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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선비 Mar 25. 2021

11. 보물섬

     

바로 그때였다. 

툴툴거리며 조금 전에 자신이 딛고 섰던 곳을 원망스레 쳐다보던 서불의 눈빛이 번짝였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매달려 보려고 애쓰던 자기 덩치만 한 바위가 비스듬히 미끄러져 흘러내려 있었고, 그 바위가 있던 자리에는 구멍이 뻥 뚫린 채 그 틈새를 뚫고 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하역작업은 사흘 뒤부터 시작되었다. 

그 사흘 동안 서불은 동남동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어린 남녀들이 오랜 항해를 겪는 동안 누적되었던 피로를 풀 수 있게끔 쉬게 했다. 남쪽으로 툭 트인 양지바르고 넓은 바닷가에서 그들은 마치 유람선을 타고 여행하다가 잠시 뭍에 내린 사람들처럼 즐겁게 떠들며 마시고 지냈다.

그러나 서불은 쉴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상륙하던 날부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큰 비는 아니었다고 해도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 내렸다. 하지만 먼동이 틀 무렵 동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보고 서불은 행장을 차리기 시작했다.

날씨를 확인한 서불은,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배를 타고 나가 섬에 금인을 고정시키는 마무리 작업을 지휘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백암산을 향해 올라가더니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온통 흙투성이가 된 채 내려왔다.


서불을 수행하고 다니는 사람은 단 하나, 동명이 유일했다. 

첫날을 산에서 보내고 내려온 서불은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시켜, 사방 석자 크기의 얇고 가벼운 양가죽으로 덮은 죽간과 어른 주먹 크기의 쇠망치 그리고 작고 예리한 장도를 하나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백암산을 올랐던 첫날, 서불은 자신들이 상륙할 지점을 손바닥처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그곳은 상륙지점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들이 정박하고 있는 곳까지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이상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곳의 지형은 정말 희한했다.

올라올 적에는 그저 높고 큰 바위산이 있다 싶어, 그곳을 왼편으로 돌아 정상으로 올랐는데, 처음엔 그저 정상으로 오르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 바위산의 형세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에 서서 그곳을 내려다보니, 그 장소만큼 좋은 곳도 없었다. 

그곳은 백암산 정상이 아니라 정상에서 약간 서쪽 내리막으로 비껴선 곳이었는데,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위가 그 꼭대기에 위태롭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기도 했다. 

서불은 그 바위를 대장 바위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내리막길에서 막상 대장 바위로 접근해 보니 올라올 적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깎아지른 바위 벼랑이 가로막고 있었다. 

대장 바위는 마치 백암산과 별도로 만들어진 요새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기이하게 생긴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대장 바위로 가려면 수십 길이나 매끄러운 바위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반대편 바위 절벽을 그만큼 더 올라가야 했다. 도저히 맨몸으로 접근하기는 불가능한 지형이었던 것이다.

서불은 일단 그 절벽을 피해서, 아까 올라왔던 그 길을 따라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대장 바위 바로 밑에 접근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어도 역시 그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찾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 장소를 포기할 수 없었던 서불은, 적당히 만만해 보이는 벼랑을 골라 기어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마침 남서쪽 벼랑에 튼실해 보이는 나무가 한 그루 뻗어 나 있었고, 디딤돌로 이용하기에 적당하리만큼 어린애 머리통만 한 돌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것이, 한번 시도해 볼 만했다.

그러나 막상 오르려고 시도를 해보니 예상했던 바와 달리 쉽진 않았다. 

두 팔로 나뭇가지를 잡고 발을 호박돌에 디딘 채 매달리는 데까지는 그런대로 해볼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위로 오를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며칠 동안 줄곧 내린 비 때문에 바윗돌은 미끄러웠고 나뭇가지나 풀 따위도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더욱 몸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을까.

