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버지니아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한번 망가진 폐는 복구되지 않는다. 이에 클램 부인은 마지막 방편으로 마리아 루이스 슈에게 부탁해 버지니아의 간호를 맡겼다. 당시 25살이었던 슈는 클램 집안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집안의 자녀였다. 그녀는 간호사이면서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수치료 전문가였고, 그녀의 남편 조엘 슈도 의사이면서 수치료사였다. 그녀는 헌신적으로 버지니아를 돌보았다. 포우는 그런 슈에게 감사의 표현을 잊지 않았다. 버지니아 사후 포우는 슈에게 보낸 편지에서 '엄숙하게 당신을 존경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 '외롭고 어두워진 내 영혼의 천사', '과거에 나에게 아낌없이 보살펴 준 당신에게 항상 감사한다'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마음적으로 의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1847년 1월 30일이었다. 버지니아는 겨울 찬 공기가 무겁게 드리운 그날 마지막 숨을 쉬고 하늘로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돌보았지만 그녀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11살이나 많은 괴팍한 사촌 오빠를 남편으로 둔 기막힌 사연을 뒤로하고 이제 자유를 찾았다. 몸이 약해 평생 동안 넓은 세상 한번 접하지 못한 그녀는 하늘에 가서야 그 세상을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버지니아는 자유를 찾았지만 포우는 비탄과 질곡 속으로 침몰했다. 망연자실 한 그는 쉽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식음을 전패한 채 버지니아의 침대를 떠나지 않았다. 마리아 슈는 그런 포우를 달래주기 위해 이틀에 한번 꼴로 포담을 방문했다. 그럼에도 포우는 불안과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폭음과 무절제 한 행위를 일삼았으며 심할 때는 심신 쇠약이 극에 달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훗날 슈는 유명한 외과의사인 발렌타인 모르토에게 당시 포우의 증세를 설명했는데, 이에 포우가 어릴 때 뇌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포우는 절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는 우선 집을 떠났다. 슬픔을 잊기 위해 워싱턴과 볼티모어와 필라델피아 등을 여행하면서 로버트 콘레드 판사와 조지 그레이엄을 만나 위로를 받았고, 자신을 해고한 고디를 만나 앙금을 푸는 등 많은 문학 친구들을 만났다. 여행 중에 때로는 자신이 좋아하던 호손의 작품에 대한 평론과 '아른하임의 영역'이라는 산문을 썼으며,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하여 하나의 걱정을 내려놓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과거에 썼던 '폐류학자의 첫 번째 책'에 대한 표절 시비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버지니아주 성공회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여 '갈까마귀'를 낭송하기도 했다.
그 여행에서 포우는 특히 여러 명의 여성들과 접촉을 했다. 먼저 올버니로 가서 오스굿을 만났다. 필라델피아 스캔들 후 그녀는 그곳을 떠나 뉴욕주의 올버니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포우가 불청객처럼 찾아간 것이다. 스캔들에 휘말린 후 포우와 소원했던 오스굿은 버지니아를 잃은 포우의 상황은 공감했지만 남자로서의 마음은 이미 식어 있었다. 그런 여자의 마음도 모르고 단순히 버지니아가 투병 중일 때 보낸 그녀의 편지에 감흥을 받아 눈치도 없이 올버니로 찾아갔으니 분위기는 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포우는 무책임한 행동을 한 것 같다. 그 후 편지라던가 어떤 기록에도 오스굿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의 관계는 당시를 기점으로 완전히 끝난 것으로 추정된다. 포우 사후에 의하면 당시 포우가 오스굿에게 함께 떠나자고 애원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아무튼 당시 불미스러운 트러블이 생긴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마지막으로 포우를 만났던 오스굿은 3년 후 버지니아처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물론 포우는 그녀의 마지막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먼저 사망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포우의 여성 편력은 집요하게 진행된다.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고 직업도 없이 방황을 하던 포우는 버지니아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던 마리아 슈를 찾아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버지니아가 사망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어느 봄날이었다. 마치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가는 처연한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위로받고 싶은 겨울 나그네처럼 말이다. 그렇게 처음엔 포우는 그녀와 함께 협업하여 시를 쓰기도 하고, 그녀를 따러 성공회 교회에 가서 예배도 올리기도 했으며, 마리아 슈가 이사를 갈 때는 가구를 함께 쇼핑하기도 하면서 그녀의 공간 속으로 흡입되어 갔다. 이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포우는 슈에게 청혼을 한다. 어엿한 남편이 있는 유부녀임에도 포우는 좌우 보지도 않고 무지스럽게 돌진한 것이다. 마리아 슈도 포우가 싫지는 않았지만 이혼을 하고 함께 산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언감생심, 사회적 규범을 깨면서까지 포우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모성애 같은 여성 특유의 감성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녀 입장에서는 오히려 당황스럽기도 하고 마음이 상하기에 충분했다. 그러고 보면 당시 포우의 사고능력이 단세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은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포우는 또 한 명의 여인을 잃었다.
