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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May 31. 2023

고갱, 달과 6펜스(1)

아웃사이더

세상의 끝, 타이티 파페에테에서 북쪽으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가로질러 1,500km를 더 가야 닿을 수 있는 아투오나 섬이 바로 그곳이다. 마르키즈 제도에서도 가장 끝에 있는 섬이다. 망망대해에 떠도는 조각배처럼 존재조차 미미한 그곳에 파리지앵 폴 고갱이 살고 있었다. 아투오나에 온 지도 몇 년째, 그는 원주민 복장에 맨발로 다니며 그들과 섞여 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항상 푸른색 베레모를 쓰고 다녔는데 그 모양새는 파리에서 하던 대로였다. 그는 자신이 설계하여 만든 집을 '쾌락의 집'이라고 명명했고, 그 집 마당에 테레즈라고 이름 지어준 여자 조각상을 세워놓았다. 브리타뉴 시절 자신이 거처하던 하숙집 대문에 다소 익살스러운 '안녕하세요 고갱 씨'라는 그림을 붙여 놓은 것처럼 그의 집과 조각상에도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시 고갱은 소송 중이었다. 미국 상선과 고래잡이 어선이 자주 대피하던 아투오나에는 그들을 상대로 성매매가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었고, 밀수도 백주에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도서벽지였기 때문에 법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밀수에는 현지 경찰도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미제 소총을 비룻한 여러 가지 물품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거래되고 있었고, 이를 보다 못한 고갱이 그 경찰관을 마르티즈 검찰에 고발한 것이다. 화려한 세상을 등지고 원시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세상의 끝에 왔지만 그의 꼬장 한 성격은 마지막까지 그를 편안하게 두지 않았다. 이에 피고발인 경찰관 팡브룅 외젠이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하였는데 1심에서 이를 인정하여 고갱에게 3개월 구금에 1,000프랑 벌금형을 선고했었다. 비정상정인 재판 구성에 분개한 고갱은 당연히 원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를 하였고, 그 재판에 참석하기 위한 여행 비용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항소심은 원심의 재판 구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소(고갱 사후 무죄로 판정)할 것은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송사를 치르는 과정에서도 고갱은 마지막으로 그림 10점을 계약에 따라 파리에 있는 화상 볼라르에게 보냈다. 1903년 5월이었다.


고갱은 브리타뉴 퐁타벤에서 자신의 정부 안나를 찝쩍거리던 선원들과 싸웠을 때 부러졌던 발목이 10년 가까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매일 밤 퉁퉁 부은 발목은 그를 혹독한 통증으로 몰아넣었고, 이젠 모르핀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고갱의 이런 상태를 두고 혹자들은 매독 증상이라고도 하고 나병의 증상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았던 그의 자유분방한 인생 역정을 볼 때 매독이라는 병은 가장 적합한 추정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작품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공존했지만,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덧난 다리 때문에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였다.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아투오나 섬 바닷가를 거니는 고갱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다니엘 드몽프레에게 쓴 많은 편지에는 통증에 대한 호소가 가득하다.


그리고 통증보다 더 그를 절망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파리 미술계의 냉소적인 혹평이었다. 통증은 모르핀으로 조금은 무마시킬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작업을 하고 있을 때는 잠시 잊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절하는 참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 있을 때는 그런대로 작품이 팔려 최소한 전업화가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타이티로 온 후로는 그보다 판매가 훨씬 부진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미술 평단에서의 자신의 평가가 그만큼 반영된 결과였다. 변화무쌍한 아방가르드 시대에 상위 레벨의 화가가 아니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파리 목숨이었다. 그나마 새로운 화상 볼라르가 매월 약간의 생활비와 회화 재료를 보조해 주는 조건으로 그림을 그려 파리로 보냈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처음엔 자신을 물어 뚫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뼈 만 남은 사체를 보는 듯하는 미술 평단에 대해 그는 저주를 퍼붓는 편지를 드몽프레에게 수없이 보내며 자신을 위로했다. 고갱이 추구하는 미술세계에 대해 사실 파리 평단은 너무나 인색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나마 자신을 지지하던 상징주의 시인 알베르 오리에가 사망한 후에는 아예 그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 근자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샤를 모리스를 비롯한 볼테르파는 그나마 고갱의 작품에 호의적이었지만, 비평이라면 하느님도 예외일 수 없는 사악한 파리 미술 평단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현 상황이 계속 유지된다면 볼라르와의 계약도 파기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미래는 점점 암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다른 경제 활동으로 수입을 창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림의 판로는 최소한 지켜내야만 했다. 몸과 정신 그리고 경제적 상황은 그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서 제대로 된 작품이 생산될 리는 없었다. 그림 작업은 먹고살기 위한 절박한 노동이었고 남는 시간은 대게 글을 쓰고 조각을 했다. 특히 드몽프레와 슈페케네르 같은 친한 동료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썼고, '노아노아'와 '전과 후' 같은 회고록 형식의 글을 쓰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글쓰기라도 없었다면 무섭도록 지독한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말년에는 대화를 할 정도의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아투오나에도 프랑스 사람들이 꽤 살았지만 그는 공적인 일 이외에는 의도적으로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위선적이라는 이유로 유럽인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하지만 의대 출신 목사인 폴 베르니어는 자주 찾아가서 만났는데 그가 아투오나에서 그나마 의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싶은 대상이 필요해고 그 대상이 베르니어였는지 모른다. 고갱은 거의 유일하게 그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베르니어는 고갱 특유의 과시와 허세 투의 태도에 거부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특히 파리 미술계에 대한 비판을 쏟아낼 때는 그의 눈빛은 생동감이 넘쳐났다고 한다. 그렇게 베르니어와 만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고갱은 통증이 심해질 때 모르핀으로도 호전되지 않으면 그에게 티오카 노인을 보내 치료차 방문할 것을 요구했다. 극심한 통증과 모르핀 중독으로 혼절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고, 죽음으로 가는 그런 상황을 고갱은 두려워했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베르니어는 황급히 고갱에게로 달려가서 짧은 의료 기술로 그의 다리를 치료도 해주고, 진심 어린 목사의 덕목으로 위안도 해주었다. 그에 대한 일화는 베르니어가 드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히 적혀있다. 그는 고갱을 존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연민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3년 5월 8일, 그날도 그랬다. 그날 아침 티오카 노인은 자신의 손자를 베르니어 집으로 급하게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고갱의 거처를 확인한 아이는 직감적으로 그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알렸으며, 티오카 노인은 급히 베르니어를 불렀던 것이다. 베르니어가 황급히 뛰어와서 숨을 멈춘 고갱의 몸을 만졌을 때 아직 온기가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티오카 노인은 마르키즈 전통에 따라 고갱의 이마 가죽을 어금니로 깨물어 죽음을 막으려고 했고, 베르니어도 유럽의 의술에 따라 마지막으로 인공호흡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고갱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밤새 극심한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모르핀을 과다 복용했으며 그로 인해 혼절한 상태로 심장이 멎은 것으로 보였다. 아투오나에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공문서에는 정확한 사인 없이 간단히 심장마비로 기록되었다. 그의 사인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모르핀 과다 복용인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고갱은 다음날 아투오나 항이 내려다보이는 칼보리 묘지에 묻혔다. 그 옆에는 살아생전 앙숙이었던 마틴 주교가 묻혀 있었다. 종교와는 상관없는 고갱이었지만 가톨릭 절차에 따라 간소하게 장례식이 치러졌다. 자신을 돌보아주던 티오카 노인 식구들과 베르니어 목사 외 몇 명만이 고갱의 죽음을 애도했다. 약 4개월이 지난 후 고갱이 가지고 있던 유품이 2번에 걸쳐 현지에서 경매 절차에 의해 처리되었다. 잡다한 개인 용품, 편지, 회고록 형태의 원고. 그림과 조각 몇 점 등이 팔렸다. 작품 중에 완성도가 있는 것은 대리인인 드몽프레에게 보냈고, 경매에 내놓은 것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허접한 그림들이었다. 하지만 현지 경매에서, 아투오나 항에 정박해 있던 해군 중에 코친이라는 장교가 있었는데 그는 우연히 그 경매를 구경하다가 고갱의 그림 중 '모성(Maternite2)'이라고도 하고 '해변의 여인들'이라고도 불리는 작품을 150프랑을 주고 샀고, 그 작품은 2004년 소더비 경매에서 39,208,000달러에 낙찰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된 유품 경매 수입금 4,000프랑이 덴마크 코펜하겐에 살고 있던 가족에게 전해졌다.

