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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Jul 30. 2020

무아를 찾아서

용추계곡 트레킹

수많은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여 때론 부서져 조각이 나기도 하고 때론 결합하여 커지기도 하고 그리고 먼지처럼 사라지기도 하는 이 사바세계에서 잠시 떠나 보는 것도 괜찮을지 모른다. 실행에 옮기는 것이 생각처럼 쉽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이 각박한 세상을 벗어나 주일 하루라도 입을 닫고 묵상 여행을 떠나는,  그리하여 잠시 낯선 곳의 객이 되는 것도 기분 전환에 좋은 방법일 것이다.


연식이 오래될수록 육체는 기능이 약화되고 정신도 혼탁해지며 그런 현상을 인지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새로운 세계를 추구한다. 부처의 말마따나 태어나는 자체가 괴로움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이가 들수록 근심 걱정 등 정신적인 고통의 수치는 상승하기 마련이다. 괴로움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은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갈구해 왔다. 부처는 깨달음의 원리와 방법론을 사성제로 축약하여 설파했는데, 즉 고집멸도의 첫 번째가 괴로움을 인식하는 고이다.      


인간의 악업과 번뇌의 근원을 무명이라고 한다. 부연 설명을 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괴로운 존재인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무지 즉 무명이며 그 무명은 탐진치 중에 하나인 어리석음이다. 그 어리석음을 인식의 세계로 끌어올려 각성하는 순간부터 내적 변화를 위한 수행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무명을 타파하지 않으면 온갖 상념은 의식의 저수지에 고여 부패하고 번뇌조차도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성제의 믿음이 인간 정신사의 거창한 담론이라 다가가기 힘들다면, 소박하게나마 삶에 지치고 고달프다는 것을 느낄 때 그것 또한 무명으로부터의 탈피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와 팔정도와 십이연기를 굳이 골치 아프게 학습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 무명이라는 들보를 걷어내고 세상을 한번 둘러보면 대게의 중생들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찾아 나선다. 수행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2019년 10월 19일     연인산 임도

현리에서 마일리 종점으로 들어가는 읍내 버스엔 항상 나 혼자였다. 운행거리가 짧은 이유도 있겠지만, 다른 승객이 타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운전기사를 둔 자가용 버스였다. 언제가 나는 운전기사에게 “이렇게 사람이 없어서 기름값이나 나오겠어요?”라고 물었다. 그때 기사는 “시골 버스는 거의 공공재라 망하지는 않고, 주민 한 사람이라도 필요하다면 어디든 들어가야 하는 게 이곳 법칙”이라고 대답했다.


버스기사한테 수고하세요라고 넙죽 인사를 하고 내린 나는 청명한 아침 햇살이 산 능선에 걸려있는 계곡길로 보무도 당당하게 발걸음 옮겼다. 비록 현리 읍내와 멀지 않은 곳이지만 들머리부터 중량감 있는 산세와 맞닥뜨리고, 울창한 숲에서 발산하는 신선한 에너지가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정오가 넘어야 태양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계곡은 깊다.  


이 계곡 들머리는 국수당이라고도 부른다. 국수당은 일종의 민간신앙의 신전이었던 서낭당 혹은 성황당의 여러 방언 중에 하나다. 그러니까 현리라는 마을을 수호하는 신을 모신 성황당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번성했던 무속문화 붐에 따라 마을 사람들은 연인산과 매봉을 가르는 이곳에 사당을 짓고 마을의 안녕을 위해 굿을 했다. 그만큼 이 곳은 영험한 신기가 발호하는 지역이었다.  


마을을 지나자마자 산행이 시작된다. 임도의 기점인 우정고개까지 오르려면 한 시간 정도 등산을 해야 한다. 경사가 심하지는 않지만 너덜지대가 많아 편안하게 오르지는 못한다. 사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등산로엔 이렇게 너덜이 많지 않았다. 그 사이에 험악한 물 폭탄을 몇 번 맞은 후로 길이 이렇게 거칠어졌다. 수십 년 동안 쌓였던 흙이 씻겨 나가고 숨어 있던 발톱이 드러나 산객들의 발걸음을 방해했다. 특히 마지막 후반부는 정말 삭막할 정도로 속살이 까발려져 있었다. 아마도 이 길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몇십 년은 걸릴 것이다. 사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변화는 지극히 당연한 대자연의 역동적인 현상이며, 인간이 그런 변화를 걱정한다는 게 한편으론 자연에 대한 우월적 편향인지 모른다.

2019년 6월 1일   연인산 임도

너덜지대로 변한 마지막 경사면을 용을 쓰고 오르면 넓은 우정고개 마루금이 나온다. 해발 650미터 정도 되는 이곳은 연인산과 매봉을 잇는 연결점이며 또한 용추 계곡과 회목고개가 이어지는 연인산 도립공원의 교통 요충지이다. 요즘은 본연의 살림 관리용 목적보다 아웃도어를 위한 숲길로 더 각광을 받고 있는 임도이다. 여타의 임도에 비해 MTB와 등산과 백팩킹과 도보 여행지로서 이름이 회자되는 편이어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국립공원처럼 대량의 인파가 몰리지는 않는다. 이 고갯마루에서 네댓 명 이상 마주친 적이 없을 정도로 어느 쪽 길이든 한적했다.  


이제 노고의 대가로 안식의 시간을 얻은 우리는 한숨 쉰 후 숲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경사가 없는 구릉지역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마루금에서 조금만 가면 물소리가 들리는데 바로 우리가 갈 용추계곡의 발원지이다. 계곡이 길면 지류도 많기 때문에 용추계곡은 항상 풍족한 물을 보유하고 있다.     


