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우가 성장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그의 인생은 양아버지 알렌과의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알렌을 논하지 않고 포우의 청춘 시절을 얘기할 수 없다. 알렌과 포우는 양자와 양부 사이이면서 극단적인 애증으로 점철된 사이였다. 뼛속 깊이 상인이었던 존 알렌은 아내 프랜시스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는데 마침 지인의 소개로 2살짜리 에드가 포우를 입양받는다. 포우의 친부모는 주로 셰익스피어 작품을 연기하는 무대배우였다. 친모 엘리자베스 홉킨스는 포우를 낳고 2년 후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아버지 데이비드 포우도 3일 후 역시 피를 토하며 아내의 뒤를 따라갔다. 졸지에 포우는 형 헨리와 여동생 로살리에와 함께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 삼 남매는 각자 새로운 부모를 찾아 생이별해야만 했다. 형 헨리는 당시 이미 볼티모어에 있는 포우 집안 친지 집에 맡겨져 있었고, 리치먼드에 살던 포우와 로살리는 각자 리치먼드에 사는 존 알렌과 윌리엄 맥킨지 집으로 입양되었다. 당시 리치먼드 극장에서 주지사를 포함해 72명이 사망하는 대형 화재사고가 일어났는데 그 사망자들의 자식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두고 고민하던 주정부는 그들을 입양 보내는 것으로 결정을 했고, 그에 따라 포우와 로살리에도 얼덜결에 그 부류에 편승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늘이 점지하여 포우를 입양한 알렌은 왠지 모르지만 그를 정식으로 입양을 시키지 않고 애매모호한 상태로 두었다. 호적에 등재를 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름 중간에 알렌을 넣어 포우의 풀네임이 에드가 알렌 포우가 되었다. 추정해 보면, 이런 느슨한 부자 관계를 만든 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알렌의 의중 때문인데, 남을 믿지 못하는 상인기질로 무장한 그는 자신의 재산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포우에게 맡길 수 없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20년 후 그가 사망할 때 포우에게 상속을 한 푼도 하지 않는 유언장을 남긴 것을 보면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돈에 대해서는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알렌은 담배 사업을 하기 위해 1815년 가족을 데리고 리치먼드를 떠나 영국 런던으로 떠난다. 포우가 6살 때였다. 처음엔 런던에서 살았지만 인근 도시 첼시에서도 살았고 마지막에는 사업 관계로 스코틀랜드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알렌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포우를 가능하면 질 좋은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했다.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에 장차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포우는 알렌의 적극적인 지원 덕에 좋은 학교에서 정통 영국식 영어를 배웠고 라틴어도 습득했으며 미국인으로서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힐 수 있었다. 그런 계기로 영국과 유럽의 문학작품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포우는 훗날 미국이라는 변방국의 핸디캡을 깨트리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물론 당시 신생국의 많은 시민들이 영국에 유학을 가서 선진 문물을 배워왔지만, 예민하고 호기심 많은 포우에게는 누구보다 남다른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축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례로 그의 소설을 보면, 최초의 소설 '메첸거슈타인'과 포우가 가장 사랑했던 '리지아', '윌리엄 윌슨' 그리고 탐정 뒤팽이 등장하는 3개의 추리소설 등 많은 소설들의 배경이 영국과 프랑스 같은 유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미국이라는 공간은 포우가 상상력을 발현하기엔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생인 포우는 공부도 잘하고 총명하고 특별히 말썽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알렌은 용돈도 풍족하게 주며 그를 애지중지했다.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자 반항적인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 기록에 의해도 포우는 총명했지만 고집이 세고 버릇이 없는 아이였다. 고학년에 올라갔을 때는 가정교육이 안 되어 싸가지가 없는 것 같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학교의 기록을 알렌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렌의 입장에서는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총명하지만 싸가지가 없는 포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그놈의 포우 자식. 정확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하더라도 아버지의 이런 감정은 보편적으로 폭력적인 행위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더구나 알렌은 권위적이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길들이려는 아버지와 그것을 거부하는 어린 아들의 격한 대립은 결국 좋은 감정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마찬가지이다. 시간이 갈수록 성격의 틀이 잡혀가는 포우를 보면서 알렌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그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알렌은 영국에서 실패를 맛보고 5년 만에 빈털터리가 되어 리치먼드로 돌아왔다. 하지만 리치먼드의 사정도 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업은 지지부진하여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결국 4년 후 사업을 접게 된다. 그렇다고 거리에 내몰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돈 많은 친지들이 주위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렇게 가정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에서 포우는 요셉 헨리 클라크 중등학교에 다녔다. 영국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포우는 학교에서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포우는 영국에서 배웠던 라틴어로 키케로의 연설문과 호메로스의 작품을 학우들 앞에서 읽어주었고, 영국의 오리지널 언어와 고급 수학을 뽐냈으며, 토론 능력과 풍자적인 표현 능력도 탁월하여 동급생을 압도할 정도였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변방인 리치먼드에서 이런 학생이 나타났다는 것은 별종 취급을 받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만하지 않은 포우는 누구보다 학교생활에 충실하여 웅변과 권투를 배우기도 하고, 제임스 강에서 6마일이나 수영할 정도로 수영 실력을 배양시켰다고 한다.