그리고 사라 휘트먼이란 여인이 있다. 그녀와는 지지하게 현실적으로 장래를 약속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 존 휘트먼이 1833년 사망한 후 홀로 사는 돈 많은 미망인이었고 자녀도 없었다. 과학과 최면술과 오컬트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포우가 오스굿과 친하게 지낼 때부터 팬심으로 그를 알고 있었고 편지 왕래도 여러 번 한 사이였다. 그녀는 당시 시인인 친구 메리 엘리자베스 휴이트에게 '나는 두려운 열망으로 그의 펜에서 떨어지는 모든 글을 삼켰다'라고 실토할 정도로 포우의 그로데스크 한 작품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포우를 찬사 하는 시(To Edgwr Poe)를 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이를 알게 된 포우는 '헬렌에게'라는 답시를 써서 그녀에게 보냈다. 이런 인연으로 포우는 휘트먼을 만나기 위해 보스턴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당시 포우는 자살 시도를 할 만큼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안식을 찾기 위해 갈구했던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 오스굿과 슈에게 했던 자신의 행위에 실망한 포우는 이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자포자기 상태였는데, 이런 그에게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와 그를 보스턴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포우는 휘트먼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당시 우황청심원처럼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하던 드링크제 아편을 먹을 정도로 그의 정신은 심약해져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보스턴에 도착한 포우는 4일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휘트먼과 어울렸다. 금방 친숙해진 그들은 공통 관심사인 문학을 공유했고, 많은 시간을 휘트먼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는데 할애를 했다. 휘트먼은 나름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인인 포우를 자랑스럽게 지인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어울리기를 바랐지만 거의가 초월주의자였던 지인들은 포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오리려 휘트먼에게 포우를 경계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포우의 작품이나 행색과 언변을 보았을 때 위험한 인물로 취급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초월주의자들에게 포우라는 존재는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두 사람은 그 만남 이후에도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뜨거운 감정을 교류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드디어 결혼에 동의한다. 단 조건은 포우가 금주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코네티컷 주 뉴런던시의 어느 신문에 1848년 12월 26일 포우와 휘트먼이 결혼식을 한다는 광고가 실렸다. 친지와 지인들의 걱정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불쌍한 영혼'을 구하기로 작정한 휘트먼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후 포우가 술에 취한 것을 보았다는 익명의 편지가 휘트먼에게 날아왔다. 이에 혼인은 단칼에 파경을 맞이했다. 포우에게 있어 술과 여인의 방정식은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였다. 버지니아도 살아생전 포우의 주벽을 걱정하여 심지어 오스굿과의 관계를 용인하지 않았던가. 설에 의하면 이 결혼을 극열하게 반대한 휘트먼 어머니의 방해 공작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 후 포우가 휘트먼의 어머니를 비난하는 편지를 휘트먼에게 보낸 것을 보면 억울한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포우는 몰랐지만, 당시 휘트먼의 어머니는 포우가 휘트먼과 결혼을 추진하는 가운데서도 애니 리치먼드와 사라 로이스터 같은 여자들과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포우의 여성에 대한 관심은 집착이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애니 리치먼드라는 여인이다. 포우가 쓴 시 '애니를 위하여'의 주인공이 바로 애니 리치먼드였다. 포우는 휘트먼과 열렬하게 사랑을 하고 있을 당시 애니와도 은밀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포우가 강연을 하기 위해 로웰이 갔을 때 그 고장의 제지업자의 부인이었던 애니와 인연을 맺게 된 후 편지를 주고받았고 두 번 더 로웰에 방문하여 애니를 만났다고 한다. 포우가 11월 16일에 보낸 편지를 보면 라우다움 2온스를 구입해 보스턴에서 1온스를 먹고 다음날 아침 친구에게 구조되어 겨우 뉴욕으로 돌아왔노라고 썼다. 1온스의 라우다움은 치사량이라고 한다. 이렇게 정신회로가 엉망으로 뒤엉켜 있을 때 포우는 '애니를 위하여'라는 시를 섰다. 그러니까 제정신에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포우도 애니와의 관계를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고 그리고 유부녀인 애니도 이런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가 세상에 밝혀진 것은 포우 사후 30년, 전기 작가 존 잉글램의 추적으로 애니에게서 포우의 편지를 건네받고 세상에 발표한 후였다. 