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는 10대 때 이미 천재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20대 때는 몽마르트르의 제왕으로 굴림하며 유럽 미술계를 이끌었다. 20세기 초 새로운 미술 사조가 들불처럼 일어날 때 피카소는 미술계의 나폴레옹이었다. 누구도 그의 등장에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 탄탄한 기본을 바탕으로 인상주의를 넘어 입체주의를 완성한 그의 예술적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여 미래의 미켈란젤로를 보장받았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젊은 예술가들과 그들이 창조하는 다양한 실험들이 넘쳐나던 몽마르트르 세계에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였고, 그를 신봉하는 추종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는 미술계의 현재이며 미래였다.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있었던 아마데오 모딜리아니는 죽을 때까지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를 떠돌던 보헤미안 삶에 만족해야만 했다. 피카소보다 3살 어린 모딜리아니는 가난과 알코올과 마약에 찌든 별 볼 일 없는 화가로서 마지막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검은 다이아몬드 같은 눈과 영혼의 친구 단테와 그리고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예술을 꽃피우지 못하고 가난한 보헤미안 삶을 영위하는 그에게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실낱같은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그를 사랑한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무명으로 사라진 것처럼 영원히 잊혔을 것이다. 후대에 명성을 떨쳤던 당시 젊은 예술가들은 그를 마지막까지 보듬어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가난한 보헤미안으로 남아 있었다. 살아생전 꽃을 피우지 못한 슬픈 모딜리아니, 인생의 종착점에 이르기까지 고독을 사랑한 모딜리아니, 살아서도 보헤미안이었고 죽어서도 보헤미안이었던 모딜리아니...
아마데오 모딜리아니는 1884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공업도시 리보르노에서 가죽과 석탄 등을 판매하는 상인의 막내아들로 세상에 태어난 그는 강인한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의 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모딜리아니의 검은 눈에 빠져버린 어머니는 형제 중에서 그를 유독 귀여워했다. 하지만 그는 몸이 약해 커가면서 여러 질병으로 고생을 했다. 사춘기 때는 결국 일명 예술가들의 병이라고 하는 폐결핵에 감염되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병치레를 한 탓인지 모딜리아니의 성격은 예민해졌다. 그런 막내아들을 어머니는 이탈리아에서 힐링에 좋다는 곳을 백방으로 쫓아다니며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그러한 가운데 모딜리아니에게 그림에 대한 재능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훗날 법대를 나와 사회주의 좌파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첫째 아들과 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가 되는 둘째 아들에서 보듯, 예술과는 거리가 먼 집안에서 모딜리아니는 특이한 존재였다. 또한 전형적인 유대인 상인의 기질을 가진 아버지는 또 어떠한가.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재능을 살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당신이 보기엔 막내아들은 화가가 될 자질이 충분했다.
정식 그림 교육을 받기 전부터 모딜리아니는 동네에서 많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용돈을 벌었다. 동네에서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소문이 자자했다. 열 살 정도 되는 꼬마 녀석이 동네 공원 벤치에 앉아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은 당시 예술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도시 분위기에서 아주 진기한 풍경이었다. 그런 아들이 자랑스러웠을 법도 한데도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밥 빌어먹을 게 뻔한 화가라는 직업을 받아줄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예술을 전혀 모르는 상인의 눈에는 초상화를 그리는 아들 녀석이 마뜩잖은 건 당연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다. 막내아들의 재능을 사장시킬 수 없었던 그녀는 모딜리아니가 다니던 중학교를 자퇴시킨 후 리보르노에서 유일한 미술학교에 입학시킨다. 그리고 그에 만족하지 못한 그녀는 모딜리아니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미술 학원을 찾아 나섰다. 다소 삭막한 도시 환경에서 예술과 관련된 소규모 아카데미도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그녀는 집요하게 수소문한 끝에 끌리엘모 미켈리가 운영하던 화방을 찾아냈다. 미켈리는 특별하게 내세울 게 없는 무명 화가에 불과했고 자신을 찾아오는 미술 지망생도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모딜리아니는 미술 공부에 전진했다. 미켈리도 그런 모딜리아니에게 자신의 모든 미술 지식을 전수해 주었다. 특히 데생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여 훗날 모딜리아니의 데생의 전설을 낳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남다른 재능을 발견한 미켈리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화가로서 길을 모색할 것을 조언했다. 회화의 기술적인 면도 탁월했지만 무엇보다 예술가로서의 감수성과 돌이킬 수 없는 미래를 발견한 것이다. 그의 관상이 화쟁이가 될 운명이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어떤 신기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모딜리아니의 범상치 않는 예술적 기질을 간파한 그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솟구치던 청소년기에 모딜리아니는 악마의 장난으로 폐결핵 진단을 받고 공해로 찌든 리보르노를 떠난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늑막염으로 고생하기도 했던 그는 리보르노의 오염된 공기를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폐가 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중간에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고생하기도 했는데, 이런 질병들로 인한 탓인지 그는 다른 또래보다 조숙했다. 아무튼 어머니는 공기 좋고, 결핵 치료도 할 수 있고 또한 미술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도시를 수소문 한 끝에 피렌체를 선택하고 모딜리아니를 유학 보내기로 결정했다. 남편의 사업 부진으로 형편이 예전 같지 않았지만 어떤 소명을 받은 듯 아내는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경제적 형편과 상관없이 남편은 반대를 했지만 아내의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 그리움에 사무칠 때 이 가족의 체취와 이 집의 향기가 의식의 언저리를 신기루처럼 어른거릴지 모르다. 아득히 먼 전설처럼... 그렇게 그는 집을 떠났다. 이탈리아에서 그나마 공기가 괜찮은 피렌체에 있는 미술학교로 전학한 그는 1년 만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로마를 거쳐 예술의 고향 베네치아로 가서 미술 공부를 더 한다. 미켈란젤로의 숨결이 살아있는 피렌체였지만 그의 예술적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보다 큰 도시인 베네치아로 가서 자신의 미래를 모색했던 것이다. 처음엔 폐결핵을 치료할 목적이 더 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운명적 미래가 그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니체, 바이런, 보들레르 그리고 로트레아몽에 빠져 있었다. 특히 로트레아몽의 '말도로의 노래'를 전부 외우다시피 했다. 그 시집은 30년 전에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어 출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세상이 좀 자유로워지자 간신히 출판한 희대의 악마의 시였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능가하는 작품이었다. 작가 자신이 이 시는 인간의 선을 지향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인간의 악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변론을 했지만 방법과 표현은 반항적이고 과격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청소년기의 예민한 문학도라면 한 번쯤 푹 빠져 봄직한 작품이었다.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나 다다이즘을 추종하는 급진적 예술가들은 이 작품을 자신들의 코란으로 추앙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러면서 데카당스 세계에 심취한 모딜리아니는 어떤 계시를 받은 듯 보다 예술적인 보헤미안이즘을 자신의 인생 모토로 삼았다. 이제 폐결핵 치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세계가 그의 전부가 되었다. 메피스토의 치명적인 유혹처럼 그는 이제 빠져나올 수 없는 보헤미안의 세계로 홀린 듯이 흡입되어 간다.
베네치아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어엿한 청년 화가로 성장해 있었다. 객지에서 자신을 뒷바라지해주던 어머니 없이도 혼자 생활할 수 있었다. 리보르노에서 일정한 생활비를 받고 있었지만, 이제 과시욕에 가득 찬 부자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작지만 수입도 창출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장구한 로마시대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는 동안 유럽 미술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 도시 곳곳을 여행하면서 본 수많은 작품들은 그에게 고전주의에 대한 개념을 각인시켰다, 유럽 미술의 정통성을 습득한 것이었다. 또한 조반니 파피니와 아르덴고 소피치 등 젊은 예술가들과 사귀며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탈인상주의와 미래파 예술의 태동을 접하면서 세기적 예술사의 흐름과 안목도 키웠다. 그리고 세잔, 로트렉, 고흐, 고갱, 르누아르 등 현대 미술의 정점을 접했고, 무엇보다도 문학과 철학에도 심취해 있었다. 로트레아몽주의자는 특히 단테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의 시를 가슴에 담고 다녔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이 아방가르드적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고전주의 정신과 문학이 중심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사실 문학은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의 초상화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하다. 아마도 그림에 대한 재능이 없었다면 그는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영향으로 인해 오히려 그의 예술적 감수성이 복잡해지는 결과를 낳아 훗날 안갯속을 헤매게 되는 단초가 되었는지 모른다. 문학과 미술의 재능의 경계선이 분명하듯 각자 감성의 영역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경계선이 모호할 경우 결코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없기 마련이다. 신은 피조물에게 시와 그림을 함께 주지 않는다.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는 피렌체에서 동거동락했던 선배 오스카 길리아에게 쓴 편지에서 ‘아름다움에는 고통스러운 의무가 따른다’라고 자신의 예술관을 고백했다. 이미 십 대 후반의 나이에 그는 고통스러운 보헤미안 삶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런 예술가적인 신념은 문학적 감수성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에밀 베르나르처럼 나이가 들어 젊었을 적의 신념을 상실하고 고전으로 돌아설 수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모딜리아니는 그전에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베네치아를 떠날 즈음에 그는 이렇게 편지를 쓴다. ‘베네치아에서 보낸 시간은 나에게 가장 귀중한 가르침을 주었다... 학습을 마치고 어른이 되어 나오는 것 같다... 베네치아, 메두사의 머리와 무한한 푸른 뱀의 거대한 청록색 눈에서 영혼이 길을 잃고 무한한 가운데 고양된 나를 발견한다...’ 이렇게 출사표를 던진 모딜리아니는 1906년 이탈리아를 떠난다.
