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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Jul 15. 2020

나를 넘어가는 길

강씨봉 오뚜기 고개

한반도엔 산도 많고 계곡도 많다. 북방 평원지역에 살던 우리의 먼 조상들이 산악지역이 70%가 넘는 한반도로 내려와 살면서 길을 내고 산맥을 넘는 고개도 만들었다. 사실 고개를 넘지 않으면 교통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았다. 고개는 사람들의 소통을 위한 가장 원시적인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              


그들은 산과 산 사이의 낮은 능선부에 길을 내어 산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러 다녔다. 산이 높으면 위험과 노고를 감수하면서 갈지자로 꼬부랑길을 만들었다. 바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이 고갯길이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이 어린 이율곡을 데리고 강릉을 떠나 한양으로 갈 때 넘었던 고개가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해발 832미터의 대관령이었다.               


산이 많은 만큼 고개도 많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첩첩산중 강원도에 가더라도 고갯길이 매우 발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높은 산에도 사람들은 길을 냈다. 해발 1500미터의 함백산 줄기에도 1300미터가 넘는 만항재를 내고, 험악한 설악산과 점봉산이 만나는 지점에도 한계령을 만들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한계령 마루금 남쪽 방향 바로 옆에 연결되어 있는 고개가 있는데, 바로 대동여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는 필노령이다. 현리로 이어지는 그 길은 주변 산세처럼 험하여 사람의 왕래 없이 오랜 시간 방치되어 왔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한동안 군사도로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지금은 이순원의 소설 제목으로 유명세를 타 은비령으로 불리기도 하고, 사람들에 따라서는 필례고개, 피래고개라고도 부른다. 은비령은 국립공원에 위치해서 발굴된 길이지만, 등산을 다니다 보면 오래 전 누군가 걸었던 흔적만 남은 이름없는 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또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큰 고개가 있는 반면에 등산로처럼 작은 오솔길로 된 고개도 많이 남아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넘나들었던 고갯길을 현재의 우리도 이용하고 있으니 그 노고에 감사할 따름이다. 또한 어떤 목적으로든 우마차나 사람들이 다녔던 오래된 고갯길을 확장하여 산림 관리를 목적으로 임도화 한 산길들이 의외로 발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019년 6월 22일 오뚜기령길 능선부

일동면 화대리 무리울 계곡으로 들어가다 보면 가평으로 넘어가는 임도 들머리가 보인다. 지금은 잘 다듬어진 전형적인 임도지만 불과 8년 전만 해도 오프로드(2륜, 4륜 구동 산악용 차량) 마니아들의 성지였다. 이 말은 곧 4륜 구동 산악용 지프차들이 계곡과 임도를 헤집고 다니며 손상을 시켰다는 의미이다. 특히 반대편 논남 계곡은 물도 많고 바위돌과 호박돌들이 산재해 있는 길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오프로더들에겐 최적의 조건이었다. 한동안 그들로 인해 고갯길은 사람들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쑥대밭이 되었다. 지금도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그 찬란했던 역사의 현장을 감상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오뚜기고개에서 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으며 이에 산림청과 지방자치단체에서 오프로드 차량의 출입을 막았고 임도 정비 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오프로드는 미국처럼 넓고 척박한 땅에서 즐길 수 있는 아웃도어의 일종이지  좁고 산림이 대다수인 우리나라에서는 맞지 않는 레포츠임이 분명한 것 같다.               


하여튼 강씨봉 휴양림이 만들어진 후 바위돌 투성이었던 논남 계곡은 정비가 되고, 행정구역이 다른 반대편 일동 방향의 임도도 새롭게 손을 보아 지금의 임도를 완성하였다. 때론 사람의 손이 안 탄 자연 상태를 원하지만 그것은 나의 욕심인지 모른다. 자연 상태와 인위적인 관계를 어떻게 조화롭게 결정짓느냐는 지구인의 영원한 숙제일 게다.               


