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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선비 Mar 28. 2021

17. 선상 반란

     

바로 그때

비스듬히 왼쪽으로 쓰러진 서불이, 팔을 뻗어 두루마리 지도의 맨 아랫부분에 매달린 가장 굵은 축의 끝 부분을 두 손으로 움켜쥐더니 오른쪽 손을 비틀었다. 

그러자 지금껏 마치 하나로 된 몽둥이처럼 보이던 목봉이 칼로 자른 듯 어긋나면서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이 뽑혀 나왔다.     



    

2차 원정을 떠난 서불 일행이 바다 한가운데로 나온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선단은 전과 마찬가지로 백암도를 향하고 있었다. 

바람이 역풍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굳이 속도를 높이지 않은 채 천천히 항해하고 있는 이유는, 곧 따라붙기로 약속된 진시황의 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는 서불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도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동명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말했고 동명도 그렇게 하고 있노라고 말했지만, 약속했던 황제의 배는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항해를 시작한 지 보름째 되던 날, 아득히 수평선 멀리 유혈도가 어슴푸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고물 쪽에서 수평선만 쳐다보면서 황제의 배를 기다리던 서불에게 동명이 천천히 다가왔다. 동명의 뒤쪽으로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는, 이번 항해를 위해 새로 뽑은 것으로 보이는 선원 대여섯 명이 무장을 갖춘 채 두 사람을 주시하면서 서 있었다.

“대인! 잠시 선실로 드시지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지 않으셔도 오늘 해 질 무렵에는 황제 폐하가 타신 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서불은 동명에 앞서 선실로 내려가는 계단을 들어서면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불안해하시지 않을까 염려되는데…….”

선실로 들어선 서불은 곧바로 반대편 정면에 걸린 지도 앞으로 나가서 지도를 한번 훑어보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제 진황도(秦皇島)가 시야에 들어왔으니 사나흘 후에는 백암도에 도착하겠구나. 

동명 자네가 정말 수고가 많았네. 

자네, 진황도가 어딘지 아는가? 하하! 내가 새로 이름을 하나 지었다네. 

자네가 이르는 유혈도를 내가 진황도로 이름을 바꾸었지. 

자네도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섬에는 꼭 우리 폐하의 옆모습을 닮은 바위가 있거든. 

허허허! 백암도에 이르면 폐하께 말씀드려서 자네에게 큰 상을 내리도록 하겠네.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미리 생각을 해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허허허!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동명은 묵묵부답이었다.

서불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천천히 동명을 향해 몸을 돌렸다.

순간, 서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패도를 손에 쥔 동명이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서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놀란 얼굴빛을 누그러뜨리며 낮은 목소리로 동명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가? 그 패도는 웬 건가?”

기다란 탁자 건너편에 서 있던 동명이 여전히 서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패도 끝으로 탁자를 긁어 예리한 칼금을 내면서 말했다.

“대인, 이제 그만 이 배에서 내려주실 때가 된 듯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동명의 표정에는 알 듯 말 듯 희미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서불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평온한 표정으로 동명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냐?”

동명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소매에다 패도 끝에 묻은 나무 조각을 닦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미 동명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우리가 만난 지 거의 십 년이 되었어. 

당신이 내게 주는 금덩이 몇 조각을 바라고, 내가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고생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게 아니란 것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겠지? 

당신이 알다시피 나는 영파 상단의 대행수 아닌가? 

그것은 내가 바라는 정도가 당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상상외로 크다는 뜻이기도 하지.”

동명은 말을 이어가면서 천천히 오른쪽으로 탁자를 돌아 서불을 향하고 있었다. 

서불도 침착하게 오른쪽으로 동명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말했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충분한 보상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뭘 바라고 칼을 겨눈단 말이냐? 

황제의 배를 만나면 우리는 그 배로 옮겨 탈 것이니, 너는 이 배에 실린 재물을 싣고 바로 네가 원하는 곳으로 떠나라. 

이것만 해도 너는 우리나라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동명은 한 걸음 더 서불 쪽으로 다가서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후후! 그건 이미 이번에 함께 출항한 우리 상단 부하들의 몫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저녁 황제의 배를 만나게 되면, 방금 내 뒤에 서 있던 나의 부하들은 이 배를 가지고 영파로 돌아갈 계획이다. 

물론 나는 황제의 배를 타고 백암도로 갈 것이고…….”

서불은 긴장한 표정으로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했다.

“황제의 배에는 무장한 정예 병력이 백 명이 넘게 타고 있다. 너희들이 무슨 수로 당해낸단 말이냐?”

