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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Jan 20. 2024

랭보, 아프리카로의 먼 여정

아웃사이더

1 신세계


동아프리카 열곡대라는 지역이 있다. 판구조론에 의하면 아프리카 지각에서 아라비아 지각이 이미 떨어져 나가 홍해를 만들었고, 그 아래 소말리아 지각도 계속 떨어져 나가고 있는데 바로 그 경계 지역이 동아프리카 열곡대라고 한다. 현재도 연간 몇 mm 식 계속 동쪽으로 벌어지고 있는 진행형 지각이다. 아마도 수백만 년 후에는 아프리카 지각과 소말리아 지각도 완전히 갈라져서 그 사이에 홍해처럼 바닷길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에티오피아 절반과 소말리아, 케냐, 탄자니아 그리고 모잠비크 일부가 오스트레일리아처럼 대서양에 떠도는 하나의 작은 대륙이 될 것이라고 지구과학자들은 예상한다. 불과 십여 년 전 년에는 그 속도를 가속시키는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 한번에 8미터 정도 균열이 생겼다고 하는데, 그 속도는 더욱 가속될 수도 있다.     


그 열곡대는 에티오피아 북쪽에서 적도 아래 모잠비크 북부지역까지 길이 약 4.000킬로미터, 폭은 60킬로미터에서 짧게는 몇 킬로미터까지 형성되어 있고, 좌우로 지각을 밀어내고 있어서 단층 분지 형태의 지형이 만들어지고, 지역에 따라 소금사막으로 유명한 다나킬 사막처럼 해수면 보다 100미터 이상 낮은 곳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지대가 낮아져서 강줄기가 형성되어 있고, 빅토리아 호수 같은 초대형 호수를 비롯해 크고 작은 호수가 줄지어 있다. 특히 에티오피아 북동쪽 아파르 삼각지역 하다르에서는 3백2십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 즉 루시라고 이름 붙여진 여자 화석이 발견되었고, 그리고 20만 년 된 호모사피엔스 화석도 다량으로 발견되어 아주 오래전부터 호미니드들이 살았던 지역이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북동부 대부분 지역은 지진과 화산 활동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이다. 지하에서 솟아올라 굳어버린 흑갈색 현무암과 황산 같은 물질로 범벅이 된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풍경이 연출되는 곳도 있고, 저지대에는 소금 사막과 호수가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고, 대게는 풀 한 포기 없는 사막 분지와 삭막하고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형성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턱 막히게 한다. 우기에는 며칠 동안 폭우가 내려 땅을 침식시켜 새로운 지형이 만들어지고, 건기에는 아예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은 지옥불과 같은 천형의 땅이다.     