서론이 길었다. 빨리 임도 안으로 들어가자. 행정 명칭이 화대임도인 오뚜기 고개는 월래 이름은 강씨고개였는데, 육군 8사단에서 그 고갯길을 군사적인 목적으로 몇십 년 전에 확장공사를 하였고, 그에 뜻을 기리고자 8사단의 별명인 오뚜기를 본 따 오뚜기령으로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군사문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 지명이 오뚜기령으로 칭하고 산악인들도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 여기서 굳이 옛 지명을 고집하지는 않겠다. 명칭에 대한 역사성의 중요함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군사문화 또한 비켜갈 수 없는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오뚜기 고개는 말 그대로 해발 700미터가 넘는 능선을 가로질러 가는 산길이다. 산허리를 끼고 굽이쳐 이어지는 전형적인 임도의 형태는 아니다. 따라서 오름길과 내림길이 뚜렷하고 분위기도 전혀 다르다. 그래서 더 매력적인지 모른다. 다른 고개에 비해 오뚜기 고개는 차이의 정도가 분명하다.              

2019년 6월 22일 / 오뚜기령 

한여름 태양은 용광로처럼 뜨겁다. 늦은 오전 귀목봉을 넘어온 태양은 투명한 하늘에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지속된 정비공사가 완료된 지 1년밖에 안 되는 임도는 아직도 공사의 흔적이 남아 흙바람을 일으켰다. 더구나 오프로드 차량에 수난을 겪느라 수풀이 온전치 않아, 흙길은 태양에 꼼짝없이 노출되어 뜨겁게 달구어진다. 태양을 제대로 피할 곳이 없다. 마치 고대 초기 기독교 수도승들이 시나이반도 광야에서 고행의 길을 걷듯이 그 길은 여유와 풍유를 즐길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처음 가는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거품을 물것이다. 임도의 80% 정도가 남서쪽 방향으로 향하고 있고, 주변 산들도 높지 않아 여름이면 태양의 등쌀에 시달려야 한다.              


현재는 말끔히 정비되어 있지만, 몇 년 전까지 만해도 산사태로 참혹한 상태였던 180도로 휘어진 지점을 지나고, 차마고도처럼 급경사면을 절개해 만든 오르막 후반부의 뜨겁게 달아오른 흙길을 통과하면 전혀 새로운 세상이 당신의 노고를 치하할 것이다. 이젠 당신에게 짙은 숲과 시원한 계곡을 즐길 자유가 주어진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논남 계곡은 오후가 늦어질수록 계곡의 풍미를 더해간다.       


오뚜기 고개는 북으로는 강씨봉 국망봉, 남으로는 귀목봉 명지산 그리고 청계산, 동으로는 논남 계곡, 서로는 일동으로 가는 한북정맥의 중요한 길목이다. 특히 정맥꾼들에겐 전진을 위한 쉼터로서 그리고 하산의 시작점으로서 애환이 진하게 배어있는 고개이다.               


뙤약볕에 달궈진 몸도 식히고, 배도 채웠으니 이제 또 걸어야 한다. 거의 고갯마루부터 시작하는 계곡은 특이한 지형에 따라 완만하고 길게 이어져 강씨봉 휴양림을 지난다. 지금은 너무나 잘 비되어 있어 걱정이 되지만, 위에서 얘기했듯이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논남 계곡은 혹독한 수난을 겪고 있었다. 수량이 풍부하고 경사가 완만하여 비가 좀 많이 내리면 물이 불어나 임도를 집어삼키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였다. 옛길은 계곡 천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에 대충 돌다리를 놓아 개천을 수없이 건너야 하며, 수량이 갑자기 넘치면 기존의 길조차도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길인지 물인지 모를 정도로 계곡은 제 마음대로였다. 호박돌이 많은 지역은 아예 길의 존재를 없애버렸다. 더구나 그런 지역에, 그것도 비 온 뒤에 오프로드 차량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밀고 들어오니 계곡은 온전할 수 없었다. 자연과 인간이 번갈아 가며 이 계곡을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2019년 6월 22일 / 오뚜기령에서 논남기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