동명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아직도 나를 그렇게 모른단 말인가? 

나와 함께 행동하기 위해 영파를 떠난 우리 선단이 아마 곧 도착할 것이다. 

백암도에 묻힌 보물을 가지려면 그 정도는 준비해야지.”

말을 마친 동명은 허리를 약간 숙이면서 오른손에 쥔 패도를 앞으로 내밀어 서불을 겨누었다.

서불도 뒤로 물러서며 다시 동명에게 말했다.

“무모한 짓이다. 

지금 네가 나를 죽인다고 해도 밖에 있는 나의 부하들과의 일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예에 출중한 군사들이다. 

쌍방이 피를 흘리게 되면 이 배는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바다를 잘 아는 네가 그걸 모른단 말이냐?”

그러자 동명은 또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하하하! 서불, 당신이 모르는 일이 하나 더 있지. 당신은 바닷물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하긴 곧 죽을 몸이니 우리 상단만 알고 있는 비밀을 하나 알려주지. 

우리가 떠나온 봉래 포구부터 백암도, 벽옥도 심지어는 영주산에 이르기까지의 해역에 있는 모든 바닷물이 내가 사는 영파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걸 해류(海流)라고 하지. 

당신도 잘 생각해 보면 알 거야. 지난번에 우리 배가 영파로 돌아갈 때, 우리가 탔던 배가 유난히 빠르게 달린다고 당신이 내게 말했던 거, 기억나는가?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달리면 배의 속도가 훨씬 빨라진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잖아? 

우리 고을 이름을 잘 생각해 봐. 영파(寧波)! ‘물결을 편안히 만든다’는 뜻이지. 

편안하기로는 자기 집만 한 곳이 없지 않은가? 

영파는 이 세상 모든 물결의 집이라는 말이 되는 거지. 즉 모든 물결이 그쪽을 향해 들러간다는 뜻이란 말이야. 

그 말은, 이 배에 탄 사람이 모두 죽는다 해도 이 배는 영파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거야. 

물론 영파에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향하고 있는 우리 선단에게 발견되게 되어 있지만 말이야, 하하하! 

백암도와 벽옥도는 물론 영주산 일대의 해도와 지도는 벌써 우리 상단의 최고 행수님께 전달되었어. 

나 하나쯤 죽어 없어져도 이 일은 그대로 진행되게 되어 있다는 뜻이지. 

자, 어떤가? 우리에게 협조해서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물론 백암도에 묻힌 보물도 가져와서 말이야. 물론 당신은 영주산으로 돌아가 여생을 편히 보내면 될 것이고!”

서불은 일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직감했다.

순간 동명이 탁자 위로 뛰어올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칼끝을 서불에게 겨누면서 조금씩 다가왔다.

뒤로 돌아서 갑판으로 나갈 수는 있겠지만, 그쪽은 이미 동명의 부하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니 그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선택이다. 

선실에는 동명의 패도를 이겨낼 수 있는 어떠한 물건도 보이지 않았다.

서불이 멈칫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동명은 곧바로 잰걸음으로 서불을 향해 달려들면서 칼 든 손을 뻗었다. 

서불이 급히 몸을 숙이고 탁자 밑으로 숨는 순간, 헛손질을 한 동명의 몸이 중심을 잃고 탁자에서 앞으로 굴러 떨어졌다.

서불은 그 틈에 급히 탁자 밑을 기어서 다시 지도가 걸린 앞쪽으로 도망쳤다. 

다시 일어난 동명은 이미 숨이 한껏 거칠어져 있었다.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몰아쉬는 동명의 숨소리가 좁은 선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미 노인이 되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서불도 비 맞은 사람처럼 금방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서로에게 말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동명은 다시 탁자 위로 뛰어올라 칼을 겨눈 채 서불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불이 오히려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아까처럼 탁자 밑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걸린 벽 쪽으로 조금씩 밀리는 형국이었다. 

아주 느린 움직임이었지만, 서불도 동명도 죽고 죽이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앞두고 있는 만큼, 두 사람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가 선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윽고 동명은 탁자 끝에까지 왔고 서불의 등이 지도에 닿았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핏발이 서린 서불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어깨는 조금 전보다 더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 

동명은 가볍게 탁자에서 뛰어내린 다음, 허리를 펴고 숨을 고르며 한마디 내뱉었다.

“굳이 죽여야 할 필요까지는 없으나, 살려두면 서로 복잡해질 것 같으니 너무 원망 마시오.”