어떤 연정이 숨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아편을 먹고 사경을 헤맸다고 실토한 편지를 썼다는 것은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의 깊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오해를 살 만했고, 사실 세상이 모르는 더 많은 그들만의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포우의 전기에서 포우의 은밀한 편지가 공개됨으로써 애니는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주위에서 흔히 말하는 현모양처로서 인식되어 왔던 애니의 이미지가 한순간 깨지고 불행한 노후를 보내야만 했다고 한다. 애니의 딸 캐롤라인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버지인 찰스 리치먼드의 기억으론 잔혹한 모욕으로 여겼으며, 시인과의 위대하고 비밀스러운 플라토닉 연애에 대한 "애니의" 랩소디를 보았다'라고 인터뷰했다. 하지만 그녀는 큰 대가를 치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불멸의 여인처럼 포우의 삶의 여정과 동행하고 있다. 포우가 어떤 인간인지 그녀를 통해 투영되었다는 것이다.
포우가 마지막으로 집착한 여인은 사라 로이스터였다. 포우가 리치먼드에서 10대 시절을 보내고 있을 당시 인연을 맺은 첫사랑의 상대였다. 포우 생의 마지막 해인 1849년, 포우가 리치먼드에 가서 지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을 때 아직 고향을 떠나지 않고 리치먼드에 살고 있던 로이스터와 조우한 것이었다. 10대 때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미래를 약속했지만 여자의 집에서 극열하게 반대하여 파국을 맞는다는 흔해빠진 서사처럼 두 사람도 그런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로이스터는 당시 미망인이었다. 이에 포우는 그녀에게 청혼을 했고 승낙을 받아냈다. 하지만 포우가 살아온 여정을 볼 때 그렇게 순조롭게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무튼 그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10대 후반이었던 그녀의 두 자녀가 극열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말로는 잠시 유보되었다고 하지만 당사자 외의 타인들이 보았을 때는 결코 장밋빛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결혼이었다. 로이스터뿐만 아니라 포우와 관계를 맺은 여러 여성들의 공통점은 남성에 대한 보편적인 모성애가 강한 유형이었고, 그중에서도 포우는 모성애를 유발하는 요소가 유별났기 때문에 그런 감성에 얽힌 남녀 관계는 결코 행복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이스터 자녀들의 주장이 오히려 어른보다 현명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접근을 했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여성에 대한 편집증적인 관심은 삶의 에너지를 잃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 방어적인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는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재기의 몸부림을 쳤다. 정체하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을 부여잡고 그는 그해 겨울 뉴욕으로 돌아와 1,6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시작의 원리'를 텍스트로 강연을 하기도 하고, 허드슨 강가에 가서 운동을 하며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한동안 펜을 들지 못했던 포우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보스턴에서 발행하던 주간지 더 플래그에 단편소설 '절름발이 개구리'와 '랜더의 오두막'과 시 '애니를 위하여'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레이엄과 서부 문학 메신저 등에도 '폰 컴펠런의 발견', '엘도라도'. '나의 어머니' 같은 시를 비롯해 많은 글을 기고했는데, 그중에 '애너벨 리'도 있었다. '애너벨 리'는 하늘로 간 버지니아를 기리는 포우의 절절함이 배어 있는 시였다. 그 시는 포우 사후 다른 시와 묶어 '애너벨 리'라는 제목으로 유니온 메거진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포우는 스타일러스라는 간행물을 창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당신 젊은 언론인 페터슨과 구체적인 창간 기획이 담긴 서신을 주고받은 끝에 그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때 포기했던 자신의 출판사를 갖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던 것이다. 