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리지아
후세의 우리는 포우의 전기 중에서 13살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을 한 사건에 대해 주목한다. 사촌끼리의 근친 혼인은 당시 서구에서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13살이라는 나이는 문제시될 수 있는 요인임이 분명했다. 특히 기독교 원리주의가 팽배한 미국에서는 이런 혼인은 윤리적으로 문제시되는 분위기였다. 당연히 버지니아의 어머니 클램은 포우의 당돌한 요청을 거부했다. 하지만 포우는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문학적 상상력을 총 동원하여 집요하게 애원한 끝에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이에 포우는 발 빠르게 도장을 찍기 위해 1835년 9월 2일 볼티모어 올드 크라이스트 교회에서 요한 존슨 목사의 집전으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만의 비밀결혼이었다. 그리고 9월 22일에 결혼 허가증을 발급받았다. 그 후 회사가 있는 리치먼드로 이사를 갔고, 이 허가증을 가지고 다음 해 5월 16일 정식으로 결혼식을 거행한다.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지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고 버지니아의 피터스버스로 신혼여행까지 갔다. 하지만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포우가 버지니아의 나이를 속였다는 정황이 보인다는 점이다. 결혼의 증인으로 선택된 집주인의 사위가 증인서를 읽었는데, 버지니아의 나이를 21살이라 했고 참석자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어물쩍 넘어 간 것이다. 의도이든 실수이든 그 나이는 포우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는 정황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혼식에 참석한 지인들이 보더라도 버지니아의 나이는 21살이 아니었다. 화장을 하고 외모를 치장했더라도 많아야 실재 나이보다 몇 살 많게 보였지만 증인들은 모른척하고 넘어갔다. 그는 왜 8살이나 속이면서까지 쫓기면서 결혼을 강행한 것일까. 2~3년 늦춘다고 버지니아가 변심할리도 없었다. 활동적이지 못해서 남자를 사귈 성향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포우에게 가스라이팅처럼 정신세계를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딴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결혼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은 포우가 성애욕자가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다. 버지니아가 조숙하고 미치도록 사랑스럽다고 하더라도 그 순진한 여자 아이를 자신의 여자로 만든 것은 현실적으로 납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할 수는 있지만 그런 감정이 최소한 보편적 사회 규범과 이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리고 절제의 미덕도 고려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다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포우의 친구이자 우호적인 평론가인 램버트 윌머의 증언에 의하면, 포우가 메신저 편집자로 있을 때 월급의 상당 부분을 버지니아를 위해 사용하였는데 심지어 피아노까지 사주는 등 삶의 안락함과 사치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포우가 가정교사를 자임하여 대수학과 문학을 가르쳤고 그녀에게 불친절한 언사를 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전한다. 마지막으로 윌머는 이렇게 말했다. 포우는 이상한 방법으로 애정을 표현했다. 나중에 포우의 여성편력을 더 얘기하겠지만 당시에 보인 포우의 여성에 대한 사랑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아무튼 그토록 집착했던 혼인을 성사시켰지만 포우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의 내면은 노도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불안했다. 그는 술에 탐닉하기 시작했고 그 정도가 심하여 근무시간에도 마시기 시작했다. 이에 사장인 화이트가 근무시간에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질타를 했지만 바로 다음날 포우는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오전부터 술 냄새를 풍기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를 발견한 사장은 결국 포우를 해고했다. 포우의 이런 무책임한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포우는 신경정신과적인 치료를 요할 정도로 정신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선척적으로 예민하고 신경증적인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외부 상황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그에 따른 반응도 신경질적이었다. 그런 현상은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돌발적이었던 과거의 부끄러운 사건들이 항상 그를 괴롭히고 있었고,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던 형의 죽음과 앙숙이면서 연민의 화신인 양부 알렌의 죽음,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자 정신적으로 몹시 힘든 상황이었다. 또한 클랩과 버지니아를 자신이 부양해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까지 그를 짓누르면서 그는 정신적으로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들이 뒤엉켜 무언가 절박한 내적 갈등의 요소로 작용했고, 정신병적으로 발전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겹쳐지면서 그를 알코올 세계로 끌어들였다. 술은 그를 편안한 세계로 인도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알코올 의존성이 강한 체질이었다. 포우는 케네디에게 자신의 이런 불안한 심리 상태를 토로하면서 위안을 받으려고 했다. 물론 복직을 염두에 두고 진심 어린 토로를 했는지도 모른다.
