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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May 28. 2024

카프카, 어느 투쟁의 기록

아웃사이더

1. 어느 투쟁의 기록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는 40~50년은 인류사에서 가장 큰 격변이 일어났던 시점이다. 인류 문명의 전반적인 급격한 발전은 욕망의 에너지를 만들어 냈고, 그 에너지는 거대한 화산처럼 세계 1차 대전이란 형태로 폭발했다. 인류사의 대전환기로서 홀로세를 넘어선 인류세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자비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보다 진화하여, 그 전쟁 보다 수십 배나 더 큰 폭발력을 가진 또 다른 차원의 전쟁으로 초토화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매머드를 멸종시켰던 전문사냥꾼 호모사피엔스의 후예인 지구인은 보란 듯이 역설의 능력을 발휘하여 파괴의 무덤에서 더 큰 진화를 엮어낸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전반적인 정치 상황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급격하게 바뀌고 있었고, 마르크스가 아담 스미스를 밀어내기 위해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 유행을 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제국주의의 득세였다. 18세기에는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정도가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었지만, 19세기말에는 독일과 이탈리아도 식민지 러시에 뛰어들어 나머지 땅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심지어 약소국가인 벨기에도 아프리카로 날아가 콩고를 차지하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잔악한 통치를 하기에 이르렀다. 지구의 대부분은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등 구인류의 땅을 빼앗아 듯이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몸집은 크지만 순했던 매머드를 무차별하게 사냥하여 멸종시켰던 것처럼 지구는 대부분 그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그들의 사냥터가 되었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에 몰려 살던 그 조그만 국가들에 의해 이 거대한 지구는 유사 이래 일찍이 없었던 곤욕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유라시아 동쪽 끝에 있는 조선도 그 광풍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렇게 식민지 사냥으로 부를 축척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강병에 매몰하여 결국 자신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런 가운데서 일조를 한 분야는 과학기술의 급격한 진화였다. 특히 물리학의 발전은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뀔 정도로 혁명적이었다. 볼츠만과 프랑크를 거쳐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물리학의 발전은 보우와 슈뢰딩거에 이르러서는 양자역학이라는 해괴망측한 이론을 창조해 낸다. 신처럼 모시던 뉴턴의 이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물리학의 세계가 탄생했고 그 이론은 불과 20여 년 후 히로시마에서 확실하게 실험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석유와 철강의 발전은 실재적으로 문명의 수준을 몇 단계 도약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미국에서 채굴한 석유는 처음엔 고래 기름의 대체품인 램프용 등유로만 정제되다가 독일에서 가솔린 엔진이 발명되면서 기적의 에너지원으로 변화하였고 그 변화의 속도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역시 미국에서 발원한 철강제의 기술적 도약은 건물의 뼈대를 철골로 만들어 뉴욕의 마천루 같은 수십 층짜리 건물을 올릴 수 있게 만들었고, 동시에 거대한 선박과 차량 등을 개발하는 핵심 재료의 원천이 되었다. 이런 석유와 철강재가 합체하면서 지구상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거대한 군함과 탱크 같은 무기들이 등장하였고, 그런 괴물들은 세계 1차 대전에서 적나라하게 실험되었다. 그 전쟁은 유럽 각국에서 만든 신무기들을 시험하는 각축장이었다. 또한 이것도 모자라 화학 무기 즉 염소가스, 포스겐, 겨자탄 같은 신종 무기들을 전쟁에 투입하였다. 유사 이래 보지 못했던 강력한 살상 무기에 유럽은 경악했다. 그런 무기들로 인해 참전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신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당사자들은 자신이 만든 무기들이 이렇게 강력한지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독일에서 참호전이란 기괴한 전술을 폄으로서 전쟁은 더욱 참혹하게 되었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유대인이다. 당시 유대인을 논하지 않고 유럽을 설명할 수 없다. 19세기 중엽부터 그동안 거의 거론한 적이 없었던 민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여 사회과학의 어젠다가 되었고, 그 논리는 급기야 진화론을 기반으로 한 우생학이라는 학문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인종주의의 극단에 선 우생학은 다윈의 외사촌 동생인 프랜시스 골턴이 이론적 체계를 완성하였고, 그 논리는 전 유럽에 인종주의의 광기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이런 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란 민족을 소환하여 마녀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부터 반유대주의가 유럽의 바닥층에서 다시 꿈틀거리고 있을 때 이런 인종주의가 더해지면서 노골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반유대주의는 고대시대부터 존속해 온 오래된 고질병이었는데, 한동안 수면 아래에 은폐되어 있다가 마치 흑사병처럼 되살아났고 그 정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은 유럽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으로서 특히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둘로 양분하는 결렬한 논쟁거리였다. 그 결과는 모두 알고 있듯이  홀로코스트 즉 '최종 해결'로서 종지부를 찍는다. 여기서 반유대주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아무튼 반유대주의가 득세한 국가는 독일이었다. 무슬림으로부터 독립한 스페인에서 왕권의 전략적인 목적에 의해 강제 추방된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유럽 각국으로 흩어졌다. 