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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Jun 10. 2024

카프카, 불안과 고립

아웃사이더

2. 관찰     


카프카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민간 보험회사에서 혹독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카프카는 9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2주 후 보헤미아 노동자재해보험회사에 입사를 했던 것이다. 1908년 8월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금융계의 큰손이었던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어서 각 분야에 협조적이었고, 젊은이들에게도 국영기업체나 국가 기관 등의 취업에 가산점을 주는 등 암묵적으로 지원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카프카는 그 회사에 입사원서를 넣고 취업을 할 수 있었다. 노동자재해보험회사는 국영기업체의 일종으로서 지금으로 말하면 산재보험과 관련된 행정적인 업무를 하는 기관이었다. 국영기업의 폐습인 관료주의로 인해 15년 동안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데도 조직의 습성은 개선될 의지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고, 이에 정부 주관기관은 회사를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관리자를 임명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법률가가 필요했는데 운이 좋게도 카프카와 연이 닿았던 것이다. 처음엔 임시직으로 입사를 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2년 후 정식 직원인 서기로 채용되었고, 1913년에는 부비서관, 1920년에는 비서관, 1922년에는 비서실장으로 승진하였다. 카프카가 그 회사에 평생 동안 적을 두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근무 시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8시에 출근해 2시에 퇴근하는 근무 시간은 글쓰기에 항상 갈증을 느끼고 있던 그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조건이었다. 이런 조건은 민간기업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하는, 완벽한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브로트도 대학 졸업 후 작품 집필과 병행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취업활동을 했는데 바로 우체국이었다. 사회 초년병인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급여보다도 오후 이른 시간에 퇴근할 수 있는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었고, 그런 직장은 국영기업체나 국가 기관이 제격이었다. 이런 경향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대다수 문학청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전업작가의 길은 예나 지금이나 고달픈 것이었다. 카프카는 그런 경향의 정도가 심하여  평생 동안 전업 작가의 꿈을 꾸지 못하고 그렇게 직장과 문학을 병행했다. 브로트는 몇 년 우체국에 근무했지만 퇴사 후 출판업계에 뛰어들어 문학계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집필활동을 했지만 카프카는 한 직장을 거의 끝까지 지켰던 것이다.       

아무튼, 당시 유럽의 경제는 무한궤도를 달리는 열차처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노동현장의 상황은 열악하여 그런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특히 유럽의 공장이라고 일컫던 보헤미아에서는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인해 안전사고가 만연하고 있었다. 카프카는 그런 상황에서 산재보험에 관련된 이의신청과 장애 등급 분류 그리고 기업가와 상해 노동자와의 중재 등 직접적인 업무와 그에 따른 법률적 뒷받침을 지원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사고 방지 대책에 관심을 집중했다. 카프카는 사무실에서 행정 업무만 보지 않고 현장 조사를 위해 많은 공장으로 출장을 나갔다. 그가 맡은 지역은 직물공장이 밀집되어 있어서 보헤미아의 맨체스터로 불리던 라이헨베르크와 미국식 마천루가 서 있던 산업의 핵심지역인 가블렌츠시였다. 그는 산재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공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기업에게 개선을 요구했고 직접 실무적인 방법을 창안하여 제시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손가락과 손목 절단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비용을 줄이려는 기업의 온갖 저항에 부딪쳐야 했고 이에 논리와 법리로 대응하고 설득해야만 했다. 지금도 그러하듯 산재와 관련된 사안은 단순하지 않았다.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과 삶의 질을 증진하려는 노동이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합의점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당시는 산재 근로자에 대한 보상은 전근대적인 관성 때문에 항상 미비하여 개선 강구가 절실하던 시기였다. 무산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서서히 개선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보다 진일보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양보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카프카는 산업재해 전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카프카는 회사 조직 내에서도 슬기로운 직장인이었다. 직원들은 업무 능력은 물론이고 매사에 성실하고 예의가 바른 그를 좋아하여 그에게 적이 있을 틈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즉 문학 세계에서 알고 있는 카프카의 고독이나 고립 같은 단어를 연상시킬 수 없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하고 건실한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한 직장에서 장기간 근무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성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문학과 개인사의 괴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을 하더라도 그런 카프카의 경우는 잘 납득이 가기 않는 예가 아닐 수 없다. 문학과 개인사의 그런 커다란 차이점은 카프카의 개인적인 특징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낮에는 완벽하게 적응된 직장인이지만 밤에는 문학적 욕망의 화신이 되어 내면의 어두운 세계를 탐구하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연상케 하는 극단적 양면성이 카프카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우리는 그의 밤의 세계에 천착하여 편견을 만들었고 그런 재료들을 버무려 신화화하지 않았을까. 그의 낮의 세계는 너무 간과한 것을 아닐까. 변신과 소송을 쓴 작가가 바로 그 직장인 카프카가 맞는가... 그래서 그의 족적을 찾아가는 과정은 생경하고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의 이런 경험은 명징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 저변에 심오한 통찰의 물줄기를 흐르게 했다. 자신이 경험한 외부 세계는 그저 바람처럼 날아가 버린 것이 아니라 내재화되어 내부 세계의 질적 향상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 깊은 문학적 향기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항상 지적 욕구를 마다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여러 가지 형태의 글을 쓰기도 했지만 당시 청년 카프카의 관심사는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는 학창 시절부터 꾸준하게 관심을 놓고 있지 않은 자신만의 어젠다이자 담론이었다. 그는 당시 가장 진보적인 저널리스트인 마자리크가 발행한 차스지를 구독했고, 아나키스트이자 러시아 사회주자이기도 한 표도르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탐독하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사회주의 청년들의 연합단체인 믈라디히 집회와 노동자 연맹인 빌렘 쾨르베 집회, 그리고 민족사회주당의 클로파치의 연설회와 사회민주당의 소우쿠프 박사의 연설회 등을 찾아다니며 당시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신조류와 이념 정당 등에 관심을 집중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전 후로 유럽에서는 정치 사회적으론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문화예술적으론 파리를 중심으로 아방가르드 즉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 같은 해괴한 조류가 등장하던 시기였다. 당시 많은 20대의 지식인 청년들처럼 카프카도 이런 상황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런 관심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떠한 대화나 일기에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던 것이다. 브로트에게는 관심 표명 정도는 했지만 모임에 참석했었다는 등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의 이런 관심은 한동안 지속적이고 정도가 깊어진다.

    