몽마르트르. 당시 유럽 예술의 아방가르드를 주도하던 그곳은 세계 각지에 있던 젊은 예술가들을 끌어들였다. 20세기의 새로운 예술 사조들이 실험되는 창조력이 넘쳐나는 혁신적인 공간이었다. 무질서와 질서가 교차되는 그곳으로 멀게는 일본과 아메리카에서 가깝게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프랑스 파리의 허름한 변두리로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모딜리아니였다. 그렇게 그도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몽마르트르라는 블랙홀로 빠져들어 갔다. 1906년 1월, 22살 때였다.
보수적인 이탈리아를 떠나 자유가 넘쳐나는 몽마르트르에 정착한 모딜리아니는 신천지 환경에 적응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로 했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새로운 예술 작품을 쏟아내고 있는 몽마르트르는 화가만 서식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과 철학과 평론가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예술의 용광로였다. 그런 예술의 열기가 점령하고 있는 그곳에서 소심하고 여린 모딜리아니는 쉽게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없었다. 한동안 그는 몽마르트르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 기존의 신인상주의를 뛰어넘은 야수파와 입체주의와 표현주의 등 새로운 사조들의 그림들이 전시되던 앙브루아즈 볼라르, 글로비스 사고, 조르주 프티, 뒤랑 뤼엘 같은 화랑을 전전했고, 젊은 예술가들이 출입하던 술집 중에서 가장 유명한 라팽 아젤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미학적으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화가는 당시 거의 모든 젊은 화가들이 숭배하던 세잔이었다. 19세기말 파리의 인상주의자들에게 괄시를 받았던 세잔은 입체주의를 개척한 아방가르드의 시작점이었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리보르노에서 소 팔아 송금해 주는 생활비가 있었기 때문에 의식주 해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리보르노 집에서 자신이 치던 피아노도 가져와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녀 가난한 화가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피아노는 당시에도 부르주아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으로서 처음엔 그 유산계급의 물감이 빠지지 않았었다. 물론 1년도 안되어 피아노를 처분하고 거렁뱅이가 되었지만 햇병아리 시절에는 경제적 난관을 격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먼저 온 베네치아 친구들의 소개로 마지막까지 인간적으로 그를 사랑했던 친구 막스 자콥스, 앙드레 드랭, 앙드레 살몽, 모리스 위트리요 등을 만나 우정을 쌓았다. 그 친구들은 미래에 유럽 예술 문화의 주축이 되는 인물로 성장한다.
발라동의 모리스 위트리요 / 모딜리아니의 폴 알렉산드르 / 왼쪽 모딜리아니 그리고 피카소와 앙드레 살몽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앙드레 살몽의 회상에 의하면, 몽마르트르 어느 술집에서 화가 지망생에 불과한 모딜리아니는 그보다 3살 많고 이미 유럽 미술계에서 상당한 레벨에 올라 있던 젊은 화가인 파블로 피가소와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며 파리의 일상생활과 미술계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모딜리아니는 지갑을 집에 두고 외출한 피카소에게 급전 100수을 빌려주었고, 12년 후 피가소는 그 돈의 500배가 되는 100프랑으로 빚을 갚았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로 인해 둘은 얼떨결에 남다른 친분 관계를 가졌지만, 이기적이고 자만심 강한 피카소를 모딜리아니는 마지막까지 좋아하지 않았다. 혹자들은 이 둘의 관계를 모딜리아니의 전기 영화처럼 라이벌 관계로 설정을 하지만 모딜리아니가 생전에는 감히 피카소와 대적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딜리아니는 영원한 유망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피카소는 자신이 주도하여 허름한 피아노 폐공장을 개조해 만든 미술 작업실로 예술가들을 불러들였는데 그 건물의 별명을 따서 모임 이름을 '바토 라부아르(세느 강에 떠있던 세탁배)'라고 불렀다. 구속력 없는 느슨한 형태의 그 모임은 피카소가 그 집 출입구에 '시인들의 집합소'라고 적었다고 하여 시인들의 집합소하고도 불렀다. 미술과 문학과 철학과 그리고 음악 등의 새로운 사조를 주도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한 건물에서 작업도 하고, 서로 어울려 토론도 하고, 예술과 관계되는 여러 가지 과목을 공부하는 모임이었는데, 작곡가 에릭 사티, 앙리 마티스, 모리스 블랑맹크, 조르주 브라크, 모리스 프랑세, 막스 자코브, 여성 화가 마리 로랑생, 작가 장 콕토 등 당대의 영향력 있는 젊은 예술가들 다수가 참여했다. 물론 건전한 토론도 있었지만 예술가 특유의 데카당스적인 행위들이 정당하게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아직도 보들레르와 오스카 와일드 같은 탐미주의가 그들의 근간에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시인들의 집합소에 참여하지 않았다. 몽마르트르 신입생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에 대한 예술적 잠재력만큼은 고수는 고수가 알아보듯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인정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검은 다이아몬드 같은 빛나는 눈과 부르주아적인 준수한 외모와 반듯한 언행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임에 참여하고자 했다면 모두가 환영했을 것이다. 비록 아직 예술가로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었지만 예술가적인 기질과 인간적인 매력은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가입 조건은 충족하고도 남았지만 그는 그 세계를 거부했다. 소심하고 자격지심이 강했던 그는 화가로서의 자신이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때론 비참함을 느끼며 내면으로 자신을 숨겼다. 그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시간을 홀로 몽마르트르 언덕 길모퉁이에 있는 라팽 아질 같은 술집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모딜리아니에게서 술과 마약 그리고 여자를 논하지 않고서는 그의 내면세계를 알 수 없다.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던 그를 처음 유혹한 것은 술이었다. 처음 가져온 목돈도 바닥이 나고, 아버지의 사업도 어려워져 송금액이 줄어들자 폭탄 맞은 것처럼 급격하게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기대와는 달리 그림도 팔리지 않았다. 이제 홀로 돈을 벌어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지만 몽마르트르는 결코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그를 좋아했던 여러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화랑에 자신의 그림을 걸 수 있었지만 화상들은 그 그림들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간혹 팔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생활하기에 빠듯할 정도로 적은 금액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화구 값만 해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몽마르트르에 온 지 1년이 지날 무렵 그는 절망에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 겪는 이런 궁핍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무명 화가로서의 상황에 회의를 느끼고, 자기 불신에 빠지고, 때론 몇 주 동안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세상과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그리고 내면에서 속삭이는 사탄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수렁과도 같은 알코올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가난은 보헤미안으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끼고 달게 받아주는 자만이 보헤미안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영혼의 지하 세계에서 만난 친구가 모리스 위트리요였다. 14살 때부터 술주정꾼이었던 그는 모딜리아니가 오기 전부터 몽마르트르에서 유명 인사였다. 그의 어머니는 모델 출신이면서 그 유명한 툴루즈 로트렉의 정부이기도 한 화가 수잔 발라동이었다. 남성편력이 화려한 그녀가 18살 때, 위트리요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방치된 채 성장했다. 그가 십 대를 갓 넘길 즈음에 이미 알코올중독자로 판정을 받았으며, 수잔 발라동은 그런 아들에게 치료의 목적으로 그림을 가르쳤는데 자신의 피를 받은 아들은 자신보다 더 잘 그렸다고 하는 전설이 몽마르트르에 전해오고 있었다. 몽마르트르에서는 그를 모모라고 불렀으며 혹은 몽마르트르의 바보라고도 수군거렸다. 그가 화가가 아니었다면 그의 이력에 대해 누구도 몰랐을 것이고 그저 거리를 배회하는 알코올중독자이면서 부랑아로 취급했을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위트리요와 모딜리아니는 매일 만나 술을 마셨고 그것도 모자라 소동을 피우기 일쑤였다. 밤이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비틀거리며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는 그들의 모습은 쉽게 눈에 띄었다. 때로는 단테의 싯구가 모딜리아니의 목소리를 타고 골목에 메아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당쿠르 광장 파출소에서 구겨진 채로 발견되고는 했다. 어느 때는 파출소에서 소동을 부리다가 철창에 가두려는 상황에서 순경의 초상화를 재빠르기 그려 선물하고 풀려났다고도 한다. 모딜리아니의 데생은 빠르고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당시의 몽마르트르는 예술가들의 기행에 관대했기 때문에 그들의 만행은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딜리아니의 막역한 술친구였던 위트리요는 놀랍게도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으며 그보다 훨씬 오래(1955년 사망) 살았다. 여기서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의 삶도 한 편의 대하드라마였다.
