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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Jun 27. 2023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아웃사이더

퐁타벤에서 혁신적인 젊은 화가들과 동거 동락하던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 드디어 고흐가 있는 아를로 떠났다. 일 년 전 카리브해에서 파리로 돌아왔을 무렵, 구필 화랑의 젊은 매니저인 네덜란드 출신 테오 반 고흐가 자신의 작품을 꾸준하게 매입해주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파리 화단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화상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있다 하더라도 낮은 가격에 판매를 하는 상황이었는데 테오는 만족스러운 가격으로 구입을 해주었던 것이다. 빈털터리 신세였던 그에게 그런 테오는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테오의 주선으로 당시 파리에서 험난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의 형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났다. 고갱과 고흐는 금방 가까워졌다. 둘 다 늦깎이 화가였고 또한 매우 가난한 처지였기 때문에 동병상련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는지 모른다. 그해 2월 고흐는 테오가 생활비를 부담해 주는 조건으로 빛을 찾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아를로 내려갔다. 그리고 빈센트와 테오퐁타벤에 있던 고갱에게 아를로 와서 함께 작업을 하자는 편지를 번갈아 가며 여러 편 보냈다. 테오는 화상이라는 갑의 위치에서 은근히 고흐의 뜻을 전했고, 고흐도 자화상과 아를의 풍경화를 고갱에게 보내며 끈질기게 구애를 했다. 이에 퐁타벤에 있던 고갱은 고흐 형제의 집요한 설득에 못 이겨 1년 동안만 함께 작업을 하겠다는 조건으로 아를로 간 것이다.


고갱과 고흐,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평범하지 않는 애증으로 점철된 두 사람의 관계는 미술사에 큰 서사를 남겼다. 그들의 슬픈 이야기는 서로 나눈 당사자간의 편지와 주변 인물들의 간접적인 편지로 인해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베르나르 같은 입 바른 작가들이 이 장미의 전쟁에 뛰어들어 점입가경을 이루게 했다. 풍부한 문학적 소양과 상대방 귀에 피가 철철 흐르게 하는 투머치 능력과 그리고 무엇보다 글쓰기 재주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글들은 편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문자로 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는 고갱의 자서전이 있는데, 아마도 고흐가 고갱만큼 오래 살았다면 그에 뒤지지 않는 글을 남겼을 것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수많은 글들로 인해 짧지만 뜨거웠던 그들의 전쟁은 대하드라마를 엮을 수 있을 만큼 방대해질 수 있었다.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고, 온갖 추측성 가십과 선정적인 거짓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고갱의 시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얘기하고, 고흐의 시각은 나중으로 기약하겠다.


사람의 관계는 직접 부딪쳐 보아야 알 수 있다. 부싯돌처럼 불꽃이 튈지, 핵분열처럼 거대한 폭발이 발생할지, 아니면 손바닥처럼 박수 소리가 들릴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정말 사람의 관계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심지어 당사자도 알 수 없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고갱이 아를로 내려간 첫날부터 어긋났다. 퐁타벤에서 출발한 고갱이 하루 반이 걸려 아를 역에 도착했는데 그 시각이 새벽 4시였다. 꼭두새벽에 도착한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런 방문은 환영받을 수 없다. 아무튼 '노란 방'으로 유명한 하숙집 주인이 그 불청객을 고흐가 미리 준 고갱의 초상화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고갱도 대단하지만 고흐의 사려 깊은 꼼꼼함도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학수고대하던 동거를 시작했다.


고갱이 아를로 간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 먼저 고흐는 아를에 화가들의 공동 작업 스튜디오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행해지던 길드 형태의 화가 조합을 조직해 가난한 화가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마음 놓고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일생일대의 목표였다. 이런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외향적인 고갱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갱은 퐁타벤에서 젊은 화가들의 맏형 격으로 상존했기 때문에 그들을 조합에 가입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고, 사실 베르나르나 샤발 같은 화가는 고흐의 계획에 매우 호의적이어서 고흐가 귀만 자르지 않았다면 성사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고갱의 화풍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의 작품 발전에 시너지 효과를 노릴 수 있었고, 잘 풀리지 않는 고갱의 인생 역정에 집착에 가까운 이타적인 연민이 작동되었고, 무엇보다 고갱에게서 자신에게는 부족한 강한 남성성을 부러워해 왔기 때문에 자신의 불안정한 마음을 의탁하고 푼 의도도 있었다. 이런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고흐는 동생 테오와 공모하여 고갱의 선택의 폭을 좁혀갔다. 테오는 먼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고갱의 그림을 사주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고, 생활비를 지급하겠다는 조건을 걸며 고흐가 있는 아를 행을 권했다. 비즈니스 관계가 다분한 거래였다. 사실 고갱은 카리브해 여행 이후 원시세계의 동경을 버리지 못하고 틈만 나면 프랑스를 떠나려는 획책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리타분한 아를로 가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었다. 그런 고갱의 생각을 잘 알고 있던 고흐는 구애하는 편지를 보내듯이 아를의 풍경과 생활환경에 대해 극찬하는 편지를 보내며 눈물겹게 고갱을 설득했던 것이다.

폴 고갱 1888년 / 아를 밤의 카페, 지누 부인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다시피 고갱과 고흐의 파국은 며칠 가지 않아 예고하고 있었다. 사람 관계는 접해 보아야 아는 것이다. 두 사람은 개성이 너무 강했다. 같은 것은 불같은 다혈질 성격이었다. 성격도 달랐지만, 일상의 루틴과 사소한 생활 습관도 달랐다. 고흐의 생각은 다르지만, 고갱이 말하기를 자신은 휴화산 같았고 고흐는 활화산 같았다고 평했다. 고흐의 정신세계는 알퐁소 도테와 콩쿠르 형제 그리고 성경이 지배하고 있었고, 이타적이지만 설교하는 스타일이어서 상대방을 질리게 했고, 고집불통이어서 타협할 줄도 몰랐으며, 파리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다투다가 화를 내면 히스테리 한 상태로 돌변하기도 했다. 일상적인 행동에서도 눈에 거슬려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비싼 물감을 터무니없이 과하게 소비했고, 안료 튜브도 닫지 않은 채 방치했고, 화구들도 산만하게 흐트러져 있는 등 정돈이 되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그림만이 빛났다. 또한 경제적 개념도 없어서 테오가 고갱 몫으로 보내준 돈을 자신 마음대로 쓰고, 음식도 다 먹지 못하고 버릴 정도로 대책 없이 많이 만들어 고갱의 핀잔을 듣기도 했다. 동생에게서 생활비를 얻어 쓰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실생활에서는 아껴 쓰려는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벽보 붙이는 알바를 하며 궁박한 삶을 살아보았던 고갱으로서는 고흐의 그런 생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각자 화풍에 대한 미학적 성향이 비슷한 것 같았지만 대화를 해보면 너무나 달라 타협점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고흐는 고전주의 화가 메소나에와 바르비종의 밀레를 극찬한 반면 드가와 세잔을 3류 화가라고 비난했다. 그런 고흐의 비판에 대해 고갱은 대척점에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표출했다. 이론 논쟁이 벌어지면 고흐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조증 환자처럼 입에 거품을 물며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파리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1년 사이에 변한 것인지 모르지만 미학적으로 자신과 일치되는 점이 거의 없었다. 고갱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어서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인상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고갱과 오히려 인상주의 이전의 화풍을 존중하는 고흐는 물과 기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각자 자신들의 작품은 서로 존중을 해주었다. 작품에 대한 기술적인 부분과 상상력에 관한 부분은 서로 보완하면서 발전시켰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1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갈라섰을 것이다.


