않지만 그림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데생을 심도 있게 배운 적이 있었고, 비록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대신 화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로서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으며, 화가라는 직업이 낯설지 않았다. 당시 렘브란트, 루벤스, 베르메르 등을 배출한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200 여전부터 정물화와 풍속화 등이 대중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으로 회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남자아이들은 그렇게 부모로부터 회화에 대해 예비 시험 같은 것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빈센트가 어릴 때 재능이 뛰어났다면 어머니에 의해 이미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화가로서 소명을 받은 빈센트는 1880년 가을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회화를 배우기 시작한다. 수업료는 무료였다. 그리고 당시 파리 본사 구필화랑에서 전도유망한 화상으로 성장해 있던 테오는 그림을 시작한 형에게 매달 생활비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버지를 통해 주다가 빈센트가 가출을 했을 때는 한 달에 100프랑을 직접 주었다. 100프랑은 당시 공장 노동자의 급여의 몇 배였다고 한다. 물감 값이 비쌌기 때문에 그 정도의 액수는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다. 아무튼, 테오는 형으로서의 빈센트를 다른 가족과는 달리 존중했고 그림에 대한 재능에도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형에 대한 존중의 표시가 아니라 화가로서의 빈센트의 미래를 낙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기초도 부족한 늦깎이 화가의 미래를 아예 무시해지만 테오는 정말 진심으로 빈센트에게서 남다른 천재성을 간파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난파할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빈센트를 독려하고 전폭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테오에 대해 앞으로 말할 기회가 많겠지만 테오 없는 빈센트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긴밀했다.
그렇다고 화가가 되는 것 또한 목사가 되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회화의 기초부터 가르쳤기 때문에 갈 길이 바쁜 빈센트로서는 따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데생의 기초 정도는 어느 정도 마스터 했다고 자부하였던 터라 교육을 따라가는 것이 지루했던 것이다. 그렇게 참을성이 부족했던 빈센트는 더 이상 아카데미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퇴를 했다. 그리고 자신을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했던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 착실하게 회화를 독학하기 시작한다. 당분간 오갈 데 없는 처지였고, 당장 회화를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타협을 한 것이었다. 속이 타는 부모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필요한 말 외에는 가능하면 하지 않는 조심스러운 동거였다. 그렇게 9개월이 지난 1881년 말 경, 사촌 매형 격인 안톤 마우베가 빈센트의 사정을 알고 그를 자신의 견습생으로 받아주었다. 네덜란드에서 꽤 잘 나가는 화가였던 마우베는 빈센트에게 데생을 물론이고 수채화와 유화도 함께 가르쳤다. 그리고 빈센트가 작업할 수 있는 화실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자금도 빌려주었다. 그는 빈센트의 재능이 처음 생각보다 범상치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심 놀랬다. 하지만 그놈의 성깔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한 달 만에 틀어지기 시작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빈센트의 까칠한 성격을 받아 줄 수 없었지만 마우베는 끈질기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원래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한계에 도달한 마우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빈센트와 부딪히고 말았다. 두 사람은 그림 주제에 관한 사소한 문제로 한바탕 언쟁을 벌였고 이에 빈센트는 홧김에 마우베의 화방을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우베는 훗날에도 빈센트를 존중했고, 빈센트도 1888년 아를 시절 마우베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애도하는 표현으로 <복숭아나무> 작품을 헌정했다고 한다.
