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베 동굴에서 벽화를 그렸던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른다. 애니메이션 같은 역동적인 동굴사자의 모습을 그린 호모사피엔스는 누구였을까. 35,000년 전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에서 매머드 기름으로 만든 횃불을 밝히고 목탄으로 석회암 벽에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그렸던 그 돌연변이들은 예술적 상상력과 영감을 후대에게 전이시켰다. 지구 역사 이래 가장 추윘던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왜 거친 벽에 다 그림을 그렸을까. 무엇이 그 돌연변이들을 미치도록 만들었을까. 그것은 돌발적인 괴이한 컬트의 일종이었는지 모른다. 그 가혹한 현실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광기였고, 그들은 그런 상황을 채득하고 있지 않았을까. 예술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는 광기의 발작적 발현 현상은 아닐까.
쇼베 화가 이후 지구에서는 수많은 화가들이 명멸해 갔다. 그들의 후예는 라스코와 알타미라 동굴 벽에 보다 화려한 채색으로 무장한 벽화를 남겼고, 그 후 1만 년 이상은 그저 권력자의 기록을 위한 서기관 정도의 직업으로 존재했으며, 그런 암흑기를 거쳐 드디어 르네상스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발톱을 세우기 시작했다. 쇼베인 이후 34,500년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지구에 예술다운 미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적 감각이 반응하는 작품을 창작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고양된 작가적 상상력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분명했다. 낭만주의나 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다수의 미술 작품들이 종교와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듯이 아직은 광기의 발톱을 숨기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화가들이 이 지구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겼고 그중에 한 명이 요하네스 베르메르였다.
베르메르를 얘기하기 전에 네덜란드라는 나라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도 그렇듯 당시의 예술가는 정치 종교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런 환경적인 요인을 제거하고는 예술가에 대해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메르 생존 당시의 사회적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수박 겉핥기식으로라도 필연적으로 유럽의 역사를 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17세기의 네덜란드를 흔히 '황금시대'라고 일컫는다. 당시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에 속해 있던 네덜란드는 16세기 중반부터 독립전쟁을 하면서도 스페인과 무역을 할 정도로 바다를 이용한 해상 무역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게 80년 동안의 기나긴 독립전쟁을 한 끝에 드디어 1648년 뮌스터 협약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16세기 남아메리카를 비룻해 유럽의 많은 공국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 스페인으로서는 뼈아픈 결과였지만 네덜란드의 경제적인 능력치는 이미 자신들이 감당하기 버거웠다. 네덜란드는 이미 동인도회사로 상징되는 가장 강력한 해상무역을 경영하고 있는 거목으로 성장해 있었고 유럽 경제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가장 큰 요인은 가톨릭을 버리고 종교혁명의 완성이라고 하는 칼뱅주의를 흡수한 결과이다. 근면 성실한 노동자를 우대하고 그러한 기반으로 취득한 경제적 이득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칼뱅의 주장이 고스란히 네덜란드 지역에 스며들었고, 이런 칼뱅의 종교는 네덜란드의 경제를 부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도 열심히 일을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경제 질서가 종교혁명 이후 형성된 것이다. 자본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작동되어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서 볼 수 없는 혁신적인 개혁이 역동적으로 시험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지구 역사 이래 처음 시민계급이 탄생하여 네덜란드를 주도하는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렇게 시민계급이 중심이 된 네덜란드는 종교적으로 완고한 칼뱅주의를 실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용과 관용주의를 표방하며 종교의 자유(표면적으로)를 보장하였고, 그에 따라 타 종교(특히 유대인) 이민자들을 적극 유치하였다. 또한 전쟁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어떠한 전쟁도 하지 않겠다는 평화주의를 내세웠고, 내부적으로는 시민의 자유를 도모하였으며, 정치적으로도 왕권이 아닌 지역 분권을 하여 공화국 형태의 국가를 형성하였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정치 종교적으로 가장 혁신적인 국가였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 네덜란드였기 때문에 당연히 금융과 문화적인 성장에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 이주민 중에 스피노자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며, 렘브란트도 유대인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가톨릭 환경에서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이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칼뱅의 나라에서는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여 네덜란드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로서 유대인이 대주주로 참여한 것은 물론이고 경영에도 깊게 간여했다.
그런 신세계에서 미술 분야도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변화는 가톨릭 교회가 살아졌다는 것이다. 기존의 성당에 걸려 있었던 수많은 성상과 성화 등을 파괴한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프로테스탄 교회가 새로 만들어졌는데 당연히 그 교회에는 성상과 성화는 설치되지 않았다. 성당을 가득 매웠던 성물은 이제 네덜란드에서 볼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교회에 성화를 납품하던 화가들은 수입이 딱 끊어졌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그들만의 새로운 미술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고객은 이제 교회와 귀족이 아니라 당시 신흥세력으로 떠오른 시민계급 즉 중산층으로 바뀌었다. 삶의 질에 여유가 생긴 중산층은 문화생활의 일종으로 미술품 구입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것은 투자로서의 유형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런 현상은 폭발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미술품은 이제 교회와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경제적 여유를 가진 중산층이 주 고객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사조가 네덜란드 특유의 풍속화였다. 일명 장르화라고도 하는 풍속화는 말 그대로 대중을 위한 화풍으로서 중산층 가정 내부의 소소한 정경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고, 시민들의 초상화, 자연과 도시의 풍경화 그리고 정물화 등을 중점적으로 그렸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프랑스에서 나타난 앵티미즘의 원형이 바로 네덜란드의 풍속화였다. 특히 그런 회화들의 배경에는 중산층들이 사용하던 각종 악기, 생활용품, 지구본 같은 과학 물품, 그리고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수많은 엠블럼 등을 소품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어떤 상징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장치들을 다수 등장시켜 구매욕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과거처럼 주문자 생산이 아니라 화가가 대중성을 감안하여 생산한 후 시장에 내놓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당시 화가들은 직접 화상이 되어 영업을 해야만 했다. 렘브란트도 당대의 명성 있는 화상으로서 자신의 그림은 물론 다른 작가의 작품도 수집하여 이윤을 남기고 파는 상업 활동을 병행했고, 이탈리아 유학파인 프로방스 출신 루벤스도 당대 최고의 화상이었다. 미술시장이 그렇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세일즈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초보적 자본주의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 미술시장의 프로세스 때문에 박리다매 현상이 나타나 그림의 크기는 작아지고, 화가의 네임밸류에 따라 그림의 가격은 천차만별이 되었다. 전업화가로서 살아가는 것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시의 미술 시장은 현재의 대중문화처럼 활발했기 때문에 화가들의 경제 사정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위키피아 / 베르메르 작 / 와인잔을 든 여인 / 흔한 풍속화의 일종
17세 네덜란드 화가들은 예술가라기 보단 엄밀하게 비유하자면 대중문화 생산자 혹은 회화기술자,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미술 노동자에 불과했다. 물론 수천 년 전에도 그림은 권력자의 행적을 기록하는 도구였다. 중세 시대 이후에도 교회와 귀족의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문화 생산품이었듯이 당시에도 주문자만 바뀌었을 뿐 화가들은 여전히 미술품 생산자에 불과했다. 특히 네덜란드에서는 그림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화가들의 조합인 지역 길드에 가입을 해야만 그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건축사 자격증이 있어야 하듯이, 길도로부터 화가 자격증을 발급받아야 화가로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크 음악의 대부인 바흐도 가족을 위해 음악 공장의 공장장을 자처했듯이 네덜란드의 화가들도 붓을 들고 노동을 해야만 했다. 그중에 대표적인 화가가 이 글의 주인공인 베르메르이다. 아무튼 당시의 화가들에겐 진정한 예술혼이 담긴 작품을 만드는 것은 어찌 보면 언감생심이었고 개념적으로도 200년이 지나야 미학 분야가 체계화된다.