출처 위키피아 / 모성 혹은 해변의 여인

미술사는 물론이고 예술사에서 볼 때 고갱처럼 선명한 발자국을 남긴 예술가는 흔하지 않다. 그것도 19세기 인물이 그렇다는 것은 특이하지 않을 수 없다. 족적이 좀 애매할 때는 사실들이 두리뭉실해지고 전설과 신비가 뒤섞인 이야기들이 전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당시 그의 삶은 평범하고는 거리가 아주 멀어 주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각인이 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직접 쓴 여러 형태의 글을 많을 남겼기 때문에 세상의 평가와 본인의 생각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문제적 인간인 고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그의 가계에 대해서 약간은 알아야 한다. 그냥 훅 들어가면 그는 그저 세속과 욕망으로 점철된 막돼먹은 인간형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19세기는 탐험과 모험의 시대였다. 대항해의 시대가 만들어 놓은 바다 길을 이용해 지구에서 가지 못할 곳이 없었다. 그렇게 닦아놓은 길을 따라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서는 모험 같은 행위들이 붐을 이루고 있었다. 지구 어느 곳에서 떠나도 2~3개월이면 못 갈 곳이 없었다. 14,000년 전 유라시아에 살던 호모사피엔스가 아메리카로 머나먼 여정을 이어갔던 것처럼, 그 모험의 유전자는 문명인을 미지의 땅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제국주의 형태로 나타나 수많은 부작용을 양산했지만, 아무튼 고갱도 선조들이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마치 역마살의 화신처럼 예술적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행동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의 정신세계와 그에 따른 예술세계의 지평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선대가 남긴 삶의 족적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그런 확장성은 고갱 하나만 놓고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고갱의 가계에 대해 여기서 얘기하면 이 글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아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다. 그의 외가는 스페인 혈통으로서 페루에서 총리를 배출할 정도의 1%에 속하는 상류층이었고, 그 일족들이 페루는 물론이고 프랑스에도 많이 살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인해 고갱은 어릴 때 페루에서도 살아보기도 하고, 훗날 프랑스에 살던 친척으로부터 유산을 상속받기도 한다. 선대들에게서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중에 중요한 인물이 바로 고갱의 외할머니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혈통을 가지 플로라 트리스탕은 페루의 유력한 모스코소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나 온갖 괄시를 받은 끝에 어머니의 나라 파리로 와서 성장했다. 조실부모한 그녀는 20대 중반에 결혼에 실패한 후 싱글맘으로 온갖 풍파를 해치며 자신의 삶을 개척했고 그런 가운데서도 독학으로 철학과 역사를 공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19세기 초중반 한때 유럽 지식인 사이에서 유토피아적 세상을 꿈꾸는 생시몽주의가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녀도 그 운동 서클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작가이면서 생의  말년에는 실천하는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대혁명 이후 가장 개혁적인 사회였던 프랑스였기 때문에 여성의 사회활동이 허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활동은 파격 그 자체였다. 그것도 1세대 노동운동의 선봉에 선 열혈 운동가였다. 그녀가 노동자 집회 때 토해내는 사자후는 모두를 열광시켰다고 한다. 자본주의  교주인 아담 스미스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유럽 각국에서 골치 덩어리였고 차츰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그 사회주의를 체계화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던 칼 마르크스가 독일을 떠나 파리로 망명 온 것은 1843년 10월이었다. 당시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였다. 파리의 코뮌들은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던 그 마르크스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사회주의자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중에 한 명이 트리스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41살에 급사한다. 노동운동에 너무 열정적이었던 그녀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 경찰의 감시를 피해 다니는 상황에 직면하기에 이르렀고, 1844년 11월 그런 과로들이 겹쳐 41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녀는 유럽의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전설이었다. 그런 운동의 결과, 권력욕의 화신 나폴레옹 3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에 등극했을 때도 노동자 단체를 합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의 지위를 향상하는데 그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현재도 정설로 남아 있다. 사실 고갱에게 그런 할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은 좀 이질적이고 믿기지 않지만 그건 사실이다. 그 두 사람을 떼어 놓고 얘기해도 각자 한 편의 대서사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의 형식이 본질적으로 다르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의 본질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누구도 굴복시킬 수 없는 반골정신은 그 결과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외할머니도 대단한 인물이지만 고갱의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유럽 최초로 국민투표라는 방식에 의해 대통령이 된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 임기에 불만을 품고 개헌을 시도하기 위해 프로파간다와 포퓰리즘 정책들을 공표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 나폴레옹 3세와 대혁명의 주체였던 시민계급이 일촉즉발로 대치하는 가운데 언론도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클로비스는 그런 프랑스 정국에서 급진적인 좌파 저널리스트로 활약했다. 장모처럼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당시 나폴레옹 3세에 저항하는 언론인으로 모든 인생을 바친 열혈남아였다. 결국 프랑스는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권력욕의 재물이 되어 군주정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 파란만장한 19세기 프랑스는 그렇게 나폴레옹 시대로 후퇴한 것이다. 현재의 프랑스를 만드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시민세력과의 영합을 위한 권력욕의 산물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클로비스는 프랑스 정세에 회의를 느끼고 아내의 외가가 있는 페루로 이민 갈 것을 결정한다. 1950년 고갱이 18개월 때였다. 아내 알린 고갱의 적극적인 권유도 있었고 페루 인척으로 부터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확약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도 길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여정 가운데, 그는 뇌동맥류가 파열되어 마젤란 해협 선상에서 사망한 것이다. 요즘 말하는 고혈압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갱은 외할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다. 그의 인생을 드려다 보면 그들의 삶의 면면을 쉬게 발견할 수 있다. 세상에 반항하는 성향은 학습한다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 물려받은 유전자는 고갱으로 하여금 머나먼 마르키즈 제도까지 가도록 인도했을지 모른다. 주장이 강한 그런 류의 사람들은 대부분 기존의 세계로부터 따돌림을 받기 마련이다.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는 행위는 당대에서는 결코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게 인간계의 정설이다. 프랑스 정치 환경에 회의를 느끼고 세상의 변방 남아메리카 페루로 가려고 했던 클로비스처럼 고갱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파리 미술계를 떠나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인 아투오나로 간 것은 사실 정서적 맥락은 다르지 않았다.