그렇게 대륙이 찢어지고 있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서쪽엔 안코베와 엔토토 그리고 동쪽으론 오보크, 타주라, 자일라, 하라르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자리 잡고 있다. 홍해와 접해있는 오보크와 타주라는 현재는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한 지부티에 속하는 도시이고, 자일라는 소말리아 영토가 되었고, 하라르는 여전히 에티오피아 영토로 남아 있지만, 19세기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없이 여러 원주민과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쥐락펴락하는 분쟁 지역이었다. 그 도시들은 동아프리카 무역로의 거점이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과 홍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자유무역 도시 아덴이 있다. 19세기 아덴은 커피의 본고장이면서 유럽의 제국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자유무역 항구로서 인도양을 건너 홍해를 거쳐 지중해로 빠져나가는 무역 항로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대개의 무역 물동량도 아덴을 거쳤다. 그 아덴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의 바다가 아덴만인데, 그 해협은 17세기 때 인도의 무굴제국 무슬림들이 선박을 이용해 메카로 성지 순례를 가던 통로였고, 그 거대하고 화려한 무굴의 선박을 강탈하려는 유럽의 해적들이 들끓었던 해역이기도 했다. 인도에서 메카로 가는 길은 이 항로가 가장 짧아서 성지 순례길로 한동안 사용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유럽 열강들이 그 지역에 집중한 것은 그런 지리학적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동아프리카 최고의 부족이면서 과거 아덴만 지역을 통치했던 악숨 왕조의 후예인 암하라족이 에티오피아 문명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특히 그들이 믿는 종교가 기독교의 한 분파였기 때문에 유럽인의 접근이 용이했던 것이다. 유럽인의 입장에서는 이집트 다음으로 에티오피아가 그나마 소통할 수 있는 문명국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11년 동안 랭보가 살았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도시에 랭보의 발자국이 깊게 남아 있으며, 그 도시들의 이동 경로인 사막 분지와 황량한 산악지역에도 랭보는 자신의 발자국을 남겼다. 그렇게 랭보는 수십 마리의 낙타와 그보다 훨씬 많은 원주민으로 형성된 캐러밴을 이끌고 짧게는 15일 길게는 몇 개 월 동안 항상 주검이 도사린 천형의 땅을 노마드처럼 떠돌았다. 그는 왜 유럽이라는 문명 세계를 떠나 아프리카로 갔을까. 그는 왜 시를 버리고 사막으로 갔을까. 그는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네덜란드 델프트를 한 번도 떠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화가 노동자로서 성실하고 작업을 했으며, 모딜리아니는 스스로 보헤미안이 되어 몽파르나스의 어두운 골목길을 거닐며 궁핍과 질병을 부둥켜 잡고 숨이 멈출 때까지 이젤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숙명처럼 늦깎이 화가가 된 고흐와 고갱은 세상으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으며 세상의 끝에서 결국 광기에 사로잡힌 채 숨을 거둘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물론 에드가 알렌 포우도, 프란츠 카프카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겐 예술은 치열함과 절박함이었다. 예술은 삶의 의미였고, 조물주가 점지한 어떤 계시와도 같았다. 하지만 랭보는 예술가의 그런 프로세스를 거부했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는 신이 준 능력을 너무 과신하다가 결국 하늘로 불려 갔지만, 랭보는 고작 십 대 때 몇 년 만에 신이 하사한 능력을 불살라 버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걷어차고 말았다. 그것은 신의 뜻을 거역한 무례하고 모욕적인 행동이었다. 고작 자신의 작품집 하나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욱하고 내팽개쳐 버리는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어디 있는가. 그리하여 신은 그에게 형벌을 내렸다. 40년 동안 시나이 광야를 유랑했던 히브리인처럼 신은 그에게 아프리카를 유랑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생존하기에 가장 열악한 역곡대 지역에 그를 떠밀었던 것이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하지만 랭보는 그 지옥을 사랑했다. 원주민처럼 얼굴이 검게 그슬리고, 몸은 비록 말랭깡이가 되었지만 그 황막한 아프리카를 자신의 고향 샤르빌 보다 더 사랑했다. 그는 그곳에서 어떤 종교적인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것 또한 신의 뜻을 거역하는 불손한 짓이었다. 신은 노했다. 그리하여 신은 그에게 다리를 절단하는 혹독한 심판을 내린 후 삶에 지친 그의 영혼을 하늘로 데리고 갔다. 시를 쓰라고 세상에 내보냈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고작 몇 년밖에 시를 쓰지 않은 죄의 대가였다. 신화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의 시에는 감동하지만 아프리카에서의 여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시는 훌륭하지만 괴팍한 시인쯤으로 생각한다. 랭보는 그 척박한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그에게 아프리카는 도대체 무엇일까?          