그러한 가운데 예술가로서 치열하게 사색하고, 예술가로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 화가가 렘브란트였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최고였지만 400년이 지난 지금은 지구상에서 최고로 군림한다. 여기서 잠깐 렘브란트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가겠다. 그를 논하지 않고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 세계를 설명할 수 없고, 당연히 오늘의 주인공인 베르메르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세기 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근처의 위트레흐트 출신 화가들이 로마에 유학을 가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던 카라바조의 화풍을 배워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일련의 그 그룹을 가리켜 위트레흐트 카라바기스트(Utrechtse caravaggisti)라고 후대의 미술사가들이 명명했다. 그들의 특징은 명칭에도 있듯이 카라바조가 창조한 극명한 명암의 세계 즉 테네브리즘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또한 풍속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헨드릭 브루헨, 제라드 반 혼토르스트, 더크 반 바부렌 등이 대표적인 카라바조이스트였고 바로 그들에게서 전반적인 미학적 개념을 습득한 화가가 바로 렘브란트였다. 흔히 빛의 화가라고 하면 첫 번째가 카라바조이고 그다음이 렘브란트라는 게 통상적인 계보이다. 네덜란드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렘브란트가 어떻게 머나먼 로마에서 활동한 카라바조를 알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바로 로마 유학파들과의 연관에서 해소될 수 있다. 아무튼 렘브란트는 카라바조의 후예를 자처하며 빛이라는 요소를 자신의 작품에 심도 있게 적용시켰다.
베르메르보다 한 세대 빠른 1606년에 태어난 렘브란트는 스와넨버그 공방에서 3년 동안 회화 수업을 받은 후 독립하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다. 그는 회화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미술품을 수집하여 되파는 미술상이기도 했고, 공방을 운영하면서 과외 수입도 창출하는 등 에너지 넘치는 경제 활동도 병행했다. 그의 회화는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어서 당시 권력층으로 성장해 있던 민병대 출신 그룹과 경제적으로 부를 쌓은 상류층 부르주아들에게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어 승승장구하던 그는 1639년 서른세 살 밖에 안 된 나이에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인 13,000 길더를 주고 유대인 타운에 있던 새 집을 구입했다. 그 금액은 중산층이 사는 주택의 10배 가까이 되는 큰 금액이라고 하는데 그는 그 금액을 한 번에 지불하지 못하고 70% 정도는 주택담보 대출을 받았다고 한다. 바로 그 대출로 인해 그는 인생 후반기에 파산 선고를 받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아무튼 잘 나가던 그가 추락한 이유는 1942년 당시 시민군 단체부터 주문을 받아 그린 야경(혹은 야간 순찰대)이라는 제목의 대형 그림 때문이었다. 시민군 10여 명 개개인의 초상을 한 화폭에 담는 일종의 집단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출연자들은 자신의 초상에 불만을 표출했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렘브란트와 크게 척을 지게 되었다고 한다. 주문자와 생산자의 마찰이었다. 내 초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수정하라, 그렇게는 못 하겠다를 두고 대립을 한 것이다. 크기가 좌우 2미터가 넘을 만큼 대형이었기 때문에 가격도 고가여서 쌍방 간의 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당시 시민군 단체는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애국자 중에 애국자였고, 네덜란드 사회 계층을 보았을 때 상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종의 군부처럼 그들이 권력층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입김으로 미술 평론가들을 움직여 오만방자한 렘브란트의 명성을 추락하게 만들었다. 어떤 사안이든 어디서나 권력을 가진 상류층과 대립하면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렘브란트도 자신의 그림에 너무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주문자는 그런 그의 태도에 분노를 일으켰던 것이다. 카라바조가 성직자의 입맛을 맞추어 주지 못한 결과 인생이 망가졌듯이 렘브란트도 타협하는 성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순조로운 삶을 이어갈 수 없었다. 결국 렘브란트는 미술계에서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2류 화가로 전락하여 그림 가격은 하락하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판화까지 만들면서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으며, 또한 공방 활성화에도 열중하여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지름신은 여전하여 미술품을 광적으로 수집하였고,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비싸게 주고 산 저택도 팔지 않았다. 그리고 낙관주의자였던 그는 여전히 과소비 성향을 개선하지 않았다. 주택담보 대출의 원금은커녕 이자 내기에도 벅찬 지경이었는데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저택 구입 후 20년이 지났을 때는 깡통주택이 되어 원금이 집값을 추월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결국 그로 인한 결과는 바로 파산선고였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3명의 자녀가 차례로 유아 때 사망하고, 마지막 네째 아들 티투스를 낳은 후에는 아내마저 먼저 하늘로 보내는 등 그에겐 삶의 곡절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극악할 정도로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에서도 렘브란트의 내면에서는 계속 예술적 영감이 솟구치고 있었다. 지구상에서 내로라하는 예술가 중에 주변 환경이 극도로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낸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도대체 예술에 대한 영감이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고갱과 고흐가 그랬고, 모딜리아니도 그랬고, 카라바조도 살인범으로 쫓기는 가운데서도 명작을 남기지 않았던가. 렘브란트의 말년 작품들을 보면 타인의 의견을 배제한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영감의 세계를 화폭에 담으려고 고뇌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자화상은 그 정도를 극대화시킨다. 좁은 화폭에서 아마도 무한한 자유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위대한 예술가로 칭송하게 만든 것은 바로 마지막 10년의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출처 위키피아 / 말년의 렘브란트 자화상
사실 렘브란트는 작품 활동과 미술품 수집 판매와 그리고 화방을 운영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대출 이자를 갚는데 상당한 돈이 지출되어야만 했고, 무엇보다도 삶의 질을 낮추는 데 소홀히 했다. 모차르트가 귀족 사회의 달콤한 분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방황했듯이 렘브란트도 젊었을 적에 접했던 상류층의 풍요로운 세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삶의 긴축을 등한시한 것이다. 경제적 여건이 악화되면 소비를 줄여야 하는 게 상식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그는 다작 활동으로 금전적 결손을 보충하면서 버티려고 했지만 그것 역시 역부족이었다. 물론 그렇게 삶에 대한 욕망이 강했기 때문에 명작들이 만들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여정은 회한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렘브란트의 인생 후반기 활동은 노골적인 미술계의 비토 분위기로 인해 비록 저평가되어 있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이나 고수들은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은 물론이고 네덜란드 제3의 도시인 델프트에서도 상당한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델프트를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베르메르도 렘브란트의 작품에 대한 평판과 사회인으로서 어떤 개성을 가진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렘브란트가 1669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베르메르의 나이는 이미 37살이었다.
