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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Feb 25. 2024

랭보, 그 뜨거운 아프리카 속으로

3. 아프리카 완벽한 탈출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부터 홍해 주변 즉, 아프리카 동쪽 해안과 아라비아 반도 서남쪽 해안은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어 갔다. 아프리카 동쪽 해안은 16세기부터 노예무역으로 인해 상권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지만 동쪽 해안은 아직 유럽인의 손을 덜 탄 미지의 땅이었다. 그런 동아프리카에 막힌 하수구가 뚫린 것처럼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었으니 유럽의 늑대들은 손쉽게 그곳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지역은 오래전부터 이집트를 중심으로 수단과 에티오피아 등 고대 아프리카 문명과 홍해를 사이에 두고 이슬람 문화를 형성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화에 어려운 면도 없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문화로 인해 수월한 면도 적지 않았다. 당시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단맛 쓴맛 다 맛보았던 유럽 열강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눈독을 들이고 틈만 나면 잡아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특히 홍해 지역에서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국가들은 서로 땅따먹기를 하기 위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때론 피를 흘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제국주의자들과 왕국 형태의 국가를 가지고 있던 기존의 민족들이 서로 뒤엉켜 크고 작은 전쟁들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지금의 수단, 에티오피아, 지부티, 소말리아 같은 국가들이 당시 유럽의 열강들에게 속수무책으로 강탈당했고 결국 에티오피아를 제외하면 모두가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동아프리카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아덴을 필히 거쳐야만 했다. 아덴은 고대부터 인도와 중동과 그리고 유럽을 잇는 거점 항구도시였고, 명나라의 정화라는 사람이 방문하기도 하고,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기도 하다가 결국 1839년 영국이 점령해 버렸다. 형식은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의 속국으로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관리를 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행정과 외교는 영국이 지배했지만 경제에 관해서는 유럽 국가들의 합의하여 자유무역 지역으로 만들어 과거의 홍콩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그렇게 유럽화 된 그 항구 도시엔 유럽의 많은 무역회사들이 상주하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선 경쟁도 하면서 도시의 상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사막 기후로 인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잘 돌아 삶의 질은 홍해 지역에서는 가장 좋았다.


그해 8월 랭보는 트레뷔셔의 추천장을 가지고 드디어 아덴으로 갔다. 그가 추천해 준 비아데 바르데는 본사가 리용에 있는 커피 전문 무역회사로서 공동 경영자 중에 한 명인 알프레도 바르데가 아덴 지사에 상주하며 경영을 하고 있었다. 그 회사는 그해 5월에 설립한 회사였고 오너인 바르데는 랭보와 나이가 같은 젊은 사업가였다. 당시 식민지 러시로 인해 유럽의 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엘도라도를 꿈꾸며 아프리카로 달려들고 있었는데 그 부류 중에 한 명이었다. 아무튼 랭보는 그 회사를 찾아갔지만 바르데는 아프리카에 있는 하라르로 출장 중이었다. 면접을 볼 수 없었던 랭보는 비아데 바르데에서 커피 가공 공장을 책임지고 있던 프랑스 육군 대령 출신 뒤바르의 호의적인 도움으로 사장이 올 때까지 공장에서 커피 원자재 관리 업무를 보았다. 예멘의 고지대에서 재배한 커피 열매는 수확 및 과육 제거를 거친 후 아덴의 바르데 창고에 입고하면 다시 세척과 분류 작업 등을 거쳐 포장을 하고 프랑스 리옹으로 보내졌다. 아직 임시직 신분이라 급여를 월 80프랑 밖에 받지 못했지만 랭보는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샤르빌에 아랍어 교본을 긴급 타전했고, 자신의 맡은 업무에 충실하여 1개월 만에 커피의 전반적인 생산 유통의 메커니즘을 습득하였다. 그렇게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성장한 랭보를 뒤바르는 대견하게 생각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당시 업무 관계로 접촉했던 커피 중계인 중 인도인 멕제 샤프세와 지금은 해방된 노예 출신 알마스와 친분을 나누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적 세계를 구축하였다. 이 세계에서는 상인들 간의 친분과 신뢰가 가장 중요한 사업 기반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임시직으로 일을 하던 중 그해 10월 말 바르데가 아덴에 도착했다. 바르데는 하라르에 아프리카 산 커피의 무역 거점을 만들기 위해 출장을 간 것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예멘 산 커피가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많이 들어간 반면 에티오피아 모카커피는 상대적으로 소량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는 의미에서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중동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원료를 구입해 1차 가공 후 프랑스로 보내는 방식이어서 이익 면에서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17세 중엽 오스만 튀르크에서 소량으로 수입하던 중동산 커피는 대해양의 시대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유럽 중심부에 수입되기 시작했으며, 그 거래의 프로세스가 거의 식민지와 직접적이 연관을 맺고 있었다. 유럽에서의 커피는 당시 혁명적인 음료였으며 특히 프랑스에서는 광풍이 불고 있었다. 에스프레소 한잔은 어느 기호 식품보다 각성 효과가 뛰어나 프랑스 예술가들에겐 신의 음료로 추앙을 받았고 카페 문화가 나타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파리의 길모퉁이 카페 프랑수아즈에서 베를렌과 함께 마셨던 바로 그 커피의 원형을 이 타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자신이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랭보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아무튼 아덴에서 돌아온 바르데는 랭보를 면접한다. 랭보에게서는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이미 공장장인 뒤바르에게 랭보의 업무 능력에 대해 전해 들었기 때문에 면접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깡마르고 이미 검게 그슬린 그의 얼굴은 살인적인 더위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생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입사를 한 랭보는 며칠 후 하라르 지점 근무를 자청한다. 하라르로 가는 지난한 여정과 그곳 사정은 이미 아덴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상인들은 그곳으로의 진출을 꺼리고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랭보가 자원을 하니 보르데의 입장에서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바르데는 랭보의 과거에 대해 몰랐지만, 언어 습득에 있어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던 랭보는 이미 통역 없이 아랍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랭보는 다시 고용계약을 했다. 기간은 3년이고 월급 330프랑에 이익금의 2%를 상여금으로 받는 조건이었다. 급여 협상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꽤 괜찮은 조건이었다. 랭보는 돈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그 모험에 자신을 던질 수 있었다. 더구나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랭보에게 있어 그 모험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험악한 세계에서 상인으로 살아가는 목적은 오직 돈이었다. 돈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성직가 복음을 위해 성령으로 아프리카에서 생존하듯이 상인들은 돈을 위해 뜨거운 아프리카에 생존하는 것이다. 나중에 계속 얘기하겠지만 랭보도 피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처럼 돈을 좇아 동아프리카를 미친 듯이 떠돈다.


그해 11월 아덴에 온 지 3개월 만에 랭보는 하라르로 떠났다. 같은 회사 직원인 콩스탕탱 리가가 함께 동행했다. 1차 목적지는 자일라였다. 자일라는 당시엔 인구가 4,000~5,000명 정도 되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지만 이미 중세 때부터 이슬람을 받아들인 아달 술탄국의 수도로서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였고, 홍해 무역권에서 수아킨과 마사와 등과 함께 중요한 항구도시로 분류되고 있었다. 아덴에서 아비시니아의 하라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자일라는 대상들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었다. 거친 사막과 험준한 산악지역을 지나야 했지만 그래도 아프리카 뿔 지역에서는 그 루트가 가장 짧고 안전한 길이었다. 며칠 동안 증기선을 타고 아덴만을 건너간 랭보 일행은 자일라에 도착하자마자 그 도시의 지도자인 아브 베르크를 알현했다. 아프리카에 들어오는 모든 유럽인은 그를 만나 일정 부분의 통행료를 지불하고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게 그 세계의 불문율이었다. 랭보는 다른 유럽인처럼 통행료를 지불한 후 베르크의 충고, 즉 이 지역에 대해 글로 기록하지 말 것, 과학기구를 사용하지 말 것, 캐러밴으로부터 거리를 두지 말 것 등의 자상한 행동 방침을 경청해야만 했다. 그리고 랭보 일행은 캐러밴을 꾸리기 시작했다.