평범하고 밝은 중등학교 생활을 마감하고 1826년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포우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마침 전 해에 알렌은 삼촌으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아 한순간에 부자가 되어 포우를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포우는 미국의 세 번째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이 자신의 고향 버지니아 샤롯츠빌에 설립한 버지니아 대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버지니아 대학 학적에 의하면 고대 언어학과 현대 언어학 강의에 등록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학교가 리치먼드에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포우는 기숙을 해야만 했다. 미국 독립의 영웅이면서 대통령까지 지낸 위대한 인물이 설립한 대학교이기 때문에 어느 대학보다도 학칙이 이 엄했고 보수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총기휴대와 도박 금지는 당연하지만 술 담배도 금지할 정도로 규율이 엄격했다. 하지만 그맘때의 청춘들이 그렇듯 대부분의 학생들은 할 것은 다하면서 1학년을 보냈다고 한다. 물론 포우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생에서 가장 천방지축으로 뛰놀 시기이지 않는가. 더군다나 처음 집을 떠나 기숙생활을 한다면 그 정도는 더욱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로부터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은 대학교가 아무리 보수적이라고 해도 그것을 극복하고도 남을 정도로 발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포우 같은 반항기 많은 청년은 그 정도가 심각할 것이다.
그렇게 대학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알렌에게서 벗어나 해방감을 만끽하기도 전에 포우는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알렌으로부터 기숙사비와 생활비가 왔지만 항상 돈이 부족해 포우는 수시로 알렌에게 편지를 썼다. 그렇다고 알렌은 포우가 요구한 만큼 돈을 보내지 않고 최소한의 의식주만 해결할 정도의 돈만 보냈다. 술과 담배를 살 돈도 없을 정도였다. 동기들에게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일 눈치를 보며 술을 얻어마셨고, 급기야 술김에 돈을 빌려 도박을 하기에 이르렀다. 술은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사실은 만고의 법칙이다. 삶의 질을 보다 높이기 위해 도박을 해야 한다는 논리는 궤변에 불과하지만 어린 포우는 그런 논리를 합리화시키기에 바빴다. 당시 알렌은 상속받은 재산을 발판으로 사업을 확장시켜 호황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버지니아에서는 알만 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유지였다. 그런 배경을 미끼로 포우는 사채까지 쓰면서 도박 자금을 만들었다. 포우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빚은 결국 알렌이 알게 되었다. 빚 독촉을 받은 포우는 견디지 못하고 알렌에게 사실을 밝히고 갚아줄 것을 청원했던 것이다. 생활비를 적절하게 보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도박을 하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책임도 없는 것이 아니니 탕감해 줄 의무가 있다는 논리를 앞세운 편지를 보냈지만 알렌이 그런 포우의 논리를 받아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수습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식한 포우는 결국 주변 정리도 하지 않고 야반도주를 했다. 학교 기록에는 자퇴로 되어 있지만 도박 빚 때문에 도망을 쳤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물론 리치먼드 집으로 가지 않고 무작정 충동적으로 보스턴으로 갔다. 보스턴은 포우가 태어난 곳이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도시였다. 포우와 관계된 친인척들은 거의가 리치먼드와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었다. 아무튼 가출과 자퇴가 동시에 이루어진 이 사건은 알렌과 지울 수 없는 관계를 낳게 했다.