교통이 발달되고, 정보통신이 지구를 하나로 엮는 소통 도구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는 오래 전의 역사적 인물에 대해 재조명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런 현상이 일어난 원동력은 인문학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요인으로 인해 살아 있을 때보다 사후에 인정을 받는 예술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죽어서 재평가를 받는 화가 중에 대표적인 예술가가 바로 베르메르이다. 두 세대 전에 활동했던 카라바조도 그에 속하지만 그래도 그는 베르메르처럼 무명은 아니었다. 카라바조는 기본적으로 주교들이 돌보아 줄 정도로 인지도가 꽤 있었고, 그에 대한 기록도 비록 형사 문건 같은 불미스러운 내용이지만 로마, 나폴리, 몰타 등 여러 도시 어딘가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흥미로운 서사를 엮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메르는 정말 미미할 정도의 행정 관청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행적을 쫓아가는 것은 행정 문서를 뒤적이는 것처럼(사실 그러했고) 따분할 뿐, 흥미를 일으키는 드라마틱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당시 무명으로 살다 간 그저 그런 풍속 화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무심하게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냥 스쳐지나간 보통의 시민처럼, 그의 존재는 행정문서에 이름 만 남아있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그를 처음 지하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19세기 중엽 프랑스 출신 언론인 토레 뷔르거였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이후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이 끊이지 않던 프랑스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던 그는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로 자의 반 타의 반 망명길에 오른다. 그리고 망명객으로서 하릴없이 무료하게 여행을 다니다가 우연히 현재의 벨기에 브뤼셀에서 베르메르의 작품 '델프트의 전경'을 접한 뷔르거는 신비의 스핑크스를 발견한 것처럼 경악을 하였다고 한다.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바로 베르메르 신봉자가 된 뷔르거는 프랑스로 돌아간 후 급진적 개혁주의 언론인의 입지를 등지고 베르메르 전도사가 되었으며 미술사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에 이른다. 그 후 유럽에서는 베르메르에 대한 연구가 뜨겁게 타올랐다. 베르메르 사후 거의 200년이 지나서 그는 네덜란드가 아닌 프랑스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출처 위키피아 / 베르메르를 발굴한 토레 뷔르거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원정을 가서 처음 스핑크스를 보았을 때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듯이, 뷔르거가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고 스핑크스를 비유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스핑크스라는 거대한 고대 유적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지만, 정작 그 고고학 유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다. 뷔르거의 '신비의 스핑크스' 비유는 바로 그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시각적으로는 위대한 작품이지만, 그 작품의 진실은 베일에 가려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베르메르가 누구야? 35,000년 전 쇼베 동굴벽화를 발견한 현대인은 그 벽화의 이면에 대해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있지만, 불과 200년 전의 인물에 대해 상상력을 가미한 서사를 엮어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베르메르 교 광신도들은 델프트로 가서 관공서와 화가들의 길드 문서 보관소와 각종 채권업자들의 기록 등을 샅샅이 뒤져서 베르메르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땅을 파서 찾아낸 호모사피엔스의 뼈 조각을 붓으로 정성껏 털어내듯이 그들은 베르메르의 하찮은 기록 하나라도 찾아내기 위해 모험을 감행했고, 현재도 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인디에나 존스 영화처럼 고고학 발굴사가 흥미진진하듯이 베르메르의 삶보다 오히려 그런 연구의 역사가 더 흥미롭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그에 대한 삶의 흔적은 너무나 미미했다. 카라바조처럼 형사적인 기록도 없고, 미켈란젤로처럼 당시 권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깝게는 렘브란트처럼 세상과 척을 지면서 열정적으로 살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공적인 족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프랑스에서 네덜란드 델프트로 여행을 간 외교관이자 판사인 드 몽코니와 귀족인 반 베르크하우트 등이 쓴 여행기에 베르메르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하는 데, 그것 또한 그냥 단순히 방문했다는 기록이지 그림이나 화가 개인에 대한 어떤 평가도 없고, 혹은 빵가게 주인한데 들었다는 정도의 매우 단편적인 일화이며, 사실 그 화가가 진짜 베르메르를 칭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더 궁금증과 상상력을 유발시키고 괴베클리 테베의 유물처럼 신비롭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그의 매력적인 작품은 우리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의 향기처럼 치명적인 유혹을 촉발시키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이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 속으로 한 발짝 들어가야만 한다. 깊은 미혹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다. 최소한 그가 누구인지 미치도록 알고 싶을 뿐이다.
베르메르의 아버지 레이니에 얀슨존은 과거 젊었을 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연히 집단 패싸움 사건(상대방 중에 군인 한 명이 사망)에 연루되어 곤혹스러운 상황을 겪었다고 한다. 당시 형사 기록에는 구체적인 정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주범은 아닌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렇더라도 기록은 기록이니 만큼 가족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기독교 원리주의가 사회의 규범으로 정착하여 정직 근면 성실 신용 같은 단어들이 공동선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사로운 폭력과 살인 같은 범죄는 간과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였다. 아무튼 그는 마음을 다시 잡고 그 후 열심히 사회활동을 한 결과 좋은 평판을 얻었다고 한다. 본업이 비단과 모직 직조 기술자인 그는 미술에도 조예가 있어서 화상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돈을 빌려 조그만 숙박업도 병행하며 당시의 열정적인 네덜란드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미술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그림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레이니에도 그 바람에 편승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업수완은 없어서 그림 투자도 신통치 않았고, 특히 숙박업도 대출을 받아 확장을 했지만 이자 내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항상 쪼들렸다고 한다. 그가 제법 큰 규모의 호텔을 산 이유는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그런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가 빚만 지게 되었던 것이다.
1632년 레이니에의 늦둥이로 태어난 베르메르는 1653년 결혼할 때까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출생신고서 외에 전무하다. 오히려 레이니에에 대한 이야기가 더 풍부하다.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와 말라리아 따위의 전염병이나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가족 중에 몇 명이 사망했다는 등의 이야기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베르메르가 어디서 회화를 습득했는지에 대해서도 영원히 숙제로 남아 있다. 그의 전반적인 화풍으로 보면 렘브란트의 수많은 도제 중에 하나이지 않았나 하고 추정하지만 그것은 상상력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삶과 경제적인 형편을 보았을 때 당시 암스테르담에 있던 렘브란트의 공방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의 여건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렘브란트의 제자들이 네덜란드에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제자였다면 직간접적이나 어떠한 형태이든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지만 그런 것도 없다. 애석하게도 베르메르가 델프트를 벗어났다는 기록은 네덜란드의 어디에도 없다. 당시는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6년간의 도제 기간을 거쳐야 했다. 아무나 그림 좀 그린다고 화가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런 미술계의 프로세스 상황에서 베르메르가 공방에 다녔을 것은 확실한 데, 어느 화가가 운영하는 공방에 다녔는지는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는 공방은 레오나르트 브라메르 공방이다. 추정 영역이지만 관계를 좁혀보면 개연성은 충분하다. 레오나르트 브라메르는 베르메르의 -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 출생신고서에 대부로 기록되어 있는 브라메르의 동생인 것을 보면 화상이었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더구나 베르메르가 21살 무렵 결혼하기 전에 브라메르가 변호사를 대동하고 신부의 어머니를 만나 혼인의 성사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보면, 자신의 아들이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아버지는 당시 델프트에서 공방을 운영하고 있던 브라메르에게 아들의 미래를 부탁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리고 파리, 마르세유, 제노바, 로마 등을 여행하면서 당대 유럽의 미술 세계를 습득하고 황금시대의 일원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브라메르가 델프트에서 - 가톨릭 신자이며 주로 종교화 그렸다는 이유로 - 렘브란트의 제자인 도우나 호흐처럼 인지도 높은 화가가 아니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풍속화가 대세였기 때문에 어둡고 무거운 종교화는 인기가 없었다. 그런 비주류의 미학적 세계를 가진 브라메르와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은 베르메르를 사제지간으로 관계를 설정하는 게 억지라고 논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술이든 인문학이든 사제지간이라고 해서 작품의 경향이 비례해야 하는 논리는 예술가들의 개성을 너무 폄하하는 것이다. 페테르차노 공방에서 도제 생활을 한 카라바조가 페테르차노의 화풍을 잇지 않았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교수에게서 강의를 들었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보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굳이 두 화가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작품의 색채에서 유독 코발트색을 강조했던 브라메르의 표현 스타일이 베르메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브라메르의 전체적인 표현 방법이 기존의 풍속화와 차별적이었듯이 베르메르도 '마르타와 마리아'와 같은 성화를 그렸고, '우유 따르는 여인'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적 세계를 고민하고 화폭에 옮겼던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연관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메르의 위대성은 바로 그 차별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그 많은 공방 문서에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베르메르의 스승 후보로 당시 델프트에서 활동하던 카렐 파브리티우스, 빌렘 반 엘스트, 아브라함 블로에마르트 등이 있지만, 당시 네덜란드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작고 세밀한 화풍(Fijnschilders)만 유사할 뿐 나이와 정황 등을 고려할 때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무관하다는 게 정론이다.
출처 위키피아 / 베르메르 작 / 델프트 전경
현대의 미술사가들은 왜 베르메르의 스승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가. 지구에 존재했던 어떠한 미술가들 중에서 이처럼 스승 찾기에 열중인 화가는 없을 것이다. 베르메르에게 왜 스승인 중요한가. 당대의 거장 렘브란트와 연결해 보려고 여러 가지 정황들을 찾다가 결국 철수했는데, 그들은 왜 그런 관계를 중요시한 것일까. 19세기 인상주의 이후 개인의 표현이 주요한 미덕으로 여겨왔지만 그전 시대에는 정치 종교적인 환경에 따라 일정한 화풍의 경향이 강조되었고 그 맥락에서 작가의 계보도 미술사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체계와 분류를 선호하는 유럽인에겐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실 관계는 예술가의 세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예술은 작가의 독창적인 상상력의 표현이기 때문에 스승의 세계를 제자가 이어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베르메르의 스승 찾기는 그가 베일에 싸여 있는 의문투성이의 인물이어서 그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인지 모른다.
