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키장을 향해
자연설에서 스키를 타본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 평소 척추 디스크가 있어서 아주 꺼렸던 운동이고, 주로 아이들과 눈썰매장에 가서 썰매만 가끔 타곤 했다. 우연히 후배님들 도움을 받아 난생처음으로 피닉스 파크에서 스키를 탔다. A자로 타니 웬만큼 높은 곳에서도 안정적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세 시간을 꼬박 타고나서 혼자 슬로프를 지그재그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고 눈밭이 딱딱해서 조심조심 탔다. 찬바람을 맞으며 미끄러져 내려가는 스키의 매력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불과 보름 전의 일이었다. 잘 탈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과 일본의 자연설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설레는 마음이 교차한다.
아침식사가 괜찮다. 유럽과는 달리 일본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음식인 것 같다. 가볍게 식사하고 버스로 이동한다. 주변 경치를 보니 쌓인 눈의 무게감이 장난 아니다. 나무에 쌓인 눈들도 입체감을 드러내고 있다. 강원도 산골에서 자라서 눈은 웬만큼 보고 자랐지만 이렇게 눈이 엄청나게 쌓인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스키장에 도착하기 전에 엄청난 눈을 보면서 그 설경에 푹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눈 덮인 설산의 풍경도 장관이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눈은 시시각각으로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2. 미끄럼 - 조심스러움과 무모함 사이
맨 처음 미끄럼을 타보았던 추억이 밀려온다. 높은 곳에 서면 떨어질까 봐 무섭다. 그 무서움을 즐거움과 짜릿함으로 바꿔주는 미끄럼의 추억은 어린 시절 내내 함께했다. 미끄럼틀이 시시해질 무렵 겨울 눈 덮인 마당에서 삽으로 눈을 다져 썰매장을 만든다. 그리고 왼손으로 삽을 잡고 오른손으로 방향을 조정하며 대략 10-20미터 내외의 썰매장을 하루 종일 탔다. 때로는 삽 손잡이에 얼굴을 부딪치기도 했지만 높은 곳에서 쌩하며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삽 썰매는 매력적이었다.
개울물이 어는 겨울이 기다려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얼음 썰매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각목에 굵은 철사를 두드리고 못으로 고정시킨 뒤 널빤지로 연결하면 앉아서 탈 수 있는 훌륭한 썰매가 만들어진다. 양손에 손잡이를 잡고 스틱처럼 찍으면 앞으로 쌩하고 달려 나간다. 얼음이 얇은 곳을 지나치다 물에 빠지기도 했다.
조금 더 성장한 뒤에는 비닐 비료부대를 들고 산비탈 언덕에서 내려왔다. 속도는 삽 썰매보다 두세 배는 될 것이다. 슬로프의 길이도 50미터 이상 되니 한참을 내려온다. 한 겨울 태백산에 눈이 내리면 그 인자하고 신령스러운 산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자연 썰매장을 만들어준다. 아예 산 입구에서 두꺼운 비닐 비료부대를 500원에 팔던 시절도 있었다. 한 번은 속도를 제어하지 못해 나무 밑동에 허벅지가 부딪친 적이 있다. 그 통증은 어마어마했다. 조심스러움과 무모함 사이에서 무모함을 선택한 결과는 참혹했다. 마침 전문 등산객이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아 그분들의 고마운 손길도 기억난다.
@3. 자연설에서 스키 타는 느낌
스키를 각자 대여하고 드디어 출발. 아 그런데 지난주에 배운 게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일단 리프트를 타다. 한참을 올라간다. 올라가면서 앞뒤로 보이는 풍경이 새롭고 눈이 정말 많다. 근사한 경험이 될 것 같다. 예상했던 대로 리프트에서 내린 곳은 경사가 급하다. 그리고 슬로프가 완만한 게 없다. 절망적이다. 어떻게 내려와야 하나? 스키가 자주 벗겨진다. 기우뚱하다가 눈에 처박히다. 스키를 못 찾을 정도로 눈이 깊다. 겨우 왼쪽으로 틀어 내려오는데 이 쪽도 경사가 급하다. 그래도 조심조심 지난주에 배운 대로 A자로 내려오는데 다리가 아프다. 안 넘어지려고 자꾸 다리에 힘을 주다 보니....