그 가운데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이었던 독일에서 가장 많은 유대 난민을 받아주었는데, 처음엔 호의적으로 대하여 금융과 상업에 진출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이 금융과 상업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성장하자 독일인은 위기감을 감지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가운데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반유대주의의 강도는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가 만든 신생 나치당의 첫 번 째 강령이 반유대주의였던 것을 보면 당시 게르만 민족이 유대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인식의 저변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성공한 유대인 금융가의 자제였던 멘델스존의 음악도 탄압의 대상이 되어 독일에서는 연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살았던 러시아에서도 이 기간 동안 포그롬이라는 형태의 학살과 탄압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서는 포그롬이 가장 심했다. 러시아에는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 거주하는 게토 형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기도 했지만 몇 세대 전에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여 러시아화 된 유대인들도 상당수였다. 그러므로 해서 볼셰비키 혁명을 촉발하게 만든 세력이 유대인이었다는 설을 낳게 했다. 이런 설은 혁명 전 러시아 차르 정권에서 만든 음모론이었지만, 당시 혁명세력의 많은 지분은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사회주의의 교주인 마르크스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만인이 아는 사실이었고, 레닌의 외할아버지도 정교회로 개종한 유대인이었고,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이었으며, 혁명을 설계한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도 유대인이었을 정도로 많은 유대인이 혁명에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연유로 히틀러가 유대인과 더불어 공산주의자를 극열하게 탄압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폴란드에서는 반유대주의는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았다. 물론 그 제국의 지배를 받던 보헤미아도 그랬다. 그렇게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등장한 시온주의가 유대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시온주의는 19세기말 경에 등장하여 유대인에게 이론적 담론과 논쟁을 양산했지만, 20세기 초부터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꿈에 그리던 제2의 엑소더스로 본격적으로 실행되기에 이른다.     


이제야 먼 길을 거쳐 보헤미아에 도착했다. 카프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는 노선이니 양해 바란다. 아무튼 위에서 언급했듯이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는 상대적으로 반유대주의 정서가 약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과 세계 1차 대전이 종전된 후 반유대주의가 부활하여 탄압의 정도가 심해졌지만 그전에는 차별을 정도가 약하여 체코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그리고 프라하에는 과거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책에 따라 프로이센에서 이주해 온 독일인이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유럽화 된 유대인과 그리고 기존의 체코인과 독일인이 혼재되어 있던 프라하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체코인과 유대인들이 지식인과 중상류층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계가 프라하의 경제 문화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9년 독일 나치가 프라하를 점령할 때 프라하 독일인들이 그들에 의해 독일로 다시 돌아갔지만, 당시 독일 사회는 프라하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리고 보헤미아는 제국의 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중공업 부분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경제적인 측면에서 삶의 질이 상당히 높은 도시 중에 하나였다. 당시 민족주의가 득세를 하고 있었지만 보헤미아는 독립을 바라지 않을 정도로 오스트리아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프라하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바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새벽의 7인이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프라하 총독 대행인 하이드리히를 암살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게슈타포의 추적을 피해 프라하 곳곳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 전원 장열하게 사살된다는 내용이다. 당시 독립국인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족적 자긍심이 강해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와 음악가 보다 소설가의 삶에 대해 논하는 것은 실재적인 측면에서 위험할 수도 있다. 그들은 글로서 수많은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고 또한 보편성과 개연성에 기반 한 상상력의 접근도 여의치 않다. 그래서 복잡한 인식의 회로를 가지고 있는 소설가의 인생을 해부하는 작업은 고통스럽다. 그들의 삶의 족적과 글과의 관계는 일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느 것이 진정한 그의 모습인지도 분간하기 힘들다. 그리고 세대를 넘어 수많은 평론가들이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재단해 놓았기 때문에 그 범위를 벗어날 수도 없다. 프란츠 카프카가 그랬다. 그가 작정을 하고 집필한 소설이나 산문보다 일기와 편지의 부피가 더 큰 분량을 차지한다. 작품 집필은 조증처럼 어떤 영감이 차오를 때 한 번에 쏟다붓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비어 있는 시간에는 수많은 단어를 일기와 편지에 다 분출했다. 특히 그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남는 시간이 많았다. 그가 쓴 일기와 편지의 양도 작품보다 훨씬 많았고 그 내용 또한 상당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일기와 편지에 갈아 넣은 것이다. 특히 7개월 동안 밀레나 예젠스키에게 쓴 편지의 양은 장편 소설 사이즈만큼 상당하고 그 내용 또한 소설처럼 복잡하고 다양하다. 따라서 카프카란 존재를 알아 가는 과정이 지난하고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무의식을 탐험하는 것처럼 막연하기도 하다. 그리고 카프카의 절친인 막스 브로트가 쓴 카프카의 전기도 너무 현학적이고 사변적이어서 카프카로 가는 지름길이 되지 못한다. 카프카가 말년이 쓴 <성>처럼 결국엔 그 내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 앞에 직면하게 된다. 그가 바로 <성>이었던 것은 아닐까.    