하라르까지의 캐러밴은 대략 20일 정도 걸렸다. 문제가 생기면 더 걸릴 수도 있었고 재수가 없으면 아예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캐러밴 준비는 경험이 있던 리가와 함께 했다. 식량과 야영 장비를 준비하고, 낙타 40마리와 인부들도 모집했는데 특히 그 과정에서 알선 업자들과의 지루한 교섭과 협상이 이어졌다. 낙타 한 마리 당 사용료와 인부의 임금 등이 가장 중요한 협상이었다. 모든 것이 돈으로 움직이는 게 이 세상의 법칙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를 마친 랭보 일행은 자일라를 떠났다. 랭보는 상상 속에 존재하던 거대한 사막을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사막 모래를 밟기도 하고 때로는 노새를 타기도 했다. 기온이 올라가면 야간에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알 수 없는 아프리카 언어들, 낙타의 되새김질할 때 나는 독한 냄새, 20도가 넘는 극심한 일교차, 소말리아인들의 노랫소리, 쏟아질 것 같은 수많은 별들, 낙타의 헐떡이는 소리, 지옥 같은 태양, 캐러밴을 집요하게 쫓아오는 자칼과 하이에나의 울음소리...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여러 부류와 마주쳤다. 여자 아이들을 팔러 가는 원주민들, 아비시니아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는 신학생들, 이동 중인 유목민과 양 때, 그리고 백여 명의 여자와 아이들을 끌고 가는 아랍인 노예상 무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날짜도 가물가물해질 즈음에 랭보 일행은 아르토에 도착하여 지친 낙타를 교환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이동했다. 그리고 해발을 높이자 곧이어 녹색지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쟁터에 처음 투입된 신병처럼 녹초가 되었던 랭보의 심신은 이제 활기를 찾았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사막은 사라지고 스위스 시골 마을 같은 녹색 풍경이 펼쳐졌다. 비도 내리고, 숨이 탁 트일 정도로 공기는 한결 좋아졌다. 해발 2,300미터까지 오르자 멀리 하라르가 보였다. 20여 일 동안의 캐러밴은 아프리카에 처음 온 유럽인 랭보에게 인내를 선물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무언가 해야만 했던 랭보는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는 인내를 의무적으로 습득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광활한 아프리카에서 인내를 거부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한번 길을 떠나면 최소한 1주에서 몇 주가 걸렸고, 몇 달 동안의 긴 이동 거리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과정 또한 항상 죽음을 위협하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다. 인내를 일상화하지 않는다면 아프리카에 있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라르는 아비시니아로 들어가는 관문에 있는 도시로서 이슬람의 3대 성지 중에 하나였고, 무역의 중심지였다. 당시는 이집트에서 통치하고 있었다. 아비시니아의 주류인 암하라족이 다스릴 때는 쇄국을 하여 문호를 폐쇄했지만 이집트와 영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부터 열강들의 무역 각축장이 되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서 온 상인들은  커피와 상아 등 아프리카 특산품을 유럽산 유리 제품과 옷감 등의 물품과 물물교환 식으로 구입한 후 캐러밴을 통해 아덴으로 보냈다. 아프리카 내륙에서 생산된 다양한 물품들이 하라르에 집중되어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런 대규모 거래 외에도 골목마다 시장이 형성되어 낙수 효과를 보고 있었다. 하라르는 점령 국가에 따라 기복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국제도시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생동감이 넘쳐났다.


그렇게 랭보는 하라르에서 아프리카의 첫 생활을 시작했다. 새로운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 등장하는 하이에나의 울부짖는 소리를, 상상이 아니라 매일 밤 생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제 그 소리도 소음에 불과해져 무감해질 테지만 말이다. 랭보는 빠르게 하라르 생활에 적응해 갔다. 바르데와 함께 와서 남아 있던 팽샤르와 그리고 자신과 함께 온 리가와 본격적으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새로운 신세계에 떨어진 긴장감과 신입사원에 불과한 업무 능력으로 처음엔 얼떨떨했지만 놀라운 적응능력을 발휘하여 두 선배 직원들을 따라잡았다.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시의 총독이나 족장에게 일정량의 세금을 내고 승인을 득해야 하는 게 그 세계의 법칙이다. 현재의 무역도 상대 국가에서 행정적인 승인을 받고 상거래를 하듯이 그 세계에서도 그런 법칙이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랭보도 하라르의 무역로를 개방한 이집트인 나르 파샤 총독을 알현한 후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거래는 개인과 할 수 없고 반드시 권력 기관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바르데 회사도 하라르 상무국으로부터 커피 원료와 천연 상아, 그리고 향수의 원료로 사용되었던 사향고양이, 노란색 화장품 원료인 와르 같은 물품을 구입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유럽에서 가져온 완성된 물품이었는데, 그중에 아프리카 상류층은 유리로 만든 제품과 도기 그릇과 비단 같은 옷감 등을 선호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아비시니아에서 화폐가 통용되었지만 재화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럽 상인들은 보다 현실적인 물물교환을 원했다. 그렇게 확보한 원자재는 자일라를 거쳐 아덴으로 보내졌다. 그 경로는 랭보가 아덴에서 하라르로 온 반대 방향이었다. 랭보가 경험한 것처럼 모든 물품의 이동과 커뮤니케이션은 캐러밴을 통해 이루어졌다. 개인 몇몇이 이동하는 것은 죽음을 작정하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이동은 크고 작든 기본적으로 낙타와 노새와 원주민으로 구성된 캐러밴이어야 가능했고 경로 또한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역 캐러밴을 통해 수많은 편지와 소포 등이 전해지면서 소통이 이루어졌다. 철도는 물론이고 도로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동 경로는 험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그나마 안전한 캐러밴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때로는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인해 중간에 편지나 소포 등이 분실되기도 했지만, 캐러밴 리더는 그것들은 전해지도록 최대한 심혈을 기울였고 그것은 그 캐러밴 리더의 신뢰이기도 했다. 악의가 있는 러더는 부탁받은 편지를 뜯어보고 은밀한 정보를 취득하는 경우가 있어 이로 인해 다툼의 원인이 되기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수십 마리의 낙타와 노새 그리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서 뜨거운 사막을 걸어가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그곳만의 풍경이었다.


하라르에 온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직원 숙소와 사무실을 예전 총독이 집무하던 건물로 이전했다. 정원도 있는 쾌적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팽샤르가 건강에 문제가 생겨 아덴으로 갔다.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이곳에서 유럽인이 1년 이상 거주한다는 것은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팽샤르가 떠난 후 곧이어 바르데가 선교사들을 동반하고 하라르로 왔다. 카프치노 수도회 소속 토랭 카뉴 주교와 여러 명의 신부와 수도사들이 바르데가 이끈 캐러밴과 함께 하라르에 도착한 것이다. 아비시니아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종파인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믿었지만 하라르는 이슬람을 믿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런 악조건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온 주교 일행은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수의 유럽인들이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토랭 주교는 10년 후 랭보가 하라르를 마지막으로 떠날 때까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랭보는 반기독교주의자였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주교와 거리를 둘 이유는 없었다. 훗날 랭보가 하라르에 거주할 때도 토랭 주교와의 관계는 항상 원만했다. 프랑스에서 만났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여기는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이었다.


이제 랭보는 하라르에서의 생활에 권태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노매드 성향이 강했던 그는 그곳 생활에 완전히 젖어들자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열정과 의욕으로 충만하다가 적응이 되면 금방 식어버리는 성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몹시 힘들고 짐승처럼 살고 있다'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는 항상 건방진 태도를 유지했지만 가족 특히 어머니에게는 마마보이처럼 혹은 감수성 예민한 소년처럼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쓴 많은 편지를 보면 겉으론 깐깐하고 이해타산에 밝은 상인의 면모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어린애 같은 투정이 남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당시 랭보는 자신의 편지가 세상에 공개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아무튼 랭보는 무언가 보다 자극적인 일을 원하고 있을 때, 바르데와 협의하여 다른 지역으로 판로를 확장하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1881년 6월이었다. 영업권을 개척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이 아니라 단지 보다 많은 상아와 가죽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집트 군도 가보지 못한 부사바라는 지역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 오지 모험은 랭보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편도 20일 동안 캐러밴을 이끌고 길고 위험한 여정을 감수한 후 부사바에 도착한 랭보는 15일 동안 머물면서 2건의 거래를 성사시켰다. 너무 무리한 탓인지 그는 열병에 걸려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이 건으로 바르데는 랭보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원주민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또한 걷는 데 이골이 난 두 다리와 때로는 험악한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튼실한 심장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랭보는 아프리카에서 상인으로 살아가는데 최적의 전형적 인간이었다. 단지 처음엔 인내력이 좀 부족할 뿐이었다.


그렇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사바에서 성공적으로 거래를 성사시킨 랭보는 열병이 호전되자 그해 9월 초에 하라르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바르데에게 사직서를 제출한다. 겉으론 적응이 되었다고 하지만, 첫 아프리카 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을 수 없었고, 한편으론 회사에 얽매이지 않고 내심 독립하고 싶었던 이유도 없지 않았다. 바르데도 랭보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고 대신 후임자가 올 때까지 하라르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물론 계약 기간이 아직 2년 더 남아 있기 때문에 바르데의 결재 없이 자기 마음대로 그만둘 수는 없었다. 바라데는 아덴 지사에 가서 심신을 추스르다 보면 마음이 변할 것으로 예상했다. 휴가를 주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랭보 11월까지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당시 하라르에서 랭보는 많은 유럽의 상인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중에 피에르 라바튀라는 무기 밀매상이 있었다. 당시 유명한 무기 밀매상이었던 그는 쇼아 왕국의 메넬리크 2세와 관련된 무기 밀매를 함께 하자고 바르데에게 제의했는데, 어떤 경우에도 항상 마지막 선을 넘지 않았던 바르데는 원주민에게 무장을 시키는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라며 에둘러 거절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의 이런 거래를 랭보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무기 거래는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당사국의 정치적 상황들이 겹쳐진 매우 복잡한 거래였고 또한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에서 이루어지는 대단히 위험한 비즈니스였다.