당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술이 압생트라는 독주이다. 45도가 넘는 푸른색의 압생트는 몽마르트르에서도 예술가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었다. 값싸고 독해 금방 취할 수 있는 술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를에서 고흐가 즐겨 마셨던 술도 바로 압생트였고, 로트렉이 사창가 골방에서 마셨던 술도 압생트였다. 하지만 몽마르트르는 그 독주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강력한 마약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하시시라고도 불리는 인도산 대마초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의 정신세계를 각성하게 만드는 향정신성 물질로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강했지만, 인간의 욕망은 보다 더 강력한 물질을 원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은 아편이었다. 영국이 중국에 수출하여 결국 홍콩을 갈취한 바로 그 아편 말이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몽마르트르의 많은 예술가들은 압생트와 하시시를 애용했으며 그것보다 강력한 아편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말보로 같은 미국산 담배 값 보다도 싼 그런 마약류들이 몽마르트르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막스 자코브 마약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프랑스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폴 포트가 만든 '감상적인 파리 혹은 우리의 스무 살 이야기'이라는 시극에 나오는 마농이라는 여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 시극의 실제 인물이 마농이었다. 십 대를 갓 벗어난 이 여인은 예술가들이 득실거리는 몽마르트르에 거처를 마련하고 어느 퇴역 군인에게서 배운 아편 피우는 법을 활용하여 젊은 예술가들을 유혹했다. 문학과 미술에 관심이 많고 재능도 있었던 그녀는 보들레르 같은 탐미주의 시를 몽환적 세계의 문을 여는 주문처럼 읊조리며 예술가들의 여왕벌로 군림했다. 예술이라는 옷을 걸치고 때론 사려 깊고 때론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여린 여인 앞에 수벌들은 굴복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 유혹에 넘어가 그녀의 집에서 아편을 피우고 그녀 품에 안겼다. 그중에는 피카소도 있었다. 예술가들은 그녀를 음란한 독초라고 불렀다. 아편의 침공은 잠시지만 바토 라부아르 즉 시인의 집합소에도 덮쳐 마치 아편굴처럼 변질되었다고 한다. 앙드레 살몽은 어느 날 몽마르트르의 거리에서 마농과 마주쳤는데, 그녀로부터 모딜리아니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오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대화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모딜리아니의 외모에 매료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모딜리아니에게 그런 부탁을 전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술독에 빠져 지내는 가난한 화가를 색정이 넘쳐나는 마농의 집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사실 마농의 집은 아편 가격이 비싸 가난한 모딜리아니에게는 부담이 너무 컸다.
그렇다고 모딜리아니가 마약으로부터 소외될 위인은 아니었다. 그는 젊은 여인의 품에 안길 수는 없었지만 비교적 저렴한 피자르 집은 거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런 유행에 한발 물러서 있던 그는 예술가들의 트렌드와 같았던 마약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한발 내딛기 시작했다. 이미 알코올 세계에 빠져 있던 그는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환각 물질로부터 내성이 약한 그의 정신세계는 거부의 몸짓도 없이 녹아내렸다.
피자르를 주위에서 흔히 남작이라고 불렀다. 예술과 요트를 사랑했던 피자르 남작은 몽마르트르에 마약굴을 만들어 싼 가격에 아편과 하시시를 판매한 것은 물론이고 마약을 흡입할 수 있는 장소도 제공했다. 그 마약굴에는 아편과 하시시의 냄새가 진동했다. 나이 어린 여자들이 몸을 거의 들어내놓은 채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고, 우둔한 탐미주의자들과 영혼이 자유로운 예술가들 그리고 불량배들이 마약굴 곳곳에 자리를 잡고 환각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고뇌의 무거운 짐’을 진 화가이며 단테를 사랑한 문학청년 모딜리아니도 그 마약굴의 단골이 되어 수시로 그 집 문을 두드렸다. 특히 그는 하시시를 애용했다. 알코올과 하시시는 그렇게 모딜리아니의 영혼과 결합하였다. 질식할 것 같은 이 예술이라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안식처가 바로 그곳이었는지 모른다. 지독한 고독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술과 마약에 탐닉하면서도 그의 붓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시간은 그의 아픔을 달래주지 않으며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 도와주는 친구들이 많았다. 화가지만 문학도였던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중에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와준 친구가 당시 프랑스 예술계에서 꽤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막스 자코브다. 시인이면서 작가이며 미술 평론가인 그는 프랑스에 오는 예술가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며 안착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 가운데 파블로 피카소가 대표적이고, 모딜리아니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같은 유대인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자코브는 어리숙하고 착한 모딜리아니를 파리의 사교계에 연결시켜 주려고 노력했다. 몽마르트르에서 재능 있는 예술가들에게 멘토 역할을 자임했던 그는 모딜리아니에게서 범상치 않은 고수의 면모를 발견했는지 모른다. 그는 모딜리아니의 예술가적인 기질과 재능을 누구보다 깊게 파악하고 있었다.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는 가난한 그를 늘 안타깝게 눈여겨보고 있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진심 어린 조언과 비평을 해주었다. 몽마르트르를 떠나 몽파르나스로 이사 갈 것을 권한 것도 자코브였다. 하지만 그는 30여 년 후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어느 폐가에서 급성 폐렴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폐렴이 아니었어도 그는 그 지옥에서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첼리스트
그리고 그중에 한 명이 앙드레 살몽이었다. 작가이면서 저널리스트인 그는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를 드나들며 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운동에 대해 꾸준히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 피가소와 앙드레 드랭 등 당시 뛰어난 예술가들과 두터운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무명화가들과도 긴밀하게 접촉을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모딜리아니였다. 그는 예술 잡지 앙트라에서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지만 이를 어기고 모딜리아니의 작품인 '첼리스트'에 대한 평론을 썼다. 의뢰인 앙트라에서는 당연히 이 글의 인쇄를 거부했지만 앙드레 살몽은 편집장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출판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도 몽마르트르의 가난한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글들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모딜리아니라는 무명화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몽마르트르를 거렁뱅이처럼 배회하던 모딜리아니가 바로 그 모딜리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다시 주목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의 인지도가 한순간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비록 경제적 사정이 세간의 주목만큼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도 화상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처음 파리에 와서 자리를 잡아갈 때 실질적으로 모딜리아니를 후원해 준 사람은 폴 알렉상드르였다. 파리에서 피부과를 개업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의사였던 그는 화가인 앙리 두셔의 소개로 모딜리아니를 라팽 아젤에 만난 후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이끌려 후원자를 자처한다. 특히 문학에 남다른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매우 만족했다. 아직 햇병아리 개업의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그의 그림 몇 점을 구입해 주고 자주 만나 관계를 가져갔다. 폴 알렉상드르는 미술에 관심이 많아 모딜리아니뿐만 아니라 여러 화가들과 관계를 가지며 지원을 해주었다. 처음이자 거의 마지막인 개인 후원자의 도움을 받았지만 모딜리아니의 생활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고, 그마저도 자신의 무절제한 생활로 인해 신뢰를 상실하여 관계가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 이탈리아 부르주아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고, 몽마르트르의 전형적인 보헤미안으로 변모를 한 모딜리아니는 비록 삶은 늘 궁박했지만 그래도 주변에는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이지적이며 부끄러움이 많고 순수'했던 그를 몽마르트르의 여인들이 그냥 두지 않은 것은 당연했는지 모른다. 그의 초기 작품 중에 ‘모우드 아브란테스’ 초상화의 주인공도 그의 연인이었으며, 그의 자식을 잉태한 후 미국에 가서 낳았다는 설이 몽마르트르에 떠돌아다녔다. 특히 누드화를 그리기도 했던 그의 주변에는 항상 여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 누드모델 중에 질베르트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라면 모두 사랑했고, 그들의 자식을 잉태하는 것이 인생의 꿈이었지만 그들 중에서도 모딜리아니는 단연 첫 번째였다. 그렇게 예술가들 주변에는 그들을 흠모하는 여인들이 서성거리며 누드모델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고, 간택을 받아 좀 더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질베르트는 진심으로 누구보다 모딜리아니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때론 하찮은 거리의 여인으로 대접하는 나쁜 남자 모딜리아니의 냉정함에 기가 죽을 만했지만 그녀는 끈질기게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들의 관계를 지켜보던 몽마르트르 인들은 헌신적인 그녀를 향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쌍한 질베르트... 사실 모딜리아니가 카사노바 기질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복잡한 여자관계로 인해 화가로서의 평판보다 파렴치한으로 몰려 매장되었을 것이다. 그는 최소한의 남자로서의 욕망만을 가지고 있는 가난한 보헤미안에 불과했다. 주변의 많은 여자들은 그의 공허함을 채워주지 못했다. 술과 마약에 취해 있는 상황에서 여자의 육체까지 취한다면 그의 영혼은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폴 베를렌처럼 타락한 예술가의 경계선에서 그는 곡예를 하고 있었다.
1909년이었다. 그는 몇 년간의 몽마르트르 생활에 지쳐 있었다. 화가로서의 미래도 암울했고, 그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세기 초 과학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문화예술 세계에서도 새로운 사조들이 들불처럼 들고일어나고 있던 역동적인 창조의 시대에 그는 한발 물러서 있는 비주류 무명 화가에 불과했다. 몽마르트르는 모든 예술 장르가 뒤엉켜 일찍이 인간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용광로 같은 뜨거운 예술적 영감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그런 아방가르드 세계에 그는 동화되지 못하고 홀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외로운 늑대를 자처했다. 특히 이탈리아 출신 화가들이 모여 만든 미래파(Futurist Manifest) 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탈리아 시절 가까웠던 동료들은 독불장군인 모딜리아니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그가 죽을 때까지 화해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화풍에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고수는 아니었다. 인상주의들에게 괄시를 받으며 파리를 떠난 세잔처럼 자신의 신념이 대세에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런 강한 자의식에도 불구하고 정립되지 않은 혼돈과 방황의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언젠가 라팽에서 친구들에게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일갈하기도 했지만 그 말을 심도 있게 들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알코올 중독자의 주사로 치부해 버렸다.
