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호용 Aug 16. 2024

반 고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아웃사이더

2. 파리


그렇게 안트베르펜 미술 아카데미를 자퇴한 빈센트는 한 달 후 드디어 파리에 입성했다. 1885년 2월 28일이었다. 그를 맞이한 사람은 테오였다. 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테오는 당시 옛 구필 화랑인 부소&발라동의 몽마르트르 지점 지배인이었다. 처음 몇 개월은 테오가 살던 집에서 함께 살았으나 작업실을 만들 공간이 협소해서 그해 6월 큰 집을 구해 이사를 갔다. 작업실은 물론이고 추울 땐 스토브가 항상 켜져 있고, 하루 세끼와 와인도 마실 수 있는 환경 속에서 그는 생활했다. 아마도 처음으로 이런 안락한 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랬다. 그는 말끔한 파리지엥으로 빠르게 변해 갔고, 이젠 테오에게 구구절절한 편지도 쓰지 않았다,


아무튼 파리에 입성하자마자 빈센트는 테오의 주선으로 몽마르트르에 있는 페르낭 코르몽 미술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두 번의 아카데미 생활에서 실패를 경험했지만 코르몽에서는 교육 수준이나 인적 구성을 볼 때 최소한 미래가 불확실하지는 않았다. 당시 유명한 역사 화가이면서 부유했던 코르몽이 후진 양성을 위해 만든 그 아카데미엔 전도유망한 젊은 화가들이 많이 찾아와 회화 기법도 배우고 미학적 탐구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사랑방 역할도 하고 있어서 많은 화가들과 친교도 맺을 수 있었다. 빈센트는 그곳에서 영원한 친구 에밀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렉과 그리고 루이 앙크탱 등을 만났다. 당시 18살의 약관이었던 베르나르는 부유한 집안의 자녀로서 나이에 비해 문학과 예술적 소양이 풍부했고 그림에도 재능을 발휘하여 할머니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코르몽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으로 회화를 배우고 있었다. 그는 고갱과도 퐁타방에서의 끈끈한 인연으로 인해 빈센트와 고갱을 연결하는 관계의 끈이 되었고, 몇 년 후 당시 프랑스 화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아방가르드의 이론가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한때 고갱을 미술계의 스승처럼 따랐지만 빈센트에게는 인생에서의 대부처럼 항상 존경하는 태도를 취했다. 빈센트가 사망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간 것도 베르나르였다. 그는 빈센트 사후엔 프랑스 화단에 회의를 느끼고 10년 동안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고 이집트 등을 방랑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고, 그 후에는 빈센트의 재평가에 심혈을 기울이는 등 평론가와 작가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로트렉은 모두가 알다시피 프랑스 로트렉 몽파 백작 가문의 자녀로서 어릴 때 사고로 인해 하반신 성장이 멈춘 장애인 화가로 유명하다. 당시 22살이었던 로트렉은 가문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방황하던 시기였다. 퇴폐적이면서 도발적인 그의 화풍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는 빈센트의 파리 시절 초상화를 그려 기록적 가치를 창출하기도 했다. 이 불행한 화가는 빈센트처럼 1901년 37살의 나이에 사망한다. 

    