그 당시 빈센트는 사랑의 열병을 호되게 앓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유명한 목사이며 신학자였던 이모부 요하네스 스트리커의 집에 잠시 기거하던 빈센트는 남편을 잃고 친정에 와 있던 외사촌 누나 케이 포스와 급속하게 친숙해졌다. 문학과 예술에 대해 서로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친밀감이 상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빈센트의 감정은 큐비트의 화살을 맞은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그 사랑은 충동적이었고 집착에 가까웠다. 빈센트는 급기야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로서 빈센트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감수성이 풍부한 6살 어린 사촌 동생으로 만족했을 뿐 이성적인 감정은 일도 없었다. 그녀는 저돌적인 빈센트가 어떤 괴물처럼 느꼈는지 모른다. 빈센트의 충동적인 청혼에 그녀는 아니야, 아니야, 절대로!라고 소리를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아예 이모부를 만나 결판을 내려고 했다. 그의 무모함은 누구도 저지할 수 없었다. 이모부의 집을 찾아간 빈센트는 자신의 요구가 묵살되자 급기야 자기 손 등을 촛불 위에 올려놓고 승낙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승낙해주지 않으면 손을 치우지 않을 태세였다. 이에 놀란 이모부는 보다 못해 촛대를 치워버렸다. 그렇게 빈센트는 그 집에서 강제로 쫓겨나고 말았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그의 이런 행동은, 광기가 드러나는 일화로 남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계가 되었다. 종교에도 광신적인 성향을 보였듯이 사랑에서도 광적이었다.
이런 격렬한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는 도망치듯이 다시 에턴을 떠났다. 어느 누구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는 헤이그로 가서 사랑의 아픔을 잊기라도 하듯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882년 1월이었다. 이제 화가가 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뒤로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는 절박했다. 정식적인 회화 교육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무모한 행보였지만 자신의 열정을 믿었다. 삶에서도 실패하고 사랑에서도 실패를 맛본 후 그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보상 심리의 기작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절박했던 그에게 한 여인이 나타난다. 사창가에 가서 알게 된 클라시아 호르닉이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녀는 당시 32살의 창녀였다. 깡마르고 키가 큰 그녀의 얼굴엔 천연두 흔적이 역력했고,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목소리에서 항상 쇠 소리가 났으며, 매춘을 하지 않을 때는 세탁부 일을 해서 손은 항상 거칠었다.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였던 그녀는 사람에 따라서는 혐오스러운 대상이기도 했다. 빈센트는 그녀를 시엔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녀에게 5살 된 딸과 아버지가 누군지 모를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하지만 빈센트는 목사도 저주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에게서 묘한 퇴폐미 같은 매력에 사로잡혔는지 모른다. 아니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적인 사랑인지, 혹은 인본주의에 따른 이타적인 사랑인지는 모르지만 빈센트는 이 불행한 여자를 사랑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는 모델비를 주면서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 창녀 생활을 접는 대가로 그녀가 사는 집의 임대료를 대납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그녀의 집에서 동거를 하면서 생활비도 전담했다. 그는 그녀의 누추한 집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때로는 호르닉이 술에 취할 때면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죽을 듯이 대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엔 빈센트는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에게서 성병도 얻었는데 그것 또한 개의치 않고 많은 돈을 쓰면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호르닉의 딸과 아들 / 슬픔(호르닉)
그들의 동거는 누가 보더라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정상적이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빈센트는 한 발 더 나아가 테오에게 그녀와 결혼을 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읽은 테오는 그것은 형의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극구 반대했다. 그리고 형이 그렇게 한다면 가족 모두는 이번엔 정말 형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테오의 이런 단호한 반응이 아니었다면 빈센트는 충동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유부녀 창녀와 결혼하는 것이 본인에게는 문제시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의 사회적 네트워크 환경과 보편적 통념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회적 편견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극단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기이한 동거가 이어지면서 호르닉은 마취까지 하는 산통을 겪은 끝에 아이를 출산했다. 그렇게 빈센트는 졸지에 세 식구를 거느린 가장이 되었다.
그렇게 누가 뭐라 하든 꿋꿋하게 자신의 가정을 지키면서도 빈센트는 그림에 몰두했다. 당시 그는 테오에게서 오는 생활비를 쪼개 써야 했기 때문에 돈이 적잖게 드는 유화보다 드로잉에 열중했다. 풍속화나 잡지의 삽화를 그려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드로잉은 숫이나 흑연이나 목수용 연필 같은 간단한 도구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표현할 수 있었다. 유화만큼의 표현은 아니더라도 예술적 감각을 유지시켜 줄 수 있었다.
