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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Sep 07. 2023

겨울 나그네, 슈베르트

아웃사이더


      1. 운명


1827년 3월 26일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향년 57세였다. 이 위대한 음악가를 추모하기 위해 성삼위일체 성당 앞으로 2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려들었다. 장시간의 장례 미사가 끝난 후 1.5KM에 이르는 긴 운구행열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맨 앞에 사제단이 앞장섰고,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구성된 8명이 베토벤의 상여를 매고 뒤따랐다. 요제프 바이글. 기로 베츠, 요한 겐스바허, 빌헬름 뷔르펠, 요제프 아이블러, 요한 훔멜, 이그나츠 자이프리트, 루돌프 크로이처 등이 그들이었다. 그리고 음악가와 작가 등으로 구성된 36개의 횃불 봉송이 이어졌으며, 검은 상복 가슴에 흰색 백합을 단 수많은 참배객들이 끝없이 뒤따랐다. 그중에 오스트리아에서 영향력 있던 귀족과 고관대작들이 보였고, 30살의 프란츠 슈베르트도 바우에른펠트와 쇼버 등과 함께 마지막까지 대가를 배웅했다.  오스트리아 언론은 그 장례식을 나폴레옹을 몰아내고 다시 왕정을 되찾은 것과 같은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었고, 매우 인상적이며 감동적인 장례식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위대한 음악가의 마지막 길을 빈의 모든 시민은 물론이고 오스트리아와 독일과 그리고 전 유럽이 애도했다. 그리고 후세는 그를 악성이라고 칭했다.


베토벤은 세상의 모든 짐을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중심이고자 했고, 그 무게를 진심으로 한 땀 한 땀 음으로 표현했다. 산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영웅적인 결기가 그의 음악과 정신세계를 지배했으며 그것은 교향곡 3번 에로이카로 완벽하게 승화되었다. 자신의 몸을 갈아먹는 온갖 질병과 싸우면서도 그는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은 웅장하고 장엄한 스케일의 음악을 창조했다. 특히 교향곡 9번은 청각이 완전히 사라진 가운데서 내면에 울림만으로 빚은 천지창조와 같은 대곡이었다. 그는 집념의 화신이었고 고독의 대명사였다. 그의 악보를 보면 한곡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뇌를 했는지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추앙했던 슈베르트는 주변의 친구와 자신이 만든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들과 어울릴 만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며 안주했을 뿐이다. 그에게 그 어떤 영웅적인 서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베토벤은 귀족들에게 너희들은 나의 음악을 감상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오만함을 떳떳하게 표출하며 경제적 이득을 쟁취했지만, 슈베르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악보를 출판하여 얻은 돈으로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갔다. 베토벤은 상류층에게서 받은 응당 대가를 허투루 쓰지 않고 모아 말년에는 풍족한 삶을 살았고, 그 재산을 조카에게 물려주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지만, 슈베르트는 출판사에서 돈을 받으면 친구들을 불러 유흥비로 날리기 일쑤였고 항상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베토벤은 20대 초반부터 베를린과 라이프니치와 드레스텐 같은 독일의 대도시와 체코의 프라하 등으로 연주 여행을 하면서 인지도를 넓혔지만 슈베르트는 기껏해야 에스테르하지 백작 딸의 피아노 가정교사를 하기 위해 몇 달 간 헝가리에 위치한 젤리즈 만 갔을 뿐 거의 오스트리아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음악적 성취를 위해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고군분투를 한 베토벤에 비해 슈베르트는 방구석에서 작곡에만 전념했을 뿐 음악적 성취를 위한 행동은 미미했다.


두 작곡가가 사망한 후 그들과 친분이 있던 많은 사람들은 두 인물의 관계를 엮어주기 위해 무수히 많은 증언들을 늘어놓았다. 당시 빈에서 베토벤이란 존재는 오벨리스크 같이 우뚝 솟은 음악세계의 거장이었기 때문에 슈베르트 같은 평범한 음악가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슈베르트의 절친인 안젤름 휘텐브레너가 베토벤의 비서 격이었던 안톤 신들러와 친분이 있어서 그의 주선으로 슈베르트가 만든 가곡 수십 곡을 베토벤에게 전하며 사사하기를 원했고, 피아노 2중주(D624)를 베토벤에게 헌정하기도 하면서 교분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자신의 음악적 존재를 베토벤에게 각인시키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는데, 그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는 슈베르트의 소극적인 성격 탓이었다. 베토벤이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직접 세상과 담판을 짓는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그는 친구들의 도움 없이는 그 누구에게도 접근할 수 없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모차르트나 멘델스존처럼 10대 때 이미 모든 것을 이루어 놓은 천재적 재능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대중적인 가벼운 가곡만 작곡하고 기껏해야 실내악 정도만 연주되는 그저 그런 음악가에 불과했기 때문에 대가의 시선을 끈다는 것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것은 음악계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슈만과 리스트에 의해 사후 재평가가 이루어진 후 그래서 두 인물의 관계에 대한 서사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그들은 슈베르트가 사망하기 며칠 전에 베토벤을 알현하는 장면을 각색했다. 베토벤을 신격화하는데 앞장섰던 안톤 신들러는 심지어 베토벤이 슈베르트를 향해 "세상을 한바탕 흔들어 놓을 재목감"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는데, 그런 증언은 슈베르트가 사후 유명해지지 않았다면 발설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도 베토벤이 슈베르트에게 어떤 언어적 표현을 했는지 여러 버진이 존재하지만, 슈베르트의 평생 후원자이자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던 요세프 폰 슈파운은 아예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알현하지 않았다고 못을 박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흠모한 것은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대의 거의 모든 음악가들이 그를 대가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음악적 존경심은 특별한 감정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슈베르트가 왕성하게 활동할 때는 모차르트와 하이든 음악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2km 정도 되는 거리를 두고 살면서도 같은 음악가로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불교류 설은 사실 슈베르트의 성격을 볼 때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는 말년을 제외하고는 포글이나 휘텐브레너 같은 극히 제한된 음악가들 하고만 교류를 했고, 교류의 대다수는 음악 애호가에 불과한 행정가 작가 화가 등 중상류층 지식인들이었다. 베토벤도 자신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성향이어서 두 사람은 바로 옆집에 살았어도 안면을 트지 않았을 것이다. 둘 다 성격이 폐쇄적이고, 서로 사는 물이 다른 데, 두 인물이 교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무슨 큰 신비로움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 없다. 베토벤의 전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슈베르트의 주변 인물들과 겹쳐지는 인물은 사리에르와 베버와 훼텐브레너 등 몇 명 외에는 거의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엮어 볼 미미한 개연성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마왕


슈베르트가 생존했던 시기의 유럽은 유럽사에게 가장 격동적인 시대였다. 1789년 5월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은 시민들에 의해 절대왕권이 한순간 무너진 미증유의 센세이션널한 사건이었다. 그 여파는 전 유럽을 흔들어놓았다. 더구나 1793년 혁명세력이 루이16세를 단두대로 참수하고 그것도 모자라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 마저 같은 방법으로 처단한 사건은 왕비의 모국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 혼돈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나폴레옹이란 괴물을 등장시켜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혁명과 나폴레옹은 근대 유럽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넘보지 못하던 미답의 러시아까지 점령하기 위해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은 결국 라스프티차 늪에 빠져 실패하였으며 그로 인해 결국 1814년 권좌를 빼앗겼다. 그리고 나폴레옹을 몰아낸 동맹국인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은 빈에 모여 다시는 이런 몰상식한 사건이 발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결의를 하였고 그 중심 국가가 오스트리아였다. 다시 프랑스혁명 전의 상태 즉 평화로운 왕정시대로 돌아가기 위해 전 유럽이 뭉친 것이다.


동맹국 중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왕국은 오스트리아였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는 등 유럽의 지배권을 상실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2세는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을 앞세워 유럽 재편에 나섰고 또한 자국의 안녕을 도모하였다. 외교장관과 총리 등을 역임한 메테르니히는 1815년부터 1848년까지 33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재건을 위해 강력한 경찰국가와 보수주의를 내걸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척결하였으며, 유럽 전역에 들끓던 시민계급의 입헌 개혁을 강압적으로 차단하였다. 그렇게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빈 체제가 붕괴되기 전까지 메테르니히가 이끌던 시대를 비더마이어 시대라고 일컫는다. 그런 격동의 19세 유럽에서 클래식이라 부르는 위대한 음악들이 만들어지고, 미술과 문학 그리고 과학기술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것은 문명과 전쟁의 상호 관계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인간은 이미 억압과 전쟁에 적응하여 이에 굴복하지 않는 생물학적 유전적 변이가 완성되었는지 모른다.


슈베르트는 혼란한 오스트리아에서 고전주의를 극복하고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상황에서 낭만적 영감을 발현시킨 그는 그래서 위대한지 모른다. 완고한 보수주의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진보적인 상상력을 표현한 슈베르트의 음악은 리스트와 슈만 같은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구미를 더 당겼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정신을 탄압하고, 인문학 분야에서는 검열이라는 잣대로 통제하는 상황에서 그래도 음악은 추상성을 무기로 억압의 틈을 비집고 표현할 수 있는 인식의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슈베르트는 교묘하게 음악세계에서 자유를 누렸고, 친구들도 그의 그런 음악에 매료되어 그를 끝까지 보호했는지 모른다. 친구들이 왜 그의 가곡이나 실내악 같은 보잘것없는 음악에 열광하였을까. 슈베르트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그 친구이다. 슈베르트에게 친구란 삶의 대부분이었다. 여기서 친구의 뜻은 선배 후배 지인을 통칭한다. 그럼 친구 몇 명을 잠깐 얘기하고 가겠다.


요세프 폰 슈파운은 슈베르트의 가장 중요한 친구이다. 이름에 폰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귀족 출신인 그는 슈베르트보다 9살 연상이었다. 11살 때 빈 시립 기숙학교에 입학 한 슈베르트는 빈 소년 합창단에 가입하여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하면서도 학교에서 운영하는 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 파트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전 국민에게 음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 내에서도 활발한 음악 활동을 적극 권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빈 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슈파운은 틈틈이 기숙학교에 가서 음악 보조교사 일을 하고 있었다. 학교 교향악단 리허설 담당 조수로 학생들의 교향곡을 지도하고 있던 슈파운에게 슈베르트는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몸집도 땅딸막하고 수줍음 잘 타는 슈베르트에게서 누구보다 음악적 재능이 월등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실 그의 음악 재능은 학교에서 자자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 그의 재능을 더욱 발전시켜 준 인물은 슈파운이었다. 20대 중반의 나이 많은 선배인 슈파운은 교향곡이나 오페라 공연을 한 번도 관람하지 못한 슈베르트를 데리고 음악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상당히 고가였던 입장료를 자신이 지불하면서 슈베르트를 데리고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케른트너토어 국립극장에 가서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들이 만든 교향곡과 오페라 공연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극장은 베토벤의 교향곡과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작품들을 공연하던 당대 최고의 극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빈의 젊은 청년들을 모아 빌둥 서클을 만들었을 때도 17살의 슈베르트를 서클의 막내로 가입시켜 주었다. 당시 메테르니히 정부는 전인적인 인간을 만들기 위해 인문학 교육을 권장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빌둥은 그 일환으로 행해지던 공개적인 모임의 일종이었다. 빌둥의 목표점은 배움과 예술 활동을 통한 자기 수양이며, 진선미 배양이었다. 그 방법으로 문학공부를 중요시하여 소설과 시를 읽고 감상문을 써서 발표를 하고, 외국 작품을 번역도 하고, 예술 작품과 미학에 대한 열띤 토론도 잇따랐다. 그렇게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지적 탐구가 행해지던 빌둥은 당시 지식인 청년층에서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 멤버들은 슈파운을 중심으로 그와 동년배인 요한 마이어호퍼, 안톤 오텐발트, 안톤 슈파운, 케너 등과 그 아래 또래인 브루흐만, 요한 젠, 레오폴트 쿠펠비저 그리고 프란츠 폰 쇼버 등이었다. 그들은 귀족 출신이거나 신흥 자본가와 고위 관료 출신 자녀들이어서 금전적으로 풍족한 중상류층이었다. 슈베르트는 그들과 견주어 사회 계층적으로나 문화적 교양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으나 오직 음악 재능 하나만으로 그 서클의 회원이 되었다. 쇼파운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지만 그것 또한 음악 재능이 없었다면 성사될 수 없었다. 슈베르트는 토론에도 참여했지만 대부분은 현존하는 시에 곡을 붙여 작품을 재해석한 가곡을 만들어 발표하는 방식으로 토론을 대신했다. 아버지 밑에서 보조교사 일을 하는 가운데, 글을 쓰는 것보다 가곡으로 숙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회원들은 그의 놀라운 재능에 감탄하며 그의 가곡에 심취했다고 한다. 10대 후반 당시 슈베르트가 만든 곡(D119~D486)이 360개인데 그중에 가곡이 250개였다. 그 가곡들은 빌둥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당시 작곡한 물레질하는 그레트헨(D118), 들장미(D257), 그리고 그 유명한 마왕(D328) 등은 현재까지도 걸작으로 남아 있다. 아무튼 빌둥은 전인적인 인간형을 만든다는 국가적 계몽사상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했지만, 시국이 시국이 만큼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엔 비밀결사 단체 명단에 오르게 되어 모임 장소인 기숙학교 출입금지 훈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서클이 와해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슈파운이 인적 네트워크를 총 동원해 적극적인 물밑작업을 한 결과 기숙하교 선배인 미하일 아르네트 신부가 보증을 하게 해서 겨우 모임 활동이 재개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빈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백수생활을 하던 슈파운은 슈베르트의 매니저를 자임하며 그의 작품을 알리는 데 전념했다. 그중에 괴테에게 편지를 써서 슈베르트의 음악적 위상을 높여주는 것이었다. 당대의 괴테는 현존하는 최고의 문학인이었다. 40년 전에 발표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은 베르테르 신드롬을 낳을 정도로 인기 절정의 작품이었고, 위대한 작품으로 추앙받는 파우스트도 당시에도 계속 연재되고 있는 최고의 작품이었다.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세계도 그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특히 그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았고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슈베르트도 수십 개의 가곡을 만들었다. 그러한 가운데 슈파운은 소심한 슈베르트를 설득해 바이마르에 있던 괴테에게 직접 편지를 쓰게 했다. 물론 내용은 슈파운이 불러준 것이었다. 괴테 가곡집이란 악보와 동봉하여 발송한 편지는 한마디로 퇴짜를 맞았다. 16개의 괴테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을 출판할 예정이오니 이 헌정을 받아주시고 한 말씀 담긴 편지를 보내주시기를 원했지만 그것을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편지는 괴테에게 전달되었지만 개봉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다시 슈베르트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도 은근히 희망적인 소식을 바랐지만 당연히 무관심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당대에 살아있는 문호였던 괴테에게 이런 류의 편지는 수없이 날아왔기 때문에 대다수는 그렇게 마무리지어졌다고 한다. 일일이 읽을 수 없었던 그런 편지는 괴테를 피곤하게 했을 것이다. 멘델스존처럼 10대 때 거의 모든 것을 이룩한 천재가 아니고서는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훗날 그런 괴테가 실수한 것이라고 비평하는 식자들도 있지만 사실 당시의 슈베르트는 전혀 인지도가 없는 철저한 무명 작곡가에 불과했기 때문에 괴테의 무관심을 탓할 수는 없었다.


슈파운은 슈베르트가 20살 무렵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할 때도 그에게 관심을 놓지 않고 진정 어린 마음으로 그들 도와주었다. 특히 슈베르트가 쇼버와 어둠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순진한 슈베르트를 타락하게 만든 쇼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그를 감싸주었다. 그리고 슈베르트 사후 그의 음악이 재평가를 받아 유명세를 탈 때, 지인들 중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글을 공개하는 경우가 있으면 그때마다 슈파운은 항상 슈베르트를 옹호하고 나섰다. 또한 슈베르트 사망 원인이 매독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그는 부단히 노력했고 한동안은 그 원인을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슈파운은 슈베르트의 개인사에 부정적인 면을 감추어 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앞장을 섰던 것이다.