케네디의 도움으로 포우는 해고 한 달 만에 다시는 근무시간에 음주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복직했다.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포우는 케네디에서 편지를 썼다. 자신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 도움을 준 당신을 잊을 수 없으며 그 덕분에 건강도 좋아지고, 이제는 내년 연봉도 520달러에서 1000달러로 인상되어 금전적으로도 만족하게 되었고, 이 행복은 당신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전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복직한 포우는 편집자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 시작했다. 1836년 한 해는 정식 결혼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자신의 역량을 알리는 시기였다. 편집 능력은 물론이고 비평과 리뷰도 직접 쓰기고 하고 때로는 자신의 소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올라운드 플레이였다. 특히 그의 작품 비평은 일찍이 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창조적인 상상력이 풍부했으며 유머와 풍자도 겸비하고 있었다. 기존의 비평 방법론을 뛰어넘는 그의 글은 미국 문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작가 개인의 서사에 많은 비중을 두고 평론하던 기존의 방법에서 벗어나 오직 작품 안에서 분석적 방법을 동원한 비평만이 진정한 비평이라고 그는 설파했으며 이는 당시에 센세이셔널 한 평론이었다. 진정한 비평의 역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후대의 평단은 평가한다. 그렇게 소설이나 시 보다도 그의 평론이 더 멀리 앞서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비평은 간지러운 데를 긁어주는 역할도 했지만, 때로는 그 정도가 심하여 당사자의 심기를 거슬리게 해서 의도적인 악평이라고 반격을 당하곤 했다. 비평의 강도가 뼈 때리게 신랄했던 것이다. 이에 정치부 기자이며 나중에 외교관까지 된 소설가 데오도르 페이와 유력한 소설가인 노먼 레슬러는 자신의 작품에 잔인한 비평을 가한 포우를 잊지 않고 있다가 그가 뉴욕에 정착했을 때 단단히 복수를 한다. 당시 기존의 견고한 문학계의 파벌 중 하나를 공격한 포우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연줄 하나 없는 햇병아리가 벌집 쑤시듯이 자신들의 성을 공격하는 행위는 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포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이름과 작품을 알리기에는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성향이 강해 비평 또한 삐딱했지만 호손의 작품에는 호의적이었던 것을 보면 그런 악평은 의도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악명 높은 그의 비평은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으로서 시와 소설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포우의 활약으로 메신저의 부수가 상승하였다. 하지만 사주인 화이트는 포우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저널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지 않았고 견제하는 경향까지 보였다. 이런 화이트의 불분명한 경영 스타일 탓으로 포우는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포우와 화이트는 갈등을 일으켰다. 500부였던 발생 부수를 3,000부 이상 올려놓았지만 그의 급여는 그에 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편집에 대한 권한과 급여 문제는 생각처럼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포우는 친구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일 한 만큼 급여를 많이 받지 못한다. 평판을 얻는 게 전부가 아니다. 문맹이고 저속한 사람을 섬기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는 동안 나의 금전적 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랬다. 평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보다 먹고사는 게 중요했다. 이별은 시간문제였다.
사실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알렌이 생존해 있을 때는 미우나고우나 그래도 마지막으로 돈을 구할 창구는 있었지만 현재는 어느 누구에게도 손을 벌릴 수 없었다. 작품 집필을 하고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서는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돈은 삶의 질을 결정 짓은 절대자였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화이트와 타협을 보지 못한 포우는 1837년 1월 메신저를 퇴사했다. 화이트와 급여 외에도 다른 여러 문제로 갈등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더 넓은 무대에 대한 갈망이 우선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한 달 후 가족을 데리고 뉴욕으로 이사를 갔다. 리치먼드는 인구 2만의 도시였지만 뉴욕은 30만 명이 살고 있는 미국 최대의 도시였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대다수의 물동량이 뉴욕을 통해야 했고, 경제의 중심이었고, 그리고 정책적으로 출판문화를 도시에 접목시키고 있었다. 