그렇게 언더그라운드 생활에 지친 그는 그해 여름 리보르노 집에 가서 잠시 머물렀다. 귀향한 패잔병처럼 그의 영혼은 허물어져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지만 몸도 많이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방탕한 생활에 폐결핵도 악화되어 요양이 필요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파리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다웠던 두 눈은 안쓰러울 정도로 푹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화가로서의 삶은 빌어먹을 짓이라고 마뜩잖아하던 아버지의 말이 옳았는지도 몰랐다. 법대를 나온 큰아들과 공대를 나온 두 째 아들은 자신들이 알아서 사회생활을 훌륭하게 하고 있었지만 화가의 길을 가고 있는 막내아들은 한시도 마음을 놓게 하지 않았다. 남편의 말을 들었다면 막내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후회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닐리아니도 당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다 큰 자식을 한 발 뒤에서 안쓰럽게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각자 바쁘게 사는 형들이 찾아와 그와 식사를 같이 하면서 진심 어린 격려를 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가족의 걱정을 뒤로하고 막내아들은 집에 온 지 3개월이 다가올 무렵 다시 집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잠시 몸을 추스르고 몽마르트르로 돌아온 모딜리아니는 막스 자코브의 고언에 따라 거처를 몽파르나스로 옮겼다. 그곳은 한때 빈민가였지만 이제는 예술가들의 새로운 허브로 성장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언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던 몽마르트르를 떠나 심기일전하기 위함이었다. 몽마르트르나 몽파르나스나 젊은 예술가들이 득실거렸지만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고자 활동 장소를 과감하게 옮겼고 그것도 모자라 회화에서 조각으로 종목도 바꾸었다. 평소 조각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모딜리아니는 화상인 폴 기윰의 주선으로 루마니아 출신인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소개받아 일 년 동안 조각을 배운다. 당시 조각계의 신성으로 주가가 올라가고 있던 브랑쿠시는 모딜리아니가 조각에도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미학적 방향성도 비슷하여 중고 조각 신인인 그에게 큰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렇게 모딜리아니는 3년 동안 조각에 빠져 있었다. 낮에는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로통드와 돔에서 관광객의 초상화를 그렸고 밤에는 조각에 매진했다. 가난했던 그는 조각 재료인 석재를 살 돈이 없어 공사장을 전전하며 버려진 돌을 주어왔다. 어느 날에는 그것도 부족하여 엠마누엘 공두앵과 공사 현장에서 절도를 한 적도 있었다. 둘이서 그 무거운 돌을 들고 어두운 골목길을 몇 시간 동안 운반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작업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세계에 몰입되어 갔다. 사실 그는 파리에 왔을 때 회화보다는 조각에 더 관심이 많았었다. 조각 아카데미에 등록을 하고 정식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경제적인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에만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한 후 브랑쿠시 공방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조각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의 경제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사실 더 바닥을 칠 형편도 안 되었지만, 조각 작업은 그림보다 더 많은 공간과 비용을 필요로 했기에 그의 생활은 최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눈물 젖은 조각 작품이 화상 폴 기욤의 주선으로 화랑에 간혹 전시되기도 했지만 자신의 그림 속 인물처럼 길쭉하고 눈동자도 없는 무표정한 두상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놀랍게도 그중에 한 작품은 80년 후 한화로 645억 원에 경매된다. 그리고 그가 남긴 27개의 조각품은 현재 작품 당 수십 억 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이 놀라운 결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무튼, 조각에 몰두하면서도 모딜리아니는 여전히 압생트와 하시시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종류의 인간들이 출입하는 로통드에서 그는 매일 미친 듯이 1프랑도 안 되는 초상화를 크로키했고, 그리고 오르테스 데 사라테와 사임 수틴과 모리스 키슬링 같은 가난한 화가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그들로부터 암울한 보헤미안 삶에 위안을 얻었다. 또한 항상 그렇듯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는 테레스 같은 여인들이 그의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그의 이십 대 시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 일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라테와는 유독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풀 네임이 마누엘 오르티스 데 사라테인 그는 이탈리아에서 출생해 칠레에서 성장했는데 놀랍게도 외할아버지가 칠레 대통령까지 지낸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화가가 되기 위한 일념으로 10대 때 가출하여 이탈리아를 거쳐 파리로 온 자수성가 형 화가였다. 집안 내력이 흡사한 폴 고갱처럼 그는 몽파르나스의 허름한 아틀리에에서 헌신적인 아내와 함께 살면서 가난한 무명화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 피카소와 친하게 지내 그의 작업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도 모딜리아니처럼 하시시 중독자였다. 모딜리아니는 공허함이 밀려올 때면 종종 사라테의 집에 방문하여 그와 함께 하시시를 피웠다. 그의 아내도 모딜리아니를 무척 좋아하여 두 하시시 중독자, 무능한 두 남자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아주었다. 모딜리아니는 작고 보잘것없는 그 아틀리에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두 부부의 가난한 사랑이 그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주었는지 모른다. 훗날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겨울, 그의 아틀리에에 석탄을 날라다 주고, 마지막 모습을 함께 한 것도 바로 사라테였다. 동료 화가이기 이전에 그들은 마음을 주고받는 진실한 친구였다. 그들의 우정은 몽파르나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모이즈 키슬링 / 프리다 칼로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시절에 그린 풍경화 몇 개만 제외하고 평생 동안 초상화만 그렸다. 모이즈 키슬링, 자크 립스츠, 디에고 리베라, 레온 인덴바움, 폴 기욤,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 그리고 그 위대한 피카소 등 친한 화가나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해서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가난한 그를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었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연유로 해서 당시 쟁쟁했던 예술가들의 초상화가 현재 매우 중요한 자료로 남겨져 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이 사임 수틴의 초상화이다. 당시 몽파르나스 시데 팔기에르라는 동네에서 일본인 화가 후지타 쓰구지와 사임 수틴 그리고 모딜리아니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다들 궁핍한 생활을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정이 돈독했다. 러시아에서 온 유대인 사임 수틴은 기인 성향이 강해 자신의 몸에 물 묻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평상시에도 씻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목욕탕에도 당연히 가지 않았고 손톱과 발톱도 깍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서 냄새가 진동할 만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거부감을 일으킬 정도의 냄새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시 가난한 예술가들이 잘 씻고 다닐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야설이 나도는 것은 유독 더 씻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그나마 외모에 신경을 좀 쓰는 모딜리아니가 보기에는 정말 지저분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그런 특이한 성향은 화풍에도 그대로 드러나 도살장에서 사지가 잘린 소를 천정에 걸어놓고 그림을 그려 악취가 시데 팔기에르에 진동을 하게 만들었다.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 전성시대에 도축된 소를 그렸던 화가들이 의외로 많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화가가 그 유명한 렘브란트였다. 그런 렘브란트의 영향인지 수틴도 도축된 소 외에도 칠면조, 닭, 토끼 그리고 가오리 사체까지 작품의 모델로 삼았다. 그런 동물을 구해와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그렸으니, 냉장고도 없던 당시 고기 썩는 냄새로 인해 경찰서에 신고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도 초상화만 그리는 기인적인 성향이 다분한 화가였지만, 그가 보기에도 도축된 그림에 집착하는 사틴의 성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틴은 그것도 예술이라고 강하게 피력을 했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10개 이상의 동물 사체 그림을 남긴 그를 이해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모딜리아니는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순박한 청년 사틴을 동생처럼 좋아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두 개의 매력적인 수틴의 초상화를 보면 그의 마음을 잃을 수 있다. 아무튼 습작으로 소 사체를 그리던 당시보다 10년이 지난 1923년에 그린 소 사체 그림은 92년이 지난 후 2000만 달러에 경매된다. 그 밖에도 21세기에 1000만 달러가 넘는 작품들이 다수였을 정도로 그도 사후에 재평가받은 화가 중에 하나였다. 그렇다고 생존 당시 모딜리아니처럼 무명은 아니었다. 그래도 꽤 잘 나가던 화가였던 그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으며, 결국 종전 2년 전에 게슈타포의 그물망을 피해 다니다 위장이 천공될 정도의 위궤양으로 인해 급사한다. 만약 모딜리아니도 20여 년을 더 살았다면 유대인 대학살이 벌어지던 광기의 유럽에서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수많은 유대인 예술가들이 대학살의 촘촘한 그물망에 걸리기도 하고, 능력이 되면 미국이나 영국으로 망명하는 고난의 역사를 겪었지 않았던가.