흔히 카프카의 삶을 얘기할 때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이다.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동유럽 유대인이었지만 신분 상승을 위해 독일어를 사용하는 출세지향 형이었던 그는 사회인으로서의 평소 품행은 거만하고 속물적이었고, 가정에서는 전형적인 독재자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자수성가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세속 상인인 헤르만은 카프카에겐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어릴 적 겪은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40살이 넘을 때까지도 결코 화해 같은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화해의 연결점은 이 넓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하는 문학이란 행위는 그저 취미 생활의 일부이고 애들 장난쯤으로 생각했고, 변호사 신분으로 프라하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바랐지만,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보잘것없는 산재보험회사에 다니는 자식 놈을 평생 동안 탐탁지 않아 했다. 그리고 그마저도 빨리 때려치우고 자신의 가업을 잇기를 원했으며, 그런 이유로 틈만 나면 카프카를 가업에 끌어들여 일을 시켰다. 이런 완고한 아버지의 권력 앞에 카프카는 평생 동안 무기력했고, 그런 부자간의 역학 관계는 프라하로부터의 탈출구를 차단시켰다. 프라하는 곧 아버지였는지 모른다. 프라하를 떠나려고 했지만 떠나지 못했고, 질식할 것만 같은 아버지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탈옥하고 싶었지만 그런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았다. 카프카에게 있어 유일한 탈출구는 문학이었다. 골방 하나와 상상력이면 충분했던 문학 활동은 그에게 유일한 자유를 주었다.     


1893년, 열 살이 된 카프카는 프라하에 있는 명문 증등학교인 올드타운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프라하라고 하지만 학교는 동네에 있던 킨스크 궁 내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프라하에서 몇 안 되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문 학교인 김나지움은 오스트리아 전통의 엄숙함과 위풍당당한 품위를 가지고 있는 중등학교였다. 교육은 강제주입식이었고, 교사와 학생 간의 접촉을 불가할 정도로 폐쇄적이었으며 학생들에게 존경만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신분상승을 꽤 하는 유대인들이 선호하는 학교여서 상당수가 그들의 자녀들이었다. 필수 과목도 고대 정신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대사와 그리스어와 라틴어 같은 고리타분 교과가 시행되었는데 학생 대부분은 시험이 끝나면 거의 잊어버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유급되지 않을 정도만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카프카도 그랬다. 김나지움은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문이니 적어도 졸업은 해야 출세의 길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도 항상 그랬지만, 김나지움 시절의 카프카는 외모가 항상 단정했고, 교만하지도 않았고, 불미스러운 일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당시 친구들의 전언에 의하면 그는 학우들의 눈에 띄지 않았고 왠지 낯설었으며 그를 좋아했지만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신비스러운 학생이었다고 한다. 또한 조용하고 선했지만, 폐쇄적이어서 외부와의 접촉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 자기 폐쇄는 개인의 고유성을 억압하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하여 학교에 이르러서 고착화되었다는 설이 아직까지 지배적이다. 한 개인은 타고난 성정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지만 외부 환경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카프카의 폐쇄성의 원인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폭력적인 가정과 학교는 십 대의 카프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신을 내밀화하는 이런 성향은 평생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키에르케고르처럼 문학이라는 형태로 형상화되었다. 삶과 문학이 함께 동행할 수 없는 벽이 만들어진 것도 그 당시부터이다.