뉴욕은 인간의 욕망이 집중된 생동감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장모이자 고모인 클램은 이사를 몇 번이나 다니는 불안정한 생활에서도 틈틈이 하숙을 놓으면서 부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포우는 계속 백수생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취업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뉴욕 리뷰라는 잡지사에 거의 취업할 수 있는 상황까지 갔지만 불분명한 이유로 마지막에 취소되고 말았다. 1837년은 유럽에서 불어온 경제 불황의 여파가 무역의 중심 뉴욕을 강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긴축을 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특히 출판문화는 경제적인 등락에 가장 민감한 종목이어서 출판 시장은 침체에 빠져 있었다. 뉴욕은 대도시였기 때문에 낙숫물 효과도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출판업계는 치명적이었다. 이런 추정은 미루어 짐작을 한 것이고, 취업을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정황으로 볼 때 누군가 방해를 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포우는 집필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취업을 못하더라도 집필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뉴욕에 오기 전에 메신저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장편소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를 발표하고, 역시 단편소설 '신비주의자 폴 융'과 '침묵 한 편의 동화'를 뉴욕에서 발표했다. 하지만 과거 노먼 레슬리에 대한 포우의 비평이 빌미가 되어 뉴욕의 비평계로부터 보복성 공격을 받았고, 그런 악의에 찬 비평이 아니더라도 전반적인 뉴욕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작품 자체는 주목할 만 했지만 시대적 상황을 볼 때 아직은 포우의 우군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전업 가로서의 희망도 산산이 부서진 상황에서 더 이상의 뉴욕 생활은 궁핍만 양산할 뿐이었다. 무기력한 일상이 포우의 목을 쥐어왔다. 뉴욕이란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열패감은 참을 수 없었다. 자괴감은 절망을 만드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였다. 그는 뉴욕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한 포우는 텃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제대로 싸움 한번 하지 못한 채 패잔병처럼 뉴욕을 떠났다. 1838년 여름이었다. 뉴욕 생활 1년 반 만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필라델피아로 갔다. 그 도시의 출판 시장은 뉴욕보다 더 컸다. 전반적인 시장 규모는 뉴욕이 더 컸을지 모르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필라델피아가 뉴욕을 앞섰다. 그리고 그곳에는 친구나 지인들도 많았다. 필라델피아에서 그는 1844년까지 살았는데, 한 도시에서 6년 동안 정착한 것은 필라델피아가 유일했고 그것은 그만큼 그의 생활이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필라델피아 시절 포우는 괄목할 만한 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아마도 문학적으로 볼 때 포우의 전생시대였는지 모른다.
자신의 작품을 괄시했던 뉴욕과는 달리 필라델피아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이었다. 포우 자신이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꼽은 소설 '리지아'와 시 '유령의 궁전'을 10달러를 받고 아메리칸 뮤지엄지에 팔았고, 평론과 출판 서평 등을 기고하면서 의미 있는 수입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 5월에 버튼스 젠틀맨스 매거진과 고용 계약을 했다. 주당 10달러에 하루 2시간 근무 조건이었고 표지에 사주인 버튼과 함께 공동 편집인으로 인쇄하는 조건도 첨가했다. 그 근무 조건 중에 하루 2시간 근무를 관철시킨 이유는 작품 생산에 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서였다. 작품에 대한 영감과 열정이 치솟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어셔가의 몰락'과 '윌리엄 윌슨' 같은 주옥같은 소설을 자신이 편집인으로 있는 잡지에 게재한 것이다. 그 외에고 단편 소설, 평론, 서평 등 자신이 쓴 거의 모든 작품을 편집하여 잡지에 실었다. 그렇게 자신이 집필한 다양한 글들과 뛰어난 편집 능력으로 인해 버튼 메거진의 판매 부수가 하루가 다르게 증가되었다. 그리고 케네디가 소개해준 단행물 출판사인 리와 블랜차드의 주선으로 최초의 단편집 '괴기담'을 출간했다. 그동안 여러 저널에 발표한 소설 중에 24편을 엄선하여 편집한 그 작품집은 포우 사후 미국 문학 사상 센셔이션 한 사건이라고 평론가들은 설파한다. 바로 보들레르가 번역한 그 책이었다. 산문시처럼 밀도감 있는 문장으로 펼쳐지는 공포와 환상적인 이야기는 미래의 독자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당시엔 단행본 출간에 대한 수입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당시 무료 증정품으로 20부만 받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잔인한 출판문화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사 자비 출판이 난무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인세는 언감생심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포우는 창작만으로 생계를 꾸밀 능력을 입증하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저작권 개념이 부족한 시절이라 전업 작가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당대 최고의 작가인 영국의 디킨스의 작품도 저작료를 지불하지 않는 해적판으로 돌아다녀 이를 실제 조사하기 위해 당사자가 직접 미국에 찾아와 이에 대한 교화를 했을 정도였다. 작가는 철저한 을의 입장이었다.