아무튼 미친 듯이 전쟁을 치르고 나면 다음날 고흐는 미안한 감정을 내비치며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이런 다툼과 화해는 반복되었다. 한 달이 지나갈 무렵 고갱은 테오에게 고흐와 성격이 안 맞아 파리로 떠나야겠다고 하소연하는 편지를 보냈다. 퐁타벤에 있던 베르나르에게도 고흐에 대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감정을 추스르고 화해를 했노라는 편지도 보낸다. 사실 고흐와 고갱은 테오와 베르나르와의 친분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지도 각자 보내며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켰다. 고갱 입장에서 고흐가 자신에 대한 평가를 테오나 베르나르에게 표현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고흐에 대한 견해를 그들에게 표했다. 이런 복잡한 관계로 인해 그들의 많은 편지에 서로의 이름이 수없이 등장하지만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표하지 않고 완곡하게 포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서로 노골적인 감정을 억제하고 정제된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런 불편한 관계에서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다. 가령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고갱과 다투었다고 고자질하면서도 그 행간에 고갱이 너에게도 이 내용에 대한 편지를 보낼 것이라고 예고하는 단어들이 있다. 테오의 입장에서 고갱과 고흐의 불화를 두 사람의 시각으로 확인해야 하니, 불편하기도 하고, 판단도 애매하고, 미루어 짐작을 하더라도 재판관의 복잡한 입장과도 같았을 것이다. 다 큰 어른이 애들처럼 노상 싸우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시한포탄과도 같은 동행에 대해 테오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베르나르의 입장도 두 선배의 동행을 어떤 식으로 보았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베르나르는 인간적으로 고흐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후 고흐 재평가에 앞장을 섰고, 상대적으로 고갱의 평가는 박했다.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는 불안전한 공존은 시간이 갈수록 이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서로의 이별은 돌이킬 수 없었다. 고흐는 노란방 벽에 '나는 성령이다. 나는 정신이 말짱하다.'라는 글은 붙여 놓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려고 노력했고, 고갱도 이미 떠나기로 마음을 굳혀가고 있었다. 고흐도 마음을 내려놓은 듯 아마도 고갱이 떠날 것 같다고 테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두 사람은 마지막 일주일 전에 기차로 2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몽펠리에로 회화 전시 여행을 갔다. 19세기 대화상인 알프레드 브루야스가 파브르 박물관에 자신의 작품 전부를 기증했는데 그 기념 컬렉션 특별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파브르에는 이전 세대인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시대에 활약했던 쿠루베, 드라크루아, 귀스타브 리카드, 알렉산드르 카바넬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해 당일치기로 갔다 오는 여행이었는데, 고갱과 고흐는 기차 안에서 드라크루아와 렘브란트의 작품 세계에 대해 항상 그렇듯 진이 빠지도록 토론을 이어갔다고 한다. 영혼을 털리는 그런 지독한 토론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들은 마지막까지 이별의 순간을 미루려고 노력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별의 결정적인 계기는 카페에서 벌어졌던 싸움 때문이었다. 그날도 저녁을 먹고 압생트를 마시며 미학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흐는 압생트를 너무 마셨고 시간이 흐르면서 눈동자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날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자신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기분이 몹시 상해 있던 참이었다. 그 그림은 자신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의 표현이라는, 어떤 피해의식적인 감정이 격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해질 때 고갱이 피하면 되었을 텐데 그는 흥분한 고흐와 계속 맞받아쳤다.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었으며 그때 고흐가 고갱의 머리를 향해 술잔을 던졌다. 다행히 빗나갔으나 사태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 일로 고갱은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날 밤늦게 집으로 들어온 고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고갱은 그런 고흐에게 다음에도 그런 행동을 하면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 답했다. 체형 자체도 강했지만 권투와 펜싱을 배운 고갱이었기 때문에 완력으로는 고흐가 당해낼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두 사람의 쌓였던 앙금이 폭발한,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급변하였다.


하지만 그 사건 다음날, 12월 25일 우리는 고흐의 귀 절단 사건이 일어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사건에 대해서는 여기서 얘기하지 않겠다. 아마도 고흐 편에서 상세하게 말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고갱은 엽기적인 고흐의 행위에 황망했지만 테오에게 전보로 귀 절단 사건에 대해 알려주었고, 아를로 급하게 내려온 테오를 만나 상황을 인수인계 해준 후 파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황급하게 몸 만 빠져나오느라 자신의 물품도 그대로 두고 왔다. 이런 불미스러운 상황에서 사건을 수습하지 않고 도망치듯이 아를을 탈출한 고갱의 행위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의심의 단초를 만들었고, 비판적인 호사가들의 입방아를 찧게 했다.


