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7월 25일, 랭보는 21개월의 지난한 여정 끝에 자미와 함께 아덴으로 돌아왔다. 자미도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아덴에 도착한 랭보는 곧바로 쥘 쉬엘을 만나 무기 거래에 관해 마지막 정산을 시작했다. 그는 거상의 위치에 있는 재력가여서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여러 상인들과 금전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랭보도 자신에게 위탁 판매를 의뢰한 쉬엘의 무기 대금에 대해 매듭을 지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이번 사업의 실패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한 후 쉬엘의 공감을 구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최종적으로 총액 6,000탈레르 중에 15%를 탕감하는 데 합의하였다. 계산은 정확해야 하는 게 이 세계의 법칙이었다. 결국 2년 동안 개고생을 한 결과 경비를 제외하면 거의 본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런 일련의 총체적인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하여 프랑스 영사관에 제출했다. 이렇게 아덴에서 정산 절차를 마친 랭보는 황폐해진 몸을 이끌고 자미와 함께 이집트로 휴가 여행을 떠났다. 그는 유럽풍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아프리카에 온 후 처음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와서 그동안 악착같이 모아두었던 16,000프랑 상당의 어음을 금화로 바꾼 후 연간 8%의 이자로 은행에 예치했다. 그 밖에도 이집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보렐리의 형을 만났는데, 그는 랭보를 프랑스 잡자사인 보스포르 에집시앵의 사장에게 소개해주었고, 그 인연으로 랭보는 자신이 경험한 아프리카 상황에 대해 르포 형식으로 투고하기로 합의했다. 이 작업에 랭보는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경제성 있는 자원에 관한 정보와 쇼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메넬리크와 요하네스와의 권력 투쟁 등은 세밀하게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밀도감 있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 글은 얼마 후 그 잡지사에 2번으로 나누어 게재되었다.
몇 년 사이에 랭보는 많이 늙어 있었다. 30,000프랑까지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그 기회가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삶의 에너지는 한풀 꺾이고 말았다. 무모한 행동은 아니었을까 하고 자책을 하기도 했다. 2년 동안의 파란만장한 행로에 결국 남는 것은 피폐해진 심신 밖에 없었다. 특히, 두 다리 하나는 누구보다 강인하여 사막에서도 빠른 걸음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다리에 류머티즘도 생겼고, 넓적다리에도 가끔 마비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으며, 허리와 어깨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에 나타났다. 긴장이 풀린 원인도 있지만 이미 그의 육체는 너무나 많이 소모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은 이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50대의 몸이라고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고작 33살에 불과했다.
그해 10월 초에 랭보는 이집트에서 아덴으로 돌아왔다. 무기력해진 그는 다시 잔지바르로 이주하려는 생각에 잠겼다. 그곳이 아니더라도 베이루트나 아라비아도 괜찮은 선택지였다. 아니면 더 멀리 중국이나 일본도 고려의 대상이었다. 이성적인 긴장이 이완될 때면 그의 머릿속에는 항상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꿈을 꾸었다. 멀리 더 멀리 떠나려는 노매드적 욕망이 의식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사업 구상을 하기에 바빴다. 프랑스에 있는 바르데에게 새로운 사업에 대한 계획서를 보내기도 하고, 몇 년 전 프랑스 지리학회에 보내 호평을 받은 보고서를 바탕으로 아프리카 뿔 지역의 전문가로서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다면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겠다는 의향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아덴에 오기 전에 시리아에 방문하여 효율성 좋은 시리아산 수탕나귀를 구입하여 쇼아 지역에서 사육하고 매매하려는 사업을 알아보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유목이나 대상은 거의가 이동 수단으로 낙타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현실적으로 노새도 상당한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노새 사업도 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는 이 사업에 대해 시리아 주재 프랑스 영사에게 문의를 했는데, 현지에서 씨당나귀를 구입하려면 어디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아덴까지 끌고 오는데 필요한 경비와 보험료가 얼마나 드는지에 대한 구체적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아덴에 돌아온 랭보는 내친김에 노새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했으나, 또다시 눈앞에 등장한 무기의 유혹이 그 계획을 뒤로 물리게 했다. 2년 전 타주라에 묶여 있던 솔레예의 소총 3,000정을 헐값에 구입한 사부레가 다시 메넬리크에게 팔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총에 더해 더 많은 소총을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에 가 있던 사부레와 편지를 주고받은 랭보는 함께 동업을 하기로 잠정적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에 랭보도 어머니에게 지원 사격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로슈 지역의 국회의원에게 에티오피아에서의 무기 판매에 대한 정부의 결정에 압력을 넣어 줄 것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스위스로 휴가를 떠나는 알프레도 일그가 아덴을 경유하기 위해 방문했는데, 랭보는 그를 만나 정식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이 사업에 대해 유럽에 가면 프랑스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외교적인 문제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무기거래를 한다는 것은 불법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에 랭보와 사부레는 포기하지 않고 극비리에 2개월 동안 실무 작업에 착수했다. 비밀이 알려지면 철창신세를 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1888년 2월, 랭보는 직접 아덴에 방문하여 하라르 총동 마코넨을 만나 캐러밴에 필요한 경호와 낙타 지원과 그리고 어느 루트로 이동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협의하고 한 달 만에 아덴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랭보는 이번 사업에서 정면에 나서지 않았다. 사부레와의 신의 때문에 이제 와서 완전히 발을 뺄 수는 없었다. 사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불법을 자행하면서까지 이 사업을 추진하는 게 너무 위험했고, 사부레도 이런 사업을 하기엔 적성에 맞지 않았다. 더구나 메넬리크 2세에게 호되게 당했는데, 한번 배신한 사람은 두 번 배신은 더 쉬운 법, 그것을 알면서도 다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회의와 의구심이 랭보를 사로잡았다. 지난번 실패로 인한 손실을 복구하려는 욕심 때문에 다소 경솔하게 결정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부레와의 동맹은 신뢰 문제로 완전히 선을 그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업 실행 현장은 사브레가 전담하고 랭보는 메넬리크의 주변 인물들과의 인맥을 활용하여 뒤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으로 업무를 분담했다.