2 탈출


자신보다 4살 어린 여동생 비탈리가 17살의 나이에 황액막염이란 병으로 사망하자 랭보는 이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비탈리는 가족 중에서 나르시스트인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유일한 동생이었다. 당시 비탈리가 쓴 일기를 보면 그녀가 오빠 랭보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고, 그런 행동과 말이 랭보에게 전해졌을 것으로 볼 때 랭보는 비탈리를 극진히 아꼈음을 할 수 있다. 랭보는 관청에 가서 비탈리의 사망 신고를 직접 했다. 그리고 머리를 삭발하고 자신의 오필리아를 애도했으며, 1876년 1월 드디어 알에서 깨어나듯 방랑의 첫발을 내디뎠다. 2년 전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한 산문시 '지옥에서의 한 철'이 파리 문단에서 완벽하게 외면당했을 때 이미 탈출은 예고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도 이 유럽에서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어떤 계시처럼 의식에 정착시켰다. 유럽이라는 거대한 질서의 메커니즘 속에서 자신은 한낮 미미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어떤 종교적인 회심처럼 지나온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는 것과 같은 궤적인지 모른다.     


처음엔 광활한 대지에 도취되어 적어도 러시아나 중동까지 가려고 꿈을 꾸었다. 집을 나선 그는 무작정 걸었다. 기차나 마차를 외면하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지칠 줄 모르고 두 발로 걸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빨랐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속도는 베를렌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누구보다 빨랐다. 그는 타고난 경보 능력으로 미친 듯이 걷고 때론 짐수레를 빌리기도 하면서 바이에른 지역을 거쳐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했다. 그 거대한 도시엔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걸은 탓인지 그는 술에 취한 상태로 빈의 어느 골목 구석에 곯아떨어진 채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런 노숙자를 지나가던 마차꾼이 발견하고 그의 소지품을 다 털어갔다. 거지처럼 빈털터리가 된 랭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오스트리아 지역을 방랑하다 무연고 부랑자로 체포되어 경찰에 의해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그렇게 오스트리아에서 쫓겨나 프랑스 땅을 밟았다고 해서 편하게 샤르빌로 간 것은 아니었다. 결국 모든 무전여행은 두 다리로 이루어졌다.     


샤르빌로 돌아온 몇 개월 후, 랭보는 네덜란드에서 용병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하고 무릎을 탁 친다. 네덜란드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원주민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용병을 모집하는 광고였다. 당시 식민지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던 유럽의 국가들은 넘쳐나는 돈으로 용병을 확보하여 식민지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용병 모집에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프로이센 등의 많은 젊은이들이 지원을 했다. 6년 복무에 금화로 300프랑의 급여, 그리고 필요하다면 선금으로 150프랑을 지급하는 조건이었는데 그 금액은 당시엔 꽤 큰 금액이었다. 이런 조건은 랭보를 만족시켰다. 다소 마른 편이지만 선천적으로 신체능력이 좋았던 랭보는 신체검사와 서류 심사에 합격한 후 곧바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6월 10일 훈련을 마친 네덜란드 원정대는 열차로 이동한 후 덴헬데르 항구에서 오라녜공 호에 승선했다. 용병 226명과 민간인 40여 명을 태운 3,000톤급 증기선은 인도네시아를 향해 머나먼 항해를 시작했다.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고 지중해를 거쳐 나폴리에서 항해 물자를 보충한 후 본격적으로 긴 여정을 이어갔다. 이집트의 포트사이트와 수에즈 운하 그리고 홍해를 지나 아덴에 점을 찍은 후 광활한 인도양을 가로질러 7월 21일 인도네시아 바타비아 항구에 도착했다. 훈련소에서 떠난 후 41일 만에 현지에 도착한 것이다. 순진하고 허약했던 유럽의 청년들은 이미 이 긴 항해에 지쳐버려 도착하자마자 탈영 사태가 속출했다. 이런 가운데 랭보는 1대대 4중대에 배속받고 불안감을 금치 못한 채 또다시 이틀간 배를 타고 세마랑으로 갔고,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45km를 이동한 후, 도보로 2km를 더 가서야 살리타가에 위치한 자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13일 동안 이동한 것이다. 해발 600m 산악지역인 그곳은 열대우림 특유의 고온 다습함이 지배하고 있었고 풍토병 또한 유럽의 젊은이들을 질식하게 만들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랭보의 동료인 오귀스트 미쇼가 풍토병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래도 랭보는 그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도 받고 전투에 투입되어 전사자를 목격하면서도 참고 버텼다. 하지만 십여 일이 지나자 지옥 같은 이곳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에 랭보는 목숨을 건 탈영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유럽으로 가야만 했다. 이미 계약금 150프랑을 받았으니 손해 보는 것은 아니었다. 부대를 탈영한 랭보는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자신이 온 역방향으로 도주하여 드디어 아일랜드 퀸스타운으로 떠나는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미루어 짐작을 하더라도 항구까지 오는 데도 빠삐용처럼 수많은 난관을 극복했을 것이다. 불가사의하고 무모한 짓이었다. 그리고 유럽까지 가는 여정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가명을 사용한 밀항 형식의 승선인 것은 분명한데, 일설에는 선원에 고용되어 신원을 보장받았다고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탈영병 신분으로 유럽행 화물선에 승선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의 수완과 모험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무모하리만치 그의 생존능력은 남달랐는지 모른다.     