전대미문의 이 충격적인 사건은 파리 미술계에 파다하게 퍼졌다. 사건 내용이 6하 원칙에 따라 기사화될 정도로 가벼운 사건은 아니었다. 그 사건의 전말은 분분했다. 고흐가 왜 귀를 잘라야 했는지에 대한 가당치 않은 추정들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함구했다. 사이가 좋았던 그들의 관계가 왜 그토록 험악해졌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고흐가 분노조절장애와 조울증 같은 신경정신과 질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전후 정황상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고흐 자신이 사건의 직접적인 언사(그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의사 한데 말했다)는 없지만 심정적인 표현은 편지로 남아있다. 고흐의 편지를 보면, 고흐는 그 사건 이후에도 고갱과 좋은 감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점을 볼 수 있다. 자신의 그런 돌발 행동에 대해 자신도 놀라 정신병적인 발작이라고 자가 진단을 했고, 정신병원 입원을 마다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고갱의 책임은 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흐의 수많은 편지를 보더라도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문장은 있지만 고갱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문장은 없다. 당사자인 고갱은 고흐가 더 충격적인 자살이라는 행위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동안 함구하고 있었다. 일련의 그 과정에서 고갱이 보인 무반응은 의문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동료 화가들은 고갱의 말을 듣고 싶어 했다. 이제 입을 열 때도 되지 않았느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느냐는 등의 계속된 성화에 못 이겨 두리뭉실하게 해명하기도 했고,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도 고흐와의 관계에 대해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사실, 그저 고흐의 우울증에 의한 자해라고 설명하면 간단하지만, 사람의 관계가 얽히다 보면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가 되기 마련이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진실은 무언의 합의에 의해 세상에 밝히지 않은 채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위에서 밝힌 사실들은 상황을 피할 수 없었던 고갱의 입장일 뿐 당사자인 고흐는 영원히 입을 닫고 떠났지 않았던가. 자신의 귀를 자른 행위에 대해 나는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상상의 영역이 남아 우리의 호기심을 촉발하고 있다.  


사실 고갱의 구라는 파리 미술계에서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조금은 신뢰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도를 넘는 것은 아니어서, 가령 사석에서는 구라대왕이라고 칭하는 황석영처럼, 표현이 다소 과장되어 있는 정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고흐는 기독교 정신이 투철한 선한 사람, 고갱은 뱃사람 출신에 냉혹한 금융인이며 세속에 찌든 나뿐 사람이라는 등식이 고정관념화 되어 있었다. 이타적이고 겸허한 고흐와 이기적이며 매사에 건방진 고갱이라는 등식은 항상 논란거리였다. 더더욱 귀 절단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에서 멘붕에 빠져 수습도 하지 못하고 아를을 떠났다고 최소한 이해는 할 수 하지만,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을 반복하는 등 인생의 최악에 몰리고 있을 당시에 한 번도 그를 찾아가지 않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상식 밖이었다. 고갱의 이런 처신에 대해 냉정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다수였다. 마이어 그래프 같은 평론가는 고갱의 처신에 대해 비정하고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또한 고흐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갱보다 베르나르가 앞장서서 장례식을 치른 것을 보면 고갱은 비난받아 마땅한 냉혹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고갱은 이에 변론을 하지 않았다. 반박을 해보았자 자신에게 돌아올 것은 마녀사냥식 화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이며 사실관계는 모른다. 사람의 관계를 일반화하여 개연성이란 공정을 거쳐 결과물을 도출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사람의 감정과 이성은 언어라는 방법으로 일반화시킬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그런 단순한 논리에 길들여진 인간은 거짓과 진실의 경계선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당사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 경우는 인간사에서 비일비재하다. 아무튼, 당시 외부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그 사건 이후 고흐가 자살하기 한 달 전까지도 우호적인 편지를 여러 번 주고받았다. 그 은밀한 내용을 보면, 절교를 한 상태이라고 해도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연민과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고갱의 답장을 보면, 파리에 전시된 고흐의 작품을 보았는데 아주 훌륭했노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자신이 거주하는 퐁타벤으로 방문하겠다는 고흐의 의향에 대해 건강이 우선이니 당분간 힐링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고, 더불어 현재 고흐가 걱정해 주던 고향 후배 마이어 드한이 퐁타벤에 도착하여 잘 생활하고 있다는 등 그곳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은 마다가르다스에 가서 원주민과 섞여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겠다는 소망을 얘기하는 등 따뜻한 표현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고갱의 다른 편지에도 고흐와 테오를 선하고 고마운 사람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다. 두 형제의 진심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사람 관계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부부가 이혼할 때도 일방적인 것은 없는 법이다. 그들의 내밀한 생각과 다툼은 그들만이 알 뿐(사실 당사자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정신세계가 누구보다 복잡한 고갱과 고흐는 더더욱 그렇다. 그 복잡한 의식 구조와 파생된 주장들이 서로 부딪혀 충돌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이미 예견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상상이지만 고갱이 아를로 끝내 가지 않았다면 그들의 인생 역정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아를에서 퐁타벤으로 돌아온 그해 5월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국력을 만 천하에 알리는 대대적인 박람회였다. 그것을 빌미로 그해 6월 파리에서는 수많은 미술 전시회가 열렸는데 고갱도 이에 합세하여 볼피니 카페에서 앙데팡당 단체전을 기획했다. 고갱을 비롯해 에밀 베르나르, 샤를 라발, 조르주 드몽프레,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슈페네케르 등 9명이 참여했다. 흔히 퐁타벤파라고 일컫는 종합주의 화가들의 단체전이었다. 고갱은 파나마와 마르티니크, 브리타뉴와 아를에서 작업한 작품 17점을 출품했고, 에밀 베르나르 23점, 샤를 라발 6점 등이 전시되었다. 특이한 점은 라발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고갱의 화풍을 모방한 것이어서 고갱의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했으며, 당연한 점은 평론가나 관람객들이 그들의 특이한 작품에 대해 평가를 유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달 가까이 전시회 문이 열려 있었지만 작품 판매는 한 점도 없었다. 당시 아방가르드 미술세계를 선보인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단번에 인상주의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실감하는 전시회였다. 그래도 고갱은 기죽지 않고 탈 인상주의를 향해 직진했다.

폴 고갱 1889년 / 황색 그리스도

파리 전시회가 끝난 후 고갱은 퐁타벤에서 멀지 않은 폴뒤라는 바닷가 어촌 마을로 거쳐를 옮겼다. 심기일전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때 피사로에게 소개받은 네덜란드 출신 마이어 드한이 합세했고, 영원한 친구 샤를 라발과 가정 전위적인 폴 세뤼지에, 그리고 아방가르드를 추종하는 아르망 세갱과 에밀 코랭 같은 젊은 화가들이 동조했다. 특히 아를에 있던 고흐가 드한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보여 고갱도 각별하게 드한을 대했다. 그렇게, 언더그라운드를 지향하는 이들은 폴뒤 마리 앙리 하숙집에 묵으며 퐁타벤 시절보다 더 진보된 화풍을 연구하고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고갱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들의 공통점은 기존의 인상주의를 탈피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에콜 퐁타벤'이라고 부른다. 고갱은 그들 가운데 최연장자였지만 퐁타벤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승이나 지도자를 자청하지 않았다. 그는 개성이 강해서 사람을 모으는데 욕심이 없었다. 설령 그런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장담하건대 결코 성공할 수는 없었다.