아무튼, 그런 가운데서도 랭보는 새로운 사업을 모색했다. 거의 6개월 만에 찾은 하라르는 그전에 비해 한결 평화로워져 있었고, 왠지 모르지만 하라르에 대한 연민이 랭보의 마음을 흔들었다. 다시는 하라르 땅을 밟지 않겠다는 결심이 얼음 녹듯이 흘러내긴 것이다. 신출내기 시절 바르데 회사의 직원으로 처음 커피 사업을 배우던 기억이 마치 고향의 그리움처럼 되살아 나지 않았을까. 미우나 고우나 하라르는 랭보의 영원한 잔자바르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상인으로서의 원형적 고향은 아니었을까. 그는 스위스에 가 있는 일그에게 이제 하라르에 정착할 터이니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우선 랭보는 바르데와 사업 제휴를 맺었다. 무엇보다 하라르 사정을 잘 아는 바르데는 랭보의 제휴 요청에 승낙을 했다. 바르데는 유럽산 비단 같은 공산품을 하라르로 공급하고, 랭보는 하라르에서 물물교환을 한 커피 같은 물품을 바르데에게 보내 수입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물론 교역 품목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거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협의한 후 랭보는 우선 아덴 상주 프랑스 영사에게 하라르 총독에게 제출할 추천서를 발급해 줄 것을 청탁했다. 하라르 총독이 자신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정착하는 마당에 공신력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프랑스 영사의 추천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외국에서 외교관의 추천은 당사자의 신뢰를 올리는데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랭보가 싸구려 상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덴에서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사의 추천서는 쉽게 랭보의 손에 쥐어졌다.
1888년 4월 13일, 랭보는 아프리카로 떠나는 증기선에 몸을 실었다.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아프리카로 떠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이번에는 영국이 개발하고 있던 소말리아의 베르베라 항구를 거쳐 자일라로 갔다. 거기서 과거 바르데 시절 오가덴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던 소티로가 랭보를 마중했다. 그리고 또다시 대중교통 같은 다른 캐러밴에 의탁해 십여 일의 기나긴 여정 끝에 하라르에 도착했다. 언제 하라르를 떠날지 기약은 없었다.
하라르에서의 생활은 드라마틱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평범의 기준이 상대적일 수 있지만, 지금까지 아프리카에서 살아온 시간을 볼 때 현재의 일상은 평범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제 또 그의 마음이 바뀌어 이곳을 떠날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정착에 마음을 두었다. 그는 우선 도매와 소매를 병행하는 차원에서 매장도 열었다. 현지에서 구입해 유럽으로 보내는 물품은 한정적이었다. 사향, 커피, 고무, 상아, 은, 가죽 등 원재료 등이었고 항상 구매도 유동적이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들어온 공산품은 온갖 종류의 잡화였다. 여러 가지 색을 입힌 양모, 면직물, 비단 등의 다양한 옷감이 많았고, 그리고 철로 만든 냄비, 주물로 만든 프라이팬, 주석으로 만든 완차, 유리로 만든 잔과 물병, 담배, 가위, 종이, 수첩, 약품 등 온갖 종류의 공산품을 도소매로 판매를 했다. 심지어 머리빗까지 팔았다. 특히 랭보는 유리 제품에 적극적이어서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여 주문을 하기도 했다. 다양한 형태의 유리 제품은 당시 아비니시아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현재의 랭보를 기억할 때 시와 커피를 떠올리지만 유리 제품도 그에 못지않게 그의 무역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랭보를 찾아온 브레몽이 한가하게 이런 만물상을 운영하고 있는 랭보를 보고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필요하다면 프랑스 상인들을 상대로 회계 장부도 작성해 주었다. 특히 사부레의 장부는 빈틈이 없어서 세무조사를 받아도 거의 적발될 게 없을 정도였다. 그런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우선 매사에 꼼꼼하고 또한 책임감과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랭보는 이런 능력과 함께 신뢰성까지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그런 일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덴 경제의 대부인 쉐엘과 세자르 티앙도 랭보가 만든 장부는 믿었다. 또한 그는 유럽을 비롯해 하라르와 아덴과 엔토토와 그리고 안코베 등 상권이 형성된 도시로 전달되는 각종 편지와 소포도 취급했다. 그리니까 우편집중국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라르는 상권 중심이었기 때문에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고, 그리고 메넬리크 2세의 오른팔인 마코넨이 통치하고 있을 정도로 비중 있는 도시여서 우편물 취급 량이 상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동아프리카에서 발생하는 정치 경제 사회를 망라한 온갖 정보를 수집 유통하는 정보통 역할도 자연스럽게 겸업하였다. 그는 성실하고 사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정보는 신뢰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라르에 오는 상인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접하다 보면 많은 정보들이 쌓여 교환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런 내용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요긴하게 전해지기도 했다. 정보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일그가 스위스에서 데려와 아와시 강 교량 보수공사를 맡겼던 아펜첼러도 하라르에서 랭보를 만났고, 그리고 탐험가이자 측량사인 브레몽, 랭보가 항상 부러워 한 사진사 비도, 밀사의 임무를 띠고 이탈리아에서 온 안토넬리, 여전히 무기 거래에 매달려 있는 사부레, 탐험을 즐기는 보렐리, 케냐를 여행하고 돌아가던 오스트리아의 텔레키 백작 등 많은 사람들이 랭보를 거쳐갔다. 특히 보렐리는 랭보에게 편지까지 보내, 진제로에서 원주민의 무자비한 공격들 받아 일행 일부가 도망을 쳤고, 자신과 남은 일행은 포로로 잡혀 온갖 고초를 겪다가 원주민 4명을 죽이고 탈출을 하였다는 무용담을 늘어놓았고, 10월에는 하라르로 갈 것 같다고 첨언했다. 