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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Jun 05. 2020

느림에 대하여

임도 트레킹의 시작

인간은 원래 느렸다. 불과 150년 전, 자동차나 비행기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해 결코 빠르지 않았다. 직립 후 인간은 그렇게 2백만 년 동안 지구에서 생존해왔다. 사실 느림은 빠름의 상대되는 말이 듯, 사람이 걷는다는 것은 자동차가 나타나기 전에는 당연한 일상이었고, 느리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느리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빠름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사람의 발걸음을 대신하던 운송 수단은 물론이고 정보통신 속도는 빛의 속도에 버금갈 정도로 빨라졌으며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각도 빠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빠름은 인류 문명의 최고의 선이 되었다. 아마도 그 빠름은 미래에도 더욱 가속되어 신의 영역까지 침범할지 모른다. 빠름에 대한 욕망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빠름의 열차 안에서 세상을 내다볼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21세기 현재, 빠름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더라도 몇 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그랬던 것처럼 느림은 아직 퇴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은 자신이 주장한 자연선택설에 따라 빠름이 인간의 유전자를 지배하기를 바라겠지만, 아직은 느림의 유전자는 퇴화되지 않고 굳건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 미래에는 현재의 빠름이 느림을 압도하여 느림이 먼 과거의 화석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은 빠름을 거부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빠름으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하더라도 어느 누가 발목을 잡을 수 없다.     

석파령 오르는 길

임도 트레킹의 시작과 끝은 느림이다. 등산화를 동여매고, 집을 나서 걷기 시작하여, 버스나 전철을 타고, 숲길을 걷고, 다시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걷는 행위는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느림이다. 집을 나서는 순간 느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임도를 걷는 것만 다를 뿐 공간과 시간의 측면에서 볼 때 등산을 갈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정상을 목표로 하는 등산은 최소한의 빠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반면에 임도 트레킹은 정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체력적 고갈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빠름에 대한 부담감은 상대적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등반이 체력과 정신력과 그리고 시간과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면 임도 트레킹은 그런 치열함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여유와 평화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임도 트레킹은 느림을 떼어놓고서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무엇보다 느림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친숙해져야 한다. 목적지가 속한 군소도시의 시내(군내) 버스시간 정보를 얻어, 그 시간에 산행 일정을 맞추어야 하지만, 일정이라는 게 마음 같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다반사다. 자칫 계획된 버스를 놓치면 한두 시간은 물론이고 지역에 따라서는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를 충분하게 두어야 한다. 산행 계획을 짤 때 기다림의 여유가 부족하다면 그 산행은 처음부터 접는 게 현명한 판단이다. 시간에 쫓기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기다림도 임도 트레킹의 일부여야 한다.      

석파령 안부에서 덕두원리 송림원으로 가는 길

걷는다는 것은 느림을 담보로 한다. 처음엔 등산하던 버릇이 남아 초심을 잃고 중반전이 지나면 짐승처럼 야수의 본능이 살아나 걸음이 격해지는 나를 발견하고는 했었다. 그럴 때마다 속도를 늦춘다던지 잠시 휴식을 취하며 흥분을 가라앉힌다. 사실 빨리 간다고 버스를 빨리 타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느림은 지루함과의 싸움이다. 아무리 느림에 공감하지만, 변화가 거의 없는 산길을 몇 시간 걷다 보면 지루해지고 무언가 주변을 빙빙 도는 링반데롱 현상에 빠진 듯 멍한 상태에 매몰 될 수가 있다. 깊은 정적이 감도는 산속을 홀로 무작정 걷고 있는 나는 무엇이며, 무슨 고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죽자 살자 왜 걸어야 하는지 회의가 들 때도 있다. 도돌이표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똑같은 걸음과 풍경은 정말 미칠 것만 같은 지겨움을 줄 때도 있다.      


또한 지나친 느림에의 몰입은 정신적인 고립감을 자초할 수 있다. 스님들의 하안거 동안거 등의 수행생활이나, 수도원에서의 수도사들의 묵상 생활이나 아니면 요즘 종편에서 인기를 끄는 ‘자연인’의 정서적 맥락 등을 추구하려는 의도는 애초부터 전혀 없기에, 잠시 호흡조절을 할 때도 있어야 하며 그런 차원에서 간혹 한두 명 팀을 이루어 산행을 잡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무엇이든 항상 과하면 부작용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법정도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수행에 정진하더라도 고립은 피하라.      

덕두원리 송림원 / 길 따라 내려가면 버스 종점이 있다

일상 밖으로 나온 느림은 욕계에서 요동치던 온갖 형태의 감정 입자들을 잦아들게 한다. 자신의 의지력으로 소멸시키지 못했던 빠름에 지쳐 있던 상념들이 자신도 모르게 느린 걸음에 천착하여 느려지는 것이다. 걸음이 의식의 흐름의 속도를 늦추어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식세계를 한번쯤 느림에 의탁시켜도 손해 볼 것은 없을지 모른다.    


느림에 익숙해지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마음을 그 걸음에 싣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느리다고 육체가 편하지도 않고, 마음 또한 평화롭지 않다. 단지 느림은 일상의 빠름을 잠시 늦추게 하는 브레이크 역할은 할 수 있다. 그래서 느림이 임도 트레킹의 시작이다. 라르고가 아니라 아다지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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