고갱은 그 하숙집 현관에 '안녕하세요 고갱 씨'라는 문구와 그림을 걸어놓았다. 다소 코믹하고 정겨운 그림이었다. 폴뒤에서의 1년은 고갱에서 있어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었다. 생기발랄한 청년 화가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삶의 에너지가 샘솟고 있었으며, 예술적 영감도 충만되어 그의 작품 세계는 완숙한 경지에 다다랐다. 당시 그린 작품이 '황색 그리스도'와 '설교 후의 환영' 등이 있고, 원시세계를 지향하는 조각 작품도 만들었다. 그 외에도 판화, 도예에도 관심을 가지고 많은 작품을 생산했다. 상상력과 에너지가 넘쳐나는 시간이었다. 당시 신세대 미술 평론가이자 시인인 알베르 오리에가 고갱의 작품세계를 호의적으로 분석하는 평론을 쓰기도 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요절할 때까지 고갱을 옹호한 유일한 고갱주의자였다.


그렇게 브리타뉴와 프로방스 지역을 떠돌던 고갱은 1889년 말 2년 만에 파리로 돌아와 정착했다. 전시회 때문에 잠깐 파리로 오기도 했지만, 이젠 파리를 떠날 계획은 없었다. 유일한 계획은 이 복잡한 파리에서 아주 먼 원시세계로의 탈출이었다. 2년 만에 나타난 고갱의 모습은 예전 같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부르주아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이발도 하지 않은 덥수룩한 머리, 트레이드 마크가 된 파란색 베레모,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두꺼운 외투, 싸구려 기성복, 그리고 나막신과 그 신발을 덮은 긴 바지... 그런 모습으로 그는 늘 끼니를 걱정하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항상 그렇듯 그는 슈페네케르 집에 기거했다. 당시의 슈페네케르는 화가로서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미술품 수집가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사실 그에게는 화상이라는 직업에 더 어울렸다. 당연히 그의 집에는 미술과 관계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는 고갱의 영원한 친구였지만 따로 화실을 내줄 형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화실은 손님들의 접대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갱이 작업할 공간은 없었다. 그때 슈페네케르 집에 방문했던 다니엘 드몽프레를 알게 되었다. 그는 아마추어 화가이면서 화가들을 후원하는 인물이었고, 요트를 구입해 직접 운항하는 아마추어 요트인이기도 했다. 그런 취미로 인해 전문 항해사였던 고갱과 공유하는 주제가 넘쳐났다. 골프나 등산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금방 친숙해지듯이 그들도 만나자마자 죽이 잘 맞았다. 돈 많은 드몽프레는 고갱의 경제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사용하던 화실을 선 듯 내주었다. 그의 의도는 순수했다. 어떤 보답도 원하지 않고 고갱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사실 그러기는 쉽지 않지만 그는 누구보다 고갱을 좋아했다. 고갱이 세상의 끝 아투오나 섬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까지 그는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후원자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갱 사후에는 아내 마테로부터 상속 대리인으로 위임을 받고 활동하기도 한 진국이었다.


1890년 그해 7월 29일, 오베르에서 고흐의 비보가 날라 왔다. 얼마 전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했던 '격동의 하늘 아래 광대하게 펼쳐진' 밀밭에서 그는 권총으로 자신의 복부를 쏜 후 2km를 걸어 저녁 9시경에 하숙집으로 돌아왔고, 이 소식을 받은 테오가 달려왔지만 새벽 1시 30분에 고흐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귀를 자른 사건도 미스터리했지만 권총 자살 사건도 미스터리였다. 베르나르의 주도하에 오베르에서 장례식이 열렸지만 고갱은 참석하지 않았다. 왜 고갱이 참석 안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 오는 이야기는 없다. 아를에서의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고흐의 측근들이 고갱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알았더라도 자신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차마 참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갱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장례식 불참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회고록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수많은 편지에서도 밝히지 않았다. 사실 고흐가 사망하기 한 달 전에도 고갱은 고흐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으며, 이 사실을 테오에게도 편지로 알렸었다. '오베르에서 완전히 회복하기를 바란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남긴 편지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장례식 불참에 대한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고갱은 말년에 마르티즈에서 고흐가 즐겨 그렸던 해바라기 정물화를 네 개나 그린다. 고흐를 향해 해바라기 화가라고 냉소적으로 빗댔던 고갱은 지독한 외로움과 싸우며 고흐가 그렸던 해바라기를 텃밭에 손수 키웠고 그것도 모자라 정물화를 그렸던 것이다. 그런 고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불행했던 고흐와의 기억을 회상하며 깊은 회한에 빠졌을 게 분명하다. 고흐도 자신처럼 인생의 벼랑 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외로움과 치열하게 싸웠을지도 모른다. 문득, 마지막 날 침대에 누워 총알이 박힌 배를 움켜쥐고 고통을 참으며 파이프를 피우고 있는 고흐의 모습이 떠올랐다. 칠흑 같은 어둠과 침묵이 뒤섞인 좁은 공간으로, 죽음의 그림자처럼 가슴속에서 뿜어져 나온 희뿌연 담배연기가 뒤섞여 알 수 없는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꿈에서 본 네덜란드 유령선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오를라의 스산한 기운이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고갱은 고흐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 비보의 여운이 남아 있는 가운데서도, 그해 겨울 고갱은 몽마르트르에서 많은 문인들과 어울렸다. 붓을 들고 있는 시간보다 그들과 만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의 지적 상상력이 그들이 모인 카페로 유인했는지 모른다. 화가나 평론가들을 만나 자신의 작품을 부각하려고 노력해도 모자를 판국에 그는 한가하게 상징주의 시인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는 볼테르 카페였다. 미술에 관심이 많아 평론도 자주 썼던 알베르 오리에와 쥘리앵 르클레르, 그리고 샤를 모리스, 말라르메, 장 모레아, 에루아르 뒤뷔 등 상징주의 신봉자들이 매주 월요일 저녁 9시에 볼테르 카페에서 모임을 가졌다. 고갱은 오리에의 도움으로 그 모임에 자주 참석하여 시인들의 빛나는 언어의 향연을 즐겼다. 어느 날엔, 한때 랭보와 동성애 관계였고 그에게 권총을 쏘기까지 해던 그들의 스승 폴 베를렌이 뒤에서 말없이 그들의 토론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세계에 심취해 있던 고갱은 종합주의를 지향했던 화풍에서 상징주의로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오리에가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상징주의 시 세계의 공식에 맞추어 분석을 했는데, 그 분석이 고갱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자신이 추구할 방향은 상징주의였으며, 드디어 자신은 인상주의를 뛰어넘은 상징주의자라고 자평했다. 이제 인상주의라는 마지막 비늘을 벗겨내고 창작의 자유를 찾은 것 같았다. 어느 누구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신만의 미학 세계를 구축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갱은 항상 가난했다. 후미진 몽마르트르 골목의 선술집과 식당을 전전하며 코냑을 커피에 타서 마셨다. 그런 독주와 무절제한 흡연은 그의 목소리를 탁하게 만들었고, 머리카락도 빠지고 색도 변색이 되었고, 그 유명한 높은 콧대도 휘어지고 눈꺼풀도 두꺼워졌다. 그리고 손질 안 한 턱수염이 항상 그의 두툼한 입술을 덥고 있었다. 영락없는 기인의 풍모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쥘리에트라는 누드모델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사생아도 잉태하게 했는데, 그 아이는 고갱의 피를 받아 후에 화가가 된다.


