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호용 Nov 24. 2023

에드가 알렌 포우, 메첸거쉬타인

아웃사이더

3. 메첸거쉬타인

사실 자신의 뜻대로 사관학교에서 퇴학은 당했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준비해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그의 몸을 맡길 곳은 볼티모어에 있는 클램 고모집 밖에 없었다. 그 집에는 과부인 클램 고모와 두 남매와 할머니 그리고 어릴 때 따로 살았던 포우의 형 윌리엄 헨리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더 생활할 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주인은 포우를 거두어주었다. 이때 미래에 포우 아내가 되는 고모의 딸 버지니아는 8살이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나오는 연금으로 겨우 생활하는 형편이었다. 포우 보다 두 살 많은 헨리는 한때는 선원생활도 했지만 당시는 백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아 시를 쓰기도 했고 동생인 포우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미리 얘기하자면 그는 그해 8월에 결핵으로 사망했는데, 설에 의하면 알코올 중독자로서 과음을 일삼은 끝에 24살의 나이에 사망한 것이라고 한다.


무일푼의 젊은 청년 포우는 볼티모어에서 취업 활동을 했지만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먹고사는 것이 막막한 시기였다. 교사 자리나 출판사 편집인 자리를 물색했으나 번번이 물을 먹었던 것이다. 볼티모어는 미국 최초의 증기기관차 선로가 놓인 도시였고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지만 당시 콜레라와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기라 도시 분위기가 흉흉했다고 한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하자 포우는 마지막 수단으로 리치먼드의 알렌에게 간절하게 손을 벌렸다. 절박했고 결사적이었다. 사채업자한테 80달러를 차용했는데 현재 그 채무를 갚지 못해 경찰에 체포되어 있으니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여러 번 보낸 것이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런 반 협박적인 편지를 믿을 리 없었던 알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렇듯 요구액의 일부인 20달러만 보내주었다. 아마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돈을 준 것인지 모른다. 알렌의 입장에서는 거머리 같은 포우를 떨쳐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포우의 집요함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포우의 이런 집요함은 그의 문학의 원동력이었다. 특히 추리소설을 집필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였다.


이제 포우가 가야 할 길은 문학세계라는 것은 확고해졌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문학이 유일했는지 모른다. 문학은 이제 숙명처럼 그의 의지를 끌어당겼다. 블랙홀처럼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로 그는 한발 한발 내딛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의 문학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애호가들이나 하는 일종이 문화생활이었다. 변호사나 의사처럼 어엿한 직업의 일종이 아니었다. 소설가나 시인은 전문직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전부 본업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문학 생태계에서 무일푼이며 문학청년에 불과한 포우가 생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뒷받침 없이 오직 문학적 재능만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는 자신을 믿었다. 그렇게 다락방에 처박혀 단편소설과 시를 쓴 결과, 필라델피아 신문에서 기획한 소설가와 시인의 등용문인 신춘문예 같은 공모에 포우는 5편의 작품을 출품했다. 무엇보다도 1등 상금이 100달러였다. 결과는 아쉽게도 여성작가 델리아 비이컨의 사랑의 순교자에게 1등이 돌아갔지만, 심사위원들은 포우의 단편소설 메첸거슈타인에 주목하여 1832년 1월 14일 자 신문에 그 소설을 게재하도록 도와주었다. 아마도 1등이 여성이 아니었다면 포우가 그 자리에 올랐을 것이란 공감대가 심사위원들에게 형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아쉬움으로 포우의 작품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어떻게 보면 포우에겐 자신의 작품이 기성 언론에 최초로 공개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포우라는 이름이 미약하지만 미국 문학계에 알려지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런 작은 성공은 23살의 포우에게 희망을 주었다. 이전에 있었던 두 번의 시집 출간은 자비 출간이었기 때문에 기성 문학계에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신문에 게재된 소설로 인해 문학계의 첫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 웨스트포인트 선배이면서 당시 볼티모어 주간지에 편집자로 있었던 존 휴이트가 포우의 작품을 리뷰해 주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시인이면서 고전음악 작곡가이기도 하고 언론인이기도 했다. 웨스트포인트 생도 시절 상급 장교와 대결을 벌여 퇴학 당했는데 그것은 외형적으로 포우와 일맥상통하는 사건이었다. 휴이트가 이런 포우의 웨스트포인트 이력을 알고 종족의식이 발동하였는지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포우 문학을 지지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같은 주간지의 편집자였던 램버트 윌머도 포우의 작품에 호위적인 평론을 썼고, 포우의 집을 자주 방문하여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평생지기가 되었다. 포우 사후 그의 전기에 사용할 내용 중에 상당 부분이 윌머의 기억에서 나왔다고 한다. 특히 포우의 볼티모어 시절의 사적인 부분은 그의 기억에 많이 의존했다고 한다.


