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호용 Jul 22. 2020

멀고 먼 시간 앞에서

화악리 임도

지금은 지리산이 평화롭지만 한국전쟁 전후의 지리산은 게릴라전이 벌어지는 전장 터였다.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과 그들을 쫓는 토벌대의 전투로 지리산은 자신과는 상관없이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그 참혹했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문학과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져 지금도 전해지며, 지리산 뱀사골 입구에 가면 빨치산과 토벌대가 사용했던 유품, 사진 그리고 충혼탑을 볼 수 있다.           


지리산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화악산도 그에 못지않은 이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화악산은 38선이 지나는 지역으로 북쪽 넘어 사창리는 북한 땅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었고, 북한군 패잔병들이 화악산으로 숨어들어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곳이었다. 종전 후에도 정상부를 비롯해 마을 곳곳에 미군기지와 한국군 부대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무장공비들이 수시로 출몰하였다고 전한다. 그 중심이 바로 실운현 넘어 사창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화악리 일대이다.          


화악리 건들내로 향하던 가평발 군내버스는 중간에 홍적리로 들어가 우리를 내려놓고 다시 나갔다. 하루에 몇 사람이나 탔을지 모를 버스정류장 부스가 우리를 반갑게 마중하고, 역시나 마을은 아직도 아침 정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습한 흙냄새와 가축 배설물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배낭을 고쳐 메고 홍적 고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팔트 2차선 도로를 덮었던 태양은 마을을 벗어나자 종적을 감추었다. 고갯마루까지 가려면 어쩔 수 없이 2킬로미터 남짓 아스팔트 도로를 통과해야 한다.          


오래전, 화악리에 살던 화전민들이 화천으로 가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다. 홍적 고개 마루금을 넘어가면 춘천 지암리이고, 마루금을 가로질러 가는 임도가 있는데, 멀게는 춘천 서면에서 시작해 이곳을 지나 촉대봉과 응봉까지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실운현에서 시작해 응봉 촉대봉 능선부를 거친 등산로가 이곳을 지나 몽덕산과 북배산 가덕산을 넘어 삼악산에서 끝난다. 그리니까 홍적 고개는 6 거리인 셈이다. 한북정맥의 오뚜기 고개가 산악인의 애환이 배어있는 곳이 듯, 이곳도 그들의 거친 숨결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2019년 2월 9일

우리는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임도로 들어간다. 숲길을 처음 밟는 느낌은 언제나 새롭다. 임도는 어디든 비슷하지만 처음엔 설레기 마련이다. 그리고 초등하는 산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앞으로 숲길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약간은 긴장감이 돌기도 한다. 처음엔 항상 그렇다.          


봄이 오려면 아직 먼 듯 찬 기운이 귓가를 스친다. 깊이 들어갈수록 침묵의 층이 두터워지고, 어디선가 형체를 알 수 없는 냄새가 코끝에서 아른거렸다.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듯 냄새는 자신의 정체를 쉽게 들어내지 않았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경사면으로 오르느라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순간 그 입자가 콧속으로 훅하고 들어간다. 겨우내 말라비틀어진 수풀이 봄의 기운은 받은 듯 건조하면서 습한, 하지만 낯설지 않은 오래된 기억 속의 향기였다. 나는 산 냄새가 참 좋구나라고 중얼거리듯이 말을 했다. 옆에 가던 도반이 이 말을 들었는지 자신도 코를 벌렁거리며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마도 그 냄새는 분자로 만들어진 실체가 아니라 뉴런의 충동적인 자극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하여튼 실재든 관념이든 산 냄새에 취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두 시간 가까이 남쪽 지능선을 타고 가던 임도가 북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면서 탁 트인 조망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때서야 병풍처럼 펼쳐진 화악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 임도 중에 가장 높은 곳이다. 임도 트레킹에서 조망을 요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장쾌한 조망을 선물 받는 경우도 가끔은 있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파란 하늘에 그려진 능선의 실루엣을 잠시 감상하고 있었다. 능선 너머 익근리에서 시작한 임도가 애기 고개를 넘어 산허리를 휘감아 돌아 남쪽으로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익근리와 화악리를 잇는 지름길이었다.        

2020년 2월 9일

조망은 하룻밤의 꿈이었는지 모른다. 다시 드라마틱이라곤 전혀 없는 길을 지루하게 걷다가, 마치 도끼 자국처럼 예각으로 움푹 파인 계곡 끝부분에서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계곡 입구 노씨터에서 시작한 길이 오래전부터 폐가로 방치되어 있는 화명사 터를 지나 실가락처럼 가늘어지면서 우리에게로 오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10년 전인가, 주인 없는 그 절터에서 왜 스님이 절을 떠났는지 상상을 하며 사진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천국이었다는 것을 조금 후에 알게 되었다. 계곡 끝머리에서 알바를 여러 번 한 끝에 겨우 이 임도에 올랐지만, 여기서 촉대봉으로 오르는 들머리를 찾을 수 없어 지도를 원망하고 임도를 원망하다가, 등산로가 명확하지 않은 능선을 악전고투 끝에 치고 올라갔던 기억이 영사기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늦가을 낙엽이 무릎까지 빠지는 급경사면을 거친 숨을 토해내며 기어 오르는 나를 잠시 소환했다. 그리고 나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시간과 영원히 이별을 고하는 회한의 미소인지 모른다.       