이제 고갱은 파리 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다. 자신의 작품을 대하는 평론가들은 모두가 적이었고, 이 거대하고 복잡한 파리라는 도시는 자신에게 어떠한 위안도 주지 않았다. 파리에서 존재해야 할 목적이 없었다. 질식할 것 같은 불편함이 그를 매일 불면으로 내몰았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목젖까지 올라왔다. 새로운 삶이 환상처럼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각을 행동으로 못할 고갱이 아니었다. 그의 삶에서 행동은 숙명과도 같은 요소였다. 행동에서 그의 인생이 결정지어졌다. 어린 시절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수많은 결정의 순간, 행동은 그의 인생을 바뀌게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행동하는 인간, 그것이 고갱이었다.


처음엔 고흐에게 편지로 몇 번이나 얘기했던 마다가스카르를 목적지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고민한 끝에 태평양에 있는 타이티로 행선지를 변경했다. 마다가스카르도 섬이지만 대륙처럼 너무 컸고 이미 문명이 지배하고 있었던 반면에 망망대해에 떠있는 티끌만 한 섬인 타이티는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원시 공간이었다. 자신의 욕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곳은 바로 타이티였다. 이렇게 결정을 내린 고갱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의 작품 중에서 30점을 추려 오텔드루오 경매장에 내놓았다. 빈털터리였던 고갱은 그래도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9,860프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만한 돈이면 물가가 저렴한 타이티에서 상당 기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1891년 3월 23일 상징주의 시인들의 성전 볼테르 카페에서 고갱의 환송 파티가 열렸다. 그 환송식에는 30여 명이 참석했는데, 볼테르 파 시인들과 가까운 화가들이 참석하였다. 각자 음식과 술을 준비하여 나름 성대한 파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특히 말라르메의 시와 편지가 낭송될 때는 감동의 물결이 넘쳐났다. 참석자들은 진심으로 고갱의 건투를 빌었다. 문명의 질서와 관습을 거부하고, 인간이 일찍이 가보지 못했던 불확실한 예술의 길을 떠나는 고갱은 자신들의 예술적 욕망을 대행해 주는 대리인으로 간주했는지 모른다. 안락한 문명에 안주하지 않고 원시로 떠나는 그는 미래적 인간이며 진정한 아방가르드적인 예술가였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그에게 그들은 응원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1891년 4월 4일 고갱은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파리 리옹 역을 떠났다. 그리고 마르세이유에서 배를 타고 2달 동안 항해를 한 끝에 타이티 파페에테 섬에 도착했다. 3년 전 카리브해로 떠날 때는 라발이 있었지만 지금은 홀로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지의 땅에서 그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한발 내딛고 있었다.

폴 고갱 1892년 / 언제 결혼하실 건가요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고갱은 2년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문명을 등지고 대자연 속에서 예술혼을 불사르겠다는 당초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타이티의 파페에테는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유럽의 작은 도시처럼 이미 유럽화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프랑스인을 비롯해 유럽인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 말이 통하고, 생활방식도 별로 다르지 않고, 무엇보다 속물적인 사고방식도 비슷하면 인간관계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욕망의 충돌은 고갱으로 하여금 회의를 가지게 했다. 고갱은 돈만 허비한 채 파페에테에서 1년 정도를 버틴 후 남쪽으로 45km 떨어진 마타이에아라는 작은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자신이 꿈꾸어 오던 자유를 찾았다. 원주민의 주선으로 그곳 풍습에 따라 어린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이 동거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그것은 잠시 뒤로 물리고 아무튼 고갱은 대자연과 원시가 어우러진 환경에 만족해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파리로 보낸 작품들은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았다. 상징주의 시인들만 고갱의 작품을 호의적으로 평가했을 뿐 미술계는 거의가 외면했다. 특히 1893년 2월 오리에가 갑자기 요절하자 그나마 든든한 우군도 사라져 자신의 위치는 풍전등화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고갱은 코펜하겐에 있는 메테에게 그림 8점을 보내 가족의 생활비에 보탬을 주었다. 아무튼 경제적 타격은 현실이 되었다. 가져온 정착금은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원시세계에 동화되어 산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의식주를 원주민과 똑같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머나먼 곳에 온 것은 오직 예술 작업 때문이지 세상을 등진 은둔자의 입장은 아니었다. 자신은 예술가이지 은둔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여건이 충족되어야만 했다. 궁핍이 서서히 목을 죄고 있을 때 그는 파리로 돌아가기로 작정한다. 현지에서 경제활동으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그곳에서의 구체적인 생활은 생략하겠다). 파페에테에서 알바를 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물감조차 살 수 없었다. 하여 파리로 가서 손수 전시회를 열어 담판을 짓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타이티를 떠나기 전, 뱃삯을 마련하기 위해 타이티 당국과 눈물 나는 실랑이를 한 끝에 난민처럼 겨우 프랑스행 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3등 칸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양과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가는 2개월이 넘는 항해는 혹독한 추위와 그리고 적도를 지날 때는 폭염으로 여러 명이 수장되는 것을 목격한 지난하고 긴 시간이었다.