카프카는 사춘기가 지나고 지적인 욕구가 충만할 나이가 되었을 때 자연사 과목 교사인 고트발트의 영향으로 처음으로 윤리적 엄숙주의에 위반하는 다윈의 진화론과 헤겔의 저서 등을 접한다. 그리고 당시 정제되지 않은 새로운 학설들이 난무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반 가톨릭 운동 단체인 '자유학파'의 주장에 동조하여 연설회 등에 쫓아다녔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16살에 누구나 인정하는 사회주의자가 된다. 그에게 사회주의를 복음 한 친구는 루돌프 일로비였다. 김나지움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빠졌던 그는 은행원이란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평생 동안 사회주의운동가로서 때로는 작가와 시인과 때로는 행동가로 살다가, 결국 대부분의 유대인이 그렇듯 그도 1943년 악명 높은 테레진 게토에서 폐렴으로 사망한다. 아무튼 일로비가 불가피한 이유로 자퇴를 하자 카프카는 학교에서 유일한 사회주의자로 남는 웃픈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도 카프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사회주의자의 징표인 붉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 신념은 10년 후에도 이어져 남들 모르게 사회주의 운동 단체인 믈라디히 서클에서 주관하는 집회에도 참가하고,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렉산더 이바노비치 헤르젠과 역시 러시아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인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등이 쓴 빨간책을 탐독하였다. 김나지움 시절에는 십 대의 치기로 그런 발칙한 행동을 했지만 사회생활을 할 때는 사회주의가 점차 못쓸 사상으로 몰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인들에게 알리지 않고 쫓아다녔다.     


그리고 카프카는 김나지움 상급생들이 주도한 독일 민족주의 단체인 '구시가 동지회' 집회에 강제적으로 참여했지만, 독일의 옛 국가를 부르지 않는 등 행사에 소극적이자 이를 보다 못한 상급생들이 그를 쫓아냈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없는 서유럽화 된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독일 민족주의 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당시부터 그는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학교 독서 서클에 가입하여 독후감 같은 글을 쓰기도 하고, 누가 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는 일기를 심도 있게 썼다. 당시 쓴 글은 거의 소실되었지만 남아 있는 일기를 보면 '의식 불명의 고독에 대한 소망'이라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지적 습득을 내재화하는 능력은 '차가운 상상력을 가진 냉담함'으로 표현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내면에는 인간으로서의 따뜻함보다도 차가운 상상력이 점차 지배하였고 그의 이런 성향은 그의 작품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어느 날 막스 브로트에게도 자신은 너무 사랑이라는 단어에 인색하다고 토로했을 정도로 그도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더 자세하게 말하겠지만 그렇다고 일상이나 현실에서 그런 표현은 하지 않았다. 그의 글쓰기 경향이 그렇다는 말이다. 작품이 어둡다고 해서 사회인으로서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오스카 폴락이 나타난 것은 김나지움 졸업반 때였다. 한 학년에 불과 40명 남짓한 데도 불구하고 카프카와 폴락은 7년 동안 그저 그런 동급생 사이였다가 졸업반 즈음이 되어서야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문학적 감수성의 수치가 치솟을 당시의 카프카에겐 폴락이란 존재는 마치 데미안과 같은 친구였다. 세상을 보는 성숙함과 지적인 완숙함에 목말라하던 카프카에겐 폴락은 오아시스와 같았다. 카프카는 대학교 1학년 때 그에게 쓴 편지에서 '무엇보다도 나를 위한 창과 같은 존재... 그 많은 학생들 중에서도 너하고만 얘기했었지...'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폴락이 어떠한 존재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불분명한 이유로 대학교 2학년 때 연락이 끊긴다. 카프카가 매달리는 쪽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폴락은 카프카를 멀리했다. 그렇게 우정에 시련을 겪을 무렵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와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아마도 성격적인 문제가 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내성적이고 고집이 센 카프카에 비하면 폴락은 한 2년 선배 정도 되는 성숙함과 외향적 성향이 강했던 것이다. 아무튼 폴락은 미술사를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전도유망한 미술사학자가 되어 비엔나 대학에서 미술사 조교수로 재직하기도 하면서 바로크 미술에 대한 뛰어난 연구 논문도 발표하였고, 이를 인정받아 오스트리아 정부 소속인 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 로마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자원 입대하여 결국 그해 6월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던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접경 지역 이손초 전투에서 사망한다. 폴락은 비록 32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미술사에서 무시하지 못하는 업적을 남겨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카프카는 본격적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할 즈음에 처음엔 폴락이 카를 대학 화학과에 지망한 것을 보고 자신도 그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아버지의 벽에 부딪쳐 결국 카를 대학 법학과로 진학한다. 법학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로마 민법, 법령전서, 채권법, 부동산법 같은 과목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2학기부터는 최소한의 전공과목 이외에는 예술사와 독문학 같은 과목을 수강했고, 2학기를 마쳤을 때는 아예 뮌헨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홀로 뮌헨을 갔다 오기도 했지만 역시 아버지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법학의 수렁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학으로 인해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다닐 수 있었고 작품을 집필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했다면 현재 우리는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없었던 카프카는 방학 때면 모라비아 지방의 소도시 트리쉬에 가서 외삼촌 지그프리트 집에 기거하며 농촌 생활을 즐겼다. 지그프리트는 지역의 공의 즉 공무원 의사로서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고 친척 중에서 카프카가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카프카의 작품 '시골 의사'의 모델이 지그프리트라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카프카는 트리쉬에서 '성가시게 사랑에 빠진 한 소녀와 공원에 앉아 있기도 하고, 연못가 풀밭에 오래 누워 있기도 했다. 그리고 회전놀이 기구도 만들어 세우기도 하고, 암소와 염소에게 풀을 뜯긴 후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곤'하는 목가적인 풍경에 빠져 있었다.     