말을 마치자 동명은 다시 몸을 수그렸고, 뒤이어 동명의 칼이 곧바로 서불의 심장을 향해 짓 쳐들어 왔다. 

몸을 약간 웅크린 동명이 온몸의 체중을 싣고 팔을 뻗어, 수평으로 서불의 심장을 향해 칼을 들이밀면서 들어올 때, 서불은 왼쪽으로 피하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동명의 칼이 또다시 서불의 오른쪽 어깨 부근을 스치면서 목판으로 된 지도에 박혔다.

바로 그때.

비스듬히 왼쪽으로 쓰러진 서불이, 팔을 뻗어 두루마리 지도의 맨 아랫부분에 매달린, 가장 굵은 축의 끝 부분을 두 손으로 움켜쥐더니 오른쪽 손을 비틀었다. 

그러자 지금껏 마치 하나로 된 나무 몽둥이처럼 보이던 목봉이 칼로 자른 듯 어긋나면서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이 뽑혀 나왔다. 

칼이 지도에 박히자 순간적으로 당황한 동명은 칼을 뽑는 데 정신이 팔려 서불의 움직임을 잠깐 놓쳤다. 

하지만 바로 칼을 뽑아낸 동명은 곧바로 쓰러진 서불 위로 몸을 날리면서 서불의 가슴을 향해 비수를 쥔 팔을 내리찍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서불은 비스듬히 누운 채 본능적으로 장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은 그대로 뒤엉켜 쓰러진 채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이마를 잔뜩 찌푸린 서불의 왼쪽 어깨를 스친 동명의 패도가 선실 바닥에 꽂혀 있었고, 예리하게 찢어진 서불의 어깨 부분 옷자락에 피가 흥건히 배이기 시작했다.

동명은 서불 위에 몸을 덮은 채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었다. 

동명의 등을 뚫고 나온 서불의 칼날을 타고 핏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려 동명의 옷에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동명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서불의 온몸을 적시며 검붉게 물들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잠시 후.

도포로 몸을 감싼 서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큰 소리로 부하를 불러 동명의 시체를 옮기게 했다.

조금 전에 자신을 감시하던, 선원으로 위장한 동명의 부하들이 눈치채기 전에 동명의 시체를 처리해야 했다. 서불의 부하들은 고물 쪽으로 동명의 시체를 메고 가서 곧바로 바다에 던져버렸다.

“다행히 고기밥 신세를 면할 수 있다면, 네가 그렇게 자랑하던 네 고향 영파로 가게 되겠지. 그동안 수고 많았다. 명복을 빈다.”

서불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내뱉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동명의 부하들이 칼을 뽑아 든 채 서불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양쪽 어느 누구도 쉽게 덤벼들지 못한 채 한동안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다!”

과연 웅장한 크기의 배 세 척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황금색 바탕에 다섯 발가락을 가진 푸른 용을 그린 깃발이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마침 저물어가는 해를 배경으로 배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든 채 천천히 서불이 탄 배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황제의 배를 발견한 동명의 부하들이 곧바로 엎드려 항복을 하는 바람에 상황은 쉽게 끝나는 듯했다.          

진시황이 탄 배가 가까이 오자, 서불은 진시황의 배로 옮겨 탄 다음 진시황 앞에 엎드려 예를 올렸다. 

온통 피에 젖은 서불의 옷을 보고 놀란 진시황에게 간단히 상황 설명을 한 서불은 군사들을 골고루 나누어 타게 하고 곧장 백암도로 진로를 잡았다. 

이제 진황도가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었다.

서불은 진황도를 오른편에 두고 잠시 배를 멈추게 한 다음, 진시황에게 말하였다.

“폐하! 이 섬 이름이 진황도(秦皇島)입니다.” 

진시황이 놀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진황이라면 바로 난데, 이 섬이 진황도라니?”

서불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린 다음, 일어나서 손으로 섬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폐하! 저 섬의 왼쪽 끝 부분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한번 보십시오. 저 바위가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제 눈에는 저 바위가 앉아 계신 폐하의 옆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제야 진시황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 정말 그렇구나. 진황도라는 이름이 딱 들어맞는 섬이구나!”

그러자 그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잇달아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석양을 받은 진황도를 지나며 서불이 말했다.

“폐하, 여기서 북쪽으로 이틀만 가면 백암도입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폐하의 꿈은 거의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서불의 말을 듣고 있던 진시황의 눈에 저 멀리 어슴푸레하게 저녁 해무에 덮인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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