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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Jul 03. 2020

그 깊은 침묵 속으로

국망봉 임도

경남에 신불산을 중심으로 1000미터가 넘는 준봉들이 여럿 모여 있는데, 산악인들은 그곳을 일명 영남 알프스라고 부른다. 정상부의 멋들어진 억새 평전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에 그에 못지않은 준봉 군락이 있다. 경기 카라코룸(지구 상에서 2번째로 높은 K2와 8000미터 고봉들이 모여 있는 파키스탄의 지역 이름)이라 불리는 가평 용수동이 그곳이다. 해발 1400미터가 넘는 경기 제1봉인 화악산의 중봉, 북봉, 응봉과 해발 1200미터대의 명지산 그리고 1000미터가 넘는 국망봉 석룡산 촛대봉 민둥산 연인산 등이 화악산을 중심으로 모여 있으며 바로 그 준봉들의 중심에 있는 마을이 용수동이다.     


가평역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북면으로 들어가서 다시 2시간마다 용수동으로 들어가는 지선버스를 갈아탄다. 작년까지만 해도 가평역에서 한 번에 용수동까지 버스가 운행되었지만 지금은 중간점인 북면에서 환승을 해야 한다. 하여튼 버스는 화악산과 명지산 등에서 발원하는 가평천 옆으로 굽이굽이 이어진 도로를 따라 산속 깊이 들어간다. 지리산 뱀사골의 본류인 만수천 계곡과 버금가는 깊은 계곡 전경이 도마치 고개를 향해 길게 이어져 있다. 들어갈수록 산은 더 높아지고 골도 더 깊어진다. 명지산을 지나고 강씨봉 들어가는 명화 삼거리를 거치면 화악산의 숨 막힐 것 같은 어떤 거대한 기운이 당신을 잠시 전율케 할 것이다. 지금은 계곡 곳곳에 펜션들이 들어차고 도로도 포장이 되어 산의 깊이감이 반감되었지만, 1990년 초까지만 해도 가평 읍내에서 하루에 서너 대 들어가는 읍내 버스가 북면 목동에서 포장도로 20리, 비포장도로 30리를 더 가야 할 정도로 첩첩산중이었다.     


강씨봉 휴양림까지 들어갔다 나온 버스는 용수동에 등산객들을 부려놓고 회차한다. 식당과 펜션들 몇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는 아침 녘이면 항상 그렇듯 숨을 죽이고 있다. 사방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을 보려면 고개 각도를 높여야 한다. 한여름이지만 서늘한 산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오전 버스는 용수동에서 몇 백 미터 더 들어가 화악산 들머리인 삼팔교에 등산객을 풀어놓았었는데 요즘은 용수동에서 회차를 하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항상 그렇듯 북쪽 하늘을 본다. 이 도로를 따라 20리를 더 가면, 백운산과 국망봉을 거쳐 운악산까지 이르는 한북정맥과 석룡산을 거쳐 화악산 중봉 북봉 응봉에 이르는 능선의 분기점인 해발 700미터가 넘는 도마치 고개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고개를 힘겹게 넘어 다시 30리를 더 달리면 사창리가 나온다. 그 도마치 고개는 산을 좀 안다는 산꾼들에겐 화악정맥의 메카이며 산악인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특히 백운산을 기점으로 화악산 북봉을 거쳐 중봉에 이르는 코스는 겨울 능선 등정 중에 백미이며 지리산 종주와 견주어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범접할 수 없는 존재를 대하듯, 걸어서 영원히 갈 수 없을 것 같은 멀고 먼 그곳에서 시선을 돌린 나는 한북정맥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화전민 수준의 허름한 집 몇 채가 모여 있던 마을은 언제부터인가 도시인들의 안식을 위해 만들어진 아름다운(?) 펜션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예전에, 견치봉에서 하산하다가 집 앞 텃밭에서 밭을 갈던 촌로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몇몇의 펜션 건물을 지나면 현종사 입구가 나온다.      


차도와 바특이 접해 있는 임도 들머리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여기 임도처럼 중간에 계곡을 치고 오르는 경우도 있다. 물론 경반리에서 회목고개를 오르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출발점이 가파른 능선인 경우도 있다. 교통편과 일정에 따라 코스를 정하면 되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현종사 입구에서 몇 백 미터 더 가면, 자연을 죽도록 사랑(?)하는 독특한 사람이 기거하는 조립식 주택을 지나고 그때부터 계곡 트레킹이 시작된다. 용수동을 기점으로 하는 산행은 석룡산이나 화악산이 많고, 견치봉 국망봉이 있는 한북정맥으로 가는 등산객은 드물다. 더구나 이 계곡 코스는 겨우 숲길이 유지될 정도로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는 곳이다.     

