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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Nov 14. 2020

2011년 프라하 #2

- 사명, 욕망, 책임감, 높은 에너지 수준, 자유로운 영혼

어제저녁 9시 넘어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12시 48분에 깨었는데, 어휴 지금부터 아침까지 뭘 하지? 2002년 처음으로 미국 미시간의 그랜드 래피즈로 갔었다. 새벽 1시에 다들 깨서 소주를 한잔씩 기울이고 새벽 4시경에 잠들었다. 시차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일어나면 할 일이 많아진다. 평상시 잘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고 그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아이디어와 구상과 감정들을 조용히 정리할 수 있으니, 잠이 와도 좋고 잠이 오지 않아도 좋다. 이런 멋진 상황을 즐기게 된 것에 너무 감사할 뿐이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욕망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모든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는 없다. 더구나 그것이 가치지향적인 것, 이를 테면 사회적인 가치와 봉사 이런 것을 하고 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향하면 그것은 아주 무한대로 늘어나 절대 살아있는 동안 충족될 수 없다. 작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너는 어디서 왔는가?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너는 어디로 갈 것인가?)과 사명을 찾는 일을 하려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없다. 그런 인생은 나중에 후회만 남을지도 모른다. 욕망을 향한 힘이 사그라지면 허무만이 남기 때문이다. 의욕도 꺾일 것이고 그때 가치지향적이 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늦은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능과 재능은 내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 자연의 역학관계와 우주 질서의 산물이다. 따라서 그 질서를 깊이 이해하고 역학관계와 질서에 걸맞은 책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장애물이 바로 자신의 욕망이고 욕심일 것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시선만을 의식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자신에게 진솔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에너지 수준이 낮은 자의 행동이 미칠 수 있는 영역은 미미하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내면적 에너지 수준을 높이는 일을 해야 한다.

잠시 잠깐 자연과 우주에 대해 생각하면서 명상에 잠기는 것, 에너지 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음악작품이나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 역시 에너지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써놓은 글을 읽는 것(사람들이 많이 읽는다고 베스트셀러라고 무턱대고 따라 읽다가는 책을 대하는 나의 올바른 시선을 기를 수 없다. 에너지 수준이 높은 사람이란 그 주제에 대해 깊이 가되, 현실에 발을 디디고 글을 쓴 사람들이다. 가치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 가치를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들), 에너지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살면서 복된 일이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존재다. 타인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거나 주눅 들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행동, 나의 품위를 높이기 위한 행동 속에서 나는  자신에게 미안한 일을 줄일 수 있다. - 너무 많이 일해 피곤하거나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으면서 그 의무에 치이는 것은 자신에게 더없이 미안한 일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좋은 일들을 많이 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어찌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사랑하자>

아침 6시 30분까지 뒤척이다가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 빵들은 너무 맛있다. 단출한 아침이지만 신선한 과일과 빵, 그리고 토마토를 먹었다. 같이 어울려 담소를 나누면서 식사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또 다른 매력 지점일 것이다. 오늘 일정에 대해 같이 의견을 나눴다. 저녁에 오페라 갈라 콘서트도 너무너무 기대된다. 아침 식사 후 산책을 나섰다.  눈이 날리면서 추운 날씨였다. 서울 면적의 4/5 정도나 되는데 인구는 140만 명 밖에 되지 않는단다. 역시 여유 있게 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 미사 장면을 보러 성당에 갔다. 안에는 예배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아주 오랜만인지 처음인지는 몰라도 잠시 성당 미사를 평화로운 마음으로 보았다.


우리의 종교행사들도 이와 같이 조용하게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담을 주고 마음의 안식을 찾기에는 부족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의 종교행사라는 것이 한 두 사람의 설교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되는 것은 정말 아닌 것 같다. 삶의 공동체에 대한 폭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같이 만들어가고 함께 나누고 서로를 향해 소통하는 것이지 어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그가 전지전능한가? 아니면 엄청난 가르침을 받은 것인가? 그도 역시 한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그 공간으로 향한다. 오늘 나는 잠시나마 아주 평온한 시간을 맞고 있다. 저 뒤에 서계신 분의 진지한 모습에 나도 조용히 옷깃을 여미고 눈을 감는다.

