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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Jun 26. 2020

낯설지 않는 여행

가다보면 마주치는 여행

양동 매월리 임도 산행을 하기 위해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열차를 탄 우리는 한 시간 남짓 창밖의 늦가을 풍경을 넋 놓고 감상한 후 양동역에서 내렸다. 승객은 손에 셀 정도로 적었다. 근래에 새로 지은 듯한 역은 서울 근교 전철역에서 볼 수 있는 외벽이 유리로 된 현대식 건물이었다. 면 단위 읍내에 수십 억은 족히 되는 이런 건축물이 과연 적당한지를 놓고 우리는 갑론을박하며 역을 빠져나왔다.      


시골 역전이 그렇듯 한적한 읍내가 낯선 외부인을 반겨(?) 주고 있었다. 두 대 중에 얼마 전 한 기사가 병사하여 한 대 만 운행하고 있는 양동 택시는 정류장에서 무료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에 두 번 운행하는 텅빈 삼신행  읍내 버스와 굳게 문이 닫혀 있는 허름한 식당들, 양동 5일장 터 입구에 대충 물건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슈퍼와 어디선가 익숙한 듯한 금성 다방과 흑진주 미용실이라는 간판 등이 우리에게 시선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양동면 읍내

우리는 편의점에서 필요한 먹을거리를 산 후 운전기사의 환대를 받으며 택시를 타고 목적지인 매월 1리 마을회관으로 들어갔다.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일정이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는데, 도반의 말마따나 지방 경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시골 좁은 길을 돌고 돌아 마을회관 앞에 우리를 부려놓은 택시는 빛의 속도로 꽁무니를 뺐다. 이제 임도 들머리까지 마을길을 따라 한 시간 남짓 걸어야 한다. 다소 쌀쌀한 늦가을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고적한 마을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었다. 처음 보는 불청객을 알아보는 듯 개 짖는 소리가 찌렁찌렁 들려왔다. 가는 동안 한 사람도 볼 수 없는 시골길을 따라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노마드처럼 계속 걸었다. 어지러운 세상의 도피처가 아닌 그저 숲길을 ‘걷는 사람’의 임무에 충실했다.      


4시간 동안 황갈색 낙엽송이 가득 들어찬 임도 숲길을 걸은 후, 아쉬움을 달래며 빠져나오면 매화 2리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 가운데에 오래된 간이역이 추레한 모습으로 우리를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다. 이젠 역으로서 생을 마감하고 옛 추억만을 간직하고 있지만 찾는 이는 없고, 머지않아 을씨년스러운 폐가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건물에서 사진을 찍고 매곡역을 향해 또 마을길을 걸었다.      

임도 들머리로 가는 매월리 마을길 / 전나무 낙엽송이 만추의 풍경을 수놓고 있다

열차 도착시간이 두 시간 이상 남았다. 우리는 역에서 몇 분 거리에 있는 한적한 식당으로 들어가 막걸리를 한잔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늦은 오후 아직 손님이 올 시간이 아닌 듯 식당 안은 썰렁했다. 메뉴 중에 무엇을 먹을지 망설이고 있을 때 주인장이 오늘 우리 김장을 하고 있으니 돼지고기 수육에 김장김치를 준비하겠다고 선수를 쳤고 우린 생각지도 않게 메뉴판에도 없는 김치보쌈을 주문했다. 막걸리에 김장김치 보쌈이라, 그것도 이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우린 컵라면 면발이 잔득 불어 있을 위장에 다 산신도 놀라워할 그 보쌈을 고이 씹어 넘겼다.      

페역이 된 매곡역 / 보존하려고 철거를 하지 않았지만 관리는 거의 되지 않는다.

매곡역은 간이역이다. 두 시간 전에 우리가 사진을 찍었던 폐역도 예전에 간이역이었고, 근래에 준공된 듯한 마치 군 요새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벌판에 덩그러니 서있는데 그곳도 간이역이었다. 벙커 같은 그 건물 안에는 매표소가 없고, 직원도 보이지 않았고, 이동식 간이 화장실이 1층에 놓여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우리는 왕복으로 예매했다) 매표 행위는 열차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우리가 청량리에 하차할 때까지 매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예매권 확인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플랫폼에서 붉은 노을에 물든 가을 녘 매월리 마을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 뒤로 우리가 걸었던 산 능선의 실루엣이 노을에 숨어 흐릿하게 보였다. 항상 그렇듯 이제 곧 어둠이 이 마을을 덮겠지... 멀리서 열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새로 지은 요새 같은 매곡역

임도 산행을 하면서 들머리와 날머리 사이의 산길을 걷는 것이 물론 주목적이지만 그 들머리로 가는 과정과 날머리를 나와 집으로 가는 여정도 산행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등산도 그렇지만 임도 산행에서 만나는 수많은 정경들이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여행이 아니라 간과해서는 안 되는 임도 산행의 일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등산화를 신을 때부터 임도 산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등산화를 풀 때 산행이 끝난다.     


