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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선비 Mar 26. 2021

13. 백암도의 금인


  

금인선이 크다고는 하지만 산더미 같은 파도에 비하면 이미 가랑잎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몇 번이나 뒤집어질 듯 거꾸로 섰다 싶을 정도로 들썩거리던 금인선이 어느 순간 그 육중한 몸을 바로 세운다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반대쪽으로 뒤집어져 버렸다.  


   


한편 벽옥도에서 금인선이 침몰하던 바로 그 시각.

큰 바다에서 항해하는 서불의 선단이 처한 입장에 비하면 훨씬 낫긴 했으나, 백암도의 금인선도 상황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서불이 백암도를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오후였다.

백암도 앞을 지나는 바람의 세기가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결의 높이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욱더 걱정스러운 것은 조류가 눈에 띄게 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류는 서에서 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가 마치 섬을 통째로 쓸고 내려가려는 듯 우르릉 쿵쿵거리는 소리까지 내면서 흐르고 있었다.

서쪽으로 내린 닻줄은 이미 팽팽해질 대로 팽팽해져 있었고,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리기까지 하는 줄도 있었다. 그렇게 두껍게 엮은 줄에서 그런 소리가 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모두들 겁에 질려 어찌할 줄 모른 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도 어떤 방법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도가 점점 높아지자 금인선도 점차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워낙 많은 줄을 묶어놓아서이기도 하고 조류도 급한지라 좌우로 흔들리지는 않았으나 아래위로 출렁대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얼마나 버텼을까.

잔뜩 비바람을 퍼붓는 날씨에 저녁 무렵이 다가오자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파도는 높아졌고, 종일 파도에 흔들리던 금인선은 더욱더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끼이익, 끼이익!’ 하면서 뭔가 육중한 물체가 서로 부대끼며 기분 나쁜 소리를 내나 보다 했더니, 순간 누군가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악! 이제 끝났다! 쇠기둥이 빠지고 있어! 빨리 피해야 돼, 빨리!”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뿌지직’ 소리를 내며 맨 끝에 박혀 있던 쇠기둥 하나가 뽑혀나갔다. 아니 뽑혀나갔다기보다는 금인선의 귀퉁이 통나무가 그대로 찢기면서 그 자리에 박혀 있던 쇠기둥이 튕겨져 나갔다는 말이 더 옳았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너나없이 금인선을 버리고 앞다투어 섬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금인선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확실히 죽는 길이고, 그렇다고 바닷물로 뛰어든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금인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선택한 방법은, 파도에 휩쓸리는 금인선과 섬의 아름드리나무 둥치를 묶고 있던 동아줄을 타고 섬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다행히 팽팽히 당겨진 동아줄은 마치 쇠막대처럼 단단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고정된 상태는 아니었다. 

동아줄은 크게 일렁이면서 흔들리긴 했으나 애초에 워낙 빈틈없이 빼곡하게 묶었던 탓에 밧줄을 타고 피신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편이었다.     

이미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워진 상태였고, 바로 밑에서 집어삼킬 듯 용솟음치는 파도가 거친 물보라를 뿜어대고 있는데도 생사를 건 탈출을 감행하는 것인 만큼 선원들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하긴 그 외에 어떤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옳았다.     

원래 금인선은 금인의 무게로 인해 갑판의 높이가 수면과 거의 비슷해져 있었기 때문에, 금인선을 묶은 동아줄이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라 해도 거의 파도에 반쯤 파묻힌 채로 흔들리고 있는 형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줄과 줄의 간격이 좁아서 헛발질로 바다로 떨어질 위험성이 적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어둠과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내는 공포를 극복하고 동아줄에 매달린 30명의 선원들 가운데 섬으로 돌아온 사람은 모두 열여섯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열네 명은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린 것이다.     

섬에 남은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요동치는 금인선을 두려움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금인선은 겨우 시커먼 하나의 덩어리로 보일 따름이었지만, 오히려 파도가 부딪쳐서 일으키는 하얀 물거품이 그 형체를 가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윽고 금인선 쪽에서 ‘끼익’ 거리는 소리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우지끈하고 뭔가 둔중한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떵’하고 울리는 소리는 아마도 동아줄이 끊어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나면서 금인선을 버티고 있던 밧줄이 일제히 왼쪽 방향으로 움직였다. 선원들은 시커먼 덩어리가 동쪽으로 급히 쏠리는 것을 어렴풋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서쪽 방향으로 묶었던 닻줄이 모조리 끊어지거나, 그쪽에 박혔던 쇠기둥이 모두 뽑혀서 더 이상 지탱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누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금인선의 상태는 이상한 형국으로 변해 있었다. 서쪽에서 잡아주던 힘이 모두 없어지고 섬에서 잡아주는 동아줄의 힘과 동쪽에서 잡아주는 동아줄의 힘만 남은 셈인데, 동쪽에서 잡아주는 힘이란 것이 이제는 묘한 작용을 하고 있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금인선의 서쪽 부분을 들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반면에, 배를 고정시키기 위해 묶었던 동쪽 부분의 닻줄이 오히려 금인선을 밑으로 잡아당기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인선이 크다고는 하지만 산더미 같은 파도에 비하면 이미 가랑잎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몇 번이나 뒤집어질 듯 거꾸로 섰다 싶을 정도로 들썩거리던 금인선이 어느 순간 그 육중한 몸을 똑바로 세운다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반대쪽으로 뒤집어져 버렸다. 

그 큰 금인선이 뒤집어졌으니 보통 때 같으면 그로 인해 생기는 물결이 엄청났을 터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거친 파도에 파묻힌 채 그저 저 혼자 간단히 뒤집어지는 듯한 모습으로 비칠 뿐이었다.

금인선이 뒤집히는 순간, 섬에 묶였던 동아줄도 동쪽 부분에서 두 개가 끊어졌다. 

섬과 금인선을 연결하던 동아줄은 가위처럼 엇갈렸고, 금인선은 이미 하나의 커다란 판자에 불과했다. 

금인이 금인선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금인선에 매달린 채 물속으로 코를 처박고 있는 형국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오래가지 못하고 말았다. 어느 시점부턴가 뒤집힌 금인선이 흔들리는 모양이 달라졌다. 육중한 금인을 매달고 흔들리던 금인선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었다. 

금인선과 금인이 분리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 이상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없었다. 

동아줄을 염려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제 누구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태풍이 지나간 날로부터 나흘 뒤. 

백암도로 돌아온 서불은 절망하고 말았다.

며칠 전 태풍의 흔적은 바닷가 숲의 나무들이 가지가 부러지고 잎이 태반이나 떨어진 채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다는 것 외에는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금인선도 사람도 흔적이 없었다.

다만 금인선을 묶었던 동아줄만 어지러이 뒤엉킨 채 섬의 남쪽 벼랑에 걸레처럼 널브러져 있을 따름이었다.


일단 백암산 아래, 그들이 상자를 하역했던 포구에 닻을 내린 서불은 생존자들을 만나 상황을 보고받았다. 서불은 피로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대원들을 쉬게 한 다음, 동명과 향후 대책을 의논하였다.

서불은 단호한 표정으로 동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다. 바람이 완전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영주산으로 출발한다.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영주산에 상륙하여 장기간 머무를 준비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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