데생은 회화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많이 그린다고 손해 볼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근자에 미술 아카데미에서 진득하게 공부를 하지 못하고 몇 개월 만에 포기한 것에 대해 그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에 항상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그렇다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가벼운 처신에 대해 자책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데생이 투박하고 섬세하지 못한 특징은 노력해도 시정이 되지 않았다. 추상주의나 표현주의를 추구하더라도 사실적 묘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은 회화의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그는 그런 능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항상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부족한 데생은 유화로도 이어져 항상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을 받기 일쑤였다.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화가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운명적인 창작자를 자임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절박함의 일환일 수도 있었지만, 신의 계시를 받은 구도자처럼 항상 경건하게 붓을 다루었다. 보잘것없는 소품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향한 기도처럼 자신의 영혼을 불살랐다. 그것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진정한 작가정신이었다. 그는 독립적 시각을 가진 예술가였고, 그것은 놀랍게도 광기 같은 집념으로 유지되었다. 그런 고집스러운 신념으로 인해 세상의 무관심과 폄훼와 백안시를 극복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당시 그는 그나마 돈이 되는 풍경화를 그리지 않고 오로지 초상화나 적어도 사람이 주인공인 인물화를 그렸다. 그것도 모두가 가난한 프로레타리아들이 주인공이었다. 척박한 보리나주에서 광부들과 함께 생활한 것도 그리고 늙은 창녀 호르닉과 동거한 것도 그런 작품을 육화 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는지 모른다. 바르비종파 특유의 목가적이면서 관조하는 세계가 아니라 직접 격은 체화된 표현을 극대화시켰던 것이다. 물론 대중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주제였다. 또한 그런 주제를 당시 네덜란드 미술계의 한 조류였던 그리자유 같은 잿빛 화풍을 추구함으로써 더욱 대중성과 대립하는 경향을 보였다. 당연히 그의 작품은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습작 수준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빈센트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호르닉은 자신의 어머니와 오빠의 꼬임에 넘어가 다시 몸을 팔기 시작했다. 빈센트의 몇 푼 안 되는 생활비로 근근이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자신들에게 와야 할 돈 줄마저 끊기게 되자 그들이 그녀에게 매춘을 해야 한다고 강권을 했고, 이에 그녀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다. 빈센트가 만류했지만 전세를 회복할 수 없었다. 빈센트의 헌신은 그렇게 무참히 무너졌다. 이에 낙심한 빈센트는 이제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테오가 더 이상의 관계 유지는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를 하자 그 가족으로부터 물러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제야 현실을 인식했는지 모른다. 호르닉의 삶이 있고 빈센트의 삶이 있으며 그런 삶은 각자의 고유 영역이 있는 법이다. 그런 영역이 무너지면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한때 사랑에 눈이 먼 빈센트는 이제야 본연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빈센트는 그녀를 떠났다. 그녀도 그런 빈센트를 말리지 않았다. 1883년 9월 어느 날, 헤이그 역 플랫폼에서 호르닉은 한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나와 빈센트를 배웅했다. 자신을 아빠처럼 잘 따르던 아이였다. 집에 들어가면 늘 그 아이의 친구가 되어주곤 했었다. 그리고 이별 후 얼마 되지 않아 호르닉이 다시 세탁부로 일을 한다는 소식을 접한 빈센트는 감동을 했다고 전한다.