오전 10시 프라하 성으로 향했다. 중간에 찰스 다리 옆길에 잠시 차를 세워두었다. 프라하성을 비롯해 여러 전망이 한꺼번에 보이는 좋은 장소였기에 단체사진을 한 장 찍고 가라는 거다. 바로 옆은 스메타나 기념관이 있었다. 예전에 LP판으로 Ma Blast를 샀었다. 나의 조국, 몰다우가 2악장인지는 오늘 알았다. 조국에 대한 사랑이 깊게 묻어있는 웅장하면서도 애절한 선율을 듣게 된다. 이곳 몰다우 강에 와보니 새삼 그가 자부심을 느낄만한 풍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프라하성으로 향하는 길은 삼성과 현대가 그 광고권을 독점하고 있다고 했다. 삼성이야 이제는 글로벌 기업으로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현대와 기아의 약진은 정말 의외다. 차의 가격 대비 성능도 성능이지만, 제품의 품질이 이전에 비해 아주 좋아진 듯하다. 왜냐하면 작년 시애틀에서 빌린 카니발도 그렇고 오늘 타고 다니는 카니발도 그렇고 아주 편안하고 편의성을 잘 고려해서 만들었다는 느낌이었다. 부디 잘 나갈 때 없는 사람들과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고려해주시기를....

프라하성은 그 면적도 굉장히 크다. 점점 본 성이 다가올수록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900년대에 시작한 성당 건설은 1900년대에 가서야 마쳤다고 한다. 1천 년 동안의 건설, 그 인내심과 계획력도 대단하지만 그 사이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쳤을 것을 생각하면 당대에 무슨 일을 몇 년 만에 하려고 하는 우리의 조급한 문화와는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성당에 국한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유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은 나라와 민족의 백년대계에 대해서는 그렇게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다는 전통이다.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 파리의 신시가지(Ladefance) 공사인데, 설계와 계획에만 50년이 걸렸다고 한다. 일산이나 분당 같은 신도시는 불과 3-5년 만에 건설되었다. 비교하기 싫지만 비교되는 지점이다. 성숙한 시민의식과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조화로운 질서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고 젊은이들이 마음껏 미래에 도전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일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해봤다.


성당에 도착하니 눈발이 조금씩 굵어진다. 프라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동안은 어디 구경만 가면 돌 건물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느라 제대로 그 풍경과 경치를 감상할 틈이 없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은 잘 안 보게 된다. 그러다가 한동안은 아예 사진을 찍지 않으려 사진기도 가지고 다니지 않기도 했다. 이제는 적당히 사진을 찍는 쪽으로 다시 기울고 있다. (파스칼의 주사위가 생각난다. 신이 있다는 쪽에 걸면 이득이고 그렇지 않은 쪽에 걸면 아무 이득도 없으니 있는 쪽에 거는 것이 낫다는) 기억의 한계가 너무 분명하고 깨끗한 사진 한 장이 나의 기억 속에 수많은 화학작용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만 찍지 않는다면, 그리고 꼭 남들이 찍은 장소에서 찍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시간은 11시. 성당 관람을 위해서는 12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한국으로 보내는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 셋 모두에게 엽서를 보낸다. 문득 우리 아이들과 많이 대화를 하지 못해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내용으로 글을 쓰는 것이 좋은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음에 이 곳에 같이 왔으면 좋겠다는 하나마나한 얘기로 엽서의 빈 공간을 채웠다. 얘들아 미안하다. 아빠는 너희들과 대화가 많이 필요하구나.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좌우의 폭과 대칭 그리고 대리석에 공을 들인 그 솜씨와 창문에 가득한 스테인드 글라스와 모자이크, 특히 Mucha무아의 그림은 모자이크가 아니었다. 그의 그림은 낯이 익고 아주 특이했다. 추운 겨울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고 있었는데, 지하에 있는 역대 왕들의 무덤을 구경할 수 있는 특혜를 얻었다. 그중 눈에 띄는 관은 평민 출신으로 왕이 되었던 사람의 것이다. 이들에게 바츨라프 왕은 영웅으로 자리 잡혀 있었음을 곳곳의 유물의 흔적들로 알 수 있었다. 숙연함과 종교가 인간에게 미치는 위대한 영향에 대해 한번쯤 돌아볼 시간이었다.


현재라는 시간은 대단히 불안하고 위태롭지만 절대자가 지켜주는 과거와 미래는 안정되고 복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 특히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생로병사의 수많은 난관들은 종교적인 힘이 아니고서는 이겨내기 어렵다. 그런데 체코는 특이한 역사가 있었다. 30년 전쟁의 진원지에 신교와 구교와의 전쟁 그리고 기독교의 전파 등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회의적인 감정을 갖게 되어 이제는 전 인구의 약 30% 정도만이 종교생활을 한다고 한다.