슈파운이 슈베르트에서 선한 존재였다면 프란츠 폰 쇼버는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슈베르트의 영혼을 빼앗은 어둠의 존재였다. 그렇다고 그를 악의 세계로 빠지게 한 것은 아니고 남성의 원초적인 욕망을 해결해 주기 위해 향락의 세계로 인도한 친구였다고 해야 옳다. 좀 더 호의적으로 평가하면 슈베르트의 예술혼을 각성하게 만든 디오니소스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쇼버는 누가 뭐라 해도 슈베르트의 인생에서 강한 임팩트를 준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쇼버와 포글

슈베르트보다 한 살 많은 쇼버는 스웨덴 태생으로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의 유산을 상속받은 어머니를 따라 12살 때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해 와 정착했다. 린츠의 크렘스뮌스터 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슈버는 주말이면 빈에 와서 빌둥 서클에 모습을 나타냈다. 상당한 규모의 사업체와 토지를 상속받은 어머니 때문에 그는 부잣집 자식으로서 귀족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고, 외향적인 성격에 언변도 좋고, 마초적인 남자다운 면모도 가지고 있어서 친구들이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다소 과시하려는 언행 때문에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그런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상쇄시키지는 못했다. 모법생만 모인 빌둥의 엄격한 분위기에서 그는 반항아 취급을 받았지만 선천적으로 사교성이 좋아 회원들은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집안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던 그는 자신의 집을 빌둥 모임 장소로 제공하기도 하고, 훗날 슈베르티아데를 자주 열기도 했다. 화려하고 값비싼 가구들이 가득한 쇼버의 집은 빌둥이 추구하는 가치와 다소 상반되었지만 쇼버의 마력에 반발할 수 없었다. 나이와 무관하게 그의 카리스마는 대다수의 회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 쇼버를 슈베르트는 유독 좋아했다. 자신에게는 부족한 남자다운 면모에서 대리 만족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와 함께 있으면 항상 기분이 상승되어 있었다. 슈베르트를 처음 사창가로 데리고 간 사람이 쇼버였을 것이다. 슈베르트가 유명해지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일화들이 많이 감추어졌지만 당위성으로 볼 때 그를 여색의 세계로 인도한 사람은 쇼버가 틀림없다고 식자들은 확신한다. 그리하여 슈베르트를 매독에 걸리게 한 원흉으로 지탄을 받기도 하는데 한편으론 억울한 면이 있을 것이다. 남자의 세계에서 그런 행위는 비일비재하고 더구나 혈기왕성한 청춘에겐 암묵적으로 당연시되는 행위였다. 슈베르트 사후 50년 가까이 지났을 때 쇼버는 슈베르트의 조카 하인리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슈베르트에게 따분한 교직 생활을 청산하도록 조언했고, 따라서 학교라는 갑갑한 공간에서 해방시켜 독립적이고 창조적인 세계로 이끌었다고 설파했다고 한다. 당시 슈베르트의 재평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어서, 그런 슈베르트에게 자신이 예술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는 뜻이다. 자신이 없었다면 위대한 슈베르트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특유의 과시였다. 사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을지 모른다. 예술이란 자유로운 영혼에 의해 창조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슈베르트는 쇼버에게 빚을 졌는지 모른다. 예술가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좇는 탕아가 되어 보기도 하고, 고독해보기도 하고, 때론 몸과 마음이 고통으로 짓눌려보기도 하는, 그런 평범하지 않은 삶을 거부하지 않는 특이한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 뭐라 해도 쇼버는 슈베르트의 음악적 성장에 현실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1816년 여름 방학 때 슈베르트는 아버지에게 어렵게 허락을 받고 쇼버의 집에서 기거를 했다. 아버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꼬장하고 보수적인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인 아버지의 카리스마와 엄격한 규율 속에서의 기숙학교 생활에 지쳐 있던 그에겐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첫 번째 가출이었다. 합창단과 학교 악단과 그리고 빌둥 같은 특별활동 같은 생활도 조직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자유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런 슈베르트를 쇼버는 욕망이 넘쳐나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기도 했고, 때로는 요한 미하엘 포글 같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쇼버의 매형이 케른트너토어 극장 관계자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관계를 활용하여 쇼버는 명성이 자자한 오페라 가수 포글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갓 10대를 넘긴 청년에 불과했지만 대인관계가 남다른 쇼버는 슈베르트의 가곡 악보를 가지고 포글의 집에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처음에는 풋내기 작곡가의 악보를 보고 탐탁지 않게 여겼던 포글은 쇼버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가 다시 한번 악보를 자세하게 정독했다. 쇼버의 설득보다도, 악보를 분석한 결과 포글은 슈베르트에게서 어떤 비범함을 발견했다. 객기 어린 젊은이들의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요한 미하엘 포글은 육 척 장신에 은퇴를 앞둔 당대 최고의 성악가였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뻘 되는 그는 쇼버 집에서 슈베르트를 처음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을 손수 불렀다. 그렇게 슈베르트의 가곡 몇 곡을 부른 포글은 단박에 그의 음악을 인정했다. 장래성이 한눈에 보인 것이다. 그 후 포글은 슈베르트와 함께 그란츠, 린츠 등으로 여러 번 음악 여행을 다니며 그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슈베르트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지갑 열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제2의 아버지라는 비유가 회자될 정도로 그는 진심 어린 음악 선배를 자임했다. 20살이 넘는 나이 차이와 음악계의 네임밸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포글은 슈베르트의 음악성과 인간성을 함께 존중했고 결코 그를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허우대 차이도 대단하여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면 거인과 난쟁이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런 비유적인 삽화나 이야기들이 빈에 회자되었는데, 무엇보다 이상한 눈총을 받으면서도 보잘것없는 슈베르트를 포용한 포글의 인간됨은 정말 존중받을만했다. 결코 친해질 수 있는 요소가 보이지 않는 데도 두 사람은 서로 존중하며 마지막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그 우정에 때로는 균열이 발생되기도 했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선 나중에 더 말할 기회를 갖기로 하고, 다시 쇼버에게로 돌아가겠다. 쇼버는 빌둥에서는 다소 위험한 인물이었지만 슈베르티아데에서는 주도적이었다. 슈베르티아데를 처음 만든 것은 슈파운과 마이어호퍼였지만 모임의 결속력과 확장과 지속은 쇼버로 인해 가능했다. 부친이 부재한 돈 많은 부잣집 아들인 그는 극장 배우 수업을 받기도 했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시인과 극작가를 자처하며 순진한 슈베르트와 오페라 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고, 남아도는 시간을 이용해 슈베르티아데를 비롯해 무도회와 파티를 열어 중상류층의 우아한 세계의 표본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인생을 즐기려고 했지만 형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사망하고, 20대 후반에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와 불화를 겪기도 했다. 집의 규모를 줄여 이사를 가는 상황에서도 한량 생활을 하는 쇼버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일 좀 하라고 닦달거렸고, 쇼버는 이에 못 이겨 집안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에 나가 처음으로 직업다운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 슈베르트가 사망하기 몇 개월 전까지 쇼버는 그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있었다. 슈베르트가 매독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을 당시 쇼버는 마지막까지 그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슈베르트가 혹독한 투병으로 인해 성격이 조증처럼 과격해져 주변의 친구들이 거리를 둘 때도 쇼버는 그래도 그와 함께 했던 것이다.


그리고 슈베르트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입시켜 준 인물은 요한 마이어호퍼였다. 1787년생인 그는 슈파운과 빈 법대 동기로서 빌둥과 슈페르티아데의 주요 멤버이기도 했다. 한때 사제가 되기 위해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서 4년 동안 수련을 받기도 했던 그는 시인이면서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노래도 잘 불렀고 기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다방면에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는 가정교사 알바를 하면서 공무원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때 친구 슈파운의 소개로 슈베르트를 알게 되었다. 그는 큰형처럼 너그럽고, 책임감이 강했으며, 매사에 친절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가족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슈베르트와 잡아두려는 아버지가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중재자 역할을 했을 정도로 슈베르트의 사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슈베르트가 쇼버의 적극적인 권유로 가출을 감행했을 때도 그들 아낌없이 도와준 사람이 마이어호퍼였다. 슈베르트가 아버지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시도할 때 그가 직접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이 책임지고 데리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설득하여 결국 성사될 수 있게 했다. 마이어호퍼와 슈베르트의 2년간의 동거는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이다. 이러한 관계를 두고 혹자는 슈베르트가 동성애자이라고 추정하지만 사실은 건강한 선후배 사이였다. 특히 그 기간에 마이어호퍼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 50개가 넘을 정도로 두 사람은 음악과 문학의 통섭적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괴테 다음으로 많은 그의 시가 가곡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면적으로는 그렇게 진실되고 반듯한 사람이었지만 내면에서는 또 다른 자아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탓인지, 우울증의 정도가 심하여 심기증 환자라고 무방할 정도로 그는 죽음을 항상 옆에 두고 살았다. 자신의 육체에 무언가 이상 신호가 오면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는 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결국 1831년 1차로 자살을 시도한 후, 콜레라가 창궐하던 1836년 자신의 사무실에서 뛰어내려 기어코 자살에 성공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술적 감성이 풍부했던 그가 슈베르트와 동거 2년이 지난 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첫 부임한 부서가 중앙도서 검열국이었다. 그러니까 문화예술과 관련된 작품과 서적 등을 검열하는 직무였던 것이다. 아마도 사회적으로 가장 빠르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이 고위 관료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차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공직 세계에 들어갔지만 그 직무가 터무니없게도 도서 검열관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지자가, 그 영혼을 검열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의 혼란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그 괴리감에 괴로워했고 결국 우울증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키웠을지도 모른다. 복잡한 정신 회로를 가지고 있던 그는 이 모순된 세상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화학반응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고 하나는 포기해야만 했으며, 그것은 세상의 법칙이었다. 슈베르트가 현실을 포기한 것처럼 말이다.

마이어호퍼와 슈파운

위에서 언급한 슈파운, 쇼버, 포글, 마이어호퍼 외에도 많은 지인과 선후배들이 슈베르트 주변에 포진하고 있었다. 슈베르트 셋째 형 카를의 미술 아카데미 동기이며 역사 화가로서 국가 훈장까지 받았던 레오폴드 쿠펠비저, 그의 4살 많은 형이며 케른트너토어 궁정 극장의 요직에 있으면서 슈베르트와 함께 오페라 작업을 했던 요세프, 반정부운동을 하다 체포된 후 빈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던 요한 센, 귀족이며 변호사 출신에 제국의원과 교수를 역임했던 이그나츠 폰 존라이트너, 그의 아들이며 변호사인 레오폴트, 그리고 슈베르티아데에서 피아노 파트너였고 빈 궁정에서 근무하던 영원한 절친 요세프 폰 가이 등 많은 인물들이 슈베르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1815년에 슈베르트의 음악 재능을 확장시켜 주기 위해 공식적으로 슈베르티아데라는 음악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슈베르트의 슈베르트를 위한 사교 음악 모임이었다. 당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귀족이나 신흥 자본가의 저택에서 실내악 연주회를 목적으로 한 작은 연회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었는데, 슈베르티아데는 아예 슈베르트 음악 만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슈베르트의 작품에서 가곡과 실내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음악적 분위기에 편승한 결과라고 해도 무방하다. 슈베르트는 비록 당대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교향악과 특히 오페라에 집착할 정도로 매진한 것은 나름 그런 소작품에서 벗어나고 푼 반사 작용이었다. 아무튼 그해 처음 슈베르티아데가 열린 곳은 이그나츠 폰 존라이트너의 저택이었다. 고위 관료였던 존라이트너는 음악에 관심이 많아 빈의 음악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었다. 살리에르의 제자이며 학교와 교회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산하고 있던 슈베르트의 음악을 사장시킬 수 없었던 그는 주변 사람들의 중지를 모아 모임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 연주회에서 슈베르트는 자신이 만든 가곡을 궁중 소년 합창단 출신답게 서곡처럼 직접 불렀고, 포글도 우렁찬 바리톤 목소리로 그의 가곡을 열창했으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 회원 중에 성악에 실력이 있는 사람도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슈베르트는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자신이 만든 곡을 부른 최초의 싱어송 라이터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슈베르티아데는 슈베르트가 사망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열렸다. 많을 때는 100명 가까이 되었고 최소한 30~40명은 꾸준히 참석했다. 회원들의 면면을 보면, 귀족 공직자 시인 극작가 화가 등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예상외로 음악가는 소수였다. 처음엔 존라이트너가 중심이었지만 몇 년 후에는 슈파운과 쇼버가 중심이 되어 그들의 저택과 호텔 연회장이나 카페를 통째로 빌려 연주회를 열었다. 슈베르트의 가곡과 실내악이 주류였지만 시와 소설 낭송도 하고 때론 취기가 올라 분위기가 뜨거워지면 남자들만의 난잡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슈파운의 주도로 슈베르트의 가곡집을 출판할 경우엔 당연히 회원들이 구입해 주었다. 주변머리가 없었던 슈베르트는 자신이 직접 나서 악보 출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슈파운을 비룻한 슈베르티아데 회원들이 십시일반 출간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런 슈베르티아데는 시간이 흐르면서 구성원이 바뀌었다. 회원들 각자 중상류층 일원이어서 유학이나 사업 관계 등으로 해외로 나간다던가, 공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결원이 시시때때로 발생하였다. 하지만 슈파운과 쇼버의 열정적인 관심으로 연주회는 끊이지 않고 열렸다. 특히 슈베르트 인생 후반기에는 기숙학교 후배인 모리츠 슈빈트, 에두아르트 폰 바우에른펠트 등 신세대 멤버들이 슈베르티아데를 이끌었다. 그리고 슈베르트 사후에도 주인 없는 슈베르티아데는 그 명맥을 유지하여 현재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많은 도시에서 매년 다양한 슈베르티아데가 개최되고 있다.


그리고 빌둥과 슈베르티아데 같은 일련의 그룹에 속하지 않았던 친구들도 슈베르트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대표적으로 기숙학교 동기인 안톤 홀츠아펠과 안젤름 휘텐브르너가 그런 부류에 속한다. 변호사가 된 홀츠아펠은 슈베르트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 중에 한 명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살리에르 음악학원 동문인 휘텐브르너는 10대 때 슈베르트의 유일한 음악 친구였다. 그는 대지주의 맏아들로서 쾌활한 성격에 사교성이 좋아 슈베르트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였다. 그의 동생 요세프가 슈베르트가 음악세계에서 성장할 즈음에 잠시 그의 비서 노릇을 하며 궂은일을 도맡아 했을 정도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는데 그것은 형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전문적인 음악가의 길을 가지 않고 빈 법대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었지만 음악 세계와 끈을 놓지 않고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형성된 음악계 인맥 중에 거장 베토벤과도 연이 닿아 있었다. 그렇게 발이 넓었던 그는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사실인지 설화인지 모르지만, 슈베르트와 베토벤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설이 있고, 베토벤 사망을 지켜본 몇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사망한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관했다는 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직도 본론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머리만 맴돌고 있는 것은 슈베르트의 인생에서 친구(지인 포함)들은 절대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처럼 자립할 수 없는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친한 사람들한테는 짓궂은 농담도 하고 밝고 명랑했지만 기본적으로 내향적인 성정을 가지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들과는 죽어도 어울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삶을 살았고, 자식들도 자신의 입지를 키워가기 위해 열성적이었지만, 막내아들은 달랐다. 그런 슈베르트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슈파운이 그의 음악 재능이 아까워 당시 귀족들이 그랬던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를 후원했고, 그것을 시발점으로 친구들이 십시일반 모여 보이지 않는 하나의 후원 그룹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들은 대다수가 중상류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영향력도 대단하여 슈베르트 사후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차단하고 긍적 모드를 형성할 수 있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슈파운이 없었다면 지금의 슈베르트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슈만이나 리스트의 시선에도 잡히지 않고 그저 그런 가곡 작곡가로 묻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이유로 먼저 친구들 면면을 논하지 않고서는 그의 삶의 여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인물을 소개하고 가겠다. 슈베르트는 14명의 형제 중 생존에 성공한 5명 중에 넷째였다. 불평불만이 많았지만 아버지 테오도르의 천직인 교사를 이어받은 데 성공한 첫째 형 이그나츠, 교사의 지위보다 한 단계 높은 대학 교수까지 오를 정도로 포부가 컸던 둘째 형 페르디난트, 그리고 화가로서 성공한 셋째 형 카를이 있었는데, 그중에 둘째형 페르디난트는 프란츠가 가장 많이 따르는 형이었다. 그는 슈베르트가 남긴 편지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며 그 내용을 보더라도 때론 친한 친구처럼 때론 편안한 형처럼 막역하게 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슈베르트 다음으로 음악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음악교사로 봉직하며 교회 미사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연주와 지휘를 하기도 하고 때론 슈베르트의 미사곡을 자신의 곡으로 살짝 속여 미사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정을 꾸리는데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슈베르트 삶의 마지막을 자신의 집에서 건사했고, 슈베르트 사후 그의 악보를 버리지 않고 거의 다 보관하고 있었으며,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알베르트 슈만이 자신의 집에 찾아왔을 때 동생의 악보를 건네준 사람이 바로 페르디난트였다.


