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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Oct 21. 2022

불멸의 이방인, 카라바조

아웃사이더

2009년 12월 22일 자 연합뉴스에 ‘르네상스 거장 카라바조 추정 유해 회수’라는 제목을 단 기사가 실렸다. 12월 21일 이탈리아 중부 포르토 에르콜레라는 도시의 어느 교회 납골당에서 카라바조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되었으며 이탈리아의 인류학자 지오르지오 그루포니 교수가 이끄는 발굴단에 인계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추후 밝혀졌지만, 탄소연대 측정과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카라바조 유해가 확실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2016년 4월 14일에는 ‘프랑스 다락방에 발견된 1570억짜리 카라바조 작품’이라는 기사가 연합뉴스를 비롯해 국내 유수의 많은 신문사에 실렸다. 아마도 1570억 원이라는 거액에 눈이 번쩍 띄었는지 모른다. 그 그림은 2년 전, 그러니까 2014년 4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도시 툴레즈의 어느 공동주택 다락방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집주인에 의해 미술품 감정사인 에리크 튀르갱에게 넘겨졌다. 그는 2년 동안 비밀리에 그 그림을 손질하고 진품 여부를 확인한 후 세상에 내놓았다. 그 그림의 제목은 전설 속에 떠돌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였다. 카라바조가 똑같은 제목의 그림을 두 점을 그렸는데, 다름 한 점은 로마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쌍둥이 그림은 400년 동안 개인의 손에 떠돌다 21세기에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카라바조가 이렇게 세상의 이목을 끈 것은 경이적이었다. 1610년에 사망한 카라바조는 350년이 흐른 20세기 후반 지하에서 잠자고 있던 드라큘라 백작처럼 다시 살아났다. 그동안 문화사적으로 폄하되어왔던 17세기 바로크 양식이 이탈리아에서 재평가되면서 그 시대의 시발점이었던 카라바조를 소환했던 것이다. 그 당시 로마를 미치게 했던 것처럼 카라바조는 무덤에서 나와 21세기의 우리를 열광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이탈리아는 유로화 전 100,000리라 지폐의 주인공에 카라바조를 등장시켰고, 세계 각국에서 순회 전시회(2016년 일본과 홍콩까지 만 왔다)를 주최하는 등 카라바조 열풍을 주도했다. 유해 발견과 1570억 원 운운하는 기사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는 이유는 그 연장선이었다. 위대한 카라바조를 위하여!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1564년 르네상스의 정점이었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90년의 생을 마감하면서 16세기 후반 그 시대의 열풍도 식어가고 있었다. 이제 화려했던 르네상스 시대는 임무를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또 다른 시대를 갈망하고 있었다. 당시의 회화를 비롯한 문화예술은 르네상스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멀리 나가 있었고, 또한 층층이 저변에 축척되어 있었으며 이제 보다 진보된 문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기에 카라바조라는 듣보잡 화가가 등장하여 톨릭의 핵심인 로마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어수선했던 로마는 불안정한 사회를 일신시키기 위해 새로운 문화운동(롬바르디아 문화운동)을 추구했으며 카라바조의 특이한 화풍은 그런 흐름을 타고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극명한 명암 대비와 극사실주의적인 화풍은 르네상스의 성스럽고 평면적인 회화 형태에 익숙했던 전반적인 인식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라파엘로와 카라바조의 작품을 놓고 비교하면 전혀 다른 화풍을 실감할 수 있다.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회화 세계의 방향이 급 커브를 튼 것이다. 바로 바로크 시대의 시발점이었다. 물론 카라바조가 르네상스를 이끈 라파엘로처럼 바로크 시대를 주도했다고 할 수 없고, 당시에도 전국구적인 인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새로움을 추구하는 당시 사회적인 환경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결과론적이지만 그의 화풍은 주세페 데 리베라, 잔 로렌조 베르니니, 프랑스 화가인 조르주 드 라 투르, 시몽 부에, 그리고 네덜란드 회화의 전성시대를 연 렘브란트와 베르메르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미술사적인 사실이다. 논리, 조화, 진리 같은 고정관념을 벗어난 독특하고 좀 괴이한 어떤 형태를 원하는 욕구가 바로 바로크 정신이었다.


미켈란젤로도 보통 까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지만, 카라바조가 최소한 미켈란젤로처럼 마지막 선을 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자신의 우상을 뛰어넘는 예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후예인 루벤스나 렘브란트 보다 더 유명세를 탓을 것이다. 이런 평가는 그의 삶의 여정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으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의 인생이 평탄치 못함으로 해서 이런 위대한 작품이 탄생했다고 해야 옳을모른다. 예술적 영감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세상으로 표출되는 하나의 추상적 형태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애완견처럼 사회의 질서에 길들여진 그였다면 그의 예술은 영원히 땅속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 플라톤을 공부했고 단테의 작품을 완독 하는 등 르네상스적 인간으로서 철학적 배경을 형성했지만, 카라바조는 인문학적 학습을 받지 않고 교양도 없는 야생마와 같았다. 어느 미술사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칠고 야수와 같았다고 한다. 그런 막돼먹은 인간이 어떻게 우리를 미치게 하는 세상창조할 수 있었을까.


카라바조의 풀 네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디 카라바조이다.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호적에 올린 것을 보면 당대에 미켈란젤로라는 존재가 대중적으로 얼마나 유명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처럼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의 공통적인 소망인지 모른다.