고갱의 어머니 알린은 졸지에 남편을 잃었지만 그래도 어린 고갱과 유복자였던 딸과 함께 페루에서 인척들의 도움으로 풍족하게 살았다. 알린의 외할아버지 즉 트리스탕의 아버지가 호적에도 올리지 못하는 손녀딸인 알린 가족을 지근거리에서 보살펴주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첩의 자식들에게 항상 죄스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외할아버지는 알린 가족을 진심으로 보듬어주었다. 하지만 몇 년 후 가족의 버팀목이었던 알린의 외할아버지가 사망하고, 그리고 그의 사위 호세 루피노 에케니크가 총리에서 정적에 의해 실각하여 정치적 위상이 하락하자 알린의 주변 환경에 변화가 생겼다. 그 무렵 프랑스 오를레앙에 살던 알린의 외삼촌이 사망하면서 자신에게 25,000프랑에 상당하는 유산을 남겼다는 연락이 왔고, 1855년 그녀는 자식들을 데리고 프랑스행 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찾아 페루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사촌들의 농간으로 유산 상속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배다른 형제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내세운 그들의 논리에 분노한 알린은 그들과 연을 끊고 오를레앙에 있는 시집으로 들어갔다. 다시 페루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곳 사정도 예전만 못했기 때문에 선 듯 결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훗날 고갱은 당시 어머니가 파리행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상류층 삶을 영위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허세를 부렸다고 한다.


알린은 어머니 트리스탕처럼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단호하고 자립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또한 그런 어머니와 외가에 대한 자긍심이 남달랐다. 비록 경제적 상황은 하락하지 않았지만 매사에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외아들 고갱은 천방지축이었다. 꽤 적지 않은 돈을 드려 오를레앙에 있는 가톨릭 학교 기숙사에 보냈으나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갱은 아버지를 닮아 독불장군적인 성격이어서 기숙사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재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알린은 그런 고갱을 상급학교 진학 시 국립 해양학교에 보내려고 했으나 성적이 따라주지 못했다. 훗날 고갱은 당시 학교 기숙사 생활이 답답했고, 동급생과도 어울리지도 못하고 공부도 뒷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린은 수소문 끝에 기어코 아들을 견습 선원으로 해양회사에 취직시켰다. 고갱이 17살 때였다. 평범하지 않았던 아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알린은 고갱을 뱃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치마바람을 자처했고, 사실 고갱도 해양인이 되는 것에 거부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답답한 육지 생활보다 넓고 모험이 뒤따르는 바다 생활이 적성에 맞다는 것을 두 모자는 합치를 본 것이다. 그렇게 외아들을 바다로 보낸 알린은 2년 후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혼란한 세상에서 임팩트 있게 살았던 어머니와 남편을 일찍 여의고, 외가의 풍족한 생활을 포기하면서도 알린은 강인하게 삶을 영위했었다. 시아버지가 사망하자 파리 변두리 생클루로 이사 가서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결국 지켜보는 이 없이 눈을 감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갱은 애석하게도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배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로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었다. 고갱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화려한 견습 선원 생활을 3년 만에 접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때서야 어머니의 무덤에 가서 아들로서 마지막 예를 표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해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그의 병적기록부에는 키 163km, 높은 이마. 큼지막한 코, 다갈색 곱슬머리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당시는 부국강병에 성공한 프로이센과 쇄락한 프랑스가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갱은 해군으로서 그 전쟁의 해전에 참전했지만, 별다른 무용담(무공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엄청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없이 3년간의 해군 생활을 마감하고 선행 표창장을 받은 후 제대한다. 선행이라는 단어가 고갱과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당시 기록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 세은 영국으로 망명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고갱은 그런 급격한 정세와는 상관없이 화려한 군복무를 마친 뒤 파리로 귀향했다. 아버지 클로비스가 살아 있었다면 나폴레옹 3세의 퇴각에 환호를 보냈겠지만 고갱은 어떠한 표현도 남기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삶에 대해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란 탓인지 고갱은 정치사회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적이 거의 없었다. 오직 나르시스적이고 데카당스적인 경향만을 추구했다.


