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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선비 Mar 22. 2021

1. 프롤로그

   

收天下之兵, 聚之咸陽, 銷鋒鍉, 鑄以爲金人十二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함양(咸陽)에 모은 다음, 칼과 활촉을 녹여서 금인(金人) 열두 개를 주조하였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초입부터 등산로는 인파로 넘쳤다.          

등산로를 두고 인파로 넘쳤다고 하는 것은 표현이 조금은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비포장이기는 해도 넉넉히 승용차 두 대가 서로 비껴갈 수 있는 남해 금산 보리암 입구는, 등산하기에는 꽤나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인파로 인해 매표소부터 북적거리고 있었다.          

원래 보리암이라는 곳이 이른바 한 가지 소원은 이뤄준다는 영험한 기도처라고 소문난 곳이기는 하지만 참배객보다는 등산객이 훨씬 더 많아 보이는 것은 역시 일요일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벌써 몇 번째 이 길을 오르는지 이젠 헤아릴 수도 없다.          

언제부턴가 나에게 남해 금산이라면 눈을 감고도 다닐 정도로 지형지물 하나하나까지 자신이 있는 곳이 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때마다 마음이 급해져서 서두르게 되는 것 또한 버릇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매표소부터 기념품 판매소 앞까지 이어지는 그다지 길지 않은 구간에서 항상 숨이 차곤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보리암 기념품 판매소 앞마당에 주차된 대여섯 대의 차량 사이를 게걸음으로 비집고 들어가 남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 벼랑 쪽으로 다가서 본다.          

바로 발아래 미조 앞바다가 아득히 잔잔하게 펼쳐져 있다.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비늘을 반짝이는 물결 위로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보니 바다가 아니라 오히려 호수 같은 느낌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스라이 펼쳐진 수평선 끝 쪽으로 눈길을 보내본다. 저 멀리 수평선 어디쯤 세존도(世尊島)가 떠 있으리라. 그게 세존도인가, 유혈도(有穴島)인가. 아니다. 그 섬을 진황도(秦皇島)라고 불렀던 사람도 있었지......                                        

한숨 돌리자마자 다시 등산로로 접어든다. 보리암으로 가는 내리막길 화강암 계단이 아니라, 금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으로 길을 잡는다.          

마치 금산 보리암을 지키는 사천왕처럼 우람한 위용을 자랑하며 오른편에 서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 어른 팔뚝 굵기는 좋이 되어 보이는 글자가 깊게 새겨져 있다. 아마 남해 금산 정상 부근에 새겨져 있는 석각 가운데 가장 큰 글자가 아닐까.          

김기성(金琪成).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런 명산에 저렇게 큰 글자로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었을까.          

고종 임금 때 능참봉에 제수된 인물 가운데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던데, 그 사람일까 아니면 동명이인일까.          

언제부턴가 금산의 이런 바위 하나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다.          

10미터 정도 올라가니 나무로 만든 계단이 나온다. 계단 못 미처 오른편 길가 바위에 또 누군가 이름을 새겨 두었다. 조금 전에 본 그 이름에 비하면 글씨 크기나 굵기가 아주 빈약하다.           

순찰사(巡察使) 홍재철(洪在喆).          

순찰사라면 아마 지금의 도지사 정도가 아닐까. 명색이 도지사란 인물이 새긴 글자가 저런 정도의 크기라면, 조금 전에 본 김기성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별로 소득도 없을 상상을 하면서 나무 계단을 지나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길로 가면 곧 금산 정상에 다다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상으로 가는 길을 버려두고 왼편 길을 택한다.           

부소대(扶蘇臺)로 가는 길이다.          

갑자기 인적이 끊어진다. 금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의 번잡함에 비하면 아무도 찾지 않는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숲길을 걷는 맛이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여기서부터는 기분이 갑자기 좋아진다. 힘들게 오르던 길이 내리막으로 바뀌었다는 주변 상황이 그렇기도 하지만, 맑은 숲길에서 나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는 즐거움이 더해져서일 것이다.          