어느 순간 바위 벼랑에 매달린 서불의 몸이 기우뚱하는가 했더니, 딛고 있던 조그만 돌이 쑥 빠지면서 서불은 그대로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진 높이야 겨우 자신의 키의 두 배 정도에 불과했지만 서불은 너무 놀랐고, 밑에서 자기를 지켜보던 동명이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툴툴거리며 조금 전에 자신이 딛고 섰던 곳을 원망스레 쳐다보던 서불의 눈빛이 번쩍였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매달려보려고 애쓰던 자기 덩치만 한 바위가 비스듬히 미끄러져 흘러내려 있었고, 그 바위가 있던 자리에는 구멍이 뻥 뚫린 채 그 틈새를 뚫고 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서불은 자기 몸에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번개같이 그 자리로 기어 올라가 무너져 내리다 만 그 바위 밑을 받치고 있던 흙무더기를 막대기로 긁어내기 시작했다. 옆에 서 있던 동명도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사태를 짐작하고 바로 서불 옆에 붙어서 손으로 흙을 파냈다.

서불과 동명이 번갈아가며 흙을 긁어내자 바위는 자체의 무게 때문에 조금씩 밑으로 움직였다. 전날 밤에 내린 비 때문에 젖은 흙을 긁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치 이빨이 빠진 것처럼 휑하니 구멍이 뚫린 그 절벽에는 어느새 제법 사람 몸뚱어리 하나는 족히 드나들 만한 동굴이 만들어졌다. 비록 편안히 서서 다닐 수는 없다 해도, 그 바위틈으로 기어서 올라가면 어느새 자기가 바라던 대장 바위 바로 밑에 바짝 붙은 지점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동굴을 지나 잡목 숲을 헤치고 대장 바위 밑에 이르고 보니 예상대로 아래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건 물론이었거니와, 아늑하기가 그곳보다 나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곳에는 솟아나는 샘물도 있었다. 서불로서는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이미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해가 지는 쪽으로 아스라이 먼바다에는 황혼에 번쩍이는 물결 위로 자신이 이끌고 온 선단이 닻을 내린 채 점점이 머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튿날에도 서불은 일찍부터 산에 올랐다. 미리 만들어둔 죽간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서 왼쪽 어깨에 걸쳐 메고, 오른쪽 어깨에는 묵직한 망치 주머니를 걸쳐 메었다. 

어제와 달리 서불은 그 전날 만들어놓은 동굴을 통해 곧장 대장 바위로 올라가, 불어오는 소슬바람을 맞으며 한참 동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불은 생각했다. 어제와 같은 일이 분명 또 있으리라. 어제는 행운이자 우연이었지만 오늘은 자신이 직접 그런 돌부리를 찾아내리라 생각했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 서불은 중요한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상식으로 보자면 서불이 발견한 이치는 별것도 아니라 하겠지만, 당시의 서불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남해 금산은 남쪽 사면이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산이다. 

북쪽 사면은 완만하게 능선을 이루고 있어서 편안하게 오를 수 있지만, 남쪽은 전혀 다른 형상이다. 마치 커다란 바위와 흙을 섞어서 거대한 돌무더기를 만들어 두었는데 그것이 큰 비를 만나 반이 뚝 잘려 나가면서 남쪽 부분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서불은 그러한 지형에서 생길 수 있는 이변이 있다는 사실을 어제의 경험을 통해 알아차렸다. 

전날 서불이 딛고 서서 굴러 대는 통에 무너져 내린 돌부리는 일종의 종석(宗石) 역할을 하는 돌이었다. 

종석이란 홍예문(虹霓門)의 중앙 마루에 박혀 있는 쐐기 모양의 돌을 말한다. 영어로는 키 스톤(key stone)이라 한다. 

홍예문, 즉 아치 모양의 돌다리에는 그 정상 중앙부에 쐐기돌이 박혀 있게 마련이다. 이 돌 하나가 바로 그 아치 모양을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는 핵심으로서, 양쪽 방향에서 쏠려 들어오는 힘을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돌을 빼어버리면 그 아치교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서불이 딛었던 돌이 바로 그가 잡고 오르려 했던 그 바위를 그 형태로 버틸 수 있게 지탱해 주던 종석 구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서불은 바로 대장 바위 밑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대장 바위 밑을 유심히 살피면서 이리저리 서성이던 서불의 눈에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가 들어왔다. 