당시 사회 초년생인 고갱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귀스타브 아로사 부인이었다. 알린이 오를레앙을 떠나 낯선 파리 생클루에 정착했을 때 그 동네에 살던 아로사 부인이 그녀 가족을 대모처럼 진심으로 도와주었었다. 알린의 집안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알린을 친 자매처럼 대해주었고, 물론 고갱도 처음엔 그녀의 보호 하에 있었다. 특히 알린이 사망한 후에는 아들처럼 대해주었다. 제대 후 백수생활을 하던 고갱을 자신의 사위 카잘이 다니던 금융회사에 취직시킨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예술에 조예가 깊어 기회가 되면 미술품이나 당시 신기술인 사진 작품 등을 수집하여 집에 걸어 놓았는데, 미술에 관심이 없었던 고갱이 아로사 부인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그 그림들을 접하면서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고갱의 인생에서 전환기적인 시점이 바로 그 당시였다고 할 수 있다. 아로사 부인을 만난 것은 고갱의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행운이었고,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출처 위키피아 / 1885년    고갱과 마테

이제 고갱의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가 사망한 후 프랑스 정세는 안정을 찾아갔고 경제도 호황을 맡고 있었다. 고갱이 다니던 베르탱은 종합금융회사로서 증권 관계 사업도 병행하고 있었다. 고갱은 그 회사의 중역인 아로사 부인의 사위 카잘과도 아주 친하게 지냈으며, 업무 능력도 뛰어나 간단한 환전 업무에서 청산 관계 업무로 전환하였고. 드디어 예나 지금이나 꿈의 직종인 주식거래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이제 잘 나가는 일종의 펀드 매니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 힘입어 그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명문가의 딸과 1873년 11월에 결혼한다. 아내 메테 소피 가트의 집안은 다이너마이트 발명으로 부호의 반열에 오른 노벨 집안과 가까워 훗날 그녀의 동생이 노벨상 위원회 일원이 되기도 한다. 알고 보면 고갱의 집안도 뼈대 있는 가문이었기에 꿀릴 것은 없었지만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오직 내세울 것은 돈 잘 버는 펀드 매니저라는 직업 밖에 없었다. 고갱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 가족과 직장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다.


고갱은 직장 생활에 만족했다. 사랑스러운 에밀과 알린이 태어났고, 메테는 셋째 클로비스도 임신한 상태였다. 아내도 중산층의 삶에 흡족해했다. 수입도 부쩍 늘어 연봉이 한화로 2억 원 이상 되었다. 모험을 즐길 줄 알고 항상 무언가 과시하려는 그의 성향은 이런 주식투자 업무가 적성이 맞는 것 같았다. 아마도 화가가 아니라 사업가의 길을 갔다면 더 큰 성공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반듯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고갱을 보고 정말 흡족해했을 것이다. 자만심 강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지 않았던가. 이제야 마음 편히 하늘에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파리 미술계에서는 일요화가라는 단어가 회자되었다. 직장인이나, 주중에 경제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일요일에 동아리를 이루어 그림을 배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아마추어 화가들을 일컬어 일요화가라고 불렀다. 그림에 재능이 있으면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도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문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술 강국답게 프랑스의 미술 저변은 그만큼 두껍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아마추어 화가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세관 공무원 앙리 루소였다. 정식적인 아카데미 코스를 거치지 않는 비주류 화가 중에서 전업 화가로 데뷔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앙리 루소도 거의 평생 동안 투잡을 뛰었다. 문화예술이 상당할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먹고사는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당시 전업화가라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중산층 이상이었다.


가족과 회사를 왕복하는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던 어느 날, 고갱은 직장 동료 중에서 친했던 에밀 슈페네케르로 부터 화랑에 가서 그림 관람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고갱은 무료한 시간을 벗어나고 푼 충동으로 '그래 한번 가지 머'라고 대답을 했다. 그 화랑에는 당시 프랑스 미술계를 선도하고 있던 인상주의 화가들인 카유미 피사로, 마네, 모네, 세잔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직 회화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작품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한방 맞은 듯한 인상을 받은 것은 속일 수 없었다. 최소한 거부반응은 일으키지 않았다. 그 후 고갱은 친구 따라 낚시터에 가듯 슈페네케르에게 손목을 잡힌 채 일요일마다 그림 모임에 드나들었다. 슈페네케르는 고갱이 언젠가 종이에 낙서를 한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에 내심 놀라곤 했었다. 슈페네케르 자신은 이제 일요 모임에 나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다짐을 한 상태였다. 각박한 쩐의 세계에서 시달리다 보면 긴장된 정신상태가 금방 이완되지 않았는데, 일요일에 한번 모임에 나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그리고 고갱 자신도 그림에 재능이 좀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 어떤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었다. 오를레앙 시절 어머니와 삼촌들도 자신의 재능에 대해 전혀 표현하지 않았고, 아내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은 주변에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중이 고기 맛을 안 것처럼 관심은 어렵지 않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엔 취미 수준의 관심이었다.


일요일엔 동아리에 나가 그림 공부를 했지만, 평일에는 퇴근 후 몽마르트르에 있는 카페로 달려갔다. 당시 예술 문화의 거리로 조성되기 시작한 몽마르트르에는 예술가들이 드나드는 카페들이 많았다. 고갱은 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카페에 드나들며 화가들 사이에서 귀동냥을 하며 미술에 대한 지식과 분위기를 익혔다. 그뿐만 아니라 앙데팡당 전시회 등을 찾아다니면서 당시 쟁쟁한 화가였던 모네, 마네, 드가, 피사로, 세잔 등의 작품도 구입하며 자연스럽게 그들과 친분을 쌓았다. 아마추어 화가이며 그림도 구입하는 중산층 금융인이었던 고갱은 그들과 금방 친해졌다. 그런 관계 형성은 외향적이고 자신의 주장이 강한 그의 성정이 뒤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프랑스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속화 시절처럼, 미술품을 대중적인 문화 상품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술시장은 매우 활성화되어 있던 시절이었고, 따라서 고갱 같은 부류들이 많았다.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인 여유와 미술에 대한 욕구를 겸비한 사람들이 그림을 구입하면서 예술가들과 어울리는 현상은 특별하지 않았다. 이런 문화적 분위기는 미술계뿐만 아니라 음악과 문학 세계에서도 깊게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고갱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화가는 카미유 피사로였다. 잠깐 피사로에 대해서 얘기하고 가자면, 그는 프랑스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를 이끈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정식 아카데미를 거부하고 늦은 나이에 거의 독학으로 회화를 습득한 그는 아틀리에를 벗어나, 캔버스를 야외로 들고나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낭만주의를 거부하고 인상주의를 개척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 같은 풍모를 가지고 있어서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었고, 온자 한 대부처럼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 넘치는 화가였다. 마네, 모네, 세잔, 피트, 르느와르, 기요맹, 드가 등 당시 화가들은 그를 인자한 선생님처럼 따랐고, 세잔은 자신의 아버지이고 유일한 상담자이며 선한 주님과 비견된다고 극찬했다. 그는 각종 모임을 조직해 인상주의 확장을 위해 노력한 행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는 유능한 리더이기도 했다. 아마추어 화가인 고갱도 당연히 그런 피사로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위키피아 / 1880년 작 / 누드 연구