1년 동안, 숨 막힐 것 같은 법학 개론과 그리고 멀어지는 폭락에 대한 아쉬움으로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자유로운 환경을 즐겼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항상 내적 부족함을 느끼던 카프카는 2학년에 올라가고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그는 영원한 친구 막스 브로트와 만난다. '독일 대학생 독서 및 강연 회관'이라는 단체에서 시행하는 강연과 시낭송회에 꾸준히 찾아다녔는데, 당시 카프카는 폴락의 영향으로 니체에 경도되어 있었다. 김나지움 시절부터 니체를 탐독했던 그는 니체가 말년에 창간 동인으로 참여한 예술의 파수꾼이란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 잡지는 니체의 사상과는 상관없이 발행인 페르디난트 아베나리우스의 독자적인 사상으로 가득 찬 잡지였다.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잡문이나 잡학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문화 예술의 순결한 근원성을 설파하는 내용이지만 논리를 비약시켜 '게르만적인 민중 친화적'인 논조로 바뀌었고, 또한 그저 '멋진 덕담', '의고적인 단어 숭배'. '무분별한 근원성 숭배의 주술' 같은 글로 넘쳐났다고 한다. 하지만 브로트를 만나고 나서 '예술의 파수꾼'이라는 몽롱한 안갯속에서 빠져나왔고, 그로 인해 폴락과도 거리를 두게 되는 계기를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아무튼 1902년 10월 그 서클의 소모임에서 1년 후배인 브로트를 처음 본 것이다. 두 사람은 1학기 초부터 그 모임에 함께 참석했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실 투명인간처럼 자의반타의반 사람 눈에 띄지 않았던 카프카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는지 모른다. 10월 어느 날, 그 서클에서 브로트가 니체를 격렬하게 비판한 것을 보고, 우연히 집에 함께 가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카프카는 그런 브로트에게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하였으며 그렇게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니체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해석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지만 그런 계기로 인해 두 사람은 급속도록 가까워졌다. 물론 외향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인 브로트의 친화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카프카와 비슷한 성격이었다면 결코 관계 형성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처음 만났던 상황에 대해 브로트는 카프카 평전 '나의 카프카'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지적 방황을 하던 카프카는 쇼펜하우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탐닉하며 자신의 문학의 근간을 마련했고,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프란츠 브렌타노의 사상에도 심취하였다. 특히 프란츠 브렌타노의 철학을 배우기 위해 그의 제자 안톤 마르티 교수의 강의를 수강하였고, 별도로 브렌타노 철학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기 위해 루브르 서클에 가입하여 대학 생활 내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브렌타노 철학은 기술 심리학의 일종으로서 사람의 심리현상은 심상과 판단의 절차를 거쳐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며 그런 엄격한 자기 분석과 사고 과정을 거쳐야만 올바른 형상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런 심리학은 영국의 공리주의자에게도 영향력을 미쳤다고 한다. 또한 카프카 문학에도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졸업을 앞둔 카프카는 지독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3년 내내 법학 전공 공부를 등한시한 결과 4학년이 되자 졸업은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사로잡혀 벼락치기로 전공과목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밀린 공부를 감당하는 것은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얀 후스가 주도한 종교혁명의 본거지였던 카를 대학은 보헤미아 최고의 대학이었기 때문에 졸업장을 자동으로 주지 않았다. 졸업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했던 것이다. 더구나 만약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아버지의 반응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런 스트레스는 결국 그를 추크만텔 요양소로 입소하게 만들었다. 사실 도피 성격이 강한 휴가였다. 안 되는 공부 억지로 한다고 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능률적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4주간 요양소에서 힐링을 했다. 그리고 당시의 일상에 대해 카프카는 입을 다물고 있지만, 요양소에서 일하고 있는 어느 기혼 여성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는 증언이 있는데, 1년 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떤 목적도 없이 다시 그 요양소를 방문한 것은 그런 관계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전기 작가들은 말한다. 그들은 아마도 카프카의 진정한 첫사랑이 아니었나 하고 로맨틱하게 추정한다.     