그렇게 1년 8개월 만에 호르닉을 떠난 빈센트는 네덜란드 북부에 있는 드렌터주로 아무도 모르게 스며들어갔다. 빈센트의 표현에 의하면 ‘상처 입은 동물처럼 홀로 숨어들었다.’ 드렌터는 빈센트와 연고가 전혀 없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고독과 함께 작업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처음 하숙집을 얻어 안착할 즈음에는 마우베의 문하생 출신인 헤르만 빌레와 파리 구필 화랑에 근무할 때 알고 지냈던 화상 엘베르트 비셀링이 찾아와 격려를 해주기도 했지만, 안락함을 뒤로하고 회화 학습을 위해 고독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을 ‘안개와 영원히 썩고 있는 이탄이 우울하게 뒤덮인 땅’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잿빛 색채만큼이나 그곳도 어둡고 습한 지역이었다. 그렇다고 거부감이 앞서지는 않았다. 이탄은 석탄 생성 전단계의 탄소화합물로서 석탄처럼 연소가 잘되지 않아 연료로 부적합했지만 가난한 드렌터 지역에서는 땔감이 부족하여 이탄을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회색빛이 감도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이탄 더미에 덮인 오두막>이란 작품을 보면 우울함을 확인할 수 있다. 빈센트는 그 암울한 도시에서 무거운 화구를 짊어지고 미친 듯이 풍경을 찾아다녔다. 그곳에서는 그런 화가의 모습을 처음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삐쩍 마르고 후줄근한 외모에 금방 넘어질 것 같은 커다란 화구를 짊어지고 거리를 활보하는 빈센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기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빈센트는 그런 시선 정도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주민들의 냉담함에는 견딜 수 없었다. 마을 전체에 배타적인 분위기가 역력했던 것이다. 초상화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델 요구를 묵살하기 일쑤였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광인으로 취급하여 동네 아이들이 돌까지 던지기도 했던 것이다. 이 기괴한 불청객을 그들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는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풍경화만 그리겠다고 한다면 사람과의 접촉을 줄일 수 있었겠지만 초상화를 그려야 했기 때문에 가까운 동네 사람들과 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엔 1년 정도 상주할 것으로 계획을 세웠으나 3개월 만에 두 손을 들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것도 야유를 받으면서. 더 이상 관계가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그 마을에 산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작업적인 측면에서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드렌터에서 쫓겨난 빈센트는 갈 곳이 없었다. 무턱대고 아무 데나 간다면 드렌터의 경우처럼 또다시 실패를 맛볼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미술계의 아웃사이더인 그를 반겨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업계에 인맥도 없었고 자신을 도와줄 지인 층도 매우 빈약했기 때문에 갈 곳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나마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었던 마우베의 호의마저 차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경제적인 이유였다. 테오가 보내준 생활비를 알뜰하게 쓰지 못하고 항상 부족하여 하숙집 주인과 눈살을 찌푸리는 일들이 잦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도움을 받는 것도 부담에 되는 데, 테오에게 돈을 더 달라고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부모가 살고 있던 브라반트 주 뉘넌에 있는 교회 사택으로 발길을 옮겼다. 12월이었다. 그날은 비와 눈이 휘몰아졌다. 그는 뉘넌행 기차를 타기 위해 6시간 동안 겨울 폭풍이 몰아치는 황야를 걸어서 후그벤으로 갔다. 테오에게는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몸소 겪었다고 자조 섞인 표현을 했지만, 그 행위는 새로운 환경을 접하기 전에 마음을 추스르기 위한 일종의 결연한 의식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상처가 생체기처럼 깊게 남아 있었지만 현재로선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것만이 현재 최선의 방법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에턴에서 뉘넌으로 근무지를 옮긴 상황이었다. 아무튼 돌아온 탕아가 처음 한 것은 사죄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마음의 앙금을 품은 상태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감정만 악화되는 것이기에 화해는 아니더라도 충돌함으로 해서 격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정화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은 죽일 듯이 싸웠다. 아버지는 목사라는 허영심에 젖어 있노라고 힐난한 빈센트는 왜 나를 미치광이 취급을 하여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했냐면서 거품을 물고 따졌다. 빈센트로서는 아버지의 그런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그저 서투른 환쟁이’, ‘더러운 짐승’ 같은 막장 단어들을 쏘아대며 맞섰다. 하지만 아버지도 그런 자신의 행위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독설을 퍼부으며 탈진할 때까지 싸우고 지쳐서 쓰러졌다.
