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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선비 Mar 26. 2021

14. 영주산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벌써 동네 어귀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서불은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자신에게 이상향을 물색해 오라는 밀명을 내린 진시황에게 천혜의 낙원인 이 영주산을 갖다 바치면 진시황도 만족하리라 믿었다. 

아무도 모르는 이 전설상의 영주산에 진시황을 모시고 오는 일만 남은 것이다.     




      

영주산으로 향하는 뱃길도 이미 험해지기 시작했다. 

태풍은 잦아들었지만 이 항로는 원래 겨울이 되면 파도가 높아져 항해가 어려워진다는 걸 동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동쪽 섬나라와 은을 거래하던 영파 상단도 이 시기가 되면 더 이상 이쪽 항로로는 배를 띄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상상외로 큰 태풍을 경험한 서불은, 이곳 백암도를 잠시 지낼 교두보로서는 괜찮은 곳이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는 곳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서불은 목표를 절반 정도만 달성한 셈이었다. 

보물은 모두 계획대로 감추어 두었지만 금인은 둘 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서불의 입장에서는 나머지 절반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 급했다.

하지만 동명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런 시기에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영주산으로 뱃머리를 돌리려는 서불의 태도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서불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하루라도 빨리 영주산을 향해 배를 출발시키는 것이 그만큼 더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나날이 파도가 높아지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행이 준비를 갖추고 백암도를 떠난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보름 남짓의 시간을 파도와 싸운 뒤에야 서불의 선단은 영주산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금인선이 없는 선단의 속도는 전에 비하면 거의 날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영주산을 바라보며 가까이 접근하던 서불은, 무슨 까닭인지 곧바로 상륙하지 않고 해안을 따라 섬을 왼쪽으로 반 바퀴 넘게 돌고 나서야 비로소 배를 멈추게 하였다.

서불은 장기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비록 이곳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었다 해도, 어차피 배를 타고 다시 바다로 나가려면 이듬해 봄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한겨울을 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 같은 영주산 기슭 중에서도 남쪽을 택하는 것이 유리했고, 더구나 그곳의 지형이 평지라면 더욱 좋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물이었다. 

서불은 배를 타고 섬을 돌면서 그러한 지형을 물색하다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려 8년을 머무르게 될 줄은 서불 자신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보물은 버려두고 왔지만 다행히 싣고 온 물자는 한겨울을 지나기에는 풍부했고 기후도 한겨울에 눈이 많이 온다는 것만 제외하면 생각보다 좋았다. 

백암도에 묻어둔 보물은 어차피 서불이 멋대로 처분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디에 있건 당장에 상관은 없었다.

서불을 비롯한 5000명의 원정대는 장기적으로 머물기 위한 기반 시설을 갖추기 시작했다. 

멀리 북쪽으로 영주산이 보이는 바닷가 평평한 지역을 골라 우선 영채를 세우고 대오를 정비했다. 

편제는 함양을 출발하던 당시의 군대 형식을 취했다.

집을 짓는 부대와 영주산 일대를 정찰하는 부대, 그리고 섬 전체를 돌면서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하는 부대 등으로 나누어 제각기 임무를 주고 특이한 일이 생기면 수시로 보고하게 하였다.

이들 외에 서불이 특별하게 만든 조직이 하나 있었다. 이른바 ‘완옹중 부대’였다. 

완옹중은 진시황이 아끼던 장수 이름이다. 

흉노족의 침입을 막아낸 유능한 장수였는데, 키가 1장 3척이나 되었다 한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자 곧 그의 모습을 본떠서 동상을 만들었다. 

서불이 만든 ‘완옹중 부대’는 바로 진시황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완옹중의 모습을 닮은 석상을 만드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고 있었다.

그들은 영주산 아래에서 사람 키의 다섯 배가 넘는 높이의 바위 두 개를 끌고 왔다. 

서불은 실제로 그들이 바다에 빠뜨린 완옹중 동상보다 더 크게 만들고 싶었지만, 거대한 바위를 운반하는 일이 너무 어려웠고 또 바위를 옮기는 과정에서 쉽게 부서져버리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크기를 줄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옮기려다 실패한 금인의 모양을 최대한으로 닮은 석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각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완옹중 동상의 생김새에 대한 기억도 제각기 분분했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은 다음에 차츰 새기기로 하고 우선 대략적인 형태만 갖춰서 세우기로 했다.

자신들이 살아가기 위해 건설하고 있는 마을이 제 형태를 거의 드러낼 무렵, 마을 입구 양쪽에 들어설 두 개의 커다란 석상도 완성되었다. 

석상의 뒷면 중앙부 하단을 반반하게 다듬어서 조그맣게 음각으로 ‘용장(勇將) 완옹중지상(阮翁仲之像)’이라 고 새겨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석상은 어느새 그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부대의 규모에 비례하여 크기를 조절하면서 완옹중 석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크기의 완옹중 석상이 만들어졌고, 심지어 손가락만 한 크기로 석상을 닮은 목각인형을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동안 영주산을 탐색하던 부대원들은 여러 가지 약초를 채취해 왔다. 

사실은 누구도 불로초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시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럴듯한 몇몇 종류를 가려내어 따로 관리하기도 했다. 나중에 고국으로 돌아가면 황제께 바칠 물건들이었다.

이렇게 한 해를 보내면서, 서불은 점점 이곳을 자신들의 영원한 정착지로 결정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다듬어가고 있었다. 

앞서 지나온 백암도는 아름답긴 했지만 지세가 비교적 급한 데다 많은 무리가 거주할 만한 평야가 부족해 보였고, 벽옥도 주변도 이곳 영주산보다 나아 보이는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서불은 자신과 함께 온 동남동녀 사이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점차 그들로 하여금 그곳이 자신들의 정착지라는 인식을 갖도록 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그들이 고국을 떠나온 지도 어언 8년이 가까워왔다.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금은보화를 백암산 기슭에 감추어 두었고, 보물이 감춰진 곳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직은 자신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동명도, 백암산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장소는 모른다. 그 많은 백암산의 바위틈을 동명이 어찌 기억한단 말인가. 

자신은 그 누구도 모르게 자신만의 기호를 사용하여 바로 자신이 밟고 섰던 그 바위 위에 암호를 새겨 놓았다. 만약 이 세상에서 자신이 없어지면 그 보물들도 영원히 빛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갖춰졌다. 

처음 와서 겪은 풍토병마저 이제 완전히 극복할 수 있었고, 바다와 들과 산에서 생산되는 물자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사실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이 상태로 여기서 여생을 보낸다 해도 아무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한평생 출생에 대한 부끄러움을 안은 채 전쟁과 정치적 암투에 시달려온 진시황이 모든 것을 깨끗이 잊고 만년을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기틀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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