아무튼 배를 잘못 탄 것인지, 랭보의 항해는 험난의 연속이었다. 화물선인 탓에 많은 항구를 거쳐가면서 무역품의 하역과 선적이 반복되었다. 더구나 빠른 항로인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거쳐 해안을 따라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사나운 날씨와 파도와 싸우면서 침몰 위기를 여러 차례 겪어야만 했다. 오히려 신분을 감추어야 하는 처지여서 인도네시아 보다 더 힘든 여정이었다. 그렇게 지난한 항해 끝에 12월 6일 랭보는 드디어 아일랜드 퀸스타운에 도착했다. 살아서 유럽에 왔다는 안도감을 즐기기도 전에 랭보는 지체 없이 배와 기차를 이용해 리버풀로 갔고, 다시 배를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 르아브르로 이동했다. 그리고 영국 선원 복장 그대로 파리를 거쳐 12월 9일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았던 샤르빌에 당도했다. 인도네시아를 탈출한 후 거의 4개월 만이었다.     


랭보의 절친 들라에의 전언에 의하면 당시 랭보는 자신이 경험한 일련의 그 과정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고 한다. 유럽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풋내기에겐 대단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군대에서 제대하면 우선적으로 친구들에게 무용담을 줄기차게 늘어놓기 마련이다. 마치 배설하듯이 말이다.  사실 랭보의 경험은 한 편의 소설로 극화하더라도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처럼 흥미진진한 작품이 될 수 있는 서사를 가 있었다. 허먼 멜빌은 백경을 쓰기 위해 자발적으로 포경선 선원이 되어 온갖 모험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파란만장한 6개월의 경험에 대해 그는 끝끝내 펜을 들지 않았다. 위에서 얘기한 용병시절의 일화는 들라에의 증언을 토대로 엮어진 스토리이다. 랭보의 어떠한 글에도 그에 대한 경험담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당시의 랭보는 일기나 편지 그리고 여행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그 서사들은 오직 제삼자의 증언으로만 남아 있다. 완고한 절필의 의지였는지 모른다. 아무튼 네덜란드 용병 경험은 그에게 인생의 쓴맛을 맛보게 했지만 더욱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용병 생활과 열대 밀림에서의 사선을 넘는 탈영 과정 그리고 기나긴 선상에서의 지난한 여정은 감성적 언어에만 길들여진 그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이정표를 새기게 했다. 그는 움추려들지 않았다. 사바나를 거니는 사자처럼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샤르빌에서 심신을 추스른 랭보는 1877년 새해가 지나자마자 또다시 짐을 꾸렸다. 어머니 비탈리도 말릴 수 없었다. 미국 해군에서 해군 사병을 모집하는 공고를 프랑스 신문에 냈는데 이를 본 랭보는 입대 지원서를 미국 영사관에 제출했지만 미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아마도 미국 해군은 자국에서는 물론이고 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유럽에 거주하는 미국인을 상대로 해군 지원병을 모집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낙담한 행보는 이번에는 코펜하겐과 스톡홀름 그리고 함부르크 같은 북유럽 도시를 떠돌아다녔다. 상선의 선원과 서커스단 알바 생활을 하면서 의식주를 해결했다. 그러면서도 보다 먼 곳,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유럽을 벗어난 미지의 땅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지 않지만 무언가 계속 도모했다. 그의 상상력은 오직 유럽 밖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토해낸 시가 살아남지 못하고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자신의 시처럼 그 자신도 그들로부터 종적을 감추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자아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고독과 방랑으로 내몰았다. 그는 이제 시인이 아니라 세상을 떠도는 노마드였다.     