1808년, 슈베르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빈 시립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는 오스트리아에 최상위권 중등학교였다. 저명한 학자인 랑 박사가 교장으로 임명된 후 문화적인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음악 활동을 적극 장려하였다. 음악원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 교육을 실시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자국의 공주인 앙트와네트가 단두대로 처형되는 야만적인 작금의 유럽을 일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문화적 인간형을 양산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당시의 오스트리아 정부는 국가적으로 전인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런 교육 방침에 따라 빈 시립기숙학교에서도 문화교육에 중점을 둔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환이 음악 활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화정책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음 해 5월 유럽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던 나폴레옹이 드디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핵심인 오스트리아 빈에 입성하는 대혼란이 일어난다. 그렇게 빈은 격변의 중심지였지만, 그런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학교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마스터하고 작곡까지 하면서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던 슈베르트는 기숙학교에 들어간 후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신의 역량을 펼쳤다. 아직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빈 소년 합창단의 전신인 시립 소년 합창단에 가입하여 소프라노 파트에서 노래를 불렀고, 교향악단에도 자연스럽게 가입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기숙학교는 아무나 입학하는 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이 있어야만 입학할 수 있었고 또한 대다수가 사회적으로 중상류층 부류의 자녀들이었다. 슈베르트는 수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은 상당히 우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교향악단과 소년 합창단에 입단하는 것도 엄격한 실기 시험을 필요로 했다. 당시엔 오히려 연주 실력보다 성악 실력이 더 좋았던 슈베르트는 카스트라토처럼 소프라노 독창 파트를 자주 담당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바로 그 음악 공간에서 슈베르트는 당시 교향악단 공연 리허설 조수로 있던 슈파운을 처음 만났다. 당시 빈 대학 법학생이었던 슈파운은 주에 몇 번 기숙학교에 와서 후배들과 함께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다. 조금은 어리숙해 보이고 내향적이었던 슈베르트는 교회 형 같이 다정다감하고 반듯한 슈파운을 유독 좋아했다. 그는 슈파운을 따라 궁정 극장을 비롯해 음악회가 열리는 여러 공연장을 찾아다녔다. 특히 오페라와 교향악 공연 관람은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경험이었다. 악보로만 보아오던 그 음악들을 귀로 들었을 때의 충격은 그에게 음악의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14살 슈베르트의 귀를 뚫어주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중에 모차르트 음악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런 음악 체험은 그의 음악 재능을 일취월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평민들은 언감생심이었던 고가의 공연 입장료는 당연히 귀족 출신인 슈파운이 부담했다.


그렇게 생산적인 학교생활을 하던 1812년 5월, 14명의 자식을 낳고 9명을 하늘로 먼저 보냈던 어머니 마리아 비에츠가 56세의 나이에 신경열(장티프스?)이라는 병으로 사망했다. 사생아까지 포함하면 15명을 잉태한 것인데, 사실 평생을 자식 생산과 사별과 육아에 시달린 것에 비하면 짧은 삶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슈베르트는 학수고대하던 안토니오 살리에르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모차르트와 대비되기도 하는 살리에르는 궁정 악단장에서 은퇴한 후 음악에 재능 있는 어린 음악도를 선별하여 레슨을 하고 있었는데, 슈베르트는 특채 형식으로 문하생이 되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빈 소년 합창단에서 음악적 소질을 발산하고 있던 슈베르트를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살리에르는 레슨비를 받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인 살리에르에게 레슨을 받으려면 상당한 재력을 필요로 했지만 살리에르는 슈베르트의 집안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액 장학금 혜택을 준 것이었다. 아마도 굳이 레슨비를 받아야 했다면 슈베르트는 그의 문하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그리고 기숙학교 교장은 이미 학교에서 상당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던 슈베르트를 일주일에 2번 기숙사 외출을 허락하는 특혜를 주었다. 마침 당시에 변성기가 와서 합창단을 퇴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작곡에 매진할 수 있게 했다. 15살의 슈베르트는 그때부터 자신이 작곡한 작품을 학교 오케스트라 악단에서 지휘하기도 하고, 미사곡 가곡 실내악 등을 작곡하기도 했다. 특히 교향곡 1번이 그 당시 작곡한 작품이다.


기숙학교에 재학하던 당시 슈베르트는 동급생보다 상급생과 더 친하게 지내는 특이한 존재였다. 동급생들과 어울리지 못한 것은 그가 조숙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숫기가 없어 쉽게 사귀기 힘든 성향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천재적인 음악 재능으로 인해 상대적인 거리감이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반에 어떤 천재가 있다면 그와 가까워지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다. 사실 훗날 그의 주변에 동기들이 거의 없었던 것을 보면 그것을 방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학생급 선배들에겐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지적 수준과 인간관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런 조합은 타당할 수 있다. 아무튼 상급생들은 슈베르트를 좋아했다. 항상 음악에 몰입하여 멍청해 보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암기력과 천재적 음악성에 감탄하여 그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곤 했을 것이다. 조그만 녀석의 머리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얼마나 궁금했겠는가. 그 가운데 슈파운은 후원자나 매니저처럼 슈베르트를 챙겨주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에게 음악 체험을 시켜주기고 했고, 대학생 영역에도 데리고 다니며 새로운 세상도 경험하게 했다. 그렇게 슈베르트는 중상류층 자제들이었던 그들과 교우하면서 문학과 철학은 물론이고 역사와 정치에 대한 지식도 쌓아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등장하는 빌둥에 가입하게 된 연유도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인맥 때문이었다.


하지만 밖에서는 대학생들과 놀 정도로 성숙했는지 모르지만 집에서는 사춘기가 막 지난 막내아들에 불과했다. 이렇게 학업에 등한시하고 음악 활동과 선배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다 보니 꼬장한 교장 선생님인 아버지가 가만히 놓아둘 리 만무였다. 슈베르트가 주일에 집에만 오면 학업 이외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훈계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슈베르트를 비롯해 자식들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런 재능은 취미로서 활용하기를 바랐다. 우리 집 수준에서 전문 음악가는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시 음악계를 보았을 때 지극히 상식적인 현실 파악이었는지 모른다. 취미는 모르지만 음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막내아들이 모차르트처럼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처럼 극성을 부릴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폭할 것 같은 음악성을 짓누르고 있던 슈베르트는 그런 아버지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머리가 커지면서 때로는 갈등이 고조되기도 했다. 선생 특유의 꼬장한 잔소리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출을 한다던가 말대꾸를 할 정도로 당돌하지 못했던 슈베르트는 형 페르디난트에게 화를 풀면서 탈출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숙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슈베르트는 미래에 대해 결정을 해야 할 중요한 기로에 섰다. 대학에 진학 것인지 아버지의 대를 이을 것인지 아니면 음악가의 길을 갈 것이지 결정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결정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슈베르트의 학업을 중단시키고 교사 양성학교에 입학 신청을 했다. 일설에는 슈베르트 자신이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자퇴를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슈베르트의 소극적인 성향상 있을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계에 (당시 아버지는 재혼을 해 자식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보탬이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그 방법으로 살아있는 자식들이 자신의 대를 이어 교사가 되는 것을 강권했다. 그만한 안정적인 직업도 없었다. 부수적으로, 교사는 징병에서 면제가 된다는 당시의 법을 잘 이용하고 약싹 빠르게 기지를 발휘한 것이기도 했다. 교사와 군 면제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것이었다. 슈베르트에겐 그 시점이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그리고 황실 산하 교사양성 학교에 입학 즈음에 기숙학교에서 장학금 수여 명단이 발표되었는데, 그 명단에 슈베르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학은 낙제였지만 다른 과목을 우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대학에 갈 자격은 충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비록 자신의 미래를 아버지가 결정했지만, 이미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고 있었던 선배, 즉 슈파운의 친구이며 애국심 강한 시인인 카를 테오도르 쾨르너(그해에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함) 같은 선배는 그에게 오직 음악만을 위해 살 것을 조언하기도 했었다. 객관적으로 누가 보더라도 슈베르트의 음악성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사와 대학진학과 그리고 전업 음악가의 갈림길에 서 있었지만, 슈베르트가 선택당한 길은 우선 교사였다.


그렇게 대학을 포기한 슈베르트는 1813년 11월 교사 양성학교에 시험을 치르고 입학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슈베르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살리에르에게 열심히 레슨을 받았고, 베토벤이나 여타의 음악 공연이 있으면 슈파운과 함께 관람을 했으며, 또한 작곡을 하는 데도 열중했다. 교육은 길지 않아 10개월 만에 교사 자격증을 땄는데, 그즈음에 미사곡 F장조(D105)가 리히텐탈 성당에서 초연되었다. 1814년 9월 25일, 친구들의 도움으로 열린 그 연주회에서 슈베르트 자신이 직접 지휘를 했다. 그의 작품이 대중과 만나는 첫 번째 공연이어서 의미가 깊은 날이었다. 어릴 쩍 그에게 음악 지도를 했던 성당의 음악 단장 미하엘 홀처가 제자에게 경의를 표했고, 슈파운과 홀츠아펠이 바이올린과 첼로를 연주하여 우정을 표했다. 그리고 케른트너토어 궁정 악단장과 살리에르를 비롯해 빈의 고위직 인사들이 참석하여 그의 공연을 감상했다. 두꺼운 안경을 쓴 그 쪼그만 아이가 어느새 성장하여 미사곡을 선보인 그 공연은 비록 비슷한 나이 때의 멘델스존처럼 세상을 흔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의 음악 재능을 알리는 데는 손색이 없었다. 음악가로의 가능성을 보인 첫발이었던 것이다.


이런 음악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는 아버지의 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교직에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좋아했던 그는 몇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초등학생들을 동생처럼 대하며 가르쳤다. 사실 성의 없게 하려고 해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교장 선생님 때문에 등한시할 수 없었다. 그런 꽉 짜여진 생활에서도 그는 틈만 나면 슈파운이 주도하는 빌둥에 나가 선배들과 어울렸고, 특히 가곡 작곡에 매진했다. 아버지는 마음은 콩밭에 가있는 그런 슈베르트가 영 달갑지 않았다. 틈만 나면 도망가려는 자와 잡아두려는 자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2년 동안 지속 되었다. 보조교사 생활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아버지는 입이 석자나 나온 슈베르트에게 생애 처음으로 중고지만 그 비싼 피아노를 사주면서 그를 달랬다고 한다. 하지만 그 피아노는 1년도 치지 못하고 고장이나 버렸다고 한다.


      3. 난쟁이


그런 가운데서도 슈베르트는 결혼을 깊게 고민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20대를 들어서는 초입이었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성당의 합창단에서 소프라노를 맡고 있던 테레제 그로프가 당사자였다. 방직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테레제의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슈베르트 집안과 돈독한 교분을 나누고 있어서 슈베르트와 테레제는 동네 친구처럼 막역하게 지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슈베르트는 성당 성가대 출신인 그녀를 위해 여러 개의 가곡을 썼다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곡이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물레질하는 그레트헨(D118)'이었다. 훗날 슈베르트 사후 테레제는 당시 슈베르트가 준 16곡이 담긴 가곡 모음집에 '오직 나만이 간직한 슈베르트의 노래들'이라는 제목을 적어 소중하게 간직하다가 그녀의 조카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테레제는 포동포동 한 체격에 미인 형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결혼 성서의 조건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안정을 찾아 주려는 아버지의 뜻이 결부되기도 했고, 슈베르트도 자신의 여러 가지 형편을 고려해 볼 때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슈베르트의 뜻은 성사되지 않았다. 당시 오스트리아 불문법 같은 전근대적인 사회 규범에는, 일반인들은 가족을 부양할 만큼의 수입이 있어야 하고, 그 증빙을 국가에 제출하여 심사를 거쳐 혼인에 대해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런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호적에 올라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슈베르트는 그 법에 걸려 결혼을 포기해야만 했다. 나이도 어리거니와 보조교사의 수입은 알바 수준으로 보잘것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제도에도 불구하고 귀족이나 지주나 고위직 자녀는 백수라도 이 법에 적용되지 않았다.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체제였던 오스트리아에서는 마지막까지 그런 계급 차별 문화가 당연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슈베르트는 실망은 했지만 이에 낙담하지는 않았다. 사실 테레제를 열렬히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단지 현실적으로 14명의 자식을 낳은 어머니처럼 가족을 꾸리기에 적합한 여자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그렇게 혼인에 실패하고 몇 년이 지난 후 테레제는 제빵 업자와 결혼한다. 만약 당시 슈베르트가 테레제와의 혼인이 성사되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슈베르트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겨울 나그네'와 '소녀와 죽음' 같은 음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렇게 생활인으로서의 현실적인 상황과 예술가로서 성장해야 할 상황이 서로 충돌하면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슈베르트를 다행스럽게도 진심으로 걱정하고 도와주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친구들은 슈베르트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국이었던 라이바흐(현재 슬로베니아 수도) 주 교사 양성학교 음악 책임 교사 모집에 지원서를 냈다. 대음악가이며 슈베르트의 스승인 살리에르와 빈 초등학교 교육 감독관장에 재직 중인 요세프 스펜도우 신부가 추천서를 써 주었다. 그런 영향력으로 21명의 지원자 중 최종 결선 3명에 포함이 되었지만 최종 심사에서 낙방을 했다. 슈베르트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독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심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당시 합격을 했다면 그의 음악 인생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논하는 식자들이 많지만, 사실 미루어 짐작을 해보면 그는 조직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개연성이 충분할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돼먹은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다. 잠시 돌아갈 뿐 결론은 숙명처럼 똑같은 자리에 당도해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나름 잘 버티던 슈베르트는 보조교사 2년이 지날 무렵 드디어 가출을 감행했다. 이제 20살이 목전인데 더 이상 예술가의 길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의 가출에는 쇼버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자신의 집에 기거할 수 있게 할 테니 음악에 매진하라고 꼬드겼던 것이다. 이제 다 큰 끼 많은 막내아들놈을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아버지는 심하게 말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큰 아들 이그나츠도 그만한 나이에 자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붙잡아두는 데 성공하지 않았던가.