도제 생활을 마친 베르메르에게 처음 닥친 불행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다방면에서 사회활동을 하던 아버지는 호텔 구입 시 대출받은 빚만 남긴 채 결국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빚을 고스란히 상속받은 외아들 베르메르는 사회에 첫발을 딛으면서부터 빚쟁이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예나 지금이나 채무자는 고달프기 마련이다. 더구나 유대인은 얼마나 집요한가. 그리고 호텔 건물을 팔아 빚을 청산하려고 했지만 매매는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베르메르는 아버지처럼 직조 기술자가 되는 것도 거부했고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는 이젤과 물감을 사랑했고 그 세계에서 미래를 도모하기를 원했다. 그런 이유로 공방을 졸업한 그는 1653년 델프트 세인트 루크 길드에 가입비 6 길더 중 20%만 납부하고, 3년이 지난 1656년에야 완납할 수 있었다. 그림을 팔기 위해서는 즉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화가 협회 격인 길드에 가입을 해야 하는데 당시 금전적으로 어려웠던 그는 많지도 않은 가입비를 체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첫 전업화가로서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청운의 꿈을 안고 밀라노를 떠나 과감하게 로마행을 선택한 카라바조에 비하면 그의 시작은 너무나 소박하고 현실적이었다. 어머니와 12살 많은 누이가 호텔을 운영하였지만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뿐 경제적으로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출처 위키피아 / 베르메르 작 / 마르타와 마리아
베르메르는 나이에 비해 이타적이고 성실하고 항상 반듯한 청년이었다. 렘브란트처럼 예술가의 자유분방함도 찾아볼 수 없고 사람 앞에서 나대지도 않았다. 화가라면 자화상을 그리는 게 당연시하던 풍토에서 단 하나의 자화상도 남기지 것을 보면 자화상을 여러 개 그린 게릿 도우나 피터 데 호흐처럼 자의식이 강하지 않고 항상 겸손했던 것으로 보인다. 100여 개의 자화상을 그린 렘브란트와 한 개도 그리지 않는 베르메르, 이 두 사람이 어떤 성정을 가졌는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아무튼,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화가라는 직업은 미래가 보장된 전도유망한 직종이었다. 풍경화 초상화 풍속화 등을 제작 판매하는 프리랜서 화가로 활동을 할 수도 있지만, 20대 초반에 잠시 린넨 상인의 고용인으로 일했던 피터 데 호흐처럼 특정 회사에 고용되어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다. 각종 서적의 삽화나 엠블럼 등의 작업에 참여하여 수입을 올릴 수도 있었고, 특히 무역 관련 회사에 고용되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사진처럼 현지의 풍경을 드로잉으로 기록하는 일러스트라는 직종은 네덜란드 어디를 가나 인기가 많았다. 따라서 화가의 수요는 항상 부족한 상황이었고 또한 아무나 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타고난 재능이 겸비된 전문성을 요하는 일종의 전문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가의 길로 들어선 베르메르는 중매쟁이들의 관심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르메르와 그의 아버지를 잘 아는 지인들이 혼인을 주선하기 위해 솔선수범 나섰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위에서 언급한 브라메르였다. 경제적으로 불안한 베르메르 집안에 안정을 찾아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청년 베르메르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한 이유가 더 컷을 지도 모른다. 보기엔 반듯해 보이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자유롭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젊은 베르메르가 어디로 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혈기왕성한 청년 예술가의 욕망은 언제든지 자신을 깊은 수렁으로 빠트릴 수 있는 시한폭탄이기 때문이다. 당시 베르메르에게는 온갖 유혹을 차단할 수 있는 안정적인 생활이 필요했고 그것은 곧 결혼이었다. 이런 예술가의 기질을 잘 알고 있던 브라메르가 손수 단속에 나섰던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베르메르는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1653년 이른 나이인 21살 때 결혼을 했다. 거의 중매나 마찬가지였다. 델프트와 인접한 고우다에서 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레이니어 볼네스의 딸인 카타리나 볼네스와 그해 4월에 결혼했는데 신부는 신랑보다 1살이 많았다. 볼네스 집안과 베르메르의 대부인 브라메르 집안이 같은 가톨릭 성가정인 것을 보면 브라메르가 그 결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아마도 결혼의 증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잣집 딸을 신부로 맞이하는 것이 베르메르와 그의 가족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혼에는 조건이 있었다. 바로 베르메르의 개종이었다. 프로테스탄이었던 베르메르의 개종을 처가에서 강력하게 요구했는데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베르메르는 순순히 응했다고 한다. 개종에 대한 갈등의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베르메르의 인생에서 종교는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잠깐 베르메르의 처가에 대해 언급하고 가겠다. 벽돌 사업으로 많은 부를 쌓은 신흥 부르주아 집안인 처가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네덜란드에서는 특이하게도 가톨릭을 믿고 있었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가톨릭 세력은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거의 말살되었지만, 경제 발전을 위해 평화와 자유를 정면에 내세운 네덜란드 정부는 칼뱅의 말씀을 어기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관용 정책을 폈다. 하지만 말이 종교의 자유지 현실 세계에서는 성당도 건립할 수 없었고, 당연히 미사를 지낼 곳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가톨릭 신도들은 공직에 진출할 수도 없었다. 형식적인 종교의 자유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처가는 대범하게 소수 종교로 전락한 가톨릭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가톨릭 신자인 브라메르와 깊은 관계가 형성되었는지 모른다. 유대인처럼 그들만의 '은밀한 교회'에서 미사를 지내면서 말이다. 하지만 처가는 남다른 종교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성가정이었지만 폭력이 난무하는 폭력 가정이기도 했다. 폭력의 피해자는 장모인 마리아 틴스였다. 그녀는 평생 동안 남편으로 부터 온갖 욕설과 폭력에 시달렸다. 증언에 의하면 옷을 벗긴 채 질질 끌려 다니기도 하고, 발길에 차여 내동댕이쳐지기고 하고, 몽둥이로 피멍이 들도록 맞기도 하고, 주방에서 혼자 식사를 하기도 하는 등의 치욕적인 폭력을 당했다고 한다. 딸의 결혼 당시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의 신체적 능력이 약해지자 이번에는 대를 이어 아들이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대상도 거의가 어머니였다. 그 집안의 가정 폭력은 병적이었고 아마도 유전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집안의 대소사는 그녀가 관리했다. 비록 가정 폭력의 피해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방마님으로서의 일은 누구보다 더 잘 꾸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강인하고 현명한 여인이었다. 처가에서 폭력이 사라진 것은 베르메르가 결혼한 후 10여 년이 지난, 그러니까 처가살이를 할 당시였다. 대를 이은 가정 폭력자인 처남이 어느 날 어머니에게 칼을 들고 대들자 이를 말리던 카타리나가 그 칼에 자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났고, 이에 경찰에 잡혀간 처남은 상습적인 가정 폭력자로 판결을 받고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당시 이웃 사람들의 증언이 아직도 고우다 관청에 문서에 남아 있다고 한다.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폭력 가정에 얹혀살던 베르메르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처가의 이런 상황은 여러 종류의 기록에 의해서 스토리를 엮을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베르메르는 그 막장 드라마에 단역으로라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입에서도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처가에서 유령처럼 존재했을 만큼 무시를 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에 대해 깊이 들어가는 것은 정말 영화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접근하지 않겠지만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은 감출 수가 없다.