알렌은 상인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일상에서도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어서 허튼 데 돈을 쓰지 않았고, 포우에게 보낸 몇 센트의 우편 요금도 장부에 기록할 만큼 꼼꼼했다. 그렇게 수전노와 같은 알렌은 포우에게 보내는 학비에 집착하여 자신이 계산한 이상의 금액은 절대 보내지 않았다. 검소하게 생활하면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름 계산했는데, 대학교 신입생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우는 양자였다. 호적에 올린 입양자가 아닌 애매모호한 양자 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지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계산에 밝은 알렌이지 않는가. 더구나 두 살 때부터 보아온 포우는 살갑지도 않고 투정을 부리기 일쑤였다. 반항기 많은 포우에게 정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런 포우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고, 어떤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성질이 고약한 놈이라고 완곡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사실 포우도 사춘기 무렵부터 알렌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한다. 이런 성격적 갈등은 사실 관계와는 달리 두 사람의 관계를 점점 고립시켰다. 두 사람의 관계가 개선될 수 없었던 것은 서로 간의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시키는 과정에서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넘나들기 마련이고, 알렌은 끝없이 변명하는 이런 포우를 믿을 수 없는 인간으로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그리고 포우도 자신을 양자로서 최소한의 이해도 구하지 못하고 불신만 하는 알렌을 돈만 아는 냉혹한 수전노로 인식했다. 사람의 관계를 몇 개의 문장으로 결정지을 수는 없지만, 표면화된 두 사람의 갈등은 평범하지 않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7년 후 알렌이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포우는 끊임없이 알렌에게 금전적 도움을 청하고, 그런 청을 때론 들어주고 때론 거부하는 알렌을 볼 수 있다. 얼굴도 안 볼 것처럼 돌아섰다가도 아쉬운 게 있으면 돌아서서 도움을 청하는 포우, 알렌 보다도 이런 포우의 모습은 이해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문학은 훌륭하지만 포우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모습인지 그 깊이를 헤아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때로는 냉정하고 이성정인 뒤팽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자질하는 심장의 나'처럼 보이기도 하고.
리치먼드에서 보스턴은 먼 거리이다. 워싱턴과 뉴욕을 지나 400km를 더 가야 도착할 수 있는 북쪽의 도시이다. 아마도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도합 1000km가 넘는 보스턴까지 가기 위해서 무일푼의 포우는 눈물겨운 모험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미루어 짐작하더라도 그 여행은 혹독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거지가 되어 보스턴에 도착한 포우는 상점 점원과 조그만 지역 신문사의 기자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포우는 그동안 써두었던 시를 모아 시집을 낼 작정을 한다. 보스턴에 도착한 1개월이 지날 무렵이었다. 당시 보스턴은 출판 인쇄의 메카여서 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포우는 신문사에 다니면서 알게 된 칼빈 토마스에게 시집 인쇄를 의뢰했다. 그는 포우와 동갑내기로서 소규모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출판사를 통한 출간은 언감생심이었기 때문에 조악하지만 어설프게 교정을 보고 자비로 발간한 것이었다. 돈이 많지 않아 50부만 인쇄한 그 첫 시집의 제목은 '타멜레인과 기타 시(Tamerlane and Other Poems)'였다. 연고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먹고살기도 힘든 판국에 돈을 모아 자비로 시집을 출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절박하게 했을까. 자신의 인생 항로를 결정짓기 위한 나와의 약속이나 결심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첫 번째 족적을 세상에 남기고 싶은 어떤 의지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는 시인이다라고 선포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포우는 출간을 보지 못하고 1847년 5월 미 육군에 입대했다. 생활고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시집은 2개월 후, 7월에야 세상에 나왔다. 물론 40페이지짜리 허접한 그 시집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인이 되는 것도 중요했지만 우선은 민생고를 해결해야만 했다. 생면부지의 도시 보스턴에서 홀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부둣가의 막일꾼으로 산다면 기본적으로 먹고사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신체 조건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없었다. 그는 절박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군 입대였다. 그것은 알렌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군대에서는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고 약간의 월급도 받을 수 있었다. 알렌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홀로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어린 포우를 지배했는지 모른다. 