1893년 8월, 타이티 정착에 실패한 고갱은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마르세이유에 도착했을 때 그의 손에는 4프랑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패잔병처럼 파리 슈페네케르 집에 당도했을 때도 2년 동안의 모험담을 들어줄 사람은 몇 명밖에 없었다. 그사이에 그에 대한 존재는 희미해져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는 낙담하지 않고 전시회를 준비했다. 타이티에서 생산한 작품 46점을 선별해 뒤랑 뤼엘 화랑에 전시했다. 그리고 고갱의 영원한 후원자 샤를 모리스가 화려한 문장으로 전시회의 서문을 써주었다. 아직도 고갱의 능력을 믿어주는 평론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당시 전혀 현대적이지 않고, 검은색 피부를 가진 타이티 여성들의 나부를 보고 파리 미술계는 '그래서 머?'라고 의문 부호를 달았고, 미학적 판단도 유보했다. 고갱이 주장하는 상징과 단순한 기법은 파리에서는 전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아름답지 못한 원주민들의 모습에 거부반응 만 보일 뿐이었다. 오히려 빈세트 반 고흐의 작품이 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영향력이 막강했던 뒤랑 뤼엘과 상징주의 문학인들의 도움으로 13점을 판매할 수 있었다. 파리 미술계의 분위기를 볼 때 준수한 성적이었다.


그리고 이 전시회가 끝날 즈음에 고갱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오를레앙에서 독신으로 살던 숙부가 사망을 했는데, 평소 왕래도 없었던 고갱이 졸지에 유산 상속인이 되었던 것이다. 숙부에겐 안 되었지만 고갱에게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횡재였다. 13,000프랑에 상당하는 유산을 받은 고갱은 파리에 고급 주택을 구입하고 그 집에 화실도 화려하게 꾸며 살롱 장소로 활용했다. 10년 전 파리지앵 시절보다 더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전형적인 복권 당첨자 같은 졸부의 모습이었다. 그의 집에는 화가, 시인, 평론가 등 미술과 관계되는 사람들이 방문하여 고갱이 펼치는 기이한 퍼포먼스를 즐겼다. 공작 정도 되는 귀족이 앉아 있음 직한 커다란 의자에 앉아 찾아온 손님들에게 특위의 구라 섞인 말들을 쏟아냈고, 피아노도 구입하여 어린애 수준의 연주도 선보이고는 했다. 이런 상류층 문화를 즐기면서 당연히 작품 활동은 등한시하였다. 전통적인 화가들보다 체코 출신 알폰스 무아나 루테크 마롤트 같은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작가들을 불러 자신의 화실을 사용하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바 출신의 나이 어린 혼혈 여성 안나를 자신의 공식적인 정부로 삼고 함께 인생을 즐겼다.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흑인 피가 섞인 그녀는 고갱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역할도 하며 항상 그의 옆을 지켰다. 이런 괴팍한 고갱의 삶은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1893년 / 왼쪽부터 폴 고갱, 알폰스 무하, 루테크 미롤트, 안나

그런 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고갱은 코펜하겐에 가서 9년 만에 가족과 재회했다. 돈 벌러 집 나간 가장의 자유로운 영혼을 처자식들이 반겨줄 리는 없었다. 이미 메테와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거의 포기한 상태였고, 고갱도 마지막 남은 가느다란 연줄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10살이나 된 막내는 아버지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어떠한 형태로든 예전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고갱은 마지막까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려고 했고, 마테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리하려 숙부의 유산 상속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던 마테는 고갱에게 유산을 분배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갱은 겨우 1,500프랑만 증여하겠다고 했다. 이에 마테는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가장 없이 홀로 아이들을 10년 동안 키웠고 앞으로도 더 건사를 해야 하는데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성의를 표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노숙자처럼 거리를 배회할 정도면 이해하지만 당초 약속한 대로 경제적 사정이 좋아지면 자식들의 미래를 최소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당신의 의무라고 열변을 토했다. 사실 고갱은 할 말이 없었다. 어떤 변명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규범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어떠한 비난도 감수할 만큼 이미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작품처럼 현존하는 질서와 규범을 이미 포기한 상태였던 것이다.


고갱은 가족과 돌이킬 수 없는 갈등만 확인하고 코펜하겐을 떠났다. 이제 다시는 자신의 피붙이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가. 내가 추구하는 세계는 어떤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에게 버림받은 만큼 이 길이 그렇게 더 소중하단 말인가. 슈페네케르처럼 가정을 건사하며 예술 세계에서 활동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가 옳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가족과 이별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정말 누구인가. 허울 좋은 예술가에 불과하고 사실 알고 보면 그저 갈애에 찌든 패륜아이며 파렴치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빈센트는 가정을 등지고 예술가의 길을 걷는 나에게 고독한 예술가라고 칭송하지 않았던가. 예술가의 길은 세속적으로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는 외로운 행로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건 레지스탕스를 하듯, 묵언이 지배하는 수도원에 들어가듯, 자신의 모든 세속적 요소들을 버리고 구도자처럼 예술가의 길을 갈 것이며 그것은 나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삶의 고통과 외로움과 더불어 세상의 온갖 질타를 감내하면서 나만의 길을 가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리라. 그리고 결코 슬퍼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파리 생활에 지친 고갱은 자신의 체취가 진하게 묻어 있던 퐁타벤으로 안나와 함께 이사를 갔다. 파리에 있으면 악의적인 평론가들과 매일 싸워야 했기 때문에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아마 세잔도 그와 같은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파리를 떠났을 것이다. 대다수 평론가들의 악평은 고갱에게 제발 파리를 떠나 줄 것을 강요했는지 모른다. 고갱은 그런 파리 미술 평단에 환멸을 느꼈다. 특히 키밀 모클리어 같은 젊은 평론가는 가장 큰 목소리로 고갱의 작품을 비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때 퐁타벤 파 도반이었던 에밀 베르나르도 우군이 아니었다. 베르나르가 누구인가. 인간적으로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절친이었고, 미학적으로도 종합주의와 클로아조니즘의 핵심적 존재로서 화풍을 공유하고 있던 도반이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베르메르는 자신이 창안한 그 화풍을 고갱이 자신의 것인 양 떠들고 다닌다면서 불쾌하게 생각했고 그 당시에는 아예 연락을 두절한 상태였다. 베르나르는 자신의 저작권에 대해 도용은 아니더라도 차용 정도만 했다고 인정을 해주면 인간적인 관계로 보아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터인데, 아쉽게도 고갱의 생각은 달랐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그런 베르나르의 입장에 고갱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창작의 세계에서 화풍 논쟁이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고, 개입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시는 다양한 아방가르드 화풍들이 난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각자 자기 것, 남의 것을 따지며 저작권을 주장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설령 자신의 주장을 설파한다고 하더라도 파리 평단에서 자신의 손을 들어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무튼 베르나르와의 관계는 서로 오해가 얽히면서 사이가 벌어져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렇다고 글쟁이로 변신한 훗날의 베르나르는 직접적으로 고갱을 공격하지는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실 화풍 논쟁 보다 고흐가 사망하는 일련의 과장에서 보인 고갱의 행동이 베르나르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고갱으로서는 고흐와 또 한 사람의 우군을 잃어버린 결과를 낳게 했다. 그리고 고갱의 그런 비타협적인 행위는 당시 거상이었던 뒤랑 뤼엘과도 결별하게 만들었고, 역시 스승인 카미유 피사로도 희생자가 되었다. 그들은 현재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은인이었지만 자신의 미술세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그들과의 관계를 끊었던 것이다. 특히 뒤랑 뤼엘에 밉보인 결과 자신의 작품을 여러 경로를 통해 판매하려고 했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마지막 9년의 인생을 고달프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고갱은 그렇게 파리 미술계에서 고립을 자초하고 있었다. 어머니 알린이 걱정했던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이 이제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퐁타벤으로 거쳐를 옳긴지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콩카르노라는 바닷가 산책로를 안나와 함께 걷고 있을 때, 근처 항구에 정박해 있는 무역선 선원들로 보이는 일군의 무리와 싸움이 붙은 상황이 벌어졌다. 불량스러운 그 선원들은 피부색이 검은 안나를 향해 인종차별적인 언행과 성추행 같은 언사로 집적거렸고, 이에 함께 있던 고갱이 그들을 그냥 놔줄 리 만무였으며, 그렇게 언쟁이 오간 후 몸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과거 복싱을 배웠던 고갱은 그 무리와 싸움을 벌였지만 역부족인 것은 당연했고 그 과정에서 고갱의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고갱의 트레이드 마크인 나막신만 신지 않고 있었더라도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결과는 그로 인해 사달이 난 것이었다. 처음에는 발목이 삔 정도로 생각하고 치료에 열중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각해졌다. 처음부터 병원치료를 확실하게 받았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고갱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뚜렷한 이유 없이 치료에 열중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인해 보행에 많은 불편을 겪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경제적 사정도 더욱 악화되었다. 병을 키워 악화시킨 결과는 삶을 질을 더 빠르게 악화시키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런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한 안나는 절름발이 고갱을 떠나 야반도주하였다.