사임 수틴 모딜리아니의 몽파르나스 시절 로통드를 빼놓고서는 그를 논할 수 없다. 로통드는 파리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대중적인 선술집이었다. 파리인은 물론이고 해외 여행객들도 여행 코스처럼 한 번은 찾아오는 유명 장소였고, 그만큼 사람들의 인연의 맺어지는 장소이면서 소통의 장소이기도 했다. 당연히 로통드는 몽파르나스의 가난한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였고 당연히 모딜리아니도 매일 찾는 단골이었다. 몽파르나스의 부랑자인 모딜리아니는 그 가게 앞에서 안면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드로잉해 주고 술을 얻어먹기도 하고, 운이 좋은 날에는 관광객의 초상화를 드로잉 해서 1프랑을 벌기도 했다. 그는 항상 누군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인물 데생은 빠르고 정확해서 로통드의 명물이었다. 그렇게 서푼짜리 초상화를 팔아 밥보다 술을 먼저 사서 마셨다. 때론 술에 취해 미친 듯이 화를 내며 행패를 부리기고 했고, 때론 격노하면서 자신의 데생을 발기발기 찢어버리기도 했다. 그저 그런 술주정뱅이 거리의 화가가 그가 받은 몽파르나스의 처음 평판이었다. 그가 현재 조각가이면서, 몇 년 전 '첼리스트'라는 작품이 살롱 데 쟁데팡당에 출품할 정도로 몽마르트르에서 꽤 촉망받는 화가였다는 사실을 로통드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의 데생은 비록 눈부셨지만 크로키 이상은 아니었고 미술 애호가들도 전혀 의미를 두지 않았다. 철저하게 무명이면서 가난한 화가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로통드에서 항상 그렇듯 룸펜처럼 데생을 하고 있을 때 당시 잘 나가던 앙드레 드랭이 나타나 그의 앞에 앉았다. 그의 명성은 몽파르나스에서 예술 좀 한다는 사람이면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통드에 모습을 드러낸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술주정뱅이 화가와 유명한 화가와 함께 앉아 열띤 대화를 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몽마르트르의 황제 파블로 피가소가 찾아와 모딜리아니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발각되었다. 이런 이색적인 풍경은 순식간에 회자되었고 모딜리아니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초상화나 그려주고 파는 별 볼일 없는 화가로만 알고 있던 모딜리아니가 피카소와 친하다니...
사실 앙드레 드랭이 모딜리아니를 찾아온 것은 그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몽파르나스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그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보다 4살 많은 앙드레 드랭은 몽마르트르 시절, 가까운 시일 안에 명성을 얻을 것으로 내다보았던 모딜리아니가 이렇게 조각만 하고 거렁뱅이처럼 산다는 소문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다. 한때 몽마르트르에서 촉망받던 젊은 화가의 모습은 사라지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거리의 화가로 변한 그의 모습을 보고 착잡한 심정이 들었던 그는 모딜리아니에게 조각을 그만두고 회화에 전념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그의 재능은 조각이 아니라 회화에 있다는 것은 드랭은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조각보다 회화가 그의 미래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제 자신은 조각가라고 여기고 있던 모딜리아니는 드랭의 강력한 권고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한때 화가였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는 현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것이다. 그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젤 앞에 앉아 있던 화가였다. 그렇다고 조각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둘 다 겸비할 수는 있지만 굳이 조각을 원한다면 지금은 회화에 전념하고 어느 정도 지명도가 높아지면 그때 가서 조각을 해도 늦지 않았다. 드랭의 주장이 그것이었다.
1914년 6월이었다. 조각 세계에서 홀대를 받은 모딜리아니는 몇 년 동안의 외유를 접고 다시 회화로 돌아왔다. 그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 중에 하나는 앙드레 드랭이나 주위 친우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지난겨울, 심하게 각혈을 하고 의식을 잃어버리는 상태에서 우연히 방문한 사라테에게 구출되는 사건이 벌이진 후 결핵에 안 좋은 돌먼지를 피하기 위한 일련의 예방 차원이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은 세계 1차 대전의 전운이 파리 하늘을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거리에는 전쟁이 임박한 것을 알리는 정치 집회가 매일 벌어지고 있었다. 그 무거운 분위기는 몽파르나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모딜리아니는 초상화 자판기처럼 로통드에서 데생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6월 어느 날 운명처럼 어느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이름은 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였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 많은 그녀는 영국의 '뉴 에이지'라는 잡지의 파리 특파원 자격으로 몽파르나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강성 페미니스트였던 그녀는 뉴 에이지에 문학과 예술 평론에 관한 글을 꾸준히 기고해 오던 프리랜서 작가였는데,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예술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칼럼을 보내라는 임무를 받고 마치 종군기자처럼 예술의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곳은 세계 각지에서 온 기인들이 벌이는 기행의 천국이었다. 아방가르드와 보헤미안이 뒤섞여 때론 폭력적이고 때론 퇴폐적인 분위기가 자욱한 몽파르나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정숙한 여성성으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보다 강한 여성성이 필요했고, 그런 적임자는 바로 급진 페미니스트 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였다.
그렇게 모딜리아니와 헤이스팅스는 자연스럽게 로통드에서 처음 만났다. 물론 인연이 결부된 우연한 만남은 아니었다. 평상시처럼 로통드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딜리아니는 조각가 오시프 자드킨의 소개로 헤이스팅스가 있던 테이블로 갔다. 몽파르나스에서 가장 보헤미아적인 모딜리아니는 그녀의 가장 적합한 취재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인터뷰 같은 의례적인 분위기였지만, 그들의 눈빛은 빠르게 뜨거운 그 무엇을 소통하고 있었다. 미인형은 아니었지만, 처음엔 커리어 우먼에게서 뿜어 나오는 지적인 신여성의 자유분방함이 모딜리아니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러면서 진한 여성성도 발산하는 묘한 관능적 매력도 뒤따라 그의 마음을 한순간 빼앗아 버렸다. 그동안 자신을 거쳐 간 그 어느 여자보다도 그녀는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자신의 우상인 단테가 죽도록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이며,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신곡의 주인공으로 배역을 준 바로 그 베아트리체이지 않는가. 더구나 그녀는 문학도답게 단테를 잘 알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단테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그들은 무언가 신의 계시처럼 이런 인연을 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헤이스팅스도 그런 그의 마음을 잃어내기라도 하듯 그에게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치명적인 매력에 빨려 들어갔다. 검은 다이몬드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삶에 지쳐 있는 예술가의 고뇌와 그렇지만 단테를 사랑하는 문학적 인식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예술가 중에서도 진심으로 예술가다운 삶을 영위하는 이 아름다운 청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지적인 여성이라면 그런 남성을 한번쯤은 깊게 안아주고 싶을 욕망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 모딜리아니에게 1914년이 중요한 이유는 헤이스팅스이라는 여인을 진정으로 열렬하게 사랑했고, 그와 동시에 비수처럼 날아온 예술적 영감이 차갑게 식어 있던 그의 예술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다는 점이다. 사랑과 예술을 동시에 얻은 것이다. 헤이스팅스로 인해서 그의 예술적 에너지가 화산처럼 폭발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그에게 그림을 그릴 것을 섹스 하 듯이 속삭였다. 당신의 그림을 보고 싶어요 모디. 모딜리아니의 예술적 기질과 재능을 누구보다 안타까워 한 그녀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그에게 뮤즈의 화살을 쏜 것이다. 그녀의 초상화를 14개나 남겼는데 그중에 누드화도 있다는 것은 그것을 방증하고도 남는다. 누드화를 그릴 정도로 그들은 사랑했고 예술적 영감도 불살랐다. 그의 작품 활동의 절정기를 추동하게 한 힘은 바로 헤이스팅스였다는 게 미술사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라고 한다. 앙드로 살몽의 표현에 의하면, 베아트리체의 침대에서 벗어나자 그의 천재성이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 1914년 유럽의 정세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하고 가겠다. 그해 8월, 그러니까 두 연인이 사랑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난 2개월 후 드디어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했다. 그 전쟁은 신제국주의가 팽배해진 유럽의 정치질서를 재편하는 나폴레옹적인 힘의 논리가 지배한 전쟁이었다. 프로이센을 통합한 비스마르크의 후예이며 부국강병에 성공한 빌헬름 2세의 독일 제국과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세력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동맹국을 이루어, 유럽의 쌍두마차인 프랑스-영국 동맹국과 지구의 중심에서 제국주의의 패권을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식민국 세르비아의 비밀결사대에 의해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후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세르비아에 전쟁선포를 했고, 동맹국 독일이 곧이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면서 전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촉발은 오스트리아가 했지만 사실은 독일에 의한 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프랑스 파리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지는 않았지만 흔히 서부전선이라고 일컫는 전선이 파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시 분위기는 고조되어 있었다. 유럽 각국에서 온 몽파르나스의 예술가들도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갔다. 독일과 러시아로 간 예술가들은 이제 적이 되어 동고동락하던 도반들에게 서로 총을 쏘아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가난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던 예술가들은 이제 전쟁터에서 화약 냄새를 공유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특히 절친인 모이즈 키슬링은 프랑스 외인부대에 지원 입대하여 전투 중 부상을 당하고 제대한다. 