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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Dec 13. 2023

에드가 알렌 포우, 갈까마귀

아웃사이더

5. 갈까마귀


그는 1844년 4월, 필라델피아를 미련 없이 떠났다. 행선지는 다시 뉴욕이었다. 디킨스가 뉴욕에 방문한 후 쓴 여행기에 뉴욕을 ‘여인들의 호화로운 웃 차림, 부의 증거, 브로드웨이의 끊임없는 인파, 포장도 안 되고 조명도 어두운 거리’로 묘사했듯이, 역동적이고 거대한 이 도시는 그에게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 욕망의 도시는 포우의 끝없는 욕망을 소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포우의 선택은 최선이면서 탁월했다. 삶의 여정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번 무너질 때면 더 낮은 곳으로 향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보다 더 큰 공간으로 자신을 던졌다. 자신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세상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가 믿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펜이었다. 이 무기로 자신의 영지를 구축하여 명성과 부를 누리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가! 난 에드가 알렌 포우다!


뉴욕은 결코 포우를 반기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항상 쪼들렸던 포우는 뉴욕에서도 임대주택을 전전해야만 했다. 버지니아는 여전히 투병 중이었다. 각혈하는 횟수도 줄어들었지만 이제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야 병세가 호전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클램도 억척스럽게 빈방에 하숙을 들이고 틈만 나면 돈을 벌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녀의 경제활동은 변변치 않은 포우의 수입에 큰 보탬이 되어 그에게 벼랑으로 내몰리지 않게 보호막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무렵 클램이 어린 길고양이를 주어왔다. 포우의 소설 ‘검은 고양이’의 모델이 된 그 고양이는 버지니아의 친구가 되었다. 포우는 디킨스처럼 전업 작가가 되어 소설과 시를 쓰면서 삶을 영위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꿈이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기 시작했다. 포우가 문학계와 전투를 벌이고 있던 그 무렵, 뉴욕에서 태어난 헨리 제임스처럼 영국으로 가서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았다면 이 구질구질한 뉴욕 생활보다 훨씬 윤택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그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양부 알렌이 영국에서 사업이 번창하였다면 그곳에서의 정착 기간은 더 길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아마도 5~6년만 더 살았다면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갔더라도 포우는 영국에 남아 소설을 쓰며 미래를 모색했을 게 분명하다. 미국 출신 영국 작가로서 헨리 제임스와 쌍벽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은 흥미롭다. 아마 포우도 당시 그런 상상을 해보았을지도 모른다. 영국은 이 미개한 미국과는 다른 문화 대국이지 않는가. 그리고 유럽은 또 어떠한가.


뉴욕에 온 몇 달 동안 포우는 가상현실을 현실처럼 스토리텔링 한 기사 형 소설 '열기구 보고서'를 집필하여 뉴욕의 선지에 판매하고, 생매장에 관한 공포물 '성급한 매장' 등 단편소설과 그리고 여러 신문에 자유기고가로서 사회 전반적인 주제의 칼럼과 에세이를 판매하며 생활을 유지했다. 당시부터 기고한 이런 잡다한 글들은 꾸준하게 이어져, 1929년 200여 편을 추려서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리고 10월 초에는 당시 나다니엘 윌리스가 창간한 이브닝 밀러지에 부주필 정도 되는 직책으로 취업을 한다. '기계적인 문단 작성자'로서 편집에 대한 영향력이 미미한 업무였지만 자존심을 접고 열심히 출근을 했다. 그러면서 뉴욕의 여러 문인들과 교류를 했는데, 그중에 가브리엘 헤리슨과 할렉과 모리스 등과 친밀하게 지냈다. 그들은 카페 테이블에 둘러 않자 담배를 피우며 포우의 냉소적이면서 신랄한 풍자가 뒤섞인 독특한 비평에 귀를 기울였고, 소문처럼 포우가 괴팍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몇 안 되는 우군을 형성하게 하여 포우가 최악으로 치닫지 않게 방어망을 구축해 주었다.