 카라바조는 1571년 9월 29일 밀라노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그해는 미켈란젤로가 90년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해였다. 그런 인연을 두고 후세의 미술사가들은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지만 당시 카라바조에게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아무튼, 카라바조의 아버지 페르모 메리시는 한때 밀라노 공국을 지배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가문의 집사의 일원으로서 주로 건축물 관리를 했다고 한다. 귀족의 집사로 일을 했다는 것은 기본적인 성정이 진지하고 성실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한옥 도편수 정도 되는 기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메리스가 결혼할 때 프란체스코 후작이 증인으로 서명했다는 것을 보면 서로 간에 돈독한 인간적인 신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카라바조는 어릴 때부터 귀족문화를 직간접적으로 경험을 하면서 성장하였고, 훗날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그 가문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당시 스포르차 가문은 1535년 밀라노 공국을 다스렸던 프란체스코 2세가 사망한 후 후계자가 없어 공작의 자리를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가문은 후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추기경도 배출하는 등 귀족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름 유복하게 살았던 그에게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이 닥친다. 1576년, 당시 지구 역사이래 가장 강력한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고 있었는데 특히 이탈리아 반도가 심했다. 밀라노에서만 사망자가 17,000명이나 발생할 만큼 페스트는 유럽을 악령처럼 뒤덮고 있었다. 바로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불로서 세상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역병으로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메리시 가족은 역병을 피해 고향인 카라바조로 피신했지만 그곳도 안전하지 않아 1577년 카라바조의 아버지가 페스트로 사망하고 곧이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숙부도 불의의 객이 된다. 하지만 페스트가 좀 잦아들 무렵 과부가 된 어머니 루치아 아라토리는 네 자식을 데리고 밀라노로 돌아와 궁박하게 살지만 두 자식을 여의고 곧이어 1584년 페스트로 인해 사망한다. 카라바조가 13살 때였다. 그것도 모자라 카라바조의 후견인이었던 프란체스코 후작도 페스트로 세상을 떠난다. 이제 그에겐 아무도 없었다.

 

페스트는 지구사적으로 볼 때 인간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준 박테리아이며, 인구를 단번에 감소시키는 원흉이기도 했을 만큼 신이 내린 천형의 전염병이었다. 페스트균에 감염되면 흔히 흑사병이라고 한다. 단어에서 보듯 몸이 검게 타서 죽는 병으로서, 고열과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죽임에 이르는 가혹한 병이었다. 카라바조는 6살이 되던 해에 처음 접한 것은 이렇게 고통으로 죽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었고, 사춘기 시절에도 어머니 역시 고통으로 죽어가는 것을 똑똑이 목도해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을 잘 그리는 자신을 귀여워해 주던 프란체스코 후작과 주변의 친족들도 고통 속에서 죽어갔으며, 그런 지옥과도 같은 세상은 감수성 예민한 카라바조의 정신세계를 질곡 속에 가두어 놓았다. 어린 카라바조에게는 너무나 끔찍한 세상이었다. 그런 정신적인 충격은 트라우마가 되어 그의 미래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페스트로 모든 것을 잃고 고아가 된 13살의 카라바조는 인척의 도움으로 당시 밀라노에서 명문 미술 도제 공방으로 명성이 자자한 시모네 페테르차노 공방에 입학한다. 천부적으로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카라바조는 페테르차노의 엄격한 시험을 거쳐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페테르차노가 단번에 카라바조를 받아준 것을 보면 그의 천재성은 이미 그 당시부터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밑그림도 없이 바로 캔버스에 물감 칠을 할 정도로 그의 재능은 탁월했다. 그것 때문에 스승인 페테르차노도 탐탁지 않아했지만 완성된 그림을 보고는 그런 불신을 불식시켰다고 한다. 식자는 스케치나 데생을 무시하는 것은 기본을 망각하는 건방진 방법이라고 질타하지만 엄격한 페테르차노도 인정할 정도로 그림의 완성도는 그런 방법론을 무색하게 했다. 밑그림 없이도 그의 붓은 거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압축적인 기법으로 인해 말년에 도망자 신세로 여러 도시를 전전하면서도 짬을 내 위대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우선 카라바조를 더 깊이 있게 알기 위해서는 트리엔트 공회의 롬바르디아 문화운동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1517년 사제였던 루터는 그해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가톨릭 교리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95개의 반박문을 붙이며 분연히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린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프랑스의 칼뱅이 1536년 '기독교 강요'라는 자신의 저서를 들고 종교개혁에 뛰어든다. 개인의 부의 축적은 신의 축복이라고 정당화하는 교리를 설파하며 당시 태동한 시민계급과 부르주아 층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은 칼뱅 파는 급속하게 팽창한다. 이런 종교개혁 바람은 독일과 네덜란드 그리고  잉글랜드까지 퍼져 큰 세력으로 확장되어 갔다. 가톨릭의 유럽은 종교개혁의 광풍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욕망의 화신 헨리 8세의 개인사, 그러니까 이혼과 재혼 문제로 로마 가톨릭과 갈등을 겪다가 결국 결별하면서 현재의 성공회가 만들어졌고, 1534년에는 스스로 수장을 자처하며 성공회를 영국의 국교로 선포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1,200년 동안 유럽의 정교를 지배하던 로마 가톨릭의 교세는 크게 위축되어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로마 가톨릭은 반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을 선포하고 공회의를 소집한다. 그러한 가운데 1528년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도회, 1534년에는 사제이며 은수자인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에 의해 예수회 같은 개혁적인 수도회가 설립되는 등 자정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공회의를 열자는 개혁적인 주교들의 주장을 묵살하였지만 그가 선종하자 바오로 3세가 등극하고부터 본격적인 공회의가 추진되었다. 바로 근대 가톨릭 교리의 기반이 되는 트리엔트 공회의가 열린 것이다. 뿌리 깊은 악습을 타파하기 위해 광범위한 개혁이 착수되었지만,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뒤따르기 마련이듯 트리엔트 공회의도 예외가 아니었다. 1545년에 시작해 18년이 지난 1563년에 종결되었으며, 그 사이에 교황도 3번이나 바뀌었다. 지난한 공회의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트리엔트 공회의 결과를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가톨릭사에서는 그 정도의 혁명적인 개혁 내용이 선포된 공회의는 없었다. 현재 가톨릭 교리의 상당한 부분이 그 당시 만들어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이게도 루터에 의해 가톨릭은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에서 돌이켜보면 당시의 개혁은 오리려 신교보다 더 개혁적이기도 했다.