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청원자에 불과했고, 출판업자는 그 청원을 받아주는 우월한 위치에 존재하는 갑이었다. 그렇게, 영혼의 결정체인 자신의 작품집이 발간되었지만 그 무명작가에게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것은 당시의 관행이었다. 서글픈 출판세계였다. 그래서 포우는 자신의 출판사를 원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가운데, 편집과 집필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매출 증가에 일익을 담당했지만 사주인 버튼과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매출 증가에 따른 급여 인상과 편집 방향의 이견으로 두 사람은 시시때때로 갈등을 빚었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만큼 임금을 받지 못한다고 수시로 불평을 늘어놓았고, 무엇보다 버튼이 자신에 대한 뒷담화 즉 자신의 음주 습관에 대해 악의적으로 퍼트리고 다닌다고 친구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이런 중상모략에 그는 자신은 이미 술을 끊은 지 4년이 되었고, 주량이 약해 많아 마시지도 못하고, 요즘은 사이다만 마신다고 항변했다. 이 정도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격한 충돌로 보인다. 사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부분은 인간관계이다. 그것은 동서고금과 시대를 막론하고 정설이다. 업무에 시달리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사람한테 시달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법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포우의 관대하지 못한 성격은 갈등을 촉발하고 증대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성향은 늘 불협화음을 일으키게 했다. 다분히 트러블 메이커적인 기질이 강했다. 물론 파행의 원인이 그런 포우에게 전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직장에서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상당 부분은 그의 모단 성격 때문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완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오너에게 고개를 숙일 때는 숙일 줄 아는 유연함이 있어야 하지만 포우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아무튼 포우는 다시 1년 만에 버튼스 젠틀멘스 매거진을 사직했다. 사주와의 불화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저널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평생의 꿈이 바로 자신의 이름이 발행인과 편집인으로 인쇄된 정기 간행물이었다. 포우는 사직 후 창간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가칭 펜 메거진에 월간 문학저널 형태였다. 당초 그해 6월 13일 자 필라델피아 신문에 창간 취지의 광고를 실었고, 다음 해 1841년 1월 1일에 창간하기로 목표를 세웠으나 자금 문제로 3월로 연기하였다. 하지만 그것 또한 여의치 않아 창간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모두가 돈 문제였다. 자신의 후원자인 케네디와 요셉 홉킨스 판사 등은 지원에 긍정적이었지만 자신의 출간 취지에 공감하고 자금을 투자할 사람은 생각처럼 많지 않았다. 문학에 관심 있는 지인들에게 출간 취지에 대한 이유와 자신의 능력과 간행물의 장밋빛 전망이 담긴 편지를 보냈으나 그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은행에서도 자신의 신용에 문제가 있어서 대출도 제동이 걸린 상태였다. 그렇게 진행이 정체되어 있을 무렴 조지 그레이엄으로부터 후한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창간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구독자를 5,500부까지 끌어올린 필라델피아 최고의 월간지 그레이엄 메거진 경영자 그레이엄은 당시 자신이 근무하던 젠틀멘스 매거진을 인수한 상태였다.
조지 렉스 그레이엄은 당시 27살의 변호사였다. 포우 보다 나이가 적었지만 사회적으로 전도가 유망한 출판인이기도 했다. 그는 선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편집인으로 재직하다가 앳킨스 케스킷을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정기간행물 출판 사업을 시작했고, 당시 젠틀맨스 매거진도 3500달러에 인수 합병하여 사업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잡지의 콘셉트는 패션, 음악, 판화, 소설, 비평 등 전반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사를 다루었고, 세련되고 현대적인 남녀를 겨냥하는 고급 대중지였다. 그리고 외주 저자에게는 미국 최초로 저작권을 부여하여 출판문화의 개선에 힘을 보탰고 작가들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레이엄은 포우에게 상당한 편집권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일정한 페이지를 할당해 주면서 지성적인 무게감을 담당하게 했다. 대중성을 지향하지만 고품격의 지성도 함께 동행한다는 취지였던 것이다. 이런 많은 재량으로 인해 때로는 너무 과하게 작품 비평을 해서 영원한 아군 제임스 로웰 조차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 포우는 이런 재량권을 활용하여 추리소설의 시작점인 ‘모르그가의 살인’과 ‘소용돌이 속으로’와 그리고 ‘요정의 섬’과 ‘적사병의 가면’ 같은 자신의 작품들을 게재하였고 또한 많은 서평과 평론들을 섰다. 그레이엄은 미국의 전형적인 기독교 정서를 지니고 있는 관용적인 인물이었고 포우와도 평생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포우가 사망한 후 그리스월드라는 인물이 포우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을 때 그 공격을 방어하고 끝까지 포우를 옹호해 주었다.