뉴욕 생활이 안정되어 갈 무렵, 겨울이 오기 전에 포우는 도심을 벗어나 패트릭 헨리 브레넌의 농가로 이사를 갔다. 물론 버지니아를 위해서였다. 그곳은 주말이면 포우와 버지니가 자주 찾던 경치 좋은 곳이었는데 아예 이사를 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집주인 브레넌은 교양이 좀 있는 사람이어서 포우가 소설가라는 사실에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불편하지 않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포우는 그 집에서 자신의 걸작 '갈까마귀'를 썼다. 그 시는 자신이 편집자로 있던 이브닝 밀러에 먼저 실었고, 곧이어 포우가 그레이엄에 있을 때 도움을 받았던 제임스 로웰이 발 벗고 나서서 새로 선보인 월간지 아메리칸 리뷰에 추천하여 재발표되었다. 두 잡지 중 어디에서 먼저 발표되었는지 논쟁이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메리칸 리뷰의 사주인 조지 콜튼은 제임스 로웰의 친구로서 그가 3년 후 급사할 때까지 포우와 가깝게 지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등장한 '갈까마귀'는 예상을 뛰어넘는 히트를 쳤다. 더구나 당시 제임스 로웰이 포우라는 인물에 대한 광고효과를 노리고 개략적인 그의 전기를 그레이엄 메신저에 발표하였고, 윌리스도 자신의 신문에 그 작품에 대한 우호적인 리뷰를 하는 등 분위기를 조성해 준 결과이기도 했다. '갈까마귀'는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얻어 여러 신문과 잡지에도 연달아 실렸고 나중에는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중요한 작품으로 다루었으며 영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포우의 명성이 상승했지만 그렇다고 부까지 안겨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1845년이 시작되었다. '갈까마귀' 덕분에 포우는 문화계에서 지명도가 한층 높아져 각종 강연에 불려 다녔다. 특히 그의 시에 대한 강연은 일품이었다고 한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시론을 설파하는 전도사와 같아 매번 많은 관중이 모여들었다. 그해 2월에 뉴욕 도서관에 주최한 미국의 시에 대한 강연에서 그는 항상 그렇듯 롱펠로우의 시를 신랄하게 피판을 한 반면 젊은 여류 시인 프란시스 오스굿의 시를 호평했는데, 그로 인해 그녀와 처음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작품에 대한 지를 주고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마침 포우가 그해 3월 브로드웨이 저널에 편집자로 취업했을 때 오스굿의 많은 시를 게재해 주고 진심 어린 평론도 해주었다. 포우 보다 2살 어린 오스굿은 2류 화가인 남편과 두 딸을 가진 유부녀로서 당시 지명도가 상당한 시인이었다. 그리고 버지니아처럼 순수한 영혼(포우가 느꼈을 때)을 가지고 있는 청순가련형이었고 무엇보다 폐결핵 환자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의 남편은 바람둥이어서 감수성이 예민한 그녀로 하여금 문학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당시 오스굿은 그런 남편과 잠시 별거 중이었다. 그렇게 포우와 가까워진 그녀는 포우의 농가에 방문하여 동병상련의 버지니아를 만났고 두 여인은 금방 가까워져 친분을 나누었다. 질투를 느낄 만도 하지만 버지니아는 포우가 오스굿과 친해지면서 금주하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의 우정을 용인했다고 한다. 이 무슨 플라토닉 사랑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두 여자의 불화설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포우와 오스굿이 애매모호하게 썸을 탈 때 엘리자베스 엘렛이라는 여류 시인이 등장하여 스캔들을 조장하고 나섰다. 포우가 악명 높은 비평가였기 때문에 웬만한 시인들은 그와 척을 지지 않기 위해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엘렛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엘렛은 얼마 전 포우에게 문학 발전기금 명목으로 50달러를 주려고 했지만 거절당한 후 자존심이 구겨져 있던 참이었다. 포우가 엘렛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표현한 흔적은 없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포우에 대한 감정이 몹시 상해 있던 그녀는 삼각관계를 형성하여 질투의 화신이 되었다. 물론 일방적이었다. 그렇게 터무니없게도 엘렛은 오스굿의 세 번째 자식의 아버지가 포우라고 헛소문을 퍼트렸다. 뉴욕 문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여자의 질투는 무서웠다. 이에 화가 난 사람은 오히려 오스굿의 남편 사무엘이었다. 그는 엘렛에게 오스굿에게 직접 사과하지 않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고, 이에 엘렛은 사과의 편지를 오스굿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포우와 오스굿의 관계에 그리스월드가 끼어든다. 두 편집자가 여기서도 겹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인연은 범상치가 않았다. 사실 오스굿은 포우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여러 남성 문인들과 스캔들이 있어 왔다. 그 연장선에서 그리스월드도 오스굿과 애정이 담긴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포우와 연적인 된 것인지 모르지만 포우 사망 후 그에 대한 인신공격의 재료로 삼았다. 그리고 그리스월드가 1857년 사망했을 당시 그의 방에서 포우와 오스굿의 초상화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많은 구설수를 낳게 했다고 한다. 아무튼 당시는 그들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에서는 남녀관계로 인해 질투와 시기가 범람하는 시절이었다. 이런 스캔들의 주인공인 오스굿은 잠시 필라델피아로 피신하였고, 그 후 포우와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포우와 오스굿의 관계는 여러 지 스캔들을 만들기에 충분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부녀 입장에서 이런 구설수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포우는 여전히 얼굴을 들고 뉴욕시를 활보했다.