대장 바위 남쪽으로 벌어져 있는 좁다란 틈 사이에 큼직한 바위가 하나 걸쳐져 있었고 그 틈바구니로 주먹만 한 크기의 돌멩이가 서너 개 박혀 있었다. 서불은 가지고 온 쇠망치로 그 돌멩이를 힘껏 내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몇 차례의 망치질에 그 돌멩이가 빠져나가자 예상했던 대로 바위가 조금씩 아래로 쳐지기 시작했다. 바로 어제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서불이 동명을 시켜 어제처럼 바위 밑의 흙을 걷어내게 하자 그 바위도 아래로 흘러내렸고, 역시 또 다른 동굴이 하나 생겼다. 

서불은 곧장 그 바위를 타고 대장 바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대장 바위를 딛고 올라선 서불은 해가 지기 직전까지 그곳에 앉아서 발아래 펼쳐진 지형을 세밀하게 죽간 양가죽에 그려 넣었다. 하지만 그런 서불의 모습을 동명은 볼 수가 없었다. 서불은 동명이 대장 바위 위에 올라오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불의 그림도 거기에서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얼핏 보면 그저 양가죽에 그린 지도 정도에 불과했다. 서불은 그것을 다시 가죽 주머니에 고이 말아 넣어서 어깨에 둘러메었다.


다음 날부터의 산행은 오로지 서불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숲이 우거진 산속에서, 서불은 오로지 자신이 그렸던 지도에 의지한 체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바위 위에 올라서기도 하고 망치로 바위를 두드려보기도 하면서 백암산을 샅샅이 뒤지듯 하루해를 보냈다. 

가끔씩 쉴 때는 등에 메고 있던 죽간을 풀어서 무언가를 계속 그려 넣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동안 또 이레가 흘러갔다.     

동남동녀라 불리는, 선원 아닌 선원들은 젊은이들이라 역시 달랐다. 항해하는 동안에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곧 죽을 듯 괴로워하더니, 육지 냄새를 맡고 제대로 만든 식사를 하게 되자 곧바로 기력을 회복하고 신속하게 하역작업을 진행했다.

전체 인원이 5000명이 넘는다고는 해도 배에 남아 있는 일부 인원과 여자들을 제외시키니 하역작업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은 2000명 남짓 되었다. 

이들은 서불의 지휘 아래,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금인선을 끌던 열두 척을 제외한 90척이나 되는 배에 실린 나무 상자 가운데 붉은색으로 ‘하(下)’ 자가 적힌 상자를 먼저 하역했다. 그 작업만 해도 꼬박 사흘 밤낮이 걸렸다.

서불은 하역작업을 아주 세심하게 지휘했다. 

90척의 배가 한꺼번에 움직인 것이 아니라 한 척씩 움직였다. 

한 척이 그들의 선단을 떠나 금인선이 묶인 섬 건너편 포구로 들어가서 100개의 상자를 하역했고, 작업은 그 배에 타고 온 남자들이 맡았다. 상자가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워낙 무거운 탓에, 상자 하나를 내리는 데 네 명이 필요했다. 

먼저 상자 위에 직경 네 치, 길이 여섯 자 크기의 통나무를 얹어서 상자와 통나무를 한 덩어리로 묶었다. 

그다음에 앞뒤로 두 명씩 서서 그 통나무를 아래에서 위로 감싸듯 밧줄을 건 다음, 그 밧줄 끝에 다시 매듭을 짓고 막대를 끼워 두 명씩 앞뒤로 서서 함께 어깨에 메는 방식으로 하역작업을 진행하였다.

더구나 배에서 내릴 때는 좁은 나무판자를 딛고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작업 속도가 더욱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파도가 밀려들어도 그 상자가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약간 내륙 쪽으로 상자를 쌓았기 때문에, 배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 상자를 메고 걸어야 했다. 