목적지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공간들은 다양한 풍경을 선사한다. 시외버스나 전철이 지나가는 중간에 정류장이나 역이 있는 산들은 바로 트레킹을 시작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고 다시 간선 버스를 타고 산으로 들어가는 경우에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풍경 속을 지나가야 한다. 특히 읍내 버스 여행은 색다른 낯섦을 협소한 공간 안에서 보여준다.     


마실 나갔다 집으로 향하는 구부정하고 손마디가 굵은 촌부들이 무언가 한 무더기 사들고 버스를 힘겹게 오르고, 각자 다른 정거장에서 탄 촌부들을 만나 안부 인사를 나누고 때론 박씨네 뒷담화도 연신 까 대고, 펜션이 많은 지역에서는 주말 손님 받으러 들어가는 여인네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공장이 많은 지역에서는 몇몇 씩 짝을 이룬 외국인들이 지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차장 먼 곳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늦은 오후가 되면, 마실로 친구들 만나러 나가는 젊은 처자가 운전기사와 잘 아는 듯 반갑게 인사를 하고 서로 가족에 대해 안부를 주고받고, 성수기 지난 유원지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는 손님도 없으니 대처에 사는 아들 집으로 나들이를 가면서 같은 동네에서 장사하는 아저씨와 자기네 자식들 자랑을 하고, 어느 전원주택에 사는 듯한 잘 가꾼 여인이 화사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근처에서 농사를 짓는 듯한 여인이 중간에 타자 갑자기 친구를 만난 듯 수다쟁이로 변하여 자기네 집 된장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번 깻잎장아찌는 간장을 잘 끓여 아주 맛있게 됐다는 등 수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작년 여름, 봉미산 임도 산행 후 산음리 버스정류장에서 30분 가까이 기다린 끝에 양평행 군내버스를 탔었다. 오후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버스기사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 두 명을 태우겠다고 지방도로에서 이곳까지 들어온 버스는 다시 나가면서 휴양림 쪽으로 들어가려는 트럭과 마주친다. 피할 곳이 없는 두 대형차는 한동안 서로 대치하였으며, 쌍방향으로 자동차들은 밀리고 그렇게 10분을 지나서야 정리가 된 후 버스는 시원하게 내달린다. 버스는 작은 소리산과 큰 소리산을 한 바퀴 큰 원을 그리면서 계곡 안에 있는 여러 마을을 들락날락거리며 승객을 태우고 내려주면서 양평으로 힘겹게 향한다. 굵은 주름이 가득한 촌부들, 무표정한 외국인 노동자들, 마실나가는 학생들, 도시에 사는 자식들 집으로 나들이 가는 아낙네들, 다람쥐처럼 산에서 날라나디는 약초꾼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탔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그렇게 한 시간을 달린 끝에 지친 버스는 우리를 양평역에 부려놓고 투덜투덜 또 떠난다.     


때론 혼자서 읍내 버스를 통째로 세를 얻을 때도 있다. 종점에서 종점으로 들어가는 내내 버스 안에 운전기사와 나 단 둘이 있을 경우도 있다. 텅 빈 버스 안에서 보이는 세상도 텅 비었고 홀로 가는 나의 내면도 텅 비어진다. 오래된 버스의 엔진 소리만이 세상의 전부이다. 그렇게 버스는 홀로 좁은 꼬부랑 도로를 한가하게 달린다. 아마도 종착지는 저 산 너머 어디인지 모른다.     


사실 시간에 쫓기고 기력이 소진되면 오직 집에 빨리 가야겠다는 욕구가 지배하기 때문에 주위 풍경에 시선이 가지 않는다. 하물며 그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당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육체가 힘이 들 때는 만사 귀찮기 마련이다. 여행이란 감성적 세계는 사치에 불과할 뿐이다.     

매곡역 플랫폼에서 보이는 매곡리 노을

따라서 넉넉한 시간과 체력 소모를 감안하여 전반적인 산행 계획을 짠다. 임도의 체력적 난이도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것들도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들머리가 너무 삭막한 곳은 가급적 피하고, 버스나 기차 시간을 적절하게 고려하여 하루 일정을 잡는다. 숲길 트레킹과 일상 속의 여행도 몸이 조금은 편해야 하고 시간에 쫓기지 않아야 하며 그래야 인식의 활동이 저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신체에서 발생하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변화를 정신력에만 맡겨놓으면 스트레스만 양산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행 찬미자는 아니다. 낯선 세상에서 자아를 찾는 따위의 달콤한 유혹에 동조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800킬로미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행위는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자신의 행위를 정립한다. 하지만 나의 걷는 여행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낯선 세상과 나의 인식의 세계와의 간격을 좁혀가는 과장일 뿐이다. 관찰자일 수밖이 없는 상황이 상수라면 변수는 그 낯섦을 공감하려는 노력이다. 너무 형이상학적인지 모르지만, 그 낯선 세계의 삶과 일상을 무관심하게 지나치지 않고 객관적이지만 한 발 다가가는 겸손한 시선으로 수집하여 마음에 담아 두고 그것을 내재화시키려는 노력이 여행의 참맛은 아닐까. 나의 여행은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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