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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Nov 10. 2023

에드가 알렌 포우, 그로데스크와 아라베스크...

아웃사이더

1. 그로데스크와 아라베스크


20대에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보들레르는 어느 날 파리 뒷골목 허름한 카페에서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던 이름 모를 어떤 잡지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포우의 작품을 접하고 바오로의 회심처럼 예술적 계시를 받는다. 보들레르의 회고에 의하면 1846년 혹은 1847년이라고 한다. 포우의 어떤 작품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산문이나 비평문 같은 짧은 글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포우의 작품에 매료된 시인은 파리에 살던 미국인을 끈질기게 설득해 미국에 있는 포우의 작품 텍스트를 어렵게 구한 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할 정도로 능통했다고 한다. 그리고 1848년 7월 정기간행물 '사상의 자유'에 투고하여 발표한다. 그 작품이 바로 '최면의 계시'로서 포우가 틈틈이 써오던 산문의 일부였는데 완성작은 1849년에 출간된다.


그리고 탕아 기질이 다분했던 보들레르는 유산을 전부 탕진하고 어머니와 격한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로부터 포우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 몇 년 전 자신이 번역한 '최면의 계시'의 원작자였다. 삶이 궁핍하고 정신적으로도 황폐해 있던 보들레르는 다시 포우에게 관심이 쏠렸고 그에 대한 정보를 미국인에게 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850년에 그리스월드가 쓴 포우의 평전 텍스트를 구한 보들레르는 1852년 포우에 대한 장문의 회고록을 쓴다. 보들레르가 그 평전을 탐독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은 포우라는 인간과 삶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전혀 딴판이었다는 것이었으며, 그 충격적 사실은 그를 포우교의 광신자로 만들었다. 그리스월드 평전이 물론 편향되고 왜곡된 부분이 많아 힐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출간 시기가 포우 사후 1년 정도 지난 후였기 때문에 펙트를 전부 변질시킬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 회고록을 발표한 후부터 보들레르는 포우의 거의 모든 소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1852년부터 1865년까지 모두가 거들떠보지 않던 변방의 무명작가 작품을 주석까지 달며 미친 듯이 번역한 것은 문화 대국의 예술가로서 쉽지 않은 전환적 발상이었다. 아마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모르그가의 살인, 소용돌이 속으로, 리지아, 황금풍뎅이 등이 실린 단편소설집 '특별한 이야기'를 필두로 포우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아서 고든 핍의 모험'과 1840년에 단행본으로 발간한 2권의 단편소설집 '그로데스크와 아라베스크 이야기'  등의 소설과 우주의 법칙을 설명한 산문시 '유레카'와 그리고 여러 에세이 형식의 작품들을 번역한 것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평론까지 썼다. 사실 1857년 악명이 자자 했던 문제의 시집 '악의 꽃'의 일부가 삭제되는 수모를 겪으며 어렵게  발표되었지만, 그의 집필 활동의 대부분은 포우의 작품 번역이었다. 포우 작품을 번역하면서 그의 정상적이지 않는 인생을 짚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 영향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각성 확장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빅토르 위고가 말했듯 '예술에 새로운 전율을 가져다주는' 그런 기괴한 예술 작업은 프랑스의 상징주의를 배태하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상징주의의 계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현재까지 없다. 보들레르를 스승으로 모시던 상징주의의 핵심인 말라르메도 포우의 말년 작품인 '갈까마귀'를 기막히게 번역했고, '에드거 포우의 무덤'이라는 시를 써서 포우를 경배하지 않았던가.


마침내 영원이 그를 그 자신으로 바꿔놓는 그런

시인이 한 자루 벌거벗은 칼을 들어 선동한다

이 낯선 목소리 속에서 죽음이 승리하였음을

알지 못하여 놀라는 자신의 세기를.


그 자들은, 히드라의 비열한 소스라침처럼, 옛날 종족의

말에 더욱 순수한 의미를 주는 천사의 목소리 들으며

이 마술이 어떤 검은 혼합의 영광 없는 물결에

취했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였다


대적하는 땅과 구름의 오 다툼이여!

우리들의 사상이 그것으로 얕은 부조를 새겨

포의 무덤 눈부시게 장식할 수 없기에,


어느 알 수 없는 재난으로부터 여기 떨어진 조용한 돌덩이

이 화강암만이라도 끝끝내 제 경계를 보여주어야 하리

미래에 흩어져 있는 저 모독의 검은 비행들에게.


