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길 원했던 7월의 나에게.
어째 매번 근황에 대한 글만 쓰는 것 같지만, 제일 쓰기 쉬운 것이 또한 근황에 관한 이야기라 그냥 적는다. 지난 7월, 도망치려면 도망을 가야 한다는 글을 썼다. 학원을 그만두고 이젠 정말 나의 길을 찾는 시간을 갖고 싶어 쓴 글이었다. 2025년 1월, 그로부터 딱 반년 후인 지금, 나는 현재 ‘도망감’ 상태이다. 드디어 도망가기의 첫 번째 단계, ‘도망가기’를 완수하고 현재 백수 일주일 차, 1인 가구 복귀 일주일 차다.
그동안은 대전에 있는 엄마의 학원에서 ‘부원장’이라는 애매한 직책을 달고 애매한 책임과 애매한 일을 도맡아 하며 평일엔 대전에, 주말엔 서울에 머무는 애매한 상태로 지내왔다. 일도 내 일 같지 않고, 집도 내 집이 아닌, 어디도 내 공간이 없는 애매한 상태가 지속되어서, 나는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도 못한 채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다녔다. 그중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이 집도 저 집도 내 집이 아닌 상태로, 옷을 입으려 해도 이 옷은 대전에, 저 옷은 서울에 있고, 다이어리를 꾸미려 해도 이 스티커는 대전에, 저 펜은 서울에 있는 등 하여간 온갖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일상은 말할 것도 없다.
벗어나서 새출발을 하고 싶은데,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니 늘 쫓기는 기분이라 출발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과 심적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12월 내가 담당한 아이들의 기말고사 기간을 끝으로 정리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수업을 정리하고 짐을 조금씩 옮겼다. 나의 상사가 가족인 가족 사업 최악의 특징 덕분에 퇴사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달 전 퇴사 통보. 상사와의 면담. 날짜를 정하고, 퇴사. 그런 비슷한 과정이 있긴 했는데, 하필 면담해야 하는 상사가 엄마였던 바람에 퇴사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엄마인 상사와 싸워야 했다. ‘그만두려면 일단 어디든 붙어놓고 관둬라.’ ‘어딜 알아볼 시간이 없어서 퇴사부터 하겠다니까.’ 이 대화가 말만 조금씩 바뀌어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대체 내가 왜 이 나이에 부모 허락까지 받아 가며 움직여야 하나…하는 자괴감이 들어 무작정 정리했다. 몰라. 배 째라지. 그런 마음으로 학원에서 스르륵 사라지듯 사라졌는데, 의외로 아무 일도 없었다. 제기랄. 그만두는 게 이렇게 별것 아녔다니. 그동안 뭘 무서워했던 거지?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러니까, 도망가기가 도망가기의 첫 번째 단계인 이유는, 어딘가에 결국 멈추어 서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든, 아니면 잠시 머물든, 혹은 결국 돌아가든. 지금 상황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 당도하기 위해 도망간 것이니까. 그래서 도망가기는 도망가기로 끝나는 게 아니다.
도망가기에도 단계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있었던 곳이 육상 트랙이 둥그렇게 깔린 거대한 운동장이었다면. 트랙을 달리는 와중에도 두리번거리며 출구를 찾다가, 마침내 트랙을 벗어나 열린 문을 향해 내달려 도망가기에 성공한다. 나와보니 드넓게 깔린 초원이 펼쳐진다. 상쾌한 공기에 자유를 느끼고, 의외로 뒤쫓아 오는 이는 없다. 출구였던 문은 이젠 마치 입구가 된 듯 여전히 열려있다. 그러나 아직은 돌아보지 않기로 했으므로, 그 문을 돌아선다.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초원. 그러나 길이라곤 없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거기로 가면 무엇이 나올지 알 수가 없다. 무작정 달리던 발을 잠시 멈춘다. 그렇게 멈춰 선 것이 지금의 나다.
도망가기는 결국 ‘도달하기’를 향한 첫걸음이다. 그것이 완전한 정착이든, 아니면 잠시 머무는 것이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도달하는 곳이 어디냐의 문제다. 목적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이 초원에선 등 뒤의 출구였던 입구 말고는 또렷하게 보이는 무언가가 없다. 그러니 목적지를 선택하기 위해 먼저 둘러봐야 한다. 주변과 나 자신을. 저기 시야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 그곳에 내가 갈 체력은 있는지. 아직 걸을 수 있는지. 거길 진짜로 가고 싶은지. 이런 것들을. 그러니 ‘도망가기’의 다음 단계는 ‘둘러보기’인지도 모르겠다.
나와 내 주변을 ‘둘러보기’. 그래서 최근엔 일단 취업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아 구직 사이트를 매일 뒤지고, 자소서를 쓰느라 머리 아파하는 중이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프리랜서 작가이지만, 그 전엔 잠시 취업으로 금전적 안정성을 확보해야 할 것 같아서다. 이왕이면 글과 가깝게 지내고 싶어서 출판사를 주로 알아보는 중인데, 들어갈 수 있을지……. 자소서 쓰기가 너무 힘들다. 친구들은 에세이 쓰듯 일단 써보라곤 하는데, 그건 너희가 내 에세이를 본 적이 없어서 하는 소리지……. 자소서를 의식의 흐름대로 쓸 수는 없잖아. 하여간, 그래서 나는 현재 재취업 준비생이다.
그리고 완전히 서울로 다시 올라와 1인 가구로 복귀했으니, 생활도 다시 정비해야 한다. 이것 또한 나를 둘러보는 과정 중 하나다. 생활을 바로잡고, 루틴 형성하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서, 머릿속으론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하고 움직이다가도 의지가 팍 꺾여버리기 일쑤다. 사실은 엊그제도 하루 종일 잠만 자다 하루를 보냈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스쿼시를 등록했다. 다른 학원도 알아볼까 한다. 어떻게든 나를 집 밖으로 끄집어내야 뭔가 할 것 같다. 배우고 싶은 건 많아서, 미술 학원도, 작사 학원도 등록하고 싶고, 독서 모임이나 글쓰기 모임도 참여하고 싶고, 커피도 배우고 싶은데… 이것도 다 돈이더라. 뭐부터 우선해야 할지 고민해야겠다.
‘둘러보기’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호기심은 많아서 이것저것 다 늘어놨다가 회수하기 버거워하는 내 성격 탓에, 한 자리만 계속 빙글빙글 돌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둘러봐야 그다음 단계인 ‘선택하기’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가야 할 목적지를 선택하는 것. 그렇게 해야 네 번째, ‘나아가기’로 향하고, 마침내 ‘도달하기’를 완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도망가기. 둘러보기. 선택하기. 나아가기. 도달하기. 이것이 내 나름대로 짜본 도망가기의 다섯 단계다. 도달한 곳이 초원에 놓인 벤치 같은 곳이었다면, 다시 첫 번째 단계로 돌아가면 된다. 그렇게 벤치와 정자를 거쳐 이리저리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마침내 내가 짐을 풀고 완전히 몸을 뉘게 될 오두막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7월의 나도 경기장 바깥에 나의 오두막이 있기를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 못 찾았어. 그리고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아. 출구를 찾아 도망치는 건 결말이 아니라 발단이더라. 인제야 ‘전개’에 돌입한다. 자유로울 줄 알았던 초원은 길이 없어 불안하기만 한데, 그래도 걷다 보면 울퉁불퉁한 길이나마 있겠지. 쉽게 넘어지고 지치지 않도록 발목을 잘 풀어줘야겠다.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