한밤중에는 어둠 때문에 배에서 상자를 쌓는 곳까지 이르는 길을 제대로 찾기도 어려웠다. 모두들 처음으로 디뎌보는 땅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불은 군데군데 솟아 있는 바위를 칼로 쳐서 표시를 한 다음, 횃불을 비춰 그 표시를 찾아오도록 일러두었다.


90척의 배에서 내린 9000개의 상자는 모두 아홉 무더기로 나눠 쌓았다. 

가로세로는 물론 높이도 일정하게 각각 열 개씩 일정하게 해서, 무더기당 1000개의 상자를 맞추어 쌓았기 때문에 아홉 무더기의 모양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사흘째 되는 날 동이 틀 무렵에야 하역작업이 겨우 끝이 났다. 서불은 낮 시간 동안 선원들을 모두 쉬게 하였다.

서불은 쌓아둔 상자 무더기를 천으로 덮고 밧줄로 묶은 다음, 자신의 명령 없이는 누구도 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선원들이 쉬는 시간에 서불은 순서를 정해 선원 두 명씩만 데리고 백암산으로 올라갔다. 서불은 역시 며칠 전에 올랐던 완만한 왼쪽 사면을 향해 출발했다.     

백암산 자락으로 접어든 서불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을 향해 산을 오르는 시간보다 뒤돌아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간이 훨씬 많을 정도로 서불은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가끔씩은 선원 두 명을 기다리라 해놓고 어디론가 급히 다녀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산을 오르다 보니, 서불이 백암산 정상에 올라 아래를 굽어볼 때는 해가 이미 중천을 지나 서쪽 하늘에 걸려 있기 일쑤였다. 

서불이 다시 포구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선원들이 저녁식사 준비를 거의 끝낼 무렵이었다. 

서불의 이러한 행동은 열흘이나 계속되었으며, 그때마다 수행하는 선원은 바뀌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이러한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서불은 전원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곳 백암산은 방장산의 기운이 맺혔다가 바다를 향해 뻗은 곳이다. 

나는 그동안 불로초를 찾아온 백암산을 샅샅이 휘젓고 다녔다. 그 결과 나는 이 일대에 불로초가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얻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특명을 받고 온 우리가 여기서 그칠 수는 없다. 

우리가 목표로 정한 영주산을 둘러보면 또 다른 어떤 불로초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가지고 온 물품의 절반을 이곳에 숨겨놓고 영주산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작업은 오늘 밤부터 시작한다.”


서불은 아직 배에 실려 있던 또 다른 상자 100개를 내려서 열게 했다. 

각각의 상자 속에는 자루 없는 곡괭이가 다섯 개씩, 도합 500개가 들어 있었다. 

서불은 2000명의 대원들을 100명씩 스무 조로 나누고, 각 조마다 곡괭이 25개씩을 나눠준 다음 어두워지기 전에 자루를 만들어 끼워서 모이게 했다.

횃불을 켰다고는 해도 한밤중에 산길을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곡괭이를 멘 2000명의 장정이 산 중턱에 집결하자, 서불은 그들을 낮에 미리 일러둔 대로, 100명씩 스무 개의 소규모 부대로 나누었다. 그런 다음 모두 그 자리에 앉아 쉬게 하고, 한 부대씩 자신이 직접 인솔하여 단 한 개의 횃불만 켜게 한 채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먼 곳 어디에선가 텅텅하면서 곡괭이 소리가 고요한 산속 공기를 흔들기 시작하면 서불이 나타나서 또 다른 횃불 하나와 한 부대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해서 모든 부대가 제각기 자신들의 작업 장소에 배치되자, 텅텅거리는 소리와 작업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온 산에 쩌렁쩌렁 울리며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지금 백암산의 어디쯤에 있는지, 주위에서 울려 퍼지는 곡괭이 찍는 소리는 또 어디쯤에서 나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느새 대장 바위에 오른 서불은, 자신이 그렸던 지도를 펼쳐놓고 그믐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빛나는 횃불의 위치를 손으로 짚어가며 양가죽에 뭔가를 신중하게 그려 넣고 있었다.     

