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삿포로로 전철을 타고 간다. 삿포로 돔구장이 안내지에 눈에 띈다. 하얀 눈이 가득한 곳에 돔 홀로 우뚝 솟아있다. 삿포로의 명물처럼 보인다. 아 이 사람들 뭐야? 왜 이렇게 대단해? 이곳은 천연잔디구장이 평상시에는 밖에 있다가 경기할 때 에어 부상 이동 시스템에 의해 통으로 돔구장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비시즌에는 이벤트홀 혹은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거다. 오늘은 와보니 어린이들을 위한 각종 이벤트를 한 군데서 하고 있다. 다양한 용도로 활용한다는 것은 생산적인 일이다.
1950년에 시작된 눈축제는 어느덧 올 해로 63회를 맞는다. 그동안 개최된 눈축제의 포스터를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는다. 어느 것 하나도 같은 포스터가 아니라 디자인과 도안이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 눈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지원한다. 우선 깨끗하고 설질이 좋은 눈을 각지에서 차로 나른다. 그 규모가 수천 대 분량이다. 그리고 그 눈을 한 곳에 집적하고 잘 다진 다음 미리 제작한 모형을 숙지하고 각각 해당하는 파트를 조각한다. 작업은 주로 날씨가 쌀쌀한 야간에 많이 이루어진다. 작품들은 테마별로 진행되는데, 특히 각 나라를 대표하는 건축물을 그대로 눈조각으로 만든 것이 인상적이다. 한국의 대표적 건축물로 숭례문을 조각했었다고 한다.
전철역으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삿포로 양의 언덕 전망대를 향했다. 이곳 홋카이도를 개발하면서 주력 사업으로 선택한 것이 목축이다. 그 목축산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 클라크 박사의 동상에는 “Boys be ambitious”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좋은 자연환경과 목축산업의 성공적 정착으로 자칫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 젊은이들에게 클라크 박사는 더 큰 야망을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야망이 희망찬 단어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허망한 단어라는 생각을 문득 해봤다.
전망대 한편에 자리 잡은 식당으로 향했다. 메뉴는 돼지고기와 양고기 구이에 카레가 들어간 양고기 크로켓과 해산물 구이. 아주 깔끔하고 맛있다. 창밖에 하얀 설원에 또다시 눈이 쏟아진다. 여기서 눈 구경은 원 없이 한다. 식사 후 양들이 있는 우리로 갔다. 하나같이 처음에는 우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조금 눈에 익자 바로 눈을 돌린다. 귀여운 넘들. 설원 가운데 자작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아주 운치가 있었다. 자작나무 빛깔이 빛난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갑자기 예세닌의 <자작나무>라는 시가 생각난다. 그의 시어는 맑고 투명하고 깨끗했다. 이 시를 안주삼아 술을 마셨던 대학시절이 떠오른다.
하얀 자작나무
내 창문 밑
눈 속에 덮여있네
은빛과 같이
부드러운 나뭇가지 위
눈 쌓인 가장자리에는
나뭇가지들이 펼쳐져 있네
하얀 술처럼
자작나무는 서 있네
꿈같은 고요함 속에
하얀 눈이 반짝이네
금빛 불 속에서
새벽노을이 서서히
주위를 감돌며
나뭇가지들 위에 뿌려주네
새로운 은빛을
다시 전철역으로 이동 중 오늘 성인식을 맞는 여자와 남자들 무리와 마주친다. 아 이 스무 살 돌이들. 난 스무 살에 뭘 했나? 남자는 정장, 여자는 전통적 의상인 기모노를 하고. 성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에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권리를 갖는 것,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것, 사회와 개인 간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 그런 점에서 통과의례는 당연히 필요하다. 이런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성인식이라는 통과의례가 사회적 합의하에 자리 잡고 스무 살 돌이 들에 게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홋카이도 초창기 개척 시절에 지은 마을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설국에 등장하는 여관도 눈에 띄었다. 여기 다다미방들은 다다미 몇 장으로 방의 넓이를 계산하는데 대개 이 한 장이 한 평정도 된다. 보통 6장에서 8장 사이의 방들이 많다. 하늘은 개어있고 4시 조금 넘은 시각이지만 벌써 저녁놀이 지기 시작하는데 그 빛깔이 예쁘다. 하늘의 풍경과 눈이 집들과 어우러져 어느 곳을 향해 셔터를 눌러도 괜찮은 그림이 나온다. 하늘에서 펼쳐지는 변화무쌍한 구름의 흐름과 하늘의 빛깔들은 언제나 멋진 그림을 선사한다. 나무들과 목조주택과 그 사이 길과 전봇대 등이 한 편의 수채화 같은 풍경과 구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을 장면들이다.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삿포로 맥주 정원을 향한다. 버스는 오래 외곽을 돌아서 시내로 들어왔다. 졸다가 깨다가 했다. 아늑한 편안함에 기대에 쉰다. 초창기 맥주 제작과 관련된 장비와 사진 등이 전시된 곳, 그리고 도자기 교육센터와 쇼핑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잘 보존하고 그리고 그 용도를 시대의 변화에 맞게 새롭게 잘 바꾸고 있구나. 처음 지었을 때의 원형을 잘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용도를 달리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길은 쌓이고 다져진 눈으로 미끄러웠다. 걷는 즐거움을 느낀다. 내 다리의 근육과 발로 밀어내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며, 동시에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의 시선을 느긴다. 이 추운 계절인데도 빨간 열매가 나무에 열렸다.
눈 구경을 원 없이 했다. 일행과 헤어진 뒤 거리로 나와 조금 걷기도 하고 차 한잔 하면서 거의 1시간 가까이 눈 구경을 하는데도 지루한 줄 모르겠다. 고향집에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하루 종일 설레었다. 집을 돌아가기 싫은 발걸음을 애써 돌리기도 했고 때로는 다시 늦은 밤에 나와 눈길을 밟기도 했다. 집 근처 길을 삽으로 치우는 일도 즐거웠었다. 여기서는 오직 저 사선으로 내리 퍼붓는 눈을 보고만 있다. 어릴 적 설렘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