아무튼 델프트의 같은 또래 젊은 화가들은 최소한 당시 네덜란드의 미술 중심지였던 플랑드르 지역이나 암스테르담에 유학을 가서 미술 공부를 하고 돌아왔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베르메르는 델프트시를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20대 초반 학습 효과가 가장 좋을 때 열정적으로 지적 능력을 배양하기도 하고, 자유롭게 세상 구경도 해보고, 때론 자아를 찾아 방황도 해봄직 하지만 그는 일상이라는 틀에 잡혀 옴짝달싹도 못한 채 델프트에 갇혀 있었다. 니콜라스 매스나 피터 데 호흐 등 같은 연배들이 세상의 안목을 넓혀 갈 때 그는 21살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시작했던 것이다. 생계형 화가로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베르메르는 생애 동안 15명의 자녀을 생산하고, 11명을 생존시켰다. 당시엔 다산이 미덕이었다고는 하지만 15명을 낳았다는 것은 결혼 후 22년 동안 거의 1.5년에 1명을 생산했다는 결과이다. 그리고 생존율을 따져보면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렘브란트도 1634년 결혼하여 1641년 본처가 사망한 7년 사이에 4명을 생산했는데 마지막 1명만 생존에 성공하여 자신의 유산을 상속할 수 있었다. 아마도 베르메르처럼 20년 이상 함께 살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는 출산에 따른 위생문제가 가장 큰 유아 사망의 원인이었고,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도 기승을 부리고 있었던 터라 유아가 50%만 생존해도 성공적인 자식농사였다. 100년 후 모차르트도 10명 중 생존한 2명 중에 하나였고, 슈베르트도 14명 중 생존자 5명 중에 한 명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베르메르는 이런 대가족을 책임진 가장이었다. 그 짐은 평생 동안 짊어지고 가야 하는 숙명과도 같았다. 바흐가 두 명의 아내에게서 20명이나 되는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평생을 보냈듯이 베르메르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 채 내놓아야 했다. 예술가로서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삶의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정을 등한시하고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도는 예술가들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예술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가정과 예술을 평생 동안 함께 지킬 수 있는 예술가는 얼마나 될까. 베르메르는 고갱처럼 가족을 버리면서 자신의 이상을 좇는 배짱도 없었고, 고흐처럼 예술을 위해 결혼을 포기할 만큼의 뜨거운 열정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베르메르는 항상 곡간에 빵이 얼마나 있는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았다.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 같은 것은 배부른 소리였다. 결혼 즈음해서 그린 '델프트 전경' 같은 초기 작품에서 그의 천재적인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런 시기는 잠시였다. 예술적 상상력은 사치에 불과했고 오직 삶의 질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그는 생활의 최전선에서 고달픈 일상을 보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화가로서 할 수 있는 표현은 풍속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집안 형편이 괜찮았던 자신의 대부 브라메르처럼 대세를 따라가지 않고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형성하고 싶었지만 그에겐 부모가 남긴 빚과 대가족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예술가가 아니라 회화 기술자였다. 중산층 가정 거실 벽을 장식하는 인테리어 소품에 불과한 그림을 생산하는 기술자이며 노동자에 불과했다. 렘브란트처럼 대가의 반열에 오르지 않는 한 그런 미술 시장의 프로세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네덜란드의 거의 많은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림만 팔아서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길드 조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미래를 도모하였고, 화가 세계에서 인간적인 평판이 좋았던 그는 결국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아 네 번에 걸쳐 조합장을 하게 되었다. 1662년, 1663년, 1670년, 1671년 도합 네 번에 걸쳐 길드 수장에 임명되었고 기간은 총 4년이었다. 임기만 총 4년이고 전후 기간을 따지면 거의 8년이란 시간을 조합에 깊게 관여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인 1671년에도 조합장을 했다는 것은 그의 화가 생활의 전반적인 기간 동안 조합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합장은 아무나 하는 직책은 아니다. 길드 조합에서 이렇게 4번이나 조합장을 했다는 것은 그가 평소 근면 성실하게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고 주위 사람들한테 신뢰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일화나 서사를 찾을 수 없어서 그가 은둔형 인간으로 알고 있지만, 알고 보면 외향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그는 화가라는 본업보다 조합 일에 더 적극적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그가 정치적인 수완과 행정가로서의 자질이 더 있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물론 그의 이런 사회생활은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그의 작품을 35개 밖에 볼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길드 조직에 깊게 관여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충분히 그런 개연성은 있다. 혹자들은 그의 작품 수가 적은 이유를 꼼꼼하고 느린 작업 스타일 때문이라고 하지만, 물론 그런 이유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도 길드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연보를 보면 그가 조합장을 하던 시기에는 작품이 희소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전업화가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조합과 화가와 그리고 간간히 화상도 겸하면서 투잡 이상의 경제적 삶을 영위했다. 그렇더라도 그가 남긴 작품은 사실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자신의 그림이 게릿 도우나 피터 데 호흐처럼 비싸지 않았기 때문에 소중함을 간과하여 가볍게 처리했다던가 혹은 그의 그림을 구입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폐기를 했다든가 하는 이유로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거나 사장되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35개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지 모른다. 17세기에서 19세기 동안 유럽에서 벌어졌던 혼돈의 정치적 상황에서 교회나 귀족이 아닌 개인 소장자들이 문화 생산품의 소중함을 간과하지 않고 현명하게 잘 지켜낸 결과였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이 생각보다 헐값에 팔리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델프트에서 소문이 자자했고, 또한 길드 조합장을 할 정도로 평판이 좋았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당시 가장 고가로 팔리던 도우의 작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그림 하나의 판매 금액은 몇 개월 생활비 정도 되는, 그러니까 중상 정도 되는 가격이 형성되어 있었다. 아마도 도우나 호흐처럼 그림에 매진했다면 렘브란트에 버금가는 시장 가격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을 가장 많이 구입한 사람은 반 루이벤이었다. 귀족 출신에 사업가로서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베르메르의 작품 절반을 구입한 최고의 후원자였다. 작품성이나 투자 가치로서 많이 구입을 했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계가 매우 돈독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 루이벤도 사망하고, 그의 부인도 사망할 1670년 무렵에 그 부인은 베르메르에게 500 길더라는 유산을 상속한다. 그 금액은 거의 중산층이 사는 주택 한 채 정도의 가치였다. 친인척도 아닌 남에게 유산을 남긴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상식을 뛰어넘는 경우였다. 그만큼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는 그들만의 깊은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반 루이벤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베르메르의 그림을 구입했다. 그중에는 델프트시 판사인 니콜라스 반 아셀, 델프트시 재정관리인 빌렘 반 베르텔, 부유한 은행가인 디에코 두아르테, 그리고 제빵 길드 회장이면서 큰 빵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헨드릭 반 바이텐(베르메르가 사망한 후 그에게 빌려준 대가로 그의 아내에게서 그림 2개를 받는다) 등이 있었다. 이런 사실 관계는 미술사가들이 델프트 시에서 보관하고 있던 수많은 문서들을 세밀하게 조사하여 나온 팩트들이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들을 볼 때 베르메르는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아버지가 남긴 빚과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가족을 거느리는 상황에서도 근면 성실하게 사회활동을 한 결과 가정부를 고용할 정도로 중산층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위키피아 / 베르메르 작 / 우유 따르는 여인
베르메르가 삶의 질을 더욱 향상할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그림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특히 물감 재료 선택에 있어서,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결벽증적인 고집으로 인해 상당한 지출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안료가 코발트색을 내는 청금석이었다. 그 청금석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채굴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광물이었다. 지금은 미국이나 남미 등에서도 채굴되지만 그 양은 아프가니스탄 보다 훨씬 못 미친다고 한다. 청금석은 수천 년 전 고대 메소포타니아와 이집트 그리고 중국 문명권에서는 보석의 일종으로 취급했고, 가깝게는 르네상스 때는 너무 고가여서 웬만한 화가들은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론 17세 유럽에서도 상당한 고가였다. 화가들이 감히 구입하여 화폭에 칠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런 값비산 안료를 베르메르는 대담하게 당시 세상의 모든 것을 무역하던 동인도회사에서 구입하여 안료로 사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우유 따르는 여인'과 '진주 귀걸이 소녀'이다. 특히 '우유 따르는 여인'의 치마의 선명한 코발트색은 당시 실험성이 강한 색채였으며, 네덜란드 회화에서 그 정도의 색감를 내는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 '진주 귀걸이 소녀'의 터번의 연한 파란색도 환상적인 색감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우유 따르는 여인'의 치마의 코발트색과 인상주의적인 조화를 이르는 상의 색인 황색 또한 납과 주석의 혼합물로서 상당한 가격이었고, 그 밖에도 베르메르가 사용한 안료는 평범하지 않는 고가의 재료가 많았다. 현재 베르메르 작품의 안료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베르메르의 이런 무절재 한 안료 사용은 당연히 그의 경제적인 사정과 직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현상은 금전적으로 궁핍했던 말년의 작품을 보면, 상상력이 활성화된 시기에 완성한 위의 두 작품과 비교하여 완연히 다른 색감을 느낄 수 있다. 안료는 그의 작품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베르메르의 일생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미생물학자 레벤후크와의 관계이다. 지구에서 최초로 현미경을 발명한 그 레벤후트 말이다. 그는 베르메르와 같은 동네에서 같은 해에 태어났다. 베르메르 보다 4일 늦게 세례를 받은 레벤후크는 16살 때 변호사인 삼촌이 근무하는 직물 회사에서 회계사 견습생으로 근무를 하고 1654년 22살 때 델프트로 돌아와 결혼을 했다. 그 당시 그는 직물 회사 경력을 발판으로 포목상을 하면서 틈만 나면 유리로 렌즈를 만들었다. 당시 망원경의 핵심 재료인 렌즈는 네덜란드 산이 가장 질이 좋았던 만큼 레벤후크도 렌즈 기술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망원 렌즈만 만든 것이 아니라 보다 크게 물체를 관찰하기 위해, 그러니까 배율을 높이기 위해 매일 유리를 연마하며 연구에 몰입했다. 그렇게 렌즈와 배율 연구에 몰입한 결과 500배 정도 되는 고배율의 현미경을 만들었고, 그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각종 생물을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미생물과 세포의 세계를 눈으로 직관한 후 의사 친구의 도움으로 논문을 쓰고 세상에 발표했다. 그의 이런 연구는 덕후처럼 집요하게 꾸준히 이어졌다. 이 발견으로 미생물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해져 까다롭다는 영국학회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공화국 총독인 빌럼 3세와 그의 부인이 함께 그의 연구실을 방문하여 직접 현미경 세계를 직관하기도 하고, 멀리 러시아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많은 관계자를 보내기도 했다. 이에 네덜란드에서 전국구 인물이 된 그는 델프트시 공무원으로 특별 채용되어 평생 동안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 가령 측량과 와인 판별사 등 - 일생을 보냈다. 바로 그런 레벤후크가 베르메르가 살던 델프트에게 평생 동안 살았던 것이다. 그의 과학자로서의 이미지는 베르메르가 그린 '지질학자'와 '천문학자'라는 2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그 2개의 작품 인물 생김새가 같은 것으로 보아 동일인이 분명한데, 그 인물이 정말 레벤후크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레벤후크가 모델이 되어주었다는 것이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런 친구 가설은 낭만적인 측면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아래에서 얘기하겠지만, 나중에 그가 베르메르의 유산 집행관으로 임명되어 처리하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인간적인 관계에 대한 표현이나 기록은 없다. 그리니까 우정이나 친분을 객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을만한 대목이 없다는 것이다.
