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과 앞으로 연재할 9꼭지 글들은 수년 전 인터넷 모 신문사에 기고한 글로서 이번에 대폭 수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더 써야 할 몇 개의 글들은 초고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처음 글들은 인터넷 생태계에 신경 쓰느라 호흡을 짧게 했는데, 브런치에 올리는 글은 좀 차분하고 꼼꼼하게 고쳐 쓰려고 한다.
오래전이다. 그 해 3월 하순 어느 날, 오전 내내 짱짱했던 하늘은 오후부터 금방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먹장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한바탕 무언가 쏟아부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저녁을 먹고 완전군장을 꾸린 우리는 2년간 정들었던 FEBA부대를 떠나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2년 전 이맘때 우린 철책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였고, 오늘 다시 예전에 근무하던 지역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리고 1년 후 우리 중 상당수는 다시 다른 FEBA부대로 이동할 것이다. 그건 전방부대 보병의 숙명인지 모른다. 이동과 이별은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했다.
대대 병력 전체가 부대를 빠져나가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군화 소리와 소총 부딪치는 소리는 점점 크게 허공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무슨 전쟁터로 나가기라도 하듯 우리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내일 해가 뜨면 우리는 또 다른 세계와 맞닥트릴 것이다. 그 변화의 어떤 관념들이 뒤엉켜 범상치 않은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모른다.
부대를 빠져나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마을을 지나 삼거리 평택집에 이르렀을 때 가게 미닫이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는 춘자의 모습이 붉은빛 현관등 시야 한쪽에 포착되었지만 우린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이등병 때 GOP에서 이곳 FEBA로 내려온 후 우린 2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처음 완전군장 10킬로 구보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모두 토악질을 해댔고, 대간첩작전에 투입되어 한여름 달포 동안 야전에서 생활해야 했고, 3소대 남기복 병장이 임진강가에 매복 났다가 익사하는 사고도 있었고, 한겨울 혹한기 훈련 때 소주를 마셔대며 밤새도록 분침호를 파던 우리 모습이, 그리고 부대 옆 가게 주인의 음흉한 너스레와 삼거리 평택집 춘자의 코맹맹이 소리도 이젠 먼 기억이 되었다. 다시는 그 공간 속에 우리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에 불현듯 남기복 병장이 떠올랐다. 그는 작년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임진강변에 매복을 나갔다가 강물에 빠져 목숨을 일었다. FEBA에서는 매복이 거의 없었지만 그해 무장공비 침투로 인해 사단 전체가 한바탕 치도곤을 당한 후라 경계 강화 차원에서 상부의 매복 지시가 하달된 실전 상황이었다. GP나 GOP와는 달리 긴장감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매복을 하고 있던 중 대대장이 순찰을 돌다가 건너편 강변에서 민간인들이 불을 밝히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매복조에게 연락을 했다. 강을 건너가 민간인들의 유흥을 단속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매복조 소대장은 분대장과 남기복 병장과 또 다른 병사 한 명을 도강하게 했다. 그곳은 전시에 군부대가 도강할 수 있도록 수심을 낮게 해 둔 특수한 지역이었다. 언젠가 연대급 훈련 때 그곳으로 도강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만만하지 않았다. 사위는 달빛도 없이 칠흑 같은 어둠이 팽배했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플래시도 킬 수 없었다. 물속으로 뛰어둔 그들은 강 건너 불빛만 보고 일렬로 줄지어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내디뎠다. 물은 허리춤까지 차올랐다. 물살도 심상치 않았다. 그때, 남기복 병장의 몸이 왼쪽으로 기우뚱 쏠리면서 물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좌우의 수심은 상상외로 깊었다. 시야 확보도 어려웠다. 분대장이 남기복 병장의 어어하는 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손은 허공을 갈랐다. 수영을 제법 했던 남 병장은 거센 물살과 깊은 수심과 어둠 속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강물 소리만이 어둠을 삼키고 있었다.
한때 소대 선임이었던 그는 내가 이등병 때 나에게 삼팔선의 봄이란 노래를 가르쳐주었었다. 한겨울 새벽녘, 둘이서 경계근무를 나갔을 때 다른 선임과는 달리 그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그 노래를 불러주었다. 눈 녹인 삼팔선에 봄은 왔건만... 이등병 목숨 바쳐 고향 찾으리... 느리게 아주 느리게, 라르고로 부르는 그의 노래는 동토의 땅을 조금은 녹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 빛나는 별을 가리키며 그 별자리 이름을 알려주었다. 카시오페아 자리.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간혹 그 별자리를 볼 때면, 제대 후 태권도 사범이 꿈이었던 어느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승달 눈매와 유독 볼 살이 불그스레했던 그의 얼굴이...