당초 떠나기로 약속한 날짜보다 한 달 가까이 더 지난 1881년 12월 15일, 랭보는 바르데를 남겨두고 다른 캐러밴을 이용해 하라르를 떠났다. 긴 여정 끝에 아덴에 도착한 랭보는 아프리카에서 오는 원자재와 유럽에서 오는 물품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했다. 하라르에 비하면 한결 가벼운 업무였다. 하지만 아덴은 하라르 보다 물가가 훨씬 비쌌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몸에 밴 근검절약 정신으로 삶의 질에 대한 욕심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그는 허투루 돈을 쓰는 것을 본능적으로 경멸했다고 한다. 그의 첫 번 째 목표는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오십만 프랑을 모은 후 프랑스로 돌아가서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인생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결혼에 대한 희망도 잃지 않았다. 그런 상상을 하면서도 잔지바르로 가는 꿈을 잊지 않았다. 적도 아래 탄자니아 앞바다에 떠있는 섬 잔지바르가 무엇 때문에 랭보를 홀리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여러 편지에서 잔지바르를 어떤 샹그릴라처럼 생각하여 언젠가 꼭 가고 싶다고 되뇌고는 했다. 자신의 시 세계처럼 문학적 상상력이 만든 어떤 이미지의 형태인지 모른다. 결혼이라는 평범한 삶과 잔지바르라는 이상향에 대한 추구는 랭보의 이중적인 자아를 표현한 것인지 모른다.


랭보가 고단한 아프리카 생활에서 잠시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취미 생활이었다. 첫 번째는 지리 학회와 관련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었고 두 번째는 사진 촬영이었다. 자신의 급여 일부를 샤르빌로 보내는 문제 때문에 잠시 불편한 관계를 겪기도 했지만 그래도 바르데는 정직한 상인이라는 사실에는 랭보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바르데는 프랑스 지리학회의 정식 회원으로서 아프리카에 대한 여러 가지 지리학적 정보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열강들은 지구 각 지역에 나가 있는 무역회사나 탐험가들에게 그 지역의 여러 가지 정보를 의뢰하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바르데는 매사에 꼼꼼하고 작문 실력도 범상치 않은 랭보에게 지리 학회 보고서 작성을 넌지시 의뢰했고 랭보도 흔쾌히 수락했던 것이다. 보고서 작성은 랭보의 취향에 맞는 작업이었다. 참고로 바르데는 그때까지 랭보의 과거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에 랭보는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물품들 즉 나침판, 기압계, 컴퍼스, 분도기, 직각자, 지도, 그리고 여러 가지 전문 서적 등을 구입하기 위해 들라에에게 편지를 썼다. 물품 구입에 필요한 비용은 어머니에게 수입 중 상당한 금액을 보냈기 때문에 그 돈을 사용하면 되었다. 그렇게 꼼꼼하게 준비하고 틈틈이 보고서를 작성한 끝에 2년 후 프랑스 지리 학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가덴이라는 지역의 지리적 풍경과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생활환경과 삶의 방식과 유럽인을 대하는 성향과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섬세한 부분까지 작성한 보고서였다. 방대한 그 문서는 자신의 시처럼 추상적이지 않고 명확했으며, 내용이 풍부하고, 읽기 편하고, 이국적이고, 상당한 신뢰를 가진 기록이라고 프랑스 학회가 평가했다고 한다. 그 보고서는 1884년 2월 공식적으로 학회지에 실렸고, 독일과 영국의 지리 학회에서도 요약본을 작성해 학회지에 실었다고 한다. 당시 많은 탐험가들에서 받은 어느 보고서보다 랭보의 보고서가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런 보고서는 순수한 의미에서는 세계화의 일면일 수도 있지만 제국주의를 실현하는 기초 자료가 될 수도 있었다. 일종의 산업스파이 성격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랭보의 구미를 당긴 것은 사진 촬영이었다. 당시 사진기는 혁신적인 기계였다. 유럽은 회화를 대신하는 사진에 열광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진기는 평범한 사람이 취득하게에는 상당한 돈이 필요했다. 랭보는 언제나처럼 샤르빌에 있는 어머니에게 사진기를 구입해 보내 달라는 발칙한 편지를 썼다. 랭보는 사진기 가격이 1,850프랑이라고 소상하게 알려주고 자신이 보내준 돈으로 구입해 줄 것을 당부했다. 당연히 그런 랭보의 부탁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어느 누구에게 사기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여 야단을 쳤다.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랭보가 시나 쓰는 순진한 아들로 생각하여 바보 같은 짓이라고 꾸짖었다. 하지만 랭보는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험악한 아프리카에서 상인으로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결코 세상 물정에 어둡지 않고, 사진기로 이곳 풍경을 찍어서 유럽에 보내면 수입을 창출할 수 있으니 가까운 시일 안에 사진기 구입 가격을 만회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집요하게 어머니를 설득했다. 사실 그것은 억지는 아니었다. 아무튼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랭보는 6개월 만에 사진기를 받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거금을 주고 어렵게 구입한 사진기로 그는 지리 학회 보고서에 사진을 첨부하기도 하고, 수입을 얼마나 올렸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진을 찍어 팔기도 했으며, 자신이 등장하는 사진을 찍어서 가족에게 보내기도 했다. 당시 그 사진은 현재 랭보의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이 나온 사진에 설명을 붙여서 어머니에게 보냈다. 정원 바나나 나무 아래에서 팔짱을 끼고 사진기를 응시하는 랭보의 모습은 과거 미소년이 아니었다. 깊게 파인 눈과 검게 그을린 얼굴은 늙고 초췌해 보였고, 마치 유령 같기도 했으며, 랭보라는 생각을 버리고 보면 50살이라고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보였다. 당시 랭보의 나이는 29살이었다. 특히 그가 입은 하얀색 남방지역의 추레한 옷은 그가 얼마나 그 지역에 동화되었지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프리카에 완전하게 정착한 유럽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촬영 실력은 문장력에 비해 형편이 없어서 전문 사진작가인 비도를 항상 부러워했다고 한다.

출처: 위키피아 / 1883년 하라르에서 자신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

아덴 생활은 따분했다. 그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1년 동안 갇혀 산다는 것은 유형지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랭보는 그랬다. 아덴을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어떤 사업을 한다는 것도 현지 사정상 쉽지 않았다. 이집트가 통치하던 하라르는 영국의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폭동이 우려될 정도였다. 1882년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여 보호국으로 만든 후 동아프리카 무역의 핵심 도시인 하라르를 직접 다스리기 위해 총독을 이집트로 돌려보내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에 하라르에 상주하던 바르데도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무기 거래의 선구자 피에르 아르누가 오보크에서 단칼리족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아덴에 날아왔다. 당시 동아프리카에서의 무기 거래를 망설이고 있던 프랑스 당국에게 무기 무역의 정당성을 강력하게 피력했던 아르누는 이미 랭보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상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피살 경위에 의하면 그는 프랑스 영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물품 거래 과정에서 단칼리 족에게 모욕을 주는 등 경솔한 행동을 한 결과라고 했다. 혹은 그 배후엔 자일라의 지도자인 아브 바르크가 있다는 설도 나돌았다. 분명한 것은 아르누가 지역의 특성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소식을 접한 랭보는 위험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무기 거래에 대한 유혹을 버리지 않았다. 무기 거래는 대박을 칠 수 있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리스크가 컸지만 인생을 걸고 모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사업이었다. 무기 거래의 특성상 국가를 배제하고 시행할 수 없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아직은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인도주의적인 차원과 국제 정치적인 역학 관계로 인해 프랑스 당국은 승인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루한 일상이 지나가고 있을 때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인지 랭보는 회사 직원과 사소한 이유로 싸움을 일으킨다. 아랍인 창고 관리 담당자인 알리 슈마크가 자신에게 불손하게 대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 흥분한 랭보가 슈마크의 따귀를 때렸던 것이다. 이에 옆에 있던 아랍인 인부들이 랭보를 제압하여 옷을 찢고 집단 구타를 하려는 순간 다른 회사 직원들이 달려들어 랭보를 구했다. 이유 불문하고 현지 경찰의 조사를 피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오너인 바르데는 슈마크를 해고했는데 그것 또한 인부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회사 분위기는 결코 랭보 편이 아니었고 이에 대한 소문이 아덴에 퍼졌다. 이 사건으로 랭보는 회사나 아덴에서 좋았던 평판을 한순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사건과 맞물리면서 하라르의 사정도 안정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에 랭보는 바르데와 고용계약을 2년 연장하고 자의 반 타의 반 아덴을 떠나기로 작정한다. 1883년 3월 21일이었다. 당초 독립하고 싶어 사직서까지 제출했지만 그것은 랭보의 과욕이었다. 그래도 계약 조건은 처음보다 좋았다. 연봉 5,000프랑에 숙박을 비롯한 모든 체류비는 회사 부담이었다.