100명의 장정이 밤을 새우며 열심히 작업을 한 탓에 새벽녘이 되자 곡괭이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서불은 서둘러 자신이 작업을 지시했던 곳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다시 대원을 인솔하여 어젯밤 집결했던 거북바위 부근으로 모았다. 그들은 한 곳으로 모으는 순서는 어젯밤 그들이 출발하던 순서와 완벽한 역순으로 이루어졌다. 즉 그들이 이동하던 중에 다른 대원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다. 

아직 날은 제대로 밝지 않았다. 

작업자들은 밤새도록 쉬지 않고 곡괭이를 휘둘렀던 탓에 저마다 피곤에 지쳐 있었다.

서불은 그들을 산을 오르던 때와 똑같은 형태로 대오를 이루게 한 다음, 한 명도 빠짐없이 질서 정연하게 인솔하여 해안으로 내려왔다. 서불은 해안으로 내려온 일행들에게, 언제든지 그 인원 그대로 집결할 수 있도록 자신이 속한 부대를 잊지 말라고 다시 한번 명령을 내린 다음 쉬게 했다.     


사흘 후 먼동이 틀 무렵, 서불은 사흘 전 작업에 동원되었던 2000명의 대원을 집결시켰다. 서불은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배에서 내렸던 상자를 산으로 옮긴다. 너희들이 보다시피 우리 눈앞에는 총 9000개의 상자가 있는데, 내일 해가 저물기 전까지 지난번에 너희들이 모였던 산 중턱까지 옮겨야 한다.

그때는 어두운 그믐밤이어서 잘 볼 수가 없었겠지만, 그곳에 가면 커다란 거북바위가 있는데 거기가 바로 우리가 일단 도착해서 휴식을 취할 장소다. 그 후의 일은 그때 가서 다시 지시하겠다. 운반 시간이 다소 걸리는 것은 용납할 수 있지만, 절대로 상자가 파손되어서는 안 되니 조심해야 한다.”     

9000개의 상자를 산 중턱까지 옮기는 일도 대역사였다. 

상자 하나에 네 명이 붙어야 안전하게 옮길 수 있기 때문에, 9000개를 옮기려면 연인원 3만 6000명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즉 2000명의 인원이 열여덟 번을 오르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다지 험한 길은 아니라고 하지만 빈손으로 오르내리기도 쉽지 않은 산길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재촉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이튿날 해가 질 무렵에야 일이 끝났다. 상자는 해변에 쌓여 있을 때와는 달리 450개씩 스무 무더기로 만들어 간격을 두고 숲 속에 쌓아놓았다.


과연 산 중턱에는 거북등 모양으로 약간 볼록하면서 평평해 보이는 바위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그보다 수십 배가 더 큰 바위가 있었다. 서불은 그 큰 바위 위에 올라서서 전 대원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며 지휘를 하고 있었다.

운반작업이 끝나자 서불은 자기 외에 상자를 지키기 위한 인원 80명만 남게 하고 모두 해변으로 내려보냈다. 내려가는 인원을 인솔하는 동명에게 서불은 말했다.

“우선 내일 오후까지는 전원을 푹 쉬게 해라. 그런 다음 내일부터 매일 해 질 무렵이 되면, 하루에 사백 명씩 올려 보내라. 이천 명을 다섯 부대로 나누어 각 부대를 순서대로 올려 보내되 하루 작업을 하면 사흘을 쉬게 하라. 쉬는 부대에게는 처음 이틀간은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이고 사흘째가 되면 작업 준비를 위해 몸가짐을 조심하도록 일러라.”     


이튿날 밤부터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400명이 거북바위로 올라와서, 횃불을 든 서불이 인솔하는 장소로 상자를 옮겼다. 

