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士徐市等入海求神弱, 數歲不得, 費多.
恐譴, 乃詐曰 “蓬萊藥可得, 然常爲大鮫魚所苦, 故不得至. 願請善射與俱, 見則以連弩射之.”
-司馬遷 <史記·秦始皇 本紀> 37年-
방사(方士) 서불 등이 바다로 들어가 신약을 구했으나 몇 년 동안 얻지 못하고 비용만 허비하였다.
그는 문책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봉래의 불로초를 구할 수는 있으나 항상 커다란 상어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까닭에 그곳에 도달할 수 없으니 원하옵건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함께 보내주시면 상어를 보는 즉시 연노(連弩)로써 그것을 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사마천, <사기·진시황 본기> 37년-
서불이 영주산을 떠나 자신의 고국으로 향하기 며칠 전, 그는 자신의 측근을 은밀히 불러 모아 극비 사항을 일러두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더 이상의 불로초를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유구국(琉球國)으로 가서 불로초를 찾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영주산에서 이미 약초에 관한 실험을 다양하게 실행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 항해에는 자신과 동명을 비롯한 소수정예만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도 사실은 그들을 속이기 위한 일종의 기만전술이었다.
서불은 그토록 치밀한 인물이었다.
서불은 자신의 항로를 동쪽으로 향하게 했다.
서불은 서쪽을 향해 가야 최단거리로 본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고 동요하지 않도록 만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서불은 자신이 동쪽 나라로 간다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끝까지 믿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훗날 영주산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서불을 찾아 무작정 동쪽으로 항해를 감행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로 지금의 일본 지역에 서불의 일행이 왔다는 기록이 남게 된 것이다.
한편, 동쪽을 향한 서불의 또 다른 목적은, 돌아가는 길에 벽옥도와 백암도 주변의 지형을 한 번 더 완벽하게 확인해 두려는 데에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다시 돌아올 때는 동명이 없을 항해일 것이기에 더욱 그랬다.
서불이 본국으로 돌아오던 날을 사마천의 <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方士徐市等入海求神弱, 數歲不得, 費多. 恐譴, 乃詐曰 “蓬萊藥可得, 然常爲大鮫魚所苦, 故不得至. 願請善射與俱, 見則以連弩射之.”
-司馬遷 <史記·秦始皇 本紀> 37年-
방사(方士) 서불 등이 바다로 들어가 신약을 구했으나 몇 년 동안 얻지 못하고 비용만 허비하였다. 그는 문책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봉래의 불로초를 구할 수는 있으나 항상 커다란 상어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까닭에 그곳에 도달할 수 없으니 원하옵건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함께 보내주시면 상어를 보는 즉시 연노(連弩)로써 그것을 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사마천, <사기·진시황 본기> 37년-
진시황 37년 10월 계축일.
진시황이 드디어 순수에 나섰다.
황제의 행차가 오현(吳縣: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을 지나고 강승(江乘: 지금의 강소성 구용현 북쪽)을 지나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낭야에 이르렀을 무렵, 진시황은 9년 전에 떠난 서불이 귀국했다는 보고를 비밀리에 받았다.
하지만 그 사실은 황제의 환관 조고와 왕자 호해 등 진시황의 최측근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아직 서불은 행방이 묘연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며칠 뒤, 서불은 낭야의 행궁에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진시황을 알현한 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보고하였다.
진시황은 진노하였고, 서불은 즉시 하옥되었다.
그 많은 재물과 인력을 송두리째 날리고 단신으로 돌아온 서불을 진시황은 당장 죽일 듯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 날 다시 진시황 앞으로 끌려 나온 서불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목숨만 살려주면 반드시 성공하여 불로초를 가져오겠다고 읍소하였다.
“폐하! 제가 폐하를 속였다면 어찌 다시 폐하 앞에 돌아올 생각을 했겠습니까?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예기치 못한 풍토병 때문에 저와 함께 갔던 사람들도 모두 죽고, 간신히 저만 도망쳐 온 것입니다.
폐하, 믿어주십시오. 불로초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반드시 가져오겠습니다.”
누가 들어도 서불이 거짓말을 하는 것쯤은 알 수 있었는데, 진시황은 이번에도 역시 서불의 말에 귀가 솔깃한 표정이었다. 그만큼 불로초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뜻일까.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불과 2년 전에 그 많은 유생들을 생매장해 죽이지 않았던가.
그때 진시황이 내걸었던 이유가, 바로 그 유생들이 불로초라는 요망한 말을 빙자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었다. 진시황은 그들이 보던 책을 천하에 쓸모없는 것이라 하여 불태웠음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건에 연루되어 생매장당한 사람도 무려 460명에 달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 사건을 두고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했다.
그때 서불의 이름도 분명히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포고문에는 “서불 무리들은 지금까지 낭비한 금액만 해도 억만금이나 되는데, 끝내 선약을 구하지 못한 채 날마다 그저 간교한 방법으로 이익만 챙기고 있다는 소식만 들려온다(徐市等費以巨萬計, 終不得藥, 徒奸利相告日聞)”라는 구절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그랬던 진시황이 막상 서불이 돌아와 사정을 아뢰자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야기는 서불이 진시황의 행궁을 찾아 복명한 날로부터 사흘 전으로 돌아간다.