아무튼 심기일전 한 카프카는 퇴소 후 프라하로 돌아와 놀라운 집중력으로 일로매진하여 졸업 논문을 준비한다. 막스 베버의 동생이자 사회학자인 프레드 베버가 학위 심사 교수로 지정되었다. 프라하 대학에서 깐깐함이라고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수였다. 하지만 카프카는 그 빈틈없는 심사를 통과했고 더 나아가 1906년 7월에는 법학 박사 학위까지 받아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다섯 명의 시험관 중 세 명에 합격점을 주어 간신히 합격했다고 한다. 어쨌든 카프카는 기나긴 4년이란 대학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성>만큼이나 끔찍한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법학은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근간을 이루는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소설 <소송>의 배경이 되는 법의 세계는 변호사의 경험이 없었다면 결코 개연성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의 모순과 부조리를 누구보다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첫 직장은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변호사 인턴생활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정식으로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변호사 보조로 1년 간 의무적으로 재직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꿈 많은 청년이었다. 변호사가 되었으니 사회적인 지위도 어느 정도는 확보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당시 일기를 보면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한 스페인으로의 유학과 남미로의 이민을 생각하기도 하고, 비엔나로 가서 수출입과 관련된 아카데미에 등록하는 것도 고민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는 프라하를 떠나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꿈은 프라하를 떠나 다른 세계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프라하 외 다른 공간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는 프라하 탓만 한다. '프라하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 어미는 맹수의 발톱을 가지고 있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는 프라하 탈출을 막연하게 기다린다. 사실 프라하라는 도시는 아버지의 성이라고 해도 해석이 가능하다. 가정 형편으로 볼 때 유학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리고 그런 뜻을 일기나 친구들에게 밝히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의 승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카프카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런 문제로 충돌하여 갈등을 빚는 상황을 본능적으로 원하지 않았다. 아예 잠자코 프라하에서 사는 게 현명한 것이었다. 


항상 그렇듯, 그는 상상한다. '아주 먼 나라의 어느 사무실의 회전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사탕수수 밭이나 회교도들의 묘지를 내다보는 나'를 희망하지만 그는 곧바로 체념하고 프라하에 깊이 매몰된다. 후세의 문학 비평가들은 그런 그를 고립이니 폐쇄성이니 하는 단어를 동원하여 평가한다. 하지만 사실 그가 프라하를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가령 제임스 조이스처럼 더블린을 떠나 파리로 가서 문학에 목숨을 거는 따위의 자신감과 절박함도 없었으며 또한 타지에서 미래를 도모할 능력도 없었다. 가깝게는 프라하 출신 마리너 릴케도 뮌헨과 모스크바와 파리 등을 옮겨 다니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카프카에겐 그런 영혼의 자유도 부족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과 비교하여 카프카가 처한 현실을 무시하고 고립이다 폐쇄성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은 무책임한 언사가 아닐 수 없다. 고립으로 내모는 것은 카프카가 아니라 그런 비평가들인지 모른다. 그는 많은 여느 사람들처럼 그저 생활인으로 체코에 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글쓰기 작업은 수입을 올리기 위한 목적을 고려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작품은 항상 무겁고, 때론 숨 막히고, 상징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다. 위의 두 사람처럼 문학으로 성공하고 푼 욕망도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인기영합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탕수수 밭 따위의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항상 글을 썼다. 일기도 당연히 썼지만 소설을 쓰고 구상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글 쓰는 시간이야말로 삶의 의미였다. 소설가로서의 자질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확신했던 브로트는 항상 그에게 작품을 쓸 것을 주문했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카프카는 불확실한 문학의 길에서 서성거렸는데 그때마다 브로트가 사기를 북돋아주었던 것이다. 너의 작품은 훌륭해. 포기하지 마. 거의 반강제적이었다. 당시부터 쓰기 시작한 단편소설 14편은 1913년 관찰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첫 등장한다. 