두 번째 아프리카행은 처음에 비해 설레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유지는 자일라가 아니라 오보크였다. 당시 영국령이었던 자일라는 치안이 좋지 않아 상인들이 기피했었다. 하지만 오보크는 악명 높은 원주민 총독이 통치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에게 밉보이지 않으면 상인들에겐 대체적으로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또다시 기나긴 캐러밴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일라에서 출발하는 캐러밴 보다 오보크에서의 기점이 거리가 더 멀고 험난했지만 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덴에서 가져온 많은 물품과 수십 마리의 낙타와 인부들이 캐러밴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12일 이상 오보크에 머물면서 랭보는 유럽의 많은 상인들과 접촉했고 그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중에 무기 밀매와 관련된 상인들과 직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라바튀와 솔레예를 비롯해 1년 전 사망한 아르누 그리고 브레몽, 피가르, 장 바랄, 셰프뇌 등 당시 동아프리카 지역을 활보하던 전설 같은 상인들이었다. 그들과도 어떠한 형태든 관계를 맺어야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리고 최소한 살아남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독불장군은 결코 환영받을 수 없었다.


그해 4월 말, 랭보는 16개월 만에 다시 하라르에 발을 디뎠다. 도시의 정세는 안정이 되어 있었지만 영업은 신통치 않았다.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아비시니아의 많은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쇼아 왕국의 힘이 강해지면서 점차 세력을 팽창하는 가운데 유럽의 열강들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라르에서의 거래의 주요 당사자는 쇼아 사람들이었고 그들에게서 대부분의 이익이 창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랭보로서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림을 극복하지 못하면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아덴에서는 무료할 때면 유럽풍의 위니베르 호텔에 가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라도 있었지만 하라르에서 그런 여유를 즐긴다는 것은 과욕이었다. 일상에서 잠시나마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남는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은 사진 촬영을 하거나 편지를 쓰는 것 밖에 없었다. 특히 편지는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프랑스에 있을 때도 많은 편지를 썼지만 아프리카를 유랑할 때는 그보다 훨씬 많은 편지를 생산해 냈다. 19세기는 편지의 시대라고 일컫듯 특히 문학하는 사람들은 랭보뿐만 아니라 수많은 편지를 양산하여 현재까지 전해졌고 그렇게 생산된 편지는 문학을 풍요롭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랭보가 쓴 편지는 대부분 샤르빌로 갔다. 아프리카에 온 초창기에는 들라에에 편지를 썼지만 그 후에는 들라에 뿐만 아니라 누보, 베를렌 같은 친구들에게도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상인으로 자리를 잡으면서는 사업과 관계된 사람들에게도 많은 편지를 보냈다. 샤르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얘기와 가벼운 자신의 생각 등인데 일종의 일기나 수상록 초고 같은 글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니까 특별히 상대방과 소통하는 것이라기보다도 일방적으로 자신의 인식세계를 표현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말수가 적었던 그는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던 오만 가지 사유의 파편들을 편지지에 토해냈다. 편지라는 은밀성이 더해져 낯 뜨거운 개인의 감정 표현도 적나라하게 나온다. 그렇게 랭보 사망 후, 어머니 집에 수북하게 쌓아 있던 230여 통의 편지 중에 180여 통을 막내 동생 이자벨이 정리하고 편집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랭보에게 있어 당시 편지 쓰기는 내면에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을 보충하는 일종의 욕망의 배출구였을 것이다. 이미 상상력의 칼날을 무디어졌고 감성 또한 쪼그라들었지만 무언가 배설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현상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마저 없었다면 체증에 걸려 광기에 빠졌을 것이다. 바로 그런 정신적 혼돈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 바로 편지였다.


랭보는 편지에서 이렇게 희망한다. '돈을 벌어 결혼한 후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과학 교육에 집중시켜 유능한 엔지니어로 키우고, 그렇게 적어도 아들 하나는 갖고 싶어 했다.' 그 희망은 막연한 꿈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어떤 신기루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이렇게 토로한다. '자신은 방랑하는 운명에 처해져 시간이 지날수록 유럽의 기후, 삶의 방식, 언어의 감각을 잃어가고, 사막에서의 이동과 피곤, 기묘한 인종들 속에서의 모험, 머릿속에 가득한 갖가지 언어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뇌,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몇 년 후 내가 마음에 드는 어떤 곳에서 어느 날 가정을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나는 아무도 모르는 채로 원주민들의 세계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불황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하라르에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바르데는 간에 문제가 생겨 치료를 받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고 그의 동생이 아덴 지사로 왔다. 가만히 앉아서 밥만 축낼 수 없었던 랭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오가덴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유다의 광야처럼 척박한 오가덴은 현재도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의 분쟁지역으로서 전쟁까지 발발했지만, 당시에도 두 민족이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던 지역이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오가덴 지역으로 동료 직원인 소티로가 직접 가서 거의 한 달 만에 물품을 팔고 돌아왔다. 소티로도 랭보처럼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상인 기질이 다분한 청년이었고,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전우처럼 랭보의 마지막 시간까지 그의 옆을 지키며 우정을 나누었다. 결과는, 무기거래처럼 생명을 담보할 정도로 메리트가 있는 거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작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수지는 불균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커피도 없었고 가죽과 상아 등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도와 알제리에 있던 바르데 지사들은 하라르 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아 이미 청산이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시 이집트군을 밀어내고 영국군이 관리하던 하라르는 잠시 안정을 찾기도 했지만 수단에 본거지를 둔 마하디의 지속적인 봉기로 인해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마하디는 수단의 이슬람 종교 지도자 마호메트 아크메트가 세운 일종의 반군으로서 수단에서 이집트군과 영국군과 싸워 승리하는 등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그에 그치지 않고 아비시니아 하라르에 진출하기 위해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처음엔 운동 성격이 강했지만 세력이 커지면서 이웃인 기독교 국가인 쇼아 왕국과 세력 다툼을 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불안한 정세로 인해 사업 전망은 매우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주변 정세는 상인들을 지치게 했다. 하라르 지사도 거의 빈사 상태가 되었다. 이에 프랑스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아덴에 돌아온 바르데는 하라르 지사장인 랭보에게 지사를 청산하고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1884년 3월 15일, 랭보는 회사의 마지막 캐러밴을 이끌고 하라르를 탈출하여 아덴으로 돌아왔다.


랭보는 이번엔 자미 와다이를 데리고 나왔다. 흔히 자미라고 불리던 그는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대략 10살 정도 되는 하라르 원주민 아이였다. 부모 없이 유럽인들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떠돌고 있던 그를 랭보가 챙겨 자식처럼 데리고 다녔다. 나이도 어리고 문명 세계에 눈을 뜨지 못했지만 똘방 지고 착해서 랭보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모른다. 랭보에게는 곁에서 마음 붙일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자미는 랭보가 하라르와 아덴과 그리고 이집트 등을 떠돌다 결국 유럽으로 떠날 때까지 항상 그의 곁을 지켰다. 요즘 흔히 말하는 로드 매너저일 수도 있었고,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비서일 수도 있었고, 그리고 아들 같은 존재일 수도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진한 우정은 훗날 랭보의 전기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아무튼, 다시 아덴으로 돌아온 랭보는 몇 달 동안 하릴없이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동아프리카의 불안한 정세는 랭보뿐만 아니라 많은 상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또다시 익숙하지만 적응이 쉽지 않은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랭보는 기회가 되면 다시 하라르로 돌아가 땅을 구입해 커피 농장을 운영하는 꿈을 꾸었다. 에티오피아 산 모카커피는 프랑스에서 최상급 커피로 유통되고 있어서 생산까지 겸비한다면 사업 비전은 매우 밝았던 것이다. 대규모 커피나무들이 물결치듯이 능선을 따라 펼쳐진 농장의 풍경을 상상했고, 그리고 그 농장을 한가롭게 거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건 사실 꿈이 아니었다.  여건이 조금만 형성된다면 마음먹기에 따라 실현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지금 돌아간다면 그 세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특정한 일도 없이 백수로 떠도는 한낱 이방인에 불과한 일상이 이어질 게 분명했다. 그런 삶은 랭보에게 있어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설령 공무원이나 사업가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 아프리카에서의 삶보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렇게 프랑스라는 공간은 그의 기억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제 너무 멀리 온 것인지 모른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아득히 먼, 현존하지 않는 세계였다.  