그런 트리엔트 공회의의 결과로 밀라노가 속한 롬바르디아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발자취가 선명한 밀라노의 대주교 카를로 보르메오가 주도하여 문화 개혁이 추진되었는데 특히 회화에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 회화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향점과 개념을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볼로냐의 주교 가브리엘 팔레오티 추기경이 직접 집필한 '종교화와 세속화에 관한 논의'를 교과서를 삼았는데 일종의 작품의 규범을 제시한 규약집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전통을 적극 옹호하는 가운데 신자들의 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감동적인 성화를 주문한 것이다. 복음서에 충실하고, 성자의 행위를 모티브로 서술적이면서 연극적인 방법론을 요구했으며, 상상력을 배제한 리얼리티와 자연주의를 강조했다. 부연 설명을 하면, 자신을 위한 창작을 배제하고 자연의 사물을 모방하여 누구나 이해 가능한 회화, 궤변적이지 않고 대중적인 언어로 신앙적 해석이 가능한 그림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자비를 실천하고 신앙심을 발원시켜 감동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 이런 롬바르디아 문화운동은 전 이탈리아로 확산되었다. 당시 그 문화 운동을 실천한 화가 중에 카라바조가 견습공으로 있던 시모네 페테르차노가 대표적이었다. 사실 대다수 화가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문화운동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을 구입하는 부류는 대다수가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주문자 중에는 메디치 가문 같은 귀족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종교화를 거부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의 풍속화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런 종교화가 전 유럽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 가운데, 페테르차노 공방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던 카라바조는 공방을 자퇴하고 본격적인 전업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밀라노에서는 무명의 카라바조를 쉽사리 받아주지 않았다. 청운의 꿈을 가진 패기가 충만한 그는 종교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세속화에 전념을 하였는데, 그런 화풍은 롬바르디아 운동이 지배적이었던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하지 않는 것이어서 그림을 구입하는 사람은 제한적이었다. 가족도 없는 그는 몇 년 동안 밀라노에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근근이 살았다. 당연히 그의 천재성을 주목하는 사제나 귀족들도 없었다. 대부 격인 프란체스코 가문도 페스트의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밀라노에서 환쟁이로 산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1592년 카라바조는 드디어 밀라노를 떠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예술혼이 숨 쉬고 있는 로마로 떠난다. 페테르차노 공방 출신 몇 명과 프란체스코 후작의 친족 일부도 로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고향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는 로마라는 대도시에 빠르게 흡수되어 갔다.

초기 작품  풍속화

당시 로마는 페스트가 휩쓸고 간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르네상스를 주도한 로마는 폭력과 정의, 비열함과 신앙, 타락과 신성, 악당과 기사, 어리석은 결투와 선의의 경쟁 등이 혼재된 도시로 변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아테네의 영광의 산물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 등의 고대 인문학, 수사학, 고고학 등이 가톨릭 수도사들이 주도하여 연구하고 있었다. 한때 그리스 문화를 파괴하였고, 금서로서 사악시 되어오던 플라톤을 그리스도교에 접목시키는 시도가 붐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교리를 형이상학으로 업그레이드 한 스콜라 철학을 형성하였지만, 미미했던 그런 종교 철학적 사조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누구보다 이름을 떨치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카라바조는 프란체스코 후작 가족의 도움으로 사제인 루도비코를 만나 대중성이 강한 세속화를 그려주며 의식주를 해결했다. 로마는 밀라노 보다 훨씬 자유로운 도시였다. 그의 그림들은 테네브리즘, 즉 극단적 명암대비와 급진적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강하고 또한 드라마적인 서사가 가미되어 있어서 기존의 회화와는 색다른 감흥을 주었다. 르네상스의 화풍은 이제 매너리즘으로 변질되어 갔고, 새로운 화풍을 원하고 있는 문화사적인 분위기에서 그의 그림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 당시 지도층이었던 추기경들이 상상외로 카라바조의 그림을 선호하여 위탁 그림을 요구했고, 그에 카라바조의 생활도 안정되어 갔다. 그중에 판돌포 푸치 추기경은 아예 그의 후원자가 되어 자신의 집에 기거하도록 했다.


당시 카라바조는 생의 마지막까지 교우했던 시칠리아 출신 화가 마리오 미니티와 시인이며 카라바조를 미켈란젤로와 대등하게 비교하는 글을 쓰기도 했던 마르초 밀레시와 그리고 자신의 화실을 사용하게 했던 화가 카발리에르 다르피노 등과 친하게 어울렸다. 그들은 카라바조의 천재성에 경의를 표했다. 성격은 과격하고 독특했지만 천재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몇 개월 후, 판돌프 푸치의 도움을 물리치고 그의 저택을 나와 친구들과 자유롭게 교우하며 보헤미아적인 생활을 즐기 카라바조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델 몬테 추기경을 만난다. 로마에 온 지 3년이 지난 1595년이었다. 델 몬테 추지경은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로서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과학에도 관심이 많아 자신의 집에 실험실도 가지고 있었고,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여러 화가들의 그림을 끊임없이 수집하고 있었다. 그는 카라바조의 화풍에 매료되어 그의 그림을 구입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자신의 집에 기거하도록 하며 적극적인 후원을 했다. 두 인물은 문화적인 교감을 할 정도로 서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카라바조는 델 몬테의 작업실에 천정화와 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당시에 그린 그림 중에서 유명한 것이 바로 '메두사'이다.