뉴욕에 온 지 1년 만에 '갈까마귀'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포우는 1845년 3월 로웰의 소개로 당시 창간한 브로드웨이 저널에 공동 편집자로 들어간다. 저작권법 운동을 하던 찰스 브릭스가 사주였고, 음악 평론가인 헨리 왓슨, 그리고 포우 3인이 공동 편집 체제를 구축하였는데, 브릭스와 포우는 편집권 문제로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다. 출판계에서 선배이며 저작권법 제정에 앞장을 선 행동가인 브릭스와 개성이라면 한몫하는 포우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어 있는 가운데 포우는 뉴욕의 문학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하이에나들이 우글거리는 그 세계에서 그는 강연과 시낭송과 시 공모 대회의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을 했고, 에베르트 두이킨크, 토마스 치버스, 앤 살롯 린치, 헨리 터커맨 등과 교우 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토머스 치버스와는 누구보다 돈독한 관계였다. 포우와 동년배인 그는 의사이며 시인이었다. 5년 전부터 열광적인 팬심으로 포우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뉴욕에서 처음 상봉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금방 친해졌다. 그는 포우가 그레이엄에 근무할 때 형편없는 저임금을 받고 있다고 사주를 성토하며 그의 능력으로 볼 때 연봉 10,000달러는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주장하여 포우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그리고 포우의 비평 활동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견지하면서, 과도하게 비평 글을 쓸 때는 '사람들이 당신을 인디언 도끼라고 한다면서 자제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으며, 포우의 음주벽에 대해 '그는 술에 탐닉해 신이 주신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고 애석해하기도 했다.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포우의 집을 자주 찾아 병마와 싸우고 있던 버지니아의 치료를 도와주며 위로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그 집에서 날을 세운 후 새벽에 포우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가기도 했다. 진심으로 포우를 친구로 여겼던 그는 포우 사후 그리스월드가 포우를 미치광이라고 비난할 때 마지막까지 포우를 옹호하며 방어망을 쳐주었다. 포우가 완전히 지하에 묻히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원인은 그나마 토마스 치버스와 같은 사람들이 입바른 소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마저 없었다면 포우는 영원히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화석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 두이킨크의 제안으로 포우의 단편소설 12개를 묶어 '포우 이야기'라는 소설집을 출간할 수 있었다. 이 책은 포우가 출간한 단행본 중에서 그나마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데 1 부당 8센트의 인세를 받고 1,500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판매 부수는 평범했지만 아마도 인세를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덕분에 뒤이어 '갈까마귀와 기타 시'라고 제목을 붙인 시집도 내놓았다. 대단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출간이었다.


그렇게 1845년은 포우에게 있어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새로운 땅 뉴욕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고, '갈까마귀'의 호응도 대단했고, 지루한 삶에 생동감을 주는 여인과 교류하기도 하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공동 편집자로 있던 브로드웨이 저널을 자신이 인수한 것이었다. 그해 10월 사주인 브릭스가 자금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폐간을 생각하고 있을 때 포우와 협상하여 겨우 50달러에 잡지사의 지분을 포우에게 매도한 것이다. 자신의 잡지를 가지고 싶었던 포우의 소원이 우연찮게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이 얼덜결에 잡지사를 인수한 탓인지 모든 것이 서툴고 운영은 순조롭지 않았다. 준비가 안 된 채 먹이를 낚아챈 결과였다. 무엇보다 자금난을 이겨내기 힘들었다. 토마스 잉글리쉬와 그리스월드와 캐네디 같은 오래된 지인들에게 조금씩 자금을 모았지만 인쇄 비용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다음 해 1월 초에 폐업 신고를 하고 말았다.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투자한 돈이 미미했고, 준비도 안 된 상태로 운영을 했기 때문에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투병 중인 버지니아에게 '배은망덕한 삶'이라고 토로하는 등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위한 경험으로 치부했다. 사실 그의 복잡한 심경을 어떻게 알겠는가.


포우가 그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은 경험 부족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건강 상태가 엉망이기 때문이었다. 출판사 경영은 물론이고 새로운 작품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너무나 미약했다. 그는 지쳐 있었다. 적군과 싸우면서도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문학적 상상력은 휴화산처럼 땅 속에 묻어져 있었다. 그럼으로써 심신은 나태해지고 술과 더욱 가까워졌다. 그가 할 수 있는 작업은 간단한 서평과 강연이었다. 그것들 또한 성의가 없었다. 일례로 보스턴 학회에서 주최한 시 낭송회를 망친 것이었다. 50달러의 강연료를 받고 청중 앞에서 낭송한 작품이 신작이라고 속이고 어릴 적 쓴 '알 아라프'를 대충 변주하여 낭송했는데 이를 간파한 관객들이 중간에 나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성의를 보이지 않고 대충 시간을 때우려고 한 포우의 태도에 실망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포우는 브로드웨이 저널에 자신이 청중을 속였다고 실토하고 사과하는 글을 실었다.