아무튼 문학계에 첫발을 내딛은 포우는 이에 힘입어 단편소설과 시를 쓰는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했다. 경제적으로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백수로 고모 클랩 집에 얹혀 살면서도 조증 환자처럼 무섭게 펜을 휘갈겼다. 예술가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어떤 시점에서 나타나는 바로 이런 폭발적인 작품 생산력이다. 미친 듯이 상상력과 영감을 발산하는 특정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무능력에 절망하기도 했지만 그런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게 절간에 들어가 고시 공부를 하고 하산한 것처럼, 그는 1년 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한 채 공들여 생산한 따끈한 작품을 들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1개의 단편소설을 묶어 '열한 개의 아라베스크 한 이야기'라고 제목까지 붙인 소설집을 장문의 편지와 함께 뉴잉글랜드 메거진의 편집자에게 보냈다. 하지만 소설집의 제목처럼 이상하고 특별한 이야기는 작가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편집자를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퇴짜를 맞았다. 소설의 내용도 기이했지만 전반적으로 사변적이고 습작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몇 주 후에 웨스트포인트 선배 휴이트가 편집자로 있던 볼티모어 주간지에서 문학작품 공모 광고가 나왔다. 소설 부문 1등은 50달러, 시 부문은 1등은 25달러였다. 포우는 단편소설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와 '에피마네스', '소용돌이 속으로' 그리고 시 '폴리오 클럽 이야기'와 '콜로세움'을 응모했다. 심사위원은 변호사인 존 케네디, 역시 변호사이며 발명가이기도 한 존 라트로브, 그리고 의사인 제임스 밀러 등이었다. 그들은 전문직을 가지고 있는 문학인으로서 문학계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인사들이었다. 이 공모에서 포우의 단편소설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가 당당히 1등으로 당선되어 10월 19일에 주간지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함께 응모한 시 '콜로세움'도 일주일 후에 실렸는데, 소설과 시를 동시에 당선시킬 수 없는 규정에 따라 아쉽게 '1등을 놓친  '콜로세움'을 당선 유무와는 상관없이 작품의 우수성만 보고 게재해 준 것이었다. 이 문학작품 공모는 대체적으로 포우에게 우호적이었다. 포우를 위한 공모전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공모전에서 존 케네디를 만난 것은 포우에겐 대단한 행운이었다. 케네디는 당시 38살의 변호사이면서 정치가이기도 한 명망 있는 인사였고 훗날 장관까지 지냈다. 심사위원을 하면서 처음 포우의 작품을 접한 케네디는 그의 그로데스크 한 작품 성향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어둡고 컬트적인 스토리는 그리스의 비극처럼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믿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그리고 케네디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포우의 후견자를 자임하고 나섰다.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범상치 않은 포우의 개인사와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결과 그의 작품에서 어떤 비범함을 발견한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개념이 그의 의중에 내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포우와 진심으로 우정을 나누며 현실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은 대단한 포용력과 인내심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누군가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절망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다. 포우 사후 케네디는 이렇게 회고한다. 포우는 괴팍하고 불평이 많고 변덕스럽지만 하지만 편집자로서의 능력을 탁월했다. 객관적이면서 정확한 안목이었다. 포우의 성격은 독특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출판 편집 능력만큼은 미국 출판업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정도로 탁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 문단에 등단했다고 해서 포우의 형편이 더 좋아지지는 않았다. 고모 집이 거실과 주방, 식당이 달린 2층 목조 건물로 이사를 가기는 했지만 포우가 경제적으로 기여한 것은 미미했다. 아직도 할머니에게 나오는 연간 240달러의 연금이 생활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처지였다. 알렌에게 경제적 지원을 구하는 편지를 썼지만 응답이 없었고 그 무렵부터 더 이상 알렌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 척박한 문학계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이제 문학계 사람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것과 더불어 자신의 주위에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도 그를 고무시켰다.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시작점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1년 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던 알렌이 투병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1834년 3월이었다. 알렌의 병세는 치명적이라고 했다. 포우는 잠시 망설였지만 리치먼드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묘한 감정이 그의 내면을 어지럽게 했다. 어릴 때부터 겪어 왔던 알렌과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결코 한시도 좋았던 기억이 없었지만 그래도 애증의 경계선 어디에선가 연민이 아른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복잡한 감정 사이에서도 실리적인 것도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알렌의 많은 재산 중에 일부는 자신에게 상속되리라는 희망도 없지 않았다. 일말의 마지막 희망이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알렌의 집에 들어선 포우는 그의 부인 루이스 알렌이 막아섰지만 그녀를 제치고 익숙한 알렌의 침실로 찾아갔다. 집 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방 중에서 알렌이 누워 있는 침실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다. 침대가 꺼질 듯이 누워있던 초췌한 노인이 포우를 향해 눈을 천천히 뜨고 있었다. 냉정하고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삶의 마지막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쪼그라든 노인이 포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시선과 마주치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알렌은 그가 포우라는 사실을 인지했고 잠시 후 경련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이내 벌떡 일어나 침대 옆에 있던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지팡이를 허공에 찌르며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문 밖에 있던 루이스가 들어와 포우를 밖으로 밀쳐냈고 곧이어 하인들도 달려들었다. 포우도 당황했다. 알렌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포우는 그렇게 알렌의 집에서 쫓겨났다. 발길을 돌린 것이 아니라 쫓겨난 것이었다.