그의 시신을 찾기 위해 대대 병력이 이틀 동안 마포교와 임진강변을 수색했다, 난간 없는 높은 마포교 위에서 우리는 하염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떠내려가지 않나 하고. 하늘은 정말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다행히 시신은 하류 멀리 흘러가지 않고 이틀 뒤 마포교 전 강기슭에서 발견되었다. 관에 누워있는 그는 참 편안했다. 볼은 창백했지만 눈매는 여전히 선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경례를 하고 이별을 고했다.
3개월 전 어느 날 소대장은 나를 중대 행정반을 불렀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마지막으로 깊게 빨고 재떨이에 눌러 끄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 나하고 GP에 가야겠다. 머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거 알지. 소대 하나를 당장 만들어야 하니까 같이 들어갈 애들 좀 생각해보고…. 정원은 20명이니까 예비분 포함해서 25명 정도 똘똘한 애들 골라보자고 내일부터."
군의 전략적 차원에서 DMZ GP 수를 늘렸고, 그에 따른 수색대 병력 충원이 필요하여 각 보병 중대에서 수색소대를 하나씩 만든다는 소문이 얼마 전부터 펴져 있었는데 그게 나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GP에서 교체되는 시점이 나의 제대 시점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색소대에 병장 하나는 필요한데 중대 통틀어 바로 내 밑에 후임병은 철책 투입 시점인 3월이 돼도 상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짬밥 수로 볼 때 나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 DMZ, 철책, GP, MDL, 지뢰…. 앞으로 펼쳐질 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병장을 달고 평온하게 군 생활을 마무리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끝까지 역마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젠 GP까지….
사실 전방 생활은 생소하지는 않았다. 처음 자대에 배치된 곳은 땅굴 예상지역이라는 곳에 파견 나가 있는 연대 예비 소대였다. 그러니까 북에서 판 땅굴이 발견될 성싶은 지역에 음파로 탐지하는 부대가 있었고, 우리는 만약에 모를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급조한 전투부대의 일원이었으며, 그 지역을 통상 개나리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북한군이 두더지 게임처럼 땅굴에서 튀어나오면 그들을 섬멸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얘기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다.
개나리에서의 생활은 따분했다. 특수임무를 띤 관계로 철책근무도 없고 별다른 훈련도 없었다. 그곳에서 생활한 2달여 동안 기억에 남는 것은 사실 화목작업이 유일했다. 일명 콘센트 막사라고 불리는 내무반 건물은 반원통 모양의 양철지붕을 씌워서 만든 임시 가건물이어서 여름이면 찜통 같이 덥고 겨울이면 남극처럼 추웠다. 일정한 난방유를 지급받지만 그 기름은 어디로 내다 파는지 모르겠고, 겨우내 땔감용 나무를 구하기 위해 소대원들은 산을 헤매고 다녔다. 한국전쟁 이후 변변한 식목을 하지 않고 산판만 해왔으니 근처에 화목용으로 쓸 만한 나무들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팔뚝만 한 나무를 구하기 위해서 반나절 동안 산속을 헤매고 다녔다. 나는 총 대신 톱과 도끼를 들고 그들을 따라 산에 올라 정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산판일을 했다. 어설펐지만 나는 요령을 부리지 않았다. 하긴 요령을 부릴 줄도 몰랐다. 여하튼 벌목한 나무를 산 아래로 내린 후 짊어지고 막사로 돌아오면 그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런 노동에 문외한인 나의 육체는 고됐지만 그래도 버틸 만했다. 짓이기는 듯한 어깨 통증은 그 산판을 몇 번 경험한 후에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헐벗은 민둥산 능선에서 겨울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았다. 동기 놈의 시꺼먼 얼굴 사이로 드러난 하얀 이빨이 그 햇살에 번득이고 있었다.
이제 나에게 마지막이 될 야간행군은 드디어 여명과 함께 마감했다. 밤새 걸어 GOP 대대에 도착한 우리는 인수인계하느라 어수선한 부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방 특유의 좁은 연병장에서 전투식량으로 대충 아침밥을 때운 후 드디어 각자 소대별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새로운 세계와 맞닥트리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몸짓으로 그 세계의 질서에 충실히 따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불확실한 미래는 표정 없이 우리를 마중하고 있었다.
우린 다시 한 시간 정도를 더 걸어 산속 깊숙이 들어갔다. 대남방송 소리가 점점 맹렬하게 커지고 있었다. 2년 만에 맡아보는 철책 냄새였다. 그 특유의 황량함은 여전했다. 초봄의 을씨년스러운 잡목들과 비포장도로 바닥에서 맴도는 습한 흙먼지 등은 어제 오후부터 짓누르고 있던 먹장 하늘과 합쳐져 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산허리를 돌아 마지막 능선에 올라서자 축구장 거리 정도에서 철책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너머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고 습한 짙은 안개 입자가 흐물거리며 귀 밑으로 긴 혀를 들이밀고 있었다. 소름이 확 올라왔지만 나는 참았다. 밤새 행군으로 지친 우리는 산 정상에 오르듯 마지막 숨을 거칠게 뿜어대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할 그곳은 아직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봄은 요원해 보였다. FEBA부대는 그래도 3월 중순이 되면 봄기운이 감돌았지만, 직선거리로 불과 20km 정도 북쪽에 있는 철책은 여전히 겨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전 눈이 왔는지 산 아래는 없던 눈들이 곳곳엔 지척이었다. 길가로 제설작업을 해 놓은 시커먼 눈더미에서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젖었던 등에서 한기가 돌았다.