밤도 깊어 오가는 행인들도 없이 사방이 조용한데, 평복으로 변장한 조고가 삿갓을 깊이 눌러쓰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낭야 교외의 한적한 객점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잠시 주인과 몇 마디 나누던 조고는 곧장 주인을 따라 후미진 방으로 들어갔다.
조고가 들어서자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늙수그레한 노인이 일어나서 조고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바로 서불이었다.
두 사람은 이튿날 먼동이 트기 직전까지 밀담을 나누었다.
여명 속에 조고는 아무도 모르게 진시황의 행궁으로 돌아갔고, 그제야 서불이 머물던 방의 불도 꺼졌다.
그로부터 이틀 뒤 중신 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진시황에게 서불이 돌아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모든 것이 진시황과 조고와 서불이 짜고 만들어낸 각본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진시황이 서불의 읍소에 속아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천하가 황제의 어리석음에 대해 한탄하고 있을 때 조고와 서불의 머리를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불이 진시황을 만난 지 며칠 후부터 정말 서불이 다시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출발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서불이 언제 어디를 통해 귀국했는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사실 서불은 영파를 통해 들어왔다. 그곳은 서불의 뱃길을 책임지고 있는 영파 상단의 행수 동명의 본거지였다. 돌아오는 길에 서불은 자신이 타고 있는 배가 영파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다시 산둥반도의 봉래항으로 갈 거라고 지레짐작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서불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자신이 탄 배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서불도 우연한 일이라 여기고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다.
동명은 역시 운이 좋아서 먼 길을 가지 않아도 황제를 뵐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동명은 그 정도로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진시황의 순수 행차가 언제 출발해서 언제 어디를 지날지, 자신의 상단이 수집한 정보력으로 손바닥처럼 꿰뚫고 있었다는 뜻이다. 서불 일행이 영주산을 떠나던 날을 정할 때도 동명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던 사실을 서불도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서불은 다시 봉래항을 출발했다.
두 번째의 출항은 그 규모가 너무도 소박했다. 배도 단 한 척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인원도 쉰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것도 동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다시 선발한 항해 기술자 열 명을 포함한 인원이었다.
상어를 쏘아 잡기 위한 궁수 따위는 아예 없었다.
예사롭지 못한 일은 서불이 떠난 뒤에도 일어났다.
그가 떠난 뒤 사흘 만에 진시황이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진시황의 어가가 평원진(平原津: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에 이르렀을 무렵에 일어난 일이었다.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서불이 불로초를 찾으러 출발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아마도 진시황의 지나친 집착에 하늘이 노해서 그러는 것일 거라고 수군대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의 행차는 아직 도성이 있는 함양으로 방향을 잡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시황의 어가가 도성을 향하기 시작한 것은 봉래항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구평대(沙丘平臺)를 떠나면서부터였다.
진시황은 며칠 전부터 몸이 아팠기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시황의 전용 수레인 온량거(轀輬車)에 함께 타고 있던 환관 조고는 며칠 사이에 무척이나 피로해 보였다.
온량거란 진시황이 타는 마차의 이름인데, 크기도 크기려니와 온갖 시설도 다양하고 장식도 화려하였다.
특히 창문이 많아서 추위와 더위를 쉽게 조절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몇 명이 편안히 누워서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수레였다.
조고는 사람을 시켜서 산동성 바닷가의 건어물을 열 수레나 가득 사 오게 했다.
황제께서 병이 들어 입맛을 잃었는데, 그나마 산동성 건어물을 좋아하시는지라 그거라도 드셔야 되지 않겠냐고 호해 왕자가 호들갑을 떨어대는 통에, 조고 자신은 물론 다른 시종들도 좋은 물건을 구하느라 산동성 해안 일대를 온통 시끄럽게 뒤집어 놓았다.
봉래 포구의 어부 곽도가 실종된 것은, 진시황의 환관 조고와 진시황의 열여덟 번째 왕자 호해 일행이 건어물을 사느라 왁자지껄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새벽같이 수레 열 대 가득 건어물을 싣고 떠난 바로 그날이었다.
진시황의 환궁 행차는 평온했다. 황제의 몸이 조금 편찮으셨기 때문에 그다지 흥겨운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점이 다른 날과 달랐다면 달랐을까, 진시황은 순수 중에도 여전히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고 환관 조고는 부지런히 진시황의 명을 받드느라 온량거를 드나들기 바빴다.
또 하나 더 다른 것이 있었다면, 바로 진시황의 뒤를 따르는 수레에 타고 있던 왕자 호해가 병든 진시황을 대신해서 자잘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다른 날보다 조금 바빠 보였다는 점이었달까.
그러나 황제께서 피곤하신 탓에 많이 쉬어야 한다면서 조고가 호해의 수레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진시황의 병으로 인해 일처리가 더디게 진행되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하면서 진시황의 환궁 행차는 두 달 동안 1560리가 넘는 길을 움직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