출처 위키피아 / 베르메르 작 / 지리학자 / 레벤후크로 추정
아무튼 레벤후크와는 달리 베르메르의 일상은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하게 지속되었다. 조합장 임기를 마치더라도 조합 회원들과 자주 어울리며 미술시장의 근황에 대해 토론도 하고, 때론 그림을 사서 파는 일도 하고, 틈만 나면 집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여러 가지 풍속화를 그렸다. 그의 작품은 그래도 상당한 퀄리티가 있어서 완성이 되면 괜찮은 금액에 금방 판매되었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 육아에도 전념했다. 그 많은 아이들을 카타리나에게 만 맡길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삶에 불만을 가지지 않고 가족을 위해 항상 그렇듯 근면 성실하게 일을 했다.
해마다 자식들이 늘어나고 그런 가운데서도 중간에 사망하는 아이도 생겨서 베르메르 부부는 슬퍼하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는 당시 흔한 일이어서 어렵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베르메르의 삶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하기 등장하는 이야기는 다산에 관한 것이다. 당시 피임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 산아제한을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물리적으로 부부관계를 멀리하는 것인데, 그런 방법은 곧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 공창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남자의 외도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 부부는 이렇게까지 해서 산아제한을 하는 것은 가톨릭 교리로 볼 때 부도덕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늘어나는 자식들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할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살이 넘어서 경제 사정이 최악으로 치달을 때도 늦둥이를 낳는 등 평균보다 훨씬 많은 출산을 한 것을 볼 때 정말 무책임한 부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막 낳아 놓으면 어쩌라고. 아무튼 그리하여 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는 생존해 있던 자식이 10명이나 되었다.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식들의 교육에도 상당한 지출이 있어야 하고, 또한 먹고 입는 것은 물론이고 적당한 문화생활을 위해서도 전부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의 큰딸 마리아가 결혼한 게 20살인 1674년이었는데, 그 당시는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 시기였다. 그러니까 베르메르는 평생 동안 가족의 삶의 질을 지키기 위해 눈물겹도록 노력했고, 때론 빚도 지고, 인생 후반기에는 처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가정 경제의 일정한 손익계산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델프트 전경'과 우유 따르는 여인'과 그리고 '진주 귀걸이 소녀' 등은 서른 중반 이전에 완성한 것을 보면 일상과 이상의 현실적 역학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일상을 이상 뒤에 숨길 수도 있고, 이상이 일상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베르메르의 성향을 보면 이상이 일상을 이겨내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상이 주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성향이라는 것이다. 고흐처럼 일상을 이상 뒤에 감추고 화폭에 집중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베르메르는 그와 정반대였다. 그는 일상의 늪에서 벗어날 능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고단한 삶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베르메르가 사회생활과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1660년대의 네덜란드는 젊은 총리인 요한 드 비트가 새로운 공화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혁신적인 정책을 집행하던 시기였다. 비록 영국과 해상 무역을 놓고 전쟁을 벌이는 와중이었지만 국민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내치와 평화주의를 내세운 외교 정책으로 공화국에 혁신의 물결을 몰아가고 있었다. 당시 영국과의 2차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영국의 크롬웰과 협상하여 훗날 영국의 국왕이 되는 제임스 2세의 딸 마리와 당시 네덜란드의 젊은 총독인 빌럼 3세와 결혼을 성사시키는 등 외교 정치적으로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런 정치력으로 그는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확고한 위치에 오르며 부동의 실세가 되었고, 시민들 또한 그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하지만 1672년 3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와 결탁한 영국의 찰스 2세가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일명 프랑스 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한다.
여기서 잠깐 당시 네덜란드를 둘러싼 유럽의 정세를 집고 가겠다.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80년 동안 독립전쟁을 하면서도 해상력을 바탕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알토란 같은 네덜란드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스페인은 결국 1648년 손을 들고 철수했고 그 후 네덜란드는 흔히 말하는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특히 스페인에서 추방되어 네덜란드로 이주한 유대인의 자본을 끌어들여 주식회사 형식의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 후추 설탕 커피 등 향신료를 비롯한 온갖 물품을 수입하여 유럽에 파는 혁신적인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고 있었다. 이에 해적의 나라 영국은 시시때때로 네덜란드를 건드려 해상 패권을 놓고 전쟁을 일으켰고, 긴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프랑스도 당시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성장을 바라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과 덴마크 등 그를 둘러싼 왕국들도 자의든 타의든 그 정세에 참여하고 이합집산을 하는 혼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야망이 불타오르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드디어 1672년 3월 네덜란드에게 선전포고를 하는데, 영원한 앙숙인 영국의 찰스 2세를 도버협약을 내세워 자신이 만든 연합국으로 끌어들여 먼저 영국이 네덜란드를 침공하게 한다. 네덜란드 총리인 요한 드 비트의 외교력으로 영국 왕족과 사돈 사이를 만들어 놓았는데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전쟁으로 네덜란드는 급격하게 요동쳤다. 평화로웠던 네덜란드의 시민사회는 험악하게 변하였고 당시 40살의 베르메르도 시민군에 징집된다. 그리고 그해 8월 프랑스 본진이 네덜란드를 침범하고, 군사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네덜란드는 대패를 한다.