그레이엄 메거진은 포우의 출중한 편집력이 더해져 구독자수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포우는 문학계에 많은 적을 양산하면서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악명 높은 서평과 평론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인류사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의 추리소설은 가벼운 귀납추론 놀이가 아니라 촘촘하고 밀도감 넘치는 문장과 개연성을 충족하는 플롯은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는 포우에게 있어 글쓰기 생산력이 가장 높은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보다 안정된 직장을 원했다. 마침 그 무렵 1년 전 필라델피아에서 만나 친분을 쌓았던 프레드릭 토마스로부터 편지가 왔다. 예전부터 볼티모어에 있던 클램 집안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그는 몇 년 전 죽은 에드가의 형 헨리와도 어릴 때부터 문학적 공감대를 가지고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아무튼 당시 토마스는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국 재무부에 재직하고 있었다. 편지에서 토마스는 자신은 안정된 공직자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어 만족하고 있으며 더불어 포우에게도 행정부에 지원을 해보라고 권유를 했다. 당시 너새니얼 호손도 보스턴 세관에 근무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었다. 특히 포우가 휘그당 당원이니 당시 대통령 존 타일러가 휘그당의 공개적인 지지 때문에 당선되어서 논공행상 식으로 심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고, 자신은 아직까지 백악관이나 행정부에 힘을 쓸 수 없으나 최대한 돕겠다고 첨가했다. 일설에는 토마스가 대통령의 아들 로버트 타일러와 친분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무튼 토마스의 제안에 귀가 쫑긋한 포우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재무부 소속 세관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마침 하원의원으로 있던 케네디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포우는 채용되지 않았다. 탈락자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왜 채용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합리적 추정이 가능한 것은 당시 대통령은 글쟁이나 먹물들을 선호하지 않았고 더더욱 논공행상에는 거부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그레이엄의 구독자 수는 1년 만에 5,500부에서 37,000부까지 수직 상승을 하고 편집실 직원도 증원을 했다. 하지만 포우는 달갑지 않았다. 매출이 증가하면 이에 상응하여 급여도 증가해야 하지만 그레이엄은 냉정했다. 젠틀멘스 메신저에 있을 때도 이런 문제로 갈등을 야기시켰듯이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마찰이 표면화되었다. 당시 대학교수 연봉이 2,000달러 이상이고, 호손도 하위직 공무원인 데도 1,500달러를 받고 있었는데 자신은 1,000달러도 안 되는 실정이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레이엄은 외부 필진에겐 넉넉한 원고료를 지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근직에게는 상대적으로 야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엄만 부를 축척한다고 포우는 떠들고 다녔다. 이에 의사이자 시인인 포우의 친구 토마스 치버스는 형편없는 저임금을 성토하며 포우는 연봉 10,000달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피력하고 다녔다. 그것뿐만 아니라 편집 방향도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여성의 패션과 사랑 이야기 같은 가벼운 내용에 치우치기 시작했고 더구나 퇴폐적인 삽화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중적인 경향을 넘어 선정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지 않나 하고 걱정한 포우는 그레이엄과 자주 부딪혔다.
하지만 인생은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포우가 이렇게 왕성하게 문학계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버지니아가 각혈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버지니아는 1842년 1월 어느 날 친지들을 모아놓고 하프 연주를 하다가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피를 토한 한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본 포우는 충격을 받았다. 바로 폐렴이 발병한 것이다. 버지니아는 몸이 약해 웬만하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좁고 습하고 쾌적하지 않은 집이었기 때문에 폐렴에 걸릴 최적의 조건이었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포우는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당시의 폐렴은 불치병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땅한 치료제도 없어서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을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포우에게는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 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버지니아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 그는 낙담하고 열패감에 휩싸였다. 버지니아가 누구인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음의 평화라는 것을 느끼게 한 사람이 바로 그녀이지 않는가. 그녀는 영혼의 안식처였다. 불행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은 항상 불안과 분노를 잉태하고 있는 활화산 같은 상태의 연속이었으며,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그런 자신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세상에 버려진 문제아였다. 세상 어디를 가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버지니아는 달랐다. 나이 어린 사촌 여동생은 자신에게 미소를 지으며 하프를 연주해 주었다. 그 미소와 평온한 연주에서 영혼의 휴식처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어도 좋고 연민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이 불합리한 세계는 질식할 것 같은 공기를 강제로 주입시켰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영혼을 정화시키는 신비로운 향을 발산했다. 그녀는 자신의 전부였다. 그녀가 없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얻기 위해 기존의 규범과 싸워서 이겨내지 않았던가. 버지니아가 또다시 각혈을 할 때면 그녀를 더 사랑하고, 절박하게 그녀의 삶에 매달렸다고 그는 치버스에게 토로했다.