이런 와중에 모딜리아니도 프랑스-영국 동맹국으로 돌아선 이탈리아 군대에 지원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신체검사에서 퇴짜를 맞고 돌아오고 말았다. 몽파르나스 친구들에게는 군대에 가서 조국을 위해 분연히 싸우겠노라고 열변을 토했지만 그는 폐결핵 환자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런 폐병 환자가 전쟁에 참전하면 오히려 전력이 약화된다는 사실을 신체 검사원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어수선했지만 예술은 태고적부터 이어온 관성에 따라 마치 멈추지 않은 진자처럼 에너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파리의 미술시장은 활황이었다. 수많은 군인들이 서부전선 참호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소식이 전해질 때 몽파르나스는 침울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술 시장의 열기는 식지 않았던 것이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전쟁을 하면서도 문명을 후퇴시키지 않고 오히려 발전시켜 왔듯이 이번 전쟁도 그 연장선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동양적 사고와는 다른 그들만의 법칙이 존재했다. 서로 각각 1대 1로 싸우기도 하고, 동맹국을 형성해 싸우기도 하면서, 오늘의 적이 내일의 적이 되는 변화무쌍한 세력 다툼이 중세 이후 숨 쉴 틈 없이 이어져 왔다. 그 결정판이 세계 2차 대전이지만, 세계 1차 대전도 석유와 철강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그동안 보지 못한 신무기들이 등장하여 각축을 벌인 결과 상상을 초월하는 사상자를 양산했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놀랍게도 문명의 에너지는 꺾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전쟁과 문명, 그 역학관계는 분리하여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참호에서도 인간의 영감은 촉발하여 신의 계시처럼 예기치 않는 어떤 형상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헤이스팅스의 존재로 인해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에 몰입하던 모딜리아니는 점차 자신의 화풍을 정착시켜 갔다. 큐비즘과 야수파들이 득실거리던 파리 미술 세계에서 그는 대세를 좇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화풍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다. 모두가 새로운 사조에 빠져 열광할 때 그는 과거로 돌아가는 듯 한 단순한 세계를 지향하며 기다랗고 좀 기이한 초상화만을 줄곧 그렸고 본격적으로 누드화에 매달렸다. 그의 진가는 파리 미술 시장에서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비록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꾸준히 전시회에 출품하여 인지도를 쌓아갔다. 당시 화상인 폴 기욤의 적극적인 영업 활동과 겹쳐져 그의 작품은 미국에 수출할 정도로 주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물론 피카소나 드랭에 비하면 아직도 멀었지만 그래도 놀라운 비약이 아닐 수 없었다. 서서히 영원한 유망주에서 탈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밝은 미래와는 달리 그들의 애정 행각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모딜리아니와 헤이스팅스는 몽파르나스에서 공인하는 커플이었지만 장미의 전쟁처럼 그들의 사랑은 애증이 점철되는 격한 사랑이었다. 싸움의 발단은 여러 가지였다.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폭발해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함께 살았지만, 곧 생활고에 시달려 각자의 일상 공간으로 돌아가기를 수차례 겪었다. 폴 기욤으로부터 매달 일정한 수입이 들어왔지만 미술 재료비와 모델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술과 하시시까지 구입해야 하는 모딜리아니 입장에서는 돈은 여전히 궁했다. 헤이스팅스도 잡지사에서 송금해 오는 월급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그것 또한 어느 때는 한 달 이상 지체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생활은 항상 무언가 부족하고 불안한 상황이었다. 사랑도 궁핍하면 행복해지기 어려운 법이다. 사실 두 사람은 생활인으로서는 낙제점이었다. 둘 다 무능했다. 아무튼 이런 경제적인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현실적인 불만들이 겹쳐지면서 관계는 서서히 식어갔고, 중요한 것은 각자의 독특한 개성이었다. 둘 다 개성이라면 한가닥 하는 개성의 소유자들이어서 사소한 것에서도 서로 부딪치기 일쑤였다. 더구나 문제는 모딜리아니의 폭력성이었다. 하시시는 나름 절제를 했지만 음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모딜리아니의 주사 중에 하나는 폭력성이었는데, 헤이스팅스와 한판 붙으면 그 폭력성이 여지없이 폭발하였다. 물론 헤이스팅스도 당돌한 여자였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고 맞섰으며 그로 인해 그들의 싸움은 격렬한 격투기를 방불케 했다. 언젠가 모딜리아니 친구가 그의 아틀리에에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두 사람의 한바탕 치도곤을 치른 듯 아수라장이 된 아틀리에의 소파에서 둘이 부둥켜안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노라고 전했다. 그들의 폭력은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같은 일종 변태적 행위라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심하게 싸운 뒤에도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랑하는 연인으로 돌변했으며 그런 다정한 모습이 몽파르나스에서 자주 목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의 종착점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한바탕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제는 금방 화해로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에는 가해자인 모딜리아니가 헤이스팅스의 집을 찾아가 사과의 제스처를 취해도 그녀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문을 열어준 후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그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얘기는 결별 후 헤이스팅스의 회고담에서 나온 일화인데, 어느 날 모딜리아니와 심하게 싸운 후 자신의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을 때, 그날 밤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문 앞에서 그 절규를 들으면서도 끝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아마도 그날은 날이 셀 때까지 문 앞에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모딜리아니의 광적인 사랑에 지쳐버린 그녀는 그렇게 그와의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이별은 항상 괴로운 법이다. 물론 모딜리아니의 입장에서는 다른 서사가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남녀 관계는 정말 모른다. 인간계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관계가 남녀 관계의 갈등 구조이지 않는가.
그들의 격렬했던 사랑은 결국 2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그래도 그들의 강한 개성을 감안했을 때 2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이별 후에도 헤이스팅스가 몽파르나스를 떠난 것은 아니다. 아직 특파원이란 보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남아 예술가들을 접하면서 열심히 글을 썼다. 그 둘의 관계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만 더 하고 가겠다. 남녀관계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서 이성적으로 납득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그들이 파국 선언을 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모딜리아니는 헤이스팅스의 절친이자 동생뻘 되는 캐나다 유학생 시몬 티루라는 이십 대 여성과 사귀었고, 헤이스팅스도 역시 밀라노 출신이며 로댕의 제자인 알프레도 피나와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 후, 시몬 티루는 모딜리아니의 아이를 가졌다고 그에게 얘기했지만,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강하게 손사래를 치면서 그 아이는 누구 것이라고 자세하게 증거까지 제시했으며, 이에 시몬 티루는 사생아를 낳아 탁아소에 맡겼다. 그 후 몇이 지난 1921년 그녀는 20대를 넘기지 못하고 파리의 허름한 자선병원에서 사망한다. 의대에 다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 혈혈단신 사바나 같은 파리에 와서 결국 캐나다 집으로 가지 못하고 불의의 객이 되고 만다. 그녀의 사망원인은 결핵이었다. 후일담이지만 티루의 아이는 입양되어 나중에 신부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에 대한 사실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미술사에서는 모딜리아니의 여성편력으로 보아 친자가 타당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1917년으로 돌아와서 시몬 티라가 아이를 낳을 즈음에, 모딜리아니는 프랑스 파리 미술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여성 화상 바실리에프 마리가 마련한 파티에서 행패를 부리는 사고를 저지른다. 그해 1월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고 의가사 제대 한 보르주 브라크를 위로하기 위한 파티가 마리의 집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당시 헤이스팅스와 헤어진 후 알코올에 절어 살던 모딜리아니를 초대하지 않은 반면 그녀와 피나는 초대를 한 것이었다. 피나는 당시 유력한 조각가였기 때문에 초대받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모딜리아니를 왕따 시킨 이유는 그의 화려한 주사 때문이었다. 그렇게 파티가 한창일 때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모딜리아니가 흥분한 모습으로 파티장에 나타났고, 파티장의 분위기는 한순간 냉각되었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열렬하게 사랑했던 헤이스팅스와 그녀의 새 애인인 피나와 마주친 상황, 모든 사람들은 그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도 적대시했던 피나와 격하게 시비가 붙었다. 주먹다짐은 물론이고 소문에 의하면 권총까지 동원되었다고 한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자 막스 자코브와 피카소가 광분한 모딜리아니를 밖으로 끌어내 진정시켰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아무튼 모딜리아니와 결별한 헤이스팅스는 몇 년 후 영국으로 돌아가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을 했다. 문학세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고 때론 출판사와 심하게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그저 그런 마이너 작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강성 페미니스트이면서 때론 남성들에게 파므파탈 같은 성향도 보이기도 했던 그녀는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고 1943년 암 투병 중 자기 집에서 취사용 가스를 틀어놓은 채 조용히 눈을 감는다.
