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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기스칸스 May 15. 2016

고요 속의 외침

소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고요 속의 외침     


차의 시동을 켠다. 차키가 돌아가자 05년식 모닝이 부릉대며 주인의 부름에 응답한다. 

긴 하루가 끝나고 귀가하는 시간이다. 

운전석에 몸을 파묻으며 내 귀를 감미롭게 해줄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내가 좋아하는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할 시간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라디오가 조용하다. 차는 묵비권을 행사 중이다. 

과속방지턱을 알려주어야 할 내비게이션마저 화난 여자친구처럼 입을 다물었다. 

문제는 퓨즈였다. 


“이런 고물차. 가지가지 하는구만.”


자동차가 사람이라면 꿀밤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집에 가는 길이 지루할 것이라 투덜대며 언덕길에 다가갔다. 

엑셀을 밟자 고요와 침묵 속에서 차의 신음소리가 무겁게 울린다. 

바퀴가 덜덜거리고 엔진이 주인에게 불평하는 소리가 들린다. 

모닝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삭였다. 

나는 그제야 내가 침묵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자동차는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녀석은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해왔던 걸까.

그리고 난 얼마나 오랫동안 녀석의 소리를 무시했던 걸까.     


우리는 이어폰을 사랑한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은 이제 비단 젊은이뿐 만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초등학생부터 노인들까지 이어폰을 통해 음악과 라디오를 듣는다. 

이는 매우 합리적으로 보인다. 남에게 피해도 안주고 다른 소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들의 경적소리, 사람들 떠드는 소리, 쓸데없는 광고소리, 별 의미 없이 나누는 대화들로부터 이어폰은 우리를 보호해준다.     


문제는 이어폰이나 음악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있다. 

우리의 이어폰 사랑은 너무 과도하다. 

학교, 지하철, 집, 공원, 심지어 횡단보도를 건널 때나 밤거리를 걸을 때도 이어폰을 끼고 걷는 사람이 많다.

이어폰 사랑의 한 예는 예전에 아르바이트로 보습학원에서 수학 강사를 할 때도 볼 수 있었다. 

중학생 여자애가 수업을 들었는데 긴 머리 사이로 귀에 꽂은 이어폰이 보였다. 

본인은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만 내 눈엔 다 보였다. 

물론 난 그냥 아무말 없이 넘어갔다.     


집에 혼자 있을 때도 소음에 대한 우리의 방어기제는 작동한다. 

우리는 제일 먼저 리모컨을 찾아 티브이를 켠다. 

보든 안보든 사람 소리가 나야 편안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PC전원을 누르고 음악을 재생시킨다. 

역시 우리의 귀를 우리가 원하는 ‘소음’으로 막아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나쁜 소음’을 피하여, ‘좋은 소음’을 찾아가는 것이 익숙해졌다.  

   

장수했던 KBS의 오락프로그램 <가족오락관>에는 ‘고요 속의 외침’이란 게임이 있었다. 

출연자들이 헤드폰을 끼고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 

물론 게임 참가자들은 헤드폰에서 울리는 큰 음악소리 때문에 정작 필요한 정보는 제대로 듣지 못한다. 

이 게임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유발하지만 그저 웃기만 할 순 없다. 

이제 ‘고요 속의 외침’은 더이상 연출된 게임 속 상황이 아니다. 

이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넘치는 소음 속에서 우리는 가끔 정말 중요한 소리를 놓칠 수 있다. 

우리가 놓치는 소리는 뒤에서 다가오는 차의 경적이나 이방인의 어색한 발걸음 소리처럼 우리의 안전과 직결될 수도 있다.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소리에 감춰진, 사람 또는 물체가 내는 본연의 소리이다. 

그 소리들은 꾸며지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들을 땐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무엇보다 진실한 소리이다. 

그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교회에서 부르는 성가 중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란 노래가 있다. 

물론 난 교회에 다니진 않지만 고요함 속에서 위대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고요함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이다.     


힙합 가수 다이나믹 듀오는 10여 년 전 노래 <고백>에서 이런 가사를 읊었다.


“시끄러운 클럽보단 산에 가고파.”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숨을 헐떡이며 따라 불렀던 노래인데 이제야 그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다. 

고막이 찢어질 듯 스피커가 울리는 정열의 클럽보다, 바람소리와 산새소리가 들리는 산이 더 끌린다는 것이다.     


세상을 채우는 모든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숨소리가 감미롭게 들릴지도 모른다. 

고요함 속에서 우리의 귀는 ‘진정’ 아름다운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하루가 지났다. 

자주 가는 카센터를 방문하여 퓨즈를 교체했다. 

작은 부품 하나만 바꾸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시동을 켜자 활기찬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나를 맞이한다. 

내이게이션 누나는 신이 난 듯 과속방지턱을 알려주었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라디오를 껐다.

오늘은 차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운전하고 싶다. 

집까지 가는 길이 즐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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