그렇게 북유럽을 부표처럼 떠돌며 한 해를 보낸 랭보는 다시 샤르빌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함께 한 여름 동안 농사를 거들었다. 억척스러운 어머니는 로슈에 조그만 땅을 임대해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작황은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농사에 열중했다. 사실 어머니는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프랑스 해군 대위 신분이었던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수령하는 연금이 연 1100프랑이 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의식주는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보다 11살이나 많았던 아버지는 결혼은 했지만 거의 많은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고, 틈틈이 샤르빌로 휴가를 나왔을 때 5남매를 생산하는데 기여했을 뿐이었다. 부부의 정이나 가족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도리를 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물려줄 유산도 없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에게 연금은 남겨주었다. 따라서 형 프레드릭이 군대에 간 상황에서 랭보는 홀어머니의 경제적인 형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였던 것이다.     


1878년 11월엔 랭보는 제노바에 있었다. 로슈에서 농사일을 마무리하고 또다시 집을 나선 랭보는 이번에는 걸어서 스위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가 며칠 만에 제노바에 도착했다. 그는 알프스를 넘을 때의 상황을 소설처럼 소상하게 써서 집으로 보냈다. 몇 년 만에 작문다운 글을 쓴 것이었다. 그 편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3주 랭보는 드디어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해 먼저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게 상책이었다. 그 거대한 도시는 나폴레옹이 원정을 갔다 온 후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특히 1869년 11월에 수에즈 운하가 만들어져 오리엔탈 문화권의 핵심 도시로 성장하였다. 아라비아 나이트에 나오는 신비의 도시 같은 알렉산드리아에 취해 있던 랭보는 정신을 차리고 취업 활동을 한 끝에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키프로스로 갔다. 월래 키프로스는 터어키령이었지만 터어키-러시아 전쟁에서 패한 터어키로부터 영국이 행정권을 빼앗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엔 경제 문화적인 왕래가 자유로웠다. 랭보가 취업한 곳은 키프로스 남부 연안 포타모스에 위치한 채석장이었다. 그의 업무는 현장 관리자로서 주로 노무 관리했다. 키프로스는 영국에 의해 전반적으로 국토를 개발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채석장은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당연히 현장의 환경은 열악했고 인부들도 거칠었으며 랭보도 그 공간에 흡수되어 갔다. 이미 인도네시아에서의 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기를 바랐다. 중요한 것은 적응이었다. 그의 육체는 이 험악한 세계에 점차 동화되어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좀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면 육체가 '그의 정신을 망상과 방랑으로부터 구원'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해 5월 그는 장티푸스에 감염되었다. 아쉬웠지만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치료와 요양을 위해 샤르빌로 돌아갔다. 아직도 파리의 카페에서 문학에 대해 떠벌이는 애송이의 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귀향은 스스로 알껍데기를 깨고 나가는 마지막 용트림이었다. 그해 9월, 로슈에서 장티푸스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며 잠시 어머니의 농사일을 거들어주고 있을 때 파리에 있던 들라에가 찾아왔다. 당시 들라에는 랭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볼은 파이고 각이 지고 단단해져 있었고, 안색은 어두웠고, 다소 어린애 같았던 음색은 무거워지고 깊어졌으며, 아직도 문학을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랭보는 이제 그것에 관심 없어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으며, 그리고 더 이상의 질문을 냉담하게 막았다...' 대신 랭보는 자신에게 채석장 재직증명서를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현재 직업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있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랭보는 겨울이 다가올 무렵 다시 키프로스로 가기 위해 마르세이유로 갔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다시 로슈로 돌아왔고, 그해 겨울을 가족과 함께 보낸 후, 1880년 3월 드디어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키프로스로 가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는 채석장으로 간 것이 아니라 영국 총독 여름 별장 신축공사 현장이었다. 