버지니아의 병이 호전되지 않자 그의 주벽은 점점 더 심해졌다. 한동안 안 마시던 술에 탐닉하게 되자 창작의욕도 사라지고, 때로는 행방불명되어 며칠 후에 귀가하기도 하고, 결근하는 횟수도 잦아졌다. 이에 회사에서도 빈축을 사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절제한 생활에 빠져 허우적거린 결과 몇 개월 만에 그의 몸과 마음은 피폐해졌다. 정상적으로 직장 생활을 할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조직 생활을 유지할 에너지가 소진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포우는 그레이엄과 편집에 대한 갈등과 개선이 보이지 않는 급여 문제로 인해 사직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참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작정했다. 사실 그레이엄 메신저에 미련이 없었던 것이다. 일설에는 버지니아의 발병과 이에 상심한 포우가 술독에 빠져 살다가 무단으로 몇 주 동안 결근하는 사태가 벌어져 해고를 당했다고 하는데, 이런 스토리는 정적이었던 루퍼스 그리스월드가 쓴 포우의 전기에 나오는 내용이어서 악의적인 서사라는 해석이 분분하다. 포우가 그레이엄 메신저를 퇴사한 후에도 사주인 그레이엄과 평생 동안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을 보면 해고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관계의 갈등 구조는 일방적인 선악의 문제처럼 이분법적으로 단순하지도 않고, 일반화된 관습적 논리도 적용시킬 수 없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루퍼스 그리스월드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가겠다. 그는 포우 생애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오히여 포우 사후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1815년생인 그는 포우의 후임자로 그레이엄 메신저에 입사할 당시 20대 중반의 젊은 평론가이자 편집인이었다. 그와 포우의 관계는 문학계에서 정적이라든지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쑥덕거렸지만, 사실 식자들은 포우 생전 시 두 사람의 관계가 심각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것은 1841년 5월 그리스월드가 필라델피아 데일리 스탠더드지에 근무할 때였다. 당시 그리스월드는 자신이 야심 차게 꾸미고 있던 시선집 ‘미국의 시와 시인’ 목록에 선정할 시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포우의 작품도 포함시키기 위해 그에게 게재할 시를 요구했고 이에 포우는 3편의 시를 보냈다. 그 시선집에는 롱펠로우 4편, 호프만 14편, 존 브레이너드 7편, 리디아시고나 8편 등과 함께 포우의 시 2편도 살짝 얹혀 있었다. 그해 가을 포우는 지인들에게 그리스월드는 고상한 취향과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신사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월드는 당시 평론계에서 한가닥 하고 있던 포우에게 자신의 시선집에 대한 서평을 보스턴 정기간행물에 청탁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포우는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발단이 되었다. 포우의 서평은 ‘우리 문학이 수년 동안 받아온 중요한 가치’라고 칭송하는 등 일반적으로 호의적이었지만, 항상 그렇듯 비판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양념처럼 부정적인 묘사가 약간 첨가되었는데, 대충 보면 선집 선정 시인에 대한 의문 제기, 즉 보수적인 관점에 치우친 선정이 아닐 수 없으며 그리고 뉴잉글랜드 출신 작가들을 선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정도의 내용이었다. 그 정도의 비평은 양념처럼 첨가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불화 원인의 전부라고는 하기엔 너무나 미약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에 포우는 프레드릭 토마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월드가 자신의 시선집에 대한 호의적인 서평을 해주면 포우의 서평이 출판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제의를 한 바, 그것은 일종의 뇌물 성격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냐는 식으로 말이다. 극히 개인적인 험담 수준이었지만, 그리스월드가 나이에 비해 순진하지 않다는 것을 그 당시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포우를 언짢게 한 것은 그리스월드가 자신의 후임으로 그레이엄 메신저에 입사를 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단순히 그가 후임자로 온 것에 대한 불만은 없었지만, 나이도 어린 초짜한테 자신보다 급여를 더 많이 주고 편집 재량권도 더 준 그레이엄에게 심히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가지 문제로 1년 동안 갈등을 빚어왔는데 패를 까고 보니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은밀하게 무언가 결탁을 하고 자신을 몰아내지나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구독자를 30,000명 이상 증가시킨 사람이 누구인데 감히 나에게 이런 모욕을 주는 것인가 하는 노여움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그레이엄에 대한 불쾌감을 친구들에게 매우 완곡하게 표현은 했지만 그리스월드에게도 비판의 칼날이 사뭇 예리했다. 그레이엄이 출판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는 현실을 인식한 처세였는지 모르지만 그리스월드는 만만하게 보기에 충분했는지 모른다. 일례로 포우는 1843년 1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그리스월드의 작품 ‘미국의 시와 시인’에 대한 강연에서 공개적으로 그 작품을 박하게 비평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여러 강연에서 그 작품을 평가절하하였고, 지인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사기꾼’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보다 더 신랄하게 비판을 했다. 