메두사

그 후 1606년까지 카라바조는 델 몬테 추기경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절을 향유한다. 특히 델 몬테 추기경 주변의 문화적 환경에 동화되어 화풍이 진지해져 성서를 회화적으로 재해석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회심 같은 극적인 각성 정도는 아니지만 성화에 대한 성찰을 하였는데, 풍속화를 배제하고 성서의 내용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해석하여 표현했다. 그런 외형적인 표현이 자극적이고 저속하고 때론 잔인하다는 평이 있었고,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납품을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식지 않았다. 대표적인 작품이 콘타렐티 교회에서 위탁한 성 마태오의 연작이다.


당시 미술 시장은 위탁 그림이 지배하고 있었다. 고전시대 음악가들이 귀족들의 여흥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주고 생계를 유지했던 것처럼 그 당시 많은 화가들도 교회와 귀족들이 주문하는 그림을 그려주며 생계를 해결했다. 그중에 유명세를 좀 타면 품위유지까지 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가 귀족적 삶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음악을 생산한 후 결국에는 영감이 소멸되어 사라진 것처럼 당시의 예술가들도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세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유명한 바흐처럼 20명이 넘는 가족들의 삶의 질을 위해 작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자처했다. 카라바조도 그랬다. 미학에 대한 욕망보다는 자연주의적인 관점에서 주문자 생산에 충실했다. 그렇다고 주문자의 의도와 완전하게 타협은 하지 않고 자신의 관념도 어느 정도 가미한 작품을 생산했지만 전반적인 화풍은 기계적이었다. 보다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공부도 하지 않았고, 명성과 돈을 버는 데 필요한 것만 그렸다. 데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2주 만에 작품을 생산하는 기적을 낳게 했고, 그렇게 돈을 번 그는 당시 귀족 스포츠였던 테니스를 즐기고 때론 하인을 데리고 1~2달 여행을 떠나곤 했다. 당시 그가 생산한 그림은 부유한 은행가이자 그림 수집광인 빈센초 주스티아니 후작이 주문한 '성 마태오와 천사', '성 토마스의 의심', '승리자 큐비트', '가시관 대관', '회개하는 성 히에로니므스'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로마 교황청의 재무장관인 티베리오 체라시도 자신의 성당에 '십자가에 못 박힌 성 베드로'와 '바오로의 개종' 같은 작품을 걸어 놓았다.

토마스의 의심

카라바조가 로마 사회에서 제법 명성을 쌓아갈 때 그는 자신의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여러 사건에 휘말려 다양한 고초를 겪었다. 사실 남 탓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성격은 평범하지 않았다. 때로는 성격파탄자 같은 성향을 보이기도 했고, 로마의 윤락가를 자기 집 드나들 듯하며 방탕한 생활에 젖어 있기도 했다. 그에 대한 기행은 화려하다. 그에 대한 기록을 잠깐 언급해 보겠다. 1598년 5월 허가받지 않은 칼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델몬테 추기경의 전속 화가라는 직함을 내세워 간신히 풀려났다. 검을 소유하는 것은 당시 신사의 표식이었는데 그 정도가 심하여 체포까지 된 것이다. 1600년에는 술집에서 손님과 사소한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났는데 상대방 머리를 몽둥이로 가격하여 중상을 입힌 이유로 고소를 당했고, 1601년에는 역시 불법무기 소지 협의로 또다시 체포되었고, 1603년에는 화가인 조반니 발리오네가 자신에게 중상모략을 했다는 이유로 카라바조를 고소하여 결국엔 카라바조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1604년에는 선술집에서 취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어린 종업원에게 접시를 던져 고발당했고, 역시나 1605년에도 불법 무기 소지 협으로 또다시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자신의 모델이자 애인인 레나의 문제로 싸웠던 공증인 마리아노 파스쿠알로네가 자신을 칼로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카라바조를 고발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같은  7월엔 임대료를 못 받은 집주인 프루덴차 브루나가 카라바조를 고소하자 그에 앙심을 품고 그의 집에 돌을 던져 역시 고소를 당하는 등 6년 동안 15건의 경찰 기소 기록이 로마 경찰서에 남아 있다고 한다. 카라바조의 기행은 소문이 아니라 기소 기록에 남아 있는 팩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는 개인이 이렇게 많은 기소 기록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무튼, 당시는 르네상스로 인해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관대하게 인식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화가들의 돌출 행동은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카라바조의 잡범 수준의 기행은 간과할 수 없는 상습범 수준이어서 후원자인 델 몬테 추기경도 포기 일보직전까지 가는 상황이었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 / 마리아의 죽은 모습이 임신한 창녀라는 설이 있다