그렇게 한바탕 살풀이를 하고, 미우나 고우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빈센트를 거두어준 부모는 한편으론 속이 타들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서른이 넘어서도 결혼도 못하고 백수로 세월을 보내는 자식을 너그럽게 여길 부모는 없을 것이다. 빈센트가 빨리 독립하는 게 소원이었다. 부모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빈센트는 태평스럽게 화구를 둘러매고 뉘넌의 골목길을 활보했다. 뉘넌 사람들은 처음엔 기인 같은 외모에 성격도 고약한 빈센트를 경계했지만 점차 친해졌다. 아마도 목사의 자식이라는 관계가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을 것이다. 목사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드렌터 사람처럼 빈세트를 가만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빈센트는 처음엔 <오두막>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마치 성화처럼 기독교적인 은유가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빈센트는 이런 오두막을 여러 편 그렸는데, 아마도 낮은 데로 임해야 한다는 의미로서의 교회 이미지와 그 안에서 안식을 취하려는 심중을 담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정물화도 그렸고 점차 배경이 있는 초상화를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모작하기도 하고, 그를 모방하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부와 촌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양한 풍경화도 그렸다. 당시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은 <직조공> 시리즈였다, 12편의 연작으로 이루어진 이 <직조공> 그림은 하나의 주제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 실험적인 작품으로서 빈센트의 당양한 미학적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인물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적당한 모델을 선정하고 만나 의향을 묻고 대가를 지급해야 하는 따위의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보다 원만해야만 했다. 한 자세로 몇 시간씩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하는 모델은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고, 자신의 얼굴을 세상에 알린다는 것 또한 프라이버시와 관계되는 것이어서 선 듯 응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모델비와 함께 설득이 필요했으며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좁은 바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가운데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마르훗 베레만이라는 여인과의 관계가 대표적이었다. 빈센트는 마르훗과 연분이나 결혼까지 하려고 했으나 상대방의 부모가 그 결혼을 극구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심지어 온갖 중상모략을 하며 결혼을 막았다. 신흥 자본가의 입장에서 하찮은 무명 화가이면서 정상적으로 교육도 받지 못한 무일푼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마르훗이 음독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결혼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리고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파경 이후 빈센트는 마음을 달래려고 피아노를 배우지만 색채를 음계와 비교하고자 하는 기괴한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펼치다가 렌슨 선생으로부터 내쫓기고 말았다. 형이상학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는 억지와 궤변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떤 논리를 폈는지 모르지만, 음악과 미술과의 관계를 연결하고자 하는 발상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단지 논리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튼, 그 후에도 빈센트는 다시 다른 여성과의 염문에 휘말린다. 빈센트의 모델을 하던 동네 소녀는 자신의 부모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는데, 그 부모로부터 태아의 씨가 빈센트가 아닌지 의심을 받은 것이다. 