카프카는 집회나 모임에 호기심으로만 참석하지 않고, 핵심적인 인물들과도 접촉하며 보다 가깝게 다가갔다고 한다. 프라나 스카멕, S.K. 노이만, 프란티셔크 랑어. 야로슬라브 하셰크, 미할 카하 등은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프라하에서는 부유한 유대인 집안 출신인 베르타 판타가 주도하는 살롱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누구보다 지적 감성이 풍부했던 그녀는 자신의 저택에서 문학, 과학, 철학 등의 신조류의 전문가들을 초대해 100년 전 귀족 사회에서 인기를 끌던 살롱 음악회처럼 조촐한 강연회를 열기도 하고, 그리고 강연이 끝나면 소소한 만찬과 음악회도 기획하면서 프라하의 신지식인 세계에서 대모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강사로 참석한 인물의 면면을 보면 그 수준을 알 수 있다. 철학자이자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 이론 물리학자 막스 프랑크,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크리시티안 에렌펠스, 그리고 당시 프라하에서 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그들이다. 그들의 입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연 양자론 같은 최신 과학과 신과 결별한 철학과 그리고 무의식을 탐구하는 정신분석학 등 당시엔 의미심장한 이론들이 튀어나왔다. 카프카는 그런 신지신인들의 모임에 참여하며 당대 최고의 지식과 접하고 습득했다. 그리고 그 살롱에서는 다양한 종교에 대해서도 작은 컨퍼런스가 열렸다고 한다. 서유럽과는 달리 동유럽의 기독교는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비적이고 변종적인 경향이 짙었고 그로 인해 사이비와 이단적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서유럽과 멀어질수록 기독교의 형태가 토착 종교와 밀착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당시 동유럽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카프카에게 사회적 의식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깊은 생각 없이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극단의 배우인 이차크 뢰베를 만나게 된다. 유대인이 중심이 된 그 극단은 이시디어(독일어와 히브리어가 혼합된 방언의 일종) 대사로 공연을 하는 극단으로서 동유럽을 전전하며 유대인을 상대로 연극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일종의 유랑 서커스단처럼 그 극단도 시장통에서 천막 치고 공연하는, 흔히 말하는 B급 연극 취급을 받고 있었다. 카프카는 왠지 모르지만 그 공연에 심취하여 재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적인 시선으로 관람했다. 그는 일기에 그 연극에 대한 평론과 묘사 등 100페이지에 달하는 주관적 관람기를 세밀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그 악단 구성원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들, 부랑자, 유대인 동포라고 경멸' 받았다고 썼다. 프라하 유대인 세계에서는 이시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경향이 팽배해 있었다. 카프카는 본능적으로 그 연극에 빨려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배우인 이차크 뢰베와 안면을 트고 가까워졌던 것이다. 카프카는 그를 데리고 유대인 친구들이 중심이 된 문학 모임에 가서 소개를 시켜주기도 하고, 생소한 이시디어를 배우기도 하면서 그와 친해졌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모자라 뢰베를 데리고 집에 가서 숙식을 하게 했는데, 이런 사실은 안 아버지는 진노를 하며 그를 내쫓았다. 뢰베는 자신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일깨워주었고, 비슷한 또래라 금방 친해졌고, 유랑극단이 그렇듯 잠자리조차 열악했으며,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진심 어린 선한 마음이 벅차올라 집으로 데리고 와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인데, 아버지의 야멸찬 거부에 민망함만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시디어를 사용하는 동유럽 유대인을 멸시했던 아버지의 태도는 유별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뢰베를 벌레 보듯이 대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카프카는 유대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관련 사적을 찾아 탐독을 하고,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유대교에 대한 무뢰한이었던 그는 통곡의 벽도 몰랐고, 하시디즘 같은 중요한 테마도 생소하기만 했다. 그렇게 뒤늦게 유대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짧은 시간에 몸소 채득 하는 것은 불가능했는지 모른다. 관심과 탐독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내재화의 과정도 부족했고, 가슴으로 느끼는 동질성의 작용도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오니즘에 대한 카프카의 태도는 상상 분열적'이었다. 20대 초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오니스트였던 벨취도 항상 카프카의 옆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가 주장하는 시오니즘에 대해 마음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항상 한 발 물러서 있었고, 그런 소극적 수용은 그가 죽을 때까지도 개선되지 않았다. 정신과 행동은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시오니즘은 행동을 원했지만 그는 항상 망설였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 시오니스트가 되었던 브로트도 카프카가 넘어오기를 기다렸지만 그의 생전에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카프카는 종교색이 없는 보편적 세계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에 아직까지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1912년은 카프카 문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몇 년 동안 일기처럼 써두었던 18편의 짧은 단편을 모아 로볼트 출판사에서 <관찰>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하였다. 처음엔 브로트의 출간 권유에 카프카는 거부했으나 마음을 바꾸어 승낙을 했는데, 출간하는 과정에서는 카프카의 결벽증적인 편집과 교정 등으로 인해 난항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아무튼 99페이지 분량에 800부 한정 인쇄되고 거의 팔리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기로 그의 문학적 영감이 화산처럼 폭발할 수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가 십 대 때 살았던 더블린을 배경으로 썼던 단편을 모아 더블린 사람들이란 제목의 소설집을 출간한 후 보다 큰 문학세계로 발을 내디딘 것처럼, 카프카도 하찮을 수 있는 소소한 소재를 바탕으로 쓴 짧은 소설을 발표한 후 주체하지 못하는 문학적 상상 속에 매몰되었다. 당시 카프카 문학의 신호탄을 알리는 요주의 작품인 <판결>을 거의 하룻밤 만에 탈고를 하고, <실종자>의 거의 많은 부분을 썼고, <변신>의 초고도 완성하였다. 그리고 <성>과 <소송>의 줄거리의 틀을 잡기도 했다.     


카프카의 글쓰기 행태는 조증 환자처럼 격렬했다. 마치 슈만이 1840년과 1849년에 위대한 작품을 폭발적으로 생산한 것처럼 카프카도 어떤 문학적 영감을 받으면 상상을 초월하는 창작 에너지가 분출되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작품을 생산했던 것이다. 집중과 몰입을 위해 그는 자신을 어두운 골방에 격리시켰다. 그의 집필 시간은 고난의 행군을 방불케 했다. 그의 극한의 집필 시간표를 보면, 회사에 8시 출근하여 오후 2시에 퇴근, 집에서 3시에서 7시까지 취침 후 식사를 하고 친구와 만나기도 하고 산책을 한다. 그리고 밤 11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새벽 3시에 끝내고 다시 취침을 하고 6시에 일어나 8시까지 출근한다. 글 쓰는 시간은 심야에 4시간에 불과하지만 그는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몰입하여 글을 썼다. 카프카의 이런 집필 패턴은 집중력 때문이었다. 그는 헤르더지에 기고한 '큰 소음'이라는 산문에서 자신이 왜 심야에 글을 써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가족들의 발자국소리. 부엌에서 화덕 닫히는 소리, 잠옷차림으로 자신의 방을 지나치는 아버지의 인기척 소리, 난로에서 재를 긁어내는 소리, 여동생이 소리치는 소리, 문들이 열고 닫히는 소리, 가정부의 기관지염 앓는 소리, 여자들의 노랫소리, 그 수많은 절망적인 소리...' 그는 이렇게 집안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를 열거하며, 그런 소리는 자신의 글쓰기에 치명적으로 방해를 하고 있으며, 그 소음의 세계로부터 도피할 곳은 심야 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그의 이런 습관은 매번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영감이 고조될 시점,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영감의 치솟을 때만 그런 시간 속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기에는 영감의 에너지는 일상적인 시간 속에서도 꺼트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가, 다시 밤에 촛불처럼 불을 지펴 뜨거운 영감을 소진시켰다. 카프카 자신도 그 해를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보았다. '당시 어느 긴 밤에 처음으로 그 상처가 터졌다'라고 그는 편지에서 밝혔다. 그 후, 카프카는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그 영감과 창작의 희열을 잊지 못하고 최소한의 사회생활만 유지하면서 내면으로 지향했다. 당시 처음으로 작가로서의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주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성에 대한 욕망은 그런 내재적 바리케이드에서 예외였다. 성과 결혼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창작열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해 여름 브로트의 집에서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브로트의 사돈 집안의 자녀였다. 당시 25살이었던 그녀는 베를린에서 축음기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부다페스트에 사는 여동생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프라하에서 하룻밤 보내기 위해 당시 신혼이었던 브로트의 집에 방문했고, 그런 기회에 브로트가 카프카를 급하게 호출하여 만남을 주선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펠리체를 만난 카프카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첫인상은 카프카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강인해 보이는 그녀의 외모에서 여성성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생활력이 강한 여성에 대한 어떤 기피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런 인식의 차이는 첫인상에서 편견으로 작동되었는지 모른다. 여자는 성적인 매력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마초적 편견 말이다. 아무튼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 첫 만남은 브로트의 예상과는 달리 썰렁하게 끝났다. 펠리체도 사실 당시 창작 열기에 빠져 있었던 카프카에게서 남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아무런 의사 표현도 하지 않았다.

     