원래 이 논남 계곡의 이름은 위에서 밝혔듯이 강씨 계곡이었다고 한다. 정확한 연대가 나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조선시대 후기 정도 되는 시절에 강씨 성을 가진 일군의 씨족들이 이 계곡부에 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고 전한다. 계곡물이 풍족하고 지형도 완만하여 화전을 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그들이 왜 이 깊은 산속에 들어와 숨어서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예전에는 어떤 죄목으로 포도청의 추적을 피해 산속 깊이 들어가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그들도 그런 성격의 화전민이 아니었나 하고 추정해 본다.          


하여튼 강씨들은 이곳에 살면서 삶의 질을 위해 최소한 물물교환과 경제적 활동을 본능적으로 추구했을 것이다. 그 욕망이 일동 장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개척하는 원동력이 되었을지 모른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가평군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지금의 행정구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일동 부근을 왕래했을 것이다. 현재의 지도를 보아도 그런 선택은 현명한 것이었다. 가평이나 춘천은 거리상으로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지구 상에 있는 모든 길은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그냥 허투루 만들어지는 길은 없다. 그 목적을 여기서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오뚜기 고개를 보면, 길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임도는 물론이고 큰 도로든 산속의 오솔길이든 그 길은 어떤 목적과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종교적인 목적이 있고, 실크로드는 경제적 목적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또한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소통으로서의 길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비록 상대적으로 미미하지만 여기서 살았던 강씨들도 근본적인 목적은 다를 수 없었다. 더구나 험난한 산 능선과 계곡에 길을 내는 지난한 노동을 감수할 정도로 목적은 그만큼 그들에게 소중했는지 모른다.               

2019년 6월 22일 / 논남기 계곡 / 이 길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프로더들의 성지였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멀지 않았다. 도성고개로 가는 삼거리를 지나 조금만 가면 휴양림 건물들이 나오고, 그렇게 12킬로 미터의 오늘 트레킹은 끝난다.           


강씨봉 휴양림이 있는 이곳은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이동할 수 있어 지형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 있지만 지도를 놓고 위치를 확인해보면 간접적으로 그 깊이를 가름할 수 있다. 오래전에, 그러니까 무서운 줄 모르고 미친 듯이 산에 다닐 때 산악 도반과 함께 명지산에 갔다가 하산하면서 길을 잃고, 여기서 2~3킬로 미터 아래에 있는 임산 계곡 입구와 소락개 중간 지점으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산에서 치도곤을 치르느라 행색은 한마디로 무장공비 수준이었다. 그 당시 찍은 사진이 사진첩 어디엔가 있는 것 같은데, 그 당시 이 길은 우마차 하나 정도 다닐 수 있는 지금의 임도보다 좁은 오솔길이었다. 수풀로 반쯤 덮인 길에서 배낭을 깔고 앉아 지도를 점검하며 쉬고 있을 때,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한 촌부가 태연스럽게 구부정한 허리에 뒷짐을 진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 깊은 산골에 웬 할머니?... 우리는 귀곡산장의 주인 노파를 마주친 듯 잠시 동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계곡 안에 민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침착하게(?) 그 할머니에게 적목리 큰길까지 나가려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고, 한 20여분 정도 걸린다는 답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20분이 1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몰랐다. 잠시 후 동료 하나가 속았다고 울부짖었으니까.              


휴양림 출입구 매표소 건물 옆에 잠시 쉴 수 있는 목재 벤치와 테이블이 있다. 나는 그늘진 그 벤치에 지친 몸을 묻고 배낭을 열어 보온병을 꺼냈다.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던 커피를 시에라 컵에 탁탁 털었다. 미지근하게 식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호사였다. 산 너머로 오늘 유난히 뜨거웠던 태양이 사라지고 짙은 그늘이 오늘의 기나긴 여정을 반추시키고 있었다. 몸이 나른해진다. 시원한 계곡 바람이 젖은 목덜미를 스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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