이 상황에서 역사는 네덜란드 공화국 수장인 빌럼 3세를 등장시킨다. 네덜란드는 다른 국가와 달리 시민계급이 가장 큰 정치 세력이었다. 그 세력을 구축하게 만든 주요 인물 중에 한 명이 요한 드 비트였지만, 정치 공학적으로 그런 관계를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인물이 바로 빌럼 3세였다. 프랑스에 대패하여 공화국의 경제가 붕괴할 지경에 이르자 시민들은 상황을 이렇게 만든 통치자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국가 부흥에 자부심이 강했던 시민들의 원망은 들끓었다. 누군가 정치적 책임을 져야만 민심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음험하고 야망이 컷 던 빌럼 3세는 그 십자가를 질 인물로 바로 비트 총리를 점찍고 음모를 꾸몄다. 전쟁의 촉발 원인이 비트 총리와 영국의 찰스 2세의 모종의 정치적 계략이었다는 소문을 퍼트려 민심을 돌아서게 만들었고, 결정적으로는 빌럼 3세 암살 계획에 비트 총리의 형인 코르넬리스 드 비트가 개입되었다는 죄명을 씌워 체포한 후 감옥에 가두었다. 이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진실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빌럼 3세가 개입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튼, 곧바로 이어진 재판에서 다른 암살 공모자들은 무죄로 풀어주고 코르넬리스만 사형을 확정한다. 그런 와중에 요한 드 비트는 형의 무죄를 주장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이미 주도권은 빌럼 3세에게 가 있었기 때문에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런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광분한 시민들은 폭도로 변하여 비트 형제를 자신들이 처단하겠다고 감옥 앞에서 격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1672년 8월 25일, 코르넬리스의 재판을 인정할 수 없었던 비트가 감옥에 가서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폭도들이 감옥 정문과 연결된 다리의 바리케이드를 넘어가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상황에서 감옥 소장이 정부에 방어 병력을 요청했지만 그 요청은 묵살되었다. 폭도로 변한 시위대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지만 불분명한 이유로 경찰 병력은 방관을 하였으며 그런 상황 때문에 역사는 그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에 빌럼 3세가 있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폭도들에 의해 감옥 문이 열리고 결국 비트 형제는 그 폭도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다. 당시 폭도들이 얼마나 광기에 빠졌는지에 대한 상세한 현장 문자 기록과 기록화가 남아 현재까지 전해진다. 기록화만 보더라도 광기의 강도를 알 수 있다. 폭도를 사주하고 이 사건의 행동대원으로 참여한 인물들은 어떠한 죄목도 받지 않고 한 달 후 거리를 활보했다. 이 사건은 헤이그에서 벌어졌지만 네덜란드 전 지역에 알려졌고 물론 델프트에도 생생한 소식이 전해졌다. 여담이지만 그 후 정적인 요한 드 비트를 제거한 빌럼 3세는 네덜란드를 좌지우지하며 승승장구한 끝에 프랑스 루이 14세의 팽창 정책을 극복하고 드디어 영국의 국왕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1689년 명예전쟁이라고 일컫는 초유의 사건으로 영국 본토에 무혈 입성하여 윌리엄 3세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비록 자신의 왕비 메리와 공동 국왕에 즉위하지만 네덜란드 공화국과 대영제국의 국왕을 동시에 거머쥐는 유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런 와중에 우리의 가엾은 베르메르는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세상은 흉흉해지고 미술시장도 붕괴되어 그림은 팔리지 않았으며 길드 조직도 와해될 지경이었다. 대가족의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그는 사채업자한테 대출을 받기도 하고, 부족한 생필품도 외상으로 구해야만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 상황은 3년 동안 개선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자라도 갚겠다는 심정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구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은 생필품이 아니고 문화상품이었기 때문에 경제가 악화되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업종이 바로 자신 같은 화가들이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물려준 호텔 영업도 바닥을 쳐 대출이자도 못 갚는 지경이었다. 당시 주식인 빵을 살 돈이 없어서 반 바이덴이 운영하던 빵가게에서 외상으로 구해 연명했다고 한다. 베르메르 사후 그 빵 외상값을 베르메르의 그림으로 갚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675년, 프랑스와의 전쟁은 계속 지속되고 있었다. 암울한 기운이 델프트를 떠나지 않았다. 시민군에 소집된 베르메르는 델프트에 프랑스군이 침범해 오면 즉시 전장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항상 긴장된 일상이 연속되는 가운데서도 가족의 생계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그는 잘 안 마시던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전해에 마지막 그림 하나를 그렸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매일 술을 마시고, 부지런하고 성실했던 삶도 태만해지고, 모든 게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기도 했다. 상황이 좋아질 기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미래는 어둡고 참혹했다. 베르메르의 내면은 복잡해졌다. 자신의 지난 과거들이 뚜렷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자신이 열망했던 예술가로서의 길은 현실 앞에서 좌절되지 않았던가. 렘브란트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보고 싶지 않았던가. 예술가의 뜨거운 피가 그의 심장에서 솟구쳤지만 세상을 알아가는 그때, 모든 것은 환상이 되고 말았다. 뜨거운 피는 차갑게 식어갔다. 그래도 '진주 귀걸이 소녀'를 화폭에 그릴 때는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 비록 작은 화폭이지만 그 안에서 그는 자유를 만끽했다. 나만의 세상을 창조한다는 것은 나에 의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지 않는가. 그 실존적 자유를 느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그림은 당시 네덜란드 미술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신비로운 작품이었다. 베르메르가 그 소녀를 완성해 갈 때의 희열을 나는 공감할 수 있다. 악몽과도 같은 현실을 벗어나 내면 저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뜨거운 영감이 기지개를 켜고 붓끝에 전달될 때의 희열은 삶에 지쳐있던 베르메르의 황폐한 영혼을 달래주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몸과 마음을 질곡 속에 가두었다. 그런 회한이 몸서리치게 그를 엄습할 때 그는 폭음을 했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우울증과 조증이 부지불식간에 나타나 가족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내인 카타리나와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던 장모 마리아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의 육신과 영혼은 급격하게 파괴되어 갔다. 걷잡을 수 없었던 마지막 며칠이 지난 뒤, 그는 심장발작을 일으켜 결국 그해 12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3년 후 1678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그는 그 혼란한 시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이 꿈꾸던 영원한 자유를 찾아 떠나고 말았다.
출처 위키비아 / 카타리나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었던 작품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먼저 간 자식들의 교회 무덤에 묻혔지만 산 자는 그가 남긴 흔적을 정리해야만 했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베르메르는 가족들의 삶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카타리나는 남편이 팔지 않고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던 '회화의 예술'을 비룻한 그림 몇 점을 채권자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다가 그 작품을 친정어머니 집에 숨겨 놓았다. 그리고 빚을 청산할 능력이 없어 결국 파산 신고를 했다. 이 사건의 채권 유산 관리인에 현미경 발명가이면서 델프트 시청 공무원인 레벤후크가 시의회로부터 임명되어 베르메르가 남긴 채무를 청산하는 데 투입되었다. 베르메르와 레벤후크의 관계를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운명의 장난인지 베르메르 인생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 레벤후크가 등장한다. 행정공무원 중에서 유산 집행관 경력자들을 무작위로 투표를 했는데 하필이면 레벤후크가 선출되었던 것이다. 그 선출에 대해 당사자가 거부를 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공문서에는 레벤후크가 임명된 것으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레벤후크는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직분에 충실을 다한 레벤후크는 카타리나의 어머니한테 숨겨 둔 그림을 찾아내어 채권추심을 집행하였다. 베르메르와 레벤후크의 이런 관계를 두고 많은 미술사가들은 여러 가지 가설을 내놓는다. 레벤후크가 베르메르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유리하게 관리했다거나, 같은 동네 출신 동갑내기이지만 친분이 없었고 당시에도 냉정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설이 맞서고 있다. 두 거장의 관계에 대한 스토리는 매우 매력적이어서 호사가들의 입맛에 맞추어 온갖 설들이 회자된다. 아무튼 레벤후크의 집행으로 카타리나의 파산은 쉽게 가결되었다. 당시 법원에서 심사했던 기록이 아직도 남아 당시 카탈리나의 구술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 후 카탈리나는 11명의 자식들과 함께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5~6년 고우다 친정집에서 살다가 당시 가족 연금이 나오는 브레다시로 이주를 했다. 그 당시 자식은 8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렇게 어린 자식들의 부양과 채무 관계로 평생을 고생했던 카타리나는 1688년 1월에 신부의 마지막 성사를 받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1696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미술품 경매에 100여 점이 매물로 나왔는데 그중에 베르메르의 작품 21점이 거래되었다. 그중에 가장 비싼 작품은 175 길더에 매매된 '우유 따르는 여인'이었고, 두 번째로 비싼 작품은 155 길더에 매매된 '저울질하는 여인'이었다. 그 외의 작품들은 81~28 길더에 경매되어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 그 경매가는 생전에 판매한 가격보다 낮은 금액이었다. 죽어서 오히려 시장가격이 하락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우유 따르는 여인'의 경매 역사를 짚어보겠다. 그 작품은 그 후 1701년 홀란드 경매에 다시 나와 320 길더에 낙찰되었고, 다시 1710년 반 회크 경매에 나왔는데 그 경매에서는 오히려 126 길더로 낮은 가격에 낙찰되었다. 당시 베르메르와 동시대의 화가인 도우의 작품이 6000 길더였다고 한다. 그리고 1765년 노이빌레 경매에서 560 길더, 1798년 야곱 데브로인 경매에서 1550 길더, 1813년 모일만 경매에서 2115 길더에 낙찰되었다. 그 후 19세기 중반 뷔르거에 의해 베르메르의 작품이 재평가되면서 그의 작품 가격은 급등하였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아직도 렘브란트 세계에 도취되어 있어서 베르메르의 완전한 재평가는 50년 이상 더 걸렸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들어섰을 때 네덜란드는 발 빠르게 정부차원에서 베르메르의 작품 대다수를 구입했는데 '우유 따르는 여인'이 당시 50만 길더를 호가했고, 전체 구입 금액이 170만 길더였다고 한다.