당시 카프카는 문학과 결혼 그리고 성적 욕망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런 정리되지 않는 혼돈이 그를 불안의 구렁텅이로 내밀고 있었다. 혈기왕성한 20대 후반의 청년 카프카는 남성으로서의 성적 욕망이 끓어오르고 있었으며 그것은 창작의 원천이기도 했다. 리비도 같은 무의식의 성적 에너지가 삶의 에너지로 전환된다고 설파한 프로이트의 학설이 맞다면 카프카의 정신적 혼란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설령 그 학설이 맞지 않다고 하더라도 당시 카프카의 분열 상태를 생체학적인 개연성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의 프라하의 사회문화 상황을 보면, 혼인에 대한 윤리관이 매우 엄격하여 여자의 처녀성을 강조하였고, 이에 젊은 남성들은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홍등가를 찾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프라하에는 클럽과 술집 그리고 매춘업소가 성행했다. 당연히 당시 예술계에서 아방가르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기 때문에 예술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런 업소에 빈번하게 출입했던 것이다. 그런 무분별한 행동은 예술가의 데카당스로 정당화되었다. 카프카의 절친이며 시온주의자였던 베르펠 조차 자신의 작품에서 매춘 업소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도 했다. 카프카도 대학을 졸업하고 그들처럼 두려움과 낯섦을 감추고 속물적인 욕망에 몸을 맡겼다. 그는 1908년 브로트에게 편지에서 '어제 늙은 창녀와 함께 호텔에 갔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욕망을 해소하고 나면 늘 자신을 탓했다. 창녀와의 섹스를 불결하게 생각하고 때론 막연하게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욕망은 그런 결벽증을 무너트렸고, 그리고 그런 상황은 반복되었다. 그의 작품에서도 여성은 그저 그런 욕망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여타의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처럼 카프카의 여성 출연자는 결코 고귀하지 않았다. <소송>에 등장하는 뷔르스트너는 색기 넘치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주인공 K.와 의미 없는 성관계를 한다. 어떠한 여성적인 매력 때문에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배설할 뿐이다. 뷔르스트너라는 단어는 비속어로 성교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밖에 등장하는 여성들도 세탁부, 변호사나 관리의 정부 같은 보잘것없는 무의미한 배경으로만 그려진다. 그리고 <성>에 등장하는 프리다 역시 그렇다. 성의 실질적인 지배자 클램의 정부로 등장하는 프리다와 관능적이고 격렬하고 치명적인 섹스 장면이 그려진다. '뜨겁게 달아 오른 두 사람은, 정신없이 뒹굴었고, 그렇게 지친 그들은 맥주와 오물들이 널브러진 바닥에 한동안 누워 있었다.' <성>에서의 여자는 그저 낯선 고장에서의 유혹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무튼, 한 달 동안 고민하던 카프카는 1912년 9월 20일 베를린에 있는 펠리체에게 첫 편지를 썼다. 하지만 답장이 3주째 오지 않자 불안해진 카프카는 친구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이에 소개팅을 주선했던 브로트는 펠리체에게 읍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실 카프카가 펠리체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평범한 사람은 애매하기 이해될만한 문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문학적 소양이 자신과 같지 않았던 그녀의 입장에선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문장들로 나열되어 있으니 답장을 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던 것이다. 연애편지는 단순하지만 감정이 제대로 실린 문장으로 형성되어야 하지만 너무나 솔직했던 카프카는 자신의 감정을 자세하게 표현하려고 했고 그것이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렇게 카프카의 불안한 심리 상태가 가득한 편지를 받고 망설이던 펠리체에게 브로트는 두 번이나 편지를 썼다. '특별하고 경이로운 사람은 병적으로 민감할 수 있으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 바란다'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브로트가 중재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펠리체가 카프카의 진심을 확인했지만 편지 왕래만 오갈 뿐 만남은 해를 넘겨야만 했다. 물론 전부라고 할 수 없지만, 당시 카프카의 관심사는 집필이었다. <변신>을 집필하는데 집중하고 있었고, 병행해서 <실종자>의 첫 번째 장인 <화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카프카의 인식세계를 이끈 것은 문학이라는 철옹성 같은 영역이었다. 카프카의 작품이 처음으로 인쇄화 되어 대중에게 선보인 것은 브로트가 발행인으로 있던 문학 연감 아르카디아지였다. 우체국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발을 내디딘 브로트는 자신이 창설한 잡지에 카프카의 작품 <판결>을 실었던 것이다. 하룻밤 만에 완성한 그 작품은 아버지와 관련된 갈등을 오이디푸스 신화처럼 서사화 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브로트는 그 발표를 신호탄으로 카프카의 작품을 출간하는 데 앞장선다. 카프카의 단편집 관찰이 첫 단행본이라고 위에서 얘기했는데, 그것 또한 브로트의 주선으로 이룰 수 있었다. 당시 로볼트 출판사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던 25살의 젊은 출판인 쿠르트 볼프를 브로트가 카프카와 연결시켜 준 것이다. 두 사람은 이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어 카프카 생전 모든 작품을 볼프 출판사에서 출간을 했다. 카프카의 모든 간행물이 초판이나 재판에서 중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프는 손해를 감수하고 카프카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출판인의 입장에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위해 작가와 타협을 하는 게 당연했지만 볼프는 카프카의 의중을 제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카프카는 그에게 ' 멋진 사람, 작가들 속에 파묻혀 사는 출판인'이라고 극찬하였다. 대중성과 예술성의 경계선에서 그는 예술성을 우선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해 10월과 11월 말, 브로트는 바움의 집에서 열린 조촐한 문학 모임에서 카프카의 <화부>와 <변신>을 직접 낭송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친한 친구들이 아니라면 그런 낭송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브로트와 바움 부부와 그리고 벨취 같은 절친들은 금방 요리해 나온 따끈한 작품에 귀를 기울였다. 1913년과 1915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두 소설의 첫 독자는 바움의 집에 모였던 몇 명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카프카의 낭송을 기다렸다. 그리고 카프카는 그레고리 잠자가 되어 절절하고 밀도감 있게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바퀴벌레처럼 흉측하게 변한 자신의 몸을 더듬는 그 상황을 담담하게 자신의 목소리로 읊조린다.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시간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레고르 잠자의 상황은, 형벌의 형식을 빌린 자신에 대한 서사이며, 불안의 서술이고 그리고 외부 세계에 대한 민감함의 초현실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해가 넘어가자 창작 에너지는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는 고갈되어 가는 영감을 부여잡으려고 했지만 손에 쥔 모래알처럼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의지로 이런 현상을 막을 수 없었다. 고난의 집필 패턴이 저 멀리 사라지자 허탈해진 그는 남는 시간에 요트와 수영과 승마 같은 취미 생활에 몰입하고, 목공소에 가서 대패질도 하고, 그리고 무작정 도보 여행도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면 눈물을 머금고 가업을 도와주었다. 그래도 창작 에너지에 사로 잡혀 있을 때보다는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1년 전에는 최악이었다. 새벽 창작에 몰입해 있을 때였다. 당시 석면공장에 가서 작업 감독을 하라는 아버지의 강권은 정말 견딜 수 없어서, 그는 브로트에게 '그들을 증오한다'라고 울부짖기도 했었다. 당시 카프카가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던 브로트는 놀라서 카프카의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카프카를 공장에서 구출해 주기도 했었다. 위대한 작가에게 이런 공장 작업 감독이라니, 하지만 당시 카프카에겐 이런 경우는 일상이었다. 문학은 단지 취미생활에 불과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당연하게 아들을 호출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카프카는 이상하리만치 거부하지 못하고 끌려 다녔다. 이제 나이가 서른 살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의 지시라면 마치 가스라이팅 된 것처럼 따랐고, 머리에서는 ‘그들을 증오했던’ 것이다. 이런 패턴은 거의 평생 동안 그를 구속했다.     


그렇듯, 펜을 들을 수 없었던 카프카에게 엄습해 온 것은 바로 불안이었다. 카프카에게 있어 불안이라는 개념은 거대한 화두였다. 때론 괴물 같기도 하고 때론 자신의 실체적 존재의 의미이기도 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자신을 지탱해 주는 힘'이었고, 쓰지 않으면 정신착란을 일으킬 것처럼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불안이 나를 잠들게 내버려 두지 않는 밤엔 나는 이렇게 밖에 쓸 줄 모른다.' 작가의 실존은 글쓰기이며 미쳐버리고 싶지 않다면 책상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쓰고 싶은 그리움은 어디서나 과도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런 글쓰기에 대한 불안정적인 현상도 그를 지배했지만 오래전부터 그는 다른 불안에 시달리곤 했었다. 불안의 종류는 여러 가지였다. 남성성의 한 형태인 성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환락가를 배회하는 자신을 경멸하고 그것은 인간성과 윤리성과 결부시켜 결국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불안감을 낳게 했다. 세속적 삶을 거부하지만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는 불안은 속물근성의 상징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외부 세계가 자기만의 고유한 현실 세계로 침투해 오리라는 불안과 내면의 자유가 세속적 죄에 의해 파괴되리라는 불안 등이 그의 인식 세계를 지배했다. 너무 결벽증적인지 모르지만 그는 그 불안과 죽을 때까지 싸웠다. 카프카는 그즈음에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을 읽고 그의 광팬이 되었다. 인간의 선택과 자각, 개인의 책임을 일깨우고 인간의 참된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도구가 바로 인간의 불안이라고 카프카는 이해했다. '적어도 그의 세계는 나와 같은 편에 있다. 그는 구처럼 나를 확인시켜 준다'라고 그는 브로트에게 고백했다. 시타르타가 설파한 고집멸도의 고, 즉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카프카의 불안은 그렇게 인식하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문학이라는 세계에서 길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길은 끝내 카프카 앞에 나타나기를 거부했다. 그럼으로써 그의 말년은 폐결핵과 함께 그를 허무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고, 마지막 삶의 희망인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꿈꾸게 했다.  