그 편지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말 경에 그는 처참한 몰골로 랭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말라리아까지 걸려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랭보는 그런 보렐리를 자신의 집에서 간병하여 기력을 회복시켰다. 아프리카에서는 삶에 대한 열정이 필요했다. 유럽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정은 필수 조건이었다. 때로는 총격전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죽임을 당기도 하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들기도 하고, 때로는 하던 사업이 실패하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뜨거운 에너지가 필요했다. 열정은 모험을 감내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드는 원천이었다. 랭보는 그런 용광로 같은 열정들을 접하면서 대리 만족을 했는지 모른다. 자신은 비록 현재 그들처럼 모험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노고를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때로는 신뢰하는 정보통 역할을, 때로는 인간적인 위로자 역할에 만족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해 10월 말 경이었다. 드디어 사부레가 낙타 250마리에 소총 3,000정과 총알 50만 발을 싣고 유령처럼 하라르에 나타났다. 1년 전 랭보가 하라르에 와서 총독을 만나 무기 운반에 대해 협조를 요청한 것은 하나도 이행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사부레는 상상을 초월하는 악전고투를 겪게 되었는데 이에 얼마 전 랭보에게 격분하는 편지를 보냈었다. 그것 외에도 영국과의 지정학적인 갈등으로 인해 프랑스 당국이 무기 판매를 승인하지 않았다가 다시 승인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었다. 동아프리카에서 지배권을 더욱 키워가던 영국의 눈치를 보느라 갈팡질팡 한 결과였다. 아무튼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성공적으로 하라르에 도착한 사부레는 한동안 랭보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두 사람 간의 불편한 관계는 랭보가 자신의 불찰을 사과하면서 해소되었다. 이 사업에 다소 불성실한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랭보로써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성공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사브레가 어떻게 역경을 이겨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랭보는 그를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기 판매 후였다. 무기거래 업계의 선배 격인 랭보가 보기엔 대금을 어떤 식으로 받아야 하는지가 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이 거래에서 하라르의 총독인 마코넨이 관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랭보는 미리 총독을 만나 마사지를 하기도 했다.
아덴은 대체적으로 평화로웠지만 주변의 정치적 상황은 요동을 치고 있었다. 쇼아에서는 내부적으로 메넬리크 2세와 요하네스 4세가 극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메넬리크 2세는 이탈리아로부터 소총 5,000정과 탄약 수백만 발을 계약하여 그 무기가 아프리카 내에서 이동하는 중이었고, 이에 요하네스 4세는 수단의 마흐디 세력과 이탈리아 군과 전쟁을 하느라 경황이 없는 가운데, 그런 메넬리크 2세의 불경스러운 행위를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부의 권력 투쟁이 본격적으로 촉발되는 가운데 이탈리아는 노골적으로 이간질을 일삼으며 분열을 조장하였다. 식민지화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가 내부 분열이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동쪽 끝에 있던 조선에서도 이런 방법이 일본 제국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다. 이런 제국주의자들의 분열 획책은 약소국가에겐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상상외로 잘 먹혀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조선과 달리 그런 획책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리고 타 지역인 타주라 만 남쪽에서는 영국의 지배권이 강화되어 새롭게 지부티 항구를 개발하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오보크주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는 영향력이 축소되고 있었다. 또한 제국주의 러시를 타고 러시아군까지 준동하여 프랑스와 총격전이 발생하는 사태까지 발전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10여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은 꾸준히 아프리카로 유입되었다. 12월 말 경, 스위스로 휴가를 갔던 일그가 1년 만에 돌아오면서 잠시 하라르에 머물렀다. 40여 마리의 낙타에 왕에게 선물한 물품을 가득 싣고 온 일그는 바꿔 타고 가야 할 낙타를 기다리며 랭보의 집에서 한 달 동안 신세를 졌다. 겨울에는 캐러밴들이 많이 형성되기 때문에 운행할 낙타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랭보는 일그와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2년 전 엔토토에서 메넬리크와 무기 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랭보는 이번에는 그를 깍듯하게 대접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일그는 쇼아 정부의 중요한 국책사업을 직접 관여하고 있으면서도, 왕의 허락 하에 약간의 상거래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랭보는 그와 사업 파트너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랭보의 입장에서는 천군만마였다. 최고 권력자의 지근거리에 있다는 존재감만으로도 대단한 영향력을 발산하는 것이기 때문에 랭보에게 있어 이보다 든든한 배경은 없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내용을 보면 일그는 상인으로서의 랭보의 열정과 정직성을 존중했고, 그리고 과거에 시인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 예술가 출신의 아프리카 상인이라는 독특한 이력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지도 모른다. 추정해 보면, 그가 스위스에서 1년간 체류하면서 랭보의 시집이 출간되고, 재평가를 받고 있던 당시 프랑스의 분위기를 직간접적으로 접했을지도 모른다.