헤이스팅스와 티라, 두 여인과 폭풍 같은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면서도 놀랍게도 모딜리아니는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거침없이 작품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땅속에서 들끓던 용암이 폭발하듯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뜨거운 영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격한 사랑과 이별이 그 에너지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그는 미친 듯이 그림에 매달렸다. 강렬한 감정의 변화가 그의 예술적 상상력을 증폭시켰는지 모른다. 단테와 베아트리체도 그랬고, 릴케와 살로메도 그러지 않았던가. 이성에 대한 어떤 감정의 요동은 예술적 영감을 자극하여 범상치 않는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술은 그렇게 혼란스럽고 난해한 세계이다. 다르게 설명하면, 이젤 앞에서 그는 자유로웠고, 안식을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 전속 화상이던 폴 기윰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업이 주춤할 때 모딜리아니는 절친 모이즈 키슬링의 소개로 폴란드 출신 젊은 화상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를 만난다. 아직 풋내기인 그는 모딜리아니와 의기투합하여 하루에 15프랑을 지급하고 그림 재료도 무상으로 제공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기거하면서 누드화 작업을 하도록 배려를 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한다. 1917년, 세잔을 비롯해 피카소, 마티스, 드랭 등 당대의 유력한 화가들이 참여하는 앙데팡당 전시회에 모딜리아니의 작품도 전시하도록 수완을 발휘하여 지명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미술품에 대한 안목과 비즈니스적인 역량은 아직 부족하지만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 그러한 파격성은 결국 제동이 걸렸다. 즈보로프스키는 베르트 웨일이라는 조그만 화랑을 빌려 모딜리아니의 개인전을 기획했다. 모딜리아니로서는 생애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무명 생활을 정리할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전시회의 주제는 누드화였다. 그것도 여성의 음모가 그대로 드러난 누드화였던 것이다. 이런 노골적인 누드화는 당시 아방가르드 시대라고 하더라도 대중적인 보편성을 담보하기에는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아직도 전시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당연히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경찰에서 폐쇄 명령을 받았다. 시민의 신고가 아니었다면 그래도 일정을 마칠 수 있었지만 상황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런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며칠 동안 전시회 개방을 두고 경찰과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문을 닫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베르트 웨일 화랑 측에서 다섯 작품을 구입해주었다고 한다. 이 전시회는 비록 폐쇄당했지만 모딜리아니의 작가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계기기 되는 것만큼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당시 전시 되었던 작품 중에 '어깨너머로 시선을 둔 누드'라는 작품은 약 100년 후 소더비 경매에서 1억 5천만 달러에 낙찰이 된다. 지구상에서 5번째로 비싼 그림이면서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누드화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시 화랑에 전시되지는 않았지만 '누워 있는 누드'라는 작품은 그보다 비싼 1억 7천만 달러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가장 비싼 누드화
몽파르나스의 보엠 모딜리아니는 30살이 넘어서야 뜨거운 사랑도 해보고 이별의 아픔도 겪으면서 화가로서의 위상도 오르기 시작했다. 전쟁 와중에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는 초상화 데생만 하는 거리의 화가가 아니었다.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모딜리아니는 마지막 여인을 만난다. 헤이스팅스를 처음 만난 것처럼 잔느 에뷔테른도 로통드에서 처음 만났다. 아직 20살이 안된 앳된 그녀는 몽파르나스에서 가까운 아카데미 콜라로시 미술학교에 다니는 미술학도였다. 파리 센에마른에서 보수적인 로마 가톨릭 전통을 지키고 있는 집안의 둘째인 그녀는 오빠 앙드레 에뷔테른의 도움으로 예술적 생동감이 넘쳐나는 몽파르나스에 드나들었다. 자연스럽게 그곳 분위기에 젖어들던 그녀는 친구와 함께 로통드에 갔다가 모딜리아니를 알게 되었다. 로통드에서는 이런 만남은 흔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더구나 화가들 세계에서는 서로의 동업자 정신이 남달랐기 때문에 처음 만나기도 쉽고 가까워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사람의 관계는 급속하게 발전하기 마련이었다. 그들도 그랬다. 미술학도와 기성 화가의 만남은 마음먹기에 따라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는 여건이 되었고, 그들은 그런 감정의 변화를 감추지 않고 처음부터 불이 붙었다. 12살 차이가 났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잔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모딜리아니의 누추한 집에 기거하기 시작했다. 동거에 들어간 것이다. 부모에게 말해보았자 돌아올 것은 극열한 반대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딜리아니도 처음엔 이런 사실을 주위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자랑스럽게 떠벌릴 내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잔느의 집에서 격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나이도 많고, 가난하고, 방탕한 알코올중독자가 어리고 순진한 딸의 남자가 되는 것을 찬성할 부모는 없었다. 어느 누가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커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그들의 사랑은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이가 생겼다.
사실 모딜리아니도 이제 보헤미안 삶에 지쳐 있었는지 모른다. 사랑의 쓴맛도 맛보고, 더더욱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은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벌써 파리에 온 지도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폴 기윰과 즈보로프스키의 도움으로 작품의 판로가 다양해져 희망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궁핍에서 금방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폐 상태도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잔느를 만난 그는 안식처를 찾은 것처럼 그녀의 품으로 스며들어 갔다. 놀랍게도 그는 잔느를 만나고부터 술을 자제했고 하시시도 피지 않았다. 이제 쉬고 싶었는지 모른다. 날카로운 욕망의 파편들이 깨져 날아다니던, 혼돈으로 점철되었던 그의 내면은 이제 서서히 질서가 잡혀가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이 안정되어 가자 작품에 대한 영감도 유연해지고 그것은 작품으로 표출되었다.
개인 전시회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모딜리아니의 이름이 파리 미술시장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18년 봄,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을 무렵 독일이 새로 개발한 열차포로 파리를 폭격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몽파르나스 인들은 술렁거렸다. 특히 외국에서 온 예술가들은 각자 피신 방법을 찾느라 경황이 없었다. 그때 즈보로프스키가 기재를 발휘하여 프랑스 남부에 있는 휴양 도시 니스로의 여행을 기획한다. 사실 파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전쟁으로부터의 피난도 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결핵 증상이 심해지고 있어 요양이 필요했고, 잔느의 출산도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여행의 목적은 충분했다. 그리고 니스에는 인상주의의 대가 르누아르가 살고 있어서 시간을 만들어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 여행에는 즈보로프스키 부부와 사임 수틴, 그리고 일본인 화가 후지타가 동행했다.
지중해안에 자리 잡은 니스는 바로 옆에 위치한 칸과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휴양 도시였다. 니스에서의 생활은 모딜리아니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자신의 폐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사랑하는 잔느가 항상 옆에 있었고, 어려울 때 자신에 힘이 되어 준 수틴과 후지타도 있었고, 자신의 작품에 무한 신뢰를 보내는 즈보로프스키도 곁에 있었다. 불안정했던 보헤미안 삶은 사라지고, 평범한 일상이 천국처럼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파블로 피카소와 앙드레 드랭과 조르지오 드 키리코 등 동료들이 니스로 내려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모딜리아니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그들과 잔느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 지역에 사는 여러 부류의 주민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그해 11월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다시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10여 일 후 잔느에게서 딸이 태어났다. 1918년 11월 29일이었다. 모딜리아니는 리보르노에 있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딸에게 축복해 줄 것을 바란다는 편지를 썼다. 세상물정 모르는 막내아들을 홀로 파리로 보낸 후 항시 노심초사 하던 어머니는 손녀의 탄생에 진심 어린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언제나 듬직했던 두 형도 동생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모딜리아니가 신분증을 분실하여 잔느의 이름으로 출생 신고를 했는데 그것은 법적으로 모딜리아니의 성으로 기록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수잔 발라동이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위트리요를 출생 신고한 것과 같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출생신고를 끝냈는데, 어떤 경로로 알았는지 알았는지 모르지만 이 소식은 파리에 있는 잔느의 집에 전해졌다. 자식까지 낳은 마당에 눈감아 줄 수도 있었지만 잔느의 부모는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몽파르나스를 처음 데려갔던 오빠가 그 먼 거리를 거쳐 니스로 내려와 잔느를 만나 설득했다. 딸을 사생아로 만들어 탁아 시설로 보내고 새롭게 출발할 것을 회유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할 것이라고 협박까지 했다.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한순간의 불장난으로 치부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잔느는 그런 강권에도 모딜리아니와 딸을 포기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파리로 가려고 했으나 직접적인 피해국인 프랑스는 아직도 전시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더구나 모딜리아니가 분실한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 다음 해 5월까지 니스에서 기다려야 했다. 바로 그사이에 모딜리아니 일행은 니스 옆에 있는 칸으로 여행을 갔다. 즈보로프스키가 칸에서 알게 된 어느 화가의 도움으로 르느와르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당시 르느와르는 시력이 거의 상실한 70대 후반의 노인이었다. 사실 그해 12월에 르느와르는 사망한다. 유럽 미술계의 거장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르느와르는 자신을 찾아오는 화가들은 항상 반겨주었다. 거장으로서의 풍모와 평판을 중요시하고, 자신의 세계를 열어놓고 삶을 영위했기 때문이었다. 즈보로프스키와 함께 르느와르 저택을 방문한 모딜리아니는 다소 형식적인 환대를 받았다. 그들은 초면이었고 르느와르가 무명화가인 모딜리아니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늘 찾아오는 화가들처럼 대했을 것이다. 이런 형태의 만남은 일상적이었다. 슈베르트도 같은 빈에 살던 자신의 우상인 베토벤을 어렵게 찾아가 만났을 때, 귀도 먹고 늙고 병들어 누워있는 베토벤과 무슨 심오한 대화를 나누었겠는가. 두 거장의 이 유명한 만남에 대한 후일담이 없는 것을 보면 베토벤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기대치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모딜리아니도 그랬다. 당대 최고의 거장을 만났지만 자신의 세계와 너무나 다른 거장을 접하고 실망만을 남긴 채 그 저택을 나왔다고 한다. 이젠 붓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한 르느와르는 평생을 밝은 세상에서 밝은 그림을 그렸고 항상 반듯하게 살아왔지만, 젊은 모딜리아니는 오직 해괴망측한 초상화만 고집했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학대하며 그늘진 곳에서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접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만남에 대한 일화도 중요하게 회자되지 않는 것을 보면 슈베르트의 예처럼 특별한 감동적인 서사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두 사람의 공통점은 누드화를 많이 남겼다는 점이다.