친자식이라면 설령 불성실한 행동을 했더라도 용서하고 최소한 내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자신은 결국 양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정리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양부에게 극도의 반감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고아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인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현실인식이 지적 자만이 한창 고양되어 있던 그의 의식 세계에 고착되었는지 모른다. 그 실존적 고독이 그의 삶을 결정하는 모태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포우는 이름과 나이를 속이고 육군에 입대를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 그의 나이가 입대 연령 커트라인에 걸리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경우는 법적인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입대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우는 겁도 없이 입대 신청서를 위조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론 미 육군의 허술한 시스템을 뚫고 포우는 5년 복무 조건에 사인을 한 후 입대에 성공했다. 인생에서 한번 쓴맛을 본 탓인지 그는 군생활에 적응을 잘하여 훈련 성적이 우수했다고 한다. 대학시절 보여주었던 충동적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 문화 탓도 있지만 그의 군 기록부에는 일탈이라고 보이는 내용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착실하게 군 생활에 흡수되어 갈 즈음에 그는 조기 제대를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입대 후 2년이 좀 안 되는 1829년으로 넘어갈 무렵, 그는 웨스트포인트에 지원할 목적으로 자원 제대를 결심한 것이었다. 자원 제대라니, 입대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제대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이런 막되 먹은 인간이 어디 있는가. 이런 선택에 대해 포우 자신이 설명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군대라는 문화를 경험해 본 결과 직업군인이 되는 것도 괜찮은 미래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군대에 봉직하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삶이라고 자신과 타협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하게 보다 더 나은 삶의 질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기왕이면 군 장교가 되는 것이 사병보다는 확실한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는 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화로운 시대였기 때문에 사관학교 교육은 훈련이나 병과 교육보다도 공학 같은 과목에 비중을 더 많이 두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계획을 세운 포우는 중대장한테 자신의 실재 이력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 조기 재대를 청원했다. 자신이 왜 군대에 올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와 그리고 제대를 허락해 주면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착실하게 봉직하겠노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던 것이다. 국가 조직이 한 개인의 치부에 놀아날 수 없는 법이다. 특히 군대라는 조직은 더욱 엄하여 만기 전역이 원칙이다. 하지만 포우 특유의 구구절절한 소피스트적인 논리 전개는 중대장을 현혹시켰다. 이에 중대장은 양부의 보증이 있다면 조기 제대를 승인해 줄 수 있다는 조건을 걸었다. 결국은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알렌과 우선적으로 화해를 해야만 했다. 중대장도 평상시 포우의 품행과 인간됨을 호의적으로 보아온 터라 그를 도와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았다. 포우는 그 후 내키지 않았지만 알렌에게 버지니아 대학시절에 저질렀던 자신의 악행에 대해 반성하고 용서해 줄 것을 간원하는 편지를 두 번 보냈다. 알렌의 답장 편지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포우의 의도대로 진행된 것을 보면 양아들의 눈물겨운 간청이 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즈음에 포우의 양모 프란시스 알렌이 사망하는 부고가 날아와 휴가를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례식 다음날 리치먼드 알렌의 집에 도착한 포우는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일시적으로 화해 무드에 접어들었다. 그래도 알렌과 달리 친엄마처럼 자신을 돌보아주던 프란시스의 죽음은 포우에게 또 다른 아픔을 주었다. 알렌의 권위가 강하지 않았다면 프란시스는 포우에게 보다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라고 훗날 포우가 밝히기도 했다. 프란시스도 알렌이란 독재자의 피해자였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1829년 4월, 자신의 뜻대로 제대 하는 데 성공한 포우는 볼티모어로 가서 넉넉하지 않은 고모 마리아 클램의 집에 잠시 의탁하고 착실하게 생활했다. 육군사관학교 입학에 필요한 양부의 동의서를 받아내기 위해 조신 있게 행동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 입학 준비를 하면서 군 생활 할 때 썼던 시와 그전 보스턴 시절 출간했던 시집에 있던 시들을 모아 시집 '알 아라프, 테멀레인과 소시들'을 출간하는 데 성공했다. 포우는 그 시집을 출간하기 위해 버지니아 대학 총장을 집요하게 설득해 추천서를 받아냈고, 자신의 이력서에서 군 생활을 삭제하고 대신 유럽 여행을 했다는 거짓 편지를 출판사에 보내 겨우 시집을 출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버지니아 총장의 추천서도 눈에 띄는 항목이지만 무엇보다도 유럽 여행이란 이력은 출판사의 편집자 눈에 훅 들어왔을 것이다. 하긴 영국에서 5년 동안 살았기 때문에 전혀 뜬금없는 거짓은 아니었다. 