알프레도 일그
해를 넘기자마자 사부레에게 좋은 소식이 전해 왔다. 메넬리크 2세와 거래가 완료되어 이제 대금을 수령하는 일만 남았다고 했다. 하지만 대금 수령은 랭보의 경우처럼 하라르 총독에게 받아야만 했다. 경제의 핵심 도시인 하라르는 쇼아의 자금줄이었기 때문에 금액이 큰 거래는 하라르에서 전담하는 상황이었다. 랭보는 사부레로부터 대금 수령의 위탁자로 위임받은 터라 하라르 관청을 수없이 찾아다니며 빚쟁이처럼 실랑이를 해야만 했다. 총 53,000탈레르를 한 번에 받지 못하고 3000탈레르, 20,000탈레르 두 번에 나누어 한 달 동안 쪼개어 수령했고, 나머지 미수금은 거의 1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원두커피로 수령했다. 사부레뿐만 아니라 일그와 관련된 미수금도 커피로 받았다. 커피 원재료는 아덴에서 현금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다. 단지 상한 커피가 있을 경우에는 원성을 사기도 했다. 특히 사부레한테 간 커피 중에 일부가 상한 게 있었는데 그로 인해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여 한동안 소원해지기도 했다. 눈곱만큼 받은 수고비로 인해 책임을 전가하는 사부레에게 화를 낸 것이었다. 하라르 총독에게 돈을 받아 내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그들은 몰랐다.
그러한 가운데 주변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두 전선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던 요하네스 4세가 마니암군과의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며칠 후 사망하자 모든 준비가 되어 있던 메넬리크 2세는 요하네스 4세의 아들과 정적들을 숙청하고 드디어 1889년 11월 30일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가 실질적인 일인자였기 때문에 쇼아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쇼아에서는 그렇게 성대하게 대관식이 열렸지만 동아프리카 해안 지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영국령인 자일라에서 선교서와 상인이 포함된 유럽인 4명과 원주민 안내원을 비롯해 인부들이 인근 부족인 이사족에게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지역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영국은 인도인으로 구성된 영국군 1,000여 명을 파견하여 이사족과 가디부르시족을 응징하였다. 그리고 후방에 있던 원주민 지원군이 영국군을 기습하여 40여명의 영국군이 전사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영국군은 아덴만 해역에서 하라르로 향하는 모든 루트를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생명줄과 같은 교역로가 묶이자 하라르의 상인들은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해제가 되겠지만 그날이 언제인지 막연하기만 했다. 이에 랭보는 일그에게 하라르는 먹고살게 없노라고 하소연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랭보는 아덴의 거상 티앙과 그리고 사브레, 세프뇌, 일그 등과도 사업상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로 불화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기에 밝은 상인들을 상대하다 보면 금전과 관련된 갈등이 다반사로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갈등은 오래가지 않고 진정되었다. 표정의 변화도 없고 말수도 적어 처음엔 깐깐하게 보였던 랭보는 갈등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자신이 손해 보더라도 양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키프러스에서 감정 조절을 못하여 혼난 적이 있은 후 마지막까지 가는 경우는 없었다. 아무튼 그가 결코 아름답지 않은 아프리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밑바탕은 배려와 존중이었다. 그를 둘러싼 여러 부류의 사람들은 최소한 그를 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이곳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고 자평했는데, 그런 평가가 다소 포장되었다 하더라도 상당한 객관성은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편지에서 계속 얘기한다. '하라르 주민들이 소위 문명국의 하얀 니그로들보다 더 바보 같지 않고 더 천한 것도 없다. 오히려 여기 사람들이 덜 악하며 어떤 경우에도 감사와 성실성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리고 ' 나는 한 번도 남에게 나쁜 짓을 한 적이 없고, 기회가 닿는 대로 약간의 자선을 베풀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누구보다 랭보를 잘 알고 있던 바르데는 '그의 관용은 매우 사려 깊고 넓어서 냉소하거나 불쾌감으로 소리를 지르는 일이 없다.'라고 증언했고, 하라르의 선교사인 앙드레 신부도 '랭보는 자기 영혼의 고통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아프리카에 망명했다.'라고 평했다.