츨처 위키피아 / 베르메르 작 / 진주 귀걸이 소녀
그리고 '진주 귀걸이 소녀'는 현재 헤이그 마우리츠 하위스 왕립 미술관에서 국보급으로 소장하고 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처럼 그 작품의 가격을 책정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작품 훼손 우려 때문에 베르메르 작품이 세계 순회 전시를 할 때도 그 작품만은 진품을 반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베르메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진주 귀걸이 소녀'는 정상적인 경매나 매매를 거치지 않고 200여 년 동안 어느 누군가의 손을 거쳐 다니다가 1881년 작가의 이름도 모른 채 헤이그 경매에 나왔는데 보존 상태가 엉망이어서 낙찰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미술품 수집가인 아놀두스 데 톰베는 전문가답게 베르메르의 작품일 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하늘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그는 2 길더 30센트에 손을 들었는데 더 이상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돈으로 몇 만 원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가 아니었다면 살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놀두스 데 톰베는 0.18평방미터 밖에 안 되는 걸레 같은 작품을 조심스럽게 가슴을 조이며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왼쪽 상단이 베르메르의 서명 문양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한창 재평가를 받고 있던 베르메르의 작품이 확실했다. 도깨비 시장 뒷골목 같은 데를 돌아다니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처지였던 진주 귀걸이 소녀는 신의 계시를 받아 톰베에 의해 운명처럼 부활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은 관계로 1902년 자신의 미술품 다수를 헤이드 왕립 미술관에 기증을 했는데 바로 그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주 귀걸이 소녀는 그 후에도 계속 복원 작업을 하여 지금의 모습을 찾았다. 처음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을 복원했다고 한다. 청순미와 관능미와 그리고 묘한 신비로움을 발산하는 그녀는 이제 모나리자처럼 만인의 연인이 되었다. 그 여인은 실제 모델이었을까, 그러면 그녀는 누구일까, 베르메르의 집에 일하는 가정부일까, 자신의 큰 딸일까, 아니면 누구의 소개로 케스팅 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상상 속의 여인은 아니까. 평소 예술적 영감이 촉발될 때 문득 떠오르는 모티브로서의 이미지는 아니까. 그런 상상들이 많은 이의 마음을 일렁거리게 했고, 그런 상상을 서사로 만들어 소설이 탄생하여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자신을 화폭에 그리고 있는 베르메르를 뒤돌아보는 맑고 어디가 연약해 보이는 눈동자, 아직 젖살이 살아 있는 볼, 관능적으로 조금 벌리고 있는 붉은 입술, 귓볼 아래 음영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진주 빛 귀걸이. 회화의 세계는 환상이든 실제이든 상관없이 감정선에 파동이 일으키게 하여 여러 가지 상상을 낳게 한다. '우리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체험'하게 하는 이 한 폭의 작품은 그래서 미술이 왜 인문학이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상상의 영역을 뛰어넘은 영혼의 응축된 결과물은 아닐까.
화폭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마치 마술 상자와 같은 세계로 한 발 내딛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작품을 우리에게 남긴 베르메르, 그는 말없이 기나긴 침묵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있다. 베르메르의 재발견은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고흐나 모딜리아니의 재평가는 사후 길어야 20년 만에 이루어졌고, 죽은 후 재평가를 받는 화가를 비롯해 음악이나 문학 세계에도 여럿 있지만 그 재평가의 기간은 고작 한 세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베르메르는 200년이나 지난 후에 그것도 고고학 유적을 우연히 발견하듯이 전혀 생각지도 않은 가운데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발견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고고학적 발굴이었고, 사실 그에 대한 연구는 고고학 유적지를 조사하는 것처럼 섬세하게 이루어졌다. 문화예술계에서 이처럼 드라마틱한 발견이 있었을까. 그 흔한 편지 하나도 없고, 일기와 낙서 같은 자필 문서도 없고, 주변의 화가나 귀족이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의 간접적인 언급도 없고, 친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레벤후크의 유물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은 일안반구도 없고, 비평가나 예술과 관련된 인쇄물에도 없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없는, 그 많은 자식들 중에 상속과 연관된 기록이나 이야기도 없고, 정말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사실 그가 가상의 인물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행정 문서를 이 잡듯이 뒤져서 찾은 그 베르메르라는 이름이 이 35개의 그림을 그린 그 베르메르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19세기에도 실제 존재했다고 한다. 그 정도의 놀라운 미술세계를 펼친 화가가 철저하게 무명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 위대한 화가가 델프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근면 성실하고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어떤 신념에 의해 자의적으로 은둔한 것도 아닌 데도 어느 누구에게도 눈이 띠지 않았다는 것은 현재의 사고능력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배신감마저 드는 것은 왜일까. 정말 실존했던 인물이 맞긴 맞는 것일까. 떠들썩하게 살만큼 산 렘브란트와 비교하면 너무나 다른 단순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족적을 찾아 네덜란드 델프트를 찾았고, 그의 작품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연구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작품 중에서 많은 작품은 당시 유행했던 풍속화의 패턴을 따라가고 있지만 그중에 몇 작품에서는 범상치 않은 예술적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그 감출 수 없는 감각이 이 글의 주제인지도 모른다. 풍속화는 대중문화의 중요한 상품이었기 때문에 그 시장에서 먹고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에 맞는 상품을 내놓아야 했을 것이다. 위에서 강조했듯이 그는 철저하게 현실주의자였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아웃사이더였다. 대가족을 지키는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충만했고 길드 조합장을 하기 위해 반듯하게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항상 내면에서 떠도는 어떤 욕망이 일렁이는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소리가 모아져 응축되었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아니면 목마른 사자처럼 붓을 들고 이젤 앞으로 달려들었다.
말년에, 세상이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 때 그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깊은 회한에 빠졌을 것이다. 비관주의자였던 그에겐 미래가 암울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왔던 지난 시간을 원망하며 매일 술을 마셨다. 내 삶을 누가 보상하겠는가.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았는가. 하늘 높이 날고 싶었던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그는 이런 원초적 질문을 자신에게 퍼부었다. 그런 실존적 질문 앞에 그는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진주 귀걸이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랑의 뜨거운 감정을 경험해 보지 못한 그에게 그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의 무의식에서 열망하던 사랑의 한 형태인지 모른다. 사랑의 감정이 만들어 낸 상상 속의 여인은 아닐까. 그는 술이 취할 때 지금은 사라진 그 소녀를 열망하지 않았을까. 그 상상 속에 매몰되어 이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봉착했고 덧없는 이 현실로부터 도피를 시도했는지 모른다. 나를 찾아 떠나야 한다. 자유를 찾아 이 공간을 떠나리라.
베르메르는 오늘도 저 깊은 교회 무덤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사실 한번 깨우고 싶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렘브란트는 살아생전에 자타가 공인하는 거장이었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위대함에 대해 당연하지라고 생각하겠지만, 베르메르는 현재의 명성에 먼저 기절초풍할 것이 분명하다. 아 그럴 리가 없어! 그가 기절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다. 그의 위대함은 사실이니까. 이런 현상에 대해 그가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젠 그의 작품은 그의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메르의 깊은 침묵과 현재의 떠들썩한 평가는 묘한 아이러니를 일으키며 우리의 상식을 흔들고 있다. 미치도록 정체를 알고 싶었던 베르메르, 이제는 그가 무엇을 추구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