그리고 시 지망생에 불과한 햇병아리 포우를 문단에서 인지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정식으로 데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짜 이력서 탓도 있지만 우선적으로 그의 시작 능력이 우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추천서나 유럽 여행은 형식적 것에 불과했고 작품 자체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막간을 이용해 시인으로 데뷔도 하고, 입 단속하며 조신하게 입학 공부를 한 결과 알렌의 동의서를 받아내어 다음 해 7월 포우는 마침내 육군사관학교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그 학교는 영국과의 독립전쟁 후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프랑스의 공병대에 영향을 받아 설립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초 프랑스가 유럽을 제패하게 된 원인 중에 하나가 육군사관학교였는데, 그 사관학교에서 주로 교육한 과목은 공학이었고 그중에서도 토목공학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교량과 길을 닦는 토목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이다. 특히 포병 장교 출신인 나폴레옹은 공병장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 유럽 최고의 육군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 프랑스군의 지원으로 설립한 웨스트포인트도 포우가 입학할 당시에도 공병 장교 양성에 주력했다. 미국 최초의 공과대학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전투병과 장교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남북전쟁 무렵이었다. 따라서 학비는 전액 면제가 아니라 일정 부분은 자비로 납부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관학교와는 개념이 다른 초창기 미국식 사관학교 정책이었다.
포우가 버지니아 대학에 다닐 때 학비를 미급하게 받아 결국 사달이 났던 것처럼, 알렌은 당시에도 그런 패턴을 보여주었다. 포우가 육사에 입학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어서 보증도 서주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상하게도 경제적인 지원은 소극적이었다. 알렌이 학비에 대한 문제를 입학할 때 포우와 어느 정도 소통을 했는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얼마 되지 않는 학비 보조 문제로 또다시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포우는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는 인색한 알렌에게 당신은 거지처럼 나를 웨스트포인트에 보냈다고 편지를 썼다. 알렌의 심중을 이해할 수 없었던 포우는 반복되는 알렌의 이런 행동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색이 미국 육군 장교를 양성하는 최고의 사관학교에 다니는 자신이 아무리 양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자랑할 만도 한데 오히려 홀대를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불신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불신을 확대 재생산하게 된 계기는 알렌이 재혼한 후 혼외정사로 낳은 자식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상속하는 유언장을 썼기 때문이기도 했다. 포우에게는 한 푼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중을 보인 것이었다. 이렇게 관계가 악화되자 포우는 더 이상 학교생활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다시 자퇴를 결심한다. 1학년도 채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학칙 상 자퇴는 허락되지 않았다. 국가에서 많은 부분의 학비를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니기 싫다고 자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버지니아 대학에서는 도망쳐도 법적인 구속력이 없었지만 사관학교는 달랐다. 무엇보다 사관학교 생도들도 군법에 적용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설 포우가 아니었다. 그는 퇴학을 당하기 위해 계책을 꾸몄다. 매일 실시되는 열병식이나 점호에 참석하지 않았고, 교회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으며, 수업 결석에 질책하는 교수나 학교 당국에 반항하는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1831년 1월, 입학 후 6개월 정도 지날 무렵 드디어 군사재판이 열렸다. 직무태만과 명령불복종 등의 죄목으로 열린 재판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해 3월 퇴학 처분을 받고 학교를 떠났다. 포우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강력하게 변호했는데 그것은 주도면밀한 연기에 불과했다. 세상의 법칙을 무력화하는 포우의 이런 집요함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이방인의 특징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아무튼, 그리고 그런 짧은 사관학교 생활에서 포우는 동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포우 특유의 현실 비판적 풍자를 좋아했고 특히 그의 시에 대해서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한창 지적으로 성장할 나이인 그들에겐 기독교적 도덕성에 입각한 서정적인 시에 익숙해 있던 문화 환경에서 포우의 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시였던 것이다. 그렇게 포우의 시에 공감대를 형성한 동기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포우가 당시 썼던 시와 1~2번째 시집에 실렸던 시들을 추려 시집 출판을 주도했다. 그 시집의 제목이 'Poems'였다. 하지만 포우는 자신이 퇴학당하고 한 달이 지난 후에 그 시집을 받아 볼 수 있었다. 그 시집의 서문에서 포우는 이미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롱펠로우를 형이상학적 시인이라고 비평함으로써 문학 평론가로서의 끼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