그의 옷차림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소탈했다. 유럽인이라고 드러내 보이려고도 하지 않았고, 돈과 명성을 위해 어떠한 모색도 하지 않았다. 하라르 주민들은 그를 보고 '정직한 저울'이라고 불렀다. 그런 별칭은 신뢰와 존경이 층층이 쌓여서 응축된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는 현지어인 암아람어와 아랍어를 구사할 줄 알았기 때문에 코란을 읽을 수 있었다. 한가할 때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코란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자신이 어릴 적 체득한 구약 성경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동네 꼬맹이들에게 유럽에서 온 이방인이 코란을 지도하고 있는 풍경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이런 친근한 행위는 의도해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인 선한 성정과 품성이 내면에 존재하지 않으면 표현될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현지인의 삶 속 깊이 흡수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매개체는 서로 간의 존중이다. 아프리카 무슬림을 가볍게 보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는 인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라르에서 무탈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프랑스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보낸 사람은 현대 프랑스 지의 기자 로랑 드 가보티였다. 이 편지는 그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한다. '친애하는 시인이여. 나는 당신의 멋진 시들을 읽었고, 데카당스 적이고 상징주의적인 이 학파의 수장께서 내가 편집장으로 있는 현대 프랑스 지에 기고를 해준다면 대단히 기쁘고 영광스러울 것이다. 부디 우리와 함께해 주시기를. 미리 감사하며 경의를 표한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랭보의 시집 일뤼미나시옹에 대해 재평가가 일어나고 있는 과정에서 날아온 편지였다. 1875년 2월, 2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베를렌이 랭보가 있던 독일로 찾아왔을 때, 출간을 목적으로 제르맹 누보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며 건네준 원고가 그 후 베를렌의 아내 마틸다와 그녀의 동생까지 개입되면서 파리를 떠돌다가 그것을 보다 못한 베를렌이 직접 나서 장문의 추천서까지 곁들여 1886년 10월에 출간하였던 것이다. 무려 11년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나마 소실되지 않고 출간된 것은 나일강변 나그함마디에서 발굴된 도마복음처럼 천운이었다. 그 후 말라르메 같은 상징주의자들에 의해 신화화되어가고 있었고, 그런 흐름 속에서 가보티가 동물적인 저널리즘 감각으로 집요한 추적 끝에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아마도, 당시 파리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던 들라에를 수소문 끝에 만난 가보티는 샤르빌에 사는 랭보의 본가 주소를 알아낸 후 탐문한 끝에 하라르 주소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랭보는 그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답장을 하여 가보티의 청탁을 들어주었다면 어떤 형태의 글이나 인터뷰 내용이 프랑스 언론이나 문단에 남아 있을 터이지만 랭보의 랭자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런 접선은 무미건조하게 종결된 것 같다. 사실 랭보는 가보티의 편지가 불편하기도 했다. 자신이 파리에서 현재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는가에 대해 가보티의 편지는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략적인 분위기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무슨 오디세우스나 되는 것처럼 15년 만에 파리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건 참을 수 없는 위선이었다. 지금 와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짓을 하겠는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요리하든 그리고 그 요리가 맛있고 맛이 없든 그것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작품은 이미 이 끔찍한 세상에 다 쓰레기처럼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쓰레기를 수거하여 재활용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그는 아주 먼, 실루엣만 간신히 투영되는 아득한 기억의 편린이 그의 회로에서 기어 다녔다. 1873년 10월이었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파리에서 어렵게 출간을 강행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시집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파리의 먹물들에게 있어 랭보라는 존재는 자신들의 친구인 베를렌의 인생을 파멸시킨 악마 같은 존재로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간을 한 후 문학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러 파리에 간 랭보는 온갖 멸시를 받고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샤르빌 로슈 집에서 그 시집을 소각했다. 세상이 자신의 시를 무시하는 것에 참을 수가 없었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이 세상에 새로운 언어의 불을 선물하겠다던 원대한 꿈은 차디찬 현실 앞에서 무참히 깨졌으며, 소각 행위는 그에 대한 일종의 씻김굿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는 다짐의 퍼포먼스였다.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시가 연기와 함께 밤하늘로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르맹 누보는 달랐다. 화가이며 시인인 그는 랭보에게 호의적이었다. 랭보 보다 3살 많은 그는 조실부모한 처지였기 때문에 항상 삶에 여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랭보에 뒤지지 않는 방랑벽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의 부재는 랭보와 어떤 동족의식을 낳게 했는지 모른다. 뜻이 맞은 두 사람은 런던으로 가서 함께 살았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야 겨우 살 수 있는 궁박한 형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틈틈이 도서관에 가서 닥치는 대로 독서를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누보는 3개월 만에 런던을 떠났다. 각자 성격이 맞지 않았거나 아니면 누보에게 일이 생겼거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예술가들과의 인간적인 교류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더구나 예술가들이 함께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아무튼 런던에 홀로 남은 랭보는 신문에 가정교사 구직 광고를 내며 구직에 열중하지만 그것 또한 여의치 않아 지고, 마침내 어머니를 런던으로 불러오는 데 성공한다. 랭보가 어떻게 구슬렸는지 모르지만, 어머니 비탈리 랭보는 랭보의 여동생 비탈리를 데리고 런던에 와서 랭보를 뒷바라지한다. 해군 대위 출신이었던 남편의 연금과 로슈에서 대토 해서 농사를 짓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여유롭게 해외로 여행을 다니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농번기였고, 런던은 멀지 않아 부담이 덜 했고, 생활비는 랭보가 일부 부담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조건들을 버무린 랭보의 현란한 논리에 비탈리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게 아들 덕분에 런던에 온 비탈리는 아들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영국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랭보 식구는 샤르빌로 돌아왔다. 이제 랭보도 군대 갈 나이가 된 것이다. 세상의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것은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군인이 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환한 것이 형 프레데릭크였다. 당시 프랑스에는 가족 중에 한 사람만 군대에 가면 다른 형제는 군 면제를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 법을 활용하여 프레데릭크를 소환한 것이다. 하는 일 없이 백수 생활을 하던 프레데릭크에겐 상당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군인이란 직업은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형을 대신 군대에 보내고 입영을 면한 랭보는 다음 해 1875년 2월 독일 슈투트가르트로 간다. 명목상은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항상 그렇듯 독일에서도 그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파리에서의 랭보 / 아랫줄 왼쪽이 베를렌이고 두 번째가 랭보