쇼버 집에서의 무료 하숙은 슈베르트에게 처음으로 자유를 선사했다. 탕아 기질이 농후한 쇼버와 함께 기거하니 어리숙한 슈베르트의 입장에선 욕망의 분출구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혈기왕성한 20살의 청춘이지 않는가. 예술가의 데카당스는 항상 양면적인 측면이 있듯 그에게 사회의 규범과 도덕과 윤리를 적용시킬 수 없었다. 하긴 보수적인 오스트리아와 진보적인 프랑스에서 보는 데카당스는 다를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슈베르트는 쇼버와 함께 살고 있을 때 음악적으로 한층 도약하게 만든 인물을 만났다. 쇼버의 풍부한 인맥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성악가 포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회 계급적으로나 음악계의 네임밸류를 볼 때 현격한 차이가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상상 외로 가깝게 지내며 영원한 음악적 동지가 되었다. 자신의 작품을 최고의 성악가가 불러준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슈베르트는 잠시 그런 행운을 망각하기도 했지만, 절교를 하는 등의 막 나가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고는 했다. 그때마다 포글은 그를 감싸주었다. 포글은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슈베르트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키워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20살 무렵의 슈베르트, 그는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순진한 청년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어리바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세상 물정 알 것은 다 알고, 성향적인 측면에서도 자신의 주장이 뚜렷한 젊은 예술가였다. 가슴이 두뇌를 지배한다고 그는 믿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깃발을 들어 올린 것처럼 기존의 음악 양식에 순응하지 않는 반항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베토벤이란 거장이 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상징하듯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고전주의 음악이 오스만 튀르크도 꿇지 못한 빈의 성벽처럼 견고하게 버티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그런 음악계의 경향은 종교적인 도그마처럼 음악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방가르드처럼 새로운 사조의 결기를 내세운 것은 아니지만, 슈베르트는 내재화된 뜨거운 가슴으로 자신 만의 음악을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이 생소하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외면당한 것이라고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는 뜨거운 가슴으로 꿋꿋하게 밀고 나갔다. 낭만주의적인 가슴이 낭만주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 자신의 음악이 낭만주의라고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그의 가슴은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당시 그의 일기나 편지를 보면, 그는 크고 작은 음악 공연에서 자신에게 보이는 청중의 갈채를 불신했고, 빈 특유의 세련된 범절을 갖춘 사회의 관례를 부정했다. 또한 가난한 남성에게 결혼을 승인하지 않는 현 체제를 비판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매음의 수렁으로 빠지게 하는 현 상황을 성토했다. '결혼을 거부하는 사내는 금욕의 고통을 받아들이거나 육욕을 해소하기 위해 역겨운 매음굴을 기웃거려야 한다'라고 그는 하소연하기도 했다. 당시의 파리에서 불고 있던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의식구조도 기존의 질서를 대하는 측면에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낭만주의의 기본 틀은 같다는 것이다.


고전주의 음악의 정점이라고 일컫는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하이든 등은 자신의 삶의 질과 음악적 출세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당시 음악 세계의 프로세스가 그러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기존의 질서와 부딪치려고 하지 않았다. 간혹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표현한 작품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것을 떳떳하게 밝히지 않았다. 바흐도 20명이 넘는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음악 공장장을 자처했고, 모차르트는 병적인 낭비벽으로 인한 파탄을 막기 위해 영혼 없이 음악을 생산했고, 그리고 베토벤은 음악 세계의 황제가 되기 위해 음악을 세밀하게 가공했다. 그렇게 위대한 음악가들도 세상과 타협했지만 슈베르트는 자신 만의 색깔을 고수했고, 삶의 질이나 음악적 출세도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 물론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위 거장들처럼 그런 세속적 욕망을 위해 음악을 만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피아노가 있는 혼자만의 작은 공간과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을 정도의 수입만을 원했다. 음악회에서 청중이 보인 반응을 냉소적으로 받아 준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니들이 내 음악을 알 것 같아...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 놓고 타인의 반응을 대하는 그의 나르시스트적인 괴팍한 성향은 마지막까지 이어져다. '죽음과 소녀'를 거쳐 '겨울 나그네'로 가는 일련의 과정은 그런 그의 예술적 감성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쇼버 집에서의 하숙은 영원할 수 없었다. 1817년 8월, 쇼버 집에 들어간 지 9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 쇼버가 갑자기 프랑스로 가기 위해 빈을 떠난 것이다. 군인으로 프랑스에 파병 나가 있던 쇼버의 형이 위급한 병에 걸렸다는 전갈이 와서 다급하게 그 형을 빈으로 데려 오기 위해 프랑스로 간 것이었다. 슈베르트는 그런 상황에서 쇼버의 집에 더 이상 기거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쇼버의 어머니는 계속 있어도 된다고 했으나 슈베르트는 그런 염치가 있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갈 곳이 없었다. 친구들이 부잣집 자녀라고 해도 쇼버처럼 자신의 집을 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쇼버가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한 것은 진심으로 슈베르트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아버지의 부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슈베르트는 하숙집을 얻어 생활할 정도로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다시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 보조교사 일을 해야만 했다. 집 나간 탕아를 거두어준 아버지의 품은 항상 그렇듯 평온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처지가 참담했다. 구속이란 걸 잘 알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현실 앞에 그는 좌절했다. 열패감과 자괴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독립은 요원한 것일까. 큰형 이그나츠처럼 아버지의 성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그런 답답함을 이기기 위해 그는 작곡에 매진했다. 그 작업은 탈출구의 일종이었다. 당시 작곡한 작품이 교향곡 6번과 괴테와 실러와 마이어호퍼 등의 시에 곡을 붙인 65편의 가곡이었다. 그 가곡들은 거의가 포글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이었다. 그렇게 만든 가곡 몇 개가 이그나츠 폰 존라이트의 아들 레오폴트의 도움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3월에는 로마 황제 호텔에서 '이탈리아 양식의 서곡(D590)이 공개적으로 초연되었다. 이에 대한 비평문이 라이프니치히 신문에 실렸는데, 그 기사가 기성 언론에 보도된 첫 번째 비평 기사였다. 멘델스존처럼 대단한 호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난한 호평이었다고 한다.


그런 음악 생활도 지루한 일상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학교생활에 지친 그는 주말이면 살리에르 동문인 안젤름 휘텐브레너의 하숙집을 찾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슈베르트 보다 3살 많았다. 빌둥 서클 멤버가 아니었던 그는 유일한 음악 친구였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음악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의기소침해 있는 슈베르트에게 활기를 불어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동생 요세프를 동생처럼 좋아하여 그에게 '송어(D550)의 필사본을 선물했는데, 당시 슈베르트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는 이에 감복하였으며, 이런 인연으로 훗날 그는 슈베르트의 비서 노릇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휘텐브레너 형제와 어울리는 시간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여름 안젤름이 변호사 시험에 합격되어 빈을 떠나 그리츠로 갔기 때문이었다.


슈베르트의 나이도 이제 20살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더욱 악화되었고 탈출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큰형 이그나츠처럼 되는 것은 도저히 허락할 수 없었다. 그때 기회가 찾아왔다. 음악학교 교사로 봉직하며 귀족의 음악 가정교사로 투잡을 하던 요한 카를 웅거의 소개로 에스테르하지 백작 집에 음악 가정교사로 들어간 것이다. 포글의 연결로 해서 알게 된 웅거는 귀족들과 친분이 두터운 음악가였다. 그의 제안에 슈베르트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1818년 7월, 백작의 두 딸의 음악 가정교사를 하기 위해 여권을 발부받고 헝가리에 있는 젤리스로 떠났다. 여름휴가 4개월 동안 한시적 자리였다. 젤리스는 백작의 여름 휴양지가 있던 지역으로서 당시 유럽에서 상당한 영토를 잃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합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이었기 때문에 헝가리로 쉽게 왕래가 가능했다.


슈베르트가 빈을 떠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새로운 환경을 접한 그는 다소 생경한 분위기에 적응을 못했지만 잘 다듬어진 목가적인 풍경은 금방 그를 사로잡았다. 대학 교수 급여 수준의 임금도 부족함이 없었고, 영지 관리인이 기거하는 별채의 넓고 쾌적한 독방도 매우 마음에 들었다. 빈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질 높은 일상이 매일 이어졌다.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백작의 두 딸인 마리와 카롤리네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지도했는데 무엇보다도 피아노를 마음껏 칠 수 있어서 좋았다. 마리는 16살이었고 카롤리네는 13살이었는데, 그녀들은 착하고 교양이 있어 음악 선생에게 거만하게 굴지 않았다. 특히 카롤리네는 슈베르트를 잘 따랐다. 자신이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넋 놓고 경청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훗날 카롤리네가 성장했을 때 슈베르트의 마음을 훔쳐 열병에 시달리게 하지만 당시는 예쁘고 상냥한 소녀에 불과했다. 젤리스 생활은 슈베르트의 인생에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밤마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현재의 생활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는 편지를 많이 썼다. 특히 형 페르디난트와는 내밀한 내용의 긴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 편지 내용을 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내성적이고 어리숙한 슈베르트와는 달리 21살의 재기 발랄한 청년 예술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론 위트가 넘치고 때론 이타적이고 우정이 넘쳐나는 그러면서 자신의 주장이 분명한 슈베르트를 볼 수 있다. 아무튼 젤리스를 떠날 즈음에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할 것을 형에게 천명한다.


젤리스에서 빈으로 돌아온 슈베르트는 페르디난트에게 천명한 것처럼 아버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드디어 독립을 선언했다. 에스테르하지 백작한테 받아 모은 급여가 그런 행동을 가능하게 했다.  적어도 독립의 마중물로서 충분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빈에 있는 백작의 저택에서 계속 가정교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일정한 수입도 보장되어 있었다. 그렇게 경제적인 여건을 확보한 후, 벌써 몇 년 전부터 자신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었던 마이어호퍼와 작정하고 그의 하숙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마이어호퍼는 직접 아버지를 만나 음악가로서의 장래가 밝다는 것과 자신이 다른 데로 빠지지 않게 잘 데리고 있을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설득을 한 끝에 겨우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흔쾌히 승낙한 것은 아니고 다시 돌아올 것이란 일말의 기대감이 담긴 승낙이었다.


마이어호퍼와의 동거는 2년 동안 이어졌다. 마이어호퍼는 슈베르트와의 인연과 자신의 하숙집에서 함께 생활한 일화를 이렇게 회고했다.  "슈베르트를 알게 된 계기는 친구(슈파운)가 그에게 내 시 "Am See"를 주고 악보를 만들게 하면서부터였다. 그 친구는 슈베르트를 5년 후인 1818년에 내가 살던 하숙집에 데려왔다. 집은 어둡고 우울한 골목에 있었고, 그 집에는 오래되어 마모가 심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천장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맞은편의 거대한 건물이 빛을 가리고 있었고, 낡은 피아노와 초라한 책꽂이가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며 우리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 시와 음악에 대한 이 깊은 정서와 상호 사랑은 우리의 우정을 점점 더 돈독하게 만들었다. 나는 시를 썼고, 그는 내가 쓴 시를 보았고 악보에 멜로디를 적었다." 낭만적인 성향이 강했던 마이어호퍼는 슈베르트에게 잠재해 있던 예술적 감수성을 자극하여 멜랑꼴리 한 특징을 발현하게 만들었다. 후기 슈베르트에게서 보이는 멜랑꼴리 한 경향은 당시 마이어호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다. 서로 그런 예술적인 성향과 내면적인 소통이 화학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두 미혼 남성이 2년 동안 동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성이 부족한 슈베르트 같은 예술가와 한 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상대방의 포용력이 필수인데 그런 면에서 마이어호퍼는 제격이었다.


마이어호퍼는 신경정신과적인 치료를 요할 정도로 불안 장애를 겪고 있었지만 슈베르트에게만큼은 배려심을 아끼지 않았다. 슈베르트는 대게 오전에 작곡을 하고 오후에는 밖에서 활동하는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이어호퍼는 그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오전에는 집을 비워주었다. 그리고 오후에 슈베르트가 없는 하숙집에 들어와 공무원 시험 준비와 시를 구상하면서 자신의 공간을 확보했다. 쾌적하지 않은 공간에서 함께 오랫동안 생활을 하면 누구든 보이지 않는 갈등이 발생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불편한 그 무엇을 느끼기 마련이다. 마이어호퍼는 영리하게 그런 심리를 조절하면서 동거를 이어가게 했다. 다소 이기적이면서 예술가 특유의 예민한 성향을 가진 슈베르트가 때론 건방진 행동을 할 때도 있었지만 마이어호퍼는 그런 슈베르트를 다 받아주었고, 슈베르트도 마지막 선은 넘지 않고 그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잃지 않았다.


독립에 성공한 슈베르트는 이제 전업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펼쳐갔다. 당시 작곡가라면 모두가 선망의 대상이었던 오페라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 슈베르트는 뜨거운 열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전초전으로 징슈필, 오라트리오 등에 전념하여 쌍둥이 형제(D647), 목동의 탄식, 아드라스트(D137), 나자로 혹은 부활 축일(D689) 등 무대음악을 작곡했다. 그리고 미사곡과 가곡과 실내악 등도 꾸준하게 만들었는데, 송어로 유명한 현악 5중주가 당시에 작곡한 것이었다. 그중에는 공연에 올린 작품도 있고, 미완성곡으로 남은 것도 있고, 사장되어 전해지지 않는 곡도 있었다. 특히 징슈필 아드라스트는 마이어호퍼가 대본을 섰는데, 몇 년 전 함께 작업했던 살라만카의 친구들(D326)도 당시 손을 보았다. 현재 우리는 슈베르트라고 하면 실내악과 가곡이 먼저 떠오르지만 당시의 궁극적 관심사는 오페라였다. 그의 수많은 가곡과 징슈필도 그 정점으로 가기 위한 방편이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음악세계에 뛰어든 슈베르트의 미래가 결코 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러 각도에서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빈 악우협회에 가입시켜 주기 위해 본업이 변호사인 레오폴트 손라이트너가 발 벗고 나섰다. 악우협회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모여 만든 단체로서 당시 교향곡과 오페라 등의 대형 공연이 있을 경우 수십 명의 연주자를 모으기가 쉽지 않은 상화에서 그것을 충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급여를 주고 오케스트라라는 단체를 유지하던 시대가 아니라 공연이 있으면 각 악기 파트 연주자를 임시로 모아 악단을 구성했는데 그 인원을 악우 협회에서 대부분 충당하였던 것이다. 아마추어라고는 하지만 전업 연주자로 생활하기 어려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본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연주 실력은 프로급인 연주자들이었다. 아무튼 그런 성격의 음악 단체여서 오스트리아 음악계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모테가 바로 당시의 악우협회였다. 따라서 그 협회에 가입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웠다. 그 협회를 만든 사람이 레오폴트의 백부인 요제프 존라이트너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는 아마추어가 아니다는 이유로 가입을 하지 못하고 몇 년 후 재차 시도한 끝에 가입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비록 가입에 실패는 했지만 당시 빈 음악계에 종사하던 음악인들과 교류하는 계가가 되었다. 주변에 울타리처럼 쳐져 있던 비음악인들을 벗어나 음악적 지평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내향적인 성격 탓에 차려진 밥상을 마음껏 먹지는 못했다.