처음에 산을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번에 상자 100개를 옮겼다. 한 번에 100개씩 옮겨서 400명이 거의 다섯 번을 왕복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대열의 중간에 드문드문 횃불이 배치되었다고는 해도 겨우 발밑의 돌부리를 피할 수 있을 정도였을 뿐, 한밤중에 그것도 우거진 숲 속에서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서불은 마치 자기 집을 찾아가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숲 속 밤길을 거침없이 헤치며 다니고 있었다.

이윽고 어느 지점에 이르자, 커다란 바위들이 굴러내리다가 약간 평평한 지형을 만나 멈춘 채 무더기를 이루고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소가 나타났다. 서불은 그 앞에 상자를 내려놓고 바위 밑을 가리키면서 큰 나무를 치우라고 지시했다.

잎이 이미 시들어버린 그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밑동이 잘린 채 바위 밑 부드러운 흙에 꽂혀 있다시피 서 있었다. 몇 명이 덤벼들어서 그 나무를 끌어내자 금방 커다란 동굴이 생겼다. 며칠 전 새벽에 파놓은 바로 그 동굴이었다. 얼핏 보면 마치 바위틈에 저절로 생긴 천연동굴 같았다.

입구는 보통 사람의 키 높이 정도로만 파내는 대신 안쪽으로 넓은 공간을 마련했다. 동굴 천장은 바위들이 서로 엉켜 맞물려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기둥을 세우지 않아도 무너질 염려가 없었다.

동굴 입구가 드러나자, 대원들은 운반해 온 상자를 안쪽 깊은 곳부터 쌓기 시작했다. 어두운 숲 속을 비틀거리며 무거운 상자를 메고 오는 일에 비해 동굴 속에 상자를 쌓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원들이 상자 쌓는 일을 끝내자, 서불은 동굴 속에 아무도 남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대원들을 모두 인솔해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대원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거북바위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서불은 비로소 대원들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게 했다.


대원들이 어둠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에 서불은 방금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조금 전 작업이 끝난 동굴 앞에 이르자 서불은 곡괭이를 들어서 동굴 입구 아래에 있는 호박돌 하나를 툭 쳐서 빼냈다. 

그 순간, 입구 왼쪽 언덕에 쌓여 있던 바위 덩어리들이 와르르 굉음을 내면서 흙먼지와 함께 무너지더니 순식간에 입구를 막아버렸다.

휴식을 취하던 대원들은 숲 속 어딘가에서 거대한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피곤에 지치고 졸음에 겨워 누구도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서불이 500명의 대원을 인솔해서 해변으로 내려왔을 때는 아직도 캄캄한 새벽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면서 서불은 꼬박 스무 날을 백암산에서 보냈다. 

날이 지날수록 서불이 가지고 있던 지도에는 계속 복잡한 그림이 채워지고 있었다. 

마지막 날 작업이 끝나자 서불은 날랜 대원 두 명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대원을 내려 보낸 다음 백암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서불은 한동안 정상 부근을 돌아다니면서 사방을 자세히 살피다가 지도를 폈다가 하기를 수십 번을 반복하였다.

이윽고 서불은 다시 중간 집결장소로 내려와서 나머지 두 명도 내려 보낸 다음 혼자 남았다. 

서불은 대원들에게 작업지시를 내릴 때 자신이 딛고 섰던 거북바위를 정으로 쪼기 시작했다. 서불은 지금껏 자기가 들고 다니던 지도를 펴놓고 곁눈으로 봐가면서 알지 못할 이상한 그림을 그 바위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불은 이미 그 지도를 완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지도에는 이따금씩 눈길을 줄 뿐 거의 자기 마음대로 돌에다 그림을 새기는 것처럼 보였다.


서불이 포구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다.

서불은 포구로 돌아오자마자 전 대원을 모아놓고 말했다.

“모두들 그동안 작업하느라 고생들 많았다. 이제 우리가 이곳에서 할 일은 거의 끝난 셈이다. 사흘을 쉰 후에 그다음 목적지인 벽옥도로 출발한다. 그때까지는 모두 마음껏 먹으면서 즐기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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