그러던 어느 날, 랭보에게 권총을 쏘고 감옥에 갔던 베를렌이 2년 만기를 채우고 1월에 출소했는데, 파리에서 랭보의 통신원 역할을 하던 들라에에게 랭보의 거쳐를 알아낸 그가 슈투트가르트에 살던 랭보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슈투트가르트에서 2년 만에 조우했다. 자신에게 권총을 발사했던 베를렌은 놀랍게도 가톨릭에 귀의해 있었다. 천하의 데카당스가 회심을 하여 예수의 품에 안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했는지 알려진 것은 없지만 랭보가 들라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베를렌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교화시키기 위해 복음을 전파했노라고 비웃듯이 얘기했다. 추측해 보면 기독교에 귀의한 베를렌을 신나게 조롱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랭보는 베를렌에게 그동안 즉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쓴 이전에 써두었던 40여 편의 시 원고를 건네주며 누보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누보와 이 시를 출간하기로 약속을 했다고 하는데 후에 벌어진 면면을 보면 그것은 명확하지 않다. 아무튼 자신에게 출간을 위탁하지 않은 것에 서운할 만도 했지만 베를렌은 필사본도 없는 그 원고를 마치 '성유골'을 모셔 오듯이 파리로 가지고 왔다. 마지막까지 베를렌은 랭보의 시를 성스럽게 다루었다. 비록 랭보의 성격이 당돌하고, 나르시스트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파므파탈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의 시는 베를렌의 예술 세계에서 옥좌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렇게 파리에 돌아온 베를렌은 친구들에게 랭보는 '천하의 상스러운 놈'이라고 힐난을 한 후 그 원고를 브뤼셀에 있는 누보에게 보냈다고 한다. 감히 나에게 이런 심부름을 시킨 랭보 놈이 괘심 했는지 모른다.
그 시점을 분기점으로 랭보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시와 관련된 어떠한 문학적인 대화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인 들라에와 만나더라도 문학의 문자도 꺼내지 않았다. 문학과 예술론에 대해 입이 닳도록 떠벌이던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시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어디를 가나 그는 이골이 나도록 걸었다.
그해 10월 다시 샤르빌로 돌아온 랭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대학에서 조교로 근무하던 들라에에게 정보를 구했다. 그것도 자연계열이나 이공계 쪽에 입시 요강을 구체적으로 문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들라에에게 해외 선교사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 세계로부터 탈출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각도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젊은 랭보는 어딘가 멀리 있는 자신을 그렸다. 그때 막내 동생 비탈리가 황액막염으로 사망하자, 그 사건을 계기로 그는 삭발을 하고 심연처럼 깊은 고독을 찾아 떠났다. 데미안처럼,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 자신에게 맞닥트린 운명을 대면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닥칠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을 담대함이 그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6. 안녕, 아프리카
하라르의 경제는 여전히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구매가 되지 않았다. 메넬리크 황제가 커피, 상아, 사향, 같은 돈이 되는 물품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랭보에게는 일그가 있었기 때문에 숨은 쉴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이 주도한 글로벌 금융 메커니즘이 아프리카에도 전해져 금과 화폐와 환율 등의 관계를 이해한 일그가 물품 재고 보다 화폐를 비축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정보를 랭보에게 학습시켰다. 물론 일그의 논리는 맞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덴에서 유럽산 공산품을 대주던 티앙과 금전적으로 마찰을 빚던 랭보는 그해 말에 마지막 결산을 본 후 결별을 선언하고 다른 거상을 찾았다. 셰프뇌는 황제에게서 지금도 캐고 있는 아살 호수의 소금 채굴권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리고 징글맞은 라바튀의 유령이 다시 나타났다. 셰프뇌와 데샹 그리고 라바튀가 얽긴 금전적인 문제가 랭보와도 겹쳐 해결되지 않고 있었는데 랭보의 양보로 종결될 수 있었다. 이로서 라바튀는 평온하게 하늘로 갈 수 있었다. 아마도 랭보가 거기에서 다시 만난다면 주먹이 날아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일그가 스위스에서 가져온 냄비를 판매하던 랭보는 부진한 영업으로 인해 갈등을 겪었다. 1891년 초에 서로 독설이 오고 간 편지를 보면 금방이라도 관계가 깨질 것 같았지만 그런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랭보의 몸에서 이상 징후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다. 몇 달 전부터 오른쪽 무릎 아래 부분에서 통증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이젠 그 상태가 우려스러울 정도로 되어 갔다. 처음엔 류머티즘나 정맥류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생각했다. 걷는 재주를 믿고 두 다리를 혹사한 결과였다. 사실 얼마나 많이 사막과 산악지역을 걸었던가. 노새 타는 것을 거부하고 두 다리로 몇 날 며칠을 걷지 않았던가. 하지만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 수면을 취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으며 이제는 무릎 주위가 뚱뚱 부어올랐다. 하라르에는 제대로 된 병원이나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진찰이나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여동생 이사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슬개골 아래쪽이 망치로 계속 내리치는 것처럼 아프더니 그다음에는 관절이 경직되고 허벅지 신경이 계속 수축하고 있다'라고 현재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 사실 양말을 받아 보려면 최소한 2개월 후일 것이고, 그 기간 동안 자신의 육신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그리고 그 양말이 효력이 있을 리 만무였지만, 그래도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상태는 점적 악화되어 갔다. '걸을 때마다 무릎에 못을 박는 것 같고, 말을 타고 내릴 때는 불구자처럼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하고, 오금이 뻣뻣해지고, 방사통이 온몸의 신경을 뒤흔들어 복사뼈부터 허리까지 고스란히 전달되고,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랭보는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마사지도 받고, 물에 몸을 담그기도 하고, 다리 전체에 붕대로 감기도 했지만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그와 더불어 식욕이 떨어져 먹지를 못했고, 매일 불면으로 통증과 함께 밤을 지새워야 했다. 3월에 접어들었을 때는 아예 걷는 것은 물론이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포기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하던 일을 놓을 수 없어서, 누워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사무실을 개조하였다. 