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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Aug 12. 2020

은둔의 땅

사명산 임도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춘천에서 양구를 가려면 추곡리부터 이어지는 꼬부랑길을 거쳐야 했다. 마치 산허리를 굽이쳐 도는 임도처럼 그 지방도로는 소양호 수면을 따라 꼬부랑꼬부랑 이어지다 선착장이 있는 석현리에서 긴 여정을 끝냈다. 그중에서도 굴곡이 가장 심한 지점이 웅진리였다.          


세계 제1의 토목 기술로 뚫어 놓은 웅진 터널 바로 앞에서 우리는 경황없이 내렸다. 춘천역에서 우리를 태운 시외버스는 하드코어 메탈 같은 굉음이 토해져 나오는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바로 터널 입구에 정류장을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깊은 꼬부랑 소양강 수면 때문이라는 사실을 처음엔 몰랐었다. 이런 자동차들이 거침없이 내달리는 험악한 곳에서 누가 타고 내린다고 정류장을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로에서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세상은 갑자기 돌변한다. 웅진리로 들어가는 옛길을 무시하고 터널을 뚫어놓은 관계로 위치적으로 볼 때 터널 입구에 정류장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신도로 아래에 옛길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옛길로 내려와 배낭을 추스르고 사명산을 향해 걸었다. 도로는 텅 빈 채 정적에 쌓여 있었다. 살벌한 신도로와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꼬부랑길이라는 관광지명으로 명명된 소양강 옛길은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로 변해 있었다. 대처에서 양구로 오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이 도로는 이제 자전거나 모터사이클 족들의 전유물이 되었고 간혹 우리 같은 산객들이 드나드는 통로가 되어 있었다.          

2019년 8월 17일 / 웅진리 들머리로 가는 소양강 옛길

사실 오래전에 양구나 인제에서 군 생활을 한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휴가 나올 때 거의 소양강 뱃길을 이용해 춘천으로 나왔다고 했다. 산도 많고 높아 도로들이 안데스 산맥의 도로처럼 온통 꼬부랑 천국이어서 버스로 춘천으로 나가는 시간보다 뱃길을 이용하는 게 훨씬 절약된다고 했다. 몇 년 전 나도 가리산에 갔다가 소양강가에 있는 물노리 뱃터에서 배를 타고 신이리 뱃터를 거쳐 30분 만에 소양댐으로 나왔는데, 홍천을 거쳐 춘천으로 가는 대중교통의 여정을 생각해보면 뱃길이 훨씬 빠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웅진리 마을 입구에서 간단하게 사진을 찍은 우리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강원도 산세의 특징은 구릉지가 발달되어 있으며 그 비탈면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산이 많은 지역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 마을도 소양호 수면부터 시작된 구릉지는 표교차 300미터 이상 올라가야 끝이 났으며, 마을 도로도 갈 짓 자를 만들지 않고 완만하게 거의 일직선으로 올라가 끝난다.

            

강원도 산악지역의 특색이 고랭지 밭이 듯, 이 마을도 계곡을 중심으로 비탈면 따라 논과 밭이 층층이 형성되어 있고 그 사이로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반대편 능선 면에는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 주택 몇 채가 소양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적막하고 평화로운 마을을 지나 30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뒤로 V자 능선 사이로 소양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불과 해발 400미터밖에 안 되지만 넓은 구릉지의 특성상 조망이 뛰어나다. 강 너머 첩첩산중 맨 뒤에 가리산이 어렴풋이 보인다.     

2019년 8월 17일 / 마을 구릉에서 본 소양호, 그리고 그 너머 가리산

이제 도로 끝에 있는 무량사와 선정사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울창한 숲을 헤치고 20분 정도 수량이 풍부한 계곡을 따라 오르면 드디어 우리가 고대하던 임도에 당도한다. 임도를 가로질러 급경사와 한바탕 격렬하게 씨름을 하면 사명산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봉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명산은 2미터 부족한 1200미터이며, 능선 줄기는 주엽산과 부용산과 오봉을 거쳐 춘천에 있는 마적산까지 이어지고, 파라호와 소양호의 중간에 정확히 위치하고 있다. 비록 군립공원도 안되지만 산악인들에겐 필히 거쳐야 할 전공과목이다. 정상에서 파라호와 소양호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산이며 그 모습이 위풍당당하고 어느 코스를 가나 매력적인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관광지화 하기엔 지정학적으로 약점이 많아 기본적으로 사람의 왕래가 적고 따라서 산 곳곳은 아직도 자연의 본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산은 좋으나 이곳을 찾는 외지인은 소수라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은거하고 있는 땅인지 모른다.