이런 폭력적인 행동은 결국 그를 파멸로 몰아갔다. 1606년,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카라바조의 작품은 주문자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표현 방법을 뒤섞어 놓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 주문자와의 마찰이 자주 일어나던 시기였다. 주문자 중에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교회나 수도원 등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제와 수도사들의 불만은 무시 못 할 정도로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미켈란젤로처럼 천재적인 능력 때문에 그나마 실랑이를 할 수 있었지 아마도 실력이 조금만 부족했다면 어떠한 형태든 단번에 절단이 났을지도 모른다. 현재 그 작품을 보더라도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는 것은 다분히 무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한 예로 '성모 마리아의 죽음'이라는 그림을 보면 마리아의 주검은 결코 성스럽지 않고 너무 세속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보수적인 사제가 볼 때 신앙을 기망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불안했는데 실제로 1년 후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아무튼 망나니 같은 그런 자기 멋대로의 기질은 화가로서의 생명을 단축시키기에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험악한 분위기가 돌고 있던 차에 기어코 카라바조는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1606년 5월 28일, 카라바조는 평상시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라누초 다 테르니와 내기 테니스 게임을 하다가 시비가 붙어 격렬하게 싸웠는데, 결국 칼로 결투를 벌이는 사태까지 발전하여 그를 사망케 하는 사고를 저지른다. 정식으로 결투를 벌였다면 정당방위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사건의 전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 사건의 확실한 피의자 카라바조는 경찰의 체포를 거부하고 로마에서 야반도주를 하였고, 재판은 궐석으로 진행되어 결국 사형 언도를 받는다. 체포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사형을 집행할 수 있으며 만약 범인을 숨겨 둔다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내용도 판결문에 첨부되었다. 거액의 내기 게임을 하다가 불분명한 이유로 결국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는 게 정설이지만, 집단 패싸움의 결과라는 설도 있고, 여자관계가 얽힌 치장 살인이라는 설도 유력하다고 한다. 카라바조의 방탕한 생활을 볼 때 다분히 여자가 개입된 치정 살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미술사가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정치적인 음모가 개입된 사건의 희생자라고도 논한다. 아무튼 테니스 게임을 한 것은 팩트지만 왜 살인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미궁에 빠져 있다. 살인의 동기를 볼 때 테니스 게임과 살인의 연결고리는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성격이 아무리 광폭하더라도 게임을 하다가 살인까지 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악마의 재능을 가진 카라바조의 인생은 이제 끝 모를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의 폭력성을 볼 때 추락은 이미 예고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페스트로 조실부모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던 밀라노를 떠나 무일푼으로 로마에 온 후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원 없이 발휘하던 카라바조는 델몬테 추기경과 보르게세 추기경 등 유력한 사제들의 도움을 무색하게 만드는 살인 사건의 피의자가 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불같은 성격과 폭력적인 성향은 불행했던 어린 시절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똑똑이 목도했으리라고 추론은 할 수 있지만 정확히 어떤 환경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고 생전의 편지나 대화 내용도 전해지는 게 없어서 그의 성격 형성에 대한 명징한 분석을 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미술에 천재적 재능이 있고 예술적 감각도 뛰어난 것을 보면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가족이 파괴되어 가는 현실을 담담하게 이겨내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아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을 게 분명하다. 살인자가 사실이라면, 극도의 정서적 불안정은 결국 그를 성격파탄자로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의 폭력성을 설명할 수 없다. 대대로 건축 장인 가문으로서 주변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던 집안 분위기와 정적인 유전적 성향을 보았을 때 현재의 카라바조의 불안정한 성격은 돌연변이나 기형적 유전인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의 상실은 정서적 결핍을 낳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살인 사건의 범인이 된 카라바조는 기겁을 하고 황급하게 로마를 빠져나가 나폴리로 갔다.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나폴리는 스페인령으로서 로마로부터 자유로웠고 무엇보다도 프란체스코 공작부인의 본가인 콜로나 가문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도시였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밀라노 시절 스포르차 가문의 집사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연이 카라바조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카라바조는 영주의 보호 하에 1년 동안 나폴리에 머무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살인자이면서 현상수배범이라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노출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화가 행세를 할 수 있었다는 게 현재의 기준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어쨌든 당시는 17세기 초였다. 로마에서의 명성은 나폴리에서도 여전해서 그의 그림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카라바조는 '엠마오에서의 만찬'과 '황홀경의 막달레나' 같은 작품을 나폴리 영주에게 선사하였고, 다작 능력을 발휘하여 많은 그림을 팔아 민생고를 해결했다. 당시 그가 그린 작품은 '일곱 가지의 시선', '그리스도의 책형', '십자가에 못 박힌 성 안드레아스', '로사리오의 성모', '기도하는 성모' 등 많은 작품을 나폴리에 남겼다. 지금도 나폴리에 카라바조의 작품이 폐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그의 인지도를 알 수 있다.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위