다시 편집자로서 전쟁터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포우의 정신회로는 이미 손상되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섬망 증상이 그 당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금방 부서질 것 같은 신경쇠약과 알코올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카오스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대다수 언론지에 실리던 판화를 제작하여 많은 돈을 벌었던 존 사테인이 유니온 메거진의 지분을 50%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포우와 친하게 지내고 있던 그가 포우에 대한 인터뷰가 지금도 전해진다. 1849년 7월 어느 날 포우가 필라델피아의 자신의 집으로 찾아왔는데, 창백하고 초췌한 표정을 한 포우가 자신은 누군가에 쫓기고 있으니 보호를 좀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뒤이어 기차에서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존 사테인이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포우는 여자 문제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이 맞다면 포우는 환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포우는 10대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리치먼드로 향했다. 그 작은 도시는 미우나 고우나 포우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왜 앙숙이었던 양부 알렌과 함께 살던 그곳으로 갔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집필이나 어떤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먼 길을 떠나기 전 회귀본능 같은 귀향일 수도 있다. 포우는 리치먼드에서 7월부터 9월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여동생 로잘린 가족과 만나 조카들과도 함께 놀기도 하고,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어릴 적 친구들과 회포를 풀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그 외에도 그들과 연관된 많을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중에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던 18살 문학소녀 수잔 아처 와이스와 매일 서신을 주고받았다. 리치먼드가 낳은 나름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인인 포우는 어린 시인 지망생인 그녀에게 성심성의껏 문학을 가르쳐주었다. 아마 당시 리치먼드 여행에서 만난 유일한 문학 친구였을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포우는 당시 두 번 정도 만취했다고 전한다. 한번 술을 마시면 섬망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에 절주를 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감정이 흔들리면 알코올이 악마의 유혹처럼 그의 아픈 영혼을 애무했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것은 일상적인 현상이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과 술은 선사시대 때부터 늘 함께 해왔고, 술은 문명의 발전에 촉매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예술가에게 있어 술은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영감을 각성하게 만드는 중요한 물질이다. 물론 체질적으로 술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예외일 수는 있지만, 예술가에게 있어 술은 부정적인 측면보다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포우도 그랬다. 포우의 집안 내력을 보면 알코올에 취약한 체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부 데이비드 포우와 형 헨리 포우도 알코올 중독자였던 것이다. 사실 포우는 알코올 중독자라기보다 간헐적 주벽을 가지고 있어서 몇 년 혹은 몇 달 동안 금주를 하다가 어떤 연유로 한번 술을 마시면 며칠 동안 이어졌고, 그리고 며칠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몸이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량이 쌘 것도 아니었다. 와인 한 잔에도 취해 주사를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신경발작적인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폭음의 기준이 사람마다 차이기 있듯이 그는 적은 양에도 폭음의 증상을 보이는 특이 체질이었다. 첫 직장인 남부문예통신에서 해고당한 것도 낮술 때문이었고, 그레이엄스를 자의반 타의반 그만둔 것도 알고 보면 술 때문이었다. 거의 마지막 직장이나 마찬가지인 브로드웨이 저널에 다닐 때도 만취한 포우를 직원들이 집까지 데려다 주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대통령을 상대로 한 문학 강연 행사 전야제에서 쫓겨난 것도 와인 한잔 때문이었다. 이런 주벽을 잘 알고 있던 포우는 의사인 스노드그래스에게 쓴 편지에서 평시에는 절제를 잘 하지만 동료들과 심하게 논쟁을 벌이면 술을 찾게 되고, 폭음을 하여 만취하는 경우가 있다고 실토하고 요즘은 소다수만 마신다고 심경을 밝혔다. 특히 버지니아가 폐렴으로 투병 생활을 시작하고 사망할 때까지의 5년 동안 포우는 술을 많아 마셨다고 한다. 1846년 1월 어느 날 치버스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영원히 술을 마신다라고 썼는데 아마도 취기가 잔뜩 오른 상태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나는 영원히 술을 마신다? 정말 포우다운 냉소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술을 마시는 이유는 수만 가지가 되지만, 버지니아의 투병과 죽음 사이에서 포우는 삶의 희망을 상실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술을 마셨다. 