[황현산 옮김]     


그렇게 상징주의의 발원지가 바로 포우라고 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의 전 영역에 걸쳐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에서 대서양 건너 남아메리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미국에 생존했던 듣보잡 포우와 연관이 깊다는 것은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입장에서는 전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미국에서는 물론이고 영국에서도 보잘것없는 식민지의 소설가에 불과한데, 오히려 문화 강국 프랑스에서 그를 수용하고 깊이 있게 연구를 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만큼 프랑스 예술계는 개방적이다라고 받아주면 의문은 어렵지 않게 풀릴지도 모른다. 시민의 혁명으로 세상을 바꾼 그 자유정신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반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과 영국 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지명도를 확보한 포우는 유럽 문학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존재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포우가 도대체 누구인데?


포우가 보들레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프랑스 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보들레르가 포우를 처음 발견하기 10년 전에 이미 포우는 영국으로 출간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사실 포우는 살아생전 프랑스에서 자신의 이름이 회자되리라고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는 범접할 수 없는 경계 너머의 세계였고 소박하게 영국으로 몇 작품 수출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나름 성공했다고 자부했지만 저작권에 대해 무지의 땅이었던 미국에서 전업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요원하다는 것을 절박하게 인식하던 터라 그래도 저작에 대한 대가가 후한 영국으로 눈길을 돌렸던 것이다. 영국에서 출판하면 미국보다는 훨씬 많은 인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문학에 대해 다재다능하지만 항상 궁박했던 포우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1842년 3월 찰스 디킨스가 가족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여행을 온 것이다. 당시 디킨스는 서른 살의 나이에 영미 국가에서 베스트 작가가 된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당연히 미국에서도 그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유능한 작가이면서 외교관이었던 워싱턴 어빙의 초청으로 미국에 온 디킨스의 목적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우선 미국에서 자신의 작품이 해적판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디킨스는 우회적으로 저작권에 대한 개념을 전파하고, 그리고 말로만 듣던 신생국인 미국을 직접 목도하고 자신의 저작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넌 것이었다.


당시 그레이엄스 메거진의 편집장에서 퇴사할 무렵, 포우는 필라델피아에 온 디킨스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고 소설가이자 평론가의 입장에서 두 번 만났다. 포우는 몇 년 전부터 '올리버 트위스트'와 '니콜라스 니클비' 같은 디킨스의 작품에 대한 평론이나 서평 등을 써왔기 때문에 그 만남은 각별했을 것이다. 당시 나누었던 인터뷰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미 두 사람은 간접적으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1841년부터 주간지에 연재되고 있던 역사 소설 '바나비 루지(Barnaby Rudge)' - 1780년에 영국에서 발생한 고든 폭동 사건을 소설화 한 작품 - 에 대해 자신이 쓴 평론과 단편소설집 '그로데스크와 아라베스크 이야기'를 먼저 디킨스에게 보내 나 이런 사람이요라고 피력했던 것이다. 디킨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색다른 평론에 대해 신선함을 느꼈지만 감명을 받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사실 두 거장의 운명적 만남이 문학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지만, 당시엔 무언가 비즈니스 적인 요소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두 인물의 개인적인 소통은 소설에 대한 담론보다 출판에 관한 현실적인 대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만남 이후 서로 오간 3번의 서신 때문이었다. 포우가 먼저 보내고 답장을 받는 방식의 서신 교환이었는데, 포우가 보낸 편지는 존재하지 않고 디킨스가 포우에게 보낸 편지만 전해지는 것을 보며 디킨스가 포우를 어떤 대상으로 인식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남아 있는 디킨스의 편지를 보면, 포우가 자신의 작품 '그로데스크와 아라베스크의 이야기'를 영국에서 출간해 줄 것은 청탁하고, 디킨스가 그 청탁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내용이다. 디킨스는 보수적인 영국의 출판업자들이 모험을 원하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디킨스는 지인들과 대화에서 '그로데스크와 아라베스크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흘끗 보았노라고 실토했고, 포우에게서 온 편지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태워버렸다는 설도 있는 것을 보면, 사실 디킨스가 불성실하게 민원을 처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 디킨스의 마음을 읽은 포우는 디킨스를 불신하여 그 후에는 더 이상 접근 하지 않았다. 뒤끝 강한 그로선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루어 짐작하더라고 33살의 포우의 입장에서는 30살에 불과한 디킨스의 성공이 부럽기도 하고 그런 무관심에 서운하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전업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하던 포우는 디킨스와의 만남으로 돌파구를 모색하려고 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무튼 두 인물의 만남은 시론이나 저작권 문제 등을 논했지만, 포우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때, 문학적으로 의미 있는 소통이나 인간적인 관계도 없이 오직 비즈니스 적인 소통만을 한 매우 건조하고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두 고수의 만남은 이렇게 싱겁게 막을 내렸지만, 포우 사후 20년이 지난 1868년에 다시 미국을 찾은 디킨스가 당시 생존해 있던 포우의 고모이자 장모인 클렘 부인을 찾아가 위로하고 궁핍한 그녀에서 돈을 주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 개연성을 따져 볼 때 포우와 디킨스의 관계를 엮어보려는 먹물들의 선정성이 내포된 작위적인 서사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의 문학 출판시장 상황에 대해 잠깐만 설명하고 가자면, 전반적인 시장 규모는 영국에 비해 보잘것없었고, 저작권도 보호되지 않아서 작가들의 수입은 형편없었다. 디킨스처럼 인세를 받으며 문필에 전념할 수 있는 영국의 문학 시장은 프리미어리그였고 미국은 2부 리그 격인 챔피언쉽 리그도 되지 않았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던 주홍글씨의 나다니엘 호손도 한때 세관과 측량회사에 근무하며 겸업을 하고 있었고, 당대 최고의 시인인 롱펠로우도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하버드 대학 출신에 시인이며 자연철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헨리 소로도 연필 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이런 열악한 미국 문학계에서 전업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궁박함을 감수하고 바흐처럼 작품을 끊임없이 생산해야 하는 고된 노동을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포우는 그런 환경에서 온갖 작품을 생산하면서 생존한 아메리카 최초의 작가였다. 좋게 말하면 작가정신이 투철한 프로페셔널 한 작가였던 것이다.