그의 소설은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일명 프라하학파의 경향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특이한 작품이었다. 여기서 잠깐 당시의 프라하 문학 조류에 대해서 얘기하고 가겠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프라하에는 100년 전 프로이센에서 이주해 온 독일인들이 상류층을 이루고 있었다. 인구 대비 10%도 안 되는 독일인들은 경제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문화예술 세계에서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독일어는 중상류층의 상징이어서 많은 체코인과 유대인들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독일어를 하는 학교에 입학시켰고, 자연적으로 모국어 보다 독일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점차 증가하였다. 식민지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체코인은 2등 시민임을 자처하였고, 독일인은 1등 시민으로 대접을 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카프카 당시는 그 정도가 극에 달해 젊은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독일 문화를 따라 했다. 독일어를 쓰는 문인들 중에 체코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작가는 거의 없었다고 당시 지식인들은 한탄했다고 한다. 프라하 출신 라이너 릴케조차도 자신도 독일어로 시를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시인을 향해 '지나치게 완숙하다'라고 비판했고, 독자들도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라고 질타를 했다. 하지만 정작 독일 문인들은 프라하의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무시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루터에게 신학적 영향을 주었던 종교개혁의 선구자 후스를 배출한 보헤미아는 상대적으로 열등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도 점차적으로 독일화가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아마도 전쟁이 없었다면, 그런 현상은 심화되어 체코 공화국이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좀 심하게 표현하면 모라비아처럼 독일에 합병되었을지도 모른다.     

식자들은 흔히 그런 부류를 프라하학파라고 비아냥 거렸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상당 수준에 있던 문인들이다. 구스타프 마이클링, 에곤 에르빈 키쉬, 파울 레핀, 빅토르 하드비거, 막스 브로트, 오스카 비너, 프란츠 베르펠, 그리고 릴케 등 당대 젊은 문인들이 이에 속한다. 그들의 문학적 특징은 프라하 독일어를 사용하면서 부정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일삼는다는 것이었다. '기괴한 에로틱과 후덥지근한 성에 관한 작품, 즉 살인자, 뚜쟁이, 불구자, 주정뱅이, 유령, 도펠갱어, 신들린 자, 백치 등 극단적인 유형들을 작품에 등장시키고, 납입형 진열장 같은 그리고 가식과 인조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과장된 은유와 바로크적인 형용사가 난무하고 향수 뿌린 언어의 곡예 같은 문장들이 범람했다.' 기존의 이런 경향을 비판했던 당시 카프카 세대도 그들의 질서에 함몰되어 그런 현상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체코인들이 사용하는 독일어의 한계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자국의 토착어와 글로서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완벽한 표현력의 결핍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그것은 언어의 빈곤을 낳고, 다양성을 차단하고 그럼으로써 다변과 장황한 서술을 양산하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괴리시켰다. 카프카도 그런 경향에 승선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문장에서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독특한 순수 지향, 냉정한 문장 구성 등은 주어진 언어의 한정 때문이었다. 사실 카프카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독일어로 소설을 쓰지만 '나는 한 번도 독일 국민 속에서 산 적이 없었다'라고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언어의 식민지에서 어쩔 수 없는 항거의 표현이었다. 그렇다고 문학을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루하고 형식적인 1년간의 인턴 생활을 마감한 카프카는 법조계로 가지 않고 이탈리아 보험회사인 아시쿠라치오니 제네럴리 프라하 지사에 취직을 했다. 그 회사는 현재 이탈리아 제일의 보험회사로 성장해 있다. 아버지는 법과 관련된 판사나 변호사 같은 직업을 원했지만 카프카의 성정상 그런 직업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법률 세계의 모순과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설령 변호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금방 도태되었을 게 분명했다. 법조계는 아버지 헤르만처럼 세속적이고 냉정한 정신세계를 요구하기 때문에 인간의 순결성을 추구하던 그에겐 불가항력의 세계였다. 학문으로의 법과 집행자로서의 법은 엄연히 경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소송>의 요제프 K는 재판관이 누군지도 모른 채 부조리한 법의 칼에 무너지면서 그 법을 향해 저주의 욕설을 퍼붓지 않았던가.      