용수동에서 임도로 오르는 계곡

오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우거진 숲과 녹색 이끼가 잔뜩 낀 검은색 톤의 각진 너덜들로 형성된 계곡은 물은 좋지만 거칠었다. 특히 계곡 마지막 지점의 형성된지 얼마 안 된 너널지대는 황막하고 위험했다. 이곳과 흡사한 곳이 바로 옆 지역에도 있었다. 용수종에서 도마치 고개로 오르는 중간지점에 적목용소에서 국망봉으로 직접 올라가는 급경사 코스가 있는데, 그 초입에서 무주채폭포까지 가는 계곡이 V협곡처럼 깊으면서 바위들이 날카롭게 각지고 검었다. 편안히 쉴 수 있는 아늑한 분위기가 아니라 한기가 느낄 정도로 음침학고 괴이한 풍경이었다. 하여튼 임도 트레킹에서 이곳 같이 거친 풍경과  접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30분 정도 계곡과 씨름하며 해발 550미터까지 오르면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처럼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평지에서 시작하는 임도와는 달리 이렇게 중간 지점으로 오르는 경우는, 그러니까 임도로 진입할 때의 온도의 변화는 온탕에서 냉탕으로 들어갈 때의 변화처럼 크다. 더구나 된비알과 한바탕 치도곤을 한 경우는 천당에 들어가는 기분이 아닐 수 없다. 이젠 최소한 험한 꼴은 보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지옥을 빠져나온 나는 크게 숨을 한번 고르고 오른쪽 숲길을 걸었다. 반대편으로 가면 이 임도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논남기 계곡이 나오고 굳이 더 가면 일동까지도 이어진다. 이젠 나만의 시간과 텅 빈 공간에 놓여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드디어 숲길이 시작된 것이다.     


임도는 민둥산과 견지봉을 거쳐 국망봉 정상부 바로 직전까지 이어지는 주능선의 약 5부 능선부를 따라 굽이쳐 이어진다. 가다 보면 건너편으로 석룡산과 화악산이 시야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그 두 산을 등반할 때의 수많은 시간이 먼 기억처럼 아련하게 눈앞을 스친다. 앞으로 그 봉우리에 오르는 나를 볼 수 있을지 나는 장담하지 못한다. 아마도 이제는 영원히 이별을 고해야 할지도 모른다. 늙은 알피니스트의 회한만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내면의 구석진 어디에선가 쓰러진 술병처럼 뒹굴고  있을 것이다.     

임도 숲길은 어디든 거의 비슷하다

높고 가파른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산길은, 그 침묵은 산 높이 만큼 무거웠다. 대자연의 깊은 침묵이 어떤 느낌인지 표현해보지 않았지만, 침묵의 중력은 지구의 중력보다 조금은 크다는 것을 인식적으로 알 수는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대자연의 경건함을 실존적으로 인식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 침묵 속을 걸으며, 한 번 그 침묵의 입자를 깊게 들어마셔보면 자연과 나는 결코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게 된다. 그 침묵이 처음엔 거북하지만 접하다 보면 친숙해지고, 사랑하는 여인의 향기처럼 가슴에 와 닫는다.      


산길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변하는 것은 소리이다. 깊은 침묵 속에서 소리들이 미세한 파동을 일으킨다. 먼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들, 인기척에 놀라 도망가는 꿩 날개 소리, 어떤 동물인지 모르지만 수풀을 가르는 소리 등이 귓가를 스쳤다 사라졌다 반복한다. 그리고 발길에 스치는 수풀 소리, 흙길을 닿는 등산화 소리, 몸이 평온할 때나 혹은 약한 경사면을 오를 때 격해지는 숨소리, 심장 뛰는 소리, 크고 작은 바람소리 등이 불규칙하게 파동을 낸다. 소리는 어느 순간 전부 사라지기도 한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다. 소리는 사라지고 침묵의 입자가 마치 암흑물질처럼 나를 둘러쌓고 있다. 불현듯 나의 숨소리가 침묵을 깨트리고 이 산속의 유일한 소리인 양 내면에 파동이 인다. 아, 내면의 소리.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물리적인 에너지에 의해 존재하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침묵이 되어 바람과 함께 이 산 어디론가 떠다니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 언제던가, 연인산 능선에서 만난 바람 소리, 나는 침묵 속에 일렁이는 그 바람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섰다. 그리고 나의 몸이 입자처럼 분해되어 바람에 날려가는 것을, 나는 그 나른함에 한껏 취해 있었다.      


숲 사이로 보였다 사라졌다 반복하는 화악산은 과거 북봉에서 만난 나를 기억하는지 무관심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 화악산은 뒤로 점점 멀어지고 국망봉 줄기가 가까워진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 누가 왔는지 나뭇가지에 꼬리표가 걸려 있다. 이 트레커는 무엇하러 이 텅 빈 산길을 걸었을까. 가끔 산 아래 민가에 사는 원주민들이 1톤 트럭을 몰고 대형 개 여러 마리를 운동시키려고 이 임도에 오는 것을 본 적은 있었는데, 순수한 임도 트레커의 흔적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길을 잃은 등산객인지 모른다.     

화악산 북봉과 중봉이 보인다

그렇게 소리와 침묵과 함께 부대끼며 텅 빈 공간을 걷다가 마지막 지점 경사면에서 가뿐 숨소리를 토해냈다. 드디어 국망봉의 거대한 능선 줄기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바로 저 사나운 산줄기 뒤에 악명 높은 무주채 계곡이 있다. 성난 황소의 불뚝 솟은 핏줄처럼 국망봉 정상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는 나의 시선을 압도하고 있었다. 침묵 뒤에 숨은 악마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몇 년 전 겨울 폭설이 온 후 아무 생각 없이 그 무주채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사투를 벌인 끝에 국망봉에 올랐던 악몽이 바로 앞에서 벌이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뜬 무주채 계곡은 저 숲 뒤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직선거리로 몇 백 미터만 가면 무주채를 만날 수 있지만 길은 계곡부에서 멈춰져 있었다. 능선의 경사도가 심하고 너덜지대도 험하여 더 이상 임도를 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 가지 못할 어두운 숲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나는 갈 수가 없었다. 가고 싶어도 저 험한 경사면을 헤치고 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숨이 가라앉자 나는 발길을 돌렸다. 그래, 다시 왔던 길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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