그렇게 기억의 여운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텅 빈 정적 속을 걷고 있을 때 천막 하나가 길옆에 있는 게 보였다.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이라는 팻말도 보였다. 주말이어서인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천막 옆에 삽과 곡괭이 등 발굴 도구들이 가지런히 탁자에 놓여 있었고, 천막 안을 보려고 했으나 닫혀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후퇴하던 북한군 패잔병들이 화악산 계곡과 기슭으로 숨어들었고, 그들을 추적하는 남한의 수색대가 만들어져 한동안 이 화악리와 익근리 적목리 지역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혼돈의 공간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깊은 산속에서 발견된 전사자 유해가 그 당시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이 숲 어디에선가 수색대의 추적을 피해 작은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있는 어린 북한군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2019년 5월 11일

종전 후에도 이곳은 평화롭지 않았다. 무장공비들은 자신의 은폐를 위해 험준한 산을 타고 침투하기 때문에 이곳은 적절한 루트였다고 한다. 바로 무장공비 출몰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부대가 편의공작대로서, 무술을 습득한 대원들은 화전민, 장돌뱅이, 고물상 등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마을에  잠입하여 간첩이나 공비들을 색출하였다. 민가나 토굴로 위장한 편의공작부대들이 여기뿐만 아니라 휴전선과 인접한 마을 곳곳에 만들어져 대간첩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당시는 휴전선 철책이 부실하고 경계 태세가 취약하여 무장공비들이 제집 드나들 듯이 했고, 우리 측 또한 영화 실미도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심리전의 일환으로 북파공작원을 북으로 보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불행한 시절이었다.           


길은 화악 계곡의 중심을 향해 지겹도록 끝없이 이어진다.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던 임도가 이제 계곡으로 난 도로와 가까워지면서 건너편으로 건들내가 시야에 들어온다. 화악산 중봉으로 오르는 들머리 마을이다. 이곳과 중봉 너머에 있는 조무락 계곡이 화악산의 여러 기점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붐빈다고 해야 산악회 관광차로 오지 않는 한 10여 명 남짓이지만 그래도 북한산을 예로 들면 우이동이나 불광동 들머리쯤 되는 곳이다.      


토마토를 입에 욱여넣으며 않아 있었던 계곡 바위 턱과 습기 가득한 나무 썩는 냄새와 계곡이 끝나고 죽음의 능선부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반쯤 기울어진 이정표와 발아래 떨어지는 굵은 땀방울과 거친 숨소리와 무거워지는 걸음... 그러게 살아난 시간들이 돌아와 잠시 나의 의식을 휘어 감고 있었다.          


들머리에서 한 시간 남짓 계곡과 능선을 숨 가쁘게 오르다 보면 넓지 않은 구릉지가 나오고 그 끝나는 지점에 정적 속에 잠겨있는 오래된 건물 하나가 보이는데 바로 천도교 수도원이다. 그냥 절집 비슷한 건물쯤으로 가볍게 생각하기 쉽지만, 그 건물은 구한말 동학교도들이 관가에 쫓겨 이곳까지 들어와 화전을 할 때 지은 집이라고 한다. 물론 그 당시 지은 집이 지금껏 남아 있는 건 아니다. 한국전쟁과 냉전시대 등 격변의 시대를 겪으면서 여러 차례 증개축을 하여 지금의 건물이 만들어졌고, 이젠 수도원으로 목적도 바뀌었다.          

화악산 중봉

동학교도들만 이 화악리에 들어와 화전을 일군 것이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은둔자의 삶을 강요받은 민중과 몇 대 째 화전을 하던 떠돌이 화전민들이 꾸역꾸역 들어와 초가집보다 못한 너와집을 짓고 살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들의 호수가 이 화악리에 만 약 200이나 되었다고 하니 웬만한 시골 마을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하지만 한국전쟁과 그 후의 야만의 시대에도 잡초처럼 생존해 왔던 사연 많은 화전민들도 70년대 후반 대대적인 정비사업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군사시절이니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산기슭 곳곳에 화전 터가 남아 궁핍했던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화전은 인간이 살아가는 마지막 방법이라고 한다. 남의 집에서 종노릇 하는 것은 최소한 곡기는 끊어지지 않으니 호사 중 호사였다. 종이나 백정보다 못한 극빈의 삶이 화전이었다. 산비탈에서 나무뿌리를 뽑고, 흙보다 많은 돌을 걷어내고 더구나 비 한번 쏟아지면 매번 다시 돌을 걷어내야 하는 노동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그 틈으로 텃밭 수준의 밭을 가꾸는 행위는 상상만 해도 입에서 단내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초근목피는 일상사였는지 모른다. 늑대라도 되었으면 산속을 뛰어다니며 동물이라도 잡아먹을 자유가 있지만 사람은 그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가혹한 삶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 속을 숨 가쁘게 지나온 두 다리는 이제 무거워지고 있었다. 종착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실운현으로 오르는 도로가 보이는 지점에서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지친 다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물통을 다 비웠다. 잔설의 습한 찬기가 코끝을 스친다. 저 아래 도로에서 남쪽으로 한 20분 정도 내려가면 건들래 버스 종점이다. 이제 이 숲길과의 이별도 지척이다. 하루 종일 밟고 온 숲길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궁박했고 야만적이었고 지난했던 과거의 시간과 이제 고별을 해야 하지만 그 시간은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창리 장터에 가서 팔 곡물과 약초를 메고 저 가파른 실운현을 넘어가는 어느 화전민의 쩔은 땀 냄새가 콧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전 09화 나를 넘어가는 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