특히 뒷담화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비밀은 없는 법이며 더군다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현란하게 혀를 놀리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수많은 설들이 나무하기 마련인데, 그러한 가운데 포우의 뒷담화는 온전하게 비밀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2년 동안 상종을 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포우의 비판에서 피할 수 있었던 그레이엄은 훗날 당시 포우의 강연은 그리스월드가 기억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비판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포우는 1845년 1월에 그리스월드에게 화해의 편지를 보냈고 그에 대한 비판적 강연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월드는 포우의 화해를 받아주지 않았다. 사실 그도 포우 못지않은 독한 혀를 가졌고, 서로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이였다. 포우 생전에도 그를 알고 있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포우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알고 보니 꿍한 성격에 보복 성향이 강했던 것이다. 그런 감정과 더불어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여류 시인 프란시스 오스굿을 사이에 두고 연적 관계를 형성하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아무튼 그리스월드는 포우가 사망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전기를 써서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이 악의적으로 왜곡되어 있었다. 두 사람을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가 그 정도로 적대적이었는지 의의해했고, 그들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대중에겐 그 위대한 소설가가 알코올중독자에 성격파탄자로 인식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미루어 짐작을 해보면 문학계에 적이 많았던 포우의 업보였는지 모른다. 포우의 냉혹한 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납득이 가지 않은 것도 아니다. 어리숙하게도 그런 그리스월드의 감정 상태를 몰랐던 포우는 자신이 사망하기 2년 전 자신의 작품에 대한 대리인으로 그를 선정하여 출판에 관한 모든 것을 일임했는데, 왜 그를 믿었는지 당시에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고 현재까지도 그 사실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다. 그런 불온한 전기는 수십 년 동안 미국을 점령하여 포우를 미치광이로 만들어 놓았고, 또한 프랑스에서도 번역되어 포우의 유령은 유럽에서까지 떠돌아다녔다. 포우 학회에서 그 전기의 왜곡된 내용을 수정하는 작업을 현재까지 해오지만 아직도 희석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한번 퍼진 소문을 다시 회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버지니아의 투병과 빈번한 음주 그리고 그레이엄 메신저의 퇴사 등 삶의 악재들이 동시에 터지는 가운데서도 포우는 마지막 선을 넘지 않고 재기의 몸부림을 쳤다. 회피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퇴사 즈음에 그는 필라델피아에 방문한 디킨스를 그레이엄 편집자 입장에서 두 번씩이나 만나 인터뷰를 빌미로 영국에서 자신의 소설집 출간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런 실현 가능하지 않는 무모한 행위라고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절박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영국에 돌아간 디킨스에게 은근히 연락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것과 연관은 없지만- 그는 다시 잡지사에 이력서를 넣지 않았다. 직장 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르그가의 속편 격인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와 ‘고자질하는 심장’ 같은 소설과 여러 가지 잡스러운 서평 등을 싸구려 잡지사에 기고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한 가운데 그는 토마스 클라크의 후원으로 자신이 구상하던 잡지사 창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잡자사 이름은 ‘스타일러스’로 정하고 평소 자신이 추구한 편집방향을 구체화하는 계획안을 만들었다. 자신의 잡지를 가지고 싶었던 소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1843년 4월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절친 프레드릭 토마스가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관직에 있으면서 알게 된 인맥을 통해 백악관에서 문학에 관한 강연을 기획한 것이었다. 2년 전 포우가 부탁한 인사 청탁 건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토마스가 이번에는 제대로 도와줄 작정으로 이 계획을 추진한 것이었다. 대통령과 면담을 하고 그 앞에서 문학 강연을 했다는 사실은 전국 신문에 실릴 중요한 기사 중에 하나이며 그런 경력은 포우가 추진하는 잡지사 창간에 절대적인 힘을 실어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참에 스타일러스 구독권을 예매하는 방법도 진행할 예정이었다.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포우는 연미복을 입고 워싱톤으로 갔다. 장비빛 미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토마스도 이 행사가 순조롭게 끝나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전날 전야제 형식의 파티에서 기분이 들떠있던 포우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한동안 뜸했던 와인을 조금 마셨는데 취기가 금방 올라왔고, 드디어 그 특유의 주사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토마스가 말릴 틈도 없이 그는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도 모를 망토를 뒤집어쓰고 대통령 흉내를 냈고, 토마스 영 잉글리쉬라는 유명 인사와 언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파티의 분위기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포우에 대한 품위와 신뢰가 폭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토마스를 비룻한 파티 참석자들이 저지를 했지만 한번 발동이 걸린 주사를 막을 장사는 없었다. 결국 감히 백악관에서 행패를 부린 포우는 경호원들에 의해 강제로 파티장에서 쫓겨났고, 그 길로 필라델피아로 돌아오고 말았다. 물론 다음 날 진행 예정인 행사는 전면 취소되었다.