아무튼, 기껏 변호사로 키워주었더니 고작 보험회사에 취직했다는 아버지의 실망감을 뒤로하고 회사에 출근을 했지만 그것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하루 8~9시간 근무에 월급도 평균 이하였고, 업무 규칙도 엄격했다. 업무상 필요하면 야근은 수당 없이 해야 하고, 사원의 희망에 따라 2년마다 14일 휴가를 주고 그것 또한 간부의 조정을 받아야 했다. 카프카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사무실 밖에서의 시간을 나는 야수처럼 갈망한다' 그리고 '하도 다녀서 건물 모퉁이가 둥그렇게 닳은 골목을 지나 광장을 건너간다.' 그렇게 기계처럼 직장 생활에 얽매인 그는 글을 쓰지 못하는 현실은 나의 불행이라고 하소연했다. 업무의 과중함보다도 근무 시간이 그를 압박하였던 것이다. 사실 취업 전에 이런 가혹한 조건들을 숙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로부터의 독립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쫓기듯 선택했다고 보아야 옳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는 직장생활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주어진 환경에 충실하자고 매일 다짐을 했지만 내면에서는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었다. 자립, 독립, 자유에 대한 끝없는 욕구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집필에 대한 욕망이었다. 전업 작가를 선언하지 못할지언정 그래도 글을 쓰는 자신을 확신할 수 있어야 했지만 환경은 그것마저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다가 영원히 이 수렁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하여 작가가 되지 못하고 이런 서류 속에 파묻혀 살아야 하는 불안감, 그런 불안은 시간이 갈수록 증폭되었다. 작가로서의 감각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소설가가 가지는 기본적인 지질 중에 하나인 세상을 보는 조망 능력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읊조렸다. '고개를 숙이고 살펴야 하는 험하고 파인 길을 가는 것처럼... '     


그렇게 팍팍한 직장 생활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그는 시간을 쪼개 친구들도 만나고 함께 여행도 다녔다. 그는 고작 20대 중반이었다. 친구들을 한창 만나고 여행도 다닐 나이였다. 당시 폴락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지만 대신 브로트와는 보다 친밀해졌다. 브로트는 카프카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브로트가 없는 카프카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신이 맺어준 운명적 관계였다. 그는 카프카의 내면에 존재하는 문학적 상상력을 끌어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긴장감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카프카를 일상의 세계로 인도했다.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이며 시온주의자인 펠릭스 벨취와 후천적으로 맹인이 되어 피아노 연주자의 길을 걸었던 오스카 바움을 카프카와 연결시켜 준 사람이 브로트였다. 그리고 처음 만남 당시 아직 김나지움 학생이었던 프란츠 베르펠(시인, 극작가, 소설가)은 문학적 감성이 풍부하고 시작 능력도 탁월한 문학도였고, 나이 차이가 6살이나 나는 데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카프카와 우정을 나누었다. 물론 대학시절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지만 더욱 친밀하게 만들어 준 것은 브로트였던 것이다. 그들은 함께 혹은 둘이 시간만 나면 프라하 주변을 산책했고, 주말이면 작정을 하고 하루 종일 도보여행도 했으며, 강가를 찾아 수영과 일광욕을 하면서 청춘을 즐겼다. 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생길 즈음에는 보헤미아의 여러 지역을 여행했고, 그 후에는 휴가를 얻어 이탈리아와 파리와 그리고 스위스 등으로 여행을 다녔다. 브로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카프카는 운동도 잘하고, 특히 수영 실력은 상당했고 체력을 키우는데 열중이었으며, 밝고 농담도 잘하는 쾌활하고 순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친구 중에는 항상 그런 놈이 있듯이, 브로트의 주도로 음악 카페와 밤 문화를 즐기기도 하는 등 새로운 세계를 함께 경험했다. 특히 브로트는 카프카를 친구들의 문학 모임(오스카 바움의 집에서 이런 모임을 자주 가졌다)에 데리고 다니며 그의 작품을 직접 낭송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작가의 감정을 이입하여 청중 앞에서 낭송하는 자리가 많았다.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일종의 소통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브로트는 카프카에게 작품 집필을 독려하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 개입하며 그의 고질적인 폐쇄성을 걷어내 주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유일한 독자이자 전폭적인 후원자인 브로트를 카프카는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는 '나는 거의 전적으로 막스의 영향 하에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일상에서 항상 에너지 넘치는 말과 행동,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 문학적 열정, 사람들과의 교제 능력 그리고 헌신과 겸손까지 겸비한 브로트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프카는 자신에게 없는 그런 성향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존경했으며 경탄해마지 않았다. 두 사람의 우정은 문학사에서 특별한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브로트 없는 카프카와 카프카가 없는 브로트는 상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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