소녀의 불분명한 태도를 유지하는 가운데 빈센트는 그 구설수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특히 그녀가 가톡릭 신자였던 관계로 해서 사제를 중심으로 신교도 늙은 청년이 어린 소녀를 범했다는 윤리적인 문제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기인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인 심성이 몸에 밴 언행으로 인해 평판이 나쁘진 않았는데 이를 계기로 부도덕한 인간으로 한순간 추락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가톨릭계의 비난에 빈센트의 부모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목사로서의 수치심을 감당해야만 했다. 백수 예술가이자 목사 아들이 사생아의 아버지라는 소문은 그럴듯한 드라마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테오에게 고백하였던 전례로 볼 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빈센트는 그런 사실 관계를 책임 못질 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
당시 빈센트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작품의 배경은 보리나주 탄공촌에서 경험한 풍경을 몽타주한 것이고, 등장인물은 뉘넌의 농부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설계한 모티브는 저녁나절 우연히 농촌 마을을 지나가다 문틈으로 보인 어느 집안의 풍경이었다는 설이 있고, 흔히 안톤 마우베가 속한 헤이그 학파의 일원인 요세프 이스라엘스의 <식탁에 앉아 있는 농민 가족>이라는 작품에서 가져왔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스케치와 습작을 수십 장 그렸다. 등장인물들은 실제 가난한 농부들로서 빈센트는 그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여 각자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 인물들을 구성적으로 꽉 차게 화폭에 배치하였다. 처음은 네 명이었다가 최종적으로 다섯 명으로 조정하였다. 좌우의 인물과 등을 등지고 있는 인물은 동일한데 얼굴을 정면으로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수정과 추가를 반복한 것이다. 처음엔 어머니와 아들과 아들 아내와 그리고 딸이 등장하지만 최종적으론 아들의 아버지를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요한 인물은 등을 지고 있는 딸의 모습인데, 그런 구성이 바로 이스라엘스의 <식탁에 앉아 있는 농민 가족>을 모방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아무튼 빈센트는 이 작품의 이본을 그리기도 하고, 아예 석판화도 제작하였으며 그리고 이에 대한 메모 형식의 편지가 방대한 것으로 보아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이 작품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집착이라 할 정도로 몰입한 이 작품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 빈센트를 적은 것을 보면 자신의 작품에 확신을 한 선언문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두운 작품은 파리에 있는 테오에게 자신 있게 보내졌지만 인상주의와 낭만주의가 판을 치고 있던 파리 화단에서 구매 욕구가 생길 정도의 관심은 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의 대부인 피사로를 비룻한 많은 화가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어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인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그 작품은 기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볼 때 호불호가 분명한 작품이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빈센트 개인에게도 뜻깊은 야심작이었다. 작품의 배경 왼쪽 벽에 걸린 액자를 보면 십자가 앞에서 두 사람이 기도를 하고 있는 그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적 사랑을 상징한 것이다. 그 액자가 아니더라도 빈센트는 직접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 테오에게 설명한다. ‘그들의 발에 입을 맞추는, 치유하는 영혼’의 마음이 담긴 작품이라고 말이다. 이 그림은 그에겐 성화와 같은 작품이었고 그것은 자신만의 복음이었는지 모른다. 보리나주에서 처절하게 인식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풍경은 그의 의식 저변에서 아직도 번득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표현이 다소 투박하고 과장되어 추하게도 보이지만 그것은 빈센트가 항상 품고 있었던 세상을 향한 메시지였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낮은 데로 임하소서.