   

아무튼, 처음엔 12월 안에 베를린에 가서 펠리체를 만나기로 했지만 주체하지 못하는 창작 에너지 때문에 해를 넘겨 부활절 휴가 때야 카프카는 베를린으로 갈 수 있었다. 처음 만난 후 거의 6개월 만에 조우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많은 편지들이 오고 갔지만, 남녀의 사랑은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해야 감정이 고양되기 마련인데, 카프카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두 사람의 감정은 정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카프카와 미래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던 펠리체는 그 중요한 연말의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집필에 몰두한 카프카를 이해할 수 없었고 변명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이 상할 만도 했지만 신념이 확고하고 매사에 참착했던 그녀는 마지막까지 카프카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서 베를린에 간 카프카는 펠리체의 집에서 그녀의 가족과 상견례를 했다. 분위기는 좋았다. 변호사이면서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건실한 청년을 사윗감으로 마다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다소 내성적이고 예민해 보이지만 그것은 문학 활동도 겸비한 예술가의 기질이었기 때문에 결혼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렇게 그 상견례에서 별 어려움 없이 펠리체의 아버지와 청혼에 대해 거의 접근할 수 있었다. 사실 약혼 날짜만 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급진전은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집착에 가까운 고민이 카프카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결혼에 대한 찬반 의견을 친구들에게 묻고 청취했고, '나는 의식불명에 이르기까지 나 자신을 모든 사람들로부터 차단시킬 것이다'라고 그는 1913년 8월 일기에서 토로했다. 결혼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두고 몇 개월 동안 갈등을 한 것이다. 칸트가 결혼을 하지 못한 이유가, 사랑했던 여인과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7년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버려 결국 결혼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카프카도 그에 못지않게 고민에 고민을 이어갔다.

     

이런 카프카의 의중을 펠리체도 모를 리 없었다. 수많은 편지에서 그런 갈등을 읽어내는 것은 여자 특유의 촉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았다. 카프카는 자신의 심경의 변화를 펠리페의 아버지에게 밝히기로 하고 편지 초안 썼다. '저에게 있어 문학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이 될 수도 없고, 변함없는 사실은 따님이 저와 더불어 틀림없이 불행해지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제 가족과도 이방인 보다 더 낯설게 살고 있고, 어머니와도 지난 몇 년간 하루에 스믈 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았고, 아버지와는 정도가 더 심하여 인사말 이상은 하지 않았고, 결혼한 여동생 식구들과도 화를 낼 때를 제외하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문학이 아닌 모든 것은 지루하고 또한 싫고, 가정생활에서도 관찰자일 뿐이고, 제 직장이 저를 변화시킬 수 없듯이 결혼 역시 저를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대충 이런 발칙한 내용이지만, 다행히도 이 편지는 우체통에 들어가지 않았다. 장차 자신의 장인이 될 사람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는 것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약혼을 언약했지만 책임지지 못할 것 같은 자신의 의중에 그는 매일 밤잠을 설쳤다.

     

그의 이런 분열적 행태는 계속 이어졌다. 펠리체는 카프카의 청혼에 대해 확정적인 언급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카프카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한술 더 떠 9월에 약속한 펠리체와의 여행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그는 자신이 결혼을 할 수 없는 이유로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 클라이스트 등을 소환하여 논리를 전개시켰다. 직설적으로 예스냐 노냐가 아니라 소피스트처럼 궤변을 마다하지 않은 구구절절한 논리와 혹은 파혼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혹은 펠레체가 마음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빙빙 돌려서 논리를 편 것이다. 플로베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펠리체의 이해 따위는 상관없이 그는 일방적으로 이해를 요구했다. 참 예의도 없는 카프카가 아닐 수 없다. 사랑의 감정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뜨겁지 않았는지 모른다. 사실 그의 이런 분열적 정신세계는 결벽증적인 질환의 일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삶과 문학을 선택해야  지점에 놓이면 그는 항상 문학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둘은 공유하거나 공생할 수 없었다. 가정을 꾸미고 사는 자연스러운 삶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병행할 수 없다고 그는 고집을 부렸다. 그런 양면적 태도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예술가들은 일상적인 삶과 예술의 삶을 훌륭하게 이끌었다. 물론 결혼을 아예 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파경을 맞은 예술가들도 많지만 그것은 일반화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결혼과 가정을 문학 행위에 방해가 된다는 이런 발상의 예는 카프카의 전형적인 분열과 불안의 상징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카프카는 회사 사장을 비롯한 상관들과 함께 비엔나에서 열린 산업재해와 관련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프라하를 떠남으로써 조금은 그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회의가 진행되는 틈틈이 그는 개인적인 시간을 얻어 당시 비엔나에서 열렸던 시온주의 회의에 참관하고, 친지 집에도 잠깐 방문했다. 이런 일정에 대해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지금의 휴대폰 문자 소통처럼 간단하게 적어 편지를 보냈다. 이런 여행에도 만족하지 못한 카프카는 정식적으로 휴가를 내서 프라하로 가지 않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베로나를 거쳐 밀라노 리마에 위치한 휴양소로 갔다. 리마는 과거 친구들과 여행을 갔을 때 좋은 이미지를 갔고 있던 작고 조용한 도시였다. 자신이 살던 공간으로부터 멀리 떠나 홀로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실 도피라고 해도 무방하다. 고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몇 주 동안 휴양소에서 있으면서 18살의 어느 스위스 소녀를 알게 되었다. '거의 완전히 그녀의 영향권 속에 살았다.' ' 평온한 마취였다.'라고 십 년 후 그는 브로트에게 가볍게 언 듯 고백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마도 그런 러브 스토리는 가상이라는 설이 다분하다. 18살의 스위스 소녀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선에서 창조된 여인이 아니었을까. 정말로 그는 평온한 마취에 빠졌을까. 카프카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브로트도 이런 러브 스토리에 의구심을 가지는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18세 스위스 소녀의 이미지는 베토벤의 불멸의 여인처럼 카프카가 창조한 상상의 여인이며, 그 존재는 문학적 영감의 촉발제 역할을 하는 베아트리체와 같은 모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돌아갈 곳은 프라하였다. 가족과 친구들이 사는 그 거대한 도시와 펠리체의 구속에서 그는 벗어날 수 없었다. 프라하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펠리체에게서 멀어지는 자신을 붙잡고 11월 베를린으로 가서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다시 시작할 것을 약속했다. 그녀는 항상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그는 그녀의 존재를 결코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무언가 막힌 것처럼 진행이 되지 않을 때 카프카의 새로운 친구인 에른스트 바이스와 펠리체의 친구인 그레테 블로흐가 적극적으로 주선하여 1914년 3월 프라하에 펠리체가 살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카프카보다 1살 많았던 에른스트 바이스는 의사이자 소설가로서 비엔나, 베른, 베를린에서 개업도 하고 인도와 일본까지 여행을 한 후 프라하에 정착하였고, 당시 전업 작가가 되기 위해 프라하 서클에 참여하여 브로트를 비룻한 젊은 문학인과 접촉하고 있었다. 서클에 소극적이었던 카프카는 열정적이었던 바이스와 서클에서 처음 만난 후 금방 친해졌는데 마침 그때 카프카의 혼사 문제가 친구들 사이에 화제가 되자 두 사람의 혼사가 성사될 수 있도록 중개자 역할을 자임한 것이었다. 아무튼 바이스와 블로흐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카프카와 펠리체는 6월 1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약혼식을 조촐하게 거행했다. 결혼은 창작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노래를 불렀던 카프카는 어쨌든 공식적으로 약혼이라는 체제 안으로 들어갔다. 카프카의 부모도 그만하면 됐다는 반응이었고 친구들도 노총각의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한 달하고 10일이 지난 후 결국 파혼을 선언했다. 그는 약혼식 당시 자신의 심경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사슬에 묶인 채 구석에 앉혀져 있는 가운데 약혼식은 진행되고...' 사실 그 약혼은 타인에 의해 성사된 것이라고 그는 파혼을 합리화시켰는지 모른다. 자신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는 점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고집스럽게 논리를 전개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파혼 편지를 펠리체에게 보낸 카프카는 덴마크로 여행을 갔다가 나흘 만에 프라하로 돌아왔다. 이런 카프카의 돌발적인 행동은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의 이런 분열적이면서 이기적인 행동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천하의 브로트도 당시엔 그를 감쌀 논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로트는 나중에 카프카의 전기를 쓸 때, 그런 카프카의 행위는 위대한 선지자의 레벨에서 보면 이해를 구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마치 우상화시키기 위해 열중한다. 위대한 예술가의 삶과 사상은 그런 세속적인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다라는 괴이한 형이상학적 논리 말이다. 세상의 위대한 인물의 사생활은 평범한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파혼과 함께 찾아온 것은 세계 1차 대전이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유럽 전체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전쟁은 아니었다. 이 전쟁은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유럽의 지형은 물론이고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좌지우지하던 세계의 지형을 뒤집어놓은 대 사건이었다. 당사자인 유럽 중에서도 젊은 예술가들은, 오늘의 친구가 적이 되어 서로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카오스적 세계에 함몰되어 갔다. 특히 당시 유대인의 입장은 주목할 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국가의 군복을 입고 그 국가를 위해 참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유대인이라고 전쟁을 방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민족에 대해 거품을 물었던 유럽은 이제 국가를 외치며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유대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영통지를 받든 자원입대를 하든 젊은 유대인들은 전쟁터로 향했다. 유대인이 유대인을 죽이고, 슬라브인들이 슬라브인을 죽이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유럽의 대혼돈은 프라하라고 피할 수 없었다. 프라하는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전쟁 분위기로 인해 암울함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 카프카는 허약 체질로 군복무를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그 전쟁을 중립적이고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식인이라면 거의 그렇듯 그도 전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애국적인 행렬은... 가장 꺼림칙한 현상의 하나이며, 불길한 시선으로 그는 그 공간에 서 있었다.' 그렇게 그는 파쇼적인 애국주의를 경계했다. 그리고 그는 싸우는 자들을 대해 증오를 했지만 누구에게도 전쟁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거론하지 않았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은, 전대미문의 가공할 만한 무기에 놀란 참전국과 연합군은 서로의 땅을 침공하는 것을 멈추고 참호전이란 독특한 형태의 전쟁 양상으로 이어졌다. 그런 전쟁의 흐름으로 인해 후방에 있는 시민들은 포격 같은 피해를 덜 받았고 나름 평상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전쟁 발발 후 한 달이 지나자 남편을 전쟁터로 보낸 여동생 오틸리가 자식을 데리고 보다 안전한 친정으로 왔다. 이에 카프카는 자신의 방을 그녀에게 내주고 할 수 없이 여동생 발리의 집에 가서 며칠 동안 얹혀살다가 그도 여의치 않아 다시 여동생 엘리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렇게 전전하다가 1915년 2월에 겨우 하숙집을 얻을 수 있었다. 전쟁이 만든 변화지만, 32살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는 파혼과 전쟁의 와중에 뜻하지 않게 독립을 했고, 그 독립은 그에게 열망하면서도 두려워하던 고독을 선사했다.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고독 외에 다른 그 무엇도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또다시 창작의 에너지가 그를 공습했다. 고독은 조증처럼 그의 고밀도의 영감의 문을 열게 만들었다. 그는 일기에서 이렇게 쓴다. '규칙적이고 공허한 독신생활은...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고, 완전무결한 공허 속을 응시하지 않게 하고... 오직 이 길 위에서만 나에게는 하나의 향상이 존재한다...'