술은 안식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그는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는 가능하면 집필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소설이나 시는 절대로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월드가 포우의 전기에서 그를 정신 나간 알코올 중독자 취급을 했지만 많은 증언들에 의하면 사회생활을 충분히 할 정도로 건강했고 단지 술을 좋아했을 뿐이라고 전한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우에겐 리치먼드에서의 2개월은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비록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로이스터와 해후한 후 새로운 연정이 살아나 미래를 약속하기도 하고, 생각지도 않은 친구들과의 우정을 확인하기도 하면서 처음으로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마지막이었다. 신이 그를 데리고 가기 위한 마지막 선물이었는지도 몰랐다. 이 무지한 세상과 치열하게 투쟁하느라 지친 그의 영혼은 이제 안식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게 그는 마지막 길을 떠났다. 1849년 9월 26일 아침 포우는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볼티모어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떠나기 전, 의사인 존 카터에게 말라카 지팡이를 선물 받았으며, 포우는 로잘린에게 '애니를 위하여' 원본과 테일러 부인에게 쓴 편지를 전해다고 한다. 그 말라카 지팡이는 포우가 볼티모어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 옆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포우의 마지막 행선지는 필라델피아라고 했지만 여행의 목적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지인들에게 필라델피아에서 약속된 강연이 있노라고 전했다고 하는데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다. 물론 어떤 비즈니스와 관계된 여행인 것만큼은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을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리고 10월 3일 새벽, 볼티모어 제4 투표소 밖 골목에서 의식이 불분명한 채 쓰러져 있는 포우가 인쇄업자인 조섭 워커에게 발견되었다. 볼티모어에서 한동안 살았기 때문에 포우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노숙자가 포우라는 것을 인지한 워커는 인근에 살던 포우의 친구 스노드그래스 박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 보냈고, 이에 황급히 현장으로 달려온 박사는 급히 마차를 불러 포우를 데리고 워싱턴 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포우는 깨어나지 못하고 1849년 10월 7일 새벽에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 과정은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포우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는 수많은 설을 양산했고 영화와 소설로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죽음의 진실은 무엇인지 200년이 가까워지지만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을 뿐이다. 그가 쓴 추리소설처럼, 그의 죽음도 정교한 추리를 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추리해 보라고 한번 씩 웃으며 세상에 문제를 남긴 것은 아닐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포우는 몇십 년 동안 알코올 중독자이며 성격파탄자라는 수식어가 붙은 요상한 문학가로 미국을 떠돌아다니다 서서히 잊혀갔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을 때 프랑스에서 상징주의자들에 의해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전개되고 있었다. 문화 변방인 아메리카에서 활동하다 이미 사망한 포우의 작품과 그의 삶이 호기심을 배제하고 진지하게 재조명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영국이나 독일 같은 보수적 색채가 강한 국가라면 결코 벌어지지 않을 현상이었다. 아방가르드의 원조인 프랑스이기 때문에 그런 획기적인 발상이 먹혀들 수 있었다. 그런 재평가는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돌아왔다. 마치 잉크도 마르지 않은 프랑스 문학작품을 수입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편견을 버리고 작품만 읽으면 미국 작품이라고 전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유럽적이었고 그중에서도 프랑스적이었다. 포우가 유럽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순수한 미국인이라는 것을 알면 대다수는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해 한다. 그렇게 다시 미국에 등단한 포우는 예전의 포우가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세계의 문화예술을 선도하는 프랑스에서 문학적 평가를 끝낸 공인된 작품이었다. 이런 경우는 근대 문화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렇게 회귀한 포우는 미국 문학계를 들끓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괄시하고 멸시까지 한 포우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에드가 알렌 포우... 디킨스를 시기할 정도로 부러워했던 포우는 이제 그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격이 충분했다.