          

임도가 그 육중한 산 허리를 뱀처럼 감아 돌고 있다. 능선과 골을 따라 굽이쳐 감아 도는 임도는 양구 읍내 쪽에서 시작해 사명산 허리를 돌아 죽엽산을 거쳐 부용산까지 마치 차마고도처럼 장구한 여정을 거친다. 우리가 가는 코스는 사명산 동쪽 면 임도를 한 바퀴 도는 일명 환종주다. 비박 장비를 메고 1박을 하며 양구에서 하우고개까지 임도 종주를 하는 꿈을 꾸어보면 참 달콤하지 않을 수 없다. 산길에 텐트를 치고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는 나를 상상해 본다.

     

2019년 8월 17일 / 임도에서 사명산으로 오르는 들머리

우리는 산악회 꼬리표가 달린 사명산 등산로를 뒤로 하고 임도를 향해 걸었다. 산길 풍경이 어디나 비슷하고 그 길을 걷는 우리의 발걸음도 다르지 않았다. 풍경과 발걸음은 지극히 단순하며 그것은 몇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다. 풍경도 반복되고 발걸음도 볼트를 조이는 자동 기계처럼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다. 시지프스는 제우스에게 밉보여 무한 반복의 죄를 받았지만 나는 왜 이 단순한 행위에 집착하는지 때론 나에게 질문은 던지기도 한다. 문득 은둔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세상으로부터의 단절, 나로부터의 단절은 이렇게 단순함으로부터 촉발되는지 모른다.

          

기원후 330년 경, 초기 기독교 성립과정에서 수도승을 자처한 교부들이 이집트의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수도승들의 사부로 칭송받은 사막의 교부 안토니우스와 아문으로부터 시작된 이집트 사막지역의 수도원 운동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던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 참석해 중추적인 역할을 한 에바그리우스가 직접 참여할 정도로 당시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요한 현상이었다.

      

에바그리우스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금욕적인 고행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런 영적 믿음을 실천에 옮긴 선구자적인 수도승이었다. 뛰어난 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사제로서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을 거쳐 이집트 사막 끝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자처했다. 알렉산드리아와 팔레스타인과 그리고 당시 로마의 중심이었던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이집트의 사막지역인 스케터와 니트리아와 그리고 가장 깊은 사막에 있는 켈리아로 향했다. 목표는 신과의 일치였다. 신과 만나기 위해 그들은 막다른 고독 속으로 운둔했다. 그들을 사막의 은수자라 부른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345년~399년)

에바그리우스나 안토니우스처럼 뛰어난 학승도 있었지만 대게의 많은 수도승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사제 서품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이었다. 그들은 오직 신과 만나기 위해 세상을 등지고 사막의 끝 켈리아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일부는 더 깊은 고독을 찾아서 벽돌로 암자를 짓고 바위 절벽에 굴을 팠다. 철저하게 독방을 지키며 상호 고립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들은 사제 서품조차 겸손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며 철저히 낮은 데로 임했다. 그들의 주식은 소금으로 빚은 빵과 기름이었으며 하루에 한 번만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아케디아(Akedia) 즉 마음의 평정을 잃은 상태 혹은 영적 태만이었다. 또한 탐욕, 분노, 욕정, 시기, 나태 등 칠죄종도 그들이 타파해야 할 악귀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나 탐진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은수자들은 그 아케디아를 쫒기 위해 매일 노동을 했다. 현재 가톨릭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기도 외에 밭을 가꾸고 필요한 생필품을 가능한 직접 만드는 등 자급자족을 하는 노동은 그 당시부터 시작된 행동 양식이었다.

      

위에서 보듯 그리스도교에 운둔자가 많이 있었지만 노자와 장자의 나라 중국에서도 은둔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광야나 사막으로 들어갔다면 중국의 은둔자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들이나 노장사상이나 도교적 신념 즉 개인적인 사연으로 세상을 등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노장사상의 영향이 컸다.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은자는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상나라 사람 백이와 숙제이다.  그리고 공자도 칭송했듯이 논어 미자 편에 나오는 장저와 헌문 편의 걸닉도 유명한 은자로 회자되었다.