빈센트는 화가로서 성장 가능설을 볼 때 주변 환경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파리 미술계에서 비주류에 속했지만 테오라는 확실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기에 따라서 발전 가능성은 상당하였던 것이다. 테오는 빈센트에게 현대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몽마르트르에 위치 한 많은 화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테오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밀고 있던 인상파에 주목하도록 권했다. 당시 파리 미술계는 자연주의와 낭만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인상파와 신인상파 화가들도 그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피사로를 중심으로 세잔, 드가, 마네, 르느와르, 쇠라, 시냐크 등은 인상주의의 핵심 멤버였다. 그리고 그 조류 외에도 고갱을 중심으로 상징주의나 클루아조니즘 같은 아웃사이더 그룹이 등장하여 급진적 아방가르드 운동의 기치를 올렸고 그 사조는 훗날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빈센트의 눈길을 끈 화가는 아돌프 몽티셀리였다. 낭만주의로 시작해 말년에는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파격적인 화풍으로 호불호가 분명했던 몽티셀리는 빈센트가 파리에 온 후 몇 개월 지나 마르세이유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그림은 급진 인상파적인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파리 화단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그의 후계자가 되기로 자처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몽티셀리에 대해 끊임없이 떠벌이고 다녔다. 심지어 자신은 그의 자식처럼 느낀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빈센트의 화풍은 그 후 많은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빈센트를 매료시킨 것은 일본 판화 우끼요에였다. 안트베르펜에서 처음 접했던 일본 판화를 몽마르트르에 있던 빙 화랑에서 다시 접한 그는 우끼요에의 광팬이 되어 고물상에서 헐값에 그림을 구입하고 자신의 방에 도배질을 했다. 특히 우타마로, 호쿠사이, 히로시게 등의 작품들은 빈센트뿐만 아니라 다른 아방가르드를 지향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도 기존의 화풍을 깨는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이렇게 화가로서의 안목을 높여주는 것 외에도 테오는 빈센트에게 핵심적인 화가들을 소개해주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카미유 피사로였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서 대형과도 같은 존재여서 그의 집에는 항상 화가들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화가 신입생에게 각별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 드가와 고갱을 손꼽을 수 있다. 고갱 말년에는 그와 틀어지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후원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들이 악마와 같은 비평가들이 난무하는 미술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아낌없이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피사로는 빈센트를 만나 그의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에 대해 극찬하였다고 한다. 1년 전에 테오에게 보낸 그 그림을 피사로가 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호평은 덕담 수준이었고, 뒷 소문에 의하면 이 촌뜨기 화가에게 다소 냉소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인상주의의 창시자이자 점묘법을 창안한 조르주 쇠라의 추종자였던 폴 시냐크와도 가까워졌다. 당시 촉망받던 20대 초반의 젊은 화가인 그는 파리 화단 여러 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빈센트는 시냐크와 함께 화구를 둘러매고 세느 강변에 가서 풍경화를 그렸고, 몽마르트르에서도 카페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다. 시냐크는 빈센트의 아를 시절 그를 방문하여 며칠 동안 함께 지내기도 하고, 빈센트 사후 그의 그림을 비판하던 파리 미술계 사람들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젊은 베르나르처럼 시냐크도 기독교적 사회의식이 강고한 빈센트를 존경했다. 때론 무모하리만치 고집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타적이고 겸손하면서도 세속적 욕망에 충실하고 때로는 보헤미안 기질도 뚜렷한 빈센트를 두 젊은 예술가는 친형처럼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빈센트 특유의 투머치가 발동될 때도 도망가지 않았다.

    

그리고 파리에서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기 위해서는 유흥문화에 어느 정도는 동참해야 했다. 몽마르트르에는 도덕적 엄숙주의는 예술가로서의 자격에 적합하지 않은 어떤 통념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파리 예술계는 데카당스적인 문화가 강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특히 보들레르 이후 문학계에서 상징주의자들에 의해 퇴폐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그런 데카당스 문화는 미술계에도 전파되어 몽마르트르에 공창과 카바레 같은 유흥 업소가 번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테오는 빈센트를 고급 음식점과 선술집과 카바레 같은 곳에 데리고 다니며 화려한 파리 유흥 문화를 접하게 했다. 유흥가 친구이기도 했던 로트렉이 그린 카바레 무랑루주 시리즈는 당시 화려한 퇴폐적 문화를 보여준다.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때론 이런 문화에 익숙해져야 했던 것이다.

        

1886년 여름 빈센트는 3개월 만에 쿠르몽 아카데미를 떠났다. 당초 3년 동안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항상 그렇듯 그는 겨우 몇 개월 버티지 못하고 탈퇴를 한 것이다. 쿠르몽과 회화의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충돌이 있어 왔지만 무엇보다도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던 원인이 있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지 못하는 성격은 어딜 가나 트러블 메이커의 원인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33살 나이에 언제까지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빈센트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자신의 그림을 그리겠노라고.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설령 그림의 기술적 부분이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표현하겠다고 그는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그렇게 그의 그림은 몰라보게 밝아졌다, 그리자유 풍의 잿빛의 우울한 색채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을 그리지 않고 가능하면 풍경화를 화폭에 담았고, 색채에 관심을 집중하여 보색의 유희에 빠져들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창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전문가가 보기에 기본에 충실하지 않는 기법으로 인해 폄훼를 받기도 하고 따라서 작품도 팔리지 않았지만 그는 그런 외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과 싸웠다. 자신의 영감과 붓칠을 믿었다. 실패하더라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파리에 와서 인상주의 화풍을 접하고 새로운 미학적 발견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영감을 믿었다. 그것은 보들레르가 말한 모던이었다, 시대를 초월하고 시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야 말로 모던 예술이었다. 괴팍하고 고집불통인 이 늦깎이 화가의 파리 생존기는 그렇게 밧줄을 타는 것처럼 위태했다.