이제 당분간은 잡지사 경영이나 편집에서 멀어져 있기로 작정했다. 그런 작업은 여러 사람들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뒤엉켜야 하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자신만 떠나면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었다. 그렇게 홀가분해진 포우는 심기일전하여 작가로서의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편집자와 작가를 병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노동인지 뒤늦게 깨달은 것인지 모른다. 이제는 혈기왕성한 20대도 아니고 불혹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이였다. 그렇게 쓴 작품이 '갈까마귀'의 시작 과정을 설명한 '시작의 이론'이라는 시론 에세이였다. 이 작품은 자신의 시에 대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명작으로서 미국 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새로운 시 세계를 설파하는 이 작품의 내용을 가지고 포우는 많은 강연을 했고 그에 호응하는 청중도 많았다. 그는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이기도 하면서 그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는 비범한 능력도 겸비라고 있는 종합 예술가이도 했다. 이런 능력에 힘입어 그는 당대 최고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고디스 레이더스 북이라는 여성 월간지에 한 페이지를 할당받고 '뉴욕시의 문인들'이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5월부터 10월까지 총 6회에 걸쳐 연재된 그 에세이는 뉴욕 문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작품에 대한 비평을 그래도 논리성이 뒷받침하고 있어 때론 가혹함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작가 자체에 대한 비평은 너무 과도한 인식의 표출이었다. 본인은 문인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부드러운 표현으로 쓴 것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이 볼 때는 선정적이고 인신공격성이 다분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적이 많은데 더욱 많은 갈등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특히 도움을 많아 받았던 토마스 잉글리쉬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에세이를 쓴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1년 전 포우와 잉글리쉬가 술에 취해 서로 다투다가 주먹다짐을 하여 포우의 눈덩이에 피멍이 든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에 앙심을 품고 그런 글을 썼다는 설이 있었다. 포우가 사망하기 전 잉글리쉬와 화해를 했다고 하지만 포우의 자제하지 못하는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에세이로 인해 1대 다수의 공방전과 소송전이 뒤따랐고, 특히 자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살포한 하이럼 풀러와 뉴욕 이브닝 밀러의 소유주인 어거스투스 클라센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결국 1년 후 225달러를 받아낸다. 이렇게 문인들의 이전투구가 확산되자 보다 못한 고디스는 11월 호에서 포우의 글을 삭제하고 연재를 중단했다. 그래도 포우의 지명도를 무시할 수 없었던 고디스는 대신 그의 소설 '아몬틸라도의 술통'을 게재함으로써 그의 심기를 달래주었다. 사실 그 소설도 누가 보아도 뉴욕 문인들에 대한 복수를 비유한 내용이었다. 그렇게 한 해 동안 포우는 많은 적을 양산했다. 마치 세상에 분노한 사람처럼 그는 자신의 영혼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의도적이든 야수와 같은 본능적 글쓰기이든 그는 그런 행위에서 어떤 만족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다분히 성격 장애적인 성향이 보이는 자기중심적인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과 척을 지는 행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미치광이라는 비난 밖에 없었다. 이때 쓴 '뉴욕시의 문인들'은 1850년 포우 사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포우는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잠시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뉴욕 외각에 있는 존 밀러의 집으로 혼자 거쳐를 옮겼다. 앞만 보고 치닫는 포우를 보다 못한 치버스가 강력하게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포우는 밀러의 집 앞에 있는 허드슨강에서 보트로 노를 저어 무인도까지 왕복하기도 하고, 강을 따라 무작정 도보 여행을 하면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시간을 갖는 것은 그의 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휴식도 없는 세상과 치열하게 부딪쳤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버지니아의 병세가 악화되자 그해 5월 포담에 있는 별장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연간 100달러라는 적지 않은 임대료를 지불하는 결단이었다. 의사의 왕진비도 상당한 금액이 지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의 폐는 점점 파괴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버지니아와 포우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 포우가 십 대 때 잠시 사랑했던 마리 스타가 양복점을 운영하던 남편 제닝과 함께 자주 방문하여 물심양면으로 어지러운 집안 형편을 도와주었고, 포우의 여동생 로잘린도 와서 며칠 동안 버지니아 옆을 며칠 동안 지켰고, 로웰과 치버스 같은 친구들도 병문안을 왔다. 그리고 당시 주목받는 시인이자 여권신장 운동가인 엘리자베스 스미스와 1년 전 스캔들의 주인공인 오스굿이 포우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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