레바논 백향목 지대처럼 장대한 모습의 잣나무 숲과 이제 제법 가을의 풍미를 더해주는 단풍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길을 나는 천상의 정원이라고 불렀다. 오랜 시간 동안 눈과 비와 사람의 발자국에 다져진 낙엽은 발의 무게를 흡수하고, 산중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전원교향곡 2번처럼 잔잔하게 고요 속에서 파동을 일으킨다. 조금 전까지 긴장되어 있던 오감은 나른해진다. 언젠가 문득 스쳐 지나간 풍경 사진일 수도 있고, 산티아고 순례길 어느 숲에서 본 풍경처럼, 아니면 무의식에 잠재해 있던 아득한 먼 기억 속의 희미한 흑백 사진처럼 숲길은 그렇게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 산 아래 대처에서 따라왔던 세속의 상념은 언제부터인가 시나브로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의식도 물소리의 파동에 실려 어디론가 소멸된다. 아무도 없다. 지금 이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은 이 숲 밖에 없다. 나도 없다.          


이 숲길을 처음 밟을 때는 눈이 정강이까지 빠지는 어느 해 겨울이었다. 지금은 단풍이 덥고 있지만 그때는 폭설이 내린 후라 하얀 눈이 그 단풍을 대신하고 있었다. 눈 천국이었다. 연인산 주봉에서 하산하느라 몸은 눈과 땀으로 젖어 있었고, 길 중간에 점점이 새겨진 한 명의 발자국을 따라 나는 홀로 걸었다. 산속 눈길을 걷는다는 것은 월래 마음이 평온해지지 않지만 그때의 눈길은 담담하고 무언가 안식이 보장된 미래가 올 것이라는 훈훈함이 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 잘 될 거야...


그렇게 삼매경에 빠져 걷다 보면 내 몸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용추계곡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백둔리로 이어지는 임도에서 빠져나온 길은 급격하게 계곡으로 내려간다. 우정계곡과 연인산 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이 합쳐져 본격적인 본류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물소리는 들리지만 물은 바위 아래로 흘러 보이지 않는다. 터널 같은 짙은 그늘이 계곡과 우리를 지긋이 덥고 있었다.     


용추계곡은 계곡의 사이즈나 수려함으로 볼 때 경기도에서는 물론 최상위권이고 전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전국 10대 계곡을 검색하면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계곡이 도끼 자국처럼 깊고, 실핏줄처럼 굽이쳐 길어서 기온이 항상 아래 마을보다 몇 도 낮다.      

2019년 10월 19일 용추계곡

물소리가 들린다. 우정계곡을 떠나면서부터 어렴풋이 들려오던 물소리는 계속 귀가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물은 졸졸졸 소리를 내며 바위 밑으로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내고 이내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물은 보이지 않지만 소리는 계속 끊임없이 들려온다. 아마도 이 물소리는 버스를 탈 때까지 계속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강아지처럼 소리를 질러대던 물은 여러 지류와 합쳐지면서 큰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중력 가속을 받은 물은 운동에너지를 분출하며 서로 충돌하고 보존하면서 엔탈피 수치도 급상승을 한다. 용암처럼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물은 세상에 모습을 보일 때는 힘을 빼고 얌전해진다. 그 물에 우리는 수건을 적시며 바위 턱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시 물은 아래로 흐르고 다른 계곡과 만나면서 몸집을 한껏 키운다. 더구나 비가 조금이라도 많이 오면 크고 작은 거친 바위들과 충돌하면서 물줄기는 사나워지고 괴성을 토해낸다. 바위가 많고 틈이 좁을수록 물은 분노하듯이 포효를 한다. 마치 우리를 빠져나가려는 사자와 같이 굉음을 질러댄다. 그러다 소를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소리는 평화롭게 잦아든다. 맑고 투명한 물은 녹색 이끼를 반사하기도 하고, 때론 만산홍엽과 황갈색 낙엽이 혼재한 천상의 색상을 빚어내기도 한다. 기괴한 절벽의 소나무와 회백색의 바위와 잘 말라비틀어진 그 흔한 떡갈나무와 수많은 홍엽 등이 그 흐르는 물을 향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함께 고락을 나눈 물이 이제 장구한 시간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여행이 시작된다.  

2019년 10월 19일 용추계곡

숲이 부실하고 물소리만 요란하다면 분위기가 다소 불안정할 수 있다.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용소 계곡이나 덕산기 계곡처럼 넓고 수량이 풍부하지만 상대적으로 숲이 부족하면 평안함을 주지 못한다. 물과 숲의 조화는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용추계곡의 두터운 숲은 방음장치처럼 물소리를 완벽하게 흡수하고 계곡에게 안정감을 주며 그 합은 순간의 깨달음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사실 등반과 숲길, 계곡 트래킹 3개 종목을 한 묶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코스는 흔하지 않다. 물론 작위적으로 코스를 만들 수는 있지만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코스는 내가 알기론 여기 이외는 없다. 적당한 마운티어링과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천상의 정원과 그리고 무아의 세계로 향하는 계곡의 절경은 바로 욕계와 단절하고 색계의 문을 열게 한다. 거부할 수 없는 일상의 무게와 마음을 혼탁하게 했던 번뇌가 이 숲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짧게나마 경험할 수 있다면 오늘의 여정은 부족함이 없을지 모른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걸었던 여정은 한낮 몇 페이지의 기억으로 남아 이름도 분명치 않은 폴더 안에 쳐 박혀 열어보는 사람 없이 그렇게 먼지만 쌓여 갈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가 걸었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타인을 향해 자진해서 말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그 시간에 대해 캐묻지도 않을 게다. 그렇게 세상은 무심하게 움직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내일 아침 나는 지하철 2호선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이어폰을 꽂고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을 듣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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