1914년 8월, 그렇게 해서 창조해 낸 작품이 바로 <소송>이었다. <소송>을 탈고한 후에도 <유형지에서>와 <법 앞에서>도 완성을 했고 그리고 생전의 마지막 장인 <실종자>의 일부도 썼다. 그는 자신의 작품 중에서 <소송>을 가장 아꼈다. 프라하 서클에 참석할 경우엔 그는 친구들에게 항상 <소송>을 낭송해 주었다. 자신의 분신인 요제프 K는 법의 프로세스가 작동하는, 그런 세상의 메커니즘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싸우다가 결국 허무하게 개죽음을 당한다는 내용은 한 인간의 실존과 소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이 법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결국 그 법에 종속되고, 부조리한 현상을 없애려고 또 다른 법을 만들지만 결국 그 법에 의해 세상은 다른 차원의 부조리에 함몰되고, 그런 시지프스 같은 부조리함에 그는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그 부조리는 <성>과 같은 영원히 넘지 못할 존재여서 개인은 한낱 분노나 하는 미물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그 소설은 부조리극이다. 아마도 알베르트 까뮈의 <이방인>도 한 편의 부조리극이라고 볼 때 이와 일맥상통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K와 메르쏘는 서로 같은 종족은 아닐까.

     

하지만 어찌 되었든 창작의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7~8개월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퇴근 후에는 전쟁터에 간 매제의 공장에 가서 대신 일을 도와주느라 집필할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물론 대마왕 아버지의 명령이었다. 카프카는 '어쩌면 얇은 장애물 한 장만 뚫고 나가면 될 것 같은데 그럴 수가 없'노라고 한탄을 했다. 그렇게 세상은 그가 집필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전쟁통이니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편으론 대범하게 수용할 수는 없었다. 공장일이 계속되자 일상의 패턴이 완전히 바뀌었고, 창작의 직조는 뒤엉켜버렸다. 그는 다시 완벽한 정체를 맞보아야 했다. 무기력이 그를 엄습하여 무의미한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펜을 들 수조차 없을 때 펠레체의 친구 그레테 블로흐한테서 편지가 왔다.

     

불안정한 정신 상태 때문인지 모르지만, 당시 그의 마음에서 펠리체에 대한 연정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었다. '구원의 시도'를 하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 펠리체와 약혼을 성사시켜 주려고 동분서주하던 그녀의 친구 블로흐한테서 안부 편지가 온 것이다. 약혼을 하기 전, 당사자와 중개자의 입장에서 그와 관련된 편지 왕래가 이미 있어 왔지만, 이번 편지는 그 당시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던 카프카에겐 단비와 같은 편지였다. 그들은 금방 서로 속마음을 얘기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두 사람의 관계의 깊이가 어떻게 변하였는지 카프카 자신이 밝힌 적은 없지만, 놀라운 것은 그녀가 1915년 카프카의 사생아를 낳았으며 그 자식이 7살 때 병으로 사망했다는 선정적인 소문이 나중에 나돌았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뒤, 1948년 건국된 이스라엘에 정착해 있던 브로트에게 한 통의 편지가 옴으로서 밝혀진 내용이다. 이야기는 좀 복잡하다. 그해 브로트의 지인인 음악가 볼프강 쇼켄이 보낸  편지인데, 그 내용물엔 1940년 그레테 블로흐가 쇼켄 자신에게 보낸 편지가 동봉해 있었다. 그녀가 보낸 편지를 보면 카프카라고 명시하지 않았지만 카프카의 사망 일자와 누가 보아도 그로 보이는 정황들이 적혀 있었고, 1921년 카프카가 죽기 3년 전에 7살 된 자신의 아들이 사망했는데 그가 바로 카프카의 자식이라고 담담하게 쓰여 있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1944년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겼던 이탈리아에서 다른 유대인과 함께 잡혀 홀로코스트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증언 내용은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편지에서 진지하고 개연성 있게 사실을 전개하여 얼핏 보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진실이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편지의 주인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진위여부도 불분명했다. 쇼켄의 편지 입수 과정도 어딘가 어설픈 면도 없지 않았다. 1948년엔 이미 카프카는 영미 문학권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고 빠르게 세계적인 소설가로 입지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사후 재평가를 받는 경우엔, 당사자와 관련된 듣지도 못한 온갖 스캔들이 터져 나오기 일쑤였고, 그것은 황색 저널리즘을 타고 확신되기도 했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어수선한 가운데 이런 진실공방과 히틀러는 자살하지 않았다 같은 음모론 같은 설들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그것 외에도 펠리체의 파혼이 그녀 때문이라는 설이 자자했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브로트는 이 스캔들을 신빙성 있게 받아주었지만, 그런 자극적인 진실 공방을 오히려 즐겼을지도 모른다. 카프가의 삶은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있는데 블로흐와의 염문에 대한 낌새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저 그녀의 주장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난해하고 복잡한 정신회로를 전제로 볼 때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지만, 아무튼 이 스캔들은 아직까지도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좋은 재료가 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카프카의 사생아라는 단어는 대단히 서프라이즈적이지 않는가.