그곳에서도 채석장과 마찬가지로 노무 관리직이었다. 그는 건설회사에 계속 근무할 목적으로 건축 관련 기술 서적을 보내 달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심지어 책의 제목까지 자세하게 적어서 보냈다. 부족한 전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그 서적들로 정말 독학을 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떤 직종이든 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위인 것은 분명하다. 알아야 그 세계에서 뒤처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4개월이 지났을 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랭보는 직원들과 심하게 싸운 후 키프로스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당시 공사 현장에 근무하던 이탈리아인의 증언에 의하면 랭보가 직원들과 난투극이 벌이다 돌을 던져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고 하는데, 정황상 그 말에 신빙성이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 외의 객관적인 정황은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직원들과의 어떤 다툼으로 인해 키프로스를 떠났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랭보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튼, 4개월 동안 모아둔 400프랑을 가지고 알렉산드리아에 온 랭보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그는 더 남쪽으로 가기로 작정을 한다. 그 시도도 새로운 출발이었고, 새로운 삶이었으며, 노마드적 자유를 내재화하는 시작점이었다. 그는 먼저 수에즈 운하의 기점인 포트사이드를 거쳐 홍해를 가로질러가는 배를 탔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멀리 보이는 좌우의 육지는 황토색 속살을 들어내고 있었다. 첫 번째 경유지는 이슬람 제일의 성지인 메카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제다였다. 하지만 화려한 그 항구 도시에 무작정 하선하여 일자리를 찾았지만 문화가 훌륭하다고 취업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실망한 랭보는 다음 배를 타고 아프리카 대륙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수아킨으로 갔다. 그 미항은 고대와 중세에 융성했던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풍요로운 무역 도시였다. 유럽인들이 좋아하던 온갖 향신료와 커피, 고무. 상아. 타조 깃털, 사탕수수 등이 거래되었고 그리고 암암리에 노예 거래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는 활황이었지만 랭보에겐 적당한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소득 없이 수아킨을 여행한 랭보는 다시 다음 배를 타고 마사와로 갔다. 하지만 그곳은 정보와는 다르게 도시 전체가 생명력을 잃어 분위기가 황막했다. 삶을 영위하기엔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었다. 무엇보다 살인적인 더위가 숨을 막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홍해를 건너 현재의 예멘이 위치한 후다이다로 갔다. 그곳은 유럽 국가들이 커피 무역을 위해 만든 항구도시여서 유럽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하지만 랭보는 지쳐 있었다. 한여름 상상도 못 하는 더위와 가혹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몸은 쇠잔해져 있었고 맨탈도 거의 붕괴되어 있었다. 지옥 같은 여행이었다. 결국 후다이다에 도착하자마자 랭보는 쓰러지고 말았다. 특별한 질병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적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호텔 방에서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현지에서 알게 된 모랑과 파브르 회사 직원인 트레뷔셔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같은 프랑스인이었던 그는 랭보에게 적극적이었다. 랭보의 처지를 알고 있던 그는 자신의 회사에는 입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대신 창업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비아네 바르데라는 무역회사를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랭보는 운명처럼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처럼, 살아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바로 그 깊은 아프리카 땅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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