그 사건의 후유증으로 인해 고갱은 매일 지독한 통증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영악한 동반자 안나도 떠났고, 자신의 앞가림을 게을리한 결과 가진 돈은 탕진 일보직전이 놓이게 되었다. 몸과 마음도 지치고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타이티였다. 다리 골절 사건이 단초가 되었지만, 이미 그는 프랑스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 유럽의 중심에서 더 이상 자신의 작품을 생산해 낼 수 없다는 어떤 돈오 같은 깨달음이 그의 인식세계를 점령했는지 모른다. 떠나는 길만이 자신이 해야 할 유일한 길이었다. 그곳만이 자신의 인생 후반기를 책임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숨 막힐 것 같은 이 프랑스를 떠나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충동은 이제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1895년 2월 18일 고갱은 또다시 고별전을 열고 오텔 드루오 경매장에 49점의 작품을 내놓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작품이었다. 그중에 자신의 영원한 친구 슈페네케르가 4점을 구입했고, 자신의 미학적 후견자인 드가가 2점을 구입해 주는 등 모두 13점이 낙찰되었다. 경매가 끝난 후 고갱은 다니엘 드몽프레에게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유무형 자산 모두를 대리해 줄 것을 부탁했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물품들을 친구들에게 추억의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미련 없이 2번째 타이티행 배에 몸을 실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별이었다. 친구들은 고갱이 몇 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수군덕거렸지만 그는 다시는 프랑스 땅을 밟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서머셋 모음의 달과 6펜스를 읽고 처음 고갱이라는 인물을 간접적으로 접했었다. 문명세계를 등지고 깊은 원시세계로 침잠해 들어간 어느 괴팍한 화가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었다. 그 소설이 처음 발간된 게 1919년이니까 이미 그전에 고갱이란 존재는 문화예술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갱 사후 10여 년이 지난 후, 그의 작품보다 범상치 않는 그의 삶이 더 회자되었고 그에 대한 평가는 진실보다 선정성으로 포장되어 전파되었다. 예술을 위해 가정을 버린 진정한 예술가의 표상, 욕망으로 가득 찬 이기주의자, 세속에 찌든 파렴치한 등등 그에 대한 평가는 무궁무진하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고갱만큼 복잡한 정신세계를 가진 예술가도 없을 것이다. 고흐와의 두 달 동안의 동거에서도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온갖 감정의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이지 않은가. 기자는 기사로 평가받고, 법관은 판결문으로 평가를 받고, 작가가 작품으로 평가받는 직업이지만 고갱만큼은 작품과 동시에 인생도 평가를 받아야 하는 특이한 인물이다. 정말 그의 진면목은 무엇이었을까.  

폴 고갱 1898년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고갱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내용이 윤리적인 문제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예술적 야망을 쫓아 떠난 개인사적인 서사는 한편으론 제임스 조이스처럼 예술가의 초상을 연상시키고 좀 더 과장하면 그리스 신화적인 서사를 제공하지만, 딸 같은 10대 중반의 여자와 동거를 했다는 사실에는 기독교적 윤리관을 적용시켜 원색적으로 비난을 받는다. 보헤미안적이고 방종에 가까운 삶을 영위한 그에게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어불성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자 소녀와 동침을 한 이 이야기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단골 메뉴이다. 첫 번째 타이티 시절과 두 번째 마르티즈 시절에 그는 15세 정도의 원주민 여자와 동거를 하며 아이도 출산했는데, 이 사실을 두고 호사가들은 자신의 딸 같은 어린 여자와 동침을 한 것은 아동 학대이며, 소아성애주의자 혹은 변태성욕자라고 힐난한다. 프랑스에 살았다면 엄두도 못할 행위를 문명과 동떨어진 변방에서 원주민 소녀를 욕망의 분출구로 삼았다는 것은 더욱 용서할 수 없는 폐륜아적 행동이라고 덧붙인다. 이 사안 하나만으로도 고갱은 인간 말종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고갱에 대한 이런 비판은 한쪽 면만 보고 평가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 이래 남자의 분출 욕망은 세상 어디서나 보편적이면서 공통적인 현상이며, 공동체의 보존에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목사가 되지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십자가의 삶을 살았고 도덕적으로 고결하다고 평가받는 고흐도 미혼이라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욕망 앞에 무릎을 꿇었고, 피카소는  아예 40년이나 어린 많은 여인들을 정부로 삼아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는 뮤즈라고 부르며 욕망을 미화시켰지 않았는가. 위대한 로트렉은 아예 환락가인 무랑루즈와 10대들이 즐비한 사창가에 거주하며 그곳 풍경을 대놓고 작품의 소재로 삼았지 않았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특히  파리의 많은 예술가들은 대놓고 탐미주의를 빙자한 퇴폐미를 탐닉하였던 게 사실이었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처럼 성적 에너지는 창작 에너지를 촉발한다고 그들은 설파했다. 누구보다 생물학적인 남성성이 강한 고갱이 문명의 흔적이 희미한 머나먼 섬에서 구도자처럼 살 수 있다고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예술가로서 창작에 대한 염원으로 타이티에 간 곳이지 수도자나 출가자처럼 어떤 정신세계의 승리를 위해 간 것은 아니다.