그렇게 나폴리에서 꽤 잘 나가는 화가로 지낼 때 로마에서는 카라바조 작품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카밀로 보르게세 추기경이 파울루스 5세로 교황에 즉위하자 카라바조의 그림은 성직자들의 총애를 잃었고 이에 사제들은 많은 교회에 걸려 있던 카라바조의 그림들을 떼어 루벤스 같은 화가나 수집상들에게 팔았다. 새 교황은 앞으로 교회에서 성화를 구입할 경우 사전에 생이나 스케치를 제출받아 검증을 해야 한다는 카라바조 포고령을 내렸다. 사전 승인 제도였다. 교리적으로 수긍할 수 없었던 반종교적인 카라바조의 성화를 모조리 떼어내자 사제들은 모두 환영을 했다. 하지만 수집가들은 싼 가격에 그 그림을 살 수 있어서 환영을 했다. 팔아서 환영, 구매해서 환영, 참 묘한 분위기가 로마에 형성되고 있었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교회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교를 모욕한 이유도 있지만 결정타는 살인자이면서 현상수배범이라는 극악무도한 범죄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패륜아를 아무리 작품이 훌륭하다고 해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덮을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카라바조의 모든 작품은 이탈리아에서 매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리고 카라바조는 나폴리에서 우연히 만난 몰타 기사단 총회장인 이폴리토 말라스피나의 초청으로 시칠리아 남쪽 지중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몰타로 간다. 1607년 7월이었다. 살해사건 후 1년이 지나는 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로비를 해보았지만 로마에서는 현상수배를 거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카라바조는 새로운 삶을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굳혀 갔고, 마침 말라스피나도 변방인 말타에서도 문화적인 소양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는 정치적인 계산이 맞아떨어져서 함께 말타로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타는 십자군 전쟁 당시 만들어진 기사단으로 유명했지만 문화예술과는 거리가 있는 소영지였다.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지나 배를 타고 시칠리아를 종단하고 지중해를 건너는 기나긴 여정 끝에 카라바조는 새로운 땅 말타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신분 세탁을 하기 위해 기사단에 가입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이 몰타에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대놓고 논하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모르지만 흔히 말하는 1급 살인은 아니었던 것 같고 약간은 억울한 과실치사가 결부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보다 깊은 비밀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는 정식 기사가 되기 위해 눈물겨운 사투를 벌였다. 그는 성 히에로니무스를 그려서 몰타에서 가자 큰 건물인 성 요한 성당에 기증을 했는데 바로 그 히에로니무스의 얼굴이 몰타의 영주인 알로프 드 위냐쿠르의 얼굴이었다. 말라스피나와 작당하여 그렇게 그린 그림이 성당에 걸리자 영주는 당연히 흡족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영주의 초상화를 그려주었고 그런 노력의 결과 드디어 카라바조는 기사단 총회에서 정식 기사로 지명이 되었다. 당시 그는 보답으로 '세례자 요한의 참수', '수태고지', '잠자는 큐피드', '몰타 기사의 초상' 같은 그림을 영주에게 받쳤다. 그런 그에게 영주는 십자가 명예 훈장을 수여하고 하인 2명을 하사함으로써, 카라바조는 몰타로 도망 온 지 1년 만에 몰타의 기사가 되는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물적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몰타의 영주 알로프 드 위냐쿠르 초상화

하지만 1608년 8월 기사 작위를 받은 지 한 달 만에 카라바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사들 간의 패싸움에 가담하게 된다. 7~8명에 뒤엉켜 싸웠다고 하는데, 한 명이 중상을 입었고 이에 조사 결과 카라바조가 주범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사건에 대한 전말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구전으로도 들리는 것도 없다. 단지 몰타의 관공서 기록에 간단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조사 결과 카라바조가 주범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로마에서 행하던 몹쓸 행동이 그 먼 몰타에서도 고치지 못하고 결국 간단치 않은 사고를 쳤는데, 개과천선을 하여 과거의 그릇된 행위를 반성하며 평생을 조용히 살아도 부족할 판국에 패사움의 주범에 몰리는 신세가 되었으니 정말 대책 없는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패싸움의 조사가 끝나고 재판에 회부될 즈음, 그해 10월 그는 빠삐용처럼 탈옥을 했다. 기사라면 잘못을 저지를 경우 비굴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대처해야 하는데, 카라바조는 애초부터 그런 명예는 바랄 수 없는 소인배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하여튼 몰타 기사단은 카라바조를 파문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이제 로마에 이어 몰타에서도 카라바조를 쫓는 상황이 벌이진 것이다. 더구나, 당초 몰타의 영주는 살인범으로 쫓기고 있는 카라바조가 이제 기사 작위를 받을 만큼 다시 태어났고 회개를 하였으니 사면해 줄 것을 로마 교황청에 상소하였는데 한순간의 분노조절 실패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카라바조는 세상 어디를 가나 기막힌 그림 솜씨 하나로 최소한 자신의 몸 하나는 거뜬히 건사할 수 있었다. 섬나라인 몰타에서 시칠리아까지 어떻게 도망을 쳤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정말 신출귀몰한 재주가 있는 것만큼은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시칠리아 사라쿠사 지역에 모습을 나타낸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알고 지내던 화가 마리오 미니티를 수소문한 끝에 찾아내고는 시칠리아 생활을 의탁한다.  마리오 미니티는 카라바조라는 인간이 어떠한지를 누고 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를 마지막까지 도와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 많았던 지인들이 자신을 등졌지만 마리오 미니티는 카라바조의 미술을 사랑했고 인간적으로도 연민을 교차하는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방탕하고 과격하고 불같은 성격이었지만 그림에서 보이는 인간의 진정성은 작가의 내면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연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카라바조를 마지막까지 이해한 사람은 마리오 미니티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을 사랑했지만 마리오 미니티는 둘 다 사랑했다.


카라바조는 마리오 미니티의 주선으로 사라쿠사 영주를 영접한 후 언제나 다른 곳에서 했듯이 많은 그림을 그려서 환심을 샀다. 그의 작품은 보편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하고 그리고 강열한 명암이 보여주는 화풍은 어디를 가든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다. 그는 항상 그렇듯 속사포로 그림을 그려서 호구지책을 이어갔다. 정말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 어디를 가든 그 재능 하나로 최소한 자신의 생활 영역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조물주와 관계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악마의 재능이라는 표현이 제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시칠리아에서 그렸던 작품은 '성녀 루치아의 매장', '로자로의 부활', '목자들의 경배', '그리스도의 수난', '성 로렌초 및 성 프란체스코와 함께 한 그리스도의 탄생' 등이 있다.