      

파리 시절 반 고흐의 작품

파리에서 사귄 사람 중에 줄리앙 탕기라는 사람이 있었다. 과거 프랑스 공화국이 탄생할 즈음에 사회주의자로 활동을 했던 탕기는 몽마르트르에서 물감 가게를 하면서 많은 화가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또한 가난한 화가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화가들은 그를 탕기 영감이라고 불렀다. 그는 물감을 만드는 데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물감 장인이었다. 그의 고객의 면면을 보면 화려하다. 세잔, 피사로, 르느와르, 모네 등 인상주의자들이 망라되어 있었고, 빈센트와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그 후 마지막까지 두 사람의 인연은 끈끈하게 이어진다. 아무튼, 그리고 탕기 노인은 풋내기 빈센트에게 젊은 시절 파리에서 굴욕을 맛보고 고향인 프로방스로 낙향하여 고진감래 끝에 성공한 세잔을 소개해주었다. 이에 빈센트는 고마움의 표현으로 탕기 노인의 초상화를 그려 그에게 선물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두 사람이 가까워진 이유는 빈센트가 프로레타리아 계급에 이타적이었던 것처럼 탕기 노인도 찐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서로 세상을 보는 측면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그렇다고 파리 화단은 결코 빈센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가 추구하는 미학적 세계는 자신의 내재적 영역 만을 구축할 뿐, 어느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세상과의 타협은 없었다. 따라서 대중성도 확보할 수 없었다. 세잔의 경우처럼 자신도 자신의 미학을 확고하게 고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여기까지라고 재단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는 고립을 원하지 않았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평가받고 싶은 욕망을 탓할 수는 없었다. 비록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작품이 계속 배척당하는 것을 본 빈센트는 여타의 화상들을 적극 설득한 결과 여러 화랑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중간에서 테오의 역할이 지대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형의 그림을 매입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상거래의 도의가 아니었다. 전시하는 것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림을 직접 구입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작품 몇 점을 자신이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당시는 무명 화가들이 레스토랑이나 카페의 벽면을 빌려 소규모 전시를 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레스토랑의 여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와 연인 관계를 이용해 전시가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몽마르트르에 퍼졌다. 이런 염문의 사실 유무에 대해 빈센트가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 그동안 지켜본 관계를 볼 때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적인 감정을 이용해 전시를 한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회적 관습이 적용된 결과였다. 당시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정의 평등 같은 단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결과 도덕적인 인간이었던 빈센트는 레스토랑에서 그림을 걷어내고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파리 문화에 젖어들면서 무질서한 생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하루 종일 카페와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압생트와 와인을 마셨고, 함께한 화가들과 대수롭지 않은 미학적 주제를 두고 격한 논쟁을 벌이기 일쑤였다. 술이 취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해졌다.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은 개선이 되지 않았고 그 결과 무의미한 언쟁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런 과격함과 투머치 토크 능력으로 인해 동료 화가들로부터 외면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습성은 그의 정신회로에 불안정한 요소로 작용하여 주위가 산만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지 않아도 산만했는데 음주문화에 빠지다 보니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작업실과 집안은 온갖 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사용한 집기들도 곳곳에 제멋대로 뒹굴었다.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이에 테오가 형 정신 좀 차리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에 두 사람은 심하게 다투었고, 테오는 이 사실을 누나한테 고자질하는 편지를 보냈다. 형 때문에 못살겠다고... 

    

빈센트는 그런 무절제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나마 작업하는 데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제 그림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질주하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져도 이제 그림이란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빈센트는 누구보다 친밀하게 지내던 에밀 바르나르와 함께 작업하는 것을 즐겼다. 조르주 쇠라의 작품 <그랑드 자트의 섬>으로 유명한 그랑드 자트에게 가서 함께 풍경화를 그리기도 하고 때론 릴에 있는 베르나르의 집에 가서 작업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베르나르는 사업에 성공한 신흥 자본가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다. 그의 할머니가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어서 베르나르를 위해 집안에 대나무로 아뜰리에를 만들어 주며 독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예술가가 되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 집에 자주 방문했던 빈센트는 베르나르의 가족과 친해졌는데,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와인을 마시고 취기가 오른 벤센트는 베르나르의 아버지에게 베르나르가 화가의 소명을 따르는 것을 아버지가 방해를 하고 있노라고 설득 아닌 설득을 하고 나섰다. 빈센트 특유의 직설적인 설득은 도리어 베르나르 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여 두 사람의 대화는 언쟁으로 번졌고. 이에 빈센트는 자신의 의견을 묵살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그 후 빈센트는 그 집을 가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침착하게 설득을 해도 부족한 판국에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따지고 대든다면 이미 그 싸움은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베르나르와의 관계가 멀어지지는 않았다, 빈센트와 베르나르의 관계는 그 사건으로 인해 오리려 더욱 돈독해졌다. 베르나르 입장에서는 자신을 확실하게 믿어주는 빈센트가 고마웠는지 모른다.