    

그 외에도 역동의 역사를 가진 중국답게 그에 따른 은자들도 많이 나타났다. 그중에 대표적인 은자가 위진시대 죽림칠현으로서, 정치적으로 혼돈했던 시기에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7명의 위정자들이 노장사상의 무위 무지 무욕을 좌우명으로 삼아 한동안 초야에 묻혀 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기 다른 신념으로 세상과 타협하거나, 세속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있었고, 마지막까지 은자의 길을 추구한 혜강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세상의 관습과 윤리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후세의 은둔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리고 동진 시절 가난한 선비로서 하급 관리로 전전하다 40살이 넘을 무렵 어느 날 깨달음을 얻은 후 낙향하여 20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고 살았던 그 유명한 도연명, 당나라 시절 42세까지 세상을 떠돌며 시와 술과 풍류를 즐기다가 현종의 눈에 띄어 조정에 들어가 양귀비까지 접했고 2년 후 권력에 회의를 느끼고 궁궐을 나와 10여 년 간 은자의 길을 걸었던 시선 이백, 그리고 그 이외에도 임포, 서위, 백인보, 왕희지 등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자유를 찾아 떠난 은자들이 많았다. 그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처음부터 은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세계에 몸을 담았다가 타의 든 자의든 어떤 계기로 은거를 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그들을 아웃사이더로 만든 것이다.      

2019년 8월 17일 / 사명산 숲길

또한 조선에서도 은둔자들이 있었다. 조선의 유교가 기독교처럼 강열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리고 중국처럼 격랑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은둔자들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러운 세상으로부터 도피를 한 은자들이 있었다. 바로 생육신이 그들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이에 반발하여 반역을 꽤 한 주범을 사육신이라 하고, 권력의 화신들이 점령한 조정에 환멸을 느끼고 초야로 들어간 사람들 즉 김시습 성담수 원호 이맹전 조려 남효온 등을 생육신이라 한다. 그중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김시습이 있다.

    

세종 당시 조선의 천재로 명성이 자자했던 김시습의 삶을 여기서 다 논할 수는 없고, 계유정난 후 30년 가까이 권력을 배격하며 야인으로 산 그가 59살에 사망하기 전 10년 동안의 족적을 보면 중앙 정치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흔에 접어들자 떠돌이 생활에 지쳐있던 그는 정신적인 각성을 한 후 새로운 삶을 위해 서울에 거처를 마련한다. 그렇게 한동안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 마흔 후반에 안씨 부인과 혼인도 하고, 자신의 가계를 돌보지 못한 불효를 사죄하기도 하는 등 보통의 삶을 위해 매진한다. 한마디로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추구했던 평범한 삶은 혼인 후 1년 만에 부인이 병마로 사망하고, 조정에 또다시 폐비 윤 씨 사건으로 피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는 새로운 삶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그는 다시 봇짐을 메고 종자 어성갑과 조카 김효남과 함께 머나먼 강원도로 떠난다. 그 후의 10년은 세상을 등진 완벽한 은둔자의 길이었다. 춘천 청평사와 설악산과 강릉과 양양 그리고 마지막 안식처였던 부여의 무량사 등 곳곳의 절집을 찾아다니며 깊은 은둔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다고 절밥을 얻어먹지는 않았다. 평소 노동의 미학을 설파했던 그는 사막의 에바그리우스처럼 손수 농사를 지으며 자연의 질서를 몸소 실천에 옮겼다.

     

강원도로 들어가기 전의 그는 자연을 벗 삼아 자유를 만끽하는 등의 유유자적이나 음풍농월식의 은둔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한 꼬장 한 지식인의 또 다른 강한 표현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세상에 그의 영혼은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이 그 진흙탕 같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머리를 깎고 땡중 행세를 하며 아웃사이더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당시 조정은 르네상스형 인간인 그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하지만 말년의 김시습은 세상에 초탈한 선승 같은 은둔자의 모습이었다. 사실 그 당시 절집을 전전하다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평생을 머리 깎은 채 중 행세를 하며 떠돌아다녔고, 불교 경전 해석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말이 승적이 없을 뿐이지 사실상은 출가를 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처음 불교에 심취한 것은 세상에 대한 반항의 일환이었지만 결국 마지막엔 그 절집이 그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다. 무량사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따사로운 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구부정한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렇게 그는 59살에 무량사에서 파란만장했던 여정을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을 한다. 아마도 세상과 완벽하게 등진 마지막 10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는지 모른다.

    

이제 오늘의 긴 여정도 끝나가고 있다. 다리도 무거워지고 피곤도 몰려온다. 사막의 은수자들이 고독과 고행에서 종교적인 확신을 얻고자 했다면 나는 회전목마처럼 반복되는 이 산길에서 어떤 삶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엄밀히 말하면 은둔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의 고립은 아닐까? 아니면 은둔은 키에르케고르가 그토록 갈망했던 실존적 나를 찾아가는 고뇌의 시간은 아닐까?

      

숲길을 빠져나오며 나는 마지막으로 은자의 향기와 작별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은둔을 꿈꾼다. 아마도 나는 내일 은둔의 달콤한 유혹에 취해 배낭을 둘러매고 다시 집을 나설지 모른다. 그리고 절집을 찾아다니는 선객처럼 텅 빈 어느 산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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