1919년 말년의 모딜리아니
1919년 5월 드디어 모딜리아니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미술계에서의 그의 위상은 니스에 가 있던 1년 사이에 상당할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언론에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도 여러 편 실렸고, 유진 데스케이브 화랑에 전시되어 있던 작품이 드루 호텔에서 시행된 경매에서 처음으로 낙찰되기도 하는 등 그의 주가는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는 영국의 맨사드와 힐 같은 유력한 화랑에서 그의 작품을 전시하여 비평가들로부터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아방가르드 시대에 아방가르드적이지 않는 그의 독특한 작품은 그들에겐 아주 매력적이었다. 입체파와 야수파가 점령한 파리의 미술시장에서 그의 존재는 언더그라운더에 불과했지만 오히려 이런 반대급부적인 관계로 인해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평가는 프랑스 보다 다른 나라에서 더 높았다. 모딜리아니는 영국 화랑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방문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미국 뉴욕에서도 그의 그림 수십 점이 전시되는 등 이제는 국제적으로 그의 이름 오르내렸다. 35살에 긴 무명시절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에 온 지 13년 만에 궁핍과 술과 마약과 그리고 지독한 고독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자포자기나 다름없는 마지막 벼랑까지 다다랐지만, 하늘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암울한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실망과 소외와 처절하게 싸워야 했던가.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긴 터널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 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는 보헤미안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져도 될 시점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명성이 마티스나 피카소처럼 올라가지는 않았다. 유럽 미술계가 주목할 정도의 수준이라고 해야 옳고, 수입도 조그만 아파트를 임대할 정도로 좋아졌을 뿐이었다. 그래도 궁핍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날아왔는지 모른다. 먼바다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날아왔지만 이젠 기력이 다 빠져나가 더 이상 날지 못하는 펠리컨처럼, 그렇게 삶의 에너지를 잃어갔다.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뇌수막염 증상까지 보이기 시작한 것이 그즈음이었다. 몽파르나스로 돌아온 직후 잔느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 이를 자랑하기 위해 수척해진 모습으로 로통드에 가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주량은 훨씬 줄어 있었다. 아 글쎄 잔느가 둘째를 임신했다니까 허허... 그해 7월, 그는 잔느와 합법적으로 결혼하기 위해 서약서도 쓰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평범한 삶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잔느의 집에서는 막내딸을 폐병 환자에게 시집을 보낼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관계를 거부했지만, 지금은 병을 들먹이며 결혼을 반대했다. 잔느가 집에 찾아가 간곡하게 간구했지만 끝끝내 그녀의 부모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 파리의 예술계에서 모딜리아니에 대한 화려한 전력이 자자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에 감추려야 감출 수도 없었고, 이미 고정관념화 된 그에 대한 인식을 희석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잔느의 부모는 마지막까지 모딜리아니를 받아주지 않았다.
모딜리아니 자화상 겨울이 오고 있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각혈은 심해지고 혼절까지 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그가 사랑했던 로통드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그의 몸은 피폐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는 그는 집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임신한 잔느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렘브란트나 르느와르처럼 너무 많은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들도 있지만, 적어도 화가라면 자화상 한두 개는 그리기 마련인데 그는 그때까지 자신을 한 번도 그리지 않았었다. 수백 개의 사람 얼굴은 그리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폐가 다 썩어가고 뇌세포도 쪼그라들어 다시는 재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미약하지만, 마지막 불꽃이 꺼지기 전에 그는 실오라기 같은 열정을 불사르며 자신의 모습을 점점이 화폭에 매우고 있었다. 붓끝은 가늘게 떨렸지만, 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원하는 대로, 그렇지만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을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는 눈동자 없는 두 눈, 하지만 입 꼬리는 약간 올라간 듯 무언가 초연함을 들어내고 있는 표정, 그래 그 얼굴이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는 완성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상념에 젖어들었을까. 희미하게 흔들리는 촛불처럼, 그의 영혼은 이제 이 공간에서 영원의 향기를 쫓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시대의 조류에 섞이기를 거부하고, 부와 명성을 거부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육신까지 거부하며 이렇게 생의 마지막 자화상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명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자신을 불태웠는가.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자신의 손을 잡고 리보르노의 후지진 골목에 있는 미켈리의 화방을 찾아갔던 어머니.
그 무렵, 몽파르나스의 대모 마리 비실리예프가 불과 2년 전 자신의 집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던 모딜리아니 집으로 병문안을 왔다.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모디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이빨은 다 빠지고 그 많던 머리카락은 머리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 속삭였다. 다 끝났어 마리... 마지막까지 모딜리아니를 보살폈던 오르티스 데 사라테도 이렇게 전했다. "내게는 이제 뇌가 한 조각밖에 남아 있지 않아. 나는 이제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해를 넘긴 1월, 세상 모두가 새해를 맞아 들떠 있던 어느 날, 그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모딜리아니의 아파트에 난방용 석탄을 대주던 사라테가 잠시 자신의 일 때문에 1주일 정도 그 집에 가지 못했는데, 그날 그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혼절해 있는 모딜리아니와 그 옆에서 간호하다 지쳐 쓰러져 있던 잔느를 발견하고 자선병원에 급하게 입원시켰다. 임신 8개월의 잔느는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처가로 보내졌다. 그리고 모딜리아니는 며칠 후 결핵에 의한 뇌수막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모이즈 키슬링은 이탈리아 국회의원이 된 모딜리아니 형에게 전보를 쳤고, 파리의 모든 예술가들에게도 죽임이 전하였다.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에서 그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 불쌍한 보헤미안에 대해 모두 한 마디씩 했다. 거리의 부랑아, 알코올과 하시시 중독자, 로통드의 터줏대감, 거리의 화가, 몽파르나스와 몽마르트르의 영원한 연인, 가난하지만 항상 벨벳 차림이었고, 줄기차게 흔들림 없이 캔버스에 그렸던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 로통드에서 취기 오른 입에서 목 놓아 터져 나오던 단테의 시, 헤이스팅스와의 격렬한 러브 스토리, 그리고 잔느와의 애절할 사랑....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모딜리아니를 안고 끊임없이 울부짖으며 그의 입에 키스를 했던 잔느는 다음날 부모집에서 결국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 함께 그의 뒤를 따라갔다. 슬픔에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그녀는 죽음처럼 무거운 침묵에 빠져 있었고, 그런 그녀의 불길한 행위를 감지한 식구들이 주의를 기울였지만 결국 그녀는 5층에서 뛰어내렸던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은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잔느의 장례식은 10명 정도만 참석할 정도로 쓸쓸했다. 모딜리아니의 친구들은 잔느를 그의 옆에 묻혀줄 것을 그녀의 부모에게 부탁했지만 결국 거절당했다. 죽어서도 잔느의 결혼을 거절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년 후 친구들의 계속된 부탁으로 잔느의 부모는 그것을 허락했다. 이제 영원히 그 둘은 함께 할 수 있었다. 뱃속의 아이도.
모딜리아니의 묘 그리고, 살아남은 모딜리아니의 딸 잔느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살던 고모 플로렌스 모딜리아니에게 입양되었고, 성장한 잔느는 작가가 되어 자신의 아버지의 전기를 섰다. 파리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모딜리아니의 묘비에는 ‘그는 성공의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현재도 잔느와 나란히 누워있는 그의 묘에는 누군가 갖다 놓은 꽃이 항시 놓여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삶의 여정은 슬픈 전설처럼 잊히지 않고 전해진다. 그리고 하나에 100프랑도 안되었던 그의 작품들은 이제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회화 중에 하나가 되었다. 작품들의 경매 합계 금액을 따졌을 때 아마도 모딜리아니 보다 비싼 화가는 지구상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방가르드 시대에 그는 왜 그 질서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남들처럼 적당히 보헤미안 생활을 하다가 세상의 질서 속으로 되돌아가면 되었을 텐데 그는 왜 마지막까지 그런 불안한 삶을 자처했을까. 13년 동안 그는 파리에서 무엇을 위해 생존했을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학대하고, 때론 폭력적이고, 때론 원초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그는 무엇을 갈구했을까. 도대체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런 질문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는 그렇게 돼먹은 인간이었다. 그의 삶에 대한 해석은 그에 대한 무례일지도 모른다. 그는 숙명적으로 보엠을 사랑했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도 지고, 후회도 하지 않았다. 그 세계에는 모딜리아니처럼 고집스럽고 유별난 사람들이 많았다. 모딜리아니는 아웃사이더로 남는 것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영혼의 자유에 따라 사유하고 행위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인생의 의미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신념은 종교처럼 그를 지배했다. 로트레아몽이나 니체 그리고 단테 같은 인물들이 메피스토처럼 그를 현혹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그를 존경할 수는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듯, 한 발짝 물러나 그의 삶을 담담하게 관조하는 것이 그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보고 있어야 한다. 감성적인 쓸쓸함도 없고, 연민도 작동하지 않고, 윤리적 잣대도 배제한 채 말이다.
* 앙드레 살몽의 '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