     

1887년 로트렉이 그린 반 고흐 초상화

1887년 가을이 되었다. 파리에 온 지도 일 년 반이 지나고 있었다. 빈센트는 자신과 친한 화가들을 규합하여 몽마르트르에 있는 뒤 샬렛 레스토랑에서 그룹전 형태의 앙데팡당을 야심적으로 주관한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베르나르, 앙크탱, 로트랙, 아놀드 코닝 등의 그림과 자신의 작품들을 합치면 족히 100여 점이 되었다. 처음엔 빈센트가 시냐크와 쇠라의 작품도 섭외를 하자고 했으나, 베르나르가 신인상주의를 추종하던 시냐크의 작품은 전시회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아무튼 이렇게 작품을 확보한 빈센트는 레스토랑의 사장을 설득하여 승낙을 받아냈다. 비록 공인된 화랑은 아니지만 100점이 넘는 작품을 대형 레스토랑에 전시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출품 화가들을 자칭 프티 볼 바르(골목길)의 화가라고 불렀다. 빈센트가 파리에서 그린 작품 200여 점 중에서 선별된 수십 점의 작품이 대중의 심판을 기다렸다. 처음엔 부위기가 좋았다.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라 있던 조르주 쇠라가 방문하여 빈센트와의 우정을 과시했고, 항상 관대한 피사로가 찾아와 격려해 주었다. 그런 결과 싼값이지만 베르나르와 앙크탱의 그림이 한 점씩 팔렸다. 그리고 고갱이 불쑥 찾아왔다. 그는 당시 카리브해 끝에 있는 마르티니크에서 라발과 함께 모험을 마치고 금방 파리로 돌아온 후였다. 고갱은 1년 전 테오의 소개로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금융회사에서 주식 딜러를 하다가 퇴사한 후 가족까지 버리고 화가가 된 고갱은 당시 파리 화단에서 독특한 인물로 회자되고 있었다. 빈센트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인 고갱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화가의 길로 들어선 그와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와 겹쳐져서 묘한 동료의식을 느꼈는지 모른다. 당시 테오는 마르티니크에서 그린 고갱의 작품을 자신의 화랑에 전시했는데 그 그림을 본 빈센트는 경탄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빈센트는 전시회를 방문한 고갱과 각자 자신의 작품을 교환하며 우정의 맹세를 나누었다. 그 작품은 빈센트가 당시 그리기 시작한 해바라기 정물화였고, 고갱의 작품은 마르티니크에서 그린 바닷가 풍경화였다.