     

아무튼 창작의 샘이 고갈되자 불안은 증폭되었다. 그렇게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던 카프카는 무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끔찍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펠리체와 다시 시작하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졸장부 같은 행위였다. 당시의 남녀 관계의 풍속이 그런 재회를 허락했는지 모르지만 카프카는 2년 만에 펠리체에게 접근하여 아무도 모르게 독일 휴양 도시 보덴바흐에서 다시 만났다. 요즘 여자 같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테지만 그녀는 카프카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의 요구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프카는 재회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지만 서로는 변하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데이트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녀는 푸짐한 식사, 평범함과 아늑한 집과 아버지가 경영하는 공장에 관심을 가졌고, 밤 11시에 취침하고 난방이 되는 집을 원했으며, 그리고 석 달 동안 한 시간 빨리 가고 있는 내 시계를 제 시간으로 맞추어 놓았다. 그녀가 옳았다. 앞으로 계속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 앞서 입영을 하기 위해 회사에 청원을 했었다. 도피의 시도라고 하기엔 무모했지만 그는 차라리 전쟁터로 가는 게 적어도 현재 보다는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입영 청원을 받은 회사는 상급 기관에 결재를 올리고 방법을 강구했지만 그는 이미 소총을 들고 행군을 하기엔 너무나 허약해져 있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채식주의자가 되어 육류를 전혀 먹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고기를 안 먹는다고 했지만 그건 그의 의지일 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나약해 보였고, 사실적으로도 그의 체력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결핵균이 그의 폐에서 증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입영조차도 거절당한 그는 어쩔 수 없이 차선의 방법으로 펠리체에게 시선을 돌렸는지 모른다.

     

이유 불문 하고 다시 시작한 두 연인은 1916년 7월, 마리엔바트에 위치한 발모랄 호텔과 오스보르네 호털에서 10일 동안 함께 생활했다. 사랑의 감정이 뜨겁지 않으면 이런 공동생활은 견디기 쉽지 않은 법이다. 그의 내면에는 사랑의 감정이 깊은 바닥에 머물러 있었고,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는 건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 '정신 승리' 같은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최면 탓인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녀에 대한 여성성과 연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부드러운 눈길이 아름답고, 여자다운 깊은 열정이 아름답다'라고 그는 애써 일기에 적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고, 교외에 방 2~3개 달린 집을 얻고, 경제적인 문제는 각자 해결하겠다'라고 미래를 계획하기도 했다. 물론 항상 그렇듯 그 생각은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레체와의 재회는 그에게 문학 활동에 활력을 주었다. 일 년 전에 출간된 산문집 <관찰>과 소설 <변신>이 소소하지만 독자층을 형성되어 저변이 시나브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브로트 같은 문학하는 친구들의 힘이 보태져 카프카는 그해에 <변신>으로 폰타네 상을 수상했다. 그 상은 독일어권에서 꽤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서 몇 년 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이 상을 수상했고, 한참 후지만 귄터 그라스도 이 상을 받았다. 사실 카프카가 독일어권 소설가 중에서 거의 무명이라고 알고 있지만 당시엔 그래도 소설가로서 어느 정도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후에 재평가를 받은 여러 예술가를 보아도 생전에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경우는 거의 없고, 그래도 비평가들로부터 작품성은 인정을 받았었고 단지 대중적인 지지도가 없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당시 카프카의 변신 같은 작품은 흔히 말하는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요소가 강했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창작열이 상승한 카프카는 새 하숙집을 구하려고 했지만 마땅한 집이 없어 고민하던 중에 오틀라로부터 자신의 집에서 글을 쓰라는 제의를 받았다. 오틀라는 혼자 셋집을 얻어 살고 있었다. 손바닥 만 한 집이었지만 여동생은 오빠에게 편의를 제공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동생의 배려를 물리칠 수 없었던 카프카는 염치 불고하고 오틀리의 집에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라 수많은 소음에 시달려야만 했다. 소음이라면 신경증적으로 반응하던 카프카는 그래도 지긋이 인내하며 그 좁은 방에서 글쓰기에 전념했다. 그래서 그해 겨울, <시골의사>와 <회랑 관람석에서>, <형제 살인> 등의 작품을 탈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겨울을 보낸 카프카는 다음 해 봄에 방이 2개 달린 집을 구했다. 과거 셰보린이란 백작이 살던 건물을 다가구 주택으로 개조한 건물이었다. 그는 이 집에서 다시 여러 작품을 양산했다. <학술원의 보고서>, <만리장성의 축조>, <열한 명의 아들> 등이 당시엔 쓴 작품이다. 그래도 그 시기는 나름 생산적인 시간이었다. 아쉬운 것은 쓰다 만 실종자를 더 이상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라하에서 학수고대하지 않았던(?) 약혼식이 열렸다. 재회한 후 금방 약혼식을 하지 못하고 1년 동안 시간을 끈 것은 카프카의 미적지근한 태도 때문이었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은 사회성에 입각한 자연스러운 행위여야 하지만 카프카에겐 그것은 구속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런 양가적인 문제로 그는 1년 동안 고민한 것이다. 그의 심정은 약혼식이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약혼식을 참관한 브로트는 이렇게 되뇌었다. '딱한 광경... 카프카와 인습이라니...' 새롭게 마음을 잡은 카프카는 결혼 후 직장을 버리고 전업 작가가 되기로 작정했다. 이에 출판사 오너인 볼프에게 이런 의도를 보이고 자신을 저버리지 말아 주기를 당부하기도 한다. 정말 그 뜻을 행동으로 옮길지는 가능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인생에 전환점을 만들려고 심각하게 고민한 것은 사실이다. 고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결혼은 속박이며 문학은 자유라는 등식이 그의 인식의 세계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만일 내가 가까운 시일 내에 죽거나 완전히 생활 능력이 상실된다면 나 자신은 스스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세계, 즉 펠리체와 나의 자아는 해결할 길이 없는 충돌 가운데서 내 육신을 갈기갈기 찢고 있다.'     

그렇게 갈팡질팡 자신의 인생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8월 처음으로 각혈을 한 것이다. 폐가 시나브로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피를 토하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발칙하게도 폐결핵 발병을 현재의 상황을 돌파하는 도구로 활용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그는 약혼식을 거행한 지 두 달 만에 일방적으로 파혼을 결정한다. 파혼의 사유는 결핵이었다. 불치의 병이나 만찬가지인 결핵을 가지고 결혼을 한다는 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기에 결혼은 재고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이미 파혼을 염두에 두고 있던 카프카는 그 발병을 계기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펠리체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혼식은 언제 할지 요원해지고 있었다. 또한 결핵은 결혼의 압박은 물론이고 회사와 부모에 대한 책임감에서도 해방되는 빌미가 되었다. 매일 반복되는 회사 생활도 10년이 되어가니 염증이 나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강권 통치는 여전히 지칠 줄 모르고 행사되고 있었기 때문에 몸과 자유를 맞바꾸는 형태의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한결 홀가분해졌다. 죽음의 병을 얻자 오히려 평온해지다니, 그런 패러독스하고 양가적인 정신 현상은 카프카이기 때문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그는 8개월이라는 장기 병가를 얻어 보헤미아에 있는 취라우로 갔다. 그곳엔 오틀라가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남편과 함께 꽤 넓은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오틀라가 프라하에서 혼자 살던 골방과는 다르게 공간이 넉넉하여 휴양하기엔 부족함이 없었고 농촌의 분위기도 만끽할 수 있었다. 마음은 한결 평화로워졌다. 그는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핵은 어머니의 치마폭에 매달린 아이 같다'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카프카는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결혼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만약 했다면 미쳐버렸을 것이라고 실토했다. 그리고 머리와 폐가 나도 모르게 서로 타협을 하고 있노라고 익살을 부렸다. 

    

1917년 9월 20일이었다. 펠리체가 취라우에서 요양을 하고 있던 카프카를 찾아왔다. 하지만 병문안은 형식적이었다. 그녀에겐 마지막 예우 차원이었는지 모른다. 이미 냉각되어 있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카프카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그녀에게 그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브로트에게 고문 기구를 사용했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두 사람은 프라하에서 만나 공식적으로 파혼을 결정했다. 그 후 카프카는 약속도 없이 브로트의 사무실을 찾아가 펑펑 울었다. 브로트의 표현에 의하면 자신이 겪은 가장 섬뜩한 광경의 하나라고 했다. 카프카의 이런 격한 감정 표현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펠리체는 15개월 후 은행원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고, 다행히 유대인의 숙명인 홀로코스트를 피해 스위스를 거쳐 머나먼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카프카의 열풍이 가장 뜨거웠던 미국에서 그녀는 보관하고 있던 카프카의 편지를 유대인 출판업자인 살만 쇼켄에게 팔아 두 사람의 관계를 세상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아무튼 당시 펠리체가 은행원과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브로트로부터 접한 카프카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축복을 해주었다고 한다. 마치 큰 짐을 벗은 듯이.