아! 그런데 정말 훌륭한 체험! 주변에 사람들도 거의 없고 사각사각하는 자연설의 그 느 낌은 나를 감동시킨다. 마지막 하강코스! 경사가 급하다. 제어가 잘되지 않는다. 그래도 간신히 A자로 제어를 하고 나서 쳐다보니 그다지 급한 경사도 아니었던 거 같다. 아무튼 이 느낌을 지속시키고 싶다. 다시 리프트로 이번에는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올라가다. 이번에는 주변 경관도 구경하면서 내려오다. 갑자기 함박눈이 쏟아진다. 비현실적이다. 함박눈 내리는 스키장을 거의 혼자 전세 내서 내려오는 이 기분.
@4. 정상에서 4000미터를 내려오는 기분
내려오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사고가 난 것 같다. 처음 스키를 배워서 타는데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기둥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다가가 보니 많이 다친 것 같다. 내려와서 안전요원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이 정확하다. 침착하게 응급조치를 하고 조심조심 같이 내려왔다. 물론 우리나라라면 설상차를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경미하게 보는 것 같다. 내려와서 보니 상처가 의외로 깊었다. 다행히 주변에 병원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수술하러 택시 태워 보내다. 일본어가 되는 일행이 같이 택시를 타고 가다.
나머지 일행들은 가볍게 점심을 먹었다. 해물볶음 가락국수 비슷한 것을 시켰는데 맛있다. 일본 사람들은 본래 음식을 적게 먹어서 아마도 식사량이 모자랄 것이라는 것은 기우다. 이것도 양이 대단히 많다. 전체적으로 음식을 평하자면 단맛이 많다. 그 외의 특색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식사 후에 모두들 정상으로 올라가잔다. 거기 초보자 코스가 있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에 같이 올라갔다. 곤돌라 내려 다시 리프트를 타는데 어휴 이건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그 옆으로 스키 타는 사람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정상은 아래와 또 달리 경치가 정말 좋다. 멀리 산들이 한꺼번에 보이고 눈도 더 깊다. 사진을 찍고 내려가려니 정말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다. 두 번 정도의 경사를 내려오고 나니 조금씩 자신감이 붙는다. 그리고 경사가 급한 곳인데 평지가 보이는 곳, 중간에서 활강을 했다. 시원하다. 모자 벗어버리기 잘한 거 같다. 일행들이 보이지 않아 다시 중간지점으로 올라가는 리프트를 타다. 그 활강코스! 계속해서 활강코스를 5회 정도 타는데 아래에서 설상차가 올라가다. 그래 우리 일행 중 초보 자들이 사고가 난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5. 설상차에 실려....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다행히 설상차에 실려온 일행은 사고가 나지 않았다. 걸어오다 보니까 늦어져서 설상차가 올라간 것이다. 함박눈이 계속 쏟아진다. 그리고 사각사각 나의 스키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이 느낌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고글과 안경을 쓸데없이 만지작거리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자만이 화를 부른 것 같다. 그냥 내려왔으면 됐는데 그리고 급하니까 제동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 얼굴이 얼얼하여 만져보니 다행히 피는 나지 않는다. 고글은 망가지고 안경도 벌어지고 결국 설상 차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창피하다. 방금 타고 가자고 했는데 자신 있게 스키 타고 내려오다가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니.
다치신 분은 다행히 수술이 잘 끝나 웃으면서 앉아계신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고 고마운 생각이 든다. 성격 좋은 분이다. 호텔로 이동하여 유황온천을 하다. 방금 전 넘어진 충격으로 목이 뻐근하다. 저녁을 먹으러 이동. 오늘은 다들 작정한 것 같다. 아마도 스키를 타며 몸에 들어온 풍경과 짜릿한 체험들이 각자의 뇌리 속에서 쉽게 가라앉지 않아서일 것이다. 미리 준비한 술이 금방 동이 나 계속 시킨다. 자연설에서의 짜릿한 추억들을 잔에 털어 가슴에 붓는다.