창고나 작업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전부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더 많은 직원을 고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절망적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발버둥을 친다고 상황이 호전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병원도 없고 자신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미 만이 그의 옆에서 수족 노릇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순간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이대로 하라르의 흙이 되어 버릴 것이다. 절망적이었다. 그는 떠나기로 작정했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형의 자산을 헐값에 청산하고, 현재 진행 중인 사업 관계는 피에트르 펠레스에 마무리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운송할 앰뷸런스 들것을 손수 설계를 해서 직원들에게 만들어 오게 했다. 노새를 탈 수 없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가마 같은 기구를 만든 것이다. 또한 그 들것을 비룻해 생필품을 운반할 인부 16명을 고용했다. 소규모 캐러밴이었다. 300km가 넘는 자일라까지 이동하려면 10일 이상이 소요될 것이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그 험난한 여정에 랭보는 몸을 맡겼다.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랭보는 걷지도 못한 채 들것에 실려 황급히 하라르를 떠났다. 한시가 급했다. 언제나 그렇듯 어린 자미가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지켰다. 랭보는 지옥과도 같은 그 여정을 일기로 남겼다. 그 와중에도 일기를 쓴다는 걸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슈베르트도 생의 마지막까지 매독의 극심한 통증과 싸우면서도 악보에 음표를 그렸고, 카프카도 숨도 쉬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극한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다. 그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마지막 성스러운 의식인지 모른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의식 말이다. 가혹한 통증을 참으며, 폭풍과 싸우고, 불어난 강을 천신만고 끝에 도강하고, 들것에서 떨어져 나뒹굴기도 하고, 특히 내리막에서는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인부들이 힘들어 도망가려는 것을 웃돈을 주고 잡아 두고, 이번엔 낙타가 도망 가 되찾아 오느라 하루를 허비하고, 그리고 랭보는 거의 먹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배설물이 나왔다. '나는 강가 쪽으로 가까스로 움직여 손으로 땅을 파고 몸을 비스듬히 하여 용변을 보고 흙으로 덮었다.' 지옥이었다. 아마도 지옥의 풍경은 그러하리라.
그렇게, 11일 만에 자일라에 도착한 랭보는 마침 아덴으로 가는 증기선을 운 좋게 잡아 승선할 수 있었다. 아덴에는 유럽인을 상대로 하는 병원이 딱 하나 있었다. 자미가 가서 불러온 티앙과 함께 병원으로 간 랭보를 본 의사는 기겁을 했다. 아수라장에서 목숨만 건지고 탈출한 사람의 몰골처럼 그의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상태를 보고 놀란 의사는 위험한 황액막염이라고 진단하고 처음엔 당장 다리를 절단해야 그나마 생명을 건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옥에서 살아온 랭보의 몸이 씻겨지고 그나마 사람처럼 보이자 의사는 그럼 마지막으로 한번 치료를 해보자는 의견을 표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다리에 주사기를 넣어 고름을 빼내고, 모르핀을 투약하는 등 치료를 한 결과 상태는 다소 호전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될 수 없었다. 프랑스에 가서 치료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강력한 소견에 랭보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바로 결정을 하고 프랑스행 배편을 예약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몰골로 프랑스 땅을 밟는다는 것은 치욕적이었다. 그래도 그에겐 삶에 대한 애착이 들끓고 있었다.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여객선이든 화물선이든 배는 매일 입항하는 것은 아니었다. 랭보는 병실 침대에서 거동도 하지 못한 채 배를 기다렸다. 그나마 자미가 옆에서 간병을 해서 조금은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진통제도 이제는 말을 듣지 않았다. 통증은 정신을 짓눌렀고, 하라르보다 훨씬 더운 날씨로 인해 욕창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그의 육신을 짓무르게 만들었다. 잠도 잘 수 없었고 음식 또한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몰골은 해골로 변해갔다. 그래도 아덴에서 그를 위로한 사람은 티앙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로 간의 금전적 이해 때문에 마찰을 빚었지만 랭보의 몰골을 본 티앙은 과거의 앙금을 풀고 진심으로 그를 위로했다. 그리고 랭보는 필설로만 나누었던 티앙과의 정산 관계 문서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멀리서 뱃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육신을 싣고 갈 증기선이 아덴 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살이 썩어 들어가는 통증이 의식을 지배하는 가운데서도 처음 아덴에 왔던 기억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커피 냄새가 진동하던 바르데의 창고에서 생원두를 검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하라르에서 돌아온 검게 그슬린 바르데와 마주 앉아 면접을 보던 장면도 클로즈업되었다. 그리고 그놈에 라바튀와 호텔 로비에서 만나 무기 거래 건을 두고 진지하게 협의하던 모습도... 그의 거친 숨소리도, 그의 독한 입 냄새도. 이제 배를 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치료를 받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설령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꼭 돌아오겠다. 그가 마지막까지 존재할 곳은 바로 이 뜨거운 아프리카였다. 이제 배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미는 함께 갈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식처럼 키우며 동고동락했던 자미와 이제 이별을 고해야만 했다. 자미의 큰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녀석은 말없이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랭보의 손을 놓지 않았다. 랭보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한 체온이, 차갑게 식어가는 그의 세포 속으로 깊은 잠 속에 빠져들 듯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1891년 5월 9일, 아마존 호는 랭보를 싣고 마르세이유를 향해 아덴 항을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덴만은 뜨거웠다.