그런 증상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바르데가 프랑스에서 아덴으로 오는 배에서 우연히 르 탕지의 종군기자인 폴 부르드를 만났는데 그와 대화를 하던 중 그가 랭보와 중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부르드는 랭보와 함께 대탐험을 꿈꾸는 사춘기 시절의 삼총사 중에 한 명이었는데, 이런 사실을 토대로 추정을 해보면, 바르데는 부르드로부터 랭보의 과거에 대해 알았을 것이고, 이런 만남을 랭보에게도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문단에서 랭보 작품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덧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랭보는 단박에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럽고 역겹다'라고 일갈했을지도 모른다. 훗날 모리스 리에에게 자신의 작품을 '개숫물'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프랑스에서의 랭보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바르데는 그래도 전도유망한 시인인 랭보가 이런 험악한 아프리카에서 모래바람과 싸우고 있다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인과 아프리카 상인은 어디를 보아도 통하는 게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가 오고 간 후 랭보는 바르데에게 부르드의 주소를 알아내 그에게 아프리카 종군기자 자리를 넌지시 타진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리 학회와의 관계처럼 아프리카와 관련된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긴가민가했는데 부르드로부터 답장이 왔다. '너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모르겠지만 지금 파리 문단에서 너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있는데 생존해 있다는 설과 사망했다는 설이 회자되고 있고, 살아 있다면 다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며, 또한 네가 썼던 시와 산문들이 활자화되어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고, 심지어 너에 대한 문학 동아리도 만들어져 깊게 연구되고 있기도 하며 그들은 언젠가 네가 등장하여 자신의 스승이 되어주기를 소망하고, 지금 유명한 소설가가 된 우리 친구 쥘 마리와 만나 너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그가 부르드의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이 남아있지 않아 실제 편지를 썼는지 안 썼는지 모르지만, 랭보 자신은 이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한 결과 그의 사후 수백 통에 가까운 편지 더미에서 발견되었다. 아무튼 부르드는 랭보가 부탁한 종군기자 즉 정식 종군 통신원의 자리는 상부에서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현지 상황에 대한 견문록 같은 글은 보내도 된다고 덧붙였다. 그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보아 부르드와의 관계는 해프닝으로 끝난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랭보의 심경은 복잡했을 것이다. 부르드와의 서신 교환에서 어떤 회한에 빠졌을까. 자신의 작품을 향해 '개숫물'에 불과하다고 일갈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작품이 완벽하게 실패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조금은 위안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조금의 위안... 그렇다고 아프리카 상인인 그가 다시 시인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너무 멀리 온 것이다.


그리고, 미래가 불확실한 아프리카 땅에서 유목민처럼 떠도는 랭보의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암이었다. 랭보는 아덴으로 나올 때 하라르에서 동거하던 그녀를 데리고 왔다. 아비시니아인인 그녀는 가톨릭 신자이면서 키가 크고 눈이 맑았다고 한다. 현재 에티오피아 여성들을 보며 날씬하고 미인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녀도 키가 크고 얼굴이 작고 눈이 선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현지 여성들과 동거를 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한 상황이었다. 랭보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온 많은 남성들은 그렇게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 그렇다고 현지에서 동거하던 여성을 유럽으로 데려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 현지처의 경우는 지구 역사 이래 남성들에 의해 자행되어 온 본능적 행위였다. 랭보도 처음엔 그들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그녀를 마음에 두었다. 랭보는 아덴 시내 외각에 두 사람만의 공간 마련한 것을 보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럽인 복장을 한 마리암과 함께 외출을 하기도 하고,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녀는 담배를 피웠다고 하고, 바르데 집에 있는 인도인 가사도우미에게 바느질을 배우기도 했는데, 증언에 의하면 마리암은 예의가 바르고 다정다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랭보가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라바튀처럼 현지 여인과 정식으로 결혼을 하여 자식을 두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내용은 랭보가 편지나 말로써 직접 남긴 것은 아니고, 그의 사후 랭보의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기 작가들이 랭보의 삶의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인터뷰 등을 통해 밝혀낸 내용들이다. 신뢰성을 얼마만큼 확보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암과 한동안 사랑을 나눈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아덴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프랑스에 갔던 바르데가 자금을 가지고 돌아왔다. 당초 회사를 파산 신고하고, 투자자를 다시 모아 자신의 명의로 회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직 자신의 사업체를 만들 형편이 되지 못했던 랭보는 새로운 사업체를 가지고 아덴에 온 바르데와 1년짜리 단기 고용계약을 맺었다. 그렇다고 회사 사정이 당장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멘 산 커피가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업 범위는 한정적이었다. 커피 더미에 쌓여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보다 다양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때론 모험을 동반한 캐러밴도 감행해야 하는 하라르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돈은 아프리카에 있었다. 아프리카는 모든 상인들의 꿈이었다. 그래서 랭보는 급여 삭감은 물론이고 단기 고용계약에 사인을 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랭보뿐만 아니라 많은 상인들이 아프리카에 가려고 동분서주했지만 현지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프랑스와 영국이 각축을 벌이던 동아프리카, 즉 아프리카 뿔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이탈리아와 러시아까지 진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라르는 영국, 그리고 오보크는 프랑스가 관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열강들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특히 이탈리아는 노골적으로 해군을 홍해에 보내 쇼아의 권력자인 메넬리크 2세에게 접근하여 영향력을 노리는 등 기존의 질서에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에 프랑스군은 오보크에 정박하고 이탈리아 해군의 접근을 막았다. 이런 와중에 영국군과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던 오보크의 권력자 아부 베르크가 사소한 충돌로 영국군을 피해 프랑스 영사관으로 피신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프랑스 해군이 오보크에 도착하자 자유의 몸이 되기도 했다. 영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식민지화 한 수단과 1882년 오스만튀르크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영국령으로 만든 이집트에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에티오피아를 비룻한 동아프리카에서는 프랑스가 선점하고 있어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동아프리카의 길목인 오보크와 타주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프랑스는 당시 아비시니아 지역의 최대 세력인 쇼아의 실세 메넬리크 2세와 지속적으로 우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방편으로 무기를 제공하기 위해 방범을 다방면으로 도모하고 있었다. 메넬리크 2세도 무기 확보가 영역확장에 필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무기를 원했다. 하지만 무기 판매는 다른 열강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쉽사리 진행시킬 수 없는 위험한 사업이었다. 그리고 그해 6월에 사상 유래가 없는 사이클론이 닥쳐 아덴만과 그 연안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영국과 프랑스 영사관 건물들이 파손되는 등 건물 피해도 상당했고, 오보크에서 출항한 프랑스 전함이 풍랑으로 침몰하였으며, 아덴 항구에 정박해 있던  영국과 독일 터어키 국적의 선박들이 크게 파손되는 등 크고 작은 선박들이 손상을 입었고, 인명 피해도 최소한 426명이 이르렀다고 당시 기록이 전한다. 이렇게 인재와 천재지변 등이 동아프리카 지역에 겹쳐져 유럽 상인들의 아프리카행은 점점 멀어져 갔다.


시간이 갈수록 악재가 겹치면서 새롭게 시작한 바르데의 회사는 반등할 기회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일상은 팍팍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급여도 삭감된 이유도 있지만 랭보는 지출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담배도 끊고 음식도 가능한 절식을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소화능력을 저하시켜 탈이 나기도 했다. 남편 없이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그는 너무나 먹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저축해 둔 16,000프랑을 가지고 인도 봄베이로 떠날 궁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파나마 어딘가로 떠나는 꿈을 꾸었다. 그의 노매드적 삶의 지향은 아마도 현지 사정이 더욱 악화되었다면 실행에 옮겨졌을지도 모른다.


4. 무기의 유혹


하라르에서 아덴에 온 지도 1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1885년 9월 초였다. 몇 년 전 하라르에서 바르데를 만나 사업 얘기를 나누었던 피에르 라바튀가 아덴에 모습을 드러냈다. 랭보와 안면은 있었지만 진지하게 얼굴을 맞댄 적은 없는 사이였다. 라바튀는 솔레예와 셰프뇌 등과 함께 전문적인 무기상이었다. 그는 아비시니아 원주민 여성과 결혼도 하고 안코베에 주로 거주하며 쇼아의 권력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런 기반을 가지고 무기 거래는 물론 여러 종류의 무역거래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런 마당발을 가지고 동아프리카 상권에서 유력한 소식통 역할도 하고 있었다. 예측 불허의 원주민들과 함께 캐러밴을 이끌고 거친 땅을 횡단하면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고 어느 때는 심지어 피치 못할 경우 살인까지 해야만 하는 등 항상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런 파란만장한 상인 생활을 하면서도 한몫 잡을 수 있는 무기 사업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무기 거래는 당시 상인들에겐 아주 매력적인 사업이었다.


메넬리크 2세와 무기 거래 계약을 하고 아덴에 온 라바튀는 이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함께 할 동업자를 찾기 위해 여러 상인들과 은밀하게 접촉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하라르에서 의사타진을 했던 바르데는 여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무기를 아비시니아 인들에게 판매를 하면 그 위험이 자신들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바르데의 논리는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윤리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살상무기 같은 거래는 본능적으로 원치 않았고 그리고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그런 위험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자격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랭보는 달랐다. 마침 눈여겨보고 있던 랭보에게 라바튀는 동업을 제의했고, 랭보는 별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라바튀가 보기엔 랭보가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랭보는 누가 보아도 아프리카라는 세계에 적응된 인간병기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세부 사항을 협의했다. 성패에 상관없이 최소한 5,000프랑을 보장하고, 성공하면 25,000프랑을 준다는 조건이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랭보는 이 사업에 투자까지 했다. 랭보로서는 놓치고 싶지 않은 흥정이었다. 40년 된 고물 소총을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7~8프랑에 구입해 메넬리크에게 40프랑에 판매하는 것으로 사업 계획이 잡혀 있었다. 라바튀가 다소 허풍스러운 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는 신뢰가 무너지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허풍을 부릴 수 없었다. 아무튼 50%만 믿는다 해도 이 정도면 아주 매력적인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모험을 할 정도로 투자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랭보는 바르데에게 고용되어 있는 몸이었기 때문에 그의 선처가 있어야만 이 프로젝트를 참여할 수 있었다. 바르데는 이미 랭보가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랭보의 완고한 해고 제의를 받고 그를 놓아주었다. 잡는다고 순순히 응할 랭보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르데로부터 자유의 몸이 된 랭보는 마리암을 먼저 오보크로 보낸 후 집과 가구 등 주변을 정리했다. 자신의 위험한 행보에 그녀는 안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 후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랭보의 죽음의 행군이 2년 가까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별을 고해야 하는 상황으로 흘러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랭보는 자미 와다이와 함께 그해 11월 말 경 드디어 타주라로 떠났다.