하지만 시칠리아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몰타와 바다로 갈라져 있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왕래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몰타 기사단은 카라바조를 체포하기 위해 추적조를 시칠리아로 급파했다. 추적자는 지역의 정보망을 가지고 카라바조의 거처를 조여갔다. 그런 낌새를 감지한 카라바조는 고마운 친구 마리오 미니티와 이별을 하고 시칠리아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몰타 기사단에 체포되면 다시는 육지로 나갈 수 없을 게 뻔했다. 친구와의 이별은 이제 마지막이 될 운명처럼 가슴을 조여왔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빠삐용과 드가의 이별처럼 그들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이별을 고했다. 1609년 10월이었다.


이 세상에서 카라바조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프랑스나 그리스로 갈 수도 없었다. 그의 성격상 생판 모르는 세계에서는 그림 하나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크든 작든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그의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는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산다는 것은 그의 인생을 더욱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포탄을 가진 카라바조의 삶은 항상 불안했다.


시칠리아를 떠나 나폴리에 간 카라바조는 이제 도망자로서의 삶에 지쳐 가고 있었다. 로마를 야반도주한지도 3년이 지나고 있었다. 계속된 사면을 위한 노력은 벽에 부딪쳤고 그를 지치게 했다. 이런 불안정한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 이어갈 수는 없었다. 아직 나이도 40살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할 수 방법은 없었다. 그는 바쿠스가 와인잔을 들고 몽환적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림처럼 술병을 옆에 끼고 살았다. 그리고 작품을 팔아 번 돈으로 홍등가에 가서 무의미한 욕망을 배설했다. 그의 몸과 마음은 극도로 피폐해지고 있었다. 삶에 대한 의욕은 사라지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음침한 골방만이 안식처처럼 그의 영혼을 위로하는 혼란스러운 생활이 한동안 이어졌다. 삶의 의미를 잊어버린 룸펜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더 이상 날지 못하는 자신을 비관하며  매일 술과 여자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자주 싸워 그의 얼굴은 항상 상처투성이였다.


그렇게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아직 열정적으로 화가로서 매진할 시기이며 명예와 돈에 대한 욕망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베드로의 부정', '성녀 우라슐라의 순교' 등을 그려 교황의 조카이면서 한때 자신의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에게 은밀하게 보내 사면을 청원했다. 그 작품들 속엔 자신의 속죄와 가톨릭에 대한 믿음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라는 작품의 머리 잘린 골리앗은 바로 현재 자신의 얼굴이었고, 그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도 자신의 젊었을 적 얼굴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나를 참수한 후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려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이 괴이한 작품은 카라바조의 당시 복잡한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최후의 작품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하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작품이며, 평론가들에게도 문제작으로 남아있는 작품이다. 오직 로마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그것만이 삶의 의미였는지 모른다. 그런 노력으로 인한 탓인지 모르지만, 로마로부터 사면에 대한 긍정적인 소식을 접한 그는 무작정 로마로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문서나 인편으로 명확한 응답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긍정적인 소식이란 카라바조 자신이 확대해서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로마로 가겠다는 요원함이 무응답을 긍정이라고 확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이 300년 동안  어둠 속에 묻혀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10년 7월, 나폴리에 온 지 9개월 만에 그는 로마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어떠한 확신도 없었지만 이제 로마로 가서 인생의 마지막 카드를 까야만 했다. 자신이 패하든 이기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더 이상 로마 이외에서의 삶은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결국 그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경유지인 팔로라는 항구 도시에서 카라바조는 다른 현상범으로 오인한 경찰에 체포되었고, 거금의 보석금을 마련하여 이틀 만에 풀려났지만 이미 배는 떠난 뒤였다. 그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육로를 이용해 선박의 다음 기착지인 포르토 에르콜레까지 황급하게 간다. 로마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끝내 로마행 배를 찾지 못하고 그는 주저 안고 만다. 이제 걸어서 가는 길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거기까지였다. 로마행이 절박했지만 세상은 그와 타협하지 않았다. 당시 페스트에 이은 말라리아가 유럽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카라바조는 바로 그 역병에 전염되어 포르토 에르콜레에 있는 산타마리아 아우실리아트리체 병원에서 사망한다. 너무나 허무한 죽임이었다. 300년 후 발견된 그 병원의 기록에는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가 병으로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밀라노를 고향으로 두고 로마를 그토록 사랑했던 카라바조는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처음에 얘기했듯이 그 도시의 작은 교회 납골당에 안치되었고, 300년 후 세상이 다시 그를 소환했다.