그러한 가운데 15살 여성과 동거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지역의 풍습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마르티즈에서는 여성이 월경을 할 정도의 나이가 되면 성인으로 취급했고 부모의 허락이 있으면 누구와도 혼인을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자연스러운 풍습의 일종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원주민 여인이 자신의 딸을 고갱과 엮어주었고 고갱은 풍습에 따라 합의하에 혼인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원주민은 유럽인과의 혼인을 매우 호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피식민자의 입장에서는 식민자와의 혼인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디를 가나 당연한 현상이었다. 나이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사에서 완벽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적인 유럽 문화와 샤머니즘의 원시문화와의 접점에서 합일점을 찾기란 쉬운 게 아니다. 또한 현실적으로 마르티즈에도 프랑스의 세속법과 기독교적 윤리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갱의 행위도 그 범위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결코 망나니처럼 방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폴 고갱 1901년 / 아투오나에서 그린 4점의 해바리기 중 하나

사실 고갱이 이런 모진 질타를 받은 이유는 평상시 그가 보였던 평판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은 훌륭했을지 모르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품행은 결코 좋은 평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고흐와의 관계는 그에 대한 평판을 더욱 악화시켰다. 두 사람의 불행한 관계는 고갱에겐 지울 수 없는 업보였는지 모른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세간의 평은 이미 고갱 편이 아니었다. 고갱이 살아생전에도 진심을 모르고 자신을 비난하는 파리 미술계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듯이 그의 삶의 어느 한 조각도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예술은 그런 개인사적인 요소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완벽한 인간인 예수의 삶을 따르라 하고, 불교에서는 싯다르타처럼 진리를 깨닫는 삶을 살라하고, 공자도 인의예지적인 인간형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당시 세상이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이 현재까지도 권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욕망에 따라 행위하며 그것이 곧 문명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역설적으로 예수와 부처와 공자처럼 인간이 살았다면 인간의 문명은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술은 윤리와 결부시켜서 설명할 수는 없다. 윤리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완벽한 예술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때는 미켈란젤로나 카라바조처럼 문제적 인간형이 위대한 예술품을 생산할 수 있다. 고갱에게 정결한 심성을 원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에 불과할지 모른다. 오히려 고갱의 인격이 정결했다면 피카소도 그의 작품에 존중을 표하지 않았을 것이고 현재 우리도 열광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예술은 인간의 모순에서 태어나는 기형아인지도 모른다.


일례로 미투 운동이 세계적으로 광풍이 불 때 수많은 문화예술인이 타깃이 되어 지탄을 받으며 사라졌다. 아마도 고갱이 현재 살아 있었다면 가장 먼저 폭격을 받았을 것이고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던 수많은 예술가들도 대한민국의 고은처럼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자신의 모든 것이 쓰레기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윤리와 예술, 이 모순적인 관계는 쉽게 정반합에 이르지 못한다. 어떻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한 인간을 규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단할 수는 없다. 인간이 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한 이런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지 모른다.


아무튼 문제적 인간 고갱은 예술의 중심 파리에서 안주하지 못하고 자신의 예술적 이상향을 쫓아 머나먼 이국으로 떠났다. 기존의 질서와 관습을 거부한 그의 행위는 아버지와 외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결과물인지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는 역마살의 원인이기도 했다. 바보처럼 왜 기존 질서에 편승하지 못하고 생고생을 했는지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기존 질서에 부합한 평면적인 인식논리이다. 그에게 우호적인 평론가들도 그럴싸하게 그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지만 그것 또한 문자적 해석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그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는 단지 반골적인 기질과 예술적 영혼이 이끄는 데로 즉자적 행위에 충실했을 뿐이다. 세잔이 파리를 떠나 고향에 가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화풍을 고집한 것처럼, 그리고 고흐가 파리를 떠나 변방을 전전하며 미친 듯이 그림에 몰입한 것처럼 고갱도 영감의 흐름에 충실했을 뿐이다.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출발점은 다르지 않았다. 그에겐 오히려 안락한 삶은 어울리지 않은 옷이었는지 모른다.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가난과 모르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육신의 고통과 그리고 절망에 이르는 고독은 그의 예술혼을 불사르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평범함과 안락함 안에서는 뜨거운 영감이 솟구치지 않는 게 이 세계의 법칙이다. 물리적으로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지만 감성과 이성은 이카로스처럼 자유롭게 높이 날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에너지가 되었다. 너무 높이 날아 날개가 태양빛에 녹더라도, 그리하여 더 이상 비상 하지 못하고 추락하더라도 고갱은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고흐가 말년에 그린 오베르의 '까마귀 나는 밀밭'처럼 고갱의 말년 작품에서도 영감의 극한, 즉 절대정신이 구현된 예술적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 시간과 영원히 이별을 해도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과 타협을 한다. 고흐가 까마귀 나는 밀밭에서 자신의 배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에 손을 얹는 장면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저지하려고 다가서는 그에게 고흐는 손으로 막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후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하나의 총성이 메아리를 치며 검푸른 밀밭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그 많던 까마귀는 그 총성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바다, 때로는 집이 날아갈 정도의 태풍이 휘몰아치다가도 때로는 에메랄드 색으로 변하여 평화로움을 선사하는 바다, 그 한가운데서 고갱은 전설이 되었다. 바다를 부유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두 돌도 되기 전에 대서양을 건넜고, 청소년기에는 항해사와 해군으로서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바다를 항해했고, 그 후에도 대서양과 카리브해 그리고 태평양의 타이티와 마르티즈를 거쳐 결국 더 이상 갈 수 없는 세상의 끝 아투오나까지 이르렀다. 그의 인생 자체가 바다를 떠도는 항해였는지 모른다. 중간에 가족과 함께 한 시간도 있었지만, 그 시간과 공간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아득히 먼 기억에 불과했고, 갑판에 누워 잠시 낮잠을 잔 머나먼 항해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에메랄드 해변가를 걷다가 눈부신 코발트색 하늘을 올려다볼 때 진한 바다 내음이 그의 살갗을 스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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