동아프리카에서의 무기거래 원조는 피에르 아르누였다. 프랑코 에디오피엔 회사의 사장인 그는 오보크와 쇼아를 연결하는 무역로를 개척하고 있었는데, 쇼아 왕국의 실질적인 일인자인 메넬리크 2세와 커피, 상아, 가죽 같은 일반적인 교역품에 대해 협상을 하면서 무기 거래도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에티오피아 왕국 재건에 기치를 올리고 있던 메넬리크 2세는 이집트와의 전쟁에 사용할 소총을 원하고 있었고, 아르누도 적극적으로 응대한 후 프랑스 당국과 협의를 시작했다. 무기 거래는 생산자가 국가이기 때문에 특성상 국가를 배제하고 추진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그리고 사실 무기 거래는 밀거래 성격이 강해 비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홍해의 경찰을 자임하는 영국에 발각되면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게 뻔했고 그 무기 또한 회수되어 적대국인 이집트로 인계될 것이었기 때문에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다. 그리고 각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 여러 부족들의 탈취 행위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현지 정보를 잘 알고 있던 아덴의 프랑스 영사는 아르누의 그런 무기 거래 의도에 대해 자제할 것을 당부했지만 아르누는 애석하게도 영사의 주의를 간과했다. 다소 거칠게 현지 사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무리하게 사업을 진행하던 그는 그 과정에서 결국 지역 원주민과 사소한 다툼 끝에 허무하게 피살된다. 그렇게 아르누는 무기의 전설이 되었다. 좀 더 신중하고 인내를 했다면 최소한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보크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타주라가 나온다. 현재 타주라 만이라고 불리는 작은 만에 위치한 오래된 무역 도시이다. 하라르로 갈 때는 자일라가 거점이었지만 쇼아 즉 현재의 아디스아바바로 갈 때는 타주라가 최적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그 도시는 프랑스의 영향력을 받고 있었지만 치안이 좋지 않았다. 라바튀와 랭보가 타주라에 도착했을 때 이미 다른 무기상 소유의 3,000 정 소총이 쇼아로의 이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5월부터 장 바랄과 아르망 사브레가 그 무기를 지키고 있으면서 타주라의 부족장과 통행세 협상을 하고 있었는데 쉽게 결말이 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기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통과하는 도시의 권력자에게 통과세를 지급해야 하는데 그 결정이 이슬람교도들의 특성상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초인적인 인내가 필요하다고 상인들은 토로했다.  


타주라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그곳은 아직도 노예 매매가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었다.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영국이 그런 노예 매매를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관망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노예 매매와 맞물려 지역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노예 매매의 구조를 보면 생산자는 아프리카인이었고, 구매자는 유럽인이나 아랍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예의 비극은 사용하는 문명인의 책임도 크지만 생산자인 아프리카의 권력자들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을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노예에 대한 인식은 각 지역의 문화적 차이와 결부시킬 수밖에 없는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미 아프리카에서는 오래전부터 노예제도가 합법화되어 있어서 유럽의 노예 구매 욕구와 쉽게 결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원주민들은 대상들을 습격하여 도적질을 하기도 하고, 충돌이 일어나면 보복을 일삼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상들의 이동을 막았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북동쪽 지역 원주민들은 유럽인을 살인한 후 마치 전리품처럼 자랑을 했다고 한다. 유럽의 상인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참고 기다려야만 했다. 아르누처럼 감정조절을 하지 못하면 위험에 봉착할 수 있었다.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가운데서도 타주라에는 여러 개의 캐러밴이 이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아프리카 최대 왕국인 쇼아로 가기 위해서는 그곳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상인들 외에 유럽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온 많은 사람들이 안전 때문에 캐러밴에 편승하여 목적지로 이동하는데, 그중에 지리학자인 쥘 보렐리, 언론인 오귀스트 프랑조, 해군 대위 우고 페란디, 기병대 중위 아르만도 론다니 등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폴 솔레예가 이탈리아인들과 함께 아덴에서 올 3,000여 정의 소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덴의 영국 공사가 무기 반출 허가증을 발급하지 않아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솔레예의 압박으로 프랑스 영사가 영국 공사를 집요하게 설득을 했지만 주변 정세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승인 유무는 쉽게 결정이 나지 않고 있었다. 아무튼 그 무리들 중에 프랑스에서 무기가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랭보 일행도 보였다.


일반적인 물품을 거래하는 대상들은 속속 내륙으로 출발했지만 무기와 관련된 대상들은 여러 가지 제약으로 여전히 발이 묶여 있었다. 랭보 일행을 비룻한 무기상들은 초인적인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라바튀가 주문한 소총 2,000정이 드디어 1886년 1월 아덴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 왔다. 그리고 프랑스 영사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랭보의 무기와 솔레예의 무기도 타주라에 도착했다. 그렇다고 즉시 캐러밴을 꾸려 쇼아로 떠날 수는 없었다. 오보크 총독의 승인과 프랑스 영사의 최종적인 허락이 있어야만 이동할 수 있었다. 또다시 기다려야 했다. 그러한 가운데 어렵게 허가를 받은 바랄과 사르레의 캐러밴이 먼저 떠났는데, 한 달 후인 3월 22일 지역 원주민의 습격을 받고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타주라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랭보 일행도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상당한 금액을 투자해 무기까지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끝장을 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실패하면 파산은 불 보듯 뻔했던 것이다.