고갱의 유일한 스승인 피사로와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아내 메테와 동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일이면 고갱은 덴마크 출신인 아내를 데리고 피사로 집을 방문하였고, 역시 덴마크 출신인 피사로는 메테를 반갑게 마중하고 자신들 만의 연대감 깊은 대화를 나누며 친목을 다졌다. 그 집에서 고갱은 피사로의 회화 기술을 학습받기도 하고, 식사를 하며 인간적인 관계도 유지했다. 메테도 그런 분위기를 좋아해 당시만 해도 고갱이 그림을 그리는 것에 거부반응 보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믿음직한 피사로가 배경에 존재했기 때문에 남편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가운데 고갱은 정부 주체 미술전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고, 앙데팡당 전시회에 출품하면서 꾸준히 그림에 매진했다. 물론 아직 비평조차 논하는 평론가도 없었지만 피사로, 마네, 드가는 진심으로 고갱을 격려를 해주었다. 물론 자신의 그림을 구입해 준 보답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고갱에게는 힘이 되었다. 사실 훗날 그들과의 관계를 보면, 그들은 진심으로 고갱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갱이 회사원일 때 그린 작품 중에서 대게는 습작 수준이었지만, 1890년에 그린 '누드 습작'이라는 작품은 회화의 기능적인 척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일명 수잔 바느질이라고 불리는 그 작품을 보면 여인의 피부에 드러난 붉은 핏줄을 극사실적으로 묘사를 했고 전반적으로도 사실주의를 표방한 것을 알 수 있다. 추후 이런 사실주의에 입각한 작품을 만들지 않았지만 그의 기술적 근본을 알 수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갱의 평화로운 시간은 종착점을 예고하고 있었다. 18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공황이 장기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은 장기공항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그 직접적인 여파는 고갱에게 들이닥쳤다. 사실 그런 경제 공황이 오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직종은 금융계였기 때문에 고갱도 그런 위기감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에밀 슈페네케르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주식시장은 1880년대 초가 되자 악화되어 가기 시작했고 상황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경제시장의 최전선에 있었기 때문이 상황 파악은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주식시장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슈페네케르와 매일 자신의 거취에 대해 걱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암울한 미래에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수입도 줄어들었다.


고갱은 여러 가지 고민에 잠겼다. 인생의 갈림길에 놓인 것이다. 그는 피사로와 만나 자신이 전업작가가 되면 최소한의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지 상의했다. 프로페셔널 한 화가처럼 높은 삶의 질을 원하지 않더라도 식구를 건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스승인 피사로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신중한 피사로는 그의 질문에 긍정적인 가능성을 내비쳤다. 크지는 않지만 희망을 준 것이다. 피사로가 볼 때, 고갱은 대인관계에서 외적인 표현이 크고 조금은 진실성이 부족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면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미술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전업화가의 길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사바나 같은 미술계에서 생존해 내리라고 보았는지 모른다. 사실 한 가닥의 희미한 빛 만 있더라도 고갱은 그 빛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고갱은 퇴사 후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물론 아내와는 상의하지 않았다. 반대가 뻔했기 때문이었다.


1883년 1월, 회사에서 자신이 할 업무가 없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고갱은 베르텡을 사직하고 황량한 사바나로 나왔다. 사실 오히려 잘 되었는지도 모른다. 화가로서의 삶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미래였는지 모른다. 이 참에 전업화가가 되어 새로운 인생을 꾸려보는 것도 하나의 소중한 인생이었다. 그러다 보면 미약하지만 자신이 십 년 가까이 가꾸어놓은 미술계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무언가 잘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만난 쟁쟁한 화가들과 그리고 자신이 구입한 작품들은 결코 자신의 미래를 등한시하지 않을 것이란 희망이 그의 인식세계를 완벽하게 점령했다.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 '예술만으로 살아갈 험난한 투쟁의 길로 뛰어들었다.' 그의 치명적인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퇴사 전부터 현격하게 줄어들었던 수입도 퇴사 후에는 아예 전무했기 때문에 고갱은 일곱 식구가 살던 주택과 꽤 시설이 좋았던 화실을 처분한 후 가족을 데리고 물가가 싼 루앙으로 이사를 갔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정말 화가가 된 것처럼 계속 캔버스를 떠나지 않았다. 아내와 다섯 아이들은 고갱의 그런 행위에 대해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메테는 바가지를 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해온 행적이 있어서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시골로 이사를 가서 뜬금없이 전업화가라고 자처하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남편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많던 수입도 그림을 사는 데 소진했기 때문에 모아 둔 돈도 많지 않아 1년도 안되어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고갱의 그림은 장담했던 것처럼 전혀 팔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그동안 사놓았던 작품들을 팔자고 했지만 처음엔 일언반구도 없었다. 궁핍함이 그 가족의 목을 죄어 올 때 구입한 작품 몇 개를 아는 화상에게 부탁했지만 그것도 경제 악화로 인해 작자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루앙의 물가가 아무리 싸다고 하더라도 수입 하나 없이 대가족이 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갑자기 삶의 질이 추락한 가족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해 걱정을 넘어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갱은 이런 상황을 예고라도 한 듯 초연하게 그림만 그렸다. 이에 더 이상 참지 못한 메테는 루앙 생활 8개월 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코펜하겐으로 가겠다고 선포했다. 이제 파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고갱을 설득할 이유도 없었다. 자신을 따라오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고갱은 화려한 인생 1막을 정리하고 패잔병처럼 프랑스를 떠나 북풍한설 휘몰아치는 코펜하겐으로 간다.


