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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선비 Mar 26. 2021

12. 벽옥도의 금인

    

금인선을 끄는 여섯 척의 배는 이미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이미 완전히 돛을 접은 배는 금인선을 끄는 것이 아니라 금인선에 매달려 꼼짝도 못 한 채 제멋대로 흔들리는 나무토막에 불과했다. 

금인선과 연결된 밧줄만 없었다면 오히려 무슨 수를 써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흘 후.

날씨는 쾌청했고 바다는 서불 일행이 백암도에 상륙한 이래로 가장 잔잔했다.

사흘을 쉰 탓도 있겠지만, 곧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푼 서불은 피로한 줄도 모르고 바로 벽옥도를 향해 닻을 올렸다.

아직 뭍으로 옮기지 않고 백암도 앞 작은 섬에 묶여 있는 금인을 지키는 인원은 최소한으로 하되, 하역작업에 동원되지 않고 해안에 남아서 배를 수리하던 인원으로 구성했다. 

금인은 앞바다의 작은 섬 가까운 곳에 매어 두고 큰 나무를 베어서 위장해 두었다. 조금 더 안정감 있게 하기 위해서 금인선 앞쪽 뾰족한 부분을 제외한 세 방향에 각각 배 한 척씩을 묶어두었기 때문에 벽옥도를 다녀오는 열흘 정도의 기간에는 별일이 없을 것이다. 

서불은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백암도에 상륙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가차 없이 목을 베겠다고 못을 박았다.     


벽옥도를 향해 갈 때, 동명은 그들이 지나왔던 큰 바다로 다시 빠져나가서 크게 우회하는 항로를 택했다. 원래는 가능하면 해안가로 붙어서 풍랑을 피하기 쉬운 항로를 택하려고 했지만, 처음 백암도로 접근할 때 보았던 지역을 빠져나가기가 만만찮아 보인다는 서불의 의견 때문에 계획을 바꾼 것이었다.

 많은 섬 사이로 난 좁은 뱃길을 선택하면 물결이 잔잔하고 거리도 가깝다는 이점은 있으나, 가끔 만나게 되는 빠른 물살에 휩쓸려 자칫 암초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금인을 비롯한 선단 전체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섬 지역을 우회해서 돌다 보니 어느새 큰 바다로 나오게 되었고 다시 해안으로 붙으려고 했으나 역시 많은 섬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넓은 바다 쪽으로 방향을 잡아 크게 우회해서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서불이 지났던 항로를 현재의 남해안 지명을 이용해서 설명하자면 이렇다.

즉 서불은 남해 미조항을 벗어나자, 자신들이 지나왔던 세존도 방향으로 항로를 잡았다. 

그러다가 세존도가 손에 잡힐 정도의 거리에 접근했을 때 왼편으로 방향을 꺾어서 갈도와 좌사리도와 국도를 지나고 매물도를 거쳐서 거제도 해금강을 향하는 항로를 택했다는 뜻이다.    

 

큰 바다로 나선 지 이틀째, 

선단은 오른편으로 멀찌감치 유혈도를 보면서 왼편으로 섬을 끼고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서불은 틈만 나면 갑판 위로 올라가 주변 지형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시 이 뱃길을 지나간다면 그때는 어느 누구의 도움이 없이 오로지 자신의 감각으로 항해를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불은 특이한 지형지물을 만나면 다시 선실로 내려가 백암산과 방장산의 거리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벽옥도와 영주산의 거리를 가늠해 보기도 하면서 벽옥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오후였다. 선실에서 뱃길을 검토하던 서불은 배가 예전과 달리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동명에게 물었다.

“배가 좀 심하게 흔들리는데, 무슨 이상이 있는 건가?”

동명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완전히 큰 바다로 빠져나온 모양입니다. 

달포 만에 배를 타시니 그런 느낌이 드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곧 도착할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렇게 먼 길을 오면서도 별일 없었는데…….”

서불은 다시 벽에 걸린 지도를 보면서 지금까지 지나온 항로와 앞으로 지나가야 할 항로를 손으로 짚어가며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서불이 몸의 균형을 잃고 흔들리다가 가까스로 벽을 잡고 겨우 몸을 가누던 순간, 서불이 아끼던 찻잔이 흔들리는 탁자에서 굴러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동시에 동명도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비틀거리다가 탁자 옆 기둥을 잡고 간신히 몸을 추스르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선실 한쪽 벽에 붙어선 서불과 탁자를 잡고 웅크린 동명의 눈길이 서로 허공에서 만났을 때, 동명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외마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태풍! 아……, 안 돼!”

부리나케 갑판으로 올라온 서불은 이미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느새 하늘은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였고, 바람과 파도는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고 있었다. 서불은 금인을 실은 배를 돌아보았다. 약간 뒤처져서 따라오는 금인선은 그야말로 가랑잎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저기에서 보면 이 대장선도 마찬가지리라.

금인선을 이끄는 여섯 척의 배는 이미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이미 완전히 돛을 접은 배는, 금인선을 끄는 것이 아니라 금인선에 매달려 꼼짝도 못 한 채 제멋대로 흔들리는 나무토막에 불과했다. 금인선과 연결한 밧줄만 없었다면 오히려 무슨 수를 써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서불은 불어오는 비바람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동명을 향해 울부짖듯 물었다.

“동명, 벽옥도는 아직 멀었나?”

바람에 날려 갑판 위로 밀려드는 파도에 휩쓸려 내동댕이쳐진 채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동명이 난간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저어기 저곳입니다. 그런데 …….”