사실 음악적 지평을 현실적으로 넓혀준 사람은 포글이었다. 당대 최고의 성악가였던 그는 슈베르트를 보물처럼 아꼈는데, 때론 부모처럼 때론 자신의 음악적 후견인처럼 대놓고 돌보아주었다. 슈베르트가 그런 포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기록은 없지만 그를 잘 따랐던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그들의 관계는 빈 음악계에서 유명했다. 포글과의 첫 번 째 음악 여행은 1819년에 이루어졌고, 1823년과 1825년 2번 더 이루어진다. 여행의 동선은 포글의 고향인 슈타이어에 먼저 가서 여러 도시를 2달 동안 여행한 후 빈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여행의 목적은 슈베르트의, 슈베르트를 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크고 작은 도시를 여행하며 세상도 구경하고, 가는 곳곳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 슈베르트가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가곡을 부르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실내악을 조직해 자신의 곡을 연주도 하고, 당연히 포글 자신도 그의 가곡을 불렀다. 물론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수입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포글의 주선으로 많은 중상류층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고, 자신에 대한 인지도의 저변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빈 어디에서 자신의 곡을 그렇게 많이 연주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슈페르티아데 정도이지 않는가. 아마도 이런 식의 전국 음악 투어는 슈베르트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물론 포글이 기획하고 추진한 것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슈베르트가 독립하여 음악가로서의 황성하게 활동을 하자 아버지는 그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류상에서도 보조교사의 직함을 삭제하고, 이제 마음에서도 막내아들을 떠나보낸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징집 서류에 키를 157cm로 기록하여 최소한 징집을 모면할 수 있도록 보호 장치를 마련했다. 징집 면제의 사유가 되었던 교사 직함이 사라졌기 때문에 징집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슈베르트의 신장이 작았다는 이야기가 아버지의 이런 편법적인 행위 때문인지 실제로 그 정도였는지 모르지만 그림에서 보더라도 평균보다는 작았던 게 사실로 보인다. 아마도 157이란 수치는 징집 기준 미달에 해당하는 수치였는지 모른다. 하여튼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대치를 하는 상황에서 군대에 가야 할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기대대로 결국엔 영장이 날아오지 않았다.


당시의 오스트리아 정국은 유럽 역사 이래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찰국가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쟁의 화신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당하는 역사적 상황을 격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자신들의 본거지인 오스트리아를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화정 운동과 개인의 자유 등 기존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개혁 광풍을 차단하기 위해 극도의 강압정책을 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떠한 형태든 시위 집회를 금지하고, 언론 출판에 대한 검열이 더욱 강화되고, 학생회와 체육협회 행사도 차단하고, 반정부 의사 표현도 엄벌에 처하고 그런 단체와 그 구성원을 감시하고 단속했다. 더구나 1819년에 보수파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극작가 출신의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가 급진 좌파 학생인 카를 루트비히 잔트한테 암살을 당했기 때문에  반정부 세력에 대한 탄압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정국에서도 젊은이들은 즐길 것은 즐기고 있었는데, 슈베르트가 그런 가운데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가 된다. 사건의 중심에 슈베르트의 기숙학교 3년 선배인 요한 젠이 있었다. 빌둥 서클의 멤버이면서 슈베르티아데의 일원이기도 했던 그는 대학에 들어간 후 진보적 성향을 보이더니 급기야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당연히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어떤 낌새가 보이면 금방 체포될 상태였던 것이다.


그날은 빈에 유학 온 요한 젠의 고향 친구들이 모여 진창 술을 마시고 젠의 하숙집에 집단으로 투숙하던 날이었다. 젠의 친구가 4명이었는데,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그 일원 중에 슈페르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빌둥에서 인기가 많았던 젠과 친하게 지내던 처지였기 때문에 함께 술판을 벌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젠의 고향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동석했다는 것은 아마도 젠이 고향 친구들에게 음악가인 슈베르트를 자랑하고 싶은 생각으로 초대를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추정해 보면 동석의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젠이 경찰의 감시망 안에 있다는 것은 그의 친구들이나 슈베르트도 잘 알고 있어서 만남을 주저할 만도 했지만 슈베르트는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1820년 3월 어느 날 새벽, 경찰이 젠을 체포하기 위해 그 하숙집을 급습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젠을 포함한 5명을 체포되었다. 그중에 슈베르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체포 과정에서 일당들이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제압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두꺼운 안경을 끼고 땅딸막한 슈베르트가 유독 거세게 항의했는데 아마도 술이 아직 덜 깬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범인 젠은 구속된 후 재판에 회부되어 14개월 구금과 빈에서의 무기한 추방령을 언도받았다. 고작 요주의 인물이 불성실한 회합을 주도했다는 죄목이었다. 아예 근본적으로 싹을 자르기 위해 본보기로 젠에게 과도한 형벌을 내렸던 것이다. 그 후 빈에서 젠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슈베르트 같은 시민들에게 부채의식을 남기고 떠난 고결한 존재로 친구들에게 기억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젠은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변방을 전전하다가 어느 작은 도시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그런 와중에 시집도 출간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나머지 4명은 훈방으로 금방 풀려났는데, 슈베르트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슈베르트는 그 과정에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술김에 체포당하는 과정에서 다른 친구들보다 과하게 저항을 했지만 술기운에 빠져나가자 곧바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후회해야만 했다. 지금도 변호사 없이 신문을 받으면 위압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하기 마련인데 당시 경찰국가 상황에서는 고문은 다반사였다. 당시 취조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다는 근거는 없지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만큼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슈베르트라는 위인이 반정부 운동을 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 경찰관은 정신적으로 심약한 그에게 따끔한 훈계로 마무리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 정도만으로도 슈베르트에겐 육체적 고문에 버금가는 고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설에 의하면 눈덩이에 멍이 든 것을 보았다는 소문도 있는데, 어찌 되었든 반골기질이 다분했던 슈베르트는 그 사건으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이후 체제 비판적인 견해를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 노골적으로 나폴레옹을 메시아처럼 영웅화했고, 그 후에도 다각도로 세상을 향해 불만을 표출했던 베토벤도 당시 당국의 요시찰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그에 비하면 슈베르트는 순한 양에 불과했다.


그렇게 한바탕 치도곤을 치르고 풀려난 슈베르트는 마이어호퍼 하숙집으로 가지 않고 알저그룬트 고아원에서 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둘째 형 페르디난트 집에 몸을 맡겼다. 난생처음 당해보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거의 멘틀 붕괴가 되어 혼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페르디난트는 박봉에 형수와 어린 조카와 함께 조그만 집에서 옹색하게 살고 있었다. 식구 이외의 사람을 들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와 형수는 불만 없이 동생의 공간을 최대한 마련해 주었다. 비록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형의 가족은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슈베르트도 형의 집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사실 슈베르트가 힘들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은 형 집이 유일했는지 모른다. 슈베르트가 마지막 투병생활을 하고 눈을 감은 곳이 바로 페르디난트의 집이지 않는가. 아무튼 슈베르트는 며칠 동안 어린 조카와 놀아주며 무너졌던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마이어호퍼는 그해 겨울이 다가올 무렵 공무원 시험에 합격되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다. 아쉬웠지만 이미 예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사실 더 일찍 공직에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문학에 관심을 더 많이 기울이느라 지체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이어호퍼는 2년 동안 슈베르트와 함께 생활한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2년은 200년 가까이 지난 후에도 음악 애호가들에게 회자된다. 슈베르트에게 문학적 영감을 준 인물이 마이어호퍼였다는 사실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훗날 식자들은 그들의 관계를 동성애로 엮으려고 했지만 그건 과도한 상상력에 불과하고, 그렇다고 그들이 항상 고상하고 지적인 분위기 속에 있진 안았다. 가끔은 혈기왕성한 미혼 남성들의 욕망을 애써 숨기지 않은 행위들이 연출되기도 했다고 한다. 아무튼,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을 슈베르트에게 선사한 시인 마이어호퍼는 문화언론 검열관이라는 터무니없는 공직에 재직하면서도 꾸준하게 슈베르티아데 같은 사교 모임에 참석하며 슈베르트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검열관이란 직분 때문에 슈파운처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그에게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슈베르트가 작곡한 2개의 징슈필과 60개가 넘는 가곡의 대본가로서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슈베르트란 존재가 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는 한 그의 이름도 영원히 그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남아 있을 것이다.


마이어호퍼와 이별을 한 슈베르트는 허름한 하숙집을 얻어 이제 홀로 서기를 해야만 했다. 남들처럼 악기 연주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연주회에 초청되거나 악단 단원으로 알바를 할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친구들의 도움으로 악보를 출판하면서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이어호퍼 집에는 그래도 낡은 피아노가 있어서 작곡에 도움이 되었지만 새로 마련한 집은 피아노를 놓을 공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악기 없이 대부분 시간 동안 작곡을 해온 터라 피아노가 없다고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기타로 대신할 수 있었다. 백지에 소설의 첫 문장을 쓰듯이 그는 빈 악보에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복잡한 기호를 점점이 새겼다. 상상 속에서 떠돌던 수많은 선율들이 어떤 창조의 능력에 의해 오선지에 기록되어 갔다. 창조의 순간은 환희를 불러오기도 하고 때론 고통을 주기고 한다. 무질서가 질서화되는 과장은 늘 경이롭다. 그 몰입은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내가 천지창조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난한 작곡가는 골방에 틀어박혀 작업에 몰입했다. 당시 안젤름 휘텐브르너의 동생 요제프가 잠깐 슈베르트의 비서 노릇을 해주었다. 노동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료 봉사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요제프가 작은 대가라도 원했다면 이런 관계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요제프는 슈베르트교의 충직한 신도였기 때문에 금전적 대가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헌금을 내야 했는지 모른다. 형보다 요제프가 더 슈베르트를 좋아했다. 그는 슈베르트의 악보 출판 관계, 연주회 일정 관리 그리고 음악과 관련된 인물들을 관리해 주었다. 그리하여 슈베르트는 사람들과 접하는 상황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특히 출판사 사람들과 흥정하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들었는데 그것을 요제프가 잘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슈베르트가 간혹 싫은 소리도 하고 짜증을 부릴 때도 그는 슬기롭게 잘 받아주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일상은 권태로웠다. 몰입도가 높아지면 일상은 의미를 상실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몰입도가 낮아지면 일상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 현상은 고도의 상상력과 몰입을 원하는 예술가에게서 잘 나타난다고 한다. 삶의 에너지가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그렇게 될 개연성 충분하다. 그래서 그들은 작품에서는 천상의 경지에 오를 수 있지만 일상 세계에서는 모든 게 젬병이가 된다. 슈베르트는 그런 증상이 유독 심했다. 당시 슈베르트의 비즈니스 부분을 도와주던 레오폴트 존라이트너의 후일담에 의하면, 슈베르트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연주회 리허설에 참석하지 않아 원성을 샀고, 악보 출판 관계에 대해서도 피동적이어서 성사에 애를 태웠고, 영향력 있는 인사의 사교 모임에도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낭패를 겪었고, 그렇다고 미안하다는 표현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만들어진 이런 습성은 시정되지 않고 그의 일상이 되었다.


아무튼 마이어호퍼가 떠난 지 몇 개월이 지난 1821년 봄이었다. 무미건조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 마치 긴 원정을 마치고 개선문을 통과하는 나폴레옹처럼 드디어 쇼버가 집안일을 정리하고 빈에 입성한 것이다. 그가 빈에 나타나자 갑자기 슈베르트 일당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침체되어 있던 슈베르티아데가 쇼버가 나타나자 주인을 만난 것처럼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이다. 각자 일상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슈베르티아데 멤버들이 삼삼오오 쇼버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쇼버의 아파트와 크라운 호텔과 바서부르거 커피하우스 등을 전전하며 흥겨운 파티가 열렸다. 옛 멤버들도 있었고 신참도 보였다. 7월에는 아첸브르너 하우스에서 3일 동안 파티가 이어졌는데 여성들도 참석하여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한 연주회가 끝난 후, 가정이 있는 참석자들은 귀가를 했지만 때론 취기 오른 청춘들은 남아 진한 여흥을 즐겼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 여흥이지 주체하지 못하는 욕망들이 범람하여 결국엔 난잡한 파티로 발전하였다는 증언들이 있다. 남자들의 욕망 분출 파티는 과거 로마에서 보듯 당시에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었다. 알코올과 하시시 연기와 그리고 음란한 여색 등이 뒤엉켜 있는 분위기는 그들에겐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인 능력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했다. 단지 슈베르트의 명성에 금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 당시 멤버들이 입을 굳게 다물도 있었기 때문에 슈베르트아데는 순수함을 지킬 수 있었다. 설에 의하면 슈베르티아데가 퇴폐적으로 변질된 것은 쇼버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참석자 모두가 공범이었다. 친구 따라 여색을 좆았다고 그 친구를 탓할 수 없는 법이다. 더구나 그들은 사회의 엘리트였다.


우리의 주인공 슈베르트는 이런 분위기에 푹 빠져 있었다. 사실 자신이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슈베르티아데를 등한시할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사교 파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당연히 작곡은 등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슈파운이 보다 못해 쇼버에게 슈베르트를 위해 자제할 것을 당부했고, 쇼버도 그의 의견을 받아주어 마지막 선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쇼버는 슈베르트와 끈끈한 친구였다.


그렇게 한동안 욕망을 분출하면서도 슈베르트는 쇼버와 함께 오페라 작업에 몰두했다. 사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쇼버와의 오페라 작업은 실패를 예고하고 있는, 애초부터 안 되는 작업이었다. 쇼버가 대본을 쓴 그 작품의 제목은 '알폰소와 에스트레야'였다. 슈베르트는 쇼버의 작가적 능력을 믿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쇼버의 능력은 형편없었다. 돈 많은 백수건달의 사교적 사치품에 불과한 작가 역량은 비평의 대상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깍지가 낀 슈베르트는 쇼버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 그 오페라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1822년 2월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인 베버가 지원했지만 포글이 예상했던 것처럼 슈베르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음악은 그런대로 훌륭하나 극의 플롯과 대사와 주제 등은 너무나 결함이 많았다고 당시 음악계가 전한다. 종합 예술인 오페라가 가지는 기본조차 지키지 않았다고 악평을 하는 음악인도 있었다. 그런데도 슈베르트는 그 작품을 생의 마지막까지 마련을 버리지 못하고 공연을 열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그 작품은 슈베르트 사후 1854년 프란츠 리스트에 의해 초연되었는데, 쇼버가 당시 리스트의 비서를 한 인연과 슈베르트의 작품이 재평가가 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사실 리스트는 대본가인 쇼버와의 관계와 그리고 슈베르트를 경배하는 차원에서 원곡의 상당 부분을 잘라내는 등 편곡을 거쳐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리스트는 가곡이나 실내악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며 100곡이나 작품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여 출판까지 했지만 '알폰소와 에스트레야'에 대해서 만은 혹평했다고 전한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오페라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슈베르트는 유독 오페라에 집착했다. 여기서 잠깐 그의 오페라에 대한 언급하고 가겠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21개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오페라 전문 작곡가 보다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자세히 드려다 보면 징슈필 장르가 절반이나 되고 마술극과 오라트리오도 여러 개 포함되어 있다. 그것보다 그 21개의 작품 중에 정상적인 오페라로서의 완성품은 '알폰소와 에스트레야(D732)', '피에라브라스(D796)' 정도이고 나머지는 10대 때 동아리 차원에서 만든 습작 정도의 작품과 만들다 포기한 미완성 곡 등이 대다수였다. 생전에 그나마 공연을 할 수 있었던 '마술종(D723)', '마술하프(D644), '쌍둥이 형제(D647)'도 대중성이 강한 짧은 작품이었고, 마지막 무대작품인 로데문자(D797)는 서곡만 공연되었다. 그리고 몇 개의 작품 외에는 제대로 출판도 되지 않아 조각조각 일부분만 남아 전해지는 실정이다. 작품 수에 비해 출판과 공연이 미미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가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당시 빈의 음악 시장이 전반적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차르트가 생존해 있을 때 반짝 성공을 거두었지만 슈베르트 시기에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어 독일 풍의 오페라는 자리를 붙일 곳이 없었다. 빈 궁정오페라극장 감독도 아예 이탈리아에서 도미니코 바르바야를 많은 급여를 주고 영입하여 자리에 앉혔다. 합스부르크의 본산인 빈에서는 당시 유럽의 모든 오페라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에서 온 로시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마탄의 사수로 성공적인 공연을 마쳤던 베버도 2년 후 발표한 '오이뤼안테'가 폭망 할 정도였으니 당시 슈베르트가 만든 '알폰소와 에스트레야'와 1년 후 다시 심혈을 기울여 전문 대본가와 함께 만든 '피에라브라스' 정도는 아예 공연 일정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외부적인 요인도 작용을 했지만 무엇보다도 슈베르트는 오페라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이탈리아 출신이면서 자신도 오페라를 많이 만들었던 살리에르를 스승으로 모셨지만 정작 슈베르트는 이탈리아 오페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교범 삼아 독일식 오페라에 전념했기 때문에 시대와 엇박자를 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슈베르트는 오페라에 대한 이해와 소양과 그리고 경험이 부족했고 그와 더불어 주제 선정이나 무대 음악이 필요로 하는 극적인 묘사나 연출에 대한 경험 등도 부족했다. 또한 아마추어 대본 작가와 손을 잡은 이유도 컸다. 이 모든 원인을 종합하면 그는 오페라에 대한 역량이 부족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학창시절  친구들의 여흥을 위해 간단한 징슈필을 만들었을 때 그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던  그 경험이 그를 우쭐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에도 모차르트처럼 모든 음악 장르를 섭렵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모차르트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그는 간과했던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베토벤처럼 한 곡 정도는 성공작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는지 모른다. 오페라는  자신의  위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상승의 필수 조건이라고 인식했던 것일까. 명성을 위해서든 아니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든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오페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남들이 안 된다고 혀를 찼지만 그는 어떤 확증편향에 사로 잡힌 듯이 오페라를 신념화했는지도 모른다. 1827년, 그가 사망하기 전 해에 삼총사(슈베르트, 슈미트, 바우에른펠트) 중에 한 명인 바우에른펠트가 대본을 쓴 '클라이헨 백작(D918)'을 만들다가 결국엔 2막에서 중지하고 미완성으로 남겼던 것을 보면, 오페라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오페라가 아니더라도 이미 그것을 뛰어넘는 훌륭한 음악을 넘쳐나게 많이 만들었다. 오페라가 없는 빈 구멍을 메우고 남을 만큼 그는 많은 곡을 생산해 낸 것이다. 베토벤도 한 곡을 만들었지만 예우 차원에서 겨우 살아남았고, 멘델스존도 3곡을 작곡했지만 폭망 하여 20살 이후에는 포기했었다. 그리고 베를리오즈와 리스트와 슈만도 한 두 곡을 만들었지만 성공을 하지 못했으며 그 후로는 아예 오페라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페라 없이도 그들은 위대한 음악가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는 너무나 많은 양의 에너지를 소모하면서도 오페라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영감의 낭비였다. 오페라 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이 필요한지는 음악의 문외한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슈베르트는 그렇게 신이 내린 영감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마구 써버린 것이었다. 모차르트처럼 말이다.  