사실 아내의 형제들이 살고 있던 코펜하겐으로 갈 수밖에 없을 당시, 고갱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아내의 의견을 따르기로 작정했다. 이제 파리로 돌아가 보아야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쟁쟁한 아내의 친척들 사이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업이 아니라도 그림은 마음만 먹으면 취미 삼아 얼마든지 그릴 수 있었다. 그렇게 전혀 생각지도 않은 코펜하겐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생각만큼 코펜하겐 생활은 녹녹지 않았다. 처음엔 처갓집의 도움으로 취직을 하기 위해 여러 회사에 이력서도 넣고 면접도 보았지만 적성에 맞는 곳도 없었고, 아예 퇴짜를 맞은 곳도 있었다. 거의 모든 구인 회사들은 영업직을 원하고 있었는데, 주식투자 업무에 길들여진 고갱의 입장에선 내킬 수 없는 직종이었다. 물론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강한 언행도 한몫했다. 사실 구직활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갱은 취업이 되지 않은 이유를 상대방에게 돌렸다. 현지인의 보수적이고 반듯한 생활 태도에 진절머리를 냈고 나 같은 자유인이 발붙일 곳이 없다고 시니컬하게 평했다. 핑계에 불과하지만 사실 그는 어디를 가나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는 코펜하겐 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다. 5년 이상 배를 탔고, 느슨한 조직에서 회사 생활을 했고, 더구나 유럽에서 가장 자유롭고 예술적 분위기가 넘쳐나는 파리에서 10년 이상 살았는데, 빈틈이 없는 코펜하겐에 적응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덴마크어를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백수로 보냈다. 그러면서도 캔버스를 떠나지 않았다. 1년이 지나자 코펜하겐 생활에 숨이 막혀왔다. 메테가 에밀 졸라 등 프랑스 소설을 번역하는 일로 수입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삶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5남매와 남편을 건사하기에는 빠듯한 수입이었다. 그들 부부가 싸우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메테는 무능력한 고갱이 답답했고 참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한때 잘 나가던 그 파리지앵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고, 가족을 등한시하고 딴생각만 하는 고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괜찮은 회사에 취직을 할 수 있는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거부하는 남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존심만 강한 백수가 되어버린 고갱, 그는 코펜하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하려는 의욕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전의 날이 왔다. 코펜하겐 생활 18개월 정도 되었을 때 고갱은 드디어 그곳을 떠난다. 이제 자신은 전업화가로서의 인생을 살겠노라고 선포하고 가족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화가로 성공하여 가족을 다시 파리로 데리고 가겠노라고 호기도 부렸다. 메테는 그런 고갱을 말리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5남매를 다 책임지기에는 역부족이니 아이들 중 한 명이라도 데리고 가라고 조건을 걸었다. 고갱은 흔쾌히 그 조건을 수락하고 가장 사랑했던 아들 클로비스를 데리고 1885년 6월 파리로 돌아왔다. 당시 클로비스는 7살이었다. 미리 얘기하지만 클로비스는 파리에 와서 학교 기숙사로 보내졌고, 2년 후 고갱이 프랑스를 떠나 카리브로 갔을 때 지인들에 의해 코펜하겐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거의 방치된 채, 고갱으로부터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한 클로비스는 그 영향 탓인지 병약하여 결국 1900년 21살 때 사망한다. 당시 그 사실을 타이티 마르티즈에서 접한 고갱은 회고록에서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매우 슬퍼했노라고 표현한다.  


고갱을 논할 때 그의 작품보다 개인사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데, 그중에 하나가 6명이나 되는 가족을 버리고 예술가가 되었다는 서사이다. 미술을 늦은 나이에 독학으로 배워 화가가 되는 경우는 당시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고 홀로 화가의 길을 간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고갱을 제외하고 떠오르는 화가는 보이지 않는다. 현실이 우선이냐, 예술이 우선이냐, 그런 상관관계에 대한 논의는 현재도 논쟁거리이고 19세기에는 더더욱 그랬다.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영국에 있는 서머셋 모음이 그런 고갱을 소재로 소설을 썼을까. 하지만 그런 관계 설정은 선정성에 따른 표피적인 서사에 불과하다. 고갱은 일방적으로 가족을 떠났다거나 혹은 아내에게 쫓겨났다 거나 하는 예기는 선정성에 부합한 가십이고 사실은 서로 협의 하에 잠시 이별을 한 것이다. 코펜하겐 생활이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고, 그럼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고 그것으로 돈도 벌 수 있는 것은 화가이니,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한 후 다시 돌아오겠다고 부부가 합일점을 찾은 것이다. 돈 벌기 위해 가족을 떠나 상선을 타는 것처럼 고갱도 그런 맥락으로 가족 곁을 잠시 떠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지금이나 예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삶의 한 형태이다. 훗날 고갱이 마르티즈에서 인생의 막바지에 당도했을 때도 가족에 대해 관심을 잃지 않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자신만 사랑한 나르시스트이며 막돼먹은 남자였지만 그가 사망한 후 유산 관계를 정리할 때 메테가 드몽프레를 대리인으로 내세우고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을 보면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가족과의 완전한 단절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평균적 도덕률과 현실적인 시각으로 볼 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었나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파리에서 고갱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가난과 무관심이었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이제 전업화가로 활동을 하겠노라고 호기롭게 선포를 했지만 자신의 작품을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더라도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열정적으로 작업에 매달려 자신이 창조하는 세계에 몰입했다. 돈이 바닥나 일당 3프랑을 받고 벽보 붙이는 알바를 하면서도 이젤을 접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생처음 겪어보는 궁핍은 그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덴마크에서 경험한 북극권의 혹독한 추위처럼 파리에는 차디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굶주림에 지친 하이에나처럼 그는 매일 새벽에 벽보를 붙이고, 생계비용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그러면서 낮에는 붓을 잡았다.


그런 결과 다음 해에 그는 폴 뒤랑 뤼엘 화랑이 주체한 앙데팡당 회화 전에 눈물젓은 빵을 먹으면서 작업한 작품 18점을 출품했다. 물론 피사로의 도움이 컸다. 그 전시에는 당시 신인상주의 화가 다수가 참여했다. 마리 브라크몽, 카미유 피사로, 드가, 포랭, 기요맹, 쇠라, 그리고 고갱의 절친 슈페네케르 등의 작품이 걸렸다. 이런 단체 회화 전에 참여한 화가들은 경제적인 여력이 되는 경우 함께 참여한 화가들의 작품을 사주기도 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고갱의 작품 몇 개가 싼 가격에 팔릴 수 있었다. 특히 고갱보다 13살이나 많은 드가는 고갱의 작품이 전시되면 항상 한두 점 구입해 주고 격려도 잊지 않은 평생 지지자였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 미술시장을 쥐락펴락했고 인상주의의 대부하고 불리는 대화상 뒤랑 뤼엘도 훗날 평균보다 높은 가격에 고갱의 작품을 구입해주고는 했다. 파리 미술계는 그 시점에서 고갱을 프로페셔널 화가로서 인정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평가는 낮았지만 자신만의 화풍을 형성해 가고 있다는 점이 미술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이었다. 인상주의 시대에서 작가 각자의 고양된 감성에 의한 작품을 창조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비평적 요소였다. 작가 개인이 사물을 보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창조하는 세계야 말로 인상주의의 핵심이며 아방가르드의 첫 번째 강령이었다. 그 다양성이 존중하는 세계에서 고갱도 점차 적응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비록 실험성이 강한 작품들이었지만 변화의 조짐은 확실했다.