잠시 후, 앞이 탁 트이면서 헬기장이 나타난다. 헬기장이라고는 하지만 아담하게 펼쳐진 시골 공터 같은 느낌이다. 헬기장 건너편으로 온전히 부소암으로만 이어지는 오솔길이 보인다. 역시 등산객이라곤 없는 길이다. 이 숲길을 천천히 10분 정도 즐기면서 내려가다 보면, 눈앞에 그야말로 한 덩어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날카롭게 깎인 모습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둥글다고도 할 수 없는 모양이다. 크기로 말하자면 4~5층 높이의 콘크리트 건물 정도로 가늠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회색빛 덩어리에 움푹움푹 크게 파인 자욱이 있는 것이, 어찌 보면 간혹 해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위만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문득 길이 끊어지면서 아찔한 낭떠러지가 눈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곧 이쪽과 저쪽을 잇는 붉은 철제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구름다리를 건널 때 으레 그렇듯이 몸이 바람에 약간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반대쪽으로 건너가면 바로 부소암 아래로 바짝 붙게 된다.          

지질학에 전혀 문외한인 일반인의 눈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부소암의 밑부분은 오랜 침식작용으로 인해 움푹 파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소암이 둥근 공 모양으로 산꼭대기에 얹혀 있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마치 설악산 흔들바위를 크게 확대해 놓은 것 같다는 느낌을 갖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이곳을 반시계 방향으로 10미터쯤 돌아가면 쇠로 만든 조그마한 쪽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밀고 들어가면 도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샘물이 있다. 이런 바위산 꼭대기에 샘물이라니.          

몇 발짝 더 들어가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그제야 일망무제 남해섬 남쪽 바다의 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동쪽으로는 미조 앞바다부터 서쪽으로는 앵강만을 지나 멀리 희미하게 여수  앞바다까지  한눈에 다 들어온다.     

부소암에서부터 흘러내린 골짜기가 이어져 만들어진 두모포를 지나,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로 알려진 노도까지의 풍경을 마치 손바닥을 보듯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금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멀리 능선 너머로 앵강만이 유리 거울처럼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때쯤이면 나는 으레 부소대 앞 너럭바위에 앉아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편다. 아니, 상상이 아니라 먼 옛날에 실제로 있었음직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한 환상에 잠기는 것이다.          

숲 속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 곡괭이 부딪치는 소리, 여기저기서 서로를 부르며 후다닥 거리는 소리, 그리고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바위 위에서 그때의 모든 광경을 손금처럼 내려다보며 지휘를 하고 있었을 초로의 남자를 생각하며 나는 깊은 상념 속으로 잠겨 든다.                                        

이쯤에서 나는, 지금까지 참아왔던 비밀스럽고 기이한 이야기를 여러분께 털어놓으려 한다. 내 나름대로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결심을 하긴 했지만, 막상 시작하려 하니 망설여지는 점도 없지 않다. 사람들이 과연 내 이야기를 얼마나 믿어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회의가 바로 그것이다.     

나 자신이야 물론 이 이야기를 직접 귀로 들으면서 이해했고 눈으로 보면서 확인했기 때문에 이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듣는 여러분들로서는 정말 믿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른 책에서 읽은 이야기 두 가지만 간단히 소개함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나의 경험담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첫 번째는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의 이야기다.            

        

1869년 봄, 이 신기한 언덕을 꼼꼼하게 둘러보던 중년의 유럽 남자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관목 숲의 낙타들 사이에서 겉도는 듯 보였다. 그는 타고난 활력으로 고고학의 새 길을 개척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주장은 아주 소박하다. 나는 생명이 없는 예술작품이나 찾아다니고 싶지 않다. 처음부터 나의 유일한 발굴 목적은 트로이를 찾는 것이었다. (......) 나의 작업을 통해 어둠에 휩싸인 선사시대로 뚫고 들어가 위대한 그리스 민족의 흥미로운 고대 역사 일부를 발견함으로써 과학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이 말을 통해 당시 대세를 이루던 '예술 고고학'의 틀을 뛰어넘는 계획을 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쪽 겨드랑이에는 <일리아드>를 끼고(당대의 다른 과학자들과 달리 그는 호메로스의 작품을 실제 사건으로 간주했다) 한 손에는 시계를 들고서 '히사를리크'라고 불리는 언덕 주변을 거닐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전투의 와중에서 도시의 성곽을 세 차례나 돌았다는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가능한지 어떤지를 알아보려면 시계가 필요했다. 그는 이런 사실들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그곳이 바로 고대 트로이 터가 분명하다고 선언했다.(......)     