 오페라 실패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의 미래는 어둡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예술계의 대모라고 불리는 카롤리네 피올러의 저택에서 자신의 곡이 연주되는 영광을 얻었고, '일반음악 신문'이라는 저널에 그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리뷰가 실렸다. 그리고 그해 3월에는 또 다른 예술 전문저널인 '빈 예술, 문학, 연극, 패션'에 그보다 더 긴 장문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신인에게 매우 보수적이었던 당시 언론이 이 정도의 관심을 보인 것은 매유 고무적이었다. 이제 20대 중반이 된 나이에 비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상승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불과 40년 전 모차르트는 10년 동안 이 빈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은 비록 버거울지 모르지만 그래도 슈베르트는 지치지 않고 빈의 음악세계에서 한 발 한 발 진일보하고 있었다. 전업 음악가로서 기반을 다져간다는 의미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었다.


        4 겨울나그네


사실 그런 삶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평범한 것은 비범한 것이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지극히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성공에 취한 슈베르트는 많은 시간을 인생을 즐기는 데 허비했다. 쇼버 아파트에 기거하던 슈베르트는 연주회나 출판 등으로 수입이 생기면 친구들을 모아 진하게 술을 사주기도 했고 때론 돈이 궁할 때는 쇼버 같은 친구들에게 술을 얻어먹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혈기왕성한 젊은 청년들은 향락적인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란한 생활은 슈베르트의 순수한 영혼을 갉아먹었다. 더구나 파티에서 충족하지 못한 많은 부분을 쇼버와 개인적으로 충당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쇼버의 집에서 두 사람이 아편을 피우고 있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아편을 피우는 것은 불법이 아니었지만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보다 강렬한 그 무엇을 원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세상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타락한 천사가 되어 해방감을 만끽하는 비틀어진 생활에서 그는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런 방종한 생활로 인해 그는 주변 친구들과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친구나 동료 음악인들에게 화를 잘 내고, 함부로 대하기도 하고 때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다투기도 하고, 그리고 그들을 냉소적으로 무시하기도 하고, 하물며 가족으로부터의 연락을 피하기도 했다. 그를 진심으로 도와주려는 지인들에게 행하는 무례함은 금방 역작용을 일으켰다. 기숙학교 동기인 홀츠아펠은 그런 소문을 듣고 슈타들러에게 슈베르트를 호되게 질책하는 편지를 섰고, 대부와 같은 포글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을 본 슈파운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의 행동은 배은망덕하다고 친구들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순수한 팬심으로 자신의 매니저 역할을 하던 요세프 휘텐브르너에게도 하인 취급을 하고, 역정을 내고, 퉁명스럽게 대하곤 했다. 친구들은 그의 이런 외적인 변화는 바로 쇼버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슈파운은 만나는 사람마다 쇼버의 행동을 비난하고 슈베르트가 그 늪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랐다. 심지어 쇼버란 놈은 순진한 슈베르트를 등쳐먹고 있다고 힐난했다. 그렇다고 슈베르트에게 직접 이런 문제점을 일깨워주고 제자리로 돌아올 것을 조언하더라도 현재 그의 정신 상태로 볼 때 수긍할 수 없을 것은 자명했다. 염치없는 친구들의 장단에 놀아나기 쉬운 성향을 가진 슈베르트는 그렇게 20대 중반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탕하고 이기적인 생활은 몸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서 잦아들었다. 바로 매독 판정을 받은 것이다. 슈베르트가 매독에 감염된 근본적인 이유는 쇼버 때문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를 어둠의 세계로 끌고 가 결국은 육신까지 파멸하게 만든 원흉이 쇼버였지만, 쇼버는 그런 인과율을 수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매음굴에 간다고 해서 모두가 매독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 쇼버는 매독 증상 없이 80살까지 장수했기 때문이다. 원인을 제공했지만 과정과 결과는 슈베르트 탓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친구 따라 윤락가에 갔다가 성병에 걸려 오는 경우는 당시에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당시 남성 중에 15%~20%가 매독 환자였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유럽에서는 흔한 병이었다. 현재는 매독이 거의 퇴치되었다고 하는데, 설령 발병된다고 하더라도 항생제 하나면 손쉽게 치유되지만 당시에는 한번 걸리면 치료하기 힘든 천형이었다. 20세기 중반 페니실린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치사율도 높아 매독으로 죽은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특히 중요한 치료법 중에 하나가 수은 치료인데 오히려 매독균 보다 수은 중독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수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만병통치약으로 써왔는데, 중세 이후에는 매독 치료의 핵심 약제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환부에 바르기도 하고 끓여서 증기를 발생시킨 후 환자에게 훈증을 시키기도 하고, 증상이 심할 경우에는 아예 수은을 복용하기도 하고 때론 목욕 요법도 사용했다고 한다. 사실 인간의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뒤처진 분야가 의학이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이 19세기에 급속하게 발전한 것에 비하면 의학은 아직도 중금속인 수은으로 질병을 치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19세기엔 매독으로 사망한 유명인이 많았지만 병의 특성상 사망 원인을 딴 곳에서 찾아 기록하기도 했다고 한다. 베토벤, 모차르트, 파가니니 등 많은 음악가들의 사망도 매독과 관계가 있다는 설이 유력하다. 특히 음악가를 포함한 예술가들의 매독 감염률은 일반인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고 성직자들도 매독에 감염되는 경우도 있었다. 매독은 인간의 욕망에 의한 부도덕한 행위의 죗값으로 감염되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그런 은밀성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20세기 후반의 에이즈처럼 익명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슈베르트였다.


슈베르트는 병세가 악화되자 쇼버 집을 나와 본가로 들어갔다. 매독에 걸린 사실을 극비에 부친 것은 당연했다. 매독 증상의 특성상 사람마다 잠복기간이 다양하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그에게 발진과 통증 등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2기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기일 경우에는 잠복기로서 증상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2년 간의 발병기 동안 호전과 악화를 수차례 겪으며 치료에 집중했다. 주치의는 기숙학교 동창인 베른하르트였다. 병세가 악화될 때는 외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19세기 당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수은 치료가 슈베르트에게도 적용되었고 그 외에도 하제 치료, 금식 치료 등 지금 시각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치료법이 동원되었다. 당연히 그런 치료는 많은 돈을 필요로 했고 슈베르트 같은 평민은 감당할 수 없었다. 남아메리카에서 거의 수입해 온 수은은 상당한 고가였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수은 요법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경제적 사정은 바닥을 쳤다. 슈파운이나 쇼버 같은 절친들이 금전적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런 귀족적 치료를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삶의 질은 악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살고 싶었다. 아직도 만들어야 할 곡들이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슈베르트를 불안하게 만든 것은 그의 존재가 대중으로부터 잊혀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슈베르트는 병세가 잠복기에 들어가 다소 호전이 되었을 때 마이어호퍼의 주선으로 요제프 후버의 집에 기거하며 작곡도 하고 지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당시 몸이 쇠약한 상태인데도 오페라 '피에라브라스'를 완성해 케른트너토어 국립 극장에 제출했지만 절친인 요제프 쿠펠비저가 요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퇴짜를 맞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는 로시니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오스트리아를 휩쓸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의 오페라는 힘을 쓰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오스트리아 제일의 오페라 작곡가인 비제의 '오이뤼안테'도 쓴맛을 보아야 할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에 이류 오페라 작곡가가 그것도 최고의 극장인 궁정극장에 공연 요청을 했으니 제아무리 친구가 근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사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슈파운의 도움으로 뮐러의 연작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D795)'를 출판하기도 했지만 지인들이 매상을 올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관심은 싸늘했고 음악 평단과 언론도 외면했다. 이 작품의 전곡(20번)이 연주된 것은 슈베르트 사후 28년이 지난 1856년이었다. 그리고 슈베르트는 1823년 10월 다시 매독 증상이 악화되자 병원에 입원했다. 그렇게 치료를 받은 과정에서도 창작의 열정이 식지 않아 병새가 잠깐 호전되었을 때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로데문자'의 악보를 손보기도 했다. 퇴원 후에는 그의 쾌유를 비는 슈베르티아테에 참석하기도 하고, 빌둥 독서회와 사교 파티에도 참석하여 기분을 전환시키기도 했다. 물론 그런 모임에 참석했을 때 흥에 겨우면 자제력을 잃고 술과 담배를 마다하지 않았다.


때로는 극심한 통증과 동반되는 우울증이 그를 지배했다. 통증과 함께, 수은에 푹 절은 몸에서 입을 통해 토해져 나오는 시큼한 중금속 냄새가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매독과 싸우는 것보다도 악마와 같은 중금속의 사슬에서 발버둥 쳐야 하는 상황이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로마에 유학 중인 레오폴트 쿠펠비저에게 매독과 싸우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편지를 썼다. 오늘 밤 침대에 누우면... 내일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는 이 고통이 두려웠다. 과연 매독과 싸워 이겨낼 수 있을지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는 이 질병으로부터 무너지는 자신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원했는지 모른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혹독한 투병 생활도 이제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잦아들었다. 매독균이 잠복기에 들어간 것이다. 병이 완연하게 호전되었을 때 에스테르하지 백작으로부터 음악 가정교사 부탁이 왔다. 1824년 여름이었다. 그렇게 그는 헝가리에 있는 젤리스로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처음 여행 때보다는 들뜨지 않았다. 투병생활의 여파일 수도 있지만 평화로운 별장의 풍경처럼 마음이 평온하지 않았다. 그래도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의 무거운 내면에 뜨거운 감정을 일으키게 한 요인이 있었는데 바로 카롤리네였다. 그녀는 13살 소녀가 아니라 이미 숙녀가 되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슈베르트는 그녀를 연모했다. 흔히 말하는 짝사랑이었다. 그녀에 대한 연정으로 인해 그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럼으로써 시적인 불꽃이 타올랐다. 그녀는 그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었고, 그의 뮤즈였고, 불멸의 여인이었고, 암묵적인 피헌정자였다. 이런 사실은 그의 절친들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1868년 슈베르트의 생애 마지막 시절 삼총사 중에 한 명이었던 모리츠 슈빈트가 그린 슈베르티아데 풍경화에 보면 벽면에 여인의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바로 그 주인공이 카롤리네였던 것이다. 그 그림은 생전에 슈베르트가 그녀를 흠모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작품이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슈베르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음악 재능에는 존중을 표했지만 그의 사랑에는 어떠한 화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백작의 딸이 슈베르트에게 연정을 품을 개연성은 전혀 없었다. 평민이면서 외모가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산도 많은 것도 아닌 남자를 단지 음악 천재라고 해서 가슴이 뜨거워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물론 일방적인 사랑이지만, 이런 러브스토리는 슈베르트 사후 친구들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관계를 다소 과장했을 수도 있었다. 특히 슈빈트의 그림은 그런 의도가 분명했다. 어쨌거나 슈베르트에게 삶의 희망과 창작의 열정을 일깨워 준 주인공이 카롤리네였던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예술적 영감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바로 이성에 대한 사랑과 이별이며 그런 연관 관계는 예술 세계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슈빈트가 그린 슈베르티아데 그림 / 뒤에 걸려 있는 초상확가 케롤리네이다

여기서 잠깐 집고 넘어갈 것은 바로 매독이 슈베르트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사실이다. 매독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사람에 따라 발병기 잠복기를 반복하다가 오랫동안 잠복기를 거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의외로 장수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시나브로 완치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몸속에 있는 박테리아는 보다 강력한 종이었는지 아니면 치료 과정에 집중을 못했는지 모르지만 다시 발병하여 5년 동안 매독균과 눈물겹도록 싸워야만 했다. 그로 인해 그의 영혼은 황폐화되었고 성격과 일상적 행위도 눈에 띄게 바뀌었다. 후세의 정신과 의사들은 기록에 나타난 슈베르트의 행동을 분석한 결과 순환기 기분 장애라고 추정하며 삶의 후반기는 조울증 초기 증상도 확연하게 보인다고 한다. 그런 분석은 고상한 학술적인 분석이고 실재 드러난 그의 행위는 타락한 천사였다.


슈베르트의 전기물과 지인들의 수많은 편지와 회고록들을 보면 극단적으로 이중적인 행동을 보인 슈베르트를 발견할 수 있다. 발병 전에는 천재 예술가 특유의 까탈스러움과 괴팍한 행동을 보이기는 했지만 발명 후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우선, 그는 골초여서 한번 분위기를 타면 파이프를 입에 물고 피아노를 치는 것은 예사였고, 슈베르티아데에서 단막극을 할 때도 아예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흡연은 전에도 있었지만 생애 후반기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그런 과도한 흡연으로 인해 입에서 니코틴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음주였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주벽이었다. 그는 술에 취하면 인사불성이 되어 초대한 지인의 집에서 추태를 부렸고 때론 광기에 찬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절제를 하지 못했다. 취기 오른 그는 장소를 가지지 않고 폭력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술집 어두운 구석에 앉아 불특정 인물을 향해 조소를 띠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기도 하고, 때론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를 목도했다는 증언들이 있는데, 아마도 황폐화된 그의 내면에서 이유 없는 폭력성이 꿈틀거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에 주변 사람들이 혀를 차며 멀리하였고, 심지어 평소에 그를 도와주던 지인들도 하나 둘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세 번 째는 여색이었다. 이렇게 술과 담배에 쩌든 그가 갈 마지막 행선지는 욕망의 분출구였다. 온갖 추악한 방법으로 성욕을 충족한 후에야 그는 조용해졌다. 밝은 슈베르트는 솔직하고, 항상 겸허하고, 진솔하고, 유머스럽고 순수하며, 남다른 의리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어두운 슈베르트는 기분이 급변하여 무절제해지고, 나태해지고, 외모에 무신경이고, 술에 취하면 유혹에 취약해지고, 폭력적으로 돌변하고, 여색에 탐닉하는 괴물이 되었다.