     

사실 파혼의 외형적인 이유가 결핵이라는 논리는 거짓이었으며, 이런 논리는 구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당시자인 펠레체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카프카도 당위성이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본질은 사랑의 열기가 도무지 피어오르지 않은 것이었다. 결혼과 문학의 고독한 선택은 사랑의 감정으로 극복할 수도 있었지만 가슴은 도무지 뜨거워지지 않았다. 아마도 밀레나 예젠스카를 당시 만났다면 상황은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가식적인 표현으로 펠리체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감정은 이성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이지 않는가. 그런 가운데서도 펠리체는 철없는 카프카의 우유부단한 행태를 받아주었고 마음이 돌아오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사람의 관계는 복잡하기 마련이고, 더구나 남녀 간의 관계는, 남녀라는 구조적인 관계와 함께 그들만의 말 못 할 사정 등이 겹쳐지면서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갈등 구조가 형성되기도 한다. 무엇이 옮고 그른가의 이분법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펠리체와 결별을 하면서 카프카의 심경은 복잡했지만 그래도 취라우에서의 생활이 그를 위로했다. 같은 사람하고 두 번씩이나 약혼을 파기하는 엽기적인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그는 도덕적인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펠리체에게 인간적으로 정말 미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버지와 돌이킬 수 없는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고, 어머니를 비룻한 가족들도 이해불가의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다시피 한 그런 불안한 상태의 카프카를 오틀리가 감싸주었던 것이다. 오틀리는 카프카보다 9살 어린 막내 동생이었다. 커갈수록 반항심이 발동된 그녀는 아버지와 수시로 대립하였고 결혼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유 결혼을 했다. 두 언니들은 부모의 의도대로 중매결혼 형식으로 결혼했지만 그녀만은 그런 풍습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릴 때는 제멋대로였던 막내 동생이 성숙해지자 카프카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카프카는 막내 동생을 데리고 가까운 데로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도스토예프스키나 쇼펜하우어의 작품을 읽어주기도 하고 물론 자신의 작품도 낭송해 주었다. 이런 문학과 철학에 대해 잘 이해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행위 자체만으로 예술적 직관력이 상승되기도 하고, 타인과의 이해와 교감 또한 성숙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카프카는 그녀를 '순수하고 진실되고 사리분별이 밝고 헌신과 자립심을 겸비하고 또한 부끄러움과 용기가 평행을 이루고 있다.'라고 나름 높은 평가를 했다. 따라서 그녀는 브로트와 더불어 카프카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고 마지막까지 카프카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두 사람의 일화 중에 하나만 얘기하자면, 성년이 된 오틀라가 농장을 경영하겠다고 선언하자 아버지는 미친 짓이라고 질타를 했지만, 카프카는 오히려 오틀라의 이런 결정을 지지하고 농업학교 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그래서 취라우에서 그녀가 농장은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틀라는 카프카에게는 부족한 과감한 결단력과 실행력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그녀를 존중했는지 모른다. 자신에 결핍된 그런 것을 그녀에게서 보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커프카가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적 인간은 바로 아버지 헤르만이었다. 당시에도 아버지와의 대립 양상은 더욱 격화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아들의 결핵 확진 소식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고, 그것도 펠리체와의 파혼이 결핵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접했으며, 그로 인해 부모로서 섭섭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카프카가 하는 행위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고, 그의 논리에도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갈등만 고조될 뿐이었다. 이런 단절에 대한 고통은 형벌과도 같았다. 카프카는 부자간의 갈등을 극복하고자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극복이란 아버지와의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상수로 놔두고 숨 막힐 것 같은 자신의 내적 갈등을 희석시키는 작업의 일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장문의 편지는 정말 아버지에게 보낸 것은 아니고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정리하는 하나의 수상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훗날 출판되어 오늘날 두 부자의 관계를 많을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되는 게기가 되었다. 

    

취라우에서 쓰다 만 실종자를 이어서 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생산적인 작업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그동안 대충 훑어만 보았던 키에르케고르를 온전하게 탐독했고, 오스카 바움이 방문했을 때는 1주일 동안 함께 기거하며 톨스토이의 인생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기도 했고, 처음으로 바움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문이나 아포리즘 같은 짧은 글을 썼고, 항상 언젠가 풀어야 할 숙제처럼 염두에 두고 있던 <성>의 스토리를 구상하였다. 사실 카프카가 소설을 썼던 공간은 프라하였다. 대자연과 '대지의 시민'들이 공존하는 농촌에서는 아포리즘 같은 기도 형식으로서의 글쓰기만 가능했고, 고도의 상상력과 고통이 필요한 소설 집필은 프라하라는 회색 도시에서나 할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은 스스로 만든 고립 즉 스스로 쌓은 폐쇄 공간에서 창조되었던 것이다.  

   

사실 카프카가 작가로서 실존적인 삶을 발견한 곳은 고립된 공간이었다. 취라우는 마음의 평화를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의적 고립 공간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들끓는 영감을 주었다. 특히 프라하에서의 고립된 공간은 최적의 창작 장소였다. 그는 오히려 폐결핵의 완치를 바라지 않는 아이러니한 경향을 보였다. 그것은 외부 세계로의 폐쇄 도구로 사용하기에 적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오직 주변 세계로부터 고립해 있으면, 그 외부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바로 그 고립무원을 갈구한 것이다. 

    

장기간의 병가를 끝내고 프라하로 돌아온 카프카는 회사에 복직했지만, 건강이 호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근무에 어려움을 겪었다. 병가 중에도 결핵 치료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18년 11월,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체코 공화국을 수립하는 역사적인 상황을 뒤로하고 다시 요양에 전념하기 위해 프라하를 떠났다. 6주 병가를 내어 프라하 북쪽 셸레젠에 있는 하숙집에 숙소를 마련했다. 작고 한적한 도시였다. 카프카가 그곳에 간 것은 몇몇 사람만 알고 있었다. 각혈 후부터는 그의 일상이 많이 바뀌어 가급적 사람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는 그 마을에서 유대인 교구의 간부이면서 구두수선공의 딸인 율리스 보흐리제크이라는 28살의 여인을 우연히 만난다. 막연한 투병과 세속적 일상에 지친 카프카는 그녀와 금방 가까워졌다. 그녀는 이디시어를 잘했고 열렬한 시오니스트였다. 당시 금융 회사에 다니고 있던 그녀는 약혼한 애인이 전쟁통에 전사하여 실의에 빠져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도 카프카가 결핵 환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처음엔 서로 만나면 좋아서, 식사할 때나 산책할 때나 서로 마주 보고 있을 때나 서로 끊임없이 웃고 즐거워했다. 그녀는 예뻤고 여성성이 충만했으며 따뜻함과 차가움이 혼합된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카프카는 사랑의 감정이 솟구쳤다. 프라하에 돌아와서도 틈만 나면 셸레젠에 가서 그녀와 밀회를 즐겼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을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카프카의 청혼을 그녀는 받아주었다. 자신의 처지를 볼 때 조심스러운 청혼이었지만 그녀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리고 프라하 브르쇼비치 지역에 결혼 후 생활 할 아파트를 마련해 놓았다. 1919년은 넘기지 않고 혼인을 하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청혼 후 잉크도 마르기 전에 그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청혼을 파기해야 하겠노라고 설파하기 시작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 문학이 지닌 온갖 위험에 빠져 있고, 폐도 약하고, 기력이 없어 사무실에서 필기조차 하기 힘들어하고...' 사실 그런 조건을 가지고 결혼하면 순진한 시골 처녀를 불행하게 만들 게 뻔했다. 그건 변명이면서도 사실이었다. 더구나, 청혼 사실을 아버지에게 보고했지만 극렬한 반대에 부딪친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의 직업이 최하층이라는 사실을 들먹이며 치욕적인 언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차라리 사창가에나 가라!'라고 극악무도한 표현까지 쓰며 반대를 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를 파혼의 이유로 들먹이며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이런 상황에서 결혼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노라고 그는 읍소했다.      