1868년 하인리히 슐리만은 절정에 오른 그의 사업에서 손을 떼고 어렸을 때 꿈인 트로이 발굴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870년 6월 24일, 당시 학생이었던 아들 세르게이에게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활력만 있으면 인간이 못할 일이라곤 없다는 것을 늘 증명해 보이는 이 아버지를 본받도록 해라.(......) 상트페테르부르크 상인 중에 학술서를 쓴 이는 여태껏 단 한 명도 없지만, 나는 4개 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책을 저술한 바 있다. 지금은 고고학자로서 유럽과 미국에서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00년 동안 전 세계의 고고학자들이 찾아 나섰지만 결국 찾지 못했던 고대 트로이를 바로 내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번역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번역이란 것이 원래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쨌든 내가 소개하고 싶은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인물을 통해 트로이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사실과, 그 출발이 <일리아드>라는 책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라는 사실에 있다.     

물론 트로이 유적이 발견되기 직전까지 하인리히 슐리만이 겪었을 수없는 비웃음과 냉대도 같이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도 없지는 않지만.      

              

두 번째 이야기는 '진시황 병마용(秦始皇 兵馬俑)'을 발굴할 당시의 상황이다.   

                 

1974년 봄, 극심한 가뭄이 중국 서부 800리의 진천(秦川)을 휩쓸고 있었다. (......)     

서양촌(西楊村)의 생산 대장 양배언(楊培彦)과 부대장 양문학(楊文學)은 과수원 모퉁이에 서서, 나무만 자랄 뿐 농작물은 자라지 않는 황폐한 땅을 바라보며 무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태양이 서산으로 기울고 새들이 둥지를 찾을 무렵, 양배언은 결심을 굳히고 삽을 들어 돌무더기 땅 위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여기서부터 시작합시다.”

양문학은 여산(驪山) 골짜기 입구와 발아래 그려진 원이 일직선 상에 있는 것을 가늠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신이 돌봐 주시길 바랄 뿐!”

이때만 해도 이 동그라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서양촌의 조장인 양전의(楊全義)를 비롯해 6명의 장정이 삽을 휘둘러 그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1974년 3월 29일.

양지발(楊志發)이라는 청년이 곡괭이를 내리친 순간 진시황릉 병마용(兵馬俑, 병사와 말의 도기 인형)의 첫 번째 파편이 출토되었다. 기적의 빛이 지면으로 그 형태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양지발은 그 파편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다만 물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양지발과 그 동료들의 곡괭이는 줄기차게 이 지하군단을 내리찍고 있었다.     

이 역시 번역문을 인용한 것이다. 좀 더 리얼하게 극적인 모습으로 그려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진실성까지도 꾸며낸 것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다소 드라마틱한 느낌은 떨어지는 문장이지만 그대로 옮겼다. 어쨌든 지금의 ‘진시황 병마용’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던 날의 실제 모습은 이와 같이 시시했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부터 내 친구 김상오(金象午)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릴까 한다. 사실 김상오란 이름은 이 친구의 본명이 아니다. 이 친구를 가명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무슨 별다른 비밀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아직은 이 친구의 본명을 여러분께 알릴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가 여러분께 알려져서 인정을 받게 되면 당연히 본명으로 세상에 소개할 생각이다. 아니 내가 소개하기 전에 알게 될 것이다.

요즘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어릴 적부터 머리가 비상했던 데다 어른이 되어서도 ‘호기심 천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그 친구는 유독 한문에 관심이 많았다. 학창 시절에도 웬만한 한시는 줄줄 외곤 하던 그 친구는, 예전에 [고문진보(古文眞寶)]를 읽다가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다고 했다.     


於是廢先王之道, 焚百家之言, 以愚黔首, 墮名城, 殺豪俊, 收天下之兵, 聚之咸陽, 銷鋒鍉, 鑄以爲金人十二, 以弱天下之民.