사실 카라바조의 죽음은 분명하지 않다.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배를 놓치고 육로를 통해 포르토 에르콜레에 갔다고 하는데, 그 도시는 로마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로마로 가는 중간 기착지라고 할 수 없다. 나폴리에서 로마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도시가 아니라 로마를 지나 북쪽에 있는 도시라는 것이다. 카라바조가 그곳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분명하다고 하면 배를 타고 이동을 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고, 다른 이유로 포르토 에르콜레에 갔고 열병 즉 말라리아로 죽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다른 설에 의하면 말타 기사단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하는데, 그 설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적대시하는 쪽에서는 매독에 걸린 후 치료제를 쓰던 납에 의한 중독으로 사망했다고도 하고, 2002년 조사한 바티칸의 문서에는 카라바조가 살해한 라누초가 속해 있던 폭력 단체에서 그를 추적하여 복수를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의 죽음은 미궁에 빠져있는 것은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카라바조는 평범한 예술가의 삶이 아닌 장미십자회 같은 어둠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매우 복잡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의 사망 소식은 뒤늦게 로마에 전해졌다. 그의 작품을 배척했던 교황청은 잠잠했지만 그와 인간적으로 친했던 예술가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시인인 마르초 밀레시는 " 천사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물감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자네가, 아 꺼져버린 은총이여, 사랑의 신과 더불어 하늘 아래 환히 빛났던 자네의 작품들... 현자가 되는 것도 죽으면 헛된 일이 리"라고 시를 읊었다. 그리고 바로크 시대를 연 시인 조반니 바티스타 마리노도 " 미켈, 당신을 희생하여 죽음과 자연이, 잔인한 음모를 꾸몄구나, 자연은 두려웠으리, 당신의 손을 거친 모든 형상이 승리했으니, 그건 창조된 것이지 그려진 것이 아니야..."라고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사실 카라바조의 성격이 괴팍하고 다혈질이라는 것은 맞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성격 파탄자처럼 막 나가는 성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도 성격이 고집스럽고 불같아서 교황과도 싸워 고초를 겪었듯이, 예술가들은 대게 성격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시인이 시처럼 살 수 없고, 종교화를 그린다고 해서 성심이 깊은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화가의 내면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성격이 모나다고 작품의 모난 것도 아니다. 문화사적으로 위대한 예술가들을 볼 때 평범하게 살다 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틀리지 않다. 개인으로서의 성격과 예술적 감성은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마르초 밀레시가 얘기했듯이 카라바조에게도 천사의 마음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양면이든 다면적이든 여러 형태의 자아를 가지고 있듯이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으로 카라바조를 규정할 수는 없다. 당시 그와 친했던 사람들은 비록 기록에는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지만 카라바조의 진실 된 내면세계와 소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를 끝까지 도우려고 했던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세상을 그렇게 막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사건의 기소 기록이기 때문에 그의 성향이 폭력적이라고 유추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의 전부를 결정지을 수 없지 않을까. 안타까운 것은 당대에 카라바조가 남긴 편지나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이나 그리고 그에 대한 인물을 평하는 글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그럼 살인사건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당시 형사기록이나 판결문 등엔 살인 동기가 불분명하고 전체적으로 개연성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어서 의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으며 심지어 왜곡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의 세속화는 세속의 정도가 심해 이전에 없던 파격 자체였고, 종교화라는 것도 신성 모독의 경계선 담장 위를 걸을 정도로 위험수위 높았으며, 평가하기에 따라 대단히 불쾌감도 드는 작품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어느 누가 신성모독이라고 분석하면 그에 대한 논박은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불만을 가진 주문자들이 그림을 반품하는 경우가 다수였다고 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겐 불온하고 정말 신성모독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종교적 이념을 가진 어떤 세력이 카라바조를 숙청할 목적으로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설이 그래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절대 권력의 시대에 그런 조작쯤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1603년 당시 미래의 교황인 카밀로 보르게세 로마 추기경이 선포한 '성화의 밑그림에 대한 포고령'을 보면 당시 교황청의 검열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전대미문의 사전 검열 상황을 촉발시킨 사람은 사실 카라바조였지만 그렇다고 그런 엄혹함에 카라바조가 고개를 숙였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카라바조니까. 하여튼 마녀사냥에서 보듯이 종교라는 이름의 권력을 가진 세력은 무엇이든지 실행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당시는 종교개혁과 온갖 역병으로 인해 사회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완고한 종교의 도그마를 거부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래서 타협하지 않는 카라바조는 아주 좋은 본보기였을지 모른다.

엠마오의 저녁 식사

미켈란젤로의 작품도 파격이었지만 카라바조의 작품은 더 파격이었다. 미켈란젤로도 고집불통으로 인해 평생 동안 교회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래도 선은 넘지 않았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미켈란젤로보다 더 고집불통이어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경계선을 즐기듯 자신의 영감을 표출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에 자만하여 교회가 그어놓은 경계선을 보란 듯이 넘나들었는데, 그런 천재의 자만은 결국 세상과 충돌하면서 파국으로 가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를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추방한 후에도 그가 창조한 세계를 지하 감옥에 가두어 놓았다. 그의 작품은 마치 중세에 그리스 철학을 철저하게 배척했던 것처럼 불온 예술품으로 분류하여 빛을 차단하였다. 빛이 없는 그림은 그림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빛의 화가로 불리는 카라바조는 살아서도 이방인이었고 죽어서도 이방인이었다. 까뮈가 창조한 이방인이란 세계의 메르쏘처럼 그는 자신이 속한 세계에 섞이지 못하고 부유하다가 결국에는 영원 속에 갇혀버렸다. 사바나에 홀로 버려진 아기 사자처럼 불안정한 삶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에겐 신이 내려준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더왕의 전설에 나오는 성검 엑스칼리버와 같은 재능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종교의 중심이면서 욕망의 중심인 로마라는 사바나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자신의 성검을 너무 과신하여 이방인을 자처하였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도 영혼의 자유로움을 향유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 모른다. 이방인의 삶은 외롭기 마련이다. 자유로울지는 모르지만 고독과도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세상으로부터 날아오는 질시와 혐오의 화살을 성검 엑스칼리버로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권력은 자신의 세계에 동화되지 않는 그를 계속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세상으로부터 추방을 당했다. 성검을 가진 자라고 해도 자신들이 형성한 문화에 동화되지 않는 그를 결국 사악한 존재로 분류한 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마치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몰아내기 위해 음모를 꾸민 사두가이처럼. 그렇게 이방인은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사라졌고 그가 창조한 작은 세계 또한 영원히 사장되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어디에도 걸어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300년이 지난 후 그를 추방한 세상은 다시 그의 성검을 들어 올리며 마치 부활한 그 누군가처럼 찬양하기 시작했다. 평범하지 않은 개인과 평범한 세상의 불협화음은 영원할 수 없으며 언제가 시대가 바뀌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게 되는 날이 찾아오기도 한다. 물론 그 예는 극히 드물 수도 있을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누군가는 아직도 땅속에 묻혀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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