카프카의 그런 변명은 이율배반적이면서 뻔뻔하지 않을 수 없는,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아버지와 다를 게 없는 파렴치한 행동이라고 해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사실 펠리체의 경우처럼 설사 아버지가 찬성을 했다고 하더라도 파혼의 변함은 상쇄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결혼에 대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마지못해 따라왔다'라고 그는 일기에서 고백했다. 사랑과 결혼은 강박이었다. 카프카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서 노골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늘어놓지만, 그런 갈등의 논리를 파혼의 빌미로 삼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태였으며, 나르시스트의 전형으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데카당스가 만연한 파리의 몽파르나스 같은 곳에서 예술하는 사람들이라면 기인에 가까운 대접을 받기 때문에 남녀 관계의 변화무쌍함에 대해 관대할지 모르지만 여기는 아직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위엄이 남아 있는 보수적인 프라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더 엄격한 유대 문화권에 속해 있었고, 공기업의 중간 간부로 재직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런 불성실한 행동에 대해서 프라하의 보수적인 사회 정서는 그에게 결코 좋은 시선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런 스캔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하지만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1963년 보흐리제크의 여동생에게 보낸 카프카의 장문의 편지가 발견되면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 러브스토리는 브로트의 카프카 전기에도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그리고 그녀는 2년 후 은행 지점장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지만 결국 대다수의 유대인이 그렇듯 그녀도 1944년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카프카를 변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프라하라는 세속 도시에서 작품 활동을 해야 할 인물이 아니다. 그는 파리의 몽마르트르나 몽파르나스에서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어울렸어야 제격이었다. 아니면 당시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의 기치를 들고 독일 문화권에서 발원한 다다이즘 같은 과격한 조류와 생사고락을 했어야 옳다. 그것도 아니면 보헤미안 족인 모딜리아니처럼 보다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파괴하며 예술에 함몰했어야 했다. 그의 작품과 고백 등을 볼 때, 그의 내재된 예술가적 성향은 본질적으로 그런 방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약한 생활력, 잘못된 교육, 독신생활은 회의론자를 낳고, 그 회의를 살려내기 위해 적어도 관념상으로라도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는 프라하라는 공간과 가족과 직장이라는 얽힌 관계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아버지처럼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성향을 조금이라도 이어받았다면 카프카는 제임스 조이스처럼 과감하게 프라하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결과적으론 그는 문학적 자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결핵균이 자신의 육신을 파괴할 즈음에야 그는 실존에 대해 각성하고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찾았다. 브로트의 말이 옮았다. 카프카에겐 결혼이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카프카의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결핵환자는 우선 잘 먹어야 하지만 그는 채식주의를 고집했기 때문에 그런 의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혹시 예술가의 병이라고 하는 결핵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상당히 많은 예술가들이 결핵균에 의해 소멸되었고 그 과정에서 위대한 작품이 창조되지 않았던가. 아무튼 그는 시시때때로 병가를 내어 요양소 생활을 했다. 1920년 4월 어느 날이었다. 메란에 있는 요양소에 있을 때 운명처럼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발송자는 뜻밖의 이름이었다. 바로 밀레나 예젠스카였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고 카프카의 출간된 작품인 <화부>와 <변신> 등을 체코어로 번역하고자 하니 허락해 줄 것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밀레나의 소개 글을 읽고 기억을 더듬은 카프카는, 작년 가을 어느 날, 프란츠 베르펠이 주도로 프라하 서클 모임이 열렸던 아르코 카페를 찾았다가 그곳에서 테이블 사이로 지나가는 그녀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의 남편 에른스트 폴락과 함께 그녀는 가끔 그 모임에 참석하여 프라하의 젊은 문학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깐 카프카에게서 눈을 떼고 밀레나 예젠스카의 관점에서 그녀의 삶을 조명해 보겠다. 카프카의 삶의 여정에서 그녀는 핵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진정한 의미에서 카프카의 말년을 지배한 불멸의 여인이었다. 당시 그녀는 24살의 유부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라하에서 유명한 턱관절 전문 외과의사이면서 체코 대학의 교수였고 또한 민족적 자긍심이 강한 올곧은 지식인이었다. 무남독녀였던 밀레나는 13살에 자신을 아버지로부터 보호해 주던 어머니가 사망하자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유일한 자식을 거의 방목하다시피 한 형식적인 아버지에 불과했고, 그런 아버지가 그렇듯 때론 과잉된 부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녀를 다스렸다. 이렇게 사춘기의 상처를 간직한 그녀는 보헤미아의 신지식인들이 설립한 미네르바 여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는 보헤미아 최초의 여자 고등학교로서 당시 여권 신장의 바람을 타고 혁신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그 학교 출신들은 해방된 여성층을 형성했고, 신여성의 자유행각으로 악명이 높았다. 밀레나는 학교 분위기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학교에서 발행하는 잡지 출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파격적인 글을 많이 썼다. 그녀의 친구인 슈타샤와 아르밀라 등이 그녀의 자발적 동조자였다. 증언에 의하면 발칙한 그녀들은 밤중에 묘지 산책, 옷 벗고 몰다우 강을 수영으로 횡단하기, 굶주림이란 소설로 유명한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hamsun)과 당시 유럽의 문학도들을 사로잡았던 도스토예프스키 탐독, 화가 문인 가수들과 스캔들 만들기, 이사도라 던컨식 의상 따라 하기, 무절제와 감정 낭비 등이 그 서클의 행동 양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은 훗날 밀레나를 '그녀는 억제되지 않는 생물 같았고, 햇빛처럼 행동했으며, 매력적이었고 그러면서도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다'하고 증언했다.

     

그렇게 과격한 고등학교 생활을 마친 밀레나는 예상과 달리 아버지인 얀 예젠스카의 뜻에 따라 프라하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의사라면 의사 가문을 형성하는 게 꿈이 듯이 아버지는 밀레나를 반강제적으로 의과대학에 입학시켰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아버지의 평생소원인 그런 강권을 아직까지는 거부할 힘이 부쳤단 그녀는 한발 뒤로 물러섰는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군 병원 부상 병동에서 수습 보조원으로 봉사를 하던 그녀는 의사의 길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가야 할 길은 아니라고 확신하였다. 이에 학부 2학년 때 그녀는 의대를 포기하였다. 아버지의 집요한 설득이 뒤따랐지만 그녀는 끝내 아버지의 의지를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녀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프라하의 문학 세계에 들어가 많은 젊은 문학가들과 접촉하며 방종하고 궁박한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 보헤미안에 가까운 방탕한 생활을 할 때 에른스트 폴락을 만난 그녀는 그로부터 청혼을 받는다. 체코에서 전도유망한 작가이자 역사와 철학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있던 폴락은 매우 활동적이며 언변이 좋아서 많은 문학인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었다. 당연히 밀레나와 폴락은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이런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안 밀레나의 아버지는 이성을 잃었다. 무일푼 듣보잡 예술가이면서 유대인인 폴락을 민족주의자이자 내로라하는 인종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이 결혼을 승락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는지 모른다. 이에 대로한 아버지는 당시 보헤미안 생활에 빠져 있던 밀레나를 코카인 중독자로 몰아 치료의 목적으로 정신 요양소에 강제 입원시켜 버렸다. 사실 밀레나는 코카인을 복용했지만 그렇다고 입원할 정도로 중독자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예젠스카는 폴락에게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여 폴락을 광분하게 만들었고, 이에 폴락은 예젠스카에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슈만이 10대의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와 소송 전을 벌인 것처럼 희대의 막장 드라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결혼은 물 건너가는 듯했다.

     

하지만 친인척의 적극적인 중재와 법적으로 결혼에 대한 부모의 동의가 필요치 않은 21살이 지났다는 이유로 예젠스카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결혼을 승낙한 것은 아니고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상태를 견지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최소한 부모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은 그는 딸에게 결혼 지참금까지 건네주었다. 훗날 밀레나가 홀로 순탄치 않은 인생역정을 이어갈 때도 예젠스카는 하나뿐인 피붙이에게 그래도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 밀레나에게 평생 동안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돈을 줄 수도 있지만 나태해질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겨우 살 수 있을 정도의 생활비만 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엔나에 정착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폴락은 문학 친구들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매일 카페를 전전했고, 그것도 모자라 카사노바 기질도 있어서 노골적으로 바람도 피웠다. 더구나 경제적으로도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한마디로 백면서생이었다. 임대료와 각종 공과금과 식비 등 그래도 어느 정도의 삶의 질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다. 더 이상은 아버지에게 손을 벌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손수 돈벌이에 나섰다. 처음엔 짐을 운반해 주는 따위의 단순 노무직도 해보는 등 수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뛰어갔고, 그런 와중에 그녀는 생계를 위해 번역 작업을 시작했으며 그 후 이와 병행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번역은 물론이고 어떤 형태의 글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전업 작가로 활동하는 것은 여성으로서 무모하기도 하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갖 편견과 무시를 이겨내며 생의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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