그 후, 20여 일이 지난 3월 27일 알렌은 영원히 눈을 감았다. 물론 상속에 관한 유언장에는 포우의 이름은 없었다. 법적으로 상속을 받을 자격이 되었지만 알렌의 모든 유산은 재혼녀의 세 자녀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포우는 상속에 대한 부당함을 법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렌 사후 그의 동업자인 토마스 엘리스의 증언에 의하면, 재혼녀 루이스 알렌이 자신에게 말하기를 알렌은 평소에 포우는 배은망덕하고 기만적인 행동을 일삼았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포우가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가 올 때마다 포우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아내에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알렌이 돈을 보내주었지만 마음에서 그를 추방했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알렌의 입장에서는 포우라는 인간에 대해 불신과 미움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밖에 논할 수 없다. 정식으로 입양을 시키지 않은 형식적인 관계로 인해 부자간의 문제를 야기시킨 책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렌에게서는 그런 관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갈등과 불신의 원인은 배은망덕 한 포우놈 때문이라고 확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외부에서 알지 못하는 두 사람 만의 비밀스러운 감정이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그들만의 감정 말이다. 사람의 관계는 정말 알 수 없다. 당사자끼리도 알지 못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존 케네디는 포우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을 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포우의 청탁으로 공립학교 교사 자리를 여기저기 알아보기도 했는데 자격이 충족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몹시 실망하기도 했다. 버지니아 대학 자퇴, 웨스트포인트 퇴학 등 학위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대학에서 1학년도 마치지 못한 미미한 학력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그런 과정에서 보여준 포우의 성격적 결함은 더더욱 교육자로서 자질에 적합하지 않은 요소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포우가 생활고에 시달릴 때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보수적인 주류 문학계에 소개를 시키면서 인지도를 높여주려고 노력했으며, 예민한 포우가 정신적으로 힘들어할 때도 멘토 역할을 하며 길을 잃지 않게 했다. 그는 1835년 봄부터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 토마스 화이트가 운영하던 남부문예메신저에 단편소설을 게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잡지는 매월 편당 5달러씩 주면서 포우의 소설 '베레니스'와 '모렐라'와 그리고 '페스트 왕' 등 많은 작품을 실었고, 그 외에도 시와 소설에 대한 비평 기사와 저널리즘에 대한 많은 기사도 지면을 할애해 주었다. 특히 저널리즘에 대해서는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토마스 화이트는 몇 개월 후 포우를 정식으로 메신저의 편집자로 채용한다. 연봉은 520달러였다.


이제 포우는 꿈에 그리던 잡지사의 편집자가 된 것이다. 그만한 연봉이면 풍족하지 못하지만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마침 그해 여름 할머니가 사망하여 연금이 끊어진 상황이었는데 포우의 취직은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이제는 포우가 경제적으로 책임을 지는 실질적인 가장이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가족은 고모와 그의 딸 버지니아 밖에 없었다. 특히 포우는 13살의 버지니아에게 많은 교육비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버지니아와 사고를 치기 위해 발칙한 행동을 하기에 이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드가 알렌 포우, 태멀레인과 그 밖의 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