돛대에 감긴 밧줄을 잡고 몸을 지탱하면서 서불이 물었다.

“뭔가?”

동명은 고개를 돌려, 얼굴로 몰아치는 파도를 피하는 한편 위태롭게 흔들리는 금인선을 힐끗 돌아보곤 서불에게 말했다.

“사람을 살리려면 금인을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금인을 끌로 항해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서불은 울부짖듯 고함을 지르며 대답했다. 파도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금인을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

동명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압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금인도 사람도 모두 잃게 됩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서불은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이 흔들이면서도 계속 소리쳤다.

“절대로 안 돼! 우리 모두 같이 죽은 한이 있어도, 안 될 일이야!”

그러나 그때 이미 오래전부터 대장선과 멀어지기 시작한 금인 선단에서, 선원들이 칼을 뽑아 네 겹으로 엮은 굵은 동아줄을 내려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서불은 머리를 감싼 채 외마디 소리를 토하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동명은 역시 항해 전문가였는지라 곧 평정을 되찾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선단의 진로를 이대로 유지하면서 애초의 목적지로 향하면, 깎아지른 바위 절벽으로 휩쓸려가서 그대로 부딪히게 되리라는 것은 누가 봐도 불을 보듯이 뻔했다.

바람은 점점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었고 파도는 더 이상 항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지도를 살피던 동명은 원래의 상륙 예상지점인 벽옥도 왼편의 넓고 완만한 해안을 포기하고 오른편 큰 바다 쪽으로 우회하여 벽옥도를 지나치기로 결정했다.

벽옥도는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조그만 섬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바람을 정면으로 받는 형국에서 배를 접안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벽옥도와 육지 사이에 선단이 지나갈 만한 좁은 물길이 틔어져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파도 속에서 선단을 이끌고 그곳을 지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선단은 동명이 탄 배가 이끄는 대로 벽옥도를 우회하기 시작했다. 동명과 서불은 벽옥도를 왼편에 두고 우회하면서 다시 한번 금인선을 바라보았다. 이미 선단에서 분리되어 제멋대로 파도에 휩쓸리던 금인선은, 집어삼킬 듯 밀려오는 산더미 같은 파도에 휩쓸려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흔들리면서 벽옥도의 절벽을 향해 밀려가고 있었다.

높은 파도 때문에 제대로 분간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금인은 금인선에 실려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어보았으나 그것도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금인선이 거의 벽옥도 절벽에 부딪힐 정도로 가까워졌다 싶을 때, 절벽을 때리고 돌아 나오는 큰 파도에 파묻힌 금인선이 약간 바다 쪽으로 밀려나간다는 느낌은 받았으나 하얀 물보라가 걷히자 금인선은 결국 뒤집혀 있었다. 동명은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으나, 서불은 정반대로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뜬 채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명의 예상대로, 벽옥도를 돌아서 뒤쪽(지금의 학동 부근이다)으로 들어서자 파도의 높이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바람도 조금 전 큰 바다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동명은 선단 전체를 밧줄로 묶어 한 덩어리로 만들게 했다. 

이미 사방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비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횃불은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다가 새벽녘이 되어 임시로나마 선단을 묶는 작업이 끝날 무렵 파도는 기세가 꺾여 잔잔해지기 시작했고, 비바람도 이미 큰 고비는 넘겼다 싶을 정도로 그 위세가 약해져 있었다.     

아침이 되자 마치 어젯밤 일은 꿈이었던 것처럼 바다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선단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금인선은 물론 금인선을 끌고 오던 여섯 척의 배는 결국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금인선이 뒤집히던 모습은 동명과 서불이 제 눈으로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서불은 동명에게 선단을 다시 수습하라고 지시한 다음, 배 한 척을 준비하게 하여 벽옥도로 건너갔다. 태풍 끝의 바람이 약간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어젯밤과 같은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상쾌한 느낌마저 주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벽옥도로 올라간 동명은 어제 금인선이 사라지던 광경을 다시 회상하면서, 금인선이 가라앉은 곳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절벽 끝으로 가서 준비해 간 정과 망치로 바위에다 뭔가 새기기 시작했다.

서불이 다시 선단으로 돌아온 것은 정오를 넘은 때였다.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명은 태풍 뒤의 선단을 수습하느라 처참해진 몰골로 서불 앞에 엎드린 채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인! 어젯밤에 배 여섯 척과 삼백 명의 대원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금인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곳에 금인을 내려두고 방장산을 향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이오니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서불은 엎드린 동명을 내려다보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게 어찌 자네의 불찰이겠나? 하늘의 뜻이 그렇다고 봐야지. 죽은 선원들이야 안타깝지만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 거지. 금인이 어떻게 됐는지 자네도 알고 나도 알지 않는가? 바다 밑의 일을 우리가 어찌 알겠나? 다음에 오면 또 찾아볼 수도 있겠지!”

말을 마친 서불은 동명에게 다시 백암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백암산 아래에 묶어둔 나머지 하나의 금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무엇보다 궁금했던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뒤의 바다는 너무나 맑고 좋았다. 벌써 바람에 차가운 기운이 묻어오기는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상쾌함을 더해 주었다. 

그러나 선단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백암도에 묶어두고 온 금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동명은 이미 절망적이라고 했지만 서불은 혹시나 하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벽옥도로 갈 때는 워낙 바깥쪽 큰 바다로 나갔기 때문에 바람과 파도를 이겨낼 수 없었지만, 백암도 쪽은 아무래도 그쪽보다는 모든 조건이 유리한 데다 워낙 단단히 묶어 두었기 때문에 서불은 금인의 안위에 대한 일망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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