1년 넘게 뉘넌에서 화구를 둘러매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던 그해 3월,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가 뇌출혈로 사망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하지만 깊은 애증이 교차하던 아버지의 죽음은 애도가 끝나기 전에 또 다른 길을 찾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이 바로 빈센트 때문이라는 억지 논리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빈센트를 덮쳤던 것이다. 그 궤변의 주인공은 바로 아래 여동생 안나였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도 자신의 집으로 가지 않고 어머니를 지키던 안나는 아버지는 오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사망했노라고 빈센트에게 대놓고 역정을 냈던 것이다. 오빠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안나의 주장에 빈센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저항을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격화될 뿐이었다. 그녀의 이런 주장에 다른 두 여생도 동의했다. 이에 안나는 식탁에 있던 빈센트의 의자를 아예 치워버리고 이 집을 떠날 것을 종용했다. 당시 어머니도 빈센트와 아버지가 지속적으로 불화를 겪고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라고 변호하지 못하고 있었다. 빈센트는 결국 가족 구성원에게 버림을 받았다, 목사로서 항상 올바른 삶을 추구했던 아버지가 무절제하고 고집불통인 빈센트를 데리고 산다는 게 일견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빈센트라고 몰아세우는 것에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빈센트는 그런 상황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 떠나자,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자신이 떠나야 가족이 평온하다면 기꺼이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상심한 빈센트는 재산 가치로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재산 상속을 포기한 채 그해 5월 초에 목사 사택을 떠나 뉘넌 농촌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가족 간의 갈등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피정하는 마음으로 초야에 묻혀있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데오에게 농촌에 눌러살면서 그곳 풍경을 죽을 때까지 그리겠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자기 위안에 불과했다.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는 그의 고달픈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당시 상속을 포기한 유산은 1889년 빈센트가 생 메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여동생에 의해 주식 형태로 그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당시 빈센트는 <성경이 있는 정물>을 그렸다. 그 작품은 아버지를 애도하는 작품으로서, 아버지가 보던 성경을 중심에 놓고 그 오른쪽 아래에 빈센트가 애지중지하던 손 때 묻은 에밀 졸라의 소설책 <생의 기쁨>을 대비시켰다. 성경이 펼쳐진 페이지는 구약 이사야서 53장으로서 고통받는 자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고, <생의 기쁨>은 탐욕으로 몰락한 한 가정이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내용으로서 고통을 느껴야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역설적 세계관을 의미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징적 묘사는 생전에 풀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화해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의미를 해석하는 것 또한 쉽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화해를 시도한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여기서 잠깐 부연하고 가자면, 빈센트는 에밀 졸라를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프랑스 민중의 척박한 삶을 대하는 졸라의 시선에서 어떤 동료적인 연대감과 공감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졸라 역시 훗날 빈센트의 <감자 먹는 사람들>들 같은 초기 작품에 대해서 누구보다 높이 평가했다고 전한다.
뉘넌의 가톨릭 교회 성물실 옆으로 주거지를 옮긴 후 바르비종파처럼 풍경화를 죽을 때까지 그리겠노라고 테오에게 말했지만 그곳 환경은 처음 생각보다 녹녹지 않았다. 바르비종파의 교주인 밀레와 회화 방법론의 스승인 들라크루아에 대한 추종은 한낱 현재 자신의 위상을 변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그는 6개월 만에 그곳을 떠났다. 시간이 갈수록 날씨가 추워져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모델을 할 만한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워졌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작업실을 마련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날씨가 춥지 않으면 밖에서 붓칠을 할 수 있었지만 겨울이 다가오자 그것마저 가능하지 않게 만들었다. 이젤 앞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빈센트는 암스테르담에 가서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을 관람하는 등 미학적 견문을 넓이기도 하고, 목사관에 왕래하며 어머니의 건강과 이사 문제 등 근황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기도 했다. 교회 사택을 내년 3월까지 비워주어야 하기 때문에 여동생들 중에 하나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큰아들인 빈센트는 면목이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
당시 어중간하게 지체된 생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던 빈센트에게 보다 못한 테오가 파리로 올 것을 권했다. 더 이상 네덜란드 초야에 묻혀 풍경화나 그리면서 지냈다가는 그 수렁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이도 이제 서른 중반인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테오 자신은 이제 파리에서 자리를 잡은 지명도 있는 화상이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빈센트를 밀어줄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가능성이 보였는지 모른다. 이에 빈센트는 겁이 났다. 아직도 부족한 실력에 항상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던 빈센트 자신은 파리에 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은 부딪혀 보아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성공도 바라지도 않았다. 파리 미술계를 직접 접하고 추세만 습득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아직까지 당시 떠오르는 사조인 인상주의 작품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과거 화상 시절 잠시 파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가 예술가들에게 어떠한 공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모든 예술가의 목적지는 파리였다. 특히 미술 세계에서는 어느 도시도 넘볼 수 없는 위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술 비평계도 사악하기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빈센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소박한 마음으로 빈센트는 파리 입성을 준비했다.