1825년이 되자 슈베르트의 몸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당시에는 의학적으로 완치와 잠복기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복기가 가능한 오래 지속되기를 하늘에 바랄 수밖에 없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슈베르트를 반겨준 것은 악우협회 정식 회원 등록이었다. 그것도 간사 중에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회원 자격은 충분했다. 그리고 로사우 본가를 나와 프루비르트 하우스에 하숙방을 얻었다. 넓고 쾌적한 환경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비싼 하숙집이었지만 에스트르하지 백작에게서 받은 가정교사 급여가 꽤 되었고,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출판 원고료 등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친 마음을 쇄신하기 위해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원기를 되찾기 위해 슈베르트는 그해 5월부터 10월까지 이미 은퇴한 포글의 주선으로 함께 음악 투어에 나섰다. 물론 포글이 모든 경비를 부담했다. 그는 케른트너토어 궁정극장으로부터 상당한 연금을 받고 있었다. 포글의 고향인 슈타이어를 시작으로 린츠, 그문테, 잘츠부르트 등을 거쳐 빈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그들은 항상 그렇듯, 그 도시에서 소소한 콘서트를 열었고, 지역의 상류층이나 지인들과 연회도 하고,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서 평화로운 시간을 향유했다. 슈베르트는 예전처럼 들떠 있지 않고 마치 자신이 여행의 주인이 된 것처럼 담담하게 여행을 즐겼다. 물론 그 여행은 슈베르트를 위한 포글의 기획이었지만, 슈베르트는 이제야 그 여행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돌아온 빈은 많이 변해 있었다. 선한 후원자인 슈파운과 마이어호퍼 같은 선배들은 이미 공직에 진출해 있었고, 그리고 부랄 친구이면서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안젤름 휘텐브르너와 요제프 쿠펠비저도 변호사와 화가로서 각각 자신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느라 분주했기 때문에 예전처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슈베르티아데 신규 멤버인 기숙학교 후배 에두아르트 바우에른펠트와 모리츠 슈빈트와 함께 삼총사를 결성하여 보다 진전된 우정을 나누었다. 당시 바우에른펠트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빈 시청의 하급 관리로 근무하고 있었고, 슈빈트는 미술 공부에 열중이었다. 그리고 당시 프로이센의 영지였던 문화도시 브레슬라우에서 연극을 공부하던 쇼버가 빈으로 돌아왔다. 조용했던 빈은 갑자기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들 4명은 굶주린 늑대처럼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다. 포글와의 여행 공간은 잘 정돈된 세계였지만 이제 무질서한 혼돈이 슈베르트의 모가지를 잡고 끌고 다녔다. 슈빈트의 고백에 의하면 슈베르트는 쇼버를 신격화했다고 한다. 슈버는 그들의 거부할 수 없는 리더였고, 슈베르트는 광신도였다. 쇼버의 행각에 대한 악평은 자자해서 예전의 친구들은 그를 멀리했다. 특히 당시 로마에서 미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쿠펠비저와 브루흐만은 쇼버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슈베르트만은 예나 지금이나 쇼버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우에른펠트와 슈빈트는 쇼버의 평소 행동에 대해 뒷담화를 하기라도 했지만, 슈베르트는 쇼버를 비난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슈베르트는 그렇게 밤이 되면 음습한 홍등가를 전전하며 욕망을 분출했다. 친구인 안톤 오텐발트는 훗날 슈베르트는 당시 '타는 듯 뜨거운 육욕을 해소하고 푼 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그는 어둠의 세계를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슈베르트의 재능을 아까워하는 지인들이 발 벗고 나섰다. 포글이 주도하여 베토벤의 절친이자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인 요세프 바이글과 그리고 디트리히슈타인 백작을 비룻한 고위층 유력 인사들의 추천서를 받아 궁정 악단 단원으로 취직시켜 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슈베르트는 이에 양이 차지 않았는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리였지만 본인의 소극적인 행보로 인해 무산되었다. 사실 슈베르트는 보다 레벨이 높은 궁정 악단 부악장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스승 살리에르가 나이가 들어 궁정 악장에서 은퇴를 했는데, 부악장이었던 아이블라가 자동으로 승진이 되었기 때문에 부악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슈베르트는 야심 차게 부악장 자리에 응모했지만 지원자들이 모두 쟁쟁한 음악가들이어서 경쟁은 치열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음악세계에서 슈베르트의 입지는 자신의 생각처럼 높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부단장에는 슈베르트의 궁정악단 단원 지원 추천인 중에 한 명인 요세프 바이글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슈베르트와 바이글은 누가 보아도 현격하게 체급이 달랐다.


물론 과욕이었지만 슈베르트가 궁정 악단 고위직을 탐한 것을 보면 삶에 대한 에너지가 아직 꺾이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마지막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는 어떤 계시가 그를 지배했는지도 모른다. 슈베르트는 그해에 비록 곡을 만드는 데는 소홀했으나 어느 때 보다도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했다. 그의 주옥같은 가곡들은 각종 연주회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곡보다 더 많이 연주되었다. 그리고 악우협회에서 주관한 목요 음악회에도 빠지지 않고 매번 참여하였고 그 외의 다른 콘서트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또한 9월에는 수년 전 미역국을 마셨던 바로 그 악우협회의 운영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운영위원은 천여 명의 회원 중에서 투표로 20명을 선출하는데 그 위원 중에 한 명이 된 것이었다. 이제 기성 음악계에서 탄탄한 위치에 오른 슈베르트는 빈 음악계의 핵심 인사들과도 교우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악우협회 위원이나 회원은 봉사직이어서 일정한 수입은 보장되지 않았다. 항상 돈이 궁했던 그에겐 경제적으로 큰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매우 만족했다.


슈베르트의 대부이며 제2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포글이 1826년 4월 늦장가를 갔다. 60 평생 음악세계에서 활동하던 그는 이제 가정을 꾸려 안락한 삶을 원했는지 모른다. 제2의 인생은 치열하고 긴장된 프로페셔널 한 음악가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여유로운 삶을 향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슈베르트가 어릴 때는, 순진하고 귀여운 천재와 함께 음악 여행도 하고 도우미 역할을 하면서 지친 마음을 위로받았지만 이제는 그가 나이가 먹어가자 세상의 때가 묻고 심지어 매독까지 걸렸으니 당신 마음대로 못하는 독립한 자식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결혼으로 포글은 슈베르트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슈베르트 입장에서도 친한 친구가 결혼할 때의 느낌처럼 한 발짝 멀어지는 포글을 발견했을 것이다. 자신이 경제적으로 궁핍할 때나 음악적으로 방황할 때나 일상에서 어려움을 격을 때나 항상 그 자리에서 대부처럼 위로를 주던 포글, 이제 그를 떠나보내는 심정으로 슈베르트는 쓸쓸히 뒤돌아 걸었다.


당시 슈베르트는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시 '죽음과 소녀'를 텍스트로 삼아 현악사중주 14번(D810)을 완성했다. 그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슈베르트가 18살 때였지만 가곡으로 만든 것은 20살 때였는데 당시에는 거의 사장되었다시피 했었다. 텍스트의 주인공 클라우디우스는 괴테와 동시대에 활동한 출판업자이자 평범한 시인이었다. 괴테의 파우스트로 상징되듯 당시 독일의 문학계는 선과 악, 죽음과 삶 그리고 비극적인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베르테르 신드롬을 낳아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많았을 정도로 그런 류의 시나 소설 등이 당시 유행이었다. 완곡하고 정제된 독일 특유의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도피하고 싶은, 어떤 카타르시스적인 요소가 강한 스토리가 먹혀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슈베르트는 8년 전 만들었던 어두운 분위기의 '죽음과 소녀'의 주제를 가져와 매독과 싸우던 1824년 현악 4중주 형식으로 작곡을 시작했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마지못해 미루어 왔는데, 2년 후 건강이 좋아지자 다시 손을 보아 완성한 것이었다.  슈베르트가 왜 죽음과 소녀에 집착했을까. 소녀는 자신을 상징하고 죽음은 자신을 데려갈 사신이라고 쉽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당시 슈베르트를 지배하는 테마였는지 모른다. 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죽음이리라. 수은 치료의 후유증으로부터 오는 고통도 다음날 아침 일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잊히는 것이었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다음날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죽음이었다. 죽음은 소녀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죽음은 평온하다고. 죽음은 결코 고통스럽지 않다고. 그렇게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그 현악 4중주 14번은 요제프 바르트의 저택에서 일부 초연을 했지만 대중적 지지는 받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작품일 뿐 대중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그는 낭만주의의 문을 연 결과를 낳았지만 말이다.


그러한 가운데 그는 바우에른펠트의 주선으로 루들람의 동굴 클럽이라는 사교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그와 함께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곧이어 비더마이어 시대가 더욱 공고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클럽이 해체되는 상황에 봉착하였으며 당연히 가입 시도는 성공하지는 못했다. 사실 클럽이 온전했더라도 가입이 성사될 수 있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 클럽은 당대 최고의 문화 예술가들이 집결한 사교 모임의 일종이었다. 당시 회원 100여 명의 면면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살리에르와 베버, 유대인이면서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며 베토벤과 멘델스존과 친분이 두터웠던 이그나츠 모셸레스, 보헤미안 출신의 최고의 음악가 기로 베츠와 같은 음악가와 그리고 당대에 명성이 자자하던 화가, 작가, 배우, 성악가 등이 망라하였다. 모차르트가 가입했다고 해서 유명한 프리메이슨도 지하로 내려갔듯이 이런 유명인의 서클은 당시 경직된 정국에서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음악계에서의 입지가 공고해진다고 해서 독립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삶은 항상 그를 괴롭혔고, 그렇게 생활고에 시달리던 슈베르트는 프루비르트 하우스에서의 생활을 감당하지 못하고 쇼버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해 늦여름이었다. 당시 쇼버의 집안도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해 쇼버 자신이 하기 싫어하던 가업인 출판사 경영에 뛰어들어야 했다. 놀기 좋아하던 그는 어머니와 다투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일한 아들로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쇼버는 기꺼이 슈베르트를 거두어 주었다.


잠복기라고 하지만 한바탕 매독과 곤욕을 치렀기 때문에 예전처럼 몸과 마음이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나 큰 병을 겪고 나면 낮아졌던 삶의 에너지가 생각처럼 상승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수은으로 손상된 자신의 심신을 질 좋은 환경에서 힐링시킬 경제적 능력도 없었다. 그는 부지런히 돈을 벌여야 그나마 현재의 삶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전업작가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고달프기 마련이다. 생활인으로서는 게을렀지만 음악인으로서의 그는 박리다매 심정으로 끊임없이 악보와 씨름을 해야만 했다. 그런 환경을 잘 알고 있었던 슈베르트는 수입을 올리기 위해 직접 출판업자들과 편지로 협상을 했지만 생각보다 인세를 많이 받지 못했다. 레오폴트 존라이트너도 매니저처럼 항상 그를 도와주지 못했고, 그 외의 친구들도 결혼도 하고 자신의 생업에 종사해야 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자신의 비서 역할을 자임했던 요제프 휘텐브르너도 오래전에 떠났다. 그런 판국에 주변머리 없는 자신이 직접 영업을 해야 하니 출판업자들한테 놀아나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몇 번 언급했듯이 당시는 가곡이나 실내악 같은 규모가 작은 곡만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보다 나은 방법은 교향곡이나 오페라 같은 대곡의 공연을 성사시켜야 만족할 만한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곳에 오르기 위해 많은 곡을 생산했지만 결국 대다수가 미완성으로 남거나 공연되지 못했다. 그런 부족한 부분을 갑자기 생활전선에 뛰어든 쇼버가 도와주었지만 대중적인 인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큰 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 책이 팔리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마케팅 전략의 개념도 없던 시대였다. 사실, 그렇다고 현재의 수입으로 혼자 먹고 살기에는 부족한 점이 없었다. 그 밖에 실내악 연주회와 레슨 등으로 짭짤한 수입은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문란한 생활이었다. 매독을 혹독하게 겪었으면서도 환락적인 욕망은 항상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유흥에 돈을 날리기도 했지만 또 다른 문제점은 경제관념이 엉망이어서 돈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재정 상태는 항상 바닥이었다.


친구들의 리더 격인 쇼버도 가업에 종사하고, 옛 전우들도 각자의 삶에 매진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슈베르트도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에 슈베르티아데는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구원투수처럼 슈파운이 빈으로 돌아왔다. 공직에 진출해 지방 정부에서 봉직하던 슈파운이 빈에 다시 돌아와 정착한 것이다. 그에 힘입어 슈베르티아데가 다시 활성화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각종 파티가 열렸다. 쇼버 때보다는 매우 건전한 슈베르티아데였다. 주관자에 따라 모임의 성격이 결정되듯 이제 사회적으로 성공한 슈파운은 사교를 목적으로 많은 파티를 주관했다. 슈베르트의 입장에서는 그런 절제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주인공인 슈베르티아데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리고 다음 해,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이 타개했다. 대가의 성대한 장례식에 여러 친구들과 함께 참석한 슈베르트는 며칠 후 저녁 훔멜을 위한 만찬에 참석했다. 베토벤의 상여를 맸던 8명 중에 한 명이었던 훔멜은 괴테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음악계의 유명 인사였다. 마침 빈에 방문 중에 베토벤이 타개했기 때문에 장례식의 주빈이 될 수 있었다. 빈의 음악계는 이런 훔멜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이 만찬에 참석한 슈베르트는 훔멜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와 그리고 범위를 넓혀 독일권에서 이런 음악계의 거장과 만찬을 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슈베르트는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그에게 헌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그란츠 음악협회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요한 옝거의 주선으로 그란츠에 2주간 음악 여행을 떠났다. 과거 슈베르티아데에서 자신의 가곡에 반주를 자주 맡아주었던 옝거와 요제프 휘턴브레너가 슈베르트를 자신의 고향인 그란츠로 초대하여 우울한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추진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행에서 돌아온 슈베르트는 우울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삶의 희망을 엿본 그란츠 여행이었지만 현실로 돌아온 그의 미래는 밟지 않았다. 다시 건강이 악화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그는 전부터 작업해 오던 '겨울 나그네(D911)'의 마지막 12곡에 매달렸고, 그렇게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이 순식간에 완성했다. 겨울 나그네는 뮐러의 연작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이다. 사랑하던 여인으로부터 실연을 당한 후 삶의 의미를 잃은 청년이 세상을 떠돌며 삶의 희망을 찾다가 결국 실패하고 거리의 악사(죽음)를 따라가는 서사를 가지고 있는 연시이다. 따라서 시의 내용처럼 선율도 대단히 음울하다. 곡만 들으면 서정적이고 아름답지만 가사의 내용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뮐러의 감정보다 더 앞서가 자신의 감정을 보다 고조시킨 것으로 보인다. 감정이입의 수위가 너무 높아진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슈베르트는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유레카를 외치며 친구들을 쇼버의 집으로 집결시켰다. 자신의 일생일대의 역작을 완성했노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슈파운의 회고록에 의하면 '자신의 감정이 잔뜩 실린, 그 어떤 가곡 보다도 자신을 힘들게' 했던 그 연가곡을 쇼버의 집에서 듣고 '우울한 분위기에 우리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라고 표현했다. 끊임없이 강요하는 집요한 우울함과 황량함에 망연자실한 것이다. 쇼버를 비룻한 다른 친구들도 5번(보리수) 이외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친구들은 슈베르트 앞에서 이런 표현은 하지 않았다. 마이어호퍼는 '절망에 뿌리를 둔 시인의 마음으로, 그는 가슴을 찌르는 날카로운 음으로 그 절망을 표현'했다고 그나마 시적으로 여과해서 표현했다. 그리고 우울증에서 조증으로 전환된 듯 슈베르트는 며칠 후 한결 밝은 '피아도 삼중주(D929)'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D934)'을 친구들 앞에서 선보였다.