이에 선왕의 법도를 폐하고 제자백가의 글을 불태움으로써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한편 이름난 성(城)을 허물고 호걸들을 죽였다.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함양(咸陽)에 모은 다음 칼과 활촉을 녹여서 금인(金人) 열두 개를 주조함으로써 천하의 백성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잖게 넘겨도 될 이 대목에서, ‘호기심 천국’이었던 그 친구가 궁금하게 여긴 것은 천하의 병기를 모아 만들었다는 ‘열두 개의 금인’이었다.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던 그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문자 그대로 ‘셀 수도 없이’ 만들어졌을 천하의 병기를, 그것들을 모두 모았다면 그 양이 얼마만큼 되었을까? 그 양이 적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얼마나 큰 용광로에 담아 녹였을까?

그리고 그것을 열두 덩어리로 나누어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면 그 하나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던 그의 의문이 봉착한 곳은, ‘모르긴 해도 엄청난 크기로 만들어졌을 그 금인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왜 아무도 모를까?’였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많은 쇠붙이를 녹여서 만든 금인이라면 그 덩치가 엄청난 크기였을 것이고, 그렇게 엄청난 크기의 금인이라면, 일부러 숨겨두었다고 해도 벌써 눈에 띄었을 터인데, 지금은 아무도 그 금인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88 올림픽 중계방송을 보다가 화면에 커다란 북이 보이자 “저렇게 큰 북을 만들자면 도대체 얼마나 큰 소가 있어야 될까?”라고 중얼거렸다던 그 친구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의문이었다.     

김상오는 곧 금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문서를 뒤져보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다음과 같은 기록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史記 秦始皇本紀> 二十六年 : 收天下之兵 聚之咸陽 銷以爲鍾鐻金人十二重各千石.

<사기 진시황 본기> 26년 :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함양에 모은 다음, 그것을 녹여 종을 매다는 용도로 금인 열두 개를 만들었다. 무게는 각각 천 석이나 되었다.     


<正義>曰 「漢書五行志」云 二十六年 有大人 長五丈 足履六尺 皆夷狄服 凡十二人.

<정의>에는 “「한서 오행지」에 ‘26년에 커다란 사람 형상이 있었는데, 길이가 5장이고 신발 크기가 6척이었다. 모두 오랑캐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도합 열두 개였다,’라고 적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三輔舊事>云 聚天下之兵器 鑄銅人十二 各重二十四萬斤.

<삼보구사>에는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동인 열두 개를 주조했는데, 각각 무게가 24만 근이 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유독 김상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금인이 없어진 과정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금인에 없어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탁전(董卓傳)」에 실려 있었다. 

거기에는 “동탁이 낙양을 접수한 후 열 개의 금인을 녹여서 동전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쇠붙이가 모자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동전을 만드는 성분을 구성하는 데에 필요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구리 광석을 섞어서 만들었다는 설명도 곁들여 있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김상오의 눈빛은 더욱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녹였다는 금인의 개수가 열 개뿐일까?

일부러 두 개를 남겨두었다는 뜻일까?

구리 광석을 섞어야 할 정도로 많은 쇠붙이가 필요했다면 굳이 두 개를 남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금인 두 개를 남겼단 말인가?

두 개를 남겼다면 왜 남겼는지, 남긴 금인은 어디에 세워두었는지 분명한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아니 기록은 없다 해도, 그 정도 크기의 금인이 존재한다면 최소한 어디엔가 남아서 지금 우리 눈에 보여야 되는 게 아닐까?

아니다, 동탁이 입수한 금인은 열 개가 전부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머지 두 개의 ‘금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의 의문은 또다시 이렇게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갔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내 친구 김상오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야기와 실제로 내가 함께 경험했던 이야기를 종합해서 정리한 것이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들께서는 내가 어떤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대략 감을 잡으셨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시점에서 만약 내 이야기가 하인리히 슐리만이 읽던 <일리아드>에 비해 그 가치가 떨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신다면, 혹은 양지발의 곡괭이 끝에 걸려 나왔던 도자기 조각보다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드신다면 …….

그러한 독자께서는 이쯤에서 책을 덮어주시길 바란다.

그럼 이제부터, 믿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내가 직접 듣고 보고 경험했던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릴까 한다. 아직 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책을 펼친 채 기다리고 있는 여러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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