그리고 4월 7일 드디어 브레몽과 보렐리의 캐러밴이 최종 승인을 받고 타주라를 떠났다. 그 캐러밴은 이동 중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2,500 정의 소총과 탄약을 끝까지 지켜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프랑스 당국은 무기 매매를 금지한다는 명령을 오보크 총독에게 하달하였고, 이에 총독의 군인들이 브레몽의 캐러밴을 추적하여 세웠다. 오래전부터 프랑스 당국의 우유부단한 결정으로 자국의 상인들이 혼선을 빚고 있었는데, 더욱이 지역적인 한계와 통신의 시간차로 인해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니까 한 달 사이에 프랑스와 영국의 외교적인 상황이 바뀐 것이다. 아무튼 오보크 총독의 군인들이 브레몽의 캐러밴을 세우고 검문했지만 무기는 이미 먼저 떠난 상태였다. 브레봉은 그런 것을 예상하여 무기를 먼저 쇼아로 급히 보낸 것이다. 브레몽은 군인에게 자신은 무기를 운반하지 않는다고 오리발을 내밀었고 이에 추적 군인들은 별다른 제재 없이 그들을 놓아주었다. 사실 그런 추적은 형식적이었다. 영국을 의식해 형식적으로 추적 조사를 한 것이었다. 무기상들은 프랑스 당국의 허가를 받은 후 돈을 주고 무기를 구입한 터라 최종적으로 무기 거래가 성사되지 않을 경우 그 원인이 프랑스 당국에 있다는 노리를 폈고 따라서 당국은 손해배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당국은 무기 거래로 인해 외교적인 마찰이 발생할 경우 회피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러니까 무기 거래에 대해 애매모호 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국의 폐기처분해야 할 무기를 무기상들에게 팔았지만, 최종 판매 과정에 대해서는 모호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무기를 팔기만 했을 뿐 그 후는 알바 없다는 무책임한 태도였다. 이런 프랑스 당국의 불분명한 처신에 솔레예와 랭보 같은 무기상들은 울분을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바튀와 랭보는 2,000 정의 소총과 60,000발의 실탄을 숨겨놓고 있었는데, 그 무기를 팔지 못한다면 그들은 파산을 면치 못하는 판국이었다. 이에 랭보는 화려한 필치로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탄원서를 써서 보냈다. 쇼아 왕과 무기 구매계약을 하고 계약금까지 받은 후 오보크 총독과 아덴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고 프랑스 국영 기업체로부터 공식적으로 무기를 구입하였으며, 그 후 1월 말경 무기가 아덴의 세관을 통해 타주라에 도착하여 운송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라고 현재까지의 경위를 설명한 후,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쇼아 왕국에게 무기 반출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오보크 총독에게 하달하여 현재 보류된 상태로 있고,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 이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데 뒤늦게 금지시키면 우리는 파산할 수밖에 없으며, 그동안 투자한 금액이 총 25만 프랑인 바. 이 사업이 무산된다면 모든 책임은 정부가 지어야 하며 이에 보상 청구를 할 것이다. 이 탄원서가 프랑스 외무부 핵심 인사에게 전달되어 내용을 인지하였는지는 확인된 바 없지만, 그래도 해결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영국으로부터 아프리카의 무기 반입에 대해 강한 압박을 받고 있던 프랑스 정부는 공식적으로 오보크, 아사브, 마사와 등 아비시니아 지역에 무기 반입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오보크의 총독 레옹스 라가르드의 도움으로 정체되어 있던 랭보의 사업은 속계 될 수 있었다. 메넬리크 2세와의 거래 계약은 포고령 이전에 성사되었기 때문에 예외라는 유권해석을 받은 것이다. 이번 랭보의 무기 매매는 밀거래 형식의 소규모 반입은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론 마지막이었다. 이에 고무된 라바튀와 랭보는 본격적으로 캐러밴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자금을 모으는데 집중했다. 아덴에서 위니베르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거상 쉬엘은 돈을 차용해 주는 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총 100정을 엘루아 피노에게 운반해 줄 것을 부탁했고, 그 외에도 여러 상인들로부터도 대가를 받고 무기 운반 대행을 맡았다. 그것은 마지막 무기 판매 허가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랭보 일행에겐 그나마 행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가까운 데서 발생했다. 라바튀는 그해 4월, 갑작스럽게 건강이 나빠져 아덴으로 급히 돌아갔는데, 진단 결과 암세포가 이미 전신에 전이되어 손쓸 틈도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 달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랭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프리카의 모래 바람을 이겨내며 모험인적 상인의 삶을 영위한 라바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애석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무기 거래의 키를 쥐고 있는 라바튀가 갑자기 사라지자 랭보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 것인지 막막했다. 그렇게 타주라에서 몇 개월 동안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솔레예에게서 동업을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안코베로 가는 지역을 잘 알고 있었고, 쇼아의 메넬리크 2세와도 친분이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 제안을 거부할 명목이 없었다. 하지만 랭보와 협상을 완료한 솔레예는 아덴에 가서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겠노라고 전하고 떠났는데, 9월 9일 무기의 저주인 듯, 아덴에서 그가 심장마비로 급사했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무기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몇 년 동안 인생을 걸었지만 모든 게 한순간 사리지고 말았다. 랭보의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든 게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동료를 잃은 슬픔은 오래가지 않았다. 솔레예에겐 투자를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행자 없이 홀로 모든 것을 집행해야 하는 상황은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초보자 홀로 이 사업을 실행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무기를 처분하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게 뻔했던 것이다.


10월에 접어들자 랭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캐러밴을 강행하기로 결심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무기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죽고 밥도 되지 않는 상황이 될 게 뻔했다. 이런 악재와 무기거래의 첫 경험으로 인한 두려움이 그를 압박했지만 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특히 타주라에서 열곡대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단칼리족과 이사족의 전쟁이 수시로 벌이지고 있었고, 타주라 만 건너편 암바도에서는 정박해 있던 유럽 상선이 원주민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유럽인 10명이 학살당했다는 흉흉한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랭보는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캐러밴을 꾸렸다. 200마리의 낙타와 그보다 많은 인부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타주라에 온 후 거의 1년 만에 시행되는 캐러밴이었다. 그 무리에서 유럽인은 랭보 혼자였고 이 루트 또한 그에겐 초행이었다.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이 여정에서 앞으로 무엇과 맞닥뜨릴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한 시간에 4km, 하루에 9시간 이동은 첫날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새로운 지역을 지나갈 때마다 그 지역의 족장들과 통행료에 대해 협상을 해야 했고, 현지 원주민들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 인부들이 도망가려고 할 때마다 달래고 재교섭을 하기도 하고, 식량은 부족하여 매일 절식을 했고, 사람과 낙타도 병들고, 다리를 다친 낙타를 안락사시킨 후 화장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고, 모래 태풍과 싸우고, 낮 기온이 40도가 넘을 땐 야간에 이동을 해야 하고, 속도는 한없이 늦어지고... 랭보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으며 고함과 언쟁으로 목은 항상 쉬어 있었다. 타주라만 해안을 따라가다 첫 번째 고원지대에 이르러 풀 한 포기 없는 산허리를 굽이쳐 돌면서 오른다. '을씨년스러운 풍경 탓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소름 끼치는 길'을 따라 내려갔다. 바로 소금 호수로 유명한 아살 호수였다. 소금 함유량이 35%나 되는 죽음의 호수는 중심부에 에메랄드 색을 띠고 있었고, 호수가에는 약 1km가 넘는 소금띠가 형성되어 있는 죽음의 호수였다. 어떠한 생명체도 서식할 수 없는 지옥이었다. 아주 오래전 타주라 만의 일부였다가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육지에 고립되어  길고 긴 세월 동안 말라 현재의 소금 호수가 되었다. 사해처럼 아살 호수도 해수면보다 150미터나 낮았다. 랭보가 본 아살 호수나 현재의 아살 호수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상들이나 유목민들은 그 호수를 지나갈 때면 너도나도 소금을 캐어 중간에 나타나는 오아시스나 목적지에서 팔았다. 그리고 캐러밴은 계속 이동했다. 간혹 오아시스도 지났지만, 다시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광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그마가 굳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검푸른 바위와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컬러풀한 지각들의 초현실적인 장면들, 깊고 어두운 협곡과 급경사진 고원을 지나고, 타는 듯한 태양 아래에서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조여 오면 뜨겁게 달아오른 기름기 가득한 물을 마셔야만 했고, 산악지역에 오르느라 지친 낙타들을 독려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아득히 먼 안코베로, 꺾일 듯하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이동이 계속 이어졌다. 캐러밴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하이에나가 밤이면 지척에서 밤새 울었다. 어둠을 밝히고 있는 은하수들이 화려한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달이 없어도 하늘은 밝았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무모한 짓이었다. 랭보는 왜 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을 치고 있는가. 그는 왜 그곳에 실존해야 하는가.


그렇게 캐러밴은 열곡대를 통과해 드디어 헤레르에 도착했다. 50여 채의 오두막이 모여 있은 그 작은 마을은 안코베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이제 삭막한 사막과는 이별을 고해도 되었다. 랭보는 그 평화로운 마을에서 잠시 안식을 취했다. 주변의 마을에 사는 원주민들이 이곳에 와 작은 장터를 형성해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랭보의 캐러밴이 며칠 머물자 마을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4개월 만에 안코베에 입성했다. 1886년 10월 초에 타주라를 떠나 해를 넘긴 2월 6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먼저 떠났던 보렐리 캐러밴은 두 달 반이 걸렸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랭보의 캐러밴은 4개월이나 걸린 대장정이었다. '요한 계시록에서나 나올 법한 가혹하고 냉혹한 세상에서의 지옥 여행'이었다. 당시 랭보의 캐러밴에 대한 기록이 프랑스 정부 공문서에 남아 있다. 샤브레-바랄 캐러밴과 비도 비스카르디 등 모든 대상들은 예외 없이 원주민으로부터 약탈과 습격을 당했지만 랭보 캐러밴은 살아남았다. 랭보가 성공적으로 캐러밴을 이끈 것은 무엇보다 아랍어, 암하라어, 오로모어 등 현지 언어 구사 능력과, 그리고 고난을 이겨내는 인내력과 튼튼한 두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그의 탁월한 언어 능력은 10대 때부터 영국, 독일 등을 여행하면서 이미 확인된 바 있었다.  


해발 2,500미터 고원에 위치한 안코베는 현재 인구가 3,000명도 되지 않지만 당시엔 10,000명이 넘는 쇼아 왕국의 수도였다. 열곡지대의 괴기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는 녹색의 물결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일 년 사시사철 기온이 온화했고 강수량도 적당해서 드넓은 구릉 지역에는 커피나무 밭이 모자이크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13세기 쇼아 왕조가 건국된 후 수도로서 유지되어 왔고,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공인된 기독교 종파인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국교로 삼고 있으며, 19세기 초부터 유럽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이제는 몇 배나 많은 상인들이 왕래를 하고 있었다.