        5 죽음과 소녀


1828년은 슈베르트의 생의 마지막 해이다. 1년 남짓한 그 시간 동안 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앞둔 즈음에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뜨거운 영감이 솟구쳤고, 외부적으로도 빈의 음악계에서 그의 위상이 한 단계 올라가고 있었다. 마치 정상이 보일 때 라스트 피치를 하듯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악우협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전문 음악인과 적극적으로 친분 관계를 맺었고, 귀족이나 상류층 저택에서 연주회를 열고 상당한 수입과 더불어 명성도 얻었다. 베토벤에 비하면 비교 대상도 되지 못하지만 작곡에 전념할 수 있을 정도의 형편은 되었다. 늦었지만 전업으로서 입지가 다져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지구상에서 후원자 없이 홀로 생존한 첫 번째 작곡자로 기록될 것이 분명했다. 높고 견고한  편견의 벽을 깬 원동력은 세상의 이기에 밝지 않은 어리숙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중상류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그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던 것 같고 그렇게 형성된 끈끈한 인맥이 전업의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제 비록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음악만으로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도약의 징조가 그해 3월이 나타났다. 처음으로 슈베르트의 단독 콘서트가 열린 것이다. 물론 절친들이 기획하고 운영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그 도움이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베토벤 서거 1주기 기념으로 열린 콘서트는 친구와 지인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고 그 밖의 음악 애호가들도 다수가 찾아와 매진 사례를 이루었다. 그리고 빈의 주요 언론에서 성황리에 끝난 그 콘서트를 주요 기사로 다루었다. 따라서 많은 수입도 올릴 수 있었다. 슈베르트로서는 대단히 성공적인 공연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작곡한 가곡 '어부의 노래(D881)'와 '세레나데(D920)', '현악 4중주(D887)', '피아노 소나타(D894)', '피아노 트리오(D929)' 외 기타 합창곡 등 주옥같은 곡들이 공연되었다. 특히 피아노 트리오(D929)'는 출판까지 하여 꽤 많은 부수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슈베르트가 출판한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10년 후 이 작품을 헌책방에서 발견한 알베르토 슈만은 혜성 같이 나타난 놀라운 작품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슈만이 추구했던 낭만주의의 기치를 올린 변환기적인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아노 트리오 2악장은 2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이어서 배리 린든과 크림슨 타이든 등 십여 개의 드라마와 영화에 주요 테마곡으로도 사용되었고 각종 드라마 등에도 등장하였다. 그중에 대표적인 작품이 1975년 드라마 영화로 만들어진 배리 린든(Barry Lyndon)인데, 그 작품의 핵심 장면에서 테마곡으로 여러 번 등장하여 피아노 트리오가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도연과 최민식 주연의 해피엔드에서도 핵심적인 장면, 즉 최민식이 불륜을 저지른 아내 전도연을 침대에서 흉기로 살해하는 장면에 바로 그 2악장이 잔인하게 흘러나온다. 2악장은 어떤 비장함과 긴장감 그리고 페이소스와 하드보일러 감정을 촉발하는 장면에서 극의 미장센을 극대화시키기에 매우 적합한 작품이다. 무겁게 뛰는 심장 소리 같은 피아노가 처음 리듬을 담당하며 등장하고, 뒤이어 첼로의 음률이 따라오며 그 리듬을 쫓는다. 그리고 잠시 후 피아노와 첼로의 입장이 서로 바뀌어 피아노가 멜로디를 담당하고 첼로가 리듬을 담당한다. 두 악기가 서로 쫓고 쫓기는 가운데 드디어 바이올린이 등장하여 격렬했던 두 악기를 진정시킨다. 피아노는 삶의 욕망이고 첼로는 죽음이며, 삶은 쫓아오는 죽음을 피해 도망가고, 그렇다 잡혀 서로 뒤엉켜 싸운다. 삶과 죽음, '죽음과 소녀'처럼 그 작품도 슈베르트의 내면에서 들려주는 영혼의 거친 숨소리이며 토해져 나오는 한탄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슈베르트의 대중적 인지도는 파가니니의 등장으로 인해 쉽게 올라가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광풍을 일으키고 있던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가니니가 유럽 투어를 하던 중 빈에 등장한 것이었다. 일종의 파가니니 인베이션이었다. 바이올린 하나로 전 유럽을 집어삼키고 있던 괴물이었다. 바로 그 파가니니가 잠시 거쳐 가는 곳으로 계획을 잡었던 빈의 공연은 예상외로 성공을 거두자 4개월 동안 연장하며 머물렀다. 광기와 기인의 풍모가 다분한 파가니니의 신들린 연주를 선호하지 않을 것 같았던 보수적인 빈 음악계는 예상을 깨고 그의 음악에 열광했던 것이다. 인간의 본능에 내재되어 있던 어떤 신들림이 표출되었는지 모른다. 파가니니는 4개월 동안 빈에 머물며 14회의 공연을 했고, 파가니니 풍의 모자, 옷, 숄, 부츠, 향수, 장갑, 지팡이, 파가니니 초상화 등이 순식간에 팔렸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제는 파가니니에게 '궁정 비르투오소'라고 명명했다. 당시 그의 수입은 슈베르트보다 100배나 많았다고 한다. 슈베르트의 콘서트가 나름 성공을 했지만 파가니니의 열풍에 가려 빛을 보지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는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성공한 음악가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


신은 이제 그에게 안식을 원하고 있었다. 겨우 31살에 불과한데 안식이라니, 하지만 신은 60세만큼의 음악적 에너지를 소진한 그에게 안식을 줄 것을 결심했다. 그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그의 육신은 본격적으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보다 강력해진 매독균이 그의 세포를 파괴하고 있었고 더불어 수은이 그 속도를 가속시켰다. '끊임없는 현기증과 머리에 피가 몰리는'현상이 그의 몸에서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쇼버의 집을 나와 형 페르디난트 집으로 거쳐를 옮겼다. 자신을 간호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홀로 박테리아와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곳은 현실적으로 페르디난트의 집 밖에 없었다. 본가에는 새어머니와 그의 자식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형과 형수가 매시간 그를 간호할 수는 없었다. 그들도 자신의 본업에 충실해야 했기 때문에 오후에나 시간을 낼 수 있었고 많은 시간은 10살짜리 조카가 그를 지켰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의 영감을 화산처럼 폭발했다. 포텐이 터진 것이다. 조울증 환자였던 슈만이 조증 현상이 발발한 1849년 39살 한 해에 27곡을 작곡한 것처럼, 그도 통증과 싸우는 한 달 동안 흔히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로 일컫는 D958, D959, D960과 처음으로 만든 현악 오중주(D956) 등을 탈고했다. 현악오중주에서 보듯이 그의 인생 후반기에 만든 현악곡에는 첼로를 바이올린과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더구나 그 작품에는 비올라 대신 첼로 하나를 더 추가 설정하여 저음부를 강조하였다. 미완성 교향곡의 시작이 첼로 합주였고, 현악 4중주(D887) 1악장도 첼로 독주로 시작한다. 기존의 현악곡에서 조연에 불과했던 첼로를 주연으로 등장시킨 그의 발상은 당시로서는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첼로의 음역에 마음이 끌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심지어 오중주에서 첼로를 두 대를 편성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 자체였다.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만든 오중주, 첼로 두 대가 만들어내는 음울한 음역에서 슈베르트는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을까. 끊임없이 울어대는 첼로는 죽음의 강을 건너고 있는, 삶을 포기한 실존적 고독을 흐느꼈는지 모른다. 침대를 뚫고 내려앉을 것 같이 짓누르고 있는 자신의 육신을 표현했는지 모른다. 내일 아침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악장의 아다지오는 그 절정을 보여준다. 죽음의 강을 건너듯 이미 초연해진 화음은 느리게 흐르고 그러다 생의 뒤를 돌아보고 멈추어 선 채 뜨겁게 울부짖는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주고, 그의 의식은 무겁고 낮게 내려앉다가, 하나의 음이 길게 늘어지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 아다지오는 '피아노 소나타 21번(D960)' 2악장에서 피아노로 다시 한번 재연된다. 들릴 듯 말 듯, 영원히 멈출 것 같은 그 긴 음의 공간은 숨을 탁 막히게 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영혼의 희미한 빛 하나가 마지막으로 긴 숨을 내쉬며 꺼진다. 낭만주의는 그렇게 시작했다.


외부 세계와 자신에게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더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시간이 갈수록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처럼 완벽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10월이 지나갈 때부터는 약을 제외하고는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다. 음식을 갖다 주면 독이 든 것처럼 포크를 쟁반에 내던졌다고 한다. 기운을 차리기 위해 계속 먹으려고 했지만 곧바로 토악질을 했다. 증세가 심해지자 새 어머니 딸인 13살짜리 여제파가 그를 간호했고, 더 심해지자 비용이 만만치 않은 전문 간병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페르디난트가 작곡한 진혼곡 공연에 참석하기 위해 8km나 떨어진 헤르날스 상당에 걸어서 왕복을 했고, 대위법을 더 공부하기 위해 2km를 왕복을 감수하면서 궁정 오르가니스트인 지몬 제히터를 찾아갔다. 그리고 쇤슈타인 남작이 주체한 파티에 참석하여 포도주를 꽤 많이 마셨다. 슈파운은 그때까지만 해도 슈베르트의 상태가 위증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기운이 없고 야위었지만 악보도 교정하고 정신은 또렸했다고 훗날 전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병세가 더 악화되자 주치의를 당대 최고의 매독 전문가인 요제프 폰 페링으로 바꾸었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환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치료 방법이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의료 관행에 따라 주치의는 그의 피를 뽑았다. 그 사혈로 인해 보름 동안 전혀 먹지 못해 영양실조가 심각하던 그의 몸은 더욱 수축되었다. 그리고 페링은 절박한 심정으로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했는데, 현재 그에 대한 진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아마도 임상실험이 불확실한 신치료법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그렇게 그의 육체가 붕괴되고 있을 때 프란츠 라이너와 바우에른펠트가 병문안을 왔다. 사망하기 하루 전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마치 침대를 뚫고 떨어질 것 같은 무게감이 나를 누루고 있다. 머리가 타는 듯이 아프고, 무기력중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친구들이 돌아간 다음날, 격렬한 정신 착란과 환각 상태에 빠진 그는 그런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에너지를 전부 소진한 끝에 숨을 거두었다. 1828년 11월 18일이었다.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어리숙하게도 당시 유행하던 장티푸스를 갖다 붙이기도 하고 혹은 현대 의학에서는 생소한 심경염이라는 병명을 들먹이면서 매독을 의도적으로 숨기려고 했지만 현재는 기록된 그의 상태만 보더라도 매독이라고 확증할 수 있다. 매독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설령 직접적인 사인이 매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치료 과장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수은 중독을 배재할 수 없고, 최소한 결정적인 것은 단순하게 영양실조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마지막까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그의 나태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31살의 나이에 미혼인 상태로 신의 부름을 받았다. 음악 재능 하나로 모든 콤플랙스를 이겨내느라 삶의 에너지를 소진한 그는 이제 안식을 취할 자격이 충분했는지 모른다.


바흐는 대대로 장인 음악가 집안이어서 다른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고,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리스트는 아버지에 의해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음악교육을 받아 성공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 중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자식이 있다면 당연히 발 벗고 나설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이 뒤따라야 하겠지만 최소한 조기교육은 시도해볼 것이다. 그런 조기 영재교육이 음악가로 성공할 수 있는 필수 코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수는 있다. 의사와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던 베를리오즈와 슈만처럼 부모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음악가로 성공하는 케이스는 많지만 그런 부류는 재능과 함께 사회성과 집념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는 교사로서 음악적 지식이 있었지만 아들의 재능을 방관하다시피 했다. 누구보다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오히려 음악가보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것을 원했다.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 여건 등이 따라주지 않은 가운데 음악만으로 먹고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론 소득은 변변치 않지만 그래도 음악가보다는 교사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레슨을 받기 위해 음악가의 집을 방문하지도 않았고 음악 아카데미에도 보내지 않았다. 좁은 집에서 많은 자식들과 함께 사는 형편에 그런 시도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싸구려 연주회조차 한 번도 관람하지 못했던 슈베르트는 12살 때 국가에서 운영하는 명문 중등학교에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펼칠 수 있었다. 그 학교는 중상류층 자녀들이 대다수일 정도로 오스트리아에서는 명망 있는 기숙사형 중등학교였다. 자연스럽게 그는 빈소년 합창단에 가입하여 소프라노 파트를 담당하고, 학교 교향악단에도 들어가 바이올린과 지휘를 담당했으며, 그런 와중에도 가곡을 중심으로 작은 가극과 실내악 등을 작곡하였다. 주위에 전문적인 음악가는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친구나 선배들의 응원에 힘입어 음악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특이한 경우였다. 하지만 그는 굶주린 사자처럼 음악에 대한 목마름을 토해냈지만 분명히 한계는 있었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웃물 안 개구리 생활을 너무 오래 한 것이었다. 음악의 변방 폴란드에서 홀로 예술의 중심인 파리에 가서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성공한 쇼팽처럼 그런 의지와 신념은 애시당초 없었다. 빈이란 공간과 친구들의 보살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슈베르트는 어떻게 보면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처럼 독특한 존재였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그는 오스트리아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가에 불과했고 주류 음악계에 속하지 않는 아웃사이더였다. 그리고 이단아였다. 친구들마저 없었다면 그는 음악교사를 하면서 그저 그런 작품 몇 개 를 남기고 사라진 수많은 작곡가 중에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그는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음악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일찍이 주류 음악계에 속해 있었다면 그런 진보적인 음악을 생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죽음에 이르는 질병과 처절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유사 이래 들어보지 못한 혁신적인 음악을 창조하지 않았던가. 빈의 어느 뒷골목에서 땅달막한 덩치에 두꺼운 안경을 낀 젊은이가 뒷짐을 지고 무언가 골똘히 사색에 잠겨 걷는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가 바로 프란츠 슈베르트라고 알기 바란다.    


어떤 이유든 사랑의 열매를 맛보지 못한 그는 자신의 천재성에 감동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음악을 만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불나방처럼 어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있어 음악과 쾌락은 일종의 욕망의 분출구였다. 그에겐 누구보다 예술가의 기질이 다분했다. 그 뜨거운 예술적 열정은 이성에 대한 사랑이 불구가 되자 탈출구 없는 욕망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예술가의 2중성이 이보다 강하게 표출된 음악가는 일찍이 없었다. 밝고 어두운 표현이 분명하고, 천상의 세계를 앙망하지만 퇴폐와 쾌락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며 자괴심에 눈물을 흘렸다. 바우에른펠트는 그런 슈베르트를 향해 이렇게 표현했다. '아름다운 노래를 만든 것은 때로는 어둠의 축성 덕분이었다. 괴테가 지루해지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토로했듯이 그는 검은 날개를 단 슬픔과 비애의 악마였다.' 그리고 창작은 혼돈의 내면으로부터 도피처였고 일종의 보호막이었다. 매독과 싸울 때는 그런 성향이 더욱 진화하여 고통이 창조적 영혼에 불을 지폈고, 고통을 통해서만 상상력이 급격하게 고양되었다. 고즈넉한 정원을 거닐며 사색하는 따위의 정서적 안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창작의 열매는 달콤할지 모르지만 뿌리는 온갖 박테리아에 시달리고 땅에 짓눌려 있기 마련이다.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의 산물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는지 모른다. 31살에 너무나 많은 음악을 토해 놓고 간 슈베르트, 사랑을 잃고 발길을 돌려 낯선 세상을 떠도는 겨울 나그네처럼 그 영혼의 숨소리는 수많은 파편이 되어 현재 우리의 심장을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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