그리고 1891년 5월 20일, 마르세이유에 도착한 랭보는 콩셉시옹 병원에 입원한 후 다음날 지체 없이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정밀 진단 결과 황액막염이 아니라 골수암이었다. 암은 이미 다른 부위에도 전이되어 있었다. 아덴에서 프랑스로 온 리에가 어떻게 알고 병원을 찾아와서 랭보를 위로했다. 사선을 넘나들던 전우처럼 두 사람은 손을 꼭 쥐었다. 상태가 다소 호전되자 랭보는 7월 이자벨과 함께 로슈에 가서 한 달 정도 요양을 했지만, 다시 악화되어 곧바로 마르세이유로 돌아왔다. 암세포가 나머지 장기마저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아프리카에서 많은 편지가 왔다. 소티로, 티앙, 마코넨, 펠레르 등이 보낸 편지에는 아덴과 하라르에서 일어나는 여러 소식과 친구들의 근황도 적혀 있었다. 특히 자미의 소식이 자세하게 전해졌다. 아덴에서 헤어졌던 자미는 하라르로 돌아가 펠레르가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티앙은 리에와 동업을 시작했고, 일그는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고, 사부레는 하라르에 정착하여 개업을 하고 유럽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고, 브레몽은 아덴에 거주하고 있고, 메넬리크 황제는 랭보의 쾌유를 빈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한결 같이 당신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오면 다시 함께 일하자고 전했다. 1891년 11월 10일, 그렇게 랭보는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기 마지막 전날까지도 여전히 아프리카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삶의 여정은 그의 말마따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었는지 모른다. 랭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자미에게 3,000프랑의 유산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는 시인이었다. 처음엔 그랬다. 이미 16살 때 만인에게 '나는 시인이다'라고 선포했지만, 20살이 넘은 이후엔 더 이상 시인이 아니었다. 시는 일종의 객기였지 모른다. 일시적인 감성의 교란으로 인해 발현된 일종의 충동적인 결과물이었다. 시인 지망생이었다가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사라진 문학도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사춘기의 첫사랑이나 불장난 같은 스캔들에 불과했다. 그런 시세계가 그의 인생을 결정지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종의 성장통이며 열병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 잘 썼을 뿐이다. 상상력의 결과물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한순간 폭발한 후 급속하게 소진되었고, 그 후에는 어떠한 에너지도 보충되지 않았다. 예술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하라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며, 하고 싶다고 해서 생산되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더라고 상상력의 압력이 차면 어떤 형태이든 화산처럼 무언가 분출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때론 운명적으로 에너지는 거침없이 표출되는 것이다. 예술 중에서 시는 디오니소스적인 요소가 가장 강하기 때문에 결코 가식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어떻게 보면 그의 시는 도취된 상상력의 극한적 산물이었으며, 그의 아프리카에서의 삶도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비극적 산물이었지 모른다. 극명했던 시와 그리고 삶의 근원적 에너지는 동질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창작의 에너지는 고스란히 아프리카 땅에서 다른 형태로 되살아 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세상은 그를 신화화하기에 이르렀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괴상한 녀석'이 기존의 질서를 질타하고 잔다르크처럼 자신을 따르라고 설파하니 기가 막혔지만, 그가 아프리카를 방랑하고 16년 만에 주검으로 나타나자 갑자기 그를 오디세우스나 된 것처럼 신화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베를렌이 주도한 이 재평가는 돌풍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더라도 적어도 논쟁거리였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랭보의 인간적인 나쁜 이미지 즉, 베를렌의 인생을 망치게 한 불량스럽고 당돌한 이미지가 다시 살아나면서 한바탕 진흙탕 싸움이 벌어졌고 서서히 승세는 랭보 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의 아프리카에서의 거친 삶과 엮어지면서, 또 다른 모습의 랭보와 그의 시는 묘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아프리카와 일뤼나시옹은 드라마틱한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당돌했던 랭보가?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시인이 쓰레기처럼 버린 시를 세상이 주어서 열광한다는 이 사실은, 그 역설은 논리와 이성을 극복하고 신화를 창조해 내는 상상력의 원형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신화는 그렇게 창조되었다. 그 역설에서 말이다.
랭보는 기성 세계로의 편입을 끝까지 거부하고 황량한 사막을 떠돌았다. 시나 읊조리면서 적당히 살 수 있었지만 그는 그 유혹을 이겨냈다. 그렇다고 자아나 이상을 찾는 따위의 허접한 상상도 거부했다. 자신의 시에 빠진 베를렌과 적당히 타협했다면 그는 보들레르에서 시작된 상징주의의 계보에 핵심적인 인물로 말라르메와 함께 파리를 활보했을 것이다. 그렇게 적당히 행동하기엔 그의 자아는 너무나 강고했는지 모른다. 천하의 베를렌이라 하더라도 그의 등에 업힐 수는 없었다. 그런 당돌한 아웃사이더는 유래가 없었다. 시인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베를렌이 나의 인생에서 무엇인가. 시가 밥 먹여주나. 중요한 것은 치열한 삶이다. '그게 나에겐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