랭보가 만나기로 한 메넬리크 2세는 쇼아 왕국의 실질적인 일인자였다. 요하네스 4세가 왕의 위치에 있었지만, 선왕시절 왕족들이 이합집산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혼란할 때 이집트에 망명을 가 있던 그를 메넬리크 2세가 옹립하여 현재의 체제를 갖추게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요하네스 4세는 혼란한 정국을 잠시 완충하는 임시직 왕이었고 그가 사망하면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것을 획책하고 있었다. 몇 년 후 요하네스 4세가 마르디와 전쟁을 벌이던 와중에 급사하자 메넬리크 2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아들을 숙청하고 계획대로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아무튼 당시의 메넬리크 2세는 주변의 많은 부족을 점령하며 영토 확장에 총력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유럽 열강들을 이용하는 등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의 협조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무기 구입은 그의 지상 과제였다. 그런 결과 랭보가 안코베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쇼아군이 이집트령인 하라르를 점령한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는 쇼아 왕국의 수도를 안코베에서 엔토토로 천도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랭보는 당초 라바튀가 설계한 경로를 따라 안코베에 도착했지만 그것은 정확한 정보가 아니었다. 수도 이전에 대한 정책 실행을 간과한 것이었다. 그런 결과 안코베에는 무기거래의 장본인인 메넬리크 2세는 없었다. 그는 엔토토 즉 현재의 아디스아바바에 상주하며 새 수도 건설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쇼아 왕국의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랭보는 메넬리크 2세가 안코베로 돌아올 것이라 믿고 일단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안코베에서 자신을 반겨준 사람들은 라바튀가 심어놓은 채권자들이었다. 그 채권자들은 라바튀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업자인 랭보를 법적인 채무 상속자로 지정을 하고 채권 변제를 해달라고 그에게 달려든 것이다. 예전 라바튀 캐러밴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현지 원주민의 미망인이 임금을 청구하였고, 라바튀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빌려주었다는 사람들도 여러 명 있었는데 랭보는 이자까지 지불하는 성의를 보였다. 이런 채권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그래도 원주민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심정으로 웬만하면 청구를 받아주었다. 이런 랭보의 선행이 소문이 났는지 어떤 군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의 사내가 찾아와 저기 숫노새는 자신이 라바튀에게 준 것이고 그리고 70탈레르를 빌려주었다고 덧붙였다. 돈을 뜯어내려고 수작을 부리는 모양새였다. 이에 더 이상 참지 못한 랭보는 화를 내며 그를 내쫓았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지긋지긋한 채권자는 라바튀의 미망인이었다. 그녀는 안코베에 있던 라바튀의 모든 재산 즉 토지와 집과 가축과 하인 등은 자신이 상속을 받아야 한다고 소송을 걸어 라바튀의 집에 기거하던 랭보를 내쫓고 모든 재산을 접수했다. 이것도 모자라 금전적인 채무도 변재 해달라고 집요하게 랭보를 괴롭혔다.


라바튀의 채무 청구에 시달리던 랭보는 결국 캐러밴을 이끌고 메넬리크 2세를 만나기 위해 직접 엔토토로 갔다. 하지만 금방 만나지 못했다. 메넬리크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갔다 오는 등 꽤 긴 시간 동안의 기다림 끝에 학수고대하던 용안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첫 대면부터 사업 얘기는 할 수 없었다. 왕에게 선물을 상납하여 심기를 부드럽게 만든 후 본안에 들어가야만 했다. 아무튼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왕은 교활했다. 무기 확보를 위해 다방면으로 추진하던 메넬리크는 라바튀와의 계약 외에도 다른 루트를 통해(오베크의 총독 아브 베르크) 무기를 확보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하라르를 점령하면서 이집트군이 보관하고 있던 많은 무기를 탈취한 상황이었다. 그런 원인으로 라바튀의 무기는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더 이상 무기가 없어도 크게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사정으로 무기 값은 처음보다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메넬리크는 랭보와의 협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랭보가 가지고 있던 무기 외의 물품을 압수한 후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팔라고 강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물품을 가지고 다시 아덴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렇게 흥정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든 후 소총 개당 140탈레르를 제시했다. 그 금액은 당초 계약했던 금액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메넬리크는 낙타 대여비 위약금 명목으로 2,500 탈레르와 라바튀에게 차용해 준 3, 500탈레르를 공제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위약금은 강탈이나 마찬가지였고, 라바튀 차용 건은 생뚱맞은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위약금 건은 그나마 수용할 수는 있었지만 차용 건은 내용과 증빙이 불분명하여 갈취당하는 기분이었다.  왕의 어처구니없는 흥정에 랭보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았으면 당연히 라바튀와 동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라바튀가 원망스러웠다. 각고의 노력 끝에 왕을 만났는데 이런 헐 값에 처분을 해야 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랭보는 메넬리크의 고문인 알프레드 일그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한 결과 겨우 1, 000탈레르를 깎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메넬리크의 농간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정산 후 남은 금액 9, 400탈레르는 지금 주지 않고 하라르에서 세금을 걷어서 지급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하달을 했다. 결국 그 채권은 후에 현금으로 전부 받지 못하고 상당한 양의 커피 같은 물품으로 받는다. 그것은 강탈이나 마찬가지였다. 랭보는 격노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미약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 왕이 약속한 9, 400탈레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받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서 잠깐 메넬리크 2세와 알프레드 일그에 대해 언급하고 가겠다. 메넬리크 2세는 2,000년 전 융성했던 솔로몬 왕조의 후예인 악숨 왕국의 영화를 되찾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세력을 확장하여 현재의 에티오피아 영토를 확립하였다. 특히 유럽의 제국주의 광풍으로부터 에티오피아를 지켜낸 인물로서 유명하다. 에티오피아를 가장 많이 괴롭힌 이탈리아와 전쟁을 불사하여 승리를 한 후 유럽의 어느 나라도 에티오피아를 넘보지 않았고,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은 국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는 에티오피아 건국의 아버지이며 현대화를 추진한 국부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유럽의 늑대들과 대치하면서도 선별 개방 정책을 폈는데, 그 중계자 역할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찾지 않고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찾았다. 제국주의에 속한 국민 중에서 중계자를 구한다면 필시 그 국가한테 이용당할 것이기 때문에 중립국 사람을 선택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론 그것은 선견지명이었다. 랭보 입장에서 보면 파렴치한 왕이었지만 그쪽 입장에서는 현명한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의 고문 역할을 하던 일그는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취리히 공대에 다니면서 장학금과 과외교사를 하면서 학비를 마련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랭보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엔지니어를 꿈꾸던 그는 스위스에서는 고작 산업과 관련된 회사의 직원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꿈을 찾아 미지의 땅 검은 대륙으로 갔다. 아덴이 있는 푸러와 어셔라는 건설회사에 입사한 그는 아프리카로의 투입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식민지 개발이 한창이던 아프리카는 젊은 유럽인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랭보처럼 말이다. 그 후 일그는 쇼아에서 메넬리크를 만나 기반 산업에 대한 컨설팅을 해주었다. 그리고 스위스인 특유의 절제와 정직함이 몸에 밴 일그에게 반한 메넬리크는 그에게 자신의 정책 고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후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그는 왕의 전폭적인 심임을 받았다. 그는 엔지니어답게 총기를 수리하고 조립하는 공장을 만들어 무기의 자급자족을 추진하였고, 아와시 강에 지역민의 숙원이던 교량을 건설하고, 지부티에서 아디스아바바까지 철도를 놓은 사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으며, 그리고 아디스아바바에 전기와 수도 시설의 설계와 공사 감독을 하는 등 기반 산업 구축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또한 화폐 개혁과 발행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로로 그는 10년 가까이 에티오피아 정부에서 외교부장관을 역임한 후 노년에 스위스로 돌아간다.


아무튼 메넬리크 2세에게 호되게 당한 랭보는 막대한 손실을 보고 엔토토를 떠나 하라르로 향했다. 그 캐러밴에는 아비시니아 지역을 여행하던 탐험가인 쥘 보렐리가 얹혀서 동행했다. 아와시 강이 흐르는 폭 10km의 좁은 열곡대 지역 외에는 거의가 고산지대여서 커피밭과 목화밭과 올리브 밭 등의 펼쳐져 있었지만 그래도 15일 이상 여행해야 했기 때문에 순탄치 않았다. 오히려 사람과 짐승들이 많아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동행한 보렐리가 그 여행의 일지를 남겨 지금까지 전해진다. 랭보가 엔토토를 떠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라바튀의 채권자라고 하는 자들이 길을 막고 마치 마지막 남은 살점을 뚫어 먹는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쇼아 왕에게 상속 청원을 하여 승소한 라바튀의 미망인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잃은 것이 없었던 랭보는 단호하게 물리치고 캐러밴과 함께 계속 이동했다. 진절머리 나는 라바튀의 채권자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도 하라르로의 여정을 재촉했을 것이다.


3년 만에 찾은 하라르는 많이 변해 있었다. 하라르를 점령한 쇼아군은 총독을 바꾸고 약탈과 공포정치를 자행하고 있었고, 10,000명이 넘는 자국의 아비시니아 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기존의 무슬림들을 대체하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마주치던 유럽인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랭보는 총독 마코넨을 만나 메넬리크 2세의 무기 관련 채권을 어음으로 받아낸 후 하라르를 떠나 아덴으로 향했다. 그 과정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메넬리크 2세의 부하인 오동의 농간과 협박으로 1, 810탈레르를 삥 뚫기는 수모를 겪은 끝에 8, 000탈레르짜리 어음과 여행 경비 정도의 현금을 겨우 챙길 수 있었다. 그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빨리 이 지옥 같은 아프리카를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아비니시아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패잔병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다른 캐러밴에 섞여 새로운 루트인 지부티 쪽으로 여정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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