빈센트는 파리로 가기 전에 먼저 현재는 벨기에의 제2의 도시인 안트베르펜으로 갔다. 1885년 11월 24일이었다. 목적지는 파리였지만 우선 그곳에 잠시 머물며 심층적으로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였다. 어설픈 실력으로 파리에 갔다가 오히려 망신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안트베르펜은 일종의 파리로 가는 완충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일상은 궁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도시는 뉘넌 보다 물가가 훨씬 비쌌기 때문에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는 기본적인 의식주와 그리고 욕망을 해소하는 데 빠듯한 실정이었다. 때로는 소품을 그려 관광객들에게 팔기 위해 거리에 내놓았지만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그리고 헤이그에 있는 화구점에게 전시를 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그의 작품은 대중적이지 않았다. 그는 거의 빵 만 먹으면서 곡기를 해결했고, 그런 가운데서도 과도한 흡연과 음주는 지속되었다. 이에 영양 결핍과 매독 증상인 하감과 궤양이 그를 괴롭혔다. 더구나 당시 이빨도 10개나 뽑아야만 했다. 의사는 수은치료를 권했지만 돈이 없었던 그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는 도시 사람들에 섞여 궁박하게 생활하면서도 그는 미술에 대한 안목을 높이기 위해 화랑에서 살다시피 했다. 네덜란드는 17세기 이후 전통적으로 뛰어난 화가들이 많이 배출했기 때문에 자국의 화가만으로 훌륭한 미술 컬렉션을 구성할 수 있었다. 렘브란트와 프란츠 할스 그리고 요르단스, 반 호이언, 루벤스, 베르메르 등의 작품을 질리도록 감상했다. 특히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마니엘 위테가 창안한 그리자유의 어두운 화풍에 경도되어 있던 자신의 그림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그런 깨달음은 그의 그림을 어두운 푸른색에서 다색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처음으로 일본 판화 우끼요에와 접했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이후 발원한 자포니즘의 한 부분인 우끼요에는 당시 프랑스 화단에 센세이션널 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인상주의 화가라면 너도나도 연구를 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새로운 것을 갈구하던 빈센트도 우끼요에에 푹 빠져들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유럽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본화는 열광을 등에 업고 판화로 만들어져 유럽 각국에 퍼지고 있었다.
이제 안트베르펜에 온 지도 3개월이 지나 해를 넘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미술 아카데미 단기코스에 등록했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수강료는 무료였다. 헤이그 시절 아카데미에서 중도에 자퇴했었지만 이번에는 마지막까지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빈센트가 누구인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는 한 달 만에 아카데미를 뛰쳐나왔다. 처음엔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중등반에 등록할 요건이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데생시험을 보았는데 자신의 능력치가 들통이 나 기초반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고, 이에 낙담한 빈센트는 남 탓하기에 열을 올렸다. 그는 테오에게 이렇게 한탄했다. ‘이 세상이 병들어 소멸할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 끝장이 날 것이다.’ 이따위 미술 아카데미에서 나의 능력을 평가한 것에 대해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정통파들이 보기엔 그의 능력치는 기초반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서도 빈센트는 실망하지 않고 틈틈이 자신의 외모를 가꾸었다. 파리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시골을 떠도는 추레한 옷차림과 싣지도 않고 수염이 제멋대로 자란 얼굴로는 가능하지 않았다. 치아도 교정하고, 수염도 말끔하게 밀고, 영양에도 신경을 써서 잘 먹으려고 노력했다. 대충 기존의 비주얼을 유지하고 파리로 갔다가는 아무리 예술가라고 하지만 화단으로부터 괄시를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파리 시민이 되고, 파리 미술계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 큰 꿈이 실현되는 첫 단추였다. 청운의 꿈같은 거대한 포부가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사파리 같은 파리에서 최소한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외모와 생활 패턴이 파리지앵에 맞게 변모해야 했던 것이다. 그 당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