이에 힘을 얻은 고갱은 파리를 떠나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지역에 가서 작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브리타뉴 지역의 퐁타벤으로 이주한다. 파리라는 도시는 많은 지인들과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또한 향락이 넘쳐나는 도시였기 때문에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므로 해서 그림에 집중할 수 없는 곳이었다. 퐁타벤은 전형적인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업할 수 있는 최적의 풍경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곳에는 젊은 화가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생활비도 싸고, 풍경도 좋고, 화가들도 많아 미술에 대한 토론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훗날 퐁타벤파라는 화파가 만들어진다. 아무튼 처음 농촌 생활을 시작한 고갱은 그곳에서 자신의 작품 경향의 변환적 모티브가 되는 에밀 베르나르와 처음 만나게 되고, 샤를 라발 같은 20대 초반의 젊은 화가들과 어울리게 된다. 미래에 아방가르드의 한 획을 긋는 젊은 화가들은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화가가 된 고갱의 예술적 기질을 동경하였고 그의 작품 세계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종교와 같은 신념이 있어야 한다는 낭만적 관념이 지배하던 차에, 그런 의미에서 고갱은 그들의 멘토 같은 존재였다. 고갱이 의도하지는 않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의식하지도 않았지만 젊은 화가들은 그와는 상관없이 삼촌 같은 그를 따랐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리고 퐁타벤 생활에 빠져 있을 때, 젊은 화상 빈센트 반 테오의 부탁으로 잠시 파리로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몽마르트르에서 그의 형 빈센트 반 고흐와 처음 만난다. 당시 만난 베르나르와 라발 그리고 고흐는 그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들의 사랑과 배신의 서사는 지금도 우리의 연민을 끌어낸다.

출처 위키피아 /  1886년  라발의 프로필이 있는 정물

퐁타벤에서 만난 애송이 화가 샤를 라발과 고갱은 비록 나이 차이가 15년 정도 났지만 둘 사이는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고갱은 나이가 많다고 형님 행세를 하지 않았고, 라발도 그런 고갱의 꾸밈없고 소탈한 성품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파리에 갔다 온 고갱이 느닷없이 라발에게 카리브해에 가자고 꼬드겼다. 몽마르트르 언덕길을 걷다가 우연히 카리브해에 있는 마르티니크 관광포스터를 보았는데, 무언가 신의 계시처럼 그곳에 가고 싶은 충동이 고갱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그곳은 과거 자신이 뱃사람이었을 때 지나다니던 그 바다였다. 아마도 브라질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항해할 때였을 것이다. 코발트색 하늘과 에메랄드 바다와 그리고 녹색의 야자수가 무성한 카리브해 풍경이 고갱의 기억에 되살아났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려 팔면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라발과 함께 가면 더 많은 그림을 생산할 수 있어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그러면 유유자적한 삶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고갱은 샹그릴라를 꿈꾸며 순진한 라벨을 꼬드겨 1887년 봄 카리브해로 가는 배를 타는 데 성공했다. 처음 행선지는 파나마였다.


하지만 카리브해라는 곳은 생각처럼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파나마 운하 공사 관계 회사에 근무하던 고갱의 친척이 그림 판매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 선약이 다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알고 보니 친척이 허풍을 부린 것이었다. 이를 믿었던 고갱 일행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그렇다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기에는 그동안 공들인 시간이 아까웠다. 그림 판돈과 가지고 있던 돈을 탁탁 털어서 이 먼 곳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생활환경이 열악한 파나마에서 온갖 고초를 격을 끝에 당초 여행지인 마르티니크로 갈 수 있었다. 그곳은 유럽인이 많아 그림 판매가 수월했다. 그들은 거리의 화가처럼 카리브해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려 판 돈으로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살인적인 더위에 그들은 지쳐갔고, 무엇보다 풍토병과 이질 같은 전염병에 적응할 수 없었다. 고갱도 이질에 걸려 한동안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몸이 약했던 라발이 견디기 힘들어했다. 더 이상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미술시장이 극히 좁아 시간이 지나자 그림은 전혀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마르티니크가 지옥처럼 보였다.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가정 좋은 방법은 그곳을 떠나 프랑스로 가는 것이었다. 고갱과 라발은 그해 11월 간신히 뱃삯을 마련해 마르세유행 여객선에 승선할 수 있었다. 고갱 특유의 구라가 섞인 여행담이었지만 힘든 여행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떠난 그 여행은 몇 년 후 더 먼 타이티로 가는 전초전 같은 여행이었다.


새까맣게 타서 돌아온 두 사람은 잠시 헤어져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다. 고갱은 파리 슈페네케르 집으로 가서 문간방 생활을 했고, 라발은 퐁타벤으로 가서 젊은 화가들이 형성한 공동체에 합류했다. 라발은 몇 년 후 그곳에서 절친이었던 에밀 베르나르의 여동생 마들렌과 연분이 생겨 뜨거운 관계가 된다.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청년 화가 베르나르는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기 위해 퐁타벤으로 왔는데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함께 살고 있던 터였다. 그들의 사랑은 퐁타벤에서 유명한 커플이었다. 하지만 약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수한 청년 라발은 약혼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약혼녀 마들렌도 다음 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1894년이었다. 고갱을 선생처럼 따랐고 때론 친구처럼 대했던 라발은 카리브해의 이글거리는 태양 속으로 사라졌다. 영혼이 맑았던 라발, 사랑했던 두 남녀는 퐁타벤의 전설이 되었다. 그들의 비극을 바로 지척에서 지켜본 마들렌의 오빠 베르나르는 그 충격 탓인지 모르지만 몇 년 후 아방가르드 세계와 결별하고 프랑스를 떠나 이집트로 간다. 베르나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얘기하겠다.