이 사건은 필라델피아 출판계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포우를 싫어했던 출판계 사람들이 혀를 차며 고소하다고 박수를 쳤다. 그리고 포우는 토마스에게 자신의 실수를 구구절절 변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다음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투의 내용이 아니라 현란한 레토릭을 발휘하며 본질을 애매하게 희석시키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그 뻣뻣함이 여지없이 들어내는 내용이었다. 오히려 다시 한번 기회를 만들어주면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대인배답게 그런 포우를 옹호해 주었다. 주사는 있지만 이해를 요하는 수준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포우가 갈망했던 ‘스타일러스’ 창간은 당연히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성공을 거두었다. 사회성이 부족하여 항상 따돌림을 받았지만 소설만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레이엄의 형이 운영하던 잡지사에 단편 추리소설 ‘황금충’을 보내 52달러를 받았지만, 마침 그때 필라델피아 달러 뉴스페이퍼라는 신문사가 공고한 단편소설 현상 공모에서 100달러 상금을 준다는 사실을 접한 후 당초 거래를 파기할 것을 제의했고 다행스럽게도 잡지사는 허락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신문사에 공모했다. 비록 비주류였지만 능력만큼은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가였기 때문에 ‘황금충’은 당선이 되고 100달러 상금도 수령했다. 48달러 때문에 영혼을 판 작가의 이 소설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1843년 6월 21일과 일주일 후 28일 두 번에 나누어 게재가 되었는데 4번이나 인쇄할 정도로 히트를 친 것이다. 이에 필라델피아에서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사인 달러 뉴스페이퍼는 ‘황금충’을 간행물로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세터데이쿠리어 신문에서도 뒤이어 그 소설을 게재했는데 한 작품이 2개 신문사에 연재되는 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었다. 그만큼 독자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해 8월에는 워넛 스트리트 극장에서 각색되어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황금충’이 성공을 거두자 이에 힘입어 그레이엄의 형 조지 그레이엄이 포우의 기존 작품 ‘모르그가의 살인사건’과 ‘소진된 사람’을 ‘황금충’과 묶어 단행본으로 출간을 했으나 재인쇄도 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신문사 연재와 단행본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당시 출판 시장의 한계를 역력히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해를 냉탕과 온탕을 오간 포우는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이 보였다 갑자기 사라지는 이 기괴한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상도 우울하기만 했다. 포우는 윌리엄 엘러리의 시에 대해 악평을 퍼부으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이 비평의 첫 문장만 읽어도 작심하고 악담을 하는 글이라는 것을 인지할 정도였다. 최악의 비평이었다. ‘검은 고양이’의 화자처럼 ‘무고한 사람(동물)을 학대했던 정신적 히스테리와 유사한 가학적 희열’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판 수렁에 빠져 더 깊이 침몰하고 있었다. 자포자기로 세상의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놈에 세상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많은 적을 만들고 있었다. 당시 포우의 절친인 램버트 윌머가 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포우가 어떻게 행세를 했는지 알 수 있다. 포우는 우리 문인들 중에서 이상한 사람이 되었고, 포우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현재 그의 변덕스러움이 고통스럽고, 불쌍한 녀석(poor fellow)... 포우는 여전히 금주하지 않았고, 나는 포우가 도덕적 육체적 지적 파괴를 치닫고 있는 것이 두렵다라고 윌머는 토로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자신이 생산한 많은 적들과의 싸움에 한계를 느낀 포우는 소설가 조지 리파드에게 쓴 편지에서 ‘적들에 대해서, 그 어리석은 사람들을 내버려주십시오. 특히 그가 악당이자 바보인 경우는 적극적으로 그를 죽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자살할 것입니다’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문학적 수사를 동원한 동물적인 적개심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의 6년은 문학인으로서 절정의 시기였다. 소설만 31편을 발표했다. ‘리지아’, ‘어셔가의 몰락’, ‘윌리엄 윌슨’, ‘모르그가의 살인’, ‘황금충’, ‘적사병의 가면’ 등 주옥같은 소설들이 그 도시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월간 저널의 편집자로서 현대적 정기간행물의 효시를 창출했고, 또한 촌철살인의 비평가로서 평론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친구들도 많이 만들었지만 적은 그보다 더 많이 양산했다. 작품 활동에서 대단히 생산적이었다는 것은 고무적이었고 나름 만족했지만 항상 사람이 문제였다. 스캔들을 이겨내는 방법은 무시하는 것이 상책인데 그는 적들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독한 혀는 독한 혀로 맞받아쳤다. 계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모를 혼탁한 문학전쟁은 인신공격으로 이어지면서 포우는 트러블 메이커로서 미국 문단에 자리매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