포우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였다. 청교도적 문화와 정서가 팽배하던 미국에서 그는 그 질서를 따르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 생존한 아웃사이더였던 것이다. 그는 부모 얼굴도 모른 채 알렌의 가정으로 입양되었지만 법적으로는 입적하지 않은 형식적인 양부모 관계였다. 의심 많은 알렌의 이런 성향은 포우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기에 충분했고, 끝내 상종도 하지 않는 관계로 발전하여 상속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불안정한 양부 양아들 관계는 예민한 포우의 성정을 비틀어지게 만든 요인이었다. 20대 중반까지는 알렌과의 갈등이 포우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여 대학을 중퇴하는 원인이 되었고, 생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육군에 자원입대를 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도 1년도 채 안되어 자퇴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했다. 포우의 그런 불미스러운 행위는 알렌에 대한 반항이었다. 포우는 알렌을 경멸했다.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상인인 알렌을 그는 저속한 인간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알렌에게서 용돈을 받아내기 위해 간 쓸개 다 내놓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면 냉정하게 다시 간 쓸개를 주어 담았다. 그렇게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처절한 갈등은 알렌의 죽음으로 종식되었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들이 남긴 치유할 수 없는 수많은 상흔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시작된 포우의 삶의 궤적은 주류 사회로 향하지 못하고 변화무쌍한 굴곡을 만들었다. 타고난 신경증과 양부와의 갈등에서 얻은 반항과 그리고 술 한 잔에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주벽은 강고한 기존 문학계로의 출입을 막았다. 정기 간행물 편집자로서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런 성향 탓에 평균 1.5년 이상을 버티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쏟아낸 문학 비평은 미국 비평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적을 양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당시 미국 문학계의 거목이었던 롱펠로우에 대한 집요하고 혹독한 악평은 주류로의 진입에 바리케이드를 치게 했다. 포우 특유의 풍자로 위장한 비아냥과 존경이라곤 전혀 없는 악의가 담긴 비평은 돌이킬 수 없는 벽을 만들었다. 청교도 정신이 지배하던 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호손의 단편소설에는 찬사를 보냈지만 호손의 대학 동창인 롱펠로우에게는 가열찬 비평을 서슴지 않았다. 청교도적이고, 교훈적이고, 심지어 초월주의적인 롱펠로우의 시는 포우를 본능적으로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시와 소설은 훌륭했지만 그의 비평은 호불호가 분명해 치명적인 적대적 전선이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그는 죽어서도 막돼먹은 이단아 취급을 받고 영원히 추방되었다. 특히 그리스월드의 포우 전기는 부관참시를 방불케 했다.
포우의 미완성 소설이 있다. 미완성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짧은 4페이지짜리 쓰다 만 작품 원고를 그리스월드가 가지고 있다가 그가 죽은 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그의 자식들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포우가 재평가를 받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작품의 제목은 월래 없었지만 후세의 작가들이 등대라고 붙여주었다. 제목대로 작품의 시작은 등대로부터 시작한다. 무대는 노르웨이 북서쪽에 있는 노르랜드 해변가 등대이다. 1월 1일, 주인공은 노르웨이 귀족 출신으로 단지 글 쓰는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등대지기에 지원하여 겨우 허락을 받은 후 커터의 배를 타고 '험난한 바다'를 건너 등대에 도착한다. 그의 동반자는 냅튠이라고 불리는 개 한 마리가 유일했다. 카터는 주인공과 개를 남겨두고 위험한 바다를 '아슬아슬하게 탈출'하여 다시 육지로 되돌아갔다. 이제 홀로 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그는 완벽한 고독에 만족하며 엑스타시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다음날 1월 3일, 그는 1층 숙소에서 램프가 있는 망루 층으로 올라가며 건물에 대한 안전 점검을 한다. 그렇게 작품은 미완성으로 끝난다. 후세의 작가들은 여기까지만 읽고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 소설은 아마도 공포와 미스터리 한 분위기가 중심인 플롯으로 전개될 것이며 당연히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그곳도 모자라 그 첫머리를 모티브로 하나의 소설을 만들기도 했다. 아무튼 포우는 정말 그 소설에서 무엇을 논하고자 했을까. 노르웨이라는 국가명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노르웨이는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매우 멀고 먼 곳에 있는 나라이고 등대 또한 육지 끝 오지나 무인도에 위치하기 마련인 것을 보면 포우는 작정을 하고 고독의 심연을 주제로 삼은 것 같다. 고독의 끝을 찾아 고립을 자초한 주인공은 포우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지 모른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세상의 끝에서 고독을 찾지만 그것은 결국 주검이라는 사실을 그는 예견하고 있지 않았을까. 고독에서 자유를 찾으려고 했던 포우는 노르웨이에서도 가장 먼 가상의 노들랜드로 그렇게 침잠했다.
'하루 종일 고요했다. 저녁이 되자 바다는 유리처럼 보였다. 몇 개의 해초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아주 작은 구름 한 점조차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