여타의 유럽지역과는 아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들은 동유럽으로 취급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위치상으로도 오스트리아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고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대단하기 때문이다. 프라하는 프랑스의 파리나 영국의 런던과는 다른 전통적인 면면이 잘 녹아있다. 애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멋진 도시이다. 그 역사적 전통과 조상의 숨결이 그들의 유전자에 깊이 박혀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1499년에 설립된 프라하 최고의 음식점에 들렀다. 약 1200명 정도 수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주변에는 스페인과 독일 등 유럽 각지에서 놀라운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어제와 비슷하게 돼지고기 요리와 소시지에 오늘은 닭과 오리고기 요리를 추가하였다. 음식은 어제 먹은 집과 비슷했다. 중간에 아코디언과 튜바를 들고 2인조 음악가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고는 대뜸 고향의 봄을 연주한다. 이어서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까지 여기에 몰다우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팁을 줄 수밖에 없었겠지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동요를 연주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실은 독일의 동요였나 보다. 옆자리의 할머니들이 신이 나서 같이 부르고 또 이어서 맥주잔을 들고 어깨춤까지 춘다. <동무들아 오너라 서로들 손잡고 노래하며 춤추며 놀아보자....> 독일 할머니들이 더 신이 났다. 옆자리로 옮긴 연주팀과 스페인에서 온 젊은 아가씨들이 합세해서 정말 왁자지껄하게 논다. 마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가 술집에서 놀던 묘사 구절과 흡사하게 아주 왁자지껄하다.

식사 후 숙소로 잠시 이동했다. 졸음이 밀려왔다. 조금만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다시 일행과 길을 나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유명한 체코의 화가 Alphonse Mucha박물관에 들렀다. 그의 그림은 아주 특이하다. 그중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그가 아내의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러시아 여인의 그림이다. 그의 그림의 콘셉트는 정형화된 기법과 꽃들 그리고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사회분위기와 시대정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어렵기도 하다. 노년의 분위기는 샤갈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의 작품세계를 다룬 영화를 볼 때는 잠시 졸기도 했다.


 박물관을 나와 찰스 다리로 향했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조금 오래 걸려 도착했다. 다른 곳엔 많지 않던 사람들이 이곳에는 북적였다. 바츨라프 4세 왕이 외국에 나간 사이 왕비와 신하가 불륜의 관계를 맺고 나서 왕비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고 한다. 돌아온 왕이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신부에게 이실직고할 것을 명했지만 신부는 끝내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왕은 마침내 신부의 혀를 자르고 그를 이곳 찰스 다리에서 강물로 집어던졌다고 한다. 신부가 죽고 나서 그 강물에 다섯 개의 별이 보였다고 한다.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종교적 사명을 다한 신부에 대한 찬미가 곳곳에 배어있다. 평소 신부가 예뻐하던(?) 개가 같이 등장하는데 그래서 다리에 묘사된 청동부조 중 죽은 신부와 개의 모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만져서 그곳만 번쩍거린다. 개를 만지면 배우자가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고 신부는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세계 어느 곳을 가나 소원을 들어주는 장소와 상징들은 꼭 있게 마련이다.


숙소로 돌아왔다. 추운데 떨어서 그런지 온수를 받아 몸을 풀고 누웠더니 곧바로 잠이 들었다. 깨보니 약속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부랴부랴 옷을 입고 로비로 나왔다. 헐레벌떡 뛰어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오페라 갈라 콘서트는 바로 박물관 복도의 층계가 좌석이고 중간 간이층이 무대였다. 대리석과 지붕의 창문이 울림통이 되어서인지 아주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게 들렸다. 메조소프라노의 음성은 깊고 풍부한 성량을 자랑했다. 평소 잘 듣지 못하던 레퍼토리라 동영상으로 몇 개 찍어놓았다. 돌아가면 아이들과 같이 보게. 레퍼토리는 주로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베르디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라 트라비아라 등이었다. 1시간 15분이었지만 아주 알차게 구경하고 나왔다. 식사를 하려고 하다가 다들 속이 좋지 않으시다고 하신다. 사실 나도 속이 좋지 않다. 그래서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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