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질문의 답을 듣기 위한 자세
230823
작품을 연재하는 내내 항상 피드백에 목말라 있었다. 누군가 내 작품을 읽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었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글을 업로드할 때마다 오르내리는 조회 수는 분명 내 글을 누군가 읽고 있음을 숫자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나의 갈증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 이야기의 어느 부분이 좋고, 어느 부분은 별로였으며,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피드백.
그런 피드백을 주는 이가 없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매주 내 원고를 받아 검토해주던 담당 PD님은 매번 원고에서 어떤 점이 좋았는지 콕콕 짚어 정성스러운 답장을 보내주었다. 때로는 무척 자상한 어조로 보완점을 몇 가지 제시해주기도 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내 글에 확신이 들지 않아 힘들다는 말에 70화나 되는 분량을 그날 밤 모조리 읽고 구체적인 감상과 함께 내가 어떤 지점에서 힘든지 알 것 같다는 공감과 격려를 쏟아주기도 했다. 완결 후엔 내 글을 모두 읽어주는 고마운 지인이 정성 가득한 후기를 남겨주기도 했다.
그럼 나의 목마름은 해소되었느냐? 그렇지도 않다. 그들의 감상에 몹시 고마워하다가도 한편으론 자꾸만 그들의 진의를 의심하는 못된 마음이 고개를 들곤 했다. ‘저 사람들이 너무 착해서, 내가 힘든 걸 아니까 일부러 좋은 말만 해준 거 아닐까?’ ‘내가 힘들다며 읽어달라고까지 했으니 안 좋은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엎드려 절받기가 아니었나?’ 같은 생각들. 억지로 좋은 말 쥐어짜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 게 아닌데도, 그들은 그게 가능하다 믿었다. 칭찬을 해줘도 곧이곧대로 듣지를 못했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피드백은 잘 수용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나의 멘탈은 [뭐임;]이라는 짧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댓글 하나에도 쉽게 바스러졌다. 또 다른 친구가 ‘너는 유행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네가 쓰고 싶은 걸 써.’라고 조언해줄 땐 ‘내가 지금 억지로 유행에 맞춰 쓰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글이 엉망이란 건가?’하고 엄청나게 확대해석하며 홀로 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네가 뭘 알아’하는 못된 마음이 들기도 했고.
그래서 결국 내가 원하는 게 뭔가. 가슴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반발심을 모아 내 마음을 헤아려보자면 결국 이거다. ‘나를 잘 모르는, 그러나 BL은 아주 많이 읽어 본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구체적인 피드백을 남겨주되, 스토리와 인물에 대해선 대체로 좋은 감상 일색인 한 편 내가 자꾸만 의심하는 부분을 콕 집어 지적하며 명확한 방향까지 제시해주면 좋겠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진짜 이런 사람이 불쑥 나타난다면 그건 사이비가 분명하니 피해야 한다. 결국, 나는 원하는 답을 마음속에 정해두고 그걸 그대로 읊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거다. 나의 이 답정너 같은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채고 입을 다물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내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건 결국 내 마음가짐 뿐이란 걸, 이제는 안다. 주변에서 아무리 좋은 피드백으로 날 이끌어주려 해봤자 얄팍한 의심과 반발심으로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 돌이켜보면 자꾸만 나에 대한 확신을 잃을 때 지표가 되어줄 좋은 신호등은 꾸준히 있었는데도, 내가 계속 그것을 외면해왔던 것 같다. “칭찬해줘. 하지만 칭찬만 하면 안 돼. 그렇다고 너무 지적하지는 마. 재미있다고 말해. 하지만 그게 빈말이면 안 돼.” 같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면서.
나는 왜 자꾸만 내게 오는 피드백을 부정하고 밀어내고 있는 걸까. 결국엔 내가 나에게 확신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부터 나를 의심하고 있으니, 다른 이들의 말을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들을 수 있을 리 없다. 지나친 자기 확신과 고집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올바른 태도는 아니지만, 자신에 대한 지나친 의심 역시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다. 모든 피드백에 귀를 기울이느라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나처럼 모든 피드백을 부정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를 낳는다. 어느 것도 도움되지 않는다.
마침 오늘 읽은 에세이에서도 피드백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타인에게 내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반응을 봐야 한다. 사람들의 반응은 몹시 솔직해서 대체로 자신의 의견을 숨기지 못한다. 만약 여러 명에게서 같은 곳을 지적받았다면, 수용하고 고쳐야 한다.’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다만, 뒤에선 또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림을 고쳐달라고 남들에게 말하는 일을 되도록 삼가라. 대신 당신이 봤을 때 좋아 보이는 그림들을 찾아라. 그것들이 왜 좋아 보이는지 이유를 스스로에게 계속 되묻길 바란다. 그런 질문들이 거듭되면서 비로소 대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린다는 것은 사실 90퍼센트 이상이 보는 일에 달려 있다. ”
- 이연,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4장. 다듬기
그림에 관한 에세이지만, 글에 적용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타인의 피드백을 수용해서 듣되, 그것을 어떻게 내 것에 적용할지는 내가 정하는 것. 그러므로 나 자신의 안목을 갈고 닦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작가인 나다. 그 작품에 누구보다 큰 애정을 쏟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나. 내 글을 가장 꼼꼼하게, 많이 읽은 것 또한 나다. 내가 흔들리지 않아야 내 글도 흔들리지 않는다.
피드백은 ‘네 목적지로 가려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가는 게 더 빨라.’하고 방향을 알려줄 뿐. 그들에게 ‘그럼 내 손 잡고 같이 가주세요.’하고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마라톤은 내가 달려야 하고, 내가 끝내야 한다. 뭐하러 뛰느냐고 무작정 비난하는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난 이미 달리기로 했으므로. 그러나 잘 달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아닌 것 같은데요?!’하고 근거도 없는 반발을 내뱉을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 마라톤은 트랙이 딱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라서, 누군가 왼쪽으로 가는 게 빠르다고 했다 한들 그것이 꼭 맞는 길이란 보장도 없다. 빠르게 도착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면 지름길이 어디건 이리저리 돌고 돌며 멋진 경치를 즐기다 가면 그만이다. 혹은 잠시 멈춰 지도를 보고 왼쪽이 정말 맞는지 확인하고 달려도 되고. 그 정도 여유는 있다. 마라톤이니까.
지도. 그래. 내겐 지도가 있다. 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미리 내 손으로 그려둔 지도가. 지도를 그릴 때만 해도 내겐 분명 확신이 있었다. 달리기에 급급해 정작 지도를 펼쳐볼 생각을 못 했던 건 아닌지 늦게나마 나를 돌아본다. 길을 안내해주는 이들이 바른 길을 안내해준다 싶으면 그들의 안내에 맞게 지도를 수정하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내 지도를 따르면 됐는데. 더욱이 많은 이들이 내 지도가 맞다고 확신을 주었는데 왜 나는 자꾸만 처음 쥐고 뛰었던 지도 자체를 의심하고 있었는지.
친구의 조언이 다시 떠오른다. 네가 쓰고 싶은 걸 쓰라는 말. 그게 남들이 어떻게 뛰는지 보지 말고 네 지도를 보고 달리라는 말이었을까? 문득, 분하게만 느껴졌던 그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