하지만 영혼을 갈아 준비한 빈센트의 전시회는 성공하지 못했다. 베르나르와 앙크탱 작품 판매 외에 자신의 작품도 팔렸지만 어처구니없게도 10장이 1프랑이었던 것이다. 쓰레기만도 못한 가격이었다. 이렇게 수모를 겪고 전시회 대관료를 지불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레스토랑 사장은 당장 그림을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아니면 자신이 직접 그림을 떼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빈센트에게 대관료를 받을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빈센트는 격렬하게 항의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빈센트는 실의에 빠져 그림을 철수한 후 한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그리고 성격이 더욱 괴팍해져 술만 마시면 거리에서 쌈박질을 일삼았다. 거리에서 이젤을 놓고 풍경화를 그리다가 하찮은 이유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시비가 붙고 때론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한번 화를 내면 걷잡을 수 없는 성격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없던 행동이었다. 이에 경찰로부터 도로에서 그림 그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받기도 했다. 이런 기행으로 인해 테오와도 관계가 불편해지지 않을 수 었었다. 그렇게 빈센트의 겨울은 유독 추웠다. 당시 그는 매독에 걸려 있었고, 알코올 중독 증상을 보였으며, 분노조절장애와 신경증 같은 성격 장애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파리는 이제 그의 목을 서서히 조르고  있었다. 파리 생활의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빈센트가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추진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화가 조합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조합은 빈센트뿐만 아니라 가난한 무명 화가들 사이에서 관심 있게 회자되고 있었다. 화가조합의 원조는 네덜란드였다. 바로크 시절 네덜란드에서는 급속한 경제 발전과 더불어 초상화와 풍속화가 번창하였는데, 당시 많은 화가들이 이런 문화사회적인 기류에 편승하여 인쇄하듯이 작품을 생산하고 있었고, 이런 배경으로 화가들의 처우개선과 미래에 안정적 생활을 도모하기 위해 각 지역별로 화가 조합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델프트시 화가 조합장이 바로 <진주 목걸이를 한 소녀>을 만든 요하네그 베르메르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는 두 번이나 조합장을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에는 미술이 하나의 산업으로 분류되고 있었기 때문에 화가는 예술가 이전에 근로자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화가 조합의 역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빈센트는 가난한 화가들의 생계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조합 형태의 공동체가 유일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 특유의 실용적 의식이 ‘예술가의 예술가’로 불리던 빈센트에게서 발현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실용성이나 사회주의적인 측면 보다 기독교적인 공동체 의식의 발로로 보아야 옳을지 모른다. 작품을 비싸게 판매한 화가는 그러지 못한 화가들을 위해 헌신을 해야 한다는 기본 취지는 다분히 기독교적이라는 것이다. 빈센트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는 네덜란드가 아니라 바로 프랑스 파리였다. 빈센트는 그것을 간과했는지 모른다. 그중에서도 몽마르트르에서는 예술가가 가난하고 보헤미안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사실 배고픔과 예술의 관계는 정답이 있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궁핍 속에서 상상력이 고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화가조합의 필요성은 가난한 화가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론 가능하지 않았다. 빈센트는 그 벽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빈센트의 주장과는 상관없이 그의 그림엔 진척이 없었다. 상상력이 고갈되어가고 있었다. 파리에 2년 동안 살면서 풍경화와 정물화 등 200점이 넘는 작품을 생산했지만 그의 마음에 드는 작품은 딱히 없었다. 그렇다고 <감자 먹는 사람들> 같은 작품을 그리던 공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미학적인 퇴보이기도 했다. 파리라는 대도시에서의 삶도 지치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그림에서 어떤 확신을 찾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파리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자극이 필요했다. 최소한 답답한 파리를 떠나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미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삶도 지치고 그림도 힘이 없었다. 영감의 자유를 찾아 머나먼 마르티니크로 떠났던 고갱이 부러웠다. 그리고 고갱이라면 함께 공동체를 꾸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빈센트는 파리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2년 동안 파리에 머문 것도 한편으론 긴 시간이었다. 테오에게 토로했듯이 파리에서 산다는 것은 마음의 평화와 자기 평정이 부재하다면 불가능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처럼 신경증 같은 정서적 장애가 있는 사람은 파리에 적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계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바글바글 모여 사는 이 거대한 도시에서 별 볼일 없는 무명화가가 산다는 것도 어찌 보면 사치일 수도 있고 궁색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가 괄시를 받기 일쑤였고, 그 열패감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2년 동안 터득했는지 모른다. 파리에 더 있는 것은 마음의 상처만 키우는 것이었다. 회화의 기본기가 부족하다고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비평가들 감당할 수 없었고, 1프랑에 10장을 팔아야 하는 수모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세잔이 왜 파리를 탈출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세잔처럼 그들의 공격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화풍을 고수하고 싶었다. 사실주의를 단념하고 색채를 더욱 강조하는 자신만의 미학과 기법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파리엔 없는 좀 더 밝은 색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일본 우끼요에 목판화에 표현된 밝고 선명한 색상은 빈센트의 미학적 영감을 각성하게 만들었고 그는 바로 그 색이 발현되는 풍경을 갈망했다. 찾고자 하는 색채는 파리를 비룻한 북 프랑스 어느 곳에도 없었고 물론 네덜란드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찾은 곳이 바로 남프랑스 지역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마르세이유였다, 지중해의 바다와 태양은 황홀할 정도로 눈부셨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에도 많은 화가들이 그곳을 찾았다. 테오도 빈센트의 결정에 동의했다. 여전히 테오는 빈센트를 형으로서 존경하고 있었고, 화가로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자신마저 그에게서 한발 뒤로 물러선다면 빈센트는 금방 모래성처럼 무너질 게 뻔했다. 아무튼, 하지만 빈센트는 마르세이유로 가기 전에 아를에서 일 년 정도 머물기로 했다. 한편으론 도시 생활에서 피폐해진 심신을 회복할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정보에 의하면 아를의 태양도 지중해 보다 나쁘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 고흐, 전설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