능선을 잠시 따라가고 있을 때 안갯속에서 가물거리는 대공초소가 드디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에 통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칠어진 숨소리는 어느 순간 잦아들었다. 장막이 서서히 걷히듯, 흐느적거리는 안개 사이에서 통문이 우리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입을 쩍 벌리고, 우리를 삼킬 채비를 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몸짓으로 우리는 그 통문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시큼한 탄소 성분이 강한 철 냄새가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지독한 금속 냄새였다.
통문 통과절차를 마친 우리는 방탄복을 입고 실탄을 지급받은 후 장전을 하고 통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차디찬 침묵이 무겁게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대남방송 소리만이 머리 위에서 형체도 없이 맴돌고 있었다. 무슨 소린지도 모를 윙윙거리는 소리, 순간 저 안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갔다.
드디어 통문 장교가 첫 번째 통문 자물쇠를 풀고 시꺼먼 철문을 연다. 쇠 끌리는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그리고 두 번째 문도 똑같은 동작으로 움직였다. 이번엔 쇠 끌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 통문 사이로 옅은 눈이 덮여 있는 검은 길이 보였다. 그 길은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통문 장교가 철문 옆으로 비켜서자 우린 지체 없이 양옆으로 갈라져 그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지향 사격자세를 취하고 좌우 경계를 하며 통문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디찬 공기가 코끝을 스치고 있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우리는 드디어 DMZ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20분이면 갈 거리를 30분 이상 소비하며 GP에 도착한 우리는 쉴 틈도 없이 기존 부대와 인수인계 작업을 시작했다. 두 소대장은 ROTC 동기인 듯 서로 친밀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기재계인 송 상병은 차 일병과 강 일병을 데리고 장부에 있는 물품 수량을 세느라 여념이 없었고, 나 상병은 대공용 M50 기관총을 인수하느라 대공초소에 올라가 내려올 줄을 몰랐고, 취사병 오 일병은 지하 취사장에서 취사도구와 식량을 인수하였고, 방 상병은 전기, 급수, 난방시설 등의 위치를 확인하고 사용방법을 습득하고 있었다.
좁은 GP는 부산하게 움직였다. 점심을 대충 먹고도 우리는 한 시간 이상 더 작업을 했다. 나와 분대장 둘은 기존 부대 선임하사와 함께 벙커와 군 시설물을 돌아보며 이 GP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다. 선임하사는 한 시간 이상을 떠들어 댔지만, 귀에 새겨들은 것은 몇 마디밖에 없었다. 그는 벙커 내부 벽에 파인 콘크리트 흔적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이게 무엇인 줄 아느냐고 물었고,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북한에서 날아온 총탄의 흔적이라고 말을 이었다. 탄흔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고 총탄의 흔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었다.
"저 새끼들은 그만큼 조준을 해서 쏜다는 거지. 우린 말이야 교전이 붙으며 총구가 어디로 향하는 줄 알아. 머 하늘을 향하고 마구 쏘아대는 거야 제기랄. 너희는 쟤들을 보고 쏠 거 같지? 그게 쉽지가 않다는 거야."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터지면 여기가 너희 무덤이야 무덤. 후퇴한다고 저 뒤에 있는 통문은 열리지 않아. 머 그럴 시간도 없겠다. 이 GP에만 조준된 저 새끼들 포탄이 수백 발은 될 거니까. 그리니까 분명한 건 너흰 첫 번째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초개와 같이 사라진다는 거야."
우린 그의 말에 놀라지는 않았다. 겁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과장되었다고 단정하지도 않았다.
북적거리던 GP는 기존 부대가 떠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우리는 피곤함을 잊은 채 각자 내무반과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고, 기재계, 취사병, 상황병, 관측병 등도 인수 한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저녁 먹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방송 소리만이 그 침묵을 이완시키고 있었다.
GP 분위기가 생경하여 모든 게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게 분명했다. 처음엔 다 그렇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우린 이곳에 완벽하게 적응해 있을 것이다. 며칠 후면 귀도 마비되어 저 지긋지긋한 방송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나는 상황실로 올라가 망루 난간대를 잡고 북쪽을 보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검은 장막에 덮여 있었다. 앞에 보여야 할 북한 초소는 아직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마 내일 아침에는 보일 것이다. 남과 북에서 쏘아대는 방송 소리는 여전히 머리 위에서 뒤엉켜 윙윙거리고 있었다. 순간 졸음이 왔다. 그러고 보니까 24시간 동안 한잠도 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