1888년이었다. 그해는 고갱의 개인적 미술사에서 가장 다사다난하고 중요한 시기였다. 카리브해에서 탈옥하다시피 도망쳐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파리지앵 슈페네케르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고갱이 의탁할 곳은 그 집 밖에 없었다. 더구나 까탈스럽고 배려심 없는 그를 그나마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슈페네케르가 유일했을 것이다. 훗날 드몽프레가 고갱의 생활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곳은 화실이었지 숙식 장소는 아니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고갱 곁을 떠나지 않았던 슈페네케르는 당시에도 방 하나를 내주어 친구로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실 방 하나만 내준 것 만 아니라 가지고 다닐 수 없는 고갱의 잡다한 작품이나 중요한 물건을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슈페네케르도 전업화가로 변신하여 자신의 미술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였고 경제적인 형편도 당연히 과거처럼 여유가 있지 않는 상황이었다. 집도 파리 외곽으로 옮긴 상태였다. 하지만 고갱은 그 집의 주인처럼 행세했다. 손님이 방문할 경우에도 얹혀사는 줄 모두가 다 아는 데도 주객전도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곤 했다. 그렇다고 결벽증적으로 소심하고, 괴팍한 성격이라면 한몫하는 슈페네케르도 고갱한테 만큼은 자신의 성격을 표출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둘 관계는 관포지교였고, 재미있게 표현하면 고갱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고갱의 역마살 때문에 슈페네케르 집에 오래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갱은 지친 몸을 추스르고 봄이 올 무렵 방 하나는 족히 차지하는 잡다한 미술품과 중요한 물품 등을 슈페네케르 집에 맡겨두고 다시 퐁타벤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2년 전에 처음 만났던 베르나르도 정착을 준비하고 있었고 역시 카브리해 여행 친구 라발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젊은 화가들이 하숙집에 함께 기거하며 공통적인 화풍을 탐구하고 있었다. 그중에 위 두 사람과 훗날 전위적인 나비파를 주도하는 폴 세뤼지에, 모리스 드니, 앙리 모레 등 아방가르드 정신이 투철한 젊은 화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인상주의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미 고갱도 인상주의를 탈피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는데, 그들도 종합주의, 클루아조니즘 같은 화풍을 연구하며 고갱의 의도에 부합하기 위해 무공을 닦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매일 예술의 지평을 보다 확장하는 토론과 논쟁이 벌어졌고, 그런 무질서에서 차춤 질서가 형성되어 가기도 했다. 그런 부류를 흔히 퐁타벤파라고 부른다. 후세의 미술사가들은 고갱을 그 화파의 수장이며 젊은 화가들이 선생으로 모셨다고도 일컫지만 사실은 고갱의 기질 상 그런 계급적 관계를 싫어하고, 독고다이 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에 그것은 뇌피셜에 불과하다. 그들이 고갱의 주위로 모여든 것은 고갱의 아방가르드적 정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갱의 이력이 보여주는, 즉 자신의 가족과 부를 전부 버리고 척박한 미술세계로 뛰어든 그 예술가의 신념을 존경한 것이었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고갱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게 혈기왕성하고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 화가들의 공통적인 철학이었다. 자신의 미학 세계를 찾아 방황하는 고갱은 현실세계에서는 공상이었지만 그들에겐 우상이었는지 모른다.

출처 위키피아 / 1886년 로트렉 작 / 베르나르 초상화

그리고 퐁타벤에는 그런 아방가르드 파만 있는 게 아니라 지근거리에서 바르비종 추종파와 정통 아카데미 파들이 동아리를 이루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자연주의의 일종인 바르비종 화파는 그 유명함 밀레를 교주로 섬기고 있었는데, 그들과 아방가르드 파는 치열한 미학적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화풍에 대해 신랄하게 뒷담화를 까기도 했다. 바르비종 파는 상대방을 향해 그게 그림이냐고 힐난했고, 아방가르드 파는 자연주의는 고답적이고 매너리즘이다라고 비판했다. 답이 없는 논쟁이었다.


아무튼, 이런 퐁타벤의 뜨거운 분위기에서 에밀 베르나르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고갱이 처음 퐁타벤에 왔을 당시, 베르나르는 파리에서 배낭 하나 매고 10여 일 동안 문전걸식하며 걸어서 이곳에 도착했었다. 흔히 말하는 무전여행이었다. 숙박과 식사를 그림을 그려주고 해결하면서 퐁타벤까지 걸어온 것이었다. 물론 걸어서 무전여행하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없지 않지만 그런 발상을 한 그도 고갱처럼 끼가 다분했고 그로 인해 다양한 삶을 경험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는 가족까지 퐁타벤으로 불러 자신을 뒷바라지하게 하면서까지 미술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는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기 전에 문학과 철학을 심도 있게 배웠고,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거장 세잔에게 직접 찾아가 사사를 받기도 한, 해박한 지식과 당돌함까지 갖춘 전도유망한 청년 화가였다. 그는 퐁타벤파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이론가이면서 실천가이기도 했다. 특히 종합주의와 클루아조니즘의 창시자로서 혁신적인 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베르나르가 처음 미술 아카데미를 찾은 곳은 파리에 있는 페르난드 코르몽 화방이었다. 1887년, 그곳에서 고흐와 로트렉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들의 공통점은 늦깎이 화가 지망생이라는 것이었다. 베르나르도 미술학교에 다니지 않는 늦깎이였지만 그들보다는 훨씬 어린 갓 20살에 불과했다. 견고한 문학적 지식을 겸비한 베르나르는 특히 15살 많은 고갱을 친형처럼 좋아했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준 로트렉과도 친하게 지냈다.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세 명이 페르난도 코르몽의 동문이라는 사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특히 고흐와의 관계는 남달랐다. 베르나르는 아를로 내려간 고흐와 2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중에는 고흐가 군대 가는 동생에서 매음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남자들만의 은밀한 대화가 숨어 있다. 섹스를 너무 많이 하면 작업에 지장을 받으니 3~4일에 한 번씩만 하면 충분하고, 자신은 돈이 궁해 사창가에 그렇게 자주 가지 못한다고 고흐가 베르나르에게 조언도 한다. 그리고 1888년에는 고갱보다 먼저 아를에 사는 고흐를 찾아가 반가운 해후를 하고 즐거운 시간도 가진다. 그런 두 사람이 파리 시절 세느 강변에 있는 야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않자 서로 존중하는 눈빛을 교환하는 흑백사진이 전해져 온다. 비록 빛바랜 흑백 사진이지만 등진 고흐를 바라보는 베르나르의 눈빛은 고흐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890년 고흐가 자살했을 때, 이 소식을 듣고 가장 빨리 달려간 사람이 그였고, 그 후 장례식을 주도한 사람도 그였다. 베르나르는 장례식 풍경을 그려 고흐에게 헌정했다. 그리고 고흐 사후 3년이 지난 뒤, 그는 프랑스를 떠나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거쳐 이집트에서 가서 10년 동안 살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중요한 인생의 변곡점이 되었을 당시 그는 작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하기 시작했고, 고흐 재평가 작업에 몰두하여 현재의 고흐가 있게 만들었다. 그의 인생도 다사다난하여 젊은 시절 이루어 놓은 자신의 성을 아르튀르 랭보처럼 스스로 허물고 아주 먼 르네상스로 뒤돌아 간다. 마치 이집트 사막 가장 깊은 곳 켈리아로 걸어가는 고독한 은수자처럼, 격렬했던 아방가르드 세계를 홀연히 떠나 고전으로 찾아들어갔고, 붓 대신 펜을 들었던 것이다.


- 2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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