그래도 포우는 디킨스와의 만남에서 소득은 있었다. 디킨스가 미국에 왔을 때 '바나비 루지'에 등장하는 그립이라는 까마귀 박제를 가지고 왔었다. 그립이라는 이름은 디킨스가 자신이 키우던 까마귀에게 붙여준 이름인데, 소설에서 작가의 의도를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중요한 소재였기 때문에 박제를 하였던 것이다. 인터뷰 당신 그 박제를 본 포우는 어떤 영감을 받았고, 그 영감은 1845년에 발표한 '갈까마귀'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포우는 이런 관계를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갈까마귀의 내용을 보면 디킨스가 다룬 그립의 이미지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라고 한다.


19세기 미국 문학은 영국과는 비교 불가일 정도로 왜소했다. 더구나 포우가 생존했던 초중반의 시기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50~60년 후였기 때문에 문화적인 격차는 더 벌어져 있었다. 영국의 문학 작품을 동경하고 모방하기에 급급했으며 그런 경향이 미국 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포우라는 듣보잡이 나타나 휘졌고 다니고 있었으니 미국 문학계가 달갑게 여길 리 만무였다. 시는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소설과 비평은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영국에서는 주제 파악도 못하는 그런 망나니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편견을 삭제하고 볼 때 포우의 문학(시 소설 비평 등)은 유럽의 주류 문학 수준에 비해 손색이 없고 오히려 더 진보된 경향도 보이지만 미국 내에서는 문화 자격지심이나 스스로 낮추려는 인식이 강해서 포우의 작품 따위는 그저 객기나 괴작으로 치부했고 그의 인생도 철저하게 이방인 취급을 했다. 호손이 주홍글씨에서 밝힌 것처럼 당시는 과거의 엄격했던 청교도 정신을 반성하는 기조가 성행하던 시절이라 상대적으로 사회역사 인식이 부족하고 낭만주의 성향이 강한 포우의 작품은 호사가들만 선호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기조는 포우 사후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아마도 머나먼 프랑스에 살던 보들레르와 그 추종자들이 포우를 수렁과도 같은 미국 문학계에서 건져내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그런 그로데스크한 문학인으로 영원히 부표처럼 떠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 디킨스에게도 차이고 겨우 프랑스 뒷골목을 배회하다 어느 타락한 천사에게 구제된 